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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217화 (217/222)
  • 217화

    * * *

    “흠, 확실히 대단한 마법인 게로군. 이를 마나가 만들었다니, 발전의 수준을 넘어서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었어.”

    셀로닌이 내 팔을 주섬주섬 만지며, 피부 위에 새겨진 문신에 집중했다.

    트라이벌이나 마오리 부족의 문신을 연상하게 하는 이것은 마나의 마법이다.

    “자네가 그렇게 마법을 쏴댔는데, 생채기는커녕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네. 도대체 그 마나라는 양반이 누군가?”

    레니아단은 방금 있었던 일들을 되짚으며 셀로닌에게 물었다. 가히 놀라울 정도의 방어력, 아니 설명할 방도가 없다.

    셀로닌이 아서에게 쏴댄 것은 드래곤을 죽이고도 남을, 화력에 집중한 공성 마법이었다.

    제아무리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영웅들이라고 해도, 이를 가만히 서서 맞기만 한다면 큰 부상을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반쯤 나사가 풀린 인간이에요, 아마 셀로닌이 했던 말을 돌아가서 전한다면, 당연한 소리라고 콧대를 높일 겁니다.”

    “하하하, 언젠가 나를 뛰어넘을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미치광이가 결국 뛰어넘었군, 뛰어넘어버렸어.”

    긴 수염을 한 손으로 매만지며 호탕하게 웃는 마법사였다. 수염을 쓸고 있는 손이 까맣다. 그 역시 주연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노쇠했네, 하지만 영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저 이야기는, 나를 그렇게 두지 않은 것이야.”

    그는 온화한 웃음을 보였다.

    피부 위에 마나의 노력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 시간 동안 셀로닌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내 뒤를 잇는다면, 더욱 뿌듯한 건 없지. 그것이 어릴 적부터 나를 쫓던 마나라면 더욱더.”

    바바비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정돈하며 이들에게 말했다. 휴식이 끝났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다시 움직이세, 이대로라면 며칠 안으로 도착하겠군. 절망이 다시 몰려들 것이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어차피 그곳에 도착할 인간은 대장과 저 흰머리 양반, 빌어먹을 막내밖에 없으니까.”

    데크에던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회귀가 될 것이다. 급할 필요 없다.

    조용히 앉아있는 베일리아를 흘깃하다가 시선이 아서로 향했다.

    “이봐, 여덟 번째. 우리도 개고생을 한 건 마찬가지야. 나는 황제였고, 대장을 따라서 오지 않았어도 충분히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살 수 있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데크에던이 바바비어에게 다가갔다. ―스릉, 마력을 잔뜩 머금은 그의 검이 집에서 벗어난다. 우리에 가둬둔 짐승이 뛰쳐나온 듯했다.

    “이렇게 급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끝에 도달하면 네가 좆같은 불꽃으로 우리를 모두….”

    레니아단이 그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평소와 달리 더욱 격양된 목소리로 데크에던에게 소리쳤다.

    “해서 안 될 소리가 있거늘, 그건 대장의 의지가 아니니까! …아무리 멍청한 네 녀석이라도 알고 있는 부분일 터!”

    “……쳇.”

    데크에던은 레니아단을 밀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황제는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서라도 이곳에서 완수하고자 했던 목표가 있다. 모험을 통해 그런 목표가 생긴 것이다.

    “…멍청한 네 녀석이 무심코 해버린 언행은, 나머지 영웅들의 대의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뻔했다.”

    쓸쓸한 표정을 짓는 레니아단을 무시하며, 데크에던은 자리를 벗어났다. 이를 지켜보던 바바비어는 고개를 숙인다.

    “……사과하지, 도리어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은 나였네. 이곳에서 하루를 묵도록 하세.”

    * * *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굳이 죽는 순서를 나열해보자면 베르히만 다음은 브렌트 잉크가 아닌, 이 레니아단이네.”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베이스캠프 중앙에는 모닥불이 피어나고 있다. 레니아단은 화살로 바닥을 그으며 아서에게 설명했다.

    “브렌트 잉크가 베르히만과 함께 안식에 들었으니, 사실상, 이 순서도 무효하다고 볼 수 있지. 멍청한 황제가 다음은 누가 객사할까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레니아단은 베이스캠프 바깥으로 어둠이 깔린 숲속을 멍하니 바라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명 멍청한 황제를 걱정하고 있다. 그는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되나 보군요.”

    “…착, 착각하지 말게, 어디서 화를 푼다고 절망이나 베어내고 있겠지! 단순해서 분이 풀리고 나면 돌아올 것이야.”

    레니아단은 이 뒤로 이어질 이야기에 관해서 설명했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로 수많은 회귀를 반복한 이들에게 있어서 결말까지 가는데 가장 큰 골칫거리가 있다.

    “조금 더 진입하다 보면, 반드시 조우하게 되어있는 대절망이 있다네. 그 녀석은 꽤 치명적이라 주연의 죽음이라는 저주가 아니더라도 영웅을 죽을 수 있는 살벌함을 지녔어.”

    이름 없는 대절망, 생김새는 검은 형태의 인간으로, 무수히 많은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바비어는 결말을 지키는 일종의 문지기라 덧붙였다.

    “베르히만 다음으로는, 이 레니아단.”

    레니아단이 쓴웃음을 지었다.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듯했다.

    “나의 죽음은 언제나 그곳에서 확정되어있네. 저주라는 것으로 삶을 무를 것도 없이 반드시 그곳에서 숨을 거두지.”

    쥐었던 화살로 바닥을 계속해서 긁어대는 그녀였다. 매번 그곳에서 죽어도, 어차피 같은 것을 반복해야 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래, 그런 내기도 했었지.”

    그리움에 잠기는 엘프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어떤 기억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떠한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그녀는 지혜로우며 강했다. 애매한 위로는 도리어 좋지 못한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레니아단은 화살을 집어넣고서, 턱을 괴며 노래를 불렀다. 당장에 음치라고 놀려댈 우매한 황제도 없으니, 그녀는 마음껏 흥얼거렸다.

    ―레니아단, 네가 만약 이 몸보다 늦게 눈을 감는다면, 이 황제의 승리다.

    승리라, 그깟 승리가 세월을 오래 묵은 고목과도 같은 엘프와 결혼하는 것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으리라.

    ―맹세하지, 그깟 결혼 따위.

    …그래, 가능하다면 네 승리다.

    그깟 결혼 따위라고 했지만, 그와의 시간을 생각하면 그깟 것이 아니었다. 구애의 방식은 늘 비슷했지만, 그는 진심이 분명했다.

    레니아단이 몸을 누워 눈을 감는다. 그 멍청한 황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내 모습이 바보 같기만 하다.

    레니아단의 기대와 달리, 그렇게 다음날이 되어서도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출발하세.”

    심경이 복잡한 바바비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도망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황제는 도망갈 자가 아니다.

    레니아단이 허공을 매만졌다. 투명 벽이 있었다. 이는 더는 뒤로 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을 오로지 앞이다. 단편적인 이야기, 회귀를 반복했던 이들의 치명적인 대가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

    “이보게 레니아단, 괜찮은가?”

    동공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는 엘프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느끼는 바바비어.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한정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수많은 회귀를 통해 알았을 터다. 레니아단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대장.”

    레니아단은 이윽고 알아챈다. 데크에던이 어디로 향했는지, 한정적인 이야기로 인하여 뒤로 도망갈 수도 없으니, 그가 갈 곳은 단 한 군데였다.

    “…얼른 가야 하네! 그 멍청한 황제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았으니까!”

    격양된 레니아단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바바비어와 베일리아, 그들은 레니아단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숨에 이해했다.

    그렇게 전방을 향해 나아갔다. 지금까지 이동 수단이 필요라도 있었냐는 듯.

    거친 호흡과 함께 숲속을 향해 약진하는 영웅들, 그 속도는 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가속의 마법을 적용한다고 하여도 무리가 있었던 셀로닌은 아서에게 업혔다.

    “미안하네, 아서!”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쾌속으로 전진하는 5인의 영웅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몰려드는 절망을 순식간에 불태워가는 바바비어, 화마를 두르며 계속해서 나아간다.

    ‘느껴진다, 데크에던의 마력이 그가 있는 곳의 기로를 분별해주고 있어.’

    아서에게는 익숙한 마력이 아니었다. 쉽지 않을 추적으로 생각했지만, 데크에던과 함께 생사를 오갔던 이들은 달랐다.

    “…후욱, 훅.”

    앞장섰던 레니아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예상했던 상황이 여실하게 나타났다. 움직일 수 없었다.

    “쳇, …왔군, …늦었어, 늦었어.”

    올라간 입꼬리에서 피가 번져 흐른다.

    복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는지, 한쪽 손으로 간신히 지혈하는 황제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 그지없다.

    결말의 문지기라 불리는 대절망은 황제 앞에서 반으로 갈라진 채, 파편을 흩날리며 사라져간다. 그가 혼자서 저력을 다해 상대한 것이 분명하다.

    화려함으로 치장된 갑옷에 황제의 선혈이 잔뜩 묻어있다. 척추가 끊겨서 일어날 수 없다. 레니아단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쿨럭.”

    그를 향해 달려가는 레니아단, 쓰러진 황제의 목덜미를 잡아 무릎 위에 얹혔다.

    “……이, …이 멍청한!”

    황제의 뺨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뚝, 뚝, 오래 묵은 감정이 그 뺨 위로 스며들자, 황제는 웃을 수 있었다. 이는 분명 사랑이다.

    시야가 깊은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소리와 향이 있다면 상관없을 것이었다.

    “……레니아단, 결국 내가 이겨버렸다고. 난봉꾼에게 시집, …잊지 않았겠지. …약속.”

    고개를 끄덕거리는 레니아단은 데크에던을 품에 안았다. 그의 몸이 축 늘어지며, 서서히 죽음을, 안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저력을 다해 한쪽 손을 힘겹게 올리는 데크에던, 그의 손이 레니아단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 좋은 날이니까.”

    매번 파렴치한처럼 굴던 데크에던이었다.

    영웅호색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라, 영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여인들과의 잠자리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던 그런 호색한이다.

    그는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오랫동안 살 것이었다.

    왕위도 적당히 물려주면 그만이다. 자식에게 아비 노릇을 할 만큼 자신이 철이 없다는 것도 안다. 데크에던의 황제는 그런 남자이다.

    회귀를 거듭하며, 가질 수 없는 여인도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레니아단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진다.

    “…제국의 황후가 된 것을.”

    부부는 다시 태어나도 부부. 황제의 구애를 피곤해하던 레니아단의 짜증 섞인 그 말은, 황제가 영웅 노릇을 계속하게 했다.

    “……축하하노라.”

    레니아단. 외마디와 함께 풀린 동공으로도 황제는 활짝 웃을 수 있다. 생전 처음 지어보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표정이다.

    다시 태어나서 만나자, 그때는 조금 더 평범해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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