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216화 (216/222)

216화

* * *

“……바바비어, …대, …장.”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베르히만,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바바비어라 읊조렸던 목소리와 달리 그를 쳐다보지 못한다.

검은 반점이 목까지 올랐다.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숯을 끼얹은 듯, 젊은 검객의 모습에서 죽음이 여실하게 나타났다.

영웅들 사이에서, 풀숲에 누운 베르히만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아뢰었다.

“그래, 듣고 있네. 베르히만.”

바바비어가 자신의 무릎 위에서 창창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천천히 그를 보듬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그는 절망을 베어나가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결말의 숲 중간까지 진입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절망을 베는 행위란 밥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 구멍 속에서 조우하지 못했던 대절망들도 쉽게 소멸했다.

그 과정에서 베르히만은 절망들에 의한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닐뿐더러, 노쇠하여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니다.

“늘 보던 것과 다르게 이번만큼은 기분이 묘하군. …쳇.”

데크에던은 주연의 죽음이라는 운명에 놓인 베르히만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매번 회귀할 때마다 보던 것이지만, 사뭇 다른 죽음처럼 느껴졌다.

“……데크에던 씨는, …결국, ……저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하하.”

초점을 잃은 동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입 밖으로 퍼지는 죽음이 서린 목소리엔 이전과 달리 분노에 차오르지 못하는 데크에던이다.

“다 죽어가는 녀석에게 듣고 싶지 않아.”

흘깃,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크에던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어딘지 모를 저 숲속 어딘가를 그저 직시할 뿐이다.

베르히만이 이렇게 죽는다면, 데크에던은 이 검객과 다시는 대련할 수 없을 것이었다.

무한한 회귀 속에서 황제는 검객에게 검을 이기기 위하여 수많은 대련을 펼쳤다.

기억한다. 나쁘지 않은 솜씨, 아니 검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괴물이었다.

“이대로라면 죽어서 만나도 네 녀석을 이기긴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보다 뛰어난 후세가 나타나겠지.”

그의 죽음을 바라보지 못했던 데크에던이 몸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그가 베르히만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곧 죽겠지. 정말로 죽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 기다리라고, 나보다 더 고약한 녀석이 네 녀석을 혼쭐 내줄지, 어떻게 알겠어.”

성질 고약한 황제 나름대로, 베르히만에게 경외를 표했다. 나는 죽어서도 네 녀석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언젠가는 그 이명을 꺾을 후세가 탄생할 것이라며.

“……기대가, ……되는군요.”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아서.”

베르히만의 움츠린 몸이 마지막 행동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로브 사이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간신히 꺼낸 그가, 아서에게 건넸다.

툭, 떨어지는 수첩은 이 이상 베르히만이 힘을 쓸 수 없음을 알린다.

“……생각해보니, …대장의 이름이, …남겨질 기록은, 이것밖에 없을 테니까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아서는 손 앞에 떨어진 수첩을 주워 베르히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영웅들은 베르히만의 뜻을 알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야기가 끝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중심 마르노프 바바비어는 기록되지 못할 것이다.

베르히만의 동공이 묽어진다.

진정한 죽음이 그에게 도착했다.

“……드디어.”

“……사명, ……을.”

넓게 펴진 동공, 그의 혼은 육을 떠난다.

그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묵례를 하는 영웅들이었다.

바바비어는 자신의 손으로 감지 못한 그의 눈을 닫으며 말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다.

“…베르히만, 지금까지 정말 고생했네.”

불세출의 검객, 영웅의 안식을 지켜본 남은 영웅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함께 하지 않은 사내가 있다. 그림자처럼.

“왜 그러나, 브렌트 잉크.”

바바비어는 베르히만의 곁을 떠나지 않고, 떠나는 영웅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브렌트 잉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앉아있던 브렌트 잉크는 자신의 옷을 걷었다.

“저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바바비어.”

신음 따위는 뱉지 않았으나, 영웅들은 놀란 동공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걷었던 소매 사이, 팔은 온통 죽음으로 물들어있었다. 시선을 그의 목덜미로 옮겼다. 그마저도 어둡게 올라탄 죽음이 번져있다.

“허락해주시지요.”

제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차갑기만 한 브렌트 잉크를 향해 고개를 흔드는 이들.

허락해달라는 목소리 사이마다 끼어있는 지친 숨을 느꼈다. 앉아있는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영웅들의 그림자로, 여정을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브렌트 잉크는 눈감은 베르히만을 직시했다. 둘은 수많은 여정을 통해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제법 친해진 것이다.

전우로서가 아닌, 영웅으로서가 아닌, 쓸데없는 담소나 나눌 수 있는 벗으로서.

제 얼굴을 반쯤 덮었던 천을 풀었다. 수많은 회귀를 반복했음에도 영웅들은 그 얼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그 얼로 웃었다.

“마지막은 그가 외롭지 않게끔 그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 으스러지고자 합니다.”

* * *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향해야 할 곳이 있기에,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침이고 밤이고, 살아있는 것을 죽이기 위해 튀어나오는 절망들.

이를 베어내는 일은 수많은 회귀를 반복한 것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거목들이 줄을 지은 숲. 끝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대절망들의 모습도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대절망이라고 하여도 이들에게 있어서 ‘조금 더 큰 절망’일 뿐이다.

―콰직!

데크에던이 뛰어올라 흉측한 거인의 모습을 지닌 절망의 머리를 베어내자, 그 거대한 것이 숲 바닥으로 처절하게 떨어졌다.

“보이기 시작하는군, 우리들과의 영원한 악연, 그리고 빌어먹을 막내가 뒤질 듯이 굴렀던 곳이 말이야.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 다음은 누가 객사할까.”

데크에던이 칼끝으로 황혼을 비추었다. 절망을 뱉어내는, 사계 천공에 깔린 수많은 구멍 중에서도 ‘결말’과 ‘비극’을 상징하는 구멍.

“가르강티아.”

아서가 던진 한마디에 나머지 영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저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늘 해결하지 못한, 해결할 수 없을 난제다.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비극, 아서는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욕지거리가 나온다.

애석하게도 영겁의 시간만큼 여덟 번째 영웅이 굴렀던 곳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혹시 저길 또 들어가야 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진짜 토할 것 같다고요.”

아서의 짜증 섞인 말에 나머지 영웅들이 폭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말하는 투는 마치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을 연상하게 했다. 웃음을 간신히 멈춘 바바비어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게,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하늘 아래,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구멍의 중심을 향해 고개를 드는 레니아단. 그녀가 흥얼거린다.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다.

―당신은 이 재앙을 알고 있을까요, 이 세계가 어둠으로 물들 때,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 드리울 때.

재질이 좋은 나무에서만 난다는 향이 코끝으로 퍼진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용감한 일곱 영웅은 길을 열었죠, 다 같이 불러요, 이 희망의 글자를요. 그들은 살아있어요, 돌아올 것이죠.

시끌벅적함, 머리를 죄어오는 폭소 소리, 케피탄 맥주의 탄산, 용사의 쉼터.

―다시 거대한 구멍이 생겨 재앙이 나타날 때, 그들은 돌아올 것이죠, 살아있어요.

바드의 연주 소리, 이어지는 고요함, 많은 이들의 연민이 가득한 시선, 따뜻함.

―당신은 이 고통을 알고 있을까요, 이 모험이 절망으로 물들 때, 수많은 마물에 둘러 공포가 드리울 때.

일하는 이들, 웃는 이들, 우는 이들, 주황빛 아래에 머물러 담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희망을 품은 일곱의 영혼은 나아갔죠, 다 같이 소망해요, 이들의 승리를요.

벽에 걸린 그림, 7인의 영웅들, 힘들었던 그 시절, 마력 전쟁, 절망을 토하는 구멍.

―그들은 끝나지 않은 모험을 하고 있어요.

영웅들은 끝나지 않는 모험을 반복하고,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며 끝나지 않을 희망을 전설로 품었다.

―세계가 뒤틀리고, 부서질 때면. 그들은 돌아올 것이죠, 우리가 불러요.

희망을 불렀다. 절대 돌아오지 못할 그들에게 경외를 담아, 그들을 기억한다.

“…영원하라, 우리의 터, 아칸이여.”

감았던 눈을 뜨는 여덟 번째 영웅, 머릿속에 스쳐 간 용사의 쉼터가 그립다.

마지막 가사를 불렀던 아서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짓는 레니아단, 어떻게 그가.

“아서, 자네가 어떻게 이 노래를….”

나머지 영웅들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니아단이 부른 노래는 원정대만이 알고 있었다.

“베르히만이 남긴 첫 번째 기록, 그가 레니아단이 부르던 노래를 적어두었더군요.”

“저런 음치가 부르는 노래까지 적어두다니, 베르히만 녀석, 취향이 독특하단 말이지.”

퍽, 말이 끝나자마자 레니아단에게 엉덩이를 차이는 데크에던이다. 쓰라린 엉덩이를 매만지는 모습이 상당히 볼품없다.

“레니아단의 노래는 사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납니다. 웬만한 바드들은 필히 숙지하고 있는 노래죠.”

그렇단 말이지, 레니아단을 포함하여 나머지 영웅들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대에 머물러있다.

“본래 영웅의 무용담은 바드들이나 음유시인들로부터 퍼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중 레니아단은 유별나게 기쁨을 표했다. 이를 알았더라면 베르히만이 안식을 가지기 전에 고맙다고 말해두는 것인데, 그렇게 아쉬움마저 남는다.

“…아주 기쁘다네, 데크에던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음악에 소질이 없으니까.”

레니아단을 째려보던 데크에던이 한참이나 비벼대던 제 엉덩이에서 손을 떼더니 입을 열었다. 분명 또 맞을 심산인 듯하다.

“귀족 폭행에는 소질 있지. 아니, 황제 폭행에 소질이 있다고 해야 하나.”

무릎 아래까지 덮인 그녀의 가죽 신발.

이 신발에는 근접전에서 사용되는 무기가 숨어있었다. 바로 바닥 면에 숨겨진 칼날이다.

푹, 데크에던의 비명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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