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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215화 (215/222)
  • 215화

    * * *

    인류를 해하겠다는 사악한 목적만을 지진 악마들이, 천공을 뒤덮은 수많은 구멍 속에서 나타나 살아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죽였다.

    사계에 비극이 도래하고, 그 근원을 찾기 위해 시작의 원정대는 떠났다. 결말의 숲으로. 많은 이들의 희망을 짊어지며 비극이 시작되는 근원의 입구를 찾아간 것이었다.

    인류는 절망으로 인하여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회귀할 때마다, 시작의 원정대는 몇 번이나 이 비극이 시작되는 입구를 찾아갔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어쩌면 이 비극은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반복한다.

    ―베르히만의 기록, 108번째 회귀 中

    * * *

    “거참, 얼른 다들 모여 보게나.”

    바바비어는 뿔뿔이 흩어져있는 영웅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곁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일리아. 백색 머리의 아름다운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다.

    비극의 입구, 결말의 숲이 시작되는 지점을 의미했다. 넓게 깔린 대지 위, 어느새 나타난 검은색으로 물든 숲. 7인의 영웅들은 수없이 봐왔던 곳이었다.

    “쳇, 이제 지겨워지려고 해. 이건 이 몸뿐만이 아닐 거라고. 어차피 8번째 영웅도 나타난 판국에, 또 그걸 해야 하나?”

    데크에던은 바바비어를 쏘아보며 말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황제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말 좀 들어라, 이 멍청한 황제가!”

    레니아단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데크에던이 눈을 쭉 찢으며 바바비어를 향해 걸어가자, 베르히만도 눈치를 보며 매무새를 정돈한다. 브렌트 잉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자, 저쪽으로 가자고. 아서.”

    레니아단이 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초행길이었던 그는 이들이 무얼 하려는지 알 수 없다.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던 아서를 바라보며 바바비어가 말했다. 이미 모두가 한곳에 모여 나란히 서 있는 상태였다.

    “시작의 원정대, 긴 모험을 떠나기 이전의 모습이라네. 희망의 상징이지.”

    “많은 이들이, 우리가 서 있는 이 모습을 보고는 시작의 원정대, 영웅들의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네.”

    “모험을 시작하기 전이라고 보기엔 어렵겠군. 한데 다시금 회귀를 반복할 것을 생각하면 ‘시작의 원정대’도 틀린 말도 아니네. 짧은 모험을 수없이 반복했으니까 말이야.”

    그들을 향해 걸어가던 아서가 멈칫한다.

    “아서, 이미 자네는 우리들이 그려진 그림을 가지고 있었을 테고. 어느 시점부터 그림 속 8번째 영웅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네, 이 이야기는 결국 자네로부터 끝나는 거야.”

    바바비어는 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이상으로 회귀는 없을 것이네, 하지만 우리가 행했던 첫 여정과 자네가 있는 마지막 여정만큼은 기록되어야 마땅하지.”

    미약한 마력 유동, 이는 전부 7인의 영웅들과 셀로닌으로부터 조성된 것이었다.

    마력이 없는 곳에, 절망이 들끓는 이 대지에 나타날 리가 없는 부엉이가 찾아왔다.

    “자 저기, 하나안스의 부엉이가 찾아왔어.”

    영웅들은 이를 익숙한 듯 받아드렸다.

    레니아단은 날아온 하얀 부엉이를 자신의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셀로닌을 지긋이 바라본다.

    “대장, 하나안스의 부엉이라니, 따지고 보면 그가 있을 숲도, 우리에게 닿을 부엉이도, 모두 셀로닌의 덕일 텐데?”

    “하하하, 자네들도 알겠지만 수없이 회귀를 반복한 탓에 헷갈려버렸군. 미안하네.”

    첫 번째 회귀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바바비어와 이들은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중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것이 마법사 셀로닌.

    동쪽의 현자 ‘노바인 하나안스’는 7인의 영웅들의 의지를 이을 8번째 영웅에게 단서를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생존해야만 했다.

    인간인 그가, 이미 7인의 영웅들과 만났을 시기 나이가 적지 않았던 그가. 멀쩡히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낸 공간이 필요했다.

    ‘신기루의 숲.’

    이는 셀로닌이 가진 마법을 모두 총동원하여 만든 고유결계가 장치된 숲이다. 충분한 마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환계에 이를 구축했다.

    여기서 하나안스는 엘프와 버금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했기에 지금의 아서는 7인의 영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모든 것이 8번째 영웅을 위한 일이다.

    “모든 여정엔 해골들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모든 임무를 마치고 결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대장.”

    베르히만이 바바비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여정엔 셀로닌이 만든 또 하나의 장치 ‘골렘’들이 존재했다.

    회귀 과정에서 바바비어를 제외한 나머지 강제적으로 기억을 손실하는 영웅들을 위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초월 마법이었다.

    레니아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우리만큼 노력했다네, 이제는 모든 일을 다 했으니 그 누구보다 결말에 도착한 것이야.”

    “떠나서, 가위바위보 따위로 왜 이 몸께서 짐을 들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군.”

    “그건 멍청한 네가 가위바위보를 못하는 거고. 매번 주먹만 내는데 그걸 누가 지나.”

    그렇게 많은 짐은 아니었지만, 가위바위보를 통해 교대식으로 짐을 졌다.

    매번 바위만 내는 데크에던 덕에, 골렘 못지않을 짐꾼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례자의 언덕을 넘을 시점에 레니아단에게 받은 로브를 착용한 아서, 이들의 옆으로 섰다.

    “아서, 내 물건을 아껴주는 것은 좋지만 말이야. 그 후드만큼은 벗는 것이 어떻겠나.”

    그림에는 분명 8번째 영웅이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8번째 영웅을 만나는 것도 이들에게는 처음이겠으나, 지금은 그 흐름을 바꾸는 시점이다.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브를 뒤로 벗어던지자, 바바비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8인의 영웅들이 부엉이를 바라본다.

    “자 모두 웃게, 그 누구보다 희망에 가득 찬 영웅처럼.”

    이들의 모습을 담은 새하얀 부엉이가, 거센 날갯짓을 하며 비극의 입구를 벗어난다. 신기루의 숲에 있을 현자에게 향했다.

    * * *

    오늘 아서와의 불침번 파트너는 베르히만이다. 불세출의 검객, 현세에서는 모든 검사가 가슴에 품은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베르히만, 제가 나타난 이상 기록은 필요 없으니 하지 않겠다고 들었는데.”

    베이스캠프를 두른 바바비어의 환한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던 베르히만, 고개를 돌려 아서를 마주한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로브 사이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어 아서에게 보였다.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수많은 회귀를 통해 고질적인 습관처럼 제 몸에 배어버린 터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낡은 수첩을 아서에게 건넸다.

    그 수첩을 열어 아무 말 없이 내용물을 확인하는 8번째 영웅을 향해 다시금 미소를 짓는 베르히만, 아서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내용이 다르네요.”

    아서는 이곳에서 베르히만이 건넨 수첩과, 트라튼 유적에서 베르히만과 함께 잠들어 있던 수첩의 내용을 비교했다.

    글자가 허공에 흩날려 기록을 읽을 수 없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바바비어에 관련된 정보였다.

    “아서는 이미 제가 남긴 기록을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고, 대장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트라튼 유적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서였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계관의 두 번째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서 트라튼 유적에 남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베르히만은 다른 영웅들과 다르게 ‘주연의 저주’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아마 아서가 본 기록은, 7인의 영웅들이 첫 회귀를 경험하고, 결말과 이 세계를 구축한 서시에 대한 의심을 시작했을 때라고 볼 수 있겠군요.”

    “…셀로닌께서 골렘을 빗어내 저희의 기억이 보존되기 시작한 첫 반복의 시작점.”

    “그리고 그다음 회귀, 아직은 주연의 저주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우매했던 그때가 분명할 겁니다.”

    너무 많은 반복을 해온 터라, 사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며. 쑥스러운 표정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는 베르히만이다.

    아서는 다시금 베르히만에게 수첩을 건넸다. 주고받은 그 잠깐 사이에 곱상한 얼굴과 다르게 투박한 손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아서의 세계는 ‘혼돈’입니다.”

    “7인의 영웅들은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이자 베르히만이 작은 웃음을 토하며, 아서가 찾아온 이 짤막한 이야기에 영웅들이 자주 웃는 모습이 나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아서의 세계는 혼돈입니다. 다양한 세계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고,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 서시는 온갖 수작을 부렸을 테지요.”

    베르히만은 바바비어의 불꽃을 바라봤다.

    “이곳은 세계관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아서. 그것보다 훨씬 동떨어진 곳이지요.”

    그 주변으로 날아다니던 반딧불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녹아내린다.

    “이곳은 ‘서시’가 존재하는 곳, 비극을 원하는 창조주가 숨어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며, 서시의 활동 범위를 줄였다. 모든 이야기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세계관에서 준비를 마친 영웅이 찾아올 때까지.

    “우리가 이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세계는 서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서가 아저씨라 부르던 베일리아 씨의 모체는 그곳에.”

    “서시의 모체는 여기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니, 베일리아 씨처럼 어떠한 존재를 빗어 이야기를 장악하려고 했을 겁니다.”

    란베르크가 손을 내밀었다. 서시로부터 파생한 또 하나의 주연을 막아낸 8번째 영웅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그걸 막고서 이렇게 찾아온 당신은, 우리들이 무한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주실 구원자입니다….”

    아서는 콧방귀를 꼈다. 구원자라니, 이제 그런 고리타분한 일은 사양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전부 해골들을 데려가기 위함일 뿐이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끝낼 수 있습니다.”

    란베르크는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어느새 검은 반점이 팔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것은 곧이어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 의미하는 것인데도, 검객은 이를 기나긴 안식을 느껴보듯. 그리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 회귀,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넋이라며. 바바비어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베르히만에게 생존에 대한 희망을 주고 말았던 순간이 있었다.

    베르히만은 웃었다. 그 순간은 덕일 것이다. 지금의 아서가 이곳에 올 수 있게끔 도와주었던 책갈피처럼.

    ‘차라리 모두와 함께 눈을 감을 수 있는 편이 시작의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베르히만으로서 행복한 일입니다. 바바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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