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 *
영웅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각자가 걸어왔던 길이 다르기에, 8번째 영웅에 대한 평가 방식도 틀렸다. 확실한 것은 어느새 이들이 아서를 8번째 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대단하군, 혼자서 지금 몇 마리를 쓸어버린 거지?”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영웅, 브렌트 잉크가 아서의 전투를 보며 호평했다.
그 밖에도 베르히만과 같이 검을 다루는 영웅이라면 그의 전투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순례자의 언덕에 들어서서, 웬만한 절망을 혼자서 베어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일이라는 것처럼.
검술의 형식도 상당히 독특했다.
누군가에게 배워보지 못한 격식 없는 검, 특별한 마법을 검에 두르는 것도 아니다. 마력을 둘러 검기를 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무력. 전투를 지켜보던 베르히만이 말했다.
“그저 죽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채택하여 탄생한 기술. 사실상 검술이라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보아하니 원소계열의 마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네요.”
그저 가속의 물약, 고주망태처럼 액체가 든 병나발을 든 채, 무서운 속도로 베어나가고 있다. 그는 한 놈씩 베어낼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했다.
―빨리 갑시다. 제발.
그가 쥔 은색 빛의 장검, 아템이라고 했던가. 바바비어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도 문제가 없는 까닭도 저 사내와 그리고 저 사내에게 질세라 함께 절망을 베어나가는 데크에던 덕이다.
‘완전히 새것처럼 보이는데, 그 많은 절망을 베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가 조금도 닳지 않았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절대 무뎌지지 않을 검처럼.’
실로 그랬다. 저 검은 매번 절망을 베어낼 때마다 칠흑 같은 피로 칠갑이 되어도, 사내가 허공에 한 번 휘두르면 그만이다.
그렇게 절망의 피를 뱉어내면, 다시 빛이 났다. 마치 새것처럼.
“이봐, 그건 내 거라고 애송이!”
“그럼 나보다 먼저 베시든지.”
“크윽, 이 새끼가!”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고, 늘 자신이 베어왔던 절망의 수를 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데크에던.
코앞에서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절망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아서, 데크에던은 승리욕에 가득 차올랐다.
―서걱! 서걱! 서걱!
데크에던이 아서 앞을 달려드는 3마리의 절망을 베어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아서는 별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그 옆으로 검은 피가 가득 고인 웅덩이가 보이자 한 눈판 데크에던을 뒤에서 차버린다.
―퍼억!
풍덩, 휘황찬란한 갑옷 위로 검은 피를 끼얹는다. 아서를 향해 육두문자를 던지는 데크에던. 이를 향해서 넌지시 썩은 미소를 띄워주는 8번째 영웅이었다.
“…풉, 볼품없는 모습이 정말로 어울리는군. 훌륭한 막내 덕에 이 레니아단이 할 일이 줄어들었어.”
아서를 향해 엄지를 드는 레니아단, 데크에던이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긴 귀의 사수는 성질 더러운 황제의 망토에다 화살을 맞힌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넘어졌다.
“…이, 이것들이 정말!!”
영웅들의 폭소 소리가,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언덕의 먼 곳까지. 그렇게 퍼져 울렸다.
언덕을 전부 올라오자, 다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그 아래에서 검은 반점들이 보인다.
바글거리는 그것들이 지면을 울리며 8인의 영웅들을 향하고 있다.
“늘 똑같이 경험했던 것이니, 늘 하던 것처럼 하자고, 다들 준비는 되었나.”
아서를 제외한 나머지 영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다.
바바비어가 전방에 불꽃을 떨어뜨렸다.
그것들은 화마처럼 사방으로 번져 절망을 태웠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절망들은 베르히만이 가차 없이 베어나간다.
허공으로부터 날아드는 절망들은 레니아단의 화살에 맞아 괴성을 지르며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뜻밖의 대열 사이로 들어오는 절망들은 영웅들의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브렌트 잉크가 베어낸다.
셀로닌은 계속해서 주문을 속삭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난 이후, 마력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전부 이 마법사 덕이겠지. 그는 영웅들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했다.
데크에던은……. 딱히 대열과 상관없이 아무 곳이나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원소 마법과 검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황제. 가끔 등신처럼 레니아단의 화살을 어깨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그녀의 실수로 붙이기엔 어려울 것이었다.
마치 전장 위를 한 폭의 작품처럼. 실력이 워낙 좋은 편이라 그런지, 그렇게 싸우는 것만으로도 절망의 수를 줄여나갔다.
이들을 지켜보던 아서는 생각을 멈췄다.
절망의 수가 줄어들 때까지, 저 앞으로 향하기까지, 그들의 대열 중 8번째 인물이 되어 아템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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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2,298마리, 넌?”
“2,299마리요.”
“구라까지 마. 너 분명 2,298마리였어, 나랑 똑같았다고. 마지막 한 마리를 대장이 죽이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겼어, 이 애송아.”
“못 믿네, 그럼 2,298마리라 칩시다. 당신을 베면 2,299마리가 될 테니까.”
“멍청하긴, 개수는 절망만 세는 거다. 나를 죽여도 개수가 올….”
“아, 그러니까.”
영웅들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데크에던은 이마의 열십자와 함께 아서에게 달려들었으나, 레니아단에게 귀를 꼬집히며 의사전달에 실패하고야 만다.
“…이거, 이번에도 녀석들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단장.”
베르히만이 파괴된 마차 앞에서 말했다. 여기까지라는 것은 마차보다 지면에서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우르그들을 의미했다.
“아서 덕에 이번에는 조금 더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이곳부터는 운명이 바뀌지 않는 것 같군.”
우루그들은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분명 아서의 합류로 인하여 우르그들의 피해는 확연히 줄었다.
게다가 생채기 하나 없다. 죽어가는 이유를 붙이기엔 너무나도 멀쩡했다.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영웅들. 우르그가 고통스럽지 않게끔, 그것들의 목을 찔러 찰나에 숨을 거둬가는 베르히만이다.
바바비어는 매서운 화염으로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열심히 달려왔던 말들을 화장했다.
“오늘 불침번은 아서와 붙여주게나. 내일부터 들어가게 될 ‘비극의 입구’에 대해서 설명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 * *
“아서 군, 어째서 우리는 같은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타닥타닥, 베이스캠프 주위로 바바비어의 불꽃이 타올랐다. 간혹 절망들이 다가와 이 불꽃을 무시하고 덤벼들다 잿더미가 되어 으스러지기에 십상이다.
바바비어는 고개를 돌리며 아서를 바라봤다. 자신의, 그리고 영웅들의 의지가 낳은 결과물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찾아왔다.
“우리는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지, 그 결과로 멀쩡한 세계는 멈추었고, 자네 덕에 다시금 움직일 수 있었네. 결국, 지금 이 이야기는 없어져도 되는 일이라는 것이지.”
관심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어떠하든.
아서는 그저 해골들을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없어져도 되는 이야기라면, 해골들과 함께 돌아간 뒤도 늦지 않다.
“순례자의 언덕을 넘어, 비극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죽음이 예정’되고 말아.”
먼 곳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의 사내. 아마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회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라네. 그것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
바바이어는 이를 ‘주연의 죽음’이라는 저주로 이름을 정했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서시에 의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주연들은 무조건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물론 아서는 다르다. 그는 일화로 인해 탄생한 주연.
“비극의 입구로 들어가, 세상의 끝이자, 죽음의 숲인 결말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의 경우를 두지. 물론 그중 하나는 무조건 선택하지 않게 되어있네.”
첫 번째 영웅이 두 손가락을 펼친다.
하나는 이대로 결말에 순응하는가,
하나는 다시금 회귀를 반복하는가.
아서는 말했다.
“그래서 대장의 결말이, 7인의 영웅의 결말이 뭡니까.”
쓴웃음을 짓는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쉰다. 이내 고개를 돌려 아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별것 없네. 아까도 말했다시피, 6명의 죽음은 당연한 것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숲에 들어서게 되면 우르그들처럼 생명력을 잃어 눈을 감게 되는 것이야.”
6명, 아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중심인 마르노프 바바비어는?
“대장은요, 왜 나머지들은 다 죽어버리고 대장만 살아남는 거죠?”
한심한 대답이 나오질 않길 바랐다.
비극이기에 그것을 막기 위한 일이라면 상관없다. 다만 희극이 될 수 있음에도 동료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회귀를 반복하는 것이라면, 그도 과거의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네, 방금 자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군. 물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찰나의 그 표정은 나와 관계가 없어.”
바바비어는 곱씹었다. 희생, 이미 희생은 끝났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일화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녀 덕이었다.
데크에던의 잠꼬대가 들린다. 레니아단에게 무어라 황급히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비극이라는 장르의 주인공이 꼭 비참하게 죽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피카레스크, 나는 피카레스크의 카타르시스 같은 존재니까.”
첫 번째 영웅은 여덟 번째 영웅의 어깨 위에 자신의 손을 얹힌다. 그저 올린 것이 전부인데, 많은 것을 짊어진 무게가 느껴졌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자네를 준비했다네.”
바바비어는 아서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붉은 머리칼이 또 한 번 휘날렸다.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밤하늘 아래에서 근사하게 타올랐다.
“뭐….”
할 말을 잃은 아서는 목적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돌아가면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도 희극으로. 단지 가족 같은 녀석들을 챙겨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끝으로 가면.”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해골 녀석들이 있는가. 그리고 해골들과 함께 이야기의 끝에 있다는 출구로 나간다면, 용사의 쉼터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네.”
“…….”
고개를 끄덕이는 아서, 어깨에 올린 손이 내려갔다. 그런데도 여운처럼 그의 알 수 없는 무게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야. 오히려 그 별것 없는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 수없이 반복했던 우리들의 삶과, 자네를 만난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별이 아닌 달이 반짝거렸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일곱 명의 이야기는 최고조가 되었고, 드디어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네.”
달이 반짝거렸다.
그 대신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그것도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기억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