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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213화 (213/222)
  • 213화

    * * *

    지면을 박차고 힘차게 달려 나가는 명마 우르그들. 베르히만이 모는 마차는 마치 퍼플을 연상하게 했다.

    “이만 들어가셔도 됩니다만, 아서.”

    “괜찮습니다. 제 차례니까요.”

    “공격 보조를 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길이라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8인의 영웅을 태운 마차는 여관의 것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6마리의 명마를 운용해야 할 정도면 대형 마차에 속한다. 모두가 편안히 발 뻗을 수 있을 크기였다.

    ―콰직!

    지면으로부터 달려드는 절망 하나를 베어낸다. 이렇게 외부에서 마차를 조종하는 베르히만 곁에서 덤벼드는 절망을 베어내는 것이 공격 보조의 일이었다.

    ―콰직!

    휘황찬란한 마차에 절망의 검은 피가 튄다. 모험과는 거리감이 먼 마차였다. 탑승 인원은 적합하지만, 너무나도 화려한 생김새다.

    “마차의 주인은 데크에던 경입니다. 아무래도 요란한 생김새에 의문점을 품으셨나 보군요. 말씀하시길 어차피 죽으러 가는 길인데 화려하게 가자고. 하하….”

    “의문점을 품기도 전에, 마차의 주인이 저 싹수없는 황제인 줄은 알았습니다.”

    마부 자리로 연결되는 창문에 데크에던이 머리를 비집고 아서를 째려본다.

    “어이, 방금 내 욕했지.”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촤악!

    달려드는 절망 하나를 또 베어내자, 검은 피가 얼굴을 내민 데크에던에게 튄다.

    얼굴 전체가 까무잡잡하게 더럽혀진 데크에던을 바라보며 폭소를 터트리는 베르히만이었다.

    “볼일 끝나셨으면 들어가지 그래.”

    “으, 으윽, 밀지 마! 늦게 온 막내 주제에 성격이 꼭 레니아단이랑 빌어먹게 닮아있군!”

    뚫린 창문으로 까무잡잡한 데크에던을 밀어 넣자, 내부에서 레니아단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데크에던이 뒤로 나자빠지며 사라졌다.

    “저렇게 보여도,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요.”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원수지간 같으면서도 묘한 기류가 흐르는 관계라고.”

    베르히만은 삭막한 대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록, 자신은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남아 있….”

    “훌륭한 검객으로요, 사계에서 검을 쥐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당신을 동경하고 있어요. 불세출의 검사, 베르히만.”

    …란베르크로부터 목이 떨어지는 것은 비밀. 그래도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으니까.

    “아젤, 드사덴 아젤께서는 잘 계시는지.”

    “네, 자녀를 낳았습니다. 모르딕이라고.”

    베르히만은 웃었다.

    모르딕, 모르딕으로 드사덴께서 2세의 이름을 지었다. 기록을 보지 못했어도, 그와 생각이 같았을 것이리라.

    “아서, 머지않아 ‘순례자의 언덕’이 나타날 겁니다. 본격적으로 저희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지요.”

    “그곳이 결말을 향한 첫 지점입니까?”

    “예, 그렇게 지은 것도 우리들입니다.”

    11번째 여정을 출발하기 이전, 이미 많은 회귀를 통해 결말 직전에 이야기를 반복했던 이들이 모여서 늘 하던 것처럼 델타 옆으로 우뚝 서 있는 산맥에서 대기했다.

    그렇게 내가 등장할 때까지,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번만큼은 달랐다. 8번째 영웅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여정은 시작된다. 모두가 죽어야 회귀할 수 있으니.

    순례자의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메마른 대지 위, 절망이 간혹 튀어나오는 이곳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언덕이 있다.

    곳곳마다 부유선으로 추측되는 물체가 부산물이 되어, 매정하게 흙바닥에 박혀있다.

    페지르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깃발이 산발적으로 넝마처럼 흙에 나뒹군다. 대제국들의 정찰 임무를 받은 부유선인 듯하다.

    “이렇게 마차를 이용하는 이유도 마력이 소모되는 현상 때문입니다. 저 순례자의 언덕부터는 그 현상이 더욱 강해지지요. 이는 많은 정찰대의 희생으로부터 얻은 정보입니다.”

    ―쉬이익!

    별안간 날아드는 절망을 베어낸다. 베르히만은 남은 손으로 오른쪽 바퀴 주변에 엉겨 붙은 절망은 베었다.

    “아서, 대장에게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 자리와 연결되어있는 창문으로 바바비어를 부른다. 시끄러운 데크에던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바바비어, 베르히만이 순례자의 언덕에 도착했다는군요.”

    * * *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바스락 소리에 눈을 뜨자, 귓가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함께 레니아단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서, 우리 차례라네. 일어나게.”

    “……아, 불침번 말이군요.”

    전번 불침번인 브렌트 잉크, 데크에던과의 교대가 끝나자 그녀는 자리에 놓인 자신의 활을 들고서 원형으로 둘러싸인 바바비어의 불꽃 앞까지 걸어갔다.

    “대장의 불꽃은 절망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네, 게다가 몇 번의 회귀를 통해 찾은 이곳은 좀처럼 절망이 없는 곳이지.”

    “확실히 다른 곳에 비하면 절망이 없는 편이긴 하네요, 더군다나 바바비어의 불꽃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기도 쉽지 않을 테고.”

    움막처럼 설치해둔 숙소와 외부에는 우르그들이 잠을 자고 있다. 그 바깥으로 넓게 두르고 있는 바바비어의 불꽃은 꼭 울타리 같은 느낌을 조성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빛을 잃지 않는 별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긴 귀의 엘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쉰다.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도 엘프라는 특성으로 인해 몹시 젊은 여인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내쉬는 한숨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것이 묘하다.

    여관의 바드인 웨라도 엘프인 것을 고려하면 나이가 적은 편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레니아단과 자신의 나이 차는 자신의 세월을 두 곱은 더해야 한다고 했다.

    “회귀를 시작하기 이전, 첫 원정 때는 잠을 자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네. 워낙 많은 회귀를 통해 같은 것을 반복하다 보니, 이런 것들도 가능하게 돼버렸어.”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일은 내게도 익숙한 편이었다. 최소한 아템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들 못지않게 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으니까.

    “……아, 미안하네. 자네는 분명 저 구멍 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거늘, 괜한 것을 말했어. 지렁이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었다네.”

    “아니에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

    “그래, 묻고 싶었던 것이 있다만. 골렘들에 대해서네, 어째서 그들에게 집착하는 건지.”

    집착이라, 가족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말없이 떠났다면 그 이유를 물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면 끝까지 찾으러 가야죠, 이건 납치나 마찬가지라고요.”

    “아하하, 아서, 자네는 그들이 우리들의 사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도 가족으로 받아줄 텐가.”

    “데크에던의 기억을 담고 있는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면 주시해야겠어요. 제길.”

    레니아단은 실실 웃었다.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 알려진 7인의 영웅들도 별것 없을지도 모른다. 전부 똑같은 사람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나다고 남모르게 강요받은 삶이라, 영웅도 안타까운 존재네요.”

    “……안타까운 존재라.”

    레니아단은 전방을 주시했다. 굳이 쏴서 죽여도 되지 않을, 그런 불가능한 거리에 놓인 절망을 화살로 가볍게 맞춘다.

    “그래, 어쨌든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지 아니한가.”

    고개를 돌린 긴 귀의 엘프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근데 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꼭 하고 싶어서 말이지.”

    “이거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나 보네요. 엘프라 오래 살아서 그런가.”

    “저기서 자는 나머지들도, 아마 이 엘프와 같은 신념을 품고 있을 것이네. 아서.”

    * * *

    동이 트고, 나를 제외한 모든 영웅이 분주했다. 막내를 위한 배려인가, 딱히 깨우는 시늉은 없었다.

    이들이 분주한 까닭은 급작스러운 전투 상황이나, 황급히 절망을 피해서 자리를 떠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콧잔등을 스치며 군침을 돋게 만드는 이 냄새. 몹시 익숙하다. 해골 녀석들이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한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막내가 일어났군. 잠은 잘 잤는가? 이렇게 첫 하루가 지나갔다네, 하하.”

    바바비어가 윙크를 하자, 나는 웩하고 싫은 티를 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레니아단, 다크에던, 셀로닌이 요리를 하고 있다.

    “베르히만, 우르그는 그만 만지고 어서 오게, 그대도 식사는 해야지.”

    대장의 목소리에 쥐고 있던 건초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베일리아와 브렌트 잉크는 요리 삼인방이 만든 음식을 가져왔다.

    “자자, 다들 이제 먹자고. 진정한 영웅은 아침을 거스르지 않는 법이야.”

    낡은 나무 상자 위에, 단출한 캠프에서는 먹어볼 수 없을 법한 호화스러운 요리가 등장한다. 전부 먹음직스러웠다.

    “이봐, 이 데크에던은 요리까지 겸비한 사내라고, 황실 요리사들에게 배운 이 실력. 상상 이상으로 맛있을 테니까 각오해라, 애송이.”

    데크에던은 쥐고 있던 식칼을 내게 내밀었고, 이를 보던 레니아단은 그의 엉덩이를 까버렸다.

    “시끄러워, 제발 설치지 좀 마. 이 쓰레기 같은 인간아.”

    “쓰, 쓰레기라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게 말이 심하잖아, 이 늙다리 노처녀 할망구가!”

    마차에 오르기 전, 바바비어에게 설명 들은 것이 있다. 대충 여정 중에 일어날 문제나, 혹은 상대하기 힘든 절망 따위에 관한 것인 줄 알았다.

    ―아서, 이 원정대에서는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네. 이는 우리가 많은 회귀를 통해 축적한 귀한 정보지.

    하나는 레니아단에게 늙었다는 소리를 하지 말 것, 둘은 레니아단에게 노처녀라는 소리를 하지 말 것, 셋은 레니아단에게 할망구라는 망언을 하지 말 것이다.

    “……그, 그게 실수였어, 레니아단.”

    그리고 놀랍도록 뛰어난 재능으로, 그 셋을 동시에 수행해버린 데크에던이었다.

    나머지 영웅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는 아마도 묵념이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 그것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 먹지 못한다는 건 아주 슬픈 일.

    이를 뒤로하고, 바바비어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게 넘겨주고는 얘기했다.

    “아서, 식사가 끝나면 순례자의 언덕으로 올라갈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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