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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210화 (210/222)
  • 210화

    * * *

    베르히만의 시체 옆으로 란베르크가 앉는다. 온몸에 빠져나간 마력을 천천히 회복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잘도 서 있었던 것이다.

    “고생했어, 란베르크.”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위에 몸을 기대는 란베르크. 아이리스와 렌은 베르히만이 마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보조했다.

    “아주 대단했다, 란베르크 선생. 이 프리실라는 또 한 번 감명 받고 말았어.”

    란베르크가 베르히만의 목을 떨어트리고.

    불세출의 칼날이 되는 그 순간을 목격한 이들 중, 이 이야기를 근사하게 부풀려 사계에 퍼트릴 자. 초롱초롱한 눈의 프리실라가 있다.

    “그의 전성기인 원정대 시절에 비하면, 시체에 불과한 것과 싸웠을 뿐. 너무 호들갑 떨지 마, 프리실라.”

    동경을 담은 표현에 쓴소리가 넘어오자, 머쓱함을 느끼는 프리실라였다. 란베르크 스승은 승리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 원정대 시절의 그는 훨씬 더 강했겠지. 하지만 온몸을 쭈뼛하게 만든 베르히만의 기운은 여전히 피부 겉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분명히 란베르크는, 검을 쥐는 자로서 과거의 영웅을 꺾으며 새 시대를 열었다.

    “불세출의 칼날, 충분히 너는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어, 란베르크.”

    아서는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숨을 뱉고는 프리실라를 향해 나지막이 웃어주는 란베르크였다.

    바위 옆, 아주 오래된 수첩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여정이 담긴, 그 끝이 담긴, 베르히만의 두 번째 수첩.

    “자 그럼, 수첩을 한 번…….”

    아서가 낡은 수첩을 쥔다.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란베르크도, 렌도, 아이리스도, 그곳에 집중한다.

    아서가 하나로스를 바라보자,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베르히만이 일기를 남겼어.”

    두 번째 수첩에는 서장처럼 적혀있는 베르히만의 일기가 있었다. 아서가 눈으로 훑는다.

    베르히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아서의 목소리가 동료들의 귓가에 스며든다.

    트라튼에 도착하여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을 기록해둔 베르히만이었다.

    ―촤르르륵.

    손에 있던 베르히만의 낡은 수첩이 빛을 내뿜으며,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책장을 넘긴다. 흠칫한 프리실라가 검을 치켜든다.

    “……멋대로 움직이잖아.”

    계속해서 종이는 빛을 뿜으며 넘어갔다.

    이윽고 글자가 종이에서 벗어나 허공을 맴돌기 시작한다. 모든 글자가 허공을 향해 무정하게 흩어진다.

    쥐고 있던 베르히만의 두 번째 수첩은 빛을 멈출 줄 몰랐고, 그 빛으로 인해 어두웠던 내부가 더없이 환하게 비친다.

    “……그들의 기록을, 사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서.”

    하나로스는 허공을 맴도는 수많은 글자를 보며 탄성을 멈추지 않았다.

    아서가 읽은 것이라고는 수첩의 시작을 장식했던 베르히만의 사적인 기록뿐이다.

    …――스스스스.

    빠르게 넘어갔던 종이들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기록들이 희미해지며 사라져간다.

    내부를 환하게 비추던 수첩의 빛은 사라지고,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주위가 고요해진다.

    렌이 아서를 부르며 정적을 깼다.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유지하는 아서였다.

    “마스터?”

    이내 정신을 차린 아서가, 쥐고 있었던 수첩을 확인했다. 한 장씩 종이를 넘긴다. 넘길수록 표정은 굳어진다.

    “…허.”

    지켜보던 동료들은 의아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아서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없어.”

    “그게 무슨 소리더냐, 임자.”

    “없다고, 이 안에 기록되어 있던 글자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야.”

    쥐고 있던 수첩을 아이리스를 향해 펼쳤다. 그 내부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았다.

    순수한 백지상태의 수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로스, 이게 무슨 뜻인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하나안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했다.

    기록은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 창조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이야기는 사계에 뿌리내릴 수 없다.

    바바비어를 포함한 6인의 영웅들이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간다. 그들을 대신하는 아서가 나타남으로, 그리고 그들이 완수하지 못했던 결말을 수행함으로. 시작의 원정대는 필요 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멈춰버린 이야기, 의미 없는 이야기.

    이를 들춰내는 것은 과거의 영웅들이 지녔던 의지를 이어받아 새 시대를 여는 주연.

    “아무래도 아서께서 그들의 기록을 얻은 것만으로, 사계는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아서는 11번째 여정을 생각했다.

    11번째 여정, 만약 두 번째 기록을 얻어 그 여정을 향할 수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안스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아서는 세계를 조율하는 서시와 일화의 권능 없이 그게 가능은 한지 의문을 품었다.

    “단장, 용사의 쉼터로부터 마법 부엉이가 도착했다. 베르히만이 조성한 환경이 무너진 바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군.”

    프리실라가 마법 부엉이의 서신을 확인한다.

    “단장, 해골 녀석들이….”

    그녀가 해주었으면 하는 대답은 ‘제정신을 차렸어.’, 하지만 서신을 읽던 프리실라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그것이, 조금 더 곤란해졌군.”

    * * *

    [ 전날, 용사의 쉼터 中 ]

    오늘은 용사의 쉼터는 휴일, 분주했던 길드원들도 주말만큼은 직원 정신과 훈련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렌이 담아두었던 발프레 차를 마시며, 홉스에게 인수인계받은 하루 매출을 확인하는 아이나. 이보다 고민거리가 있었다.

    “흠, 그들이 떠난 지도 벌써 한 별이 흘렀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그도 그럴 것이, 남대륙으로 떠난 이들은 여관 최대의 전력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대륙이면 부유선으로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서신을 보내야겠어.”

    아이나는 외부에 있던 마법 부엉이를 불렀다. 여관 전용의 부엉이로, 남대륙까지 가는데 하루면 충분할 것이다.

    “그들이 늦어지는 까닭은, 트라튼 유적 내부로 들어갔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나.”

    고고학자 월키스, 하나로스가 그들과의 원정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여관에 남아 대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객실에서 나온듯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곳에 무엇이 있든 현재 원정을 떠난 이들은 여관 최고의 전력입니다. 이렇게 늦어질 리가….”

    “트라튼이라는 곳은 베르히만으로부터 만들어진 유적입니다. 그가 사계의 흐름에서 벗어난 상태일 확률이 높으니, 그곳과 이곳의 시차가 어긋나 그런 것입니다.”

    “……지혜가 뛰어나서 그런지, 굉장히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어제저녁, 흰 나비 숲을 유일하게 뚫을 수 있는 고유 부엉이를 하나안스에게 보냈다. 이는 사실 하나안스에게 돌아온 답변이었다.

    “크흠, 저 또한 걱정되었던 나머지 하나안스께 마법 부엉이를 보냈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것은 사실상 현자께서의 답변이지요.”

    걱정이 앞섰던 아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해보니, 그 멤버들이 위험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들에게 마법 부엉이를 보낼 필요는 없겠군요.”

    불러들였던 마법 부엉이를 돌려보내는 아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월키스와 함께 마당으로 향했다.

    용사의 쉼터 마당, 거대한 나무 엑스칼리버가 정중앙에 우뚝 서 있다. 본 여관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경관이다.

    “아이나, 본래 저 나무에는 문 같은 것이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엑스칼리버를 가리키는 월키스, 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저 나무다.

    지금이다 싶은 아이나는 인류 제일의 고고학자에게 가진 지식을 뱉어낸다.

    “저것은 정령왕이 온 것을 의미합니다.”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치켜세운 아이나를 바라보는 월키스, 며칠간 정령왕이 여관을 오갔기 때문에 그도 엑스칼리버가 정령계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그런 것치고는 조금 분위기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아이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손가락을 올린 상태에서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나무가 정령계와 연결되면 구멍이 생기지, 문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

    천천히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나와 월키스, 가까워질수록 확실히 보였다. 생김새는 여느 집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나무문으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익숙한 소리는 귓등을 스치자, 고개를 돌리는 아이나였다.

    “…깨, 깨어나셨군요. 여러분!”

    신사 해골들, 본래라면 용사의 쉼터 후방 건물인 투숙객 시설에 조립되어, 마이너 수집가들의 장식품처럼 놓여있어야 했다.

    그들이 이전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트라튼으로 향했던 이들이 작전을 성공한 것이다.

    ―달그락.

    “캡틴…… 씨?”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그들, 동공은 없어도 감정이 담긴 시늉을 보이던 이들이 이전과는 판이한 분위기를 보였다.

    ―달, 달그락.

    그들이 엑스칼리버를 향해서 줄줄이 걸어간다. 아이나는 그들을 계속해서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어, 어디 가십니까! 곧 사장님께서 돌아오실 텐데 말이죠!”

    역시 반응이 없다. 캡틴이 난데없이 엑스칼리버에 생겨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이어 블루, 네이비, 옐로우, 오렌지, 그린, 퍼플이 따라 들어갔다.

    “……잠, 잠깐 멈추십시오!”

    아이나는 황급히 이들의 꽁무니를 쫓아 그들을 가로막았다. 캡틴은 이미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막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렬히 찾아온다.

    ―달그락.

    나머지 해골들이 아이나를 밀치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이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

    “멈춰요, 아이나!”

    “하, 하지만.”

    문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나를 막는 월키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가야 합니다. 제가 아니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나의 의사를 수긍한 월키스는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아이나가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형태 없는 무력이 그녀를 밀쳐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장 보고해야 해.”

    알 수 없는 무력으로 인해 문 앞에서 넘어져 버린 아이나는 자신의 무릎을 눌러 몸을 일으켰다.

    시선이 문 쪽으로 옮겨진다.

    나무 문턱 위에, 문자가 있다.

    11번째 여정, 다아트(Daath)의 길.

    유일하게 권한이 있는 자. 이는 영웅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8번째 영웅의 숨겨진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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