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206화 (206/222)
  • 206화

    * * *

    [ 노바인 하나안스의 오래된 과거 中 ]

    현자는 우매한 이를 괴롭히는데 선수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당한 백지에다 역사를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은 다음, 그 일대기를 근사한 서술이나 멋진 묘사로 실컷 포장한다.

    포장이라는 말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시대는 영웅과 같은 단어 하나만으로 희망을 품거나, 용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나, 이름하여 현자, 노바인 하나로스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이야기, 그것의 결말과 가장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자.

    머릿속이 예언으로 잔뜩 차오를 때면, 밤을 설치기 일쑤지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 있을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알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자네가 우리의 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네, 어때 우리를 그려주지 않겠는가. 지혜는 물론이요, 그 손놀림은 여느 화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하였다고 하던데.’

    7인의 영웅, 정확히 그들이 집결하기 며칠 전, 원정대의 중심이 될 ‘마르노프 바바비어’가 찾아와 말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가 어떻게 내가 예언자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어렴풋이 ‘회귀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회귀라, 사계에서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나는 그대를 알지, 그대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게 될, 혹은 우리의 이야기를 다음 시대를 열어줄 이에게 전하는 역할을 할 테니까.’

    그는 아주 멋스러운 목소리와 경쾌하면서도 올곧은 눈빛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내가 현자라도 그를 속일 수 없다는 느낌, 속이려고 하더라도 내가 진실을 이야기할 때까지 여유로운 웃음으로 기다릴 것만 같은 기분. 그는 실로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결말과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자’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몇몇 이들에게 우리의 흔적을 남겨 둘 생각이야, 가장 중요한 흔적을 남겨 둘 자는, 아마 곧이어 만나게 될 영웅 중 한 명이 될 것이고.’

    내가 현자인지, 저 붉은 머리의 사내가 현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상식도 많지만, 필요 이상으로 지식의 범주가 넓다. 하물며 예언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던 10개의 원형이 맺힌 미지의 나무도 알고 있다.

    마치,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한 이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운명을 거부할 생각이네.’

    이 사내의 말을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정해진 결말을 거부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세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야기 중, 주연이라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렇기에 결말을 거부하기는커녕, 유도해야 할 노릇이라, 사실상 방금 했던 말은 모순이 잔뜩 덩어리진 실언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기에 바바비어는 선택했다.

    자신의 의지를. 이 세계가 비극으로 끝나질 않길 바랐기에 숱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영웅들의 의지를 다음 시대로 보내겠다고.

    ‘이 이야기는, 아니 사계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시작점인 ‘서시’에 의한 것으로 그 운명을 달리할 수 없다는 말이네. 하지만 수많은 회귀를 통해 나는 또 하나의 시작점인 ‘일화’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계속되는 회귀 속에서 동료가 되어주었어.’

    7인의 영웅, 프레이시스 베일리아.

    바바비어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원정대의 구성은 6명. 일화는 베일리아라는 인물로서 7번째 영웅의 역할을 했다.

    거듭되는 회귀 끝, 새로운 시작점을 만들어 낼 ‘일화’와 영적인 조우를 거쳐, 운명을 거부할 생각이었다.

    ‘아까 말했던 가장 중요한 기록을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둔다면, 자네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이를 찾는 자는 없을 테지. …다만 문제는 그다음. 시대의 주축이 될 주연이 혹여 ‘서시’로부터 새롭게 선택된다면, 결국 비극이라는 결말을 바뀌지 않아.’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어. 물론 그가 쌓인 분노는 나를 소멸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바바비어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는 7인의 영웅들이 결말에 도달하면 나타나게 될 ‘신의 기계적 장치’, 바바비어와 일화가 꾀어낸, 일시적으로 이야기를 망칠, 비장의 수단이었다.

    ‘그가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난 이후, 굳이 숨겨진 이야기를 들춰내지 않겠다면야. 우리는, 아니 나는 그저 맥거핀에서 그치고 말 것이네.’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으니까.’

    사실상 ‘신의 기계적 장치’가 될 누군가는 대를 위해서 강제적으로 소가 되어야만 했다. 바바비어가 말하는 결말,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 들어가 영겁의 시간 동안 바글거리는 비극과 싸워 버텨내야 했다.

    ‘이야기는 기록, 기록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그 유래가 퍼지고, 신화나 전설이 생기는 것.’

    ‘첫 번째 기록은 사계의 모든 이들을 위해. 7인의 영웅들로부터 인류의 가슴 속 희망을 심어두는 것.’

    ‘두 번째 기록은 신의 기계적 장치로서 일했던 그를 위해. 영웅, 인류에 관여해왔던 일화는 합당한 대가로 개연성이 때를 만들지 못해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으니. 비로소 알아야 할 합당한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것.’

    ‘그리고 세 번째 기록은, 이 기록들을 가지고 멈춰있는, 혹은 애매하게 남아있는 우리들의 시간이 뭉친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장치.’

    ‘……세 번째 기록은, 운명적으로 그와 얽혀있기에 찾는 것보다 자연스레 발견되는 것. 이는 현자가 도와줄 것이 없네.’

    그렇게 타오르는 미소를 그칠 줄 몰랐던 바바비어는 ‘그’의 이야기를 꺼낼수록 안타까운 표정과 연민을 더해갔다. 사실상 모든 기록은 ‘그’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현자가 생각하는 것이 맞네.’

    ‘사실상 그가 신의 기계적 장치가 되는 순간부터, 이미 이 비극은 희극이 될 것이라 정해진 것이지.’

    바바비어가 사실 수많은 회귀를 통해서 이야기를 반복해왔다는 말을 기어코 듣게 된다.

    그 회귀의 끝에서 ‘신의 기계적 장치’의 역할을 하게 될 ‘이방인’을 구하지 못하면, 일화의 힘으로 적합한 ‘이방인’이 소환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며, 비극은 쌓인다.

    그렇게 언젠가 ‘이방인’이 나타나면.

    바바비어가 해결하지 못했던 수백, 수천, 수만 번의 결말. 그 시간만큼 이야기의 불규칙성을 조율하기 위해 절망을 베어나가야만 했다.

    ‘……나는 정말 미안하네, 그에게.’

    * * *

    ―트라튼 유적으로 가게나.

    용사의 쉼터로 돌아왔다.

    손님들의 이리저리 북적이는 소리를 뒤로하며, 스멀스멀 관자놀이로 향하는 내 손을 억제하기 바쁘다.

    남대륙의 고대유적 트라튼. 월키스가 하나안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고대유적’의 기록 중 하나다.

    ‘그곳에 가면, 이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는 걸까.’

    트라튼 유적, 이곳은 남대륙 어딘가에 존재하는 곳. 남대륙 출신의 아이리스도 월키스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트라튼이라는 유적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 말했다.

    “이미 과거에 찾아보았건만 발견하지 못했느니라, 과연 있는 곳이긴 할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안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없는 곳은 아닌 것 같구나.”

    과거, 아이리스는 자신이 읽었던 월키스의 서적을 토대로 말했다. ‘트라튼 유적에는 베르히만의 마지막 행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골 신사들을 세워다가 7인의 영웅에 관해 설명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스친다.

    문제라면 이곳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남대륙 출신의 푸른 용인 아이리스도, 현자 하나안스도, 아황처럼 예언을 통해 그곳이 존재한다고 느낄 뿐이다.

    ―그의 행적, 마지막 행적이 남은 곳에는 사계에 공개되지 않았던, 7인의 영웅 베르히만의 두 번째 수첩이 있을 것이네.

    첫 번째 수첩과 달리, 공개되지 않았던 두 번째 수첩. 그 수첩을 지닌 채로, 7인의 의지를 잇는 자에게 기록을 전달하기 위해 긴 세월을 기다렸다. 그곳 트라튼에서.

    사계에 뿌리내려진 그들의 일화, 이는 베르히만의 수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라진 이야기, 혹은 사라지게 될 그들의 이야기. 이는 베르히만의 두 번째 수첩에 기록되어 있다.

    ―나 하나안스는 결말에 가까운 미래를 들여다보는 현자와 다를 바가 없네. 그저 보는 것이 전부,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원인은 결과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지.

    하나안스는 그림을 강조했다.

    7인의 영웅이라는 작품은 자신이 그려낸 작품이지만, 마찬가지로 8번째 인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알 필요 없이 정해진 것’이라고 했다.

    그림은, 원인과 함께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한다. 8번째의 인물은 실존한다. 더군다나 ‘8번째 영웅’이라는 타이틀로 세계의 유산이 각성한 이야기의 주연이. …그렇다면 역시.

    ‘11번째 여정은 그들과 나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 보상으로 해골 녀석들을 돌려받을 수 있다. 이 말인가.’

    ―그 기록이 현재의 이야기를 주축 할 수 있는 주연이 보게 된다면, 자네가 말하는 11번째 여정의 길이 열릴 것이야.

    하나안스는 예언을 분석하고, 월키스는 트라튼을 가리키는 지도를 만들어냈다.

    베르히만의 상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애당초 일반적인 존재들은 그곳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현자가 덧붙였으니.

    ―자네와 가까운 곳에 꼭 데려가야 할 인물이 있다네. 이야기는 그를 끌어들일 것이고, 자네는 그와 함께하는 것이 올바를 테지.

    가까운 사람 중, 트라튼을 함께 가야 할 이가 있다. 렌이건 아이리스건, 여관의 동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따라갈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운명이 그를 이끈다.

    이야기가 그를 이끄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 프리실라도 고개를 흔들었다.

    ‘어떠한 곳이라도 따라가 도움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다만 그곳에 꼭 가야만 한다는 촉이 일찍이 오지 않은 걸 보아. …아무래도 이 프리실라는 아닌가 보군.’

    물론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명, 기둥에 몸을 기대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 란베르크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과연,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란베르크에게 주목을 하자, 녀석은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 7인의 영웅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란베르크. 저 그림을 심심하면 바라보곤 했지.”

    그랬다. 란베르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담소를 나눌 파트너 없이도, 늘 혼자 테이블에 앉아 케피탄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시선은 항상 7인의 영웅들이 그려진 그림을 향했다.

    물론, 영웅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아닌, 그중 베르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란베르크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언젠간 이야기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이 될 줄이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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