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205화 (205/222)
  • 205화

    * * *

    기억이 났다.

    아벨기우스 섬에서 만난 사내, 그는 아벨기우스를 향해서 열심히 검을 휘둘렀지만, 정작 아벨기우스는 그를 신경도 쓰지 않았지.

    ‘도리어 저주의 흔적 때문에,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가만 생각해보니 아벨기우스를 깨우건, 저 모험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오해를 사고 있던 찰나, 손을 흔들며 그 거인을 깨운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내였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노바인 하나안스의 자손, ‘노바인 하나로스’입니다.”

    하나로스의 입에서 ‘노바인’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자 입을 벌리는 아이리스였다. 애당초 고고학자 월키스를 직접 마주한 이래로 완전히 굳어있는 상태였다.

    렌이 팔꿈치로 아이리스를 밀어냈다.

    “뭐라고 말 좀 붙여 봐요, 아이리스. 늘 팬이라고 했잖아요. 아이리스보다는 어리겠지만, 인간으로서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이네요.”

    “…시, 시끄럽다. 고고학자 월키스를 직접 볼 줄은 몰랐거늘. 조금 놀란 것뿐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묘한 웃음을 짓는 렌, 아이리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다. 이를 지켜보던 월키스와 하나로스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고고학자 월키스 씨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아하하, 그렇군요. 제가 집필한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나이가 꽤 있으신 분들인데. 저런 여인께서, 아주 뜻밖입니다.”

    “나이가 많긴 합니다. …아마 월키스 씨의 서적을 읽는 독자 중에서 가장 연령층이 높겠죠.”

    “하하하, 장난이 과하시군요. 그 말은 곧 고대 엘프이거나, 용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겠네요. 물론 전자 쪽이겠….”

    “…후자 쪽입니다.”

    용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쪽. 고고학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월키스는 이 또한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같은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하, 그렇다면 저는 사실, 고고학자가 아니라 드래곤 슬레이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월키스. 피했던 시선의 방향은 창문이었다. 근사하던 마당에 웬 푸른 용이 물을 주고 있다.

    “…….”

    “여기 직원입니다. 보셨다시피 웨이트리스죠. 가끔 저렇게 마당에 물도 주고요.”

    “…아, ……그렇군요.”

    “나중에 말이라도 붙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학자님의 서적을 보면서 인류에 대한 지식을 키워갔으니까요.”

    자신이 걸어왔던 길.

    지고한 용에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생명체에게, 그런 존재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덧없이 뿌듯한 일이다.

    마당에서 물주는 푸른 용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월키스는 눈시울이 약간 달아오른다. 뿌듯한 표정과 함께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로스, 제가 무엇 때문에 곤란해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더군요. 과연, 어떻게 저를 도와주신다는 건지.”

    “물론, 저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리하고 싶지만, 제 능력 밖이니까요. 저는 그저 안내자일 뿐이지요.”

    하나로스의 손은 7인의 영웅을 향했다.

    “당신께서 주신 아벨기우스의 심장으로, 급작스럽게 단축되었던 할아버지의 수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신실한 마음, 여관을 위해 온갖 숱한 일에 덤벼드는 홉스의 눈빛과 유사했다.

    “결말과 가장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자, 노바인 하나안스. 저 그림을 빗어내신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노바인 하나안스는 인간이라는 종족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물이었으니, 언젠가는 명을 다해 숨을 거둬야 했다.

    그런 현자는 결말과 가장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며, 바뀌는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언젠가 연이 닿을 그 ‘때’를 기다린 것이다.

    ‘본래, 7인의 영웅이라는 작품에서, 저 후드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8번째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없던 인물이 그림에 나타났다는 것인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나로스였다. 어떠한 특이점이 이야기에 결합하여 결말이 바뀌었으니, 그에 따라 과거도 바뀐 것.

    ‘할아버지께서는 7인의 영웅들이 서사 속에서 사라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기에 급격히 생명력을 잃어가셨습니다.’

    그들의 서사를 사계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현자는 그들과 함께 존재의 의미가 흐릿해진다.

    언젠가 닿게 될 중요한 인연. 그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가 나타나, 그들의 이야기가 무사히 기록될 수 있게끔, 현자의 명을 조금이라도 늘려야만 했다.

    하나로스는 하나안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류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고대의 창조력을 보존한 아벨기우스의 피를 얻기 위해 떠난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 강함에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

    “그때, 아서가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7인의 영웅의 의지를 잇는 당신께서는 무의식적으로 인연을 만들었던 것이죠.”

    원인과 함께 결과가 동시에 나타난다.

    하나안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모순과 억지, 그리고 적절한 개연성을 찾아 서사가 이어진다. 아황이 말했던 것과 유사함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오고 싶어 하셨지만, 현재 할아버지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하나로스의 말에 월키스가 덧붙였다.

    “그렇기에 저희가 찾아온 것이지요. 현자께서 머물고 계시는 ‘흰 나비 숲’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흰 나비 숲’, 이는 일전에 아이리스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 일이라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으나, 분명 환계에 위치하는 곳이며, 그 기록도 월키스의 서적에서 단 한 문단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7인의 영웅, 대마법사 셀로닌 네르브리안의 마지막 행적이 있는 곳.

    예측하지 못한 단어가 귓가에 들리자, 반수면 상태를 유지하던 아황과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거의 잠꼬대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거긴 갈 수 없어, 음,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

    어느 정도 이들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까닭인지 월키스와 하나로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있는 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월키스였다.

    “아니, 이분들은 아황과 정령왕이잖습니까?”

    “네, 아황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 정령왕이라는 작자는 이 여관에 블랙리스트입니다.”

    월키스와 하나로스의 웃음소리가 여관을 울렸다. 아닌 척해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아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여관 내부를 들여다본다.

    * * *

    [ 환계 / 신기루(蜃氣樓) ]

    “자, 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시지요.”

    우물의 이름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

    깊은 우물을 천천히 내려왔건만, 기어이 다시 올라가라고 말하는 월키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꿍한 표정으로 다시 우물을 타고 올라오자, 마법처럼 거대한 들판이 펼쳐졌다. 이는 어떠한 마법적 장치가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다.

    “놀라셨겠지만, 역시 마법입니다.”

    “어쩐지, 아황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잠꼬대하던 이유가 있었네요.”

    그 언덕을 따라 쭉 걸어가면, 다시금 우거진 숲이 보인다. 이곳까지 이동하면서 느낀 바는 마력 유동이 약해진다는 것과 마력의 농도가 희미해진다는 것.

    ‘마력 유동이 일정하다고나 할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곳이군.’

    앞장서서 걷고 있던 하나로스가 숲의 입구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 작은 숲을 보며, 흰 나비 숲이라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흰 나비라는 이름으로 지으셨죠, 흰 나비가 어떤 상징을 가졌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서?”

    고개를 흔들었다. 흰 나비가 어떤 상징을 지니고 있는지 내가 아이리스도 아니고 알 리가 없었다.

    “흰 나비는, 셀로닌 네르브리안을 상징하는 생명체입니다. 그가 마법을 부리면 꼭 주변에는 흰 나비가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죠.”

    숲으로 들어가자, 신기루처럼 흰 나비들이 나타나 주위를 날아다녔다. 촘촘한 나뭇잎 사이로 작은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이 나뭇잎을 투과하여 은은한 청록색으로 번지며 지면에 내려앉는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7인의 영웅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결말과 가까운 미래를 들여다보는 자’가 필요했겠지만, 7인의 영웅이 남긴 기록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결말과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자신을 만나야만 할 것이라고.”

    노바인 하나안스, 단순히 현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7인의 영웅들에게 있어서 조언자의 역할을 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제 목적은 그저 셀로닌의 마법으로 탄생한 골렘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 해골들, …아니 골렘들은 저희 용사의 쉼터에 직원이자 식구이니까요.”

    하나로스와 월키스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그렇다면 그들이 남긴 새로운 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기록을 따라가는 것으로 할까요.”

    “그게 정확하겠네요. 저희 손님들은 녀석들이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여관을 위해서라도 사장이 발로 뛰어다녀야….”

    “용사의 쉼터는 아서의 상징이군요.”

    용사의 쉼터가 나의 상징이라.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묘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얼굴을 붉게 만든다.

    “아하하,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네요. 하나안스는 저곳에 계십니다.”

    하나로스가 가리킨 곳에 움집이 보였다. 그가 입구의 천막을 걷으며 안내했고, 조심히 그의 꽁무니를 따랐다.

    “……왔는가.”

    하나안스의 인사.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긴 세월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주변으로 날아다니는 정령들이 하나안스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느릿한 거동에 정중히 얕은 미소를 내보이는 현자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하나안스는 머리맡에 놓아둔 책을 건넸다. 턱을 들며 읽어보라는 시늉에 가볍게 종이를 넘긴다. 오래된, 아주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던 시기에 적어둔 것이지.”

    “세계의 끝, 그곳에서 모두 떠나보낸 바바비어가 말했다네.”

    “우리가 사라지고, 언젠간 우리의 의지를 잇는 여덟 번째 인물이 나타나.”

    “…잊혀가는 기록을 찾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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