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 *
이른 아침. 드래곤 길드의 일원들은 프리실라의 명령을 따라 훈련용 허수아비를 마당에 배치한 뒤, 배웅을 위해 대기했다.
“잘 다녀오게, 단장. 해골 녀석들, 그들의 희망은 단장이니까. 잘 부탁해.”
프리실라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했고, 지켜보던 란베르크는 고개를 끄덕인다.
심술궂은 표정으로 쳇, 같은 아니꼬운 소리를 내는 아이리스가 렌을 노려봤다.
“…특별히, 특별이다!”
본래라면 마도 연맹이 위치한 마계의 게이트 강까지 혼자서 다녀올 예정이었다.
당연하다시피 이를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 나는 어젯밤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 마리 용들에게 가위, 바위, 보를 권유했고.
푸른 용은 바위를, 붉은 용은 가위를 낸다. 근데 또 승자는 붉은 쪽이었다.
“마스터, 준비는 끝났어요. …그나저나 아이리스는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죠? 아직도 승패를 인정하지 못한 건가?”
분명 원칙적으로는 아이리스의 승리였다.
가위는 보를 이기고, 보는 주먹을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긴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사실.
다만, 때로는 가위가 바위를 이긴다는 것을 손수 보여준 붉은 용이다. 그러니까 바위를 상회하는 가위의 무력을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강력한 가위가 바위를 베어낼 수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라고, 푸른 용의 주먹을 두 손가락으로 으깨버린 붉은 용의 한마디가 어느 전사의 심장을 울리기까지 한다.
“어제, 그 승부는 실로 대단했다. 렌!”
“호호호, 승부가 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죠. 마치 프리실라처럼요.”
프리실라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델타의 바보.
그 옆으로 차가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아이리스는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은 듯했다.
“쳇, 짐이 특별히 양보한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나의 승리란 말이다. 붉은 용!”
식식거리는 아이리스가 달려들자, 렌은 팔을 쭉 뻗어 아이리스의 이마를 잡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하지만 아이리스도 제가 마브리우스에 있을 때, 마스터랑 함께한 시간이 많았으니까. 이번만큼은 양보해주셔야죠.”
용사의 쉼터에 거주하는 용들은 서열정리를 끝냈으니, 붉은 용의 말은 곧 협박.
불쌍한 아이리스, 그래도 ‘네 선조 드래곤 슬레이어한테 맞고 뒤짐’ 같은 소리는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렌, 해골 녀석들 손가락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가져가야 해. 확실하게 챙겼지?”
“전부 세어보니 1,442개였어요. 그럼 한 명당 206개겠네요. 마스터.”
어느새 붉은 용이 용사의 쉼터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 위로 백골을 포장한 보따리를 강하게 묶어 고정한다. 보따리를 짊어진 용이라.
…출발하자, 게이트 디 마나에게로.
* * *
[ 마계 동대륙 끝 / 마도 연맹(魔道聯盟) ]
익숙한 강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투명화 마법이 적용되어있었건만, 게이트 강의 근방으로 들어오자, 그 대단하다던 드래곤의 마법도 영역에 장치된 반격 마법으로 인하여 금세 풀리고 말았다.
추측이지만, 게이트 디 마나의 마법일 가능성이 높다.
“그 마법사,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편이네요. 드래곤의 마법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풀어버리는 이는 굉장히 드물거든요.”
“오죽하면 마리가 그러겠어, 사계에 존재하는 규격 외 등급의 인물이야.”
“…그러고 보니, 마스터도 EX등급으로 지정되어있지 않나요?”
그놈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온종일을 붙어 다니며 귀찮게 굴었던 때가 있었다.
유난스러웠던 이유는 아이리스가 ‘짐은 환계를 다녀온 덕에 임자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지.’라는 말이 렌의 심기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질투심 많은 붉은 용 때문에 그날의 여관 온도는 38도였다.
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아, 나 사실 천사야’라고 말했더니, ‘……역시’라는 반응으로 수긍했던 렌이었다.
아이리스도 렌도,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개체라 그런지 의외로 믿지 못할 것에 수긍이 빨랐다. 이 때문에 나는 적잖이 충격이었고.
“맞아, 내가 직접 그 등급을 지정받은 건 아니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복잡한 사람이잖아. 아무튼 그래, 창조주가 직접 페지르에 도래해서 전 교황에게 알렸다나, 뭐라나.”
용에서 인간으로 변한 렌은, 늘 그렇듯 여관의 유니폼을 착용한 상태였다. 조만간 내 유니폼을 바꾸든가 해야지.
“……역시 마스터는 경외의 존재세요. 근데 저도 그편이 더 좋긴 해요. 용은 언제나 자기보다 강한 개체에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죠. 제가 마스터를 사모하는 이유도 전…….”
대충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뿐히 무시하고서 강을 향해 걷는다.
뒤에서 ‘마스터, 같이 가요!’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 또한 가뿐히 무시한다.
“……휴. 너무하세요, 정말.”
“여기야. 아마 여기쯤이었어.”
“그런데 들어갈 방법은 있으세요? 마도 연맹만 입장할 수 있는 마법적 장치가 되어있다고, 마리가 그러던걸요.”
“그래서, 마리에게 이걸 받아왔지.”
나는 호주머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마스터, 저희가 준 팔찌는요?”
“자, 여기, 여기! 끼고 있어!”
“아하하, 정말이네요.”
아이리스와 함께 선물한 팔찌가 내 손목에 착용된 것을 확인하는 렌이었다. 애당초 마리의 팔찌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크흠, 아무튼 이 팔찌는 마도 연맹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증표 같은 거지. 일종의 열쇠라고나 할까. …자 이렇게 팔찌를 껴서.”
나는 소매를 걷고, 게이트 강에 팔을 집어넣었다. 마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마력이 강에 전달이 되면, 수면 밑으로 숨어있는 마도 연맹의 문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마력을 불어넣으면…….”
―쿠우우웅!
…쿠우우웅. 그런 소리가 났었나?
번외세계를 생각해보면 거대한 강이 가로로 쭉 갈라진 다음, 마도 연맹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이 나타나는 것이 전부다. 무미건조했던 강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마, 마스터?”
“…그래,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게이트 강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오고 있다. 그 수면 아래, 강의 반을 채우는 그림자가 서서히 올라왔다.
…――쿠우우웅!
그림자가 수면을 뚫고 올라온다. 웅장하고 어두컴컴한 그림자의 주인. 아무래도 우리는 게이트 강의 무언가를 깨운 것이 분명했다.
마치 환계에서 보았던 하늘 범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물며 크기는 렌이 용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보다 큰 편이다.
피부가 쭈뼛해지는 사나운 기운.
이는 포식자의 기운이다.
“마스터는 쉬세요. 제가 하죠.”
렌은 해골 신사들을 담아놓은 사람만 한 보자기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마스터도 느끼셨겠지만, 저 무지막지한 마력 유동을 보았을 때, 성체 드래곤과 수준이 비슷할지도 몰라요.”
렌은 가벼운 몸짓으로 폴짝폴짝 뛰며, 게이트 강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뱀을 바라봤다.
새하얀 비늘, 빨갛게 달아오른 눈, 저것에서 느껴지는 마력 유동은 확실히 여태 만나왔던 개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 * *
먼저 간 보기 식으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며, 거대한 뱀에게 뛰어드는 렌이다.
박차를 가했던 지면이 깊숙이 꺼진다.
―콰직!
하얀 뱀 앞으로 마법 장벽이 생성되어, 렌의 일격을 단숨에 막는다.
웬만한 마력결계도 단숨에 파괴해버리는 드래곤의 일격을 피해 없이 막아낸 것이다.
“그래,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소리구나.”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낸 렌은 마력결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허공에서 여러 번 주먹질했다.
―콰직, 콰직!
마력결계를 유지하던 에너지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유리 깨지듯 박살 난다.
그 사이를 비집고 온몸에 화염을 두른 채 하얀 뱀의 미간을 정확히 강타했다.
“뭐, 뭐야.”
꿈쩍도 하지 않는 하얀 뱀, 붉은 눈으로 렌을 무섭게 노려본다.
저 주먹을 맞고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성체인 드래곤, 그것도 붉은색 개체의 드래곤 앞에서 여유를 보인다.
―쾅!
하얀 뱀이 렌을 향해 강하게 쇄도한다. 마력을 실어 양팔로 방어했지만, 상회하는 무력으로 인해 지면으로 처박히는 렌이었다.
“……렌!”
렌은 움푹 파인 지면으로부터 몸을 털고 일어섰다. 뭔가 이상하다. 저 하얀 뱀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다.
“마스터, 저 하얀 뱀 말이죠. 이상해요.”
“네가 쉽게 나가떨어질 정도면, 이상하지.”
렌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노려봤다. ‘흠’ 같은 소리로 시선을 회피하자 녀석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타격감이 없는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면, 접촉 자체도 불가능했고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붉은 용의 마력 유동.
대충 녀석이 무슨 요지로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공기가 아까보다 배로 먹먹해질 정도로 마력의 농도가 짙어졌다.
“…잠깐, 진심으로 상대하겠다고?”
“아하하, 물론 마스터의 허락이 중요하죠.”
과연, 고개를 끄덕여도 되는 걸까.
렌이 만약 진심이라면, 끓어오르는 불꽃으로 이 강을 완전히 기화해버릴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웬 드래곤이 용사의 쉼터에 나타나 마당을 쓸어버린다면 가만히 있을 여관주인은 없다.
…웬 드래곤이 마도 연맹에 나타나 강을 쓸어버린다면 가만히 있을 마법사도 없겠지.
이미 기괴스러운 소리를 내며 용으로 변해가는 렌의 그림자 옆, 게이트 강을 가득 채운 뱀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뭔가, 웃잖아.’
저 하얀 뱀.
사람처럼 자꾸만 실룩샐룩 웃는 기분이다. 인간에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렌이 살벌한 마력을 뿜으며, 허공으로 부유했다.
「하여간 몰상식하다니까. 이봐, 붉은 용. 진심으로 할 생각이라면 관둬, 여기까지니까.」
하얀 뱀이 마력 파편을 흩날리며 일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파편 속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팔과 다리에는 마법술식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문신으로 잔뜩 새겨져 있었다.
한 사내는 분홍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게이트 강 위로 유유히 착지한다.
“내 제자가 찾아온 줄 알고, 조금 골려주려고 했는데. 마리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웬 이상한 녀석들이….”
분홍 머리의 사내는 다소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향해 직시했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가리켰다.
찌푸린 미간에는 더욱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렇게 말을 덧붙인다.
“마리의 팔찌를 차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