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 *
장황한 빛이었다.
사라져가는 가르강티아로부터 퍼진다. 그 찬란하고도 더러운 빛에 눈을 가리는 지상의 인물들.
가르강티아의 거대한 육체가 허공에 맴돌며 으스러졌다. 파편은 찬란한 빛 사이에서 끝없이 피어올랐다.
매정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 비르테리아가 그 속에 보였다. 아서를 바라보며 이윽고 입을 연다.
“결국,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사라져가는 비르테리아를 노려보는 아서, 그 반응에 쉰 소리를 내며 웃어 보이는 비르테리아.
방법은 하나.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 이상, 이 세계에는 창조주라 부를 것이 없겠군. 네 녀석의 신도, 내 신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하나, 그것이 꼭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비극에는 희망이 있는 법이고, 희극에는 절망이 있는 법이니까.”
저 신의 기계적 장치는, 저 여관을 운영하는 사내는 또 다른 모험을 한 것이다. 그 모험에서 열 한 개의 여정을 극복하고, 주연이 된 것.
“미지의 관측자들이 네 녀석을 더 좋아했나 보군, 여하튼 변덕이 심한 양반들이야.”
그들이라고 부르기에도 뚜렷하지 않은 무언가. 미지의 관측자들이라 일컫는 이야기를 유지하는 힘.
“네 녀석의, 11번째 여정은 무엇이었나.”
그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일화는 자신의 모든 창조력을 소비하여 저 사내가 활동할 수 있을 세계를 재창조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연으로 전환되어 버린 저 사내가 비극을 원하는 것이 아닌, 희극을 원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11번째 여정이라니.”
아서는 비르테리아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비르테리아는 그 물음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11번째의 여정 말이다.”
모른다. 새롭게 이 이야기의 주연이 된 저 사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동공의 미세한 떨림,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는 저 입술.
저 사내는 열하나의 여정을 알지 못하고 있다.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것들 중 가장 깊숙이 숨겨진 열매를 모르고 있다.
혹시 모를 이변을 만들어 낼 여정, 이 비르테리아는 결국 찾지 못했지만, 과연 저 사내는 찾을 수 있을까.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건 10가지의 원형일 텐데. 무슨 헛소리를…….”
말을 잇지 못한 채, 비르테리아는 완전히 소멸한다. 푸르른 창공 아래에서, 가장 어둡게 물들어갔던 비극이 완전히 걷힌다.
“어이 이봐, 무슨 헛소리를…….”
* * *
희극이 찾아왔다.
붉은 기운과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자, 보란 듯이 평화를 야기하는 하늘이 나타났다.
절망을 토하는 구멍은 사라졌고, 그 구멍의 주인인 가르강티아마저 완전히 소멸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많은 이들은 훗날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다시금 도래한 절망을 토하는 구멍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 사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운명에 맞선 이들.’
이 위대한 시대를 지키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는 햇볕에 몸을 맡겼다.
델타 베를리, 분명 후세는 운명에 저항했던 이 여인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녀는 아베스타의 함선에서 이 시대를 바라봤다. 더 이상 애처로운 눈빛이 아닌, 굳은 각오가 담긴 신념이다.
―파괴된 성벽, 여전히 피어오르는 연기, 부상을 입은 채 히죽하고 웃어 보이는 병사들, 부러진 칼날, 이가 닳은 화살, 치유를 위한 마력 빛, 지면을 파고든 거대한 구멍.
‘……그리고 또.’
―황제의 성채로부터 떨어진 부산물들, 꺾여나간 정체를 알 수 없을 보라색의 깃발, 비르테리아, 역사에 길이 기재될 폭군의 전쟁.
‘비록 잃은 것은 많으나, 우리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 테지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서진 것은 다시 고치면 된다.
이미 나가떨어져 버린 병사들의 칼날은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델타에 많으니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갑옷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손에서 고쳐질 수 있을 것이라면 그 무엇인들 다시 세우고, 보강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제국이라고 불리었던 데크 에던의 망가진 성채 또한 다시 올리면 그만일 것이다.
베를리는 인파가 모인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반가운 얼들이다. 그리고 익숙한 얼들이다.
여관주인으로부터 그 주위를 에워싼 이들. 렌과 아이리스, 란베르크, 프리실라, 레니, 브라운, 쥬드, 그리고 백골의 신사들.
…분명 일순이었지만, 은빛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어느 여인까지. 아서의 방에서 보게 된 사진 속의 어느 여인이었다.
저들이 있기에, 더 이상의 사계에는 비극이라는 것이 도래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남는다.
‘설령 그것이 다시 찾아오더라도, 그때는 다를 것이라고. 이 베를리가 맹세합니다.’
마리 페르세포 아베스타, 마계의 통치자가 베를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의미는 생각보다 넓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마계와의 화합, 어쩌면 델타가 이번 기회에 대제국이 되어, 서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강대국으로서 사계의 선봉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고가 많았네, 베를리.”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 정말 감사합니다. 제국은 현 통치자인 마리의 고노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언젠간 다시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자고, 마왕은 이만 떠나가도록 하지.”
지상까지 함선의 고도가 낮아지자,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아서 일행에게 달려가는 베를리였다.
이를 향해 멋스럽게 웃어 보이는 마리, 거대한 마계의 함선이 다시금 천공으로 굉음을 내며 비상하더니, 유유히 사라진다.
“그만, 그만.”
“마스터, 마스터….”
아서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땀과 피로 잔뜩 물들인 셔츠에 얼굴을 비비며 잔뜩 그 호감을 표하는 용들이었다.
그 모습에 질세라 이성 남성 구분 없이 아서에게 달려드는 이들.
쿵, 하고 지면으로 넘어진다.
쥬드가 거대한 몸으로 아서를 짓누르니, 그 위로 작지만 풍채가 뛰어난 브라운이 뛰어든다. 그 사이로 어렵사리 얼굴을 꺼낸 레니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잠, 잠깐! 이 사람들이 정말 이러다 깔려 죽는다고요! 렌이나 아이리스는 용이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인…… 잠, 잠깐 프리실라!”
프리실라도 그 위로 뛰어본다. 귓가에는 이미 아네스가 얼른 저들을 덮치라고 했으니, 지면을 밟고 폴짝 뛴 지가 오래다.
“그러지 말고, 네 녀석도 얼른 뛰어보지 그래. 잔뜩 뛰고 싶어 하는 얼굴이군. 우습게도.”
모르딕 아젤은 팔꿈치로 란베르크의 허리를 쳤다. 아까부터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언제 뛰어들지 눈치를 보고 있는 친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쳇.”
발그레 얼굴이 붉어진 채, 모르딕 아젤을 슬쩍 노려본다.
결국엔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가득한 인간 뭉치 사이로 가볍게 뛰어보는 사내였다.
* * *
“임자, 그리고 저 녀석들….”
인간 무더기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나를 향해 시선을 옮기는 아이리스였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손가락으로 해골들을 가리킨다.
“제길, 성해 보이는 곳이 없잖아. 게다가… 마법이라도 사용한 건가, 어째서 마석에 내재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마법이라도 사용한 건가, 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녀석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상급 마석.
저 친구들의 미간 위, 박혀있는 마석은 일반적인 마석이 아니다. 적어도 S등급 이상으로 측정받을 수 있을 고가의 물건.
마석이 고가의 물건이면 그 효과도 당연히 마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마법사가 아닌 전사들을 불문하고도, 시전자의 체내 마력을 몇 배까지 증폭시켜주거나 주문력을 높여주는 물건이다.
‘…녀석들에게는 그런 용도로 사용될 수 없겠지만.’
우리 여관의 멋진 일꾼들께서 마법을 사용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습득을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저 마석을 태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마법이라면 최소 상급 마법사 여럿이 발동해야만 하는 ‘화마의 기둥’은 되어야 할 것이고.
인간 무더기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던 란베르크가 아이리스와의 대화를 들었는지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혼수상태에 빠지셨을 때였습니다. 저희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마 선생님도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란베르크는 움직임이 둔해진 해골들을 향해 걸어가, 부족한 마력을 불어넣는다. 녀석 또한 마력이 부족한지 약간의 휘청거림이 보였다.
“이들은 7인의 영웅들의 모습을 하고, 선생님을 지켰습니다. 아이리스가 변장마법을 적용한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죠.”
7인의 영웅들, 7인의 해골. 앞 숫자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다.
하물며 번외세계에서는 아템이 관계가 있을 것 같다며 추궁을 했을 때가 있었다.
“매번 달그락 소리밖에 내지 못하던 녀석들이, 임자를 지켜야만 한다고. 인간의 말을 하였다. 뭐랄까, 마치 바바비어의 목소리로 말이지.”
턱을 쓰다듬는 행위로 고뇌에 빠져있는 아이리스의 모습이었다. 이어서 이들에게 적용되어 있는 마법이 「기억 형상화 마법」인 것 같다며 덧붙였다.
“기억 형상화 마법?”
“그래, 초월 마법이다. 그것도 ‘존재하지 않을’ 마법이라는 말이 학계에서 떠들썩하지.”
기억 형상화 마법, 이는 아템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어쨌거나 저기 저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부분이다.
나는 서로의 등에 기대어 원형을 이룬 채로 앉아있는 해골들에게 다가갔다.
“캡틴.”
“달그락.”
마석의 영롱한 붉은빛이 흑색으로 그을렸다. 얼마나 마찰이 강력한 마력 유동이 일어났으면, 마석 주위 이마까지 그을려있다.
“7인의 영웅이라니, 무슨 말이야.”
“달그락?”
캡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게 무슨 헛소리야’라는 표정, 아니 제스처를 보였다.
녀석들과의 대화 이해도가 가장 높은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제스처였다.
“모른다는데?”
“으윽! ……분, 분명!”
안다. 아이리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게다가 란베르크도 이에 대해서 수긍했다.
해골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가족이다. 나를 도왔던 이유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 다만 7인의 영웅들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알아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무릎을 누르며 일어난다.
해맑게 웃고 있는 렌이나, 캡틴의 반응 때문에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리스나. 모두가 용사의 쉼터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녀석들의 마석도 교체해주고, 천천히 알아보자, 이제 우리 시간 많으니까.”
이제는 평화가 찾아왔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브라운 아저씨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오늘 밤, 용사의 쉼터. 여관 창업 이래 가장 큰 파티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