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97화 (197/222)
  • 197화

    * * *

    ―Protagonist : ‘Arthur’

    ―Antagonist : ‘The Prologue’

    * * *

    [서대륙 델타 / 황제의 성채]

    시간은 멈춰있다.

    허공에 떠돌던 퀴퀴한 전장의 냄새, 피와 철, 화약, 공성마법의 부산물들, 사악하고 기괴한 모습을 지닌 절망들.

    그리고, 그사이 운명에 저항하는 인류, 온갖 감정이 섞인 멈춘 표정들, 하나 빠짐없이 완전하게 중지했다.

    ―똑, 소리를 내며 베를리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 멈춘 시간은 반응한다.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서서히 생명력을 지닌 자들이 꿈틀거렸다. 쥐었던 검을 더욱 강하게 쥔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굳었던 시간이 부드럽게 굴러갔다.

    “…제, …바알, ……일어나!”

    초점을 잃은 아서를 향해 일어나라고 소리쳤던 레니의 목소리가 다시 허공에 울려 퍼졌다. 모든 것들은 본래의 움직임을 되찾는다.

    ―쾅!

    그 웅장했던 황제의 성채가 절반도 남지 않은 채 무너졌다. 묵직한 성채의 파편이 지상에 떨어지자, 먼지가 태풍처럼 터진다. 델타의 병사들은 입과 눈을 가리기 바쁘다.

    그 와중에도 달려드는 절망으로 인해, 칼을 전방으로 휘두르는 것은 이미 몸에 익숙한 듯하다.

    ―뚝, 뚝.

    비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빗물이 지상을 적시며, 질척한 싸움으로 이어진다. 피와 섞여 더욱 비릿한 향이 허공에 퍼지자 절망은 더욱 날뛰기 시작한다.

    절망을 토하는 구멍으로부터 그 거대한 몸을 꺼내, 인류 말살이라는 사계의 비극 그 자체인 가르강티아가 수많은 절망들을, 심연을 지상에 토해냈다.

    “젠장!…….”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끝이다. 비극의 구멍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절망이 쏟아졌고.

    가르강티아는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저 거인의 가벼운 움직임에 대응하는 이들은 쉽게 죽어 나갔다. 생명이 휩쓸려 나갔다.

    『…….』

    제가 원하는 결말과 가장 가까운 비극을 실현하고 있으니, 그 비극이 현세에 도래하고 있으니, 웃어야 마땅할 비르테리아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

    시간이 멈추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비르테리아는 이전과 달리 허공에 떠도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이 이야기의 첫 도입부이자, 마지막을 결정하는 창조주, 아니 세계관 자체는 자신과 동조했을 것이다. 결말 가르강티아와 동조했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사계가 멸망하기는커녕 기적이 허공에 떠도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눈은 신묘하다. 인류는 보지 못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비극을 이끌어갈 주연으로서 어느 곳에 기적이 있고, 어느 곳에 비극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이 이야기의 주연이 아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미 사계는, 이야기는 온전히 이 순간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정해진 주연을 더 이상 바꿀 수 있을 말도 안 되는 모순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저 녀석, 그렇군. 저 녀석들이군.』

    7인의 영웅, 그들의 잔재. 결말을 유도하는 장치를 보호하고 있다. 마치 사명처럼.

    『결말을 유도하는 장치가, 바뀌어버린 결말로 유도하고 있는 것. ……그럴 순 없으리라!』

    가르강티아와 융합된 비르테리아는 거대한 손으로 지상을 내려친다. 저 결말을 유도하는 장치를 지키고 있는 것들을 향해.

    ―콰쾅!

    붉은 용이 거대한 주먹을 막아선다.

    그 주변으로 7인의 영웅들이 사내를 지키고 있다. 검객과 여전사가 막아섰다.

    이들이 결말과 조우한다. 바뀌어버린 결말, 이야기는 전례 없던 희극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럴 순 없다!!!!!』

    폭음과 괴성이 황제의 성채 전체를 울렸다. 이 전장에 올라선 수많은 인물들, 비극에 저항하는 자들은 영혼 속, 작은 희망을 피워냈다.

    멀리서 날아오는 인류가 내뿜는 갖가지의 마법들이 가르강티아를 향해 쇄도했다.

    아무런 미동도 일으키지 못한 채, 허공에서 마법이 소멸하거나 닿아도 의미 없을 그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윽고 가르강티아는, 비르테리아는 구멍에서 쏟아지는 절망들과 지상에 놓인 절망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빨아들이는 모습은 구멍과 그지없는 모습이다.

    『……버러지 같은 네 녀석들에게 한낱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것도 일순일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비르테리아의 얼굴이 가르강티아 속으로 완전히 묻혔다. 이윽고 점점 커져 가는 가르강티아는 칠흑의 은하를 뒤집어쓴 듯, 검게 물든다.

    기괴한 양태, 쳐다보기 괴로울 정도로 심각한 공포감, 섭리를 거스르는 비극은 인류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 비극은 다시금 사내를 향해 어두운 기운을 둘러싼 거대한 주먹을 내려친다.

    ―콰앙!

    혼신의 일격을 가하는 란베르크, 프리실라, 모르딕 아젤. 모든 마력을 쏟아내 일생일대의 검기를 던진다.

    ―흐아아아아압!!

    콰직. 세 개의 거대한 검기가 비극의 손에 닿자, 간신히 그 궤도가 뒤틀린다.

    아주 미세하게 뒤틀린 손아귀가 사내의 오른쪽으로 빗겨나가 일행들의 피해를 어렵게 막는다. 지상의 부산물들이 사정없이 흩날린다.

    거친 호흡을 내쉬던 세 명의 검객은 모든 마력을 쏟아냈기에 맥없이 쓰러진다.

    “…프, 프리실라! 아젤! 란베르크!”

    푸른 용은 세 명의 검객에게 다가가 이들을 살폈다. 레니가 치유마법을 사용하자, 정령왕을 포함한 정령들이 마력을 전달한다.

    빗겨나간 주먹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금 인류에게 떨어지는 심판처럼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마왕 아베스타는 체내에 있는 마력과 별안간 공기에서 소생되는 마력을 끌어모은다.

    이어서 아서 일행의 앞으로 마력 장벽을 넓게 펼쳤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 장벽은 겹겹이 중첩되어 비극의 일격을 막아설 준비를 끝마친다.

    콰지직!――….

    마리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 비극의 손아귀는 무정하게 마력 장벽을 꿰뚫는다.

    그곳으로부터 터지는 풍압이 사방으로 태풍처럼 퍼지자 마계의 함선이 기울었다.

    닿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저 손아귀가 아서를 향해 닿을 것이다.

    달그락――.

    7인의 영웅들이 떨어지는 비극의 손아귀를 향해 몸을 던진다. 붉은 용 앞으로 일그러지는 그들의 그림자가 손아귀로 인해 흩어진다.

    그들로부터 퍼지는 빛은 무정하게 사라진다. 마치 인류가 가진 희망이나 기적 따위를 응원하는 듯.

    “……망자들아! 망자들아!”

    비극의 손아귀를 막아선 7인의 영웅들, 아니 해골들은 그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진다.

    비극의 일격을 다시금 막았다는 기적을 선보였지만, 해골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 결국은.”

    “…이렇게 사계가 끝나는 것인가.”

    아이리스는 탄식했다.

    그나마 회복에 성공한 붉은 용. 렌도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보였다.

    허공으로 돌아가고 있는 저 비극의 손아귀는 다시금 우리를 향해 쏟아질 것이다.

    자욱한 그림자가, 희극을 꿈꾸었던 자들을 서서히 덮어왔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정해진 바, 이 이야기는 반드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며. 그림자가 자욱하게 머리 위로 뒤덮인다.

    아이리스의 질끈 감은 눈은 맞이할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비로소 인류를 다시금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용사의 쉼터, 그곳에 있으면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는데.

    ―다들, 정말 고생 많았어.

    질끈 감은 눈.

    머리맡 위로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자주 느껴볼 수 있었던 익숙한 것이었다. 따뜻하고, 상냥한 어느 인간의 손이다.

    ―지금부터는 내게 맡겨.

    감은 눈을 천천히 떠올리자, 그토록 기다리고 염원하던 자가 있다. 진즉 이를 알고 뛰어온 렌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기 바빴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던 레니는 눈물을 터뜨렸다. 이어서 아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힘들게 남겨 뒀잖아요. 막타.”

    * * *

    이야기는 결코 인물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바퀴를 상실한 자동차, 날개 없는 새, 유사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들.

    비극이 있다면, 좋을 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모험을 했다면, 그 보상이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야 한다. 시간, 추억, 굳이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돌아오는 것은 있다.

    귀찮다고 미루어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도피를 위했을 뿐. 일화에게 윽박지르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질끈 누르고 예민해했다.

    아서는 허공에 떠 있는 비르테리아, 결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 끝났어,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네 녀석은 희극을 위한 종장일 뿐, 이제 이 이야기의 주동자는 내가 되었으니까.

    델타의 시장을 걷는 사람들, 마차가 지나가면 일어나는 먼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수많은 새들.

    땅과 나무의 마찰, 케피탄 맥주를 잔뜩 실어다 그 물건들을 끄는 로건의 수레바퀴, 그리고 말발굽의 조화.

    그 모든 것들이 그립다.

    아서는 다시 내려치는 비극의 손아귀를 심판의 검 아네가브로 잘라냈다. 그 거대한 손이 잘려 나가자 일순 소멸한다.

    ‘끄, 끄떡도 없던 가르강티아가, 맥없이 잘려 나갔어.’

    렌의 한마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아서를 주목했다. 아서가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아서는 인류의 것과 다른 미지의 기운을 두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우리와… 같은 느낌.’

    아서는 바닥을 박차고, 비극을 향해 뛰어올랐다. 내 육신에 붙어있는 이 양팔, 더 이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마안의 뭉치 따위는 없다.

    ―그리고, 이제는 아템도 없어.

    은빛의 기운을 두르고 가르강티아에게 쇄도하는 아서, 분명 많은 사람들은 목격했다.

    아서와 함께 아네가브를 쥔, 어느 은빛 머리의 여인이 그를 돕고 있다는 것을.

    그 잔상이 아서 주위를 맴돌며 비극을 향한 일격을 함께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야기 그 자체에서 이끌어가야 하니까.

    ―나도, 세계도 기계장치와 같은 수단에 다시는 의지하지 않아.

    마치 하델의 마안처럼, 아서는 가르강티아의 가슴을 꿰뚫고, 덧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붉었던 하늘이 메르헨에서만 볼 수 있다던 황천의 하늘같이 푸르게 펴진다.

    그 하늘을 부유하는 사내의 등.

    델타제국, 어느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용사의 쉼터라는 여관을 운영하는 사내의 등에는 세계의 유산이 나타났다.

    이가 말하는 의미는, 그가 이 이야기의 주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

    세계의 유산이 나타내는 문양으로는 ‘프리게가’, 고대어로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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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일에 가려진, 8번째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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