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96화 (196/222)
  • 196화

    * * *

    [Return Scenario (16) ― 말쿠트(Malkuth)]

    말쿠트(Malkuth)

    케테르와 나란히 선 자, 또 다른 메타트론.

    미지의 나무, 가장 아래에 위치한 원형. 신의 기계적 장치의 역할을 맡은 찬란한 빛 케테르가 방출하는 힘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주연의 관문이 되기도 한다.

    찬란한 빛을 내는 왕관을 쓴 여인을 의미하기도 하는 ‘말쿠트’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든 모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멸된다. 말쿠트와 가장 가까운 자, 그 반쪽을 채울 수 있는 영혼과 함께 전혀 모순되지 않은 비극을 양단함으로써.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노르트와 아템의 과거 中

    이야기의 비극, 가르강티아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 노르트와 아템. 이들은 메르헨의 넓은 들판을 걸어갔다.

    “그분들이 오셨어.”

    메르헨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은 인파 속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많은 세월을 거듭한 노인이 입을 연다.

    ―황천에서 두 천사가 모든 비극을 막고, 날개가 다쳐 떨어지니. 두 천사의 휴식을 위해, 이 섬은 수많은 꽃을 피워놓고 그들을 맞이하리다.

    “메르헨.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들이 찾아오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향할 생각이신지?”

    황천에서 떨어지는 천사들의 휴식을 위한 섬, 영혼의 안식처. 이곳의 도래한 전설은 메르헨을 유지하는 근본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이곳에 머물러,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괜찮다면….”

    “부디 그렇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언제나 당신들의 신화를 기억하고 있으니, 이곳에 남아주신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지요.”

    거대한 나무상자를 든 사내들이 나타나 이들 앞에 그것을 놓아둔다. 소리가 꽤나 묵직했다.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종족은 외부와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이곳은 ‘상처받는 일에 지친 영혼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와 머무는 곳’이리라.

    “그곳이 있게끔 해준 당신들의 전설은 저희에게 있어서 잊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템은 상자를 열었고,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눈이 커진다. 작은 목소리로 노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금이다. 노르트.”

    “금? …아니요,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아템이 노르트의 발 뒷부분을 살짝 걷어차며 얘기했다. 힘이 풀려 고개를 들썩이는 노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템을 노려본다.

    “전설을 믿는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지.”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메르헨의 모든 사람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둘은 메르헨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노르트와 아템은 메르헨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달리 이들과 친했던 에르미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저는 에르미, 이곳의 정원사죠. ‘전설’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사계를 지켜줘서 고마워, 친구들.

    늘 메르헨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과 식물을 관리한다고 바쁜 정원사 에르미.

    황혼의 숲을 다녀올 때면 그들에게 꽃을 선물로 주곤 했다. 어쩌면 습관이 되어버렸을지도.

    품에 수북하게 채워온 꽃들을 던지면, 노르트와 아템은 꽃 무더기에 쌓여 미소를 보였다.

    황천의 하늘.

    넓게 펼쳐진 들판 위에 에르미가 건네준 꽃들을 심어갔다. 이들은 황천의 하늘 아래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온 우주를 담아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템은 노르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르트는 아템에게서 나는 묘한 향을 좋아했다. 구멍 속에서 맡았던 지독한 향과 달리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향이었기 때문이었다.

    “머리 치워, 뭐 하는 거야.”

    “그대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 노르트.”

    “글쎄,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닌데.”

    “그렇담… 그래, 그대가 내게 기대는 것도 무척이나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노르트와 아템의 손등, 서로를 연결해주는 문양, 이전과 달리 맹렬하게 피어오르던 빛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메르헨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랬다. 문양은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꼭 이들의 이별을 암시하는 것처럼.

    밤하늘의 별무리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반딧불은 이들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아템의 손등 위로 반딧불이 앉는다. 반딧불이 손에 앉자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였다.

    아템은 머나먼 지평선 끝을 바라본다.

    알량한 신의 기적을 품고 있으나 온갖 수렁을 겪으며 피를 흘리고, 흘리고.

    또 부활을, 부활을 반복했던 지옥 같던 구멍 속 이야기가 끝이 났지만, 차라리 그것을 반복해서라도 함께 있길 바라보는 아템이었다.

    그것을 반복할 때, 늘 곁에 있었던 것은 노르트였다. 나는 노르트의 희망이자, 유일한 친구이자, 전우이자, 내 반쪽이자, 그가 가진 모든 것에 가까운 무언가.

    “그대와 함께라면, 설령 구멍이라도 좋다.”

    중략, 서로의 영혼을 보듬을 수 있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이어서 아템은 자신이 곧 영면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는 그들이 고대했던 여행을 준비해야만 한다.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서 나오면 반드시 떠나자던 그 여행이었다.

    아템은 거대한 행낭에 굳이 필요 없을 물건까지 담는다. 메르헨 사람들이 챙겨준 것으로, 그 마음을 무시할 순 없으니. ‘고마운 사람들’이라며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아템이다.

    외부에 세워진 마차의 바퀴 따위를 정비하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노르트를 향해서 창가 사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아템이었다.

    “노르트, 슬 들어와서 식사하지.”

    식탁에 앉았지만 사형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뭘까, 노르트는 음식의 원재료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가져다 댔지만 애꿎은 코만 괴로워질 뿐이다.

    그 모습을 보던 아템은 웃음이 절로 났다.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되잖아.”

    눈에 별을 머금은 아템의 눈동자는 노르트를 향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노르트는 아템의 시선을 피할 뿐이다.

    “그럼, 분명 좋을 거야.”

    * * *

    [비극, 절망을 토하는 구멍 – 가르강티아]

    .

    .

    .

    어두운 그림자를 가득 채운, 그리고 붉은 기운이 하늘을 무정하게 태우고 있는,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었다.

    비극을 몽땅 섞어둔 결말은 형태를 이뤄, 언젠가 이 이야기를, 사계를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그 도래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소멸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아템과 나는 이로부터 두 번째다.

    이전과 달리 결과가 다르다는 것만 빼면 그리 다를 것도 없다.

    가르강티아와의 첫 조우를 생각하면 그리 깔끔하지 못한 일 처리였다. 삶에 요행을 바랐던 때가 있었다면 그때였겠지.

    요컨대 요행을 바라게 되면,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겐 그 요행이 차라리 나았다. 역시 나았던 것이다.

    “……아템.”

    흐리멍덩한 아템의 눈, 동공의 색이 묽게 번져갔다. 그 슬픈 눈으로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꽉 쥔다. 쓰러진 아템을 꽉 쥔다.

    “아템, 전부 끝났어.”

    “……아, 그래. 끝났군. 저 녀석을 창조한 신은, 골라야 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일지도.”

    가르강티아는 파편을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금 부활한다는 끔찍한 상상을 할 필요도 없이 완벽히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아템이 소멸하지 않게끔 봉인이라는 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으니, 분명 완벽한 일 처리다.

    “……아서.”

    녀석은 무겁게 들어 올린 손으로 내 뺨을 만졌고, 역시나 우리를 잇는 문양은 사라져갔다.

    뚝, 그렇게 떨어졌던 내 눈물은 자꾸만 아템의 얼굴을 괴롭힌다. 뚝, 하고 계속해서 아템을 괴롭혔다.

    “역시 쉽지 않아. 이런 기분은 쉽지 않다고.”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 사이로 비친 푸르른 밤하늘. 완전히 검게 그을린 구멍 사이에서 새 빛을 뿜어낸다.

    “다시 말하지만 고마워, 내 동료가 되어줘서.”

    소중한 물건을 드디어 찾은 것처럼, 아템은 계속해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이러다가 닳겠다고 장난을 치다가 입을 꾹 닫는다.

    아무래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오열 때문에 남은 대화를 놓칠 수 없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계속 찾고 있었어.”

    “네가 왜 내게 소중했는지.”

    이 흐리멍덩한 눈은 똑똑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다. 곧 사라져갈 것만 같은 육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흐리멍덩해도, 별무리를 닮아있다. 그 별무리의 주인인 아템은 내게 소원했다.

    “……나도 데려가 줘.”

    “…아서가 바라는 엔딩으로.”

    피로 쓰라릴 것 같은 녀석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사실 닦아주는 것도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응, 꼭 데려다줄게.”

    “용사의 쉼터에.”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

    선명한 네 목소리. 어쩌면 나를 닮은 모습인, 또 다른 나 자신, 반쪽으로 가득 채워진 네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서히 재가 되어 별빛 아래서 흩날린다.

    아템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전할 말을 위해 힘을 아끼는 것이다.

    피곤했던 녀석은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는다. 털썩하고 힘없이 바닥에 축 처진다.

    “……내게 별은 말이야.”

    그 아름다운 것은 고개를 들었다.

    가까웠다. 내 두 눈에 그녀가 가진 흐리멍덩한 두 별이 닿을 것만 같다.

    듣기 좋은 음성과 함께 귓가에 스며든다.

    그치지 않던 내 비극이 이제야 멈출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대였어, …아서.”

    용사의 쉼터, 그곳은 우리가 낳은 낭만이 있는 곳. 역시 낭만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낭만을 우리만의 방식처럼 어느 곳에서 잔뜩 즐기고 말았으니.

    그래서, 네가 그곳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도 전부 이해할 수 있다.

    꼭, 프리게와 함께 호숫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은색 빛의 장검을 내 여관에 둘 것이라.

    그렇게 나는 네 소원을 이룰 것이다.

    .

    .

    .

    ‘일화 끝’

    Per ardua ad astra.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