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93화 (193/222)
  • 193화

    * * *

    [Return Scenario (13) ― 호드(Hod)]

    호드(Hod)

    완벽한 자웅동체, 은밀한 영광.

    미지의 나무, 신의 정의와 자애 아래 왼쪽 원형. 그것은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영광을 원천으로, 이성과 감성을 오가며 자웅동체의 애매한 형체를 유지하고, 나뉘어 있다.

    은밀한 곳에 근본을 의미하기도 하는 ‘호드’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순을 억제함으로, 그 영광과 이성적, 감성적 원리는 억제함과 동시에 소멸된다. 호드의 자웅동체가 낳은 꽃을 섭취했던 불가항력의 남자로부터.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 천계 어딘가 / 파르파르 대지 ]

    발프레가 지니고 있던 열매를 얻자, 하늘을 바라보는 베를리였다. 아템과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에 난처해하던 우리를 보며 도와주겠다는 렌이었다. 고맙게도 그 덕에 천계까지 수월하게 도착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템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여관이었더라면 렌 VS 아템 VS 아이리스, 라는 구도를 만들어 내기 충분했다.

    “고마워, 렌.”

    『아녜요, 덕분에 저도 발프레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제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고요. 하하.』

    “미안하지만, 그 저주마법을 파괴하기 위해 미르라힌을 꺼낸 것은 이 아템이다. 붉은 용.”

    『……네에, 그렇군요. 아무튼 아셈 씨도 고마워요.』

    “아셈이 아니라 아템이다!”

    아템을 아셈이라 부르던 렌은 몸을 돌려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다시 돌아가면, 또 사계를 떠돌다 언젠가 용사의 쉼터 마당에 떨어져 배고프다 칭얼거릴 테고.

    “3년 뒤에 보자, 그때까지 풀만 먹고 살아. 그래야 우리 집 마당에 떨어질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그리고 제가 당분간 풀만 먹고 살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걸까요.』

    “대단해, 평생은 아니더라도 진짜 3년 동안 풀만 먹고 버틴 거잖아.”

    아템은 날아오르는 렌을 끝까지 쏘아봤고, 렌 역시 아템을 쏘아봤다. 베를리는 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인사를 전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천계다.

    천계라고 하여도 특별할 것이 없다. 성질이 조금 다른 종족이 거주하는 또 하나의 대륙일 뿐, 다만 정교라는 사계에서 가장 큰 권력이 있는 곳이기에 다른 대륙과 달리 사계에게 주는 영향력이 큰 편에 속한다.

    이곳의 대지는 노란 꽃들이 수두룩하게 피어있었는데, 특별히 튀어나온 지형 없이 온통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꽃인데.’

    게다가 메르헨에도 보지 못했던 꽃이었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오싹함이 오감을 들춰낸다는 것. 마치 이 노란 꽃을 보고 있으면 트라우마가 도진 것처럼 몸이 우선적으로 반응했다. 약간 닭살이 돋는 느낌이다.

    “아서, 이건 파르파르의 꽃이다.”

    “……으, 으악!”

    파르파르의 꽃, 그 이름만 들어도 지옥 같던 생활을 떠올릴 수 있다. 자연스럽게 관자놀이를 향해 움직이는 손, 아템은 손목을 잡아 ‘씁’이나 ‘떽’ 같은 소리를 해댔다.

    “……후, 이 끔찍한 걸 또 보게 될 줄이야.”

    한숨을 꺼질 듯이 쉬며, 넓게 펼쳐진 파르파르의 꽃밭에 시선이 내려간다.

    ―불쑥.

    정확히 성인의 기준으로 무릎보다 조금 높게 피어있는 꽃밭 사이에서 튀어나온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불쑥.

    불쑥, 여자아이의 옆으로 튀어나온 남자아이가 나를 직시했다. 멍한 표정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바라보자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아, 아템 여기는 아이들이 있을 법한 곳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고말고, 애당초 이곳을 찾는 것도 여간내기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붉은 용가리 덕에 수월하게 올 수 있었지만.”

    고개를 돌린 아템은 두 명의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을 몹시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 베를리는 꽃밭 사이에 얼굴만 내민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두 아이 모두가 밝은 금빛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레니나 갈대나무 주신인 아니스와 비슷한 색이다.

    남자아이는 바다를 머금은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숲이 일궈진 초록 눈을 하고 있다. 신나 보이던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르파르파, 또 반쪽짜리 영혼이 찾아왔어!”

    “파르파르, 우와 반쪽짜리 영혼이다!”

    “파르파르 대지에 또 찾아왔어!”

    “르파르파 대지에 또 찾아왔어!”

    반쪽짜리 영혼, 그것은 나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만 이곳에 온 적이 없으니 녀석들의 말에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파르파르 대지, 오기는커녕 구경도 해본 적 없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방방 뛰는 아이들이 꽃밭에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꺄르륵 소리를 내며 빙빙 돌기도 하는 아이들.

    …내 기준에서는 끔찍한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베를리가 열매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파르파르, 르파르파. 우리는 열매를 찾고 있어, 혹시 이곳에 그게 있을까?”

    파르파르와 르파르파는 또다시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입술을 내밀며 베를리에게 대답한다.

    “아니, 그건 이제 맺히지 않는걸.”

    “응, 이제는 해님 달님이 없어서 그래.”

    .

    .

    .

    두 아이가 우리의 손을 잡고 꽃밭을 쭉 내달렸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본다면 동심에 젖어 허겁지겁 꽃밭을 가로지르는 어른 세 명이 보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들이 꽃에 가려져서 안 보여!’

    열매가 있는 곳을 안내해달라는 말에,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하던 아이들이었다. 귀여웠다.

    “자, 여기야!”

    “봐, 여기야!”

    파르파르의 꽃과 르파르파의 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꽃밭 중앙에는 땅에 매립되어있는 납작한 돌이 있다.

    왠지 그 위에 열매로 간주되어지는 것이 있어야 마땅할 법도 한데, 특별하다 싶은 것이 없다. 밀려오는 허망함에 한숨을 내쉰다.

    “…음,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해님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달님이 없어서 그래.”

    아까부터 아이들이 이야기했던 해님, 달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파르파르와 르파르파를 향해 나긋하게 물어본다.

    “그 해님, 달님이 누구야?”

    “달님은 달님이고, 해님은 바바비어야!”

    ―마르노프 바바비어.

    7인의 영웅 중 한 명. 그리고 그들의 중심이자 리더, 그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말인가.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의 말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바바비어는 수많은 여정을 헤치고, 이곳에 들렀어. 그리고 달님은 늘 바바비어를 바라봤지. 저어기, 저기서 말이야!”

    파르파르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터무니없이 맑은 밤하늘이었다.

    무수한 별들 사이에서 청초하게 빛나는 달이 바닥에 매립된 돌을 향해 얕은 빛을 보낸다.

    “해님도 달님도, 이곳에만 있어야 하는 르파르파와 파르파르를 정말 좋아했는데, 이젠 없어.”

    파르파르와 르파르파가 내게 다가와 작은 손을 뻗는다. 녀석들의 작은 손이 쥐기에는 내 검지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바바비어처럼 반쪽짜리 영혼이 다시 찾아왔어. 근데 바바비어랑 다르게 생겼어, 그래서 바바비어가 아니야, 그럼 누구야?”

    “나는 아서, 델타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지.”

    반쪽짜리 영혼, 바바비어.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바비어는 혹시 일화가 말한 ‘먼저 온 쪽’이 아닌가, 어쩌면 나는 그가 해왔던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있잖아, 우리랑 놀아줄 수 있어?”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닮아야 한다.

    녀석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눈을 응시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두 개의 작은 얼굴, 그 시선을 회피하기엔 우리는 다 큰 어른이니까.

    아템과 베를리는 아이들을 번쩍 안아 올린 지 오래였고, 울상이던 파르파르와 르파르파는 이윽고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럼 조금만 놀아볼까.”

    파르파르와 르파르파는 우리와 한참 동안이나 꽃밭을 뛰어다녔다. 그저 술래잡기에 불과한 단조로운 놀이였지만, 그게 행복했는지 녀석들의 보조개는 펴질 생각이 없다.

    원 없이 외로움을 달랜 아이들은 이 대지에 몸을 누워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서서히 사라지는 녀석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 셋은 이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평온함이었다.

    “아서, 저곳에 열매가 생겼네요.”

    “응, 그러네. 녀석들, 분명 많이 외로웠던 거야. 이제는 괜찮겠지.”

    꽃밭의 중심, 매립되어 있는 돌 위에 놓인 열매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여덟 번째 원형에 손끝이 닿는다. 원형이 빛을 뿜으며 사라지자, 원형을 받치고 있던 매립된 돌이 깨졌다.

    유리병이 있었다. 종이가 담겨있다.

    ‘……이건.’

    * * *

    .

    .

    .

    이런 말이 있다네.

    영웅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머무는 것이고, 악인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기억되는 것이라고.

    나는 여정을 떠났네, 이 여정이 끝나고 나면 아마도 동료를 모아 결말을 향하겠지. 암, 이것도 내게 주어진 운명이니까.

    나는 수많은 회귀를 통해 많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네, 나를 이 이야기의 주연으로 세우려는 자가 이 이야기를 결코 행복한 결말로 끝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자네는 어떤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네 말이네.

    과연, 자네가 이 흔적을 보게 되었으니. 먼저 미안하다는 말로 사과를 하고 싶군, 결과적으로 나는 실패했다는 말이니까.

    그렇기에 파르파르나 르파르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게 글을 적고 있는 것이겠지. 내 의지와 접점이 있는 자네에게 말이야.

    나는 서시로부터 이 세계로 찾아오게 된, 혹은 등 떠밀려 넘어온 이방인. 그 이방인은 수많은 모험을 했다네. 그리고 똑같은 것을 반복했다네. 비극 속에서 희극을 염원했다네.

    그리고 일화를 만났네.

    서시가 아닌 일화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어. 그가 차라리 이야기의 서시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는 일화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섭리 같은 것이라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으니.

    자네에게 내 마음을 전하도록 하지. 나는 실패했고, 서시가 아닌 일화로부터 탄생한 자네는 운명을 막아설 자격이 있으니까.

    주연이 되기 위한 자는 반드시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여정을 겪어야만 하고, 그 여정은 주연이 되기 위한 자의 운명에 따라 달리 되는 것. 내 여정은 꽤, 그보다 멋진 것이었어.

    자네는 나와 유사한 여정을 겪는 유일한 자, 그리고 같은 여정의 끝에서 다른 결을 볼 자.

    만약 자네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다가올 결을 바꿀 수 있다면, 부탁이 있네.

    서시의 결말을 막고, 비극을 당연시하게 여기는 시작이 없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애매한 시간에 갇혀 그가 새겨놓은 운명에 저항할 수도 없이 의식을 잃어갈 것이 분명하지.

    부디 그때 나를 거둬주게.

    기적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는 말이 있으니, 계산적으로 기적을 준비할 수밖에. 바로 자네라는 기적을 말이야.

    하하, 물론 그 계산은 일화가 했어, 머지않아 그도 곧 만날 수 있겠군. 마지막만큼은 내 동료가 되어 나의 최후를 지켜보겠다고.

    이 글을 읽다 보면 숨이 턱 막힐지도 모르니 숨을 크게 쉬어보게.

    달빛과 함께. 잠시라도 좋으니 깊이 잠기게나. 이곳의 꽃들이 내는 향은 너무 아름다우니까.

    ―남기다.

    첫 번째 이방인.

    마르노프 바바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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