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89화 (189/222)
  • 189화

    * * *

    [Return Scenario (9) ― 티페레트(Tipheret)]

    티페레트(Tipheret)

    희생되는 아름다움, 미의 제물.

    미지의 나무, 신의 정의와 자애 아래로, 중심의 원형. 그것은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원천으로 이야기의 산 제물이 되어, 모든 것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어린아이의 희생을 의미하기도 하는 ‘티페레트’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순을 억제함으로, 그 아름다움은 억제함과 동시에 소멸된다. 티페레트의 희생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을 미지의 주역으로부터.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 자치령 블러드 럼 / 마리의 여관 1호점 ]

    녹색 피부, 내 허리에 신장이 미치지 못하는 종족, 그러니까 용사의 쉼터 열혈 매니저인 홉스가 마리의 여관 앞에서 손님을 응대했다.

    멀리서 홉스를 지켜보던 아템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어찌나 녀석의 목소리가 큰지, 오픈 시간에 맞춰 줄을 서고 있던 손님들이 흘깃 쳐다보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아서! 저, 저자가 홉스라는 자란 말인가!”

    “쉬, 쉿!”

    이곳에서의 홉스는 나를 모르는 상황에다, 저 마리의 여관 내부에는 성질 고약한 마왕 마리가 있다. …물론 목적은 그쪽이지만.

    입장부터 괜한 의심을 샀다간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홉스를 애지중지하는 마리인데다, 아직 홉스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겠다며 제 발로 마리의 여관을 떠나 내게 왔을 때랑은 경우가 틀렸다.

    지금은 마리의 여관에 자리 잡아 매니저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을 때였다.

    ‘목표는 홉스가 아니라, 어쨌거나 마리니까. 홉스는 그저 스치는 인연으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마리의 여관으로 찾아와 저 성질 고약한 마왕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는 그녀가 열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울상을 짓고 있는 베를리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

    “부족하긴 제대로 찾았는걸 뭐.”

    아템도 베를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서가 알아서 해결하길 고대하며, 우리는 안에서 음식이나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위로했다.

    “그렇지, 아서?”

    “……후, 기다려 봐. 나도 긴장되니까.”

    베를리는 분명 번외세계의 나침반으로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마계의 동쪽, 바다만큼 거대하게 펼쳐진 ‘게이트 강’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녀가 얻지 않은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혼 나간 듯이 서술해주는 다음 여정의 정보도 그랬다. 붉은빛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눈은 분명 다음 열매인 ‘티페레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강의 정체는 ‘게이트 디 마나’라고 불리는 사계의 또 다른 규격 외의 존재가 지은 ‘마도 연맹’의 요새였다.

    일단 넓게 펼쳐진 강이라 도통 입구도 모르겠고,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안내하는 곳은 강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절벽 위가 전부였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자 그럼 다음 손님?”

    홉스는 먼저 온 손님들을 여관 내부로 들여보냈고, 그다음 순서인 우리를 향해 응대했다.

    “손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이 홉스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안내뿐이라….”

    “자, 자리 주세요.”

    “하하, 입장하시면 다른 직원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감, 감사합니다. 깔끔한 복장에 신사다운 말투가 굉장히 보기 멋지네요. 홉스.”

    홉스는 다소 놀란 기색을 담아 표정을 지었다. 손으로 거들 필요도 없이 늘 매무새가 단정한 녀석이, 괜스레 넥타이 같은 것을 건들이며 쑥스러워했다.

    “인간 손님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라, 기분이 좋아서 그만.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종족에 편견이 없는 훌륭한 손님.”

    홉스의 인사를 뒤로하며 마리의 여관 내부로 들어서자, 이전에 보았던 장황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손님, 제가 응대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여직원은 자리를 안내했고, 곧 우리는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일전에 보았던 내부지만, 역시나 대단한 곳이었다. 마리의 여관 1호점. 그 정체가 마왕의 수뇌부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아템과 베를리가 안내받은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구경한다.

    ―시끌벅적한 공간, 사람들의 수다 소리.

    아템은 그렇다 쳐도 베를리에겐 아주 비일상적인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신기한 것처럼 바라보는 델타 공주의 표정은 지극히 가관이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마리의 여관 하면 ‘마법사 세트’겠죠, 인원수에 맞춰서 그걸로 가져다주세요.”

    아템이 웃는 얼굴로 한술 더 거들어야만 한다. 작전대로라면 아템의 덧붙임이 메인이다.

    “케피탄 맥주도 세 개만 가져다주시게.”

    …그래, 케피탄 맥주.

    아니 그게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지금처럼 아리따운 레이디가 아닌 사장이 왔으면 하는데. 아, 걱정 말도록, 그 마리라는 양반과는 아는 사이니까.”

    분명 아템은 여성이지만 젠틀한 사내가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템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은빛의 머리칼이 가볍게 흐트러진다. 이에 동공이 확장되는 직원이었다.

    “괜찮을까?”

    얼굴을 붉히는 마법사 복장의 여직원은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휙 하고 사라졌다.

    ‘‘반했네.’’

    이를 경험해본 베를리와, 아템이 여성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동일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여섯 번째 열매인가, 조금만 더 힘내면 곧 미지의 나무를 완성할 수 있겠어.’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아닌 여유 속에 별것 아닌 이야기들로 테이블 위를 채운다. 시간을 쉽게 죽일 수 있었다.

    ―자주색의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인이 음식을 든 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리 페르세포 아베스타. 현 마계의 통치자이자, 마왕 아베스타의 이름을 계승한 자.

    더욱 중요한 것은 ‘게이트 디 마나’의 제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그녀와 본래 세계에서 조우할 수 있었던 덕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마도 연맹으로 들어가 게이트 디 마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거, 이 사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하더니 처음 보는 철판이잖아.”

    마리는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나를 쏘아봤다. 목에 차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호루라기가 괜스레 눈에 집힌다.

    그녀가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세계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괜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마계에서 꽤 잘생겼다는 놈들한테 소문이 퍼졌나 보네, 또 그거냐. 고백 뭐 그런 거. 귀족 나리들 소꿉장난 그런 거 말이야.”

    “그대가 아리따운 미모이긴 하나, 자신감도 좋군. 아서는 이미 연인이 있다.”

    …하? ―라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는 마리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자연스레 관자놀이를 향해 손이 움직이고야 만다.

    “그 연인은 바로 나, 아템이지. 아서는 그대가 눈여겨 볼 수 있을 남자가 아니다.”

    “그럼 뭔데, 뭐 때문에 바빠서 뒤지기 일보 직전인 이 사장을 귀찮게 구는 거야.”

    팔짱을 끼고 있던 아템이 마리를 쏘아보며 입을 연다.

    “게이트.”

    게이트. 그 순간 마리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호루라기를 향해 손이 움직인다.

    “게이트 디 마나를 찾는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테이블 사방으로 마리의 부하들이 검을 들이밀었고, 아템은 미르라힌을 형성하여 그 검을 모두 막아낸다.

    “이거, 너무 요란스러운 반응인데.”

    베를리는 테이블 곳곳에 미르라힌 옆으로 빗겨나간 부하들의 검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반응도 나쁘진 않지만, 일단 아서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반쯤 테이블에 걸쳐서 검을 막고 있던 아템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마왕 나리.”

    마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 *

    [ 마계 동대륙 끝 / 마도 연맹(魔道聯盟) ]

    마계 동대륙 끝, 넓게 펼쳐진 게이트 강을 마주한 것이 벌써 두 번째가 된다.

    “빌어먹을,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마리는 손톱을 뜯으며 불안한 감정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녀가 이렇게 직접 나서서 마도 연맹까지 안내해주는 이유는 다름 아닌 표식 때문이었다.

    게이트 디 마나의 마력 표식이 깃든 자만 마도 연맹의 요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세계의 유산을 통해 우리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렇게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의심을 놓지 못하는 마리였다.

    “그 능력으로 다 확인하셨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사계가 멸망하는 것이 오히려 스승을 보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마리가 그렇게 불안해하는 겁니까. 그럴 양반도 아니면서.”

    마리는 고개를 내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발레포르 탑의 트라우마가 도진 레니를 보는 기분이다.

    “……어째서 내 스승이 사계를 정복하지 않고, 저 강 속에 틀어박혀 사색이나 즐기고 있는지 가끔은 이해가 되질 않아.”

    “……대충 이렇게 말하면 감이 오겠니?”

    사계가 멸망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승을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이야기하던 마리, 설득의 난이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합시다. 대충 당신 스승도 상당히 삐뚤어진 양반이라는 거잖아.”

    게이트 강 앞에서 손을 뻗은 마리, 손목 위로 표식이 올라오며 강과 반응한다.

    출렁. 강 중앙으로 물기둥이 올라오더니 일순 바닥으로 꺼진다. 그 주위로 거대한 구멍이 생기고 우리 앞으로 기나긴 길이 튼다.

    정면으로 물이 절벽처럼 떨어지며 자연스레 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을 쭉 따라서 시선을 옮겨보면 거대한 문이 놓여 있다. 마도 연맹으로 향하는 입구가 분명했다.

    이를 지켜보던 마나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마냥 고개를 흔들기 바빴다.

    “미안한데, 나 여기까지만 가면 안 될까.”

    “당신 이런 캐릭터였어? 자꾸 왜 이래, 도와줄 거면 끝까지 도와줘야지. 저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쏘아대던 나를 영혼 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마리, 이어서 아템과 베를리를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겠지, 분명 무슨 일이 있겠지.”

    마리는 해주기 싫은 표정을 넘어섰다. 짙은 그림자를 얼굴에 깔고는 걸음걸이마다 한숨을 붙이며 앞장섰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서 스승을 보는 것은 우리가 상상한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네가 그러는 정도면 얼마나 미친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캐릭터 자체가 달라졌다. 내 앞에서 무력을 뽐내던 마왕 마리 페르세포 아베스타는 온데간데없다는 말이다.

    ‘……정령왕 정도의 레벨은 각오해야 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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