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88화 (188/222)
  • 188화

    * * *

    [Return Scenario (8) ― 게부라(Geburah)]

    게부라(Geburah)

    공의의 검, 정복하는 전사.

    미지의 나무, 이해와 지혜 아래 왼쪽 원형. 그것은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공의가 밀집된 원천으로 철혈적인 정복자의 근본이 되어, 이야기의 힘을 불어넣는다.

    관대하지 않은 정의를 의미하기도 하는 ‘게부라’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순을 억제함으로, 그 정의는 억제함과 동시에 소멸된다. 게부라의 무력이 담긴 검을 뿌리칠 수 있을 또 하나의 검으로부터.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 서대륙 / 아젤 대제국 ]

    성채 외부에서 전시훈련 중이었던 모르딕 아젤은 ‘철혈의 좌’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뛰어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철혈의 좌(鐵血의 座)

    이는 아젤 제국의 중심 성채.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 검, 아젤을 검의 제국으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자, 과거의 삼대 검성으로 알려진 ‘드사덴 아젤’의 왕좌가 있는 곳이었다.

    삼대 검성 중에서도 가장 노쇠한 이에 불과하다 생각하는 이들이 감히 그 목을 노리려 철혈의 좌에 도전했다가 철혈이라는 단어의 후자가 되어 목숨을 잃어갔다.

    드사덴 아젤은 그렇게 전선에서 벗어나 철혈의 좌에 있는 동안 만 명이 넘는 검객들을 베어나갔다. 검성이라는 이명을 원하는 자들의 최후는 실로 개죽음이 따로 없었다.

    ―모르딕은 성채 꼭대기, 철혈의 좌로 향하기 위해, 성의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오른다.

    철혈과 정의, 그 자체를 의미하던 지아비의 정서를 따르고 존경하기에 그의 영애였던 ‘모르딕 아젤’도 제가 만든 조합의 이름을 ‘철혈의 검’으로 지었다.

    지었건만, 왕좌에 앉아 노쇠해지는 동안 왕위에 관해서 입도 벙긋하지 않는 드사덴 아젤을 멀리하고, 미워했다.

    분명 사내가 아니라는 하찮은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철혈의 좌, 이름 모를 사내가 서 있다.

    철혈의 좌는 일반적인 황실의 중심부와는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고 볼 수 있었는데, 왕좌 앞은 왕이 행차하거나 그 자리를 앉기 위해 발이 자주 닿는 곳으로 벨벳 같은 것이 길게 놓여있어야 했다.

    그 대신 넓게 펴진 대리석은 왕의 걸음 따위와는 상관없는 연무장. 자객들의 무덤이거나, 도전정신이 뛰어난 무지한 검객들이 꽃이 지듯 으스러지는 곳.

    눈을 감고 있는 노쇠한 왕의 손으로부터, 즉결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드사덴의 검을 받아치는 사내의 모습이 있다. 모든 격을 가끔은 수월하게, 가끔은 힘겹게 받아치고 있다. 연무장 위로 굉음이 터진다.

    드사덴 아젤이 눈을 감고서 왕좌에 앉아 있었던 지가, 언 몇 년이 지났는가.

    ‘움직일 기력이 없어 그런 것이리라. 베르히만 경이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문제 될 것은 없었을 터.’

    그렇게 생각했던 황실의 사신 및 전략가들은 철혈의 좌에 인원을 배치했다.

    제국에 현존하는 최고의 검객들을 모아, 철혈의 좌를 지키는 수호자로. 그중 절반은 그의 영애 모르딕에게 주선되었던 자들이었다.

    ―철혈의 좌에 배치되어 있던 최고의 검객들이 한 사내와 드사덴 아젤 주위로 널브러져 있다.

    ―수십 개의 검이 대리석으로 된 연무장 위로 무자비하게 꽂혀있다.

    ―연무장 위로 거세게 휘둘러지고 있는 두 개의 검이 부딪치며 웅장한 굉음을 터트린다.

    ‘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눈을 뜨시지 않았다. 이 미천한 딸을 뵐 때도.’

    자신의 목을 치러 온 자객을 위해 굳이 눈을 뜰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쇠하여 죽기까지 다시는 눈을 뜰 이유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붉게 물든 눈으로 사내의 격을 힘겹게 막아내는 드사덴 아젤.

    ‘……이럴 수가.’

    몇 년간, 입도 벙긋하지 않던 아버지께서.

    저 사내에게 훌륭하다는 표현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베르히만에게만 허락된 표현이었다.

    연무장을 막론하고 드사덴과 사내는 온 공간을 사용하며 서로에게 대적하고 투쟁했다.

    사계에 존재한다는 여느 전사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경지의 전투가 벌어진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대기 중에 놓인 그 많던 마로는, 변화무쌍한 검을 쥔 단일 개체에게 흡수된다.

    철혈의 좌를 비추던 마력 장막이 천장에서 걷히고, 저 멀리서 구름 사이로 빛이 들어선다.

    햇볕의 방해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던 사내는 피로 칠갑이 된 드사덴을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일순 그 틈을 노려 묵직한 검기를 전방에 펼쳐내는 드사덴이었다.

    ―치―익!

    그 검기를 간신히 받아쳐 내는 사내, 검기가 뚫린 천장을 향해 뻗어 나아가더니 구름을 뚫고 사라진다. 거친 숨을 내쉬는 사내와 드사덴은 묵묵히 서로를 마주했다.

    호흡에서 밀도 높은 마력이 육체를 회복하며 불순물을 뱉어낸다.

    “……자네는 가는 곳마다, 수라가 따로 없으리다.”

    드사덴 아젤은 깊게 사색했다.

    공의의 왕좌 위에서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었던 것도, 웃는 얼굴로 모르딕을 안아주지 못했던 것도. 전부 이 알 수 없는 힘 때문이리라. 그리 생각하고, 죽음과 함께 거두어지길 염원했다.

    정의의 대가를 치르기에는 아직은 너무나도 이르다 하셨으니, 이 또한 세상의 뜻이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혹여나 이 순간이 신의 장난일지라도, 어쩌면 가능성이 보이리다.

    “자네는 가능성이 있다.”

    “이 드사덴을 벨 수 있을.”

    붉은 기운으로 온몸을 가득 두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생채기 하나 없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드사덴. 그 모습은 실로 악귀와 같다.

    “……심각한데, 아템.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아니, 저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물론 다시 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철혈의 좌에 도착하기까지 아젤 제국으로 도착하여 온갖 수렁을 겪었지만, 철혈의 좌는 여간 보통이 아니었다.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원형 중 하나를 모르딕 아젤의 친부가 가지고 있을 줄은.

    목적을 알고 있다는 듯, 철혈의 좌 앞에서 저 왕이 가지고 있는 검이 열매가 분명하다고 말하던 베를리의 귀띔을 끊어버리고 주변에 자신을 수호하던 검객을 몽땅 베어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진 본연의 성질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지막이 입을 열며 뱉는 소리가.

    ‘방해된다.’였다.

    ―!

    노쇠한 검객은 아템에게 조율 받아야만 도달할 수 있을 기적 같은 움직임을 전부 막아냈다. 문제는 그와 달리 우리는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을 정도의 반응속도와 특이한 움직임으로 아템을 쥔 나의 검로를 모두 막아낸다.

    「조금만 더, 버티기만 하면 녀석은 알아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보는 것이다. 아서!」

    * * *

    육신의 구석구석이 찢긴 채, 뚫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 쓰리다. 온몸이 피와 땀에 젖어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심각한 출혈로 인해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선혈로 적시던 내게 베를리가 뛰어오더니, 제가 사용할 줄 아는 모든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마안의 뭉치로 인한 피해가 아니었기에 베를리의 마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나마 괜찮은지, 입에서는 단내가 퍼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드사덴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대리석 바닥에 놓여 흐릿한 동공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규격을 초월하는 검객이 스스로 쓰러질 때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텼다. 드사덴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음은 이를 성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아, 하아.”

    귀가 멍멍한 탓인지, 아템의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아템은 검에서 인간형으로 돌아와 지친 나를 부축하며 드사덴에게 이끌었다. 녀석 역시 기적을 소비한 탓에 기력이 심각하게 쇠퇴했다.

    “…자, 가자.”

    그나마 멀쩡하다 싶은 아템은 지친 나를 계속해서 부축했다. 처절함, 터벅터벅 걸어가는 과정 속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를 지키던 검객과 유사한 모습으로 대리석 위에 놓인 드사덴 아젤, 결국 열매로부터 얻은 마력을 모두 소비하고 간신히 숨을 트고 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가 스스로 쓰러지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자 전부였다.

    그는 조금씩 마력을 회복하며 기력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열매인 저 검만 회수하면 된다.

    ‘게다가 자식이 보는 눈앞에서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짓을 할까 보냐.’

    드사덴 아젤 옆으로 박혀있는 검을 쥐었더니, 요란한 빛을 내며 서서히 사라진다. 이는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열매 중 하나의 여정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드사덴 아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제길, 다시는 싸우기 싫은 상대였어, 차라리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 났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니까.”

    아템은 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양반에게 신의 기계적 장치를 시키면 될 거 아니야. 창조주 양반들도 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드사덴이 누운 채로 입을 열었다. 기력을 쏟아낸 그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야, 그대가 아니면, ……불가하니 그런 ……것이겠지.”

    드사덴은 고개를 힘겹게 움직이며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직시했다.

    “…자네는 무엇을 위해 싸우나.”

    멀리서 그의 딸 모르딕 아젤이 달려왔다. 늘 지아비가 불편하고, 피곤하다 말하는 그녀도 자식이기에 지아비가 걱정되는 것이다. 특히나 절대 꺾이지 않을 검이 꺾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야기를 다시 쓰기 위해서, 그곳에 도래한 비극을 바꾸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남았네요. 덕분에 하나는 또 얻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드사덴이었다. 사라진 열매로 인하여 정의에 사로잡혀있던 노쇠한 검객은 온화한 느낌을 담아 옅은 미소를 띄워본다.

    “……그래, 그렇군. 자네가 주역이 될 수 있다면 무언가라도 달라질 수 있을 테니, 그곳에서의 나는 당당히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야.”

    우리는 철혈의 좌에서 몸을 틀었다.

    또 다음 여정을 위해서 이동해야만 하니까.

    어깨 너머로 모르딕이 지아비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그 아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고맙네, 이방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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