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86화 (186/222)
  • 186화

    * * *

    [Return Scenario (6) ― 호크마(Hokma)]

    호크마(Hokma)

    한스러운 지혜가 밀집된 의지.

    미지의 나무, 가장 위에 놓인 세 가지의 원형 중 하나. 그것은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지혜가 밀집된 원천으로, 스스로 존재하며 뭇별을 그리기도 했다.

    스스로 유지하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는 ‘호크마’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순을 억제함으로, 그 기록은 억제함과 동시에 소멸한다. 호크마가 그토록 한탄했던, 태양과 닮은 반쪽짜리 어리석은 자로부터.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 서대륙 고대 유적 / 발레포르의 탑 ]

    베를리의 포부와 달리, 발레포르의 탑까지 도착하는데 전전긍긍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이곳이 확실해요!’라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처음 데려온 곳은 발레포르의 탑에서 약 5km 넘어 위치한 초원이었다.

    나침반의 역할을 하던 그녀는 세계의 유산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장소를 옮겼고.

    결국 제풀에 지쳐버린 베를리를 아템이 들어다가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다. 실로 인간 나침반을 들고 다닌 격이었다.

    “아하하, 이제 내려주셔도 괜찮습니다. 아템. …무, 무거웠죠?”

    “부끄러워하기는, 그대가 품은 야망의 무게에 비하면 깃털보다 가벼웠다 해두지.”

    얼굴이 발그레 뜨거워지는 베를리는 아템을 한참을 쳐다보다 제정신을 차렸다.

    언제였나, 아템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서 ‘운명에 저항하는 모습이 몹시 매혹적’이라 칭찬했을 때였던가.

    그때 이후로 베를리는 아템에게 홀딱 반한 것이 분명하다. …깁슨이 알면 그렇게 좋지 않을 듯하다.

    “이거, 당혹스럽군.”

    “왜 그러지, 아서.”

    “이곳은 본래 세계에서도 한번 들른 적이 있었거든, 내가 해주었던 본래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발레포르라는 녀석이 있었다고. 기억해?”

    “아아, 뭔가 예언을 했다던 그 녀석인가.”

    “그래, 우리가 구멍에서 보았던 대절망들과 달리 지혜롭다는 느낌이 강렬한 놈이었어.”

    아템은 거대하게 치솟은 발레포르의 탑 앞에 서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지혜를 가진 대절망이라.”

    이미 많은 모험가들의 무덤이 되어버린 발레포르의 탑. 레니의 트라우마를 시작으로, 이퀴시아 제국은 자체 관리를 통해 인명 피해를 줄여나갔다.

    “직접 만나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 귀찮은 기사들도 떨쳐냈으니 들어가 볼까. 아서.”

    아템은 신분이 없고, 베를리는 신분이 들켜서는 안 되고, 나는 자영업을 갓 시작한 여관주인이었으니. 수상하기 그지없는 무리였다. 기사들을 피하는데 필연적으로 수고가 들 수밖에.

    베를리는 아템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곧 거대한 문을 열었다.

    첨벙첨벙, 셋의 걸음을 본뜬 묵직한 소리가 탑 안에 흩어진다. 본래 세계와 유사한 분위기, 바닥이 깊게 젖어 신발 바닥이 잠기게 했다.

    “아템, 혹시 마법적 장치가 되어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 한번 확인해 줘.”

    고개를 끄덕인 아템은 위로 쭉 뻗어진 탑 내부를 훑었다. 탑의 내부를 두른 나선형 계단부터 시작하여, 군데군데 끼어있는 이끼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아템이었다.

    “아니, 전혀 그런 건 없다만. 집히는 거라도 있나 보지?”

    “……음, 분명 이곳에 왔을 때는 온갖 마법 장치가 난무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걱정할 이유는 없다. 미르라힌의 칼날이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마검 미르라힌, 푸른 광선으로 이루어진 무기질 형태의 칼날. 마법을 베어내는 검. 이는 아템과 동조함으로 주변에 있는 강한 마력 유동이나, 회로를 기반한 마법 장치를 단숨에 파악해낸다.

    셜록의 마안과 함께 사용했을 시에 그 효과는 배가 된다. 마법을 무기질이 아닌 유기질 요소로 대응할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이 가능하다.

    “아서, 마안의 뭉치가 없어도 이 아템이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야. 그런 불편한 표정은 삼가지. 마치 내가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픽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리자 아템은 안심이 되었는지 찌푸렸던 미간을 천천히 펼 수 있었다.

    “그래, 만능검 아템.”

    * * *

    [ 서대륙 고대 유적 / 발레포르의 탑 2계층 ]

    축축하게 젖어버린 회전 계단에서는 돌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 내음과 걸음 소리가 지겨워질 때쯤, 까먹을 뻔했던 2계층의 모습이 나타난다.

    2계층은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약 몇 보가량 앞에는 정사각형으로 넓고 깊게 파여 있는 유적의 흔적 같은 것이 있다.

    그 안에는 본래 수많은 석상들이 진열을 갖춘 군대처럼 놓여있어야 할 터, 하지만 그 수가 무색하다.

    “저 석상인가, 저기서 마력 유동이 물씬 풍기는데.”

    아템은 유일하게 놓여있는 석상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베를리도 석상의 마력 유동을 파악하기 위해 멀리서 들여다보는 행위를 반복한다.

    “원래라면 수많은 석상들이 놓여있어야 했어, 그중 한 놈이 발레포르가 있는 곳까지 이동시켜 줄 공간이동 마법이 적용되어있었지.”

    “그대의 말처럼 저 석상에는 분명 마법적 장치가 적용되어 있다. 셜록의 마안이 있었다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텐데.”

    베를리는 석상을 빤히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석상 주위로 수북하게 쌓인 방어구나 무기 같은 것들이었다.

    “저, 저건…. 모험가들의 흔적입니까?”

    “2계층은 대부분의 모험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구간이었어, 애석하게도 저 파괴된 무기들은 그들의 것이었겠지.”

    자신의 목을 까닥거리며 뼈 소리를 내던 아템은 말없이 도약했고, 가라앉은 지대 속에 착지하며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서, 오랜만에 몸을 좀 풀고 싶은데. 괜찮겠지?”

    나는 별 대답 없이 베를리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미 움직이고 있잖아?’

    어차피 녀석은 어떤 말을 하던 제 몸은 풀어야 성에 찰 것이기에, 딱히 허락의 가치가 없을 대답은 할 필요가 없다.

    ―스으으으….

    아템으로부터 강렬한 마력 유동이 일어난다. 이를 지켜보던 베를리, 서적에서 읽었던 초월마법이 띠는 마력 유동의 형태와 유사했다. 이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외부의 마력과 아템의 마력이 부딪친다. 손끝으로 에너지가 일렁거리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미르라힌.

    “호오, 움직일 수 있단 말이지.”

    아템은 서서히 반응하며 걸어오는 석상을 향해 넌지시 오만함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르라힌이 현세에 유지되는 순간, 그 반경의 마력은 미르라힌의 마력 유동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경직상태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힘을 내뿜는 촉매로부터 지속적인 마력을 보충, 석상 표피로 겹겹이 중첩되어있는 온갖 방어마법, 까딱거리는 손가락과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강화마법.

    석상은 마치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다.

    “주인이 꽤 능력이 출중한 자라는 건가, 적용되어있는 마법이 군단에 비유해도 부족할 바가 없군….”

    “하지만――”

    ―콰가각!

    일순 뻗어나간 아템의 검기를 향해 석상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창을 내던졌다.

    마력을 두른 창은 깃털처럼 검기에 찢기며 사라진다. 멈출 줄 모르는 검기는 석상을 향해 올곧게 나아갔다.

    석상과 함께 2계층의 환경은 정확히 두 조각으로 무자비하게 쪼개진다. 마력이 머무는 공간이 미르라힌에 의해 일그러진 것.

    “아템, 공간이동까지 파괴해버리면 곤란해!”

    석상에게 적용된 3계층으로 이동하기 위한 공간이동 마법, 그것에 미르라힌의 힘이 닿기 직전, 빠르게 마검을 회수하는 아템이었다.

    쪼개진 석상 사이로 빛이 번지며 석상 안에 내재되어 있던 마법이 발동한다.

    * * *

    [ 서대륙 고대 유적 / 발레포르의 탑 3계층 ]

    발레포르.

    구멍에서 살아남아, 현세에 머문 대절망. 레니가 가진 트라우마의 원인이자, 수많은 모험가들을 사선에 놓이게 만들었다.

    인간의 것이라기에 크기가 심히 거대한 왕좌, 그 왕좌에는 본래 세계에서 보았던 것처럼 ‘발레포르’의 섬뜩한 자태가 놓여있다.

    유난히 인간을 닮은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던 발레포르가 서서히 그 눈을 뜨며 우리를 향해 직시한다.

    『……과연.』

    『네놈과 첫 만남이 아니었다.』

    본래 세계에서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라면, 녀석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곳에서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흰자위 없이 동공과 함께 흑색을 유지하는 발레포르의 눈은 마치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바로 유지하는 지혜이며, 네놈과 같이 모순된 기록과 억지스러운 개연성을 만드는 어리석은 자에게 충고하는 자.』

    『이 어리석고 한탄스러운 자야, 네놈은 도대체 무얼 하려는 것이냐. 무얼 하려는 것이기에 이 유지하는 기록을 두 번이나 만나게 된 것이냐.』

    미르라힌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춘 마검의 뭉치가 손안에 쥐어진다.

    “알잖아,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는데.”

    발레포르는 왕좌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거대한 손아귀를 뻗었다. 그림자가 자욱하게 내려앉는다.

    『본래라면 이 유지하는 기록 또한 본래 주인으로부터 없어져야 했을 터.』

    “기껏 새로이 구축된 세상에서 그 새끼한테 선수를 빼앗기면 배 아프잖아. 일화가 적당한 시기에 보내줬네 그래.”

    『어리석은 창조주 쪽에서 그렇게 유도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네놈이 나타나는 시기가 곧 적절한 시기가 되는 것이지.』

    자리에서 발레포르가 일어난다.

    『또한 네가 말하는 주연은 이곳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 역시 억지스럽게 만들어진 일화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이기 때문이지.』

    “너 말이야, 나를 창조한 양반보다 아는 척이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 속의 밀집된 지혜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니,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심연에서부터 존재하던 지혜의 밀집체였다.』

    유난히 셀로닌과 유사한 느낌을 풍기는 까닭은 현세에 밀집된 지혜를 형상화하기에 가장 가까운 탓인가.

    사방에 거인처럼 치솟은 발레포르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어리석은 창조주의 소멸로 만들어진 이 세계는 그 자체가 ‘일화’가 됨으로써. 비극에 환장하는 창조주 쪽은 이 사실을 알 수 없게끔 만든 것이군.』

    『……일화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야기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제멋대로인 창조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마력으로 인해 주변이 일그러진다. 순순히 열매를 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 여파로 인해 천장으로부터 우수수 파편이 떨어진다. 베를리는 주춤거리며 안전을 위해 내 뒤로 물러섰다.

    『……‘미지’는 생각보다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봐라, 네놈이 만든 억지스러운 개연성이 두 세계를 오가며 활개를 치지 않는가.』

    3계층에 마력 유동이 미르라힌으로부터 흡수되기 시작했다. 우수수 떨어지던 천장의 파편이 더욱더 내려앉는다.

    『이 또한 네놈이 주연이 되기 위한 여정이기에 순순히 열매를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없었는데.』

    『내 운명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그래, 이곳에서도 네가 소멸한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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