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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185화 (185/222)
  • 185화

    * * *

    [Return Scenario (5) ― 비나(Binah)]

    비나(Binah)

    쓰러져가는 빛의 구원자.

    미지의 나무, 가장 위에 놓인 세 가지의 원형 중 하나. 그것은 이야기의 시간을 나누는 달의 원천으로, 태양을 보필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는 ‘비나’의 열매는 이야기의 비극에서 탄생하는 모순을 억제함으로, 그 빛은 억제함과 동시에 질 수밖에 없다. 비나가 그토록 바라던, 태양과 닮은 반쪽짜리 심판자로부터.

    ―번외세계의 나침반이 서술하다.

    * * *

    이곳에서 다시금 만난 인연들과 달리, 베로니카를 향해 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다. 그저 벙어리처럼 잇는 말도 없이,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어머,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구면이라기에 혹시나 싶어 자세히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초면인 것 같네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과정 속에서 무어라 혼잣말을 한 것 같은데 들을 수는 없었다.

    ‘…어쩜, 거짓말도 잘하셔라.’

    베로니카를 따라서 더욱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바스락거리는 지면에 식물들의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지자 별안간 베를리가 혼잣말을 했다.

    그 문장은 정확히 창조계의 언어로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아무렇게나 뱉어대는 특이한 언어를 듣고는 베로니카가 의아함을 보였지만, 아템과 나는 알 수 있다.

    ‘……비나, 쓰러져가는 빛의 구원자. 미지의 나무, 가장 위에 놓인 세 가지의 원형 중 하나…….’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베를리의 눈, 이어지는 모든 문장은 앞장서서 걷고 있는 베로니카가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열매 중 하나인 ‘비나’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녀, 베로니카, 아니 심연 카니로베.

    그것은 ‘보랏빛’을 상징했으니,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베를리의 눈동자가 본래 세계에서부터 보라색을 띠었던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본래 세계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건가.’

    베를리는 이내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이상한 언어를 뱉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미간 아래까지 내려온 로브로 인하여 앞에 있는 나무뿌리를 보지 못한 채 넘어지려는 것을 베로니카가 막는다.

    “아.”

    문제는 벗겨진 로브로 인하여 적나라하게 보이는 베를리의 보랏빛 동공이었다.

    “……하하.”

    “하하하.”

    “그, ……제가 좀 사연이 있어서.”

    사계에서 보랏빛의 동공이 마녀의 종자나, 마녀를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고, 더욱이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다.

    베로니카는 현재 보랏빛의 눈을 숨기고 있을 뿐, 그녀 역시 마녀의 종자나 마녀의 피를 가진 존재. 아무래도 베를리가 말한 ‘사연’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가장 긴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다.

    베로니카는 베를리의 뺨을 쓰다듬으며 애처롭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베로니카를 이어서 따라가자, 멀리서 희미하게 보였던 부락이 나타났다. 동물의 가죽을 적당히 펼쳐 만들어 놓은 집들이 어수선하게 여럿 놓여있었다.

    “베, 베로니카…. 베로, 니카가 왔어.”

    그중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멀리서 베로니카를 향해 달려왔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우리를 보고는 흠칫거렸지만, ‘안심하렴, 내 친구들이니까.’라며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많이 야위어 있었다. 육체의 성장 정도를 보면 8세 정도인 듯한데, 델타 시내에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6세 미만의 덩치였다.

    그 아이를 따라 멀리서 경계심을 품으며 내려오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전부 작은 편이네요.”

    “이들은 나라를 잃고, 길을 잃은 자들이니까요. 받아주는 곳도 없는 데다, 한참 커야 할 시기에 좋은 것들을 많이 먹지 못해서 그렇죠.”

    “전부 베로니카가 돌보는 것입니까?”

    “저도 숨어 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했건만, 어느새 저들이 숲으로 들어와 지내기 시작했고, 그들을 보니 도와줄 수밖에 없었네요. 하하.”

    “여전히 마음씨가 고우시군요. 베로니카는.”

    “지낼 곳을 잃은 것도 슬픈 일일 터인데, 그 마음에서 좋지 않은 것이 피어나고 있으니. 그저 이들의 최후를 바라봐주는 이가 되어주기로 한 것뿐입니다.”

    베를리는 아이들을 보며 측은해했다. 그 마음은 단순한 연민을 품은 감정이 아닌 훗날 통치자가 되었을 때, 언젠가는 고찰해야만 마땅할 냉정한 것이었다.

    “먹을 걸 가져왔어, 올라가서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주렴.”

    “으, 응. 고, 고마워 베로니카.”

    베로니카가 들고 있던 큰 가방을 아이 여럿이 뺏어 들고 굽이친 언덕을 도망치듯 올라갔다.

    “저희도 올라가도록 하죠, 저 언덕을 지나야만 집이 나오거든요.”

    언덕을 올라가는 도중, 동물의 가죽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허름한 천막이 수없이 목격된다. 주인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그 안에 사람들은 전부 다 좋지 않은 몰골이다.

    그 몰골을 하고서 경계심을 품고는 우리를 노려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어요, 늘 내면에 있는 어둠에게 마음을 빼앗길까 봐, 저는 그들을 곁에 두고 관찰하죠.”

    “베로니카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잖아요, 꼭 사서 고생하는 것 같은데.”

    “사서 고생해도 될 만큼, 저들은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얼마 남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어두웠다. 검은 정령의 사태를 떠올리며, 저 부랑자들의 내면에는 이미 그것들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말을 잇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베, 베로니카. 저, 저들이 베로, 베로니카를 죽이고 말 거야. 죽, 죽이고 말 거야.”

    이곳에 있는 자들은 말을 더듬는 것이 특징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묻지 않아도 베로니카가 대답해 주길 ‘내면에서 들리는 무언가와 싸우느라 외부에 목소리를 표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저 안에 있는 것은 육체를 갉아 먹으며 결국 그 육체를 차지해요. 저렇게 보여도 원래는 좋은 사람들이었답니다.”

    말을 더듬는 부랑자들의 야유를 맞으며, 어렵사리 베로니카의 집에 도착했다.

    거의 다 도착할 무렵부터 정령이 하나둘 모이더니, 기어코 집 내부까지 들어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날아다닌다.

    * * *

    “아서, 일어나.”

    “……뭐야, 깜빡 졸았나 보네.”

    테이블 위에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베를리의 잠꼬대가 보인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음식들, 그리고 술.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흔적이 있다.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거라, 익숙하지 않아서 만족스러우실지 모르겠어요.’

    창가에 달빛이 들어왔다. 그 달빛을 등지고 나를 깨웠던 아템이 물어왔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자에게서 뭔가 오묘한 기운이 드는데.”

    “……본래 세계에서도 수수께끼의 인물이었으니까. 뭔가 우리 이상으로 아는 게 많았고.”

    베로니카, 그녀의 정체는 단순히 마탑의 선생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녀라고 단락 짓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있는 존재였다.

    아템과 함께 외부로 나갔더니, 숲을 비추는 반딧불이가 길을 만들었다. 오란 듯이.

    자연스레 그곳을 따라 이동하니 베로니카가 검을 쥐고 서 있다. 그녀 역시 월광을 듬뿍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월광을 담은 검은 꽤나 적나라하게 붉은 선혈을 묻히고 있다.

    “아, 왔군요.”

    “베로니카.”

    형태를 알기 어려운 것들이 베로니카 아래로 고깃덩어리가 된 채 놓여있었다.

    검은빛이 도는 핏기 없는 모습은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절망을 닮아 있다.

    “아까 그분들이에요. 인간으로서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이었죠. 그들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으니 너무 매몰차게 노려보지 말아 주셨으면 하네요. 하하….”

    그녀가 뱉는 말은 상당히 인위적이었다. 단 한 번의 떨림도 없이 연결되는 문장이 그녀가 냉혈하다고 느껴지게끔 하면서도, 그 눈은 슬픔에 잠겨있었기에 말과 표정이 조화롭지 못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스윽 닦아내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니로베는 걱정 마세요.”

    “……베로니카가 그걸 어떻게.”

    “이미, 오래전에 해결했으니까요. 그렇지 못했으면 당신에게 ‘비나’라는 여정을 줄 수 없었을 테니까.”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는 베로니카였다. 본래 세계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담담함은 그 정도 수준에 가깝다.

    그녀는 검을 바닥에 놓고서, 절망이 되어 자기 손에 죽어버린 부랑자들의 흔적을 바라봤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동공의 색이 조금씩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또 다른 창조주로부터 탄생한 이 이야기 덕에 본래 세계에 있던 것과 달리 내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억을 온전히 가져온 채로 말이죠.”

    그녀는 아템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반쪽을 채워주는 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에 저는 착각하고 말았군요. 분명 아서는 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영혼도 반쪽이라는 게, 꼭 판박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니까요.”

    양팔을 벌려 눈을 감는 베로니카, 다시금 달빛은 그녀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자, 부디 이 모든 여정으로부터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소원하며.”

    “그이와 제 의지를 이어, 당신이 희극을 이끄는 주연이 되길 바랍니다.”

    보랏빛의 원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새하얀 빛줄기로 이루어진 나무가 밤하늘에 나타나더니, 보랏빛의 원형을 머금고 함께 저문다.

    그녀를 감싸 안은 달빛도 조금씩 흩날린다. 무정하게도 그녀와 함께 사라져간다.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무척이나 연모했다. 부디 전해주시길.”

    * * *

    “……으음.”

    베를리는 테이블로부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완전히 뻗어버리고 만 것이다. 창가 밖으로부터 울창한 숲의 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침이구나. 다른 분들은 어디에.”

    주위를 둘러보지만 인기척이 없다. 혹여 자신을 버려두고 간 것은 아닐까 설레발을 치기도 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외부로 발길을 옮기는 베를리였다.

    바스락거리는 풀을 밟으며 내려가자, 몇 걸음 되지 않는 곳에 아서와 아템이 누워있었다.

    “…주무시고.”

    “계시는구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아서의 인상은 늘 일관성이 있었는데. 무감정한 표정에, 깁슨이 말했던 것처럼 집념이 느껴져 섣불리 말을 붙이기 힘든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또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니, 아닌 것 같기도….’

    그들의 여유를 조금만 더 지켜보기 위해, 조심스레 자리를 피하며 근처에 있는 연못을 찾아 움직인다.

    연못에 있는 물을 양손으로 담아 얼굴을 씻어 내린다. 어느 숨겨진 방 안에서 세안을 할 때면 거울을 통해 늘 바라보던 보라색의 눈동자, 마녀의 상징.

    “……맙, 맙소사.”

    연못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보라색이 아닌 청록색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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