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84화 (184/222)
  • 184화

    * * *

    [ Return Scenario (4) ]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네스와 흡사한 방법을 통해, 본래 세계에서 알게 된 정보로 그녀가 겪은 그녀만의 경험을 얘기했을 뿐이었다.

    “고난이 짙을수록 너는 이런 말을 하더라고.”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번외세계의 나침반’이라는 세계의 유산은 본래 세계에서의 능력과 달리 며칠 전부터 특이한 증조 현상을 발현했다고 한다.

    “비록 흉사에 빼앗겨 버린 땅일지라도.”

    “무릇 기적은 피어나는 법.”

    그 현상은 꿈에서 들어오는 정보였다. 은색 빛이 도는 검을 든 사내가 찾아와, 짧은 여정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마음속에 기적을 품고 있던 그녀가 꾸었던 그 꿈을 꾸고 나자, 불규칙적으로 변해야만 했던 눈동자가 지속적으로 보라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아니, 당신과 가까이 있을수록 지금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뭔가요?”

    “그래요. 서대륙, 서대륙의 작은 숲…. 슬럼가, 외로운 자들이 숨어 사는 곳. 발리아트 숲.”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리아트 숲이라면 데크 에던과 아크론 제국 사이에 위치한 작은 숲으로, 첫 목적지로 그리 멀지 않다.

    “그 말에 결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공주님!”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기사는 다름 아닌 그녀의 시종 기사 ‘깁슨’, 그의 쏘아보는 눈빛이 멈출 줄 모른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저 기사라는 건가.’

    깁슨, 공주의 유일한 수호자, 보랏빛 눈의 비밀을 알면서도 그녀를 지키는 충실한 검이다. 델타 3세로부터 선택된 음모에 귀가 얇아지지 않을 유일한 기사라고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여정 속에서 베를리는 늘 깁슨을 애도했다. 그림자 기둥, 그러니까 마커스에 의해서 도주했던 어느 날, 그날 그 도주를 위해 목숨을 던진 것이 깁슨이었으니까.

    도주를 위해 목숨을 기껏 버렸건만, 그림자 기둥의 추적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델타의 겨울 야시장. 공주가 나를 치고 간 그날, 그녀를 쫓은 덕에 그림자 기둥의 추적을 피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제 눈이 고쳐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깁슨.”

    “공주님, 그러나 저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주님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깁슨은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행동거지에서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눈빛은 제가 보았던 그 어느 전투원보다 짙은 집념이 느껴집니다.”

    “하물며 감추고 있음에도 피어오르는 살기.”

    “마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망설이지 않을 것만 같은 눈빛이지요. 공주님은 그저 이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베를리는 깁슨을 지긋이 바라봤다.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서서히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연다.

    “아니요, 지금 제 마음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무런 의미 없이 보라색의 빛으로만 물들어 있던 제 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죠.”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공주님!”

    깁슨의 격양된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그의 양손을 부여잡고 말을 이어가는 베를리였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 이는 분명 제가 가진 눈에 대한 숙명 같은 것.”

    “깁슨, 어차피 이 몸이 델타에서 벗어나야 제국에도 좋은 일입니다. 아버지께는 비밀에 부쳐주시길. 당신이라면 할 수 있겠지요.”

    깁슨은 베를리에게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이곳에 방문하는 델타 3세도 해마다 한 번 공주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모든 것은 황실 주변을 둘러싼 배반자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다.

    깁슨은 델타 3세에게 공주의 상태를 보고하는 유일한 정보통이기도 했으니, 제국 외부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진심이시군요.”

    선반 위에는 델타 3세와 베를리, 그 옆으로 깁슨이 함께 있는 사진이 있다.

    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깁슨은 검을 뽑아 든다. 그 끝을 내게로 향하게 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도 아집이라는 것이 있어야겠지요.”

    깁슨의 눈빛은 베를리에 대한 신뢰로 충만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저지의 목적이 아니었다.

    “당신이 공주님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실력이 되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저 또한 진심을 다할 것이니, 부디 그 실력을 보여주시길.”

    「오호, 저자는 생각보다 훌륭한 기사의 표본이로군, 그대여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 아템은 준비가 되어 있다.」

    베를리가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이내 깁슨에게 관두라며 소리쳤다.

    “깁슨,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란은 좋지 않아요! 어서, 검을 돌리세요!”

    깁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뜻을 거스를 의향은 전혀 없었으나, 내가 그녀를 지킬만한 힘이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만 그 성이 풀릴 듯했다.

    “그렇다면 흐지부지하게 상대할 생각은 없으니. 깁슨도 각오하시길.”

    깁슨을 노려보며 아템을 쥔다.

    「그대여 나는 무엇이 되면 되겠는가, 미르라힌? 에펜할라? 알레페스?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럼 세솔라스? 정 깔끔하게 저 목을 도려내고 싶다면 오랜만에 모겔린은 어떠한가.」

    깁슨의 날카로운 칼날에 마력이 응집된다. 체내에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는 일반 기사의 이상이었지만, 그 이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비단 그 이상의 마력을 검에 주입하는 것을 보아, 그는 일격에 모든 것을 확인할 심산이다.

    ―칭!

    깁슨의 칼이 단숨에 갈라지며 제 기능을 상실한다. 찰나에 전투가 종료된 깁슨은 여전히 자세를 고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실력 차에 자신의 검이 반으로 쪼개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그가 날숨을 뱉으며 바닥에 꿇는다.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길.”

    “그녀는 제가 기필코 지킬 테니, 경께서는 부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채비를 마친 베를리가 깁슨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창가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휘날렸다.

    소란이 끝난 시점에는 여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깨진 창가로부터 떨어진 조각조각의 유리들에게 반사되는 희미한 새벽빛이 어두운 방 안을 들춰낸다.

    “깁슨, 옷이 마음에 드네요. 움직이기도 편하고, 처음 입어보는 옷이라 어색하지만요.”

    “…무엇을 입으셔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시는 공주께서, 어디 부족한 옷이 있겠습니까.”

    깁슨의 패배로 공주의 여정이 확정되자, 그는 그녀를 위해 옷을 가져다주었다. 시내에 돌아다니는 일반적인 여타 상인들의 몰골과 유사하다.

    보는 이는 없어도 황실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거추장스러운 장식거리들이 잔뜩 딸린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가 이제는 자유분방함으로 그 모습을 감춘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를리에게 로브를 씌워주며 말을 잇는 깁슨. 그 역시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의 실력은 충분할 것 같으니, 더 이상 묻지 않겠소. 그럼에도 공주님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이 기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은 공주를 지키는 기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깁슨은 분명 공주를 사랑했던 것이다.

    “내 그대에게 부족한 실력이지만, 집념은 그대와 다를 바 없소. 지옥에 떨어져서라도 그대의 목을 쳐버릴 것이니. 부디 그녀를 지켜주길 바라오.”

    * * *

    [ 서대륙 / 발리아트 숲 ]

    발리아트 숲은 예로부터 많은 전설이 탄생된 곳이었다. 유독 아이리스가 좋아하는 고고학자인 월키스의 서적 중에 많은 양을 차지하기도 했다.

    서대륙 전체를 통튼 수많은 지대 중, 정령에게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고농도의 마력이 흐르는 숲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정령들이 오가는 것은 물론이며 그 정령들로부터 가꾸어진 식물들은 최고급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다. 예로 들어 발리아트 포도주가 있었다.

    이러한 대자연이 깃든 해당 영역은 제국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머지않아 데크 에던과 아크론의 전쟁으로 인해서 그 법칙도 깨지겠지만.

    “이야기로 듣던 것보다 조금 으슥한 곳이네요. 뭔가 불길한 느낌도 드는 게, 꼭 유령이 나올 것만 같아요.”

    “유령이라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혹여 있더라도 이 아템이 단숨에 베어내 주지.”

    “아하하…. 아템이라면 가능할지도요.”

    발리아트 숲에 진입하기 전.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아템이 인간형으로 변하자 깜짝 놀라는 베를리.

    아템의 괴물 같은 붙임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템, 아서의 검이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뭇 믿은 것도 신기하다.

    인간으로 형태를 바꾼 아템의 손을 잡고서 거대한 바위를 넘는다. 평소에는 경험하지 못할 지형지물에 난처함이 이만저만이 아닌 그녀였다.

    “베를리, 이곳이 확실해?”

    “네, 분명….”

    그렇게 정처 없이 발리아트 숲을 걸어 다녔으나, 미지의 나무를 구성하는 열매라고 추측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이곳엔 어쩐 일로?”

    지친 베를리로 인하여 숲 바닥에 나앉아 있던 우리에게 말을 거는 여성, 로브를 쓰고 있는 데다 복면을 착용한 탓에 이목구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곳에 정령들이 많이 돌아다닌다고 하여, 제자에게 경험상 보여주고자 찾아온 것이 전부입니다.”

    아템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내게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베를리는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스승님,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라며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이곳은 정령들이 많은 곳이죠.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셨다간 ‘그들’을 마주하고 말 텐데, 저와 함께하시겠어요?”

    “그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더니, 작은 마을이 있었다.

    “제국을 떠나, 터를 잃으신 분들의 거처이죠, 저는 이곳에 거주하며 그들과 정령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하물며 정령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제자 분을 위한 현장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독 다정한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느낌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답답함이 함께했다.

    “근데 실례지만, 저희 구면이었던가요? 아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소개가 먼저겠죠.”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내 로브를 걷고, 복면을 내리며 자신을 소개한다.

    “반가워요, 제 이름은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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