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 *
내게 주마등이 있다면, 그중에 절반은 어두운 구멍 속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새하얀 방일 것이고.
절반이 어두운 구멍 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오래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세월을 보냈다니,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다만.
나는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마 천년, 아니 만년은 그 앞에 붙여야 내가 보낸 세월을 증명할 수 있겠지. 아무래도 한계인 듯하다.
일화(逸話), 그러니까 이 세계로 불러들인 아저씨는, 내가 맡은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많은 설정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다지 미치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없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온 듯했다.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고장이 나버려서 완전히 쓸모없는 멍텅구리가 된 것이다. 아저씨는 이런 나를 회수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연락 한번 없던 양반이 이상한 모습으로 드디어 나타나서는, 기껏 나를 다시금 새하얀 방으로 데려온 것이 아직까진 전부다.
이곳은 그리운 곳이기도 했다. 아템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으니, 내가 품은 수많은 고향 중에서도 상당히 의미가 많은 곳이었다.
의식만 남아서는 공간이 하얗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익숙했던 이곳을 두리번거렸다. 참고로 육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시야만 허공에 존재하는 느낌에 가깝다.
새하얀 공간이 군데군데 깨져있다. 바코드, 혹은 오류문자 같은 것들이 그 속을 알차게 채우고 있다.
「그래, 고생했구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중성음. 이는 아저씨의 목소리, 도대체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는지. 저 멀리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새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아저씨가 분명했다.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새하얀 빛이 번진다. 그 형상은 분명 얼굴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먼저 그대의 의문을 풀어야겠군,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 쌓였던 울분을 여기서 토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어째서 이 이야기의 결말인 ‘가르강티아’를 봉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계가 ‘가르강티아’라는 결말에 도달하고 있는….’
「그대는 이야기의 결말을 ‘봉인’을 했을 뿐, 그 결말에서 도피를 택했으니, 결말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다. 심지어는 결말과 동조하는 이야기의 ‘주연’이 있다면 더더욱.」
‘내가 언제 도피했다고 그래, 나를 화내게 만들 심산이라면 아주 잘하고 있네, 당신.’
「언제까지 도피할 것인가. 이야기의 파국을 막는 장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여.」
「그대는, 도피하였기에 내 부름에 응했고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부름에 응하자, 그대는 새로운 이야기에 도달했고, 하지만 마지막에서 도피를 했으니 결국 두 번의 도피가 되는 것.」
‘…그만해.’
「아템.」
「아템은 결말을 봉인하기 위한 검이 아닌, 제 스스로 결말을 파괴하는 장치가 되어 결말과 함께 흐드러지고, 소멸해야 하는 것.」
‘…….’
「그것이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그대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의 진정한 최후이다. 하지만 그대로 인하여 그 틀에서 벗어났으니, 결말에 새로운 여지를 남기고 말았지.」
‘결국 아템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피차일반 피해 본 건 다를 게….’
「이도 저도 아닌, 아템의 결말.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그 무엇의 상태도 아닌, 애매한 것으로, 네 자취를 그리워할 도구로 남는 것이 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장치가 망가져 버린 탓에. 나의 노르트여,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되어버렸구나. 아템은 죽은 것보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고작 네 알량한 도피를 위해서.」
‘…알겠으니까, 그 얘기는.’
‘제발, 그만둬.’
도피라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따지고 보면 저 아저씨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으니, 아이템도 사실은 자신이 맞이한 최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나를 위해서.’
‘아템은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거니까.’
거대한 문이 만들어진다.
열어보지 않았기에 저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일화가 모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네 할 일은 끝났다.」
「돌아가라, 네 세계로.」
「그대와 약속한 환생은, 준비되어있으니.」
‘돌아가라니, 그 빌어먹을 약속을 지금 이 상황에서 지키겠다는…!’
「아칸이 멸망하여도, 더 이상 상관 쓰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극의 시간을 멈춘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은 그대를 돌려보내는 정도가 남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내가 돌아가면, 이곳은 어떻게 되는데.’
「다시 시간이 흐르고, 예정된 결말을 맞이한다. ‘서시(序詩)’가 정했던 것처럼.」
이야기가 끝이 날 것이다. 하물며 비극으로. 이를 막기 위해 일화는 일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서시’와의 충돌을 위해, ‘일화’는….
일화와 종속관계가 종료되지 않는 동안 어떻게든 내가 이 파국을 막아야만 한다. 작은 기적이라도 품기 위해서는 아저씨의 힘이 필요하니까. 종속관계가 끊기면 기적은 한줄기조차 남지 않는다.
새하얀 정장을 입고 있던 아저씨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잔뜩 혼나는 기분이다. 빛이 번지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하지 못했다.
그의 존재하지 않는 표정 속에서 얻는 나만의 확신감이 있었다. 확실히 지금의 그는 나를 지구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용사의 쉼터가 남아있다. 내 영혼이 담긴 그곳이 멀쩡히 남아있다. 모두가 남아있다.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방법을 만들어 주세요.’
정적, 그 끝에 의식은 육체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발끝의 감각이 새하얀 공간을 밟는다. 육이 다시금 창조된다.
「부디, 그 대답이 나오길.」
「고대했다. 노르트. 아니, 아서.」
* * *
기나긴 대화를 통해서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로 유지되는 사계를 이제 와서 뜯어보니 머리가 아플 지경에 도달한다.
애당초 나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던, 얄팍한 소망을 세우며 다가올 비극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본래 주인은 서시였다. 서시가 이 이야기를 비극이라고 한다면 비극이오. 나는 그로부터 떨어진 조각, 이야기의 작은 일화 속에서 희망으로 빚어진 기적 같은 것이지.」
이야기란 ‘누군가로부터 관측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관측을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 이야기는 늘 이어진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가 끈처럼 이어져 있다.
사계에 시간이 존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마땅히 ‘넘어가거나, 내려가거나, 정주행하는 것’으로 즉 뻗어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어진 시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이야기 속, 희망이나 꿈을 품는 자들이 규칙을 초월하면 불규칙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성이 높아지면 당연히 ‘관찰자’가 없어지게 되며, 이야기는 사라지게 된다.
서시는 이의 대안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평행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 개의 평행세계가 나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일화 속의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엔트로피, 즉 불규칙성을 분배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이러한 평행세계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일화’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곧 ‘아저씨’가 탄생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잉태된 창조주로 인해 거대한 불규칙성을 떠안은 이야기는 또 한 번 강력한 여파를 맞는다.
인류가 ‘마력 전쟁’이라 부르는 현상이었다.
존재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창조주가 생김으로, 그 강대한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두 창조주의 보이지 않는 마찰을 의미한다.
본래의 결말보다 ‘마력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가 소멸하려 하자, 비극에 순응하지 않는 바바비어를 계속해서 평행세계를 번복하게끔 회귀를 유도한다. 이야기를 비극으로 끝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서시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무한하게 회귀시키느라 사용된 모순 및 억지는 평행세계를 제물로, 곧 대가로 가져가게 된다.
그 이후 평행세계는 어느 시점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아칸은 단 하나의 ‘현재’ 말고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첫 번째, ‘일화’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시’와 ‘일화’를 제외한 나머지 가장 큰 불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결말’을 소멸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 알게 된 일화가, 서시가 만든 결말에 간접적인 관여를 시도하기 위해서 ‘노르트 아템’을 설정하게 된 것이고.
쉽게 엔트로피를 조절할 기능이 없어졌으니 결말을 조정하기 위해선 ‘자신의 기적을 기중기에 태운 다음 이야기 속으로 내려야만’ 했다. 그 기적은 결말 속으로 들어가 불규칙성을 파괴한다.
이어서 일화와 서시의 지속적인 격돌로 인해, 엔트로피는 10가지의 조각으로 분산된다. 이야기가 제 스스로 소멸을 막는 방법이었다. 10개의 조각은 이야기 속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다.
이를 알아차린 ‘서시’가 그 조각들을 자신이 정한 ‘두 번째 주연’이 얻을 수 있게끔 ‘광휘의 서, 이달리브’를 만들어 과거로부터 존재하던 것처럼 설정한다.
이달리브는 과거와 미래를 예측하며 10가지 조각의 출처를 밝혀주는 예언서. 그로부터 ‘두 번째 주연’이 필연적으로 얻게 될 물건이 된다.
「이것은 이야기의 모든 불합리가 압축된 것.」
아저씨의 가벼운 손짓 하나로 공간은 우주처럼 변질한다. 아황이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나무가 새하얀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다.
「바로, ‘미지의 나무’이다.」
맨 위에 하나, 그 아래로 세 갈래의 뿌리가 퍼지며 세 개의 원형이 두 줄로, 두 개의 원형이 한 줄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다시 또 하나의 원형이 위치하여 총합 10개의 원형이 육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10가지의 원형, 열매를 의미하는 이것들은 제각각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불규칙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배된 ‘이야기의 육’을 의미한다. 나머지는 이야기 속 ‘주연의 의식’이 그 육을 지배하는 것.」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달리브를 통해 그것들을 얻은 두 번째 조연은 ‘미지의 나무’를 완성하고 이야기의 권한을 습득한다.」
「이야기는 주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사계에 적용되는 엔트로피의 영향을 피하게 되며. 새롭게 설정된 이야기에는 그 조연의 주인인 ‘서시’가 다시금 뿌리내릴 것이다.」
「이야기의 외부적인 엔트로피를 가담하는 ‘미지’라 불리는 ‘독자’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두 번째 주연은 첫 번째 주연과 달리, 곧 서시가 뜻하는 결말을 따라, 그 결말을 이야기에 도래할 것이니.」
「본 이야기는 미지의 관측자 없이도, ‘굳이’ 불규칙성(클리셰)에 맞추어 결말이 도래할 때까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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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시’ [The prologue]
1―1. Setup : ‘ending’
2. ‘일화’ [The Anecdote]
2―1. Setup : ‘deus ex ma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