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77화 (177/222)
  • 177화

    * * *

    ―아득히 머나먼 과거, 베르히만의 기록 中

    콧잔등에 올라탄 숲 내음이 또 사계의 여름이 찾아왔구나 싶었다. 그래, 나는 비로소 여정으로부터 세월의 흐름을 알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마주할 역경의 순간들, 목덜미에 또다시 괴여버릴 땀과 그 내음 따위에 괜스레 마음이 진다. 괜찮다. 우리는 분명 옳은 선택을 하였으니.

    영웅들과 함께 절망의 숲까지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것을 배웠다. 이 기록을 후세에 남긴다. 그대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고대하며.

    * * *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지, 나쁜 새끼와 착한척하는 나쁜 새끼.”

    “자네와 친하진 않지만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일세.”

    데크 에던과 레니아단의 대화를 듣던 셀로닌은 평소와 달리 한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이 지금 여기서 왜 나오는 겐가.”

    “당연하지, 마력 전쟁이 시작된 지금, 착한척하는 나쁜 새끼들이 모조리 나쁜 새끼가 되어 버렸으니까 말이야.”

    색이 사라진, 더 이상 대지라 불릴 수 없는 땅의 토질을 조사하던 한 영웅, 레니아단이 입을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슬프지만 이 땅에 마력은 존재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대마법사 셀로닌은 씁쓸히 웃는다. 그것은 기쁘지도, 혹은 슬프지도 않은 애매하거나,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대로 찾은 게로군.”

    “그래, 슬프게도 말입니다.”

    그의 말을 받아친 것은 베일리아, 그는 상심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셀로닌은 그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약간의 아연실색을 이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지, 하긴 자네라면 그럴 만도 하겠군. 자네는 정말 이 전쟁에 휘말렸을 뿐이니까.”

    셀로닌의 말이 맞다. 베일리아는 이 전쟁에 휘말렸을 뿐, 그는 마력을 근본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멸망을 코앞에 둔 사계로 인해 삶의 터만 잃은 셈이다.

    그의 근본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인류하고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 보통 인간은 마력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마력이란 산소와도 같은 것이다.

    베일리아는 마력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종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닌, 주신이나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고민하고 탐구해왔지만 인간의 지식과 사고로는 베일리아라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이 원정대에 뽑힌 이유는 정말 허무했다. 마력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정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레니아단이 거대한 크기의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검의 연삭을 마친 베르히만에게 부탁했다.

    “아, 베르히만, 저기 나무 좀 베어 주겠나?”

    “기꺼이.”

    베일리아가 이 원정대에서의 이례 중의 이례라면, 베르히만은 2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원정대에 참여한 특례 중의 특례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노력을 겸비하여, 검성이라 불리는 존재와 그 실력이 비등한 자. 혹은 그 이상이 되어 비상할 검객, 검의 정점에 가까운 사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정대의 나머지 영웅들에 비하면 이 또한 부족한 실력임에 틀림없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나머지 영웅들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자들이다.

    “뭐야, 베는 일이라면 나한테 시키지. 왜 저런 애송이에게 시키는 거지?”

    데크 에던이 짜증 내며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와 나는 그리 친하지 않아.”

    “하, 단단히 삐졌군. 그깟 키스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삐지다니, 완전 애송이잖아.”

    별안간 레니아단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무에 앉아있던 브렌트 잉크는 암살자로서 그녀의 살기를 느끼는 데 충분하다.

    “보통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키스를 하지는 않지. 그리고 대륙에 그런 인사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고로 역시 자네는 죽어줘야 마땅하겠어.”

    “너는 인간이 아니잖아. 자, 잠깐만. 오! 안 돼, 그건 진짜잖아!”

    레나아단의 손에서 만들어진 불꽃화살이 데크 에던의 얼굴을 향해 쇄도한다. 데크 에던은 서둘러 자신의 검을 빼든 다음 불꽃 덩어리들을 일순 베어버린다.

    “제길, 위험하잖아!”

    “당연히, 위험하라고 던진 것인데 아쉽게 됐군. 아쉽게 됐어.”

    “그리고 멀쩡한 목소리로 이상한 말투 좀 버리지 그래, 애늙은이 같으니까!”

    “너보다 나이 많네만. 네 나이는 내가 살아온 세월에 절반도 되지 않는단다. 애송아.”

    둘의 여러 공격이 원정대 사이를 오가는 도중, 나무에 앉아있던 브렌트 잉크가 레니아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프는 나무를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그 말을 들은 레니아단이 꽥꽥대는 데크 에던을 무시하고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상심한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것들은 더 이상 나무라 부를 수 없지.”

    생명이 아니니까. 그 말을 간신이 집어삼킨 레니아단은 잘린 나무 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속까지 까맣게 변했군.”

    레니아단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애처로운 숲을 두리번거린다. 절망화로 인하여 생명력을 모조리 잃어버린 식물 같은 것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그것보다, 모조리 마력이 빠져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형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건지.”

    다시 찾아온 정적, 생명체가 마력을 모조리 손실하면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워 부패하고 썩어야 한다. 모두가 아는 이치와도 같은 것.

    원정대는 레니아단의 말을 듣고 새삼스레 긴장을 하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숲을 본능처럼 둘러본다.

    숲의 이름은 정해진 것이 없다. 원정대에 의해서 ‘절망의 원천지’라고 추측되는 이곳을 ‘절망의 숲’이라 지었을 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창한 숲, 그 울창한 숲에 사계를 뒤엎은 절망의 원천이 존재한다. 여정의 끝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건 나중에, 이 숲을 끝까지 가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들이 향하는 곳, 결말의 종착지, 숲의 끝. 구멍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 기나긴 모험을 해왔다. 그리고 그 끝이 코앞이다.

    “자자, 긴장들 하게나. 앞으로 가야 할 곳은, 아마도 진짜인 것 같으니.”

    바바비어가 하늘에 열린 ‘절망을 토하는 구멍’을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베르히만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마치 그 토닥임은 ‘수고했어.’와 같은 느낌이다.

    “베르히만, 자네가 가지고 다니는 수첩, 아직도 기록을 남길 공간이 남아있나?”

    “예,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베르히만은 항상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적어 그 특징을 기록하며,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원정대의 서사를 기록했다.

    “이쯤에서 각자의 이름을 직접 쓰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써보는 이름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런, 묘한데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렇다면 나부터 적지.”

    셀로닌이 베르히만에게 수첩을 건네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적기 시작한다.

    “됐어, 여기 있네.”

    이름을 다 적은 그는 수첩을 레니아단에게 넘긴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데크 에던이 그녀에게 붙어 칭얼거렸다.

    “내 이름도 써줘. 그 옆에 나 폰 데크 에던은 적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했다고도.”

    데크 에던은 황제지만 글을 쓰지 못한다. 레니아단이 데크 에던의 이름을 적었다. 이어서 원정대 이탈 및 도주 중, 마물에게 사망이라 표기했다.

    “어이, 진심으로 쓸 생각은 아니겠지? 당장 그만둬!”

    데크 에던의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레니아단은 애새끼처럼 소리치는 데크 에던을 노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내 마법으로 적었던 글을 지운다.

    “다 적었으면 내가 적도록 하지.”

    바바비어는 자신의 이름을 적고 브렌트 잉크에게 수첩을 건넨다. 브렌트 잉크는 말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그것을 베일리아에게 넘겨줬다.

    “자, 이제 베르히만이 마지막입니다.”

    베일리아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베르히만에게 수첩을 넘겼다. 수첩의 본래 주인인 베르히만에게 모두의 기록이 되돌아간다.

    수첩에다 자신의 이름을 묵묵히 적고 있던 베르히만을 모두가 직시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적느라 집중한 까닭에 이를 알지 못한 듯하다. 바바비어가 넌지시 미소를 짓더니 베르히만에게 말했다.

    “자네는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

    “예?”

    베르히만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바바비어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최종 국면을 앞두고 전선을 이탈하라는 명령은 난생처음이다. 그것도 원정대의 중심인 바바비어가 그리 말했으니 넋이 나가지 않을 수가 있나.

    “자네는 젊어. 20대의 나이로 그 경지에 다다랐으니, 자네라면 훗날 사계 제일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우리가 모조리 죽어야겠지만, 하하.”

    “하, 하지만.”

    “솔직히 말하지.”

    바바비어의 구실 좋던 미소가 사라졌다. 냉담한 표정과 함께 젊은 검사의 의지를 무자비하게 꺾는다. 이는 그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자네의 실력으론 우리에게 방해밖에 되지 않아. 저 구멍 속은 더더욱 그럴 테지.”

    사실이었다. 베르히만이 제아무리 불세출의 검객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자들이다. 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리고, 그 수첩을 전할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나. 그래, 우리의 기록을 전할 사람 말이네.”

    그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전달. 7인의 영웅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이 기록을 후세에 전달해야만 한다.

    자신이 이곳에 남아 전력으로서 참가하는 것보다 후세를 위하기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자칫 원정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세대가, 그리고 그다음 세대가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가서, 이곳에 우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리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베르히만은 그들의 흔적이 담긴 하나의 수첩을 움켜쥐고서, 남은 자들을 향해 목례 한다. 떠나는 베르히만을 향해 모두가 한마디씩 건넨다.

    ―원정대의 일원이라 영광이었다. 그대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지.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 들지 못했던 축배를 함께 하자. 부디 그 축배가 여전히 일곱이길 바라며.

    이들을 향해 다시금 목례를 전하는 젊은 검객. 그는 이들의 한마디로부터 한 점 망설임 없이 뒤돌아설 수 있었다.

    “달, 달그락!”

    바바비어와 나머지 영웅들이 다 함께 폭소했다. 해골들 탓이다. 이를 지켜보던 베르히만도 기분이 좋았던 나머지 히죽 웃어본다.

    “녀석들도, 자네와의 이별에 아쉬움이 남는 거야, 가서 악수라도 해주는 것이 어떻겠나.”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저희도 이 여정이 쉽진 않았을 테니, 몹시 감사하고 있습니다.”

    베르히만이 일곱 해골들 앞에 선다. 일곱 해골들도 나란히 서서 그를 마주한다.

    쑥스러운지 말끔한 두개골을 긁어대는 해골들, 절망이 침식한 숲으로부터 원정대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고마웠다.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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