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74화 (174/222)
  • 174화

    * * *

    ‘비로소 떨어질 때가 찾아오면, 또 다른 별은 뜨건만.’

    ‘저 무수히 많은 별들 중에 굳이 내 별 하나가 필멸이라 할 수 있나.’

    * * *

    아템과 그날 본 밤하늘은 그림 같았다. 구멍 속에서 보았던 꺼림칙한 검은 하늘과는 전혀 다른, 그런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녀석과 나는 가르강티아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고, 아저씨를 통해 끝내 ‘진짜 사계’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영겁의 시간 동안 함께 지냈던 아템과 사계의 땅을 처음으로 밟아 본 것이다. 밟은 사계의 지면은 생명력이 가득했다.

    붉거나 검은 것 이외에는 색이랄 것이 없었던 구멍과 달리, 진짜 사계는 다채로운 색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마치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성질이 전환된 느낌이었다.

    “뭐야, 이미 사계는 ‘7인의 영웅들’로 인해 지켜졌다고 알려져 있잖아.”

    “아하하, 그나저나 저걸 보아라, 나비다. 안에서 보았던 것과는 딴판이군, 노르트.”

    영웅 취급을 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사계의 파멸을 막는다고 영겁의 시간을 보낸 건 우리들인데, 어째서 그들이 찬양받고 있는 건지.

    아저씨 말로는 우리가 가르강티아를 조우했을 때부터 절망을 토하는 구멍은 사계의 하늘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하마터면 가르강티아가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서 빠져나와, 사계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르는 일, 결말 끝자락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우리가 버저비터를 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망을 토하는 구멍은 닫혔고, 이어서 7인의 영웅들은 그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절망들을 막는데 혼신을 다했다.

    보아하니 우리가 가르강티아를 조우했을 때, 검은 하늘의 구멍이 외부로 절망들을 보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마력 전쟁이라…. 외부도 꽤나 곤란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잖아.”

    “공기 중에 마력이 소실된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는 ‘일화’가 처음으로 ‘■■’에게 개입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군.”

    “그게 무슨 소리지, 아템?”

    아템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정보를 다룰 때 일어난다. 최대한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수정을 거치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를 이루는 ‘■■’와 ‘일화’가 부딪치면 발생하는 일종의 ‘오류’ 같은 것으로, 예를 들어 그대와 내가 이곳에서 전력으로 싸우게 된다면, 여파로 이곳은 어떻게 될까.”

    “아.”

    “그래, 이 이야기의 창조주라고 볼 수 있는 ‘■■’와 ‘일화’가 대치했기 때문에, 그 여파로 ‘마력이 공기 중에서 소실되는 현상’이 이야기 속에서 보상효과로 나타났다는 말이지.”

    * * *

    메르헨. 이곳은 우리들을 위한 터. 고장 나 버린 기계장치의 신이 머무는 섬.

    아저씨는 우리가 구멍에서 나오기 전에 이 터에다 이야기를 심었다. 그 이야기가 피어올라 섬이 되었고, 마을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이 존재한다는 신의 화원. 사계(四季)를 담은 섬. 이 곳을 수호하는 정원사들, 그들의 마을 메르헨.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휴식이 허락된 영혼들의 터.’

    아저씨는 나와 아템을 조형하기 위해 많은 창조력을 소비한 관계로, 창조력을 수급할 때까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때가 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해주겠다며, 내게 기대감을 주기도 했던 아저씨다.

    이는 잘 모르겠다. 지구에 돌아갈 육체는 수류탄에 터져서 없는데. 그렇게 말하니 살던 곳으로 환생을 시켜주겠다는 소리더라. 환생이라.

    ‘편리하네, 신이란 건.’

    그렇게 그 작자는 나를 이곳에다 내버려 두고 사라졌다. 평소에는 ‘노르트여, 들리는가.’라며 시시때때로 말을 걸어오던 양반이 연락 한 통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이거, 환생 못 시켜 줄 것 같으니까 잠수 탄 게 분명하다고.

    “나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나도 그대와 함께 지구로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템,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라도 가자.”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 설령 구멍이라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그대, 가끔은 솔직해질 때도 필요한 법이다. 본래 연인의 관계란…….”

    메르헨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영겁의 시간 동안 더러운 것만 봐왔던 터라, 이곳의 생활은 지친 우리들을 부족함 없이 치유했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개울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마을 사람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실로 유유자적한 하루를 보냈다.

    우리에게도 친구가 생긴다. 에르미라는 녀석이었다. 에르미도 정원사로 메르헨의 수많은 꽃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간혹 예쁜 꽃이 보이면 꺾어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저는 에르미, 이곳의 정원사죠. ‘전설’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사계를 지켜줘서 고마워, 친구들.”

    ‘전설’은 이 섬을 이루는 가장 큰 일화. 아저씨는 이곳에다 ‘사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절망을 토하는 구멍 속에서 희생한 두 명의 천사가 있다’는 일화를 뿌리내렸다.

    이곳 메르헨은 ‘7인의 영웅들’이 아닌 ‘노르트 아템’이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곳, 지친 우리들을 먼저 알고 토닥여주는 그런 자상한 곳이었다.

    ―황천에서 두 천사가 모든 비극을 막고, 날개가 다쳐 떨어지니.

    ―두 천사의 휴식을 위해, 이 섬은 수많은 꽃을 피워놓고 그들을 맞이하리다.

    * * *

    아템과 고대했던 여행을 떠났다.

    구멍 속에서 절망들과의 전투를 떠올린다. 북대륙의 어느 평야, 사지가 잘려 그곳을 기었고, 아템은 옆에서 오른 다리가 잘린 채로 함께 기었다. 지금, 그곳을 멀쩡하게 밟고 있다.

    초원. 넓게 펼쳐진 초원 위로 나비가 날아다녔다.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이 아닌 아름다운 것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우리가 본 것들과 완전히 다르다.

    절망의 파도가 몰아칠 때. 어렵사리 그것들을 피해 몸을 숨겼던 순간을 떠올린다. 다 허물어져 가는 국벽을 넘어 도착한 어느 농장의 마구간, 서로에게 기대어 간신히 휴식을 취했다.

    지금, 그 비어있는 마구간에는 생명력이 넘치는 명마들이 숨을 쉬고 있다.

    어느 제국의 시내를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수 없다. 상인들의 호객행위에 수십 번을 붙잡혔다.

    하루가 짧아 바삐 살아가는 상인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아템과 나는 서로를 찾기 바빴다. 그 순간마저 즐거웠다. 비로소 여유였다.

    “웃으니 보기 좋아, 노르트.”

    아템과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해왔던 일들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계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크으, 맥주 맛이 끝내주잖아.”

    “마시는 모습도 보기 좋구나, 그대여.”

    우리는 정처 없이 다녔다. 구멍 속에만 있었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계는 어디든 아름다웠으니까. 사계를 넘나들며 최대한 예쁜 것들로만 시야를 가득 채워도 아쉬움이 남는다.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우리, 여행의 끝이 아쉬움과 함께 다가왔다.

    그다음은 아템과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에 대해서였다. 언제 지구로 환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부재중인 아저씨를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우리, 여관을 해보는 것이 어떤가?”

    녀석은 대뜸 여관을 추천했다. 그것도 서대륙에 있는 델타라는 제국에서 여관을 운영해보자고.

    “많고 많은 곳 중에서, 델타?”

    “이것 봐라 노르트, 이렇게, 눈을 감고서 손가락으로 대충 지도를 찍으니, 델타라는군.”

    “터 잡는 방식이 상당히 구린데.”

    “하하, 그대는 주문을 받고, 나는 음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 지금 이렇게 케피탄 맥주도 팔고.”

    오랜만에 맥주라, 기분이 좋았던 나머지 꽤나 취한 듯하다. 보글거리는 케피탄 맥주의 탄산을 보며 한숨을 쉰다. 이는 기어이 얻어낸 여유가 담긴, 그런 날숨이었다.

    녀석은 노르트의 ‘과거’를 잘 알기 때문에, 이를 생각해서 여관을 추천한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혔던 나머지 머리가 어지럽다. 취기도 빨리 오른다.

    “…그렇게, 조금씩 찾아오는 몇몇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는 평온함이 무엇인가 예전처럼 다시 알아가는 거지.”

    어느 여관에 테이블, 모험가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파묻혀서 잠이 든다. 아템은 힘이 좋은 터라 노르트를 번쩍 안아 들고 객실을 향했다. 모험가들의 휘파람 같은 야유가 터진다.

    * * *

    ‘7인의 영웅들, 시작의 원정대’

    노바인이라는 이름의 거장이 탄생시킨 위대한 명화였다. 메르헨에 돌아온 이후, 녀석이 대뜸 사계에 다녀오더니 내게 건네준 선물이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상당히 값비싼 물건이라고.

    “자, 노르트를 위한 선물.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테니, 이 물건은 꽤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이 큼지막한 그림을 여관에다….”

    “보기 껄끄럽거나, 보기 좋거나, 그런 것들은 늘 클수록 눈에 띄기 십상이지. 아하하.”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대하구만 그래.”

    7인의 영웅, 우리들과 애증의 관계를 이루던 인물들. 아템과 나를 만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녀석은 시작의 원정대 앞에 서서, 나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이윽고 협박을 가한다.

    “버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누가 버린데.”

    “하하, 장난이다. 노르트.”

    “버리긴 아까우니까, 팔아버리게.”

    “…?”

    메르헨에서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아템과 나를 연결하던 손등의 문양도 함께 지워졌다. 마치 힘을 다한 세계의 유산처럼 그 문양이 희미해진다.

    녀석과 조금씩 여관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이어질 진짜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대했다. 인테리어는 어떻고, 음식은 어떻고. 파란만장한 두 명의 초보 자영업자들. 마치 프롤로그를 시작하는 느낌이다.

    “……아템. 어째서.”

    여유와 행복을 예견하는 기분 좋은 프롤로그가 끝이 났고, 출발선을 통과하는 사람은 노르트뿐이었다.

    “…바다거북 여관도 가보기로 했잖아.”

    황혼의 숲. 녀석은 아름다운 강가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투명한 수면에 반쯤 잠겨 은은한 빛을 내보내는 검은 누가 보아도 노르트의 검, 아템이다.

    다크판타지를 끝내고 델타에서 여관을 운영하자던 약속을, 그녀는 지키지 못했다.

    * * *

    ―친애하며, 사모하는 나의 벗. 노르트에게.

    그대, 보고 있는가. 벌써부터 그대의 앙칼스러운 태도가 느껴져서 쑥스러울 따름이군.

    노르트에게 이실직고한다. 나 아템은 그대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가르강티아와 조우하여, 그대와 함께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 사실 그때의 나는 수명이 다하고 말았다. 아니, 다했어야 했다. 그것이 내 운명의 끝자락이었으니까.

    그대와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완주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이는 그대에게 마땅히 칭찬받아야 되는 일. 내게 칭찬하라, 노르트!

    아이러니하게도 결말을 봉인하면, 일화가 나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많은 힘을 소비했던 것 같군.

    그러니까 노르트, 이어질 이야기는 꿋꿋하게 혼자 걸어갈 수 있길 바라지. 아니, 그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에 많은 이들과 함께 걸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이야기를 이어가.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쉬어야겠어.

    그 이야기에 내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만, 너무나도 아쉽다만….

    그대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 역시도 그 행복을 미리 당겨 받은 기분이니,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 그걸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나 아템, 노르트의 검으로 창조되어 그 무엇보다 행복했다.

    나 아템, 노르트의 반쪽을 채워 줄 수 있는 영혼이 될 수 있었기에 감복했다.

    사랑하는 노르트, 그대가 살던 진짜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더군.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나는 그대가 바라보았기에, 빛을 줄 수 있었다. 그대가 바라보지 못했다면, 나 또한 그대의 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르트, 나는 그대에게 훌륭한 벗이었는가.

    하나 대답은 괜찮다. 이 아템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대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내가 그대에게 어떤 존재인지.

    마지막으로, 그대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 델타에서 유유자적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시작할 노르트의 새로운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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