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73화 (173/222)
  •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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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을 토하는 구멍’

    ―종장(終章) 가르강티아(Gargant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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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을 토하는 구멍, 이곳은 아칸을 빙자한 세계. 사계를 직접 본 적이 없는데도 덕분에 사계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멀쩡한 사계는 훗날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멸망 직후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될 줄은.”

    구멍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하품하는 심연 가르강티아’가 만들어낸 또 다른 사계가 ‘절망을 토하는 구멍’의 내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둥지라고도 한다.

    “주인,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멸망 직후라는 심상이 모여서 만들어진 영역이라 맨정신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껄끄럽다. 이야기의 결말을 이루는 불편한 클리셰들이 모인 곳이니 그럴 법도 하다. 특히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흑색의 하늘은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래,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까.”

    아템도 사계를 본 적은 없다.

    일화, 그러니까 아저씨가 녀석을 조형하는 과정에서 세계관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내포했다. 무지한 나를 위한 길잡이인 것이다.

    녀석이 오랫동안 대륙을 넘나든 모험가행세를 하며 내게 조언을 던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충 ‘하루’라는 기준으로 지정한 시간이 있다. 아템과 나는 ‘하루’ 동안 각각 오천 마리씩, 총합 일만 마리의 절망을 베어낸다. 하루에 한두 마리씩 베어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라는 가짜 시간을 끝내면, 우리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거처를 찾아 움직였다.

    꿈틀거리며 지면을 기어 오는 괴상망측한 마물들. 아니 마물이라고 부르기에도 괴기한 형태를 지닌 것들을 피해 몸을 숨긴다.

    “주인, 저곳에 집이 있군, 저기로 가지.”

    “제국이 편하긴 해, 숨을 곳도 많고.”

    건물이나 환경이 ‘멸망한 직후’일 뿐이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손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제국 같은 곳에 머무르게 되면, 사람은 없어도 남은 건물이 있어 휴식을 취하는데 편리했다.

    마안의 뭉치가 가져다주는 영향 때문에 수면의 필요성이 없어지긴 했지만, 이곳에서 사람다워지려면 사람다운 습관을 잊지 말아야 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곳은 정말이지 끔찍한 곳이다. 수없이 많은 절망들이 꿈틀거리며 시시때때로 우리를 죽이려 든다. 가끔은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곳에 있다 보면 당연한 것에도 회의감을 느낄 때가 있으니, 한번은 어째서 절망이 우리를 적대시하는지 의문점을 품은 적도 있었다. 이에 아템이 대답했다. 아마 이도 아저씨가 내포시켜놓은 지혜인 듯하다.

    ‘희망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에게 절망은 언제나 피어오르는 법이고.’

    ‘절망이 희망을 찢어발기려고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주인.’

    당연히 ‘희망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류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모든 인물들을 의미한다. ‘절망’은 사계에 적용되는 결말을 위한 ‘클리셰’, 결말을 위해 합당한 움직임을 취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절망들의 종류와 형태는 다양하다. 절망의 모습은 사계의 심연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기에, 인간 및 동물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개체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드래곤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개체도 존재했다. 전자처럼 본래 그 무력이 뛰어난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 달리 지성마저 뛰어난 편이기에 소멸이 어려운 편에 속한다.

    이 모든 것들의 원천인 ‘가르강티아’를 찾아 봉인하는 일이 우리의 임무.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아템과 나는 멸망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들의 둥지, 심연의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제길, 네가 없었으면 심심해 죽었을지도 몰라.”

    “늘 까칠하게만 나를 대하던 주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을 때, 방금 그 발언은 내게 아주 소중했다.”

    “소중하다라.”

    “그래, 소중하다. 주인이 나를 필요로 해준다는 말이.”

    시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곳은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렀는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아템이 ‘흠, 천년 정도는 지났겠군.’이라고 말한다면 천년이 지난 것이다.

    “흠, 천년 정도가 더 지난 것 같군.”

    “하, 벌써 또 그렇게 지났다고?”

    아템은 내게 있어서 동료이기도 했지만, 천년을 함께 지내 온 유일한 짝. 훗날 녀석과 이 결말을, 이 클리셰를 봉인할 수만 있다면, 합당한 보답으로 멀쩡한 사계를 돌아다니자며 여행을 고대했다. 그래, 모험이 아닌 여행을 고대했다.

    * * *

    개중에는 72개의 절망이라는 놈들이 있는데, 이놈들 상당히 피곤한 녀석들이다.

    물론 아템과 함께라면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진 않으나, 다른 절망들에 비해 전투를 오랫동안 지속해야 했다.

    특히 우리가 ‘바엘’이나 ‘아가레스’라고 지정한 개체와의 전투는 약 97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꺼림칙하게 생겼단 말이지.”

    “이들은 심연에서 태어난 것들이니, 우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템의 말이 맞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구멍에 들어와 절망들을 직접 눈에 담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전투는 뒷전이고 제정신을 유지하는데 백 년을 허비했던 것 같다.

    그나마 ‘마안의 뭉치’ 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패닉에 빠지지 않게끔 마안의 뭉치는 지속적으로 내 감정을 이성적으로 제어해주는 역할을 했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으로 이들을 마주하면, 제 눈을 파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 * *

    72개의 대절망 중, 대부분의 개체를 소멸시켰을 시점. 마안의 뭉치가 조금씩 내구력을 잃어갔고 예전처럼 높은 효율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 이쯤부터 마안의 뭉치의 사용 횟수를 줄였던 것 같다. 대신 아템의 사용 빈도를 높였다.

    “무리하지 마, 아템.”

    “노르트, 나는 그대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아템은 여타 검들과 차원이 다르다. 역시 아저씨가 만든 것이라 그런지 내 ‘마안의 뭉치’와 비슷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절망을 소멸시키는 ‘마검’의 그 자체이자, 창고이기도 하다.

    마검(魔剣) 아템, 그녀는 길게 떨어진 은빛 머리칼을 사방에 흩트리며 검을 쥔다. 제가 검이 될 수도 있지만, 제 안에 있는 검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다 됐어, 아템.”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구를 마친 안구에 하델의 마안을 결속하여, 전방에 있는 절망들을 침묵시켰다.

    마안의 뭉치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안구가 파손되는 까닭에 복구를 위한 시간을 아템이 벌어다 주는 것이다.

    “노르트, 근래에 들어서 안구의 수복 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이빨을 으득으득 긁으며, 다 죽은 절망의 시체를 발로 깐다. 그도 그럴 것이 안구를 수복시키거나 재구성시키는 일이 만 번을 넘어가고 있다. 우습지도 않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갈수록 인간미가 없어지고 감정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어디까지나 외부로 표출되는 것은 임시방편의 표현일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노르트, 이빨을 긁는 습관은 좋지 않다!”

    “알겠어, 잔소리는.”

    * * *

    디스페어 웨이브 [Despair Wave]

    아템과 나는 이 현상을 디스페어 웨이브라 불렀다. 희망의 클리셰를 지닌 우리들을 알아채고, 둥지 속의 절망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현상이다.

    그것은 절망의 파도였다.

    공간을 공포로 물들게 만드는 끔찍한 비명소리, 그것은 아템과 나의 것이 아닌 절망들의 음성이다. 마치 귀로 죽음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하나, 둘, 끊임없이 녀석들을 베어내도 어디선가 나타나 우리를 향해 그 끔찍한 비명을 토한다. 이 파도는, 이따금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크윽.”

    “노, 노르트!”

    복부 정중앙이 넓게 뚫린다. 이런 식으로 나와 아템은 처참한 죽음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맞이했다. 별일이 아니었다.

    내가 절망으로부터 사지가 뜯겨나가, 수복을 이루는 시간엔 아템이 무조건 죽는다. 아템이 팔이 잘려 검을 휘두르지 못해 전투가 불가능하면 내가 죽는다.

    그렇게 우리는 절망의 파도가 몰아칠 때, 서로의 죽음을 직시하고, 묵시하며, 번갈아 그 파도를 헤엄친다.

    가끔 운이 좋으면,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닿을 수 있었다. 절망들의 비명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등에서 따라오는 온기, 곁에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의지가 된다.

    * * *

    “…얼씨구.”

    “왜 그러지, 노르트.”

    아템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영겁의 시간 끝. 드디어 가르강티아와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실로 결말이라는 클리셰와 조화로운 모습, 여타 다크판타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놈이다.

    검은 하늘에 핵이 되는 큼지막한 구멍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가린 채, 몸을 감싸고 있다.

    “진짜 X같이 생겼네.”

    “그게 무슨 뜻이지? 노르트.”

    머리맡에 물음표를 다발적으로 띄우는 은발의 여인, 나는 그녀에게 X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다.

    지금처럼 한국어가 아칸어를 대신해서 필터링 없이 나올 때가 있다. 아템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손가락으로 가르강티아를 가리킨다. 아템에게 저 형체를 설명해보라고 했다.

    아템 가로되. ‘인류가 기록한 수많은 괴수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하게 생겼다. 분명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할 것 같이 생겼으나, 두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허공에 뜬 채로 100척은 쉬이 넘길만한 그 거대한 육체를 움직이고 있다. 심히 불쾌하기 그지없다.’

    ‘얼굴 형상에 입, 코라고 칭할만한 것이 없으며, 그것을 대신하듯 무수히 많은 안구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오감을 담당하는 기관이 시각 이외에 존재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게 생긴 걸 보고, X같이 생겼다고 하는 거야, 아템.”

    “그렇군, 저것은 X같이 생긴 녀석이로다.”

    “비속어니까, 함부로 쓰지 말고.”

    “가자, 노르트! 저 X같이 생긴 가르강티아를 무찌르고, 사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래.”

    ―[결말 코드 인식 중… 인식 완료]

    ―[대상자로부터 카테고리 ‘최종국면’이 판단됨. ‘일화(The Anecdote)’의 승인]

    중략, ―[오메가(omega) 랭크 : ‘엔드 오브 시나리오(End of Scenario)’ 결속 준비 완료, 결속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결말은…. 잠깐, 그다음이 뭐였지 아템?”

    『그대와 나, 우리 같은 ‘기계장치와 같은 수단’에 ‘이야기의 결말’이 의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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