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72화 (172/222)
  • 172화

    * * *

    1. ‘■■’ [The ■■■■■■■■]

    2. ‘■■’ [The ■■■■■■■■]

    * * *

    푸석푸석한 모래가 뺨에 닿았다. 모래로 되어있는 바닥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래. 우리가 아는 본연의 색과는 다른 하얀색이었다. 사방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면으로부터 쭉 이어지는 시야의 모든 것이 새하얗다.

    나는 이상한 공간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곳을 한참 어슬렁거리다, 생사에 대한 고찰이 머리를 스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받아버린 터라 죽어야 마땅하지 않았는가.

    사지가 찢기는 것은 물론이요, 복부가 터져 바깥으로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 한가득 쏟아졌으니, 죽어야 마땅했다.

    ‘여긴 어디야, 도대체.’

    사후세계? 지옥? 천국은 아니고. 물론 천국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후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천국으로 가야만 했다.

    어머니, 아버지, 하물며 나를 위해 거창한 희생을 했다던 형님께서, 죽은 나를 반겨주려면 이곳은 천국이어야만 한다.

    새하얀 공간은 공간 감각을 소실하게 했다. 혹시 제정신을 유지한 상태로 아득한 이곳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게, 진정한 지옥의 형태가 아닌가. 의구심을 품는다. 어쩌면 그보다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마음은 비웠는가, 반쪽짜리 영혼이여.」

    어느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실로 지옥인 줄만 알았다. 성별과 관계없이 그 중간을 이루는 중성의 목소리가 나를 반쪽짜리 영혼이라 부른다.

    「이 공간은, ‘이야기의 무(無)’를 의미하는 곳이다. 그러니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이야기의 무, 처음에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중성의 목소리를 가진, 그리고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독백을 끝내자 그것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반쪽짜리 영혼을 부른 아칸의 ■■이며, 그 이야기의 ■■이다.」

    ‘■■’

    이해할 수 없는 단어.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친절하게 번역된 한국말에서 저 구간만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다. 마치 ‘삐’ 소리를 내는 것처럼, 다시 물었지만 매한가지였다.

    * * *

    상대적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검은색 네모 박스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네가 누군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대충 신이라고 불러도 될까.’

    녀석은 그렇게 불러도 관계가 없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 내에서 ‘신’이라는 개념과 자신은 유사하다고. 기껏 그렇게 물어보고선 나는 그를 ‘신’으로 부르지 않는다.

    ‘아저씨.’

    이 아저씨가 아칸이라는 세계로 나를 불러들였다. 나 반쪽짜리 영혼은 앞으로 어떠한 장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르겠다. 근무 중 가끔 보았던 웹소설에 나올 법한 특이한 단어다.

    아저씨와의 대화는 끊임없다. 마치 살아생전 읽었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과 그 대화의 구조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와 ■■가 공존하고 있다는 ‘아칸’이라는 곳에 관련된 이야기들, 그리고 모든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지했다.

    정보가 반쪽짜리 영혼에 스며들고, 그것이 완벽히 내 것이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저장되는 기분이다.

    「반쪽짜리 영혼이여, 이제 그대를 조형할 때가 되었다.」

    내가 진정한 ‘기계장치의 신’이 되기 위해 조형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를 위해서 아저씨는 내게 ‘마안의 뭉치’라는 것을 주었다.

    ‘죽은 천사들이 쌓인 구렁텅이.’

    ‘그들의 눈을 묶어 만든 눈.’

    아저씨가 내게 보여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이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과 유사한 ■■가 날개 달린 대리인을 만들었으며, 그들을 ‘천사’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했다. 문제는 필요가 없어진 탓에 저렇게 버려진 것이라고. 새하얀 모랫바닥 안에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형태가 잔뜩 모여 있었다.

    아저씨는 버려진 그것들을 모아 눈을 만들었고, 마안의 뭉치가 탄생시켰다. 그 눈은 ■■가 잉태한 결말이 오기 전에, 결말 속으로 들어가 그 국면을 미리 타개할 수 있는 힘이라 했다.

    「그대 이름은 노르트.」

    다음은 새로운 내 이름이다.

    본래의 이름을 두고서 꼭 그 이름을 사용해야겠냐는 물음을 던졌다. 좌우지간 나는 내 이름을 쓰려고 했다. 쓰던 이름을 써야지. 근데 이상하게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 * *

    결국은 이름을 잊은 채로 ‘노르트’가 된다. 아저씨는 이어서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 대해서 설명했다. 왠지 듣자마자 피곤해진다.

    ‘아저씨와 ■■는 사이가 안 좋은가 봅니다.’

    ■■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의 이야기만 들어봐도 둘은 사이가 좋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와 ■■는 사이가 좋지 않다.

    ■■는 결말을 창조했다. 마치 그가 만든 결말을 아저씨가 방해하려고 하는 느낌이다. 분명 ■■는 비극을 원하는 것 같은데, 아저씨는 그것도 모르고 애써 그것을 막으려는 느낌이다. 아저씨는 ■■의 방식을 따분해했으니까.

    「너와 나는 말이다. 숨겨진 ‘더 재미난 이야기’인 것이다.」

    「이야기란 읽는 자들이 있어야 비로소 탄생하는 것. 그래야만 살아 움직일 수 있으니.」

    결말의 구조가 ‘절망을 토하는 구멍’으로 되어 있다. 나는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 오기 전에 그것을 막아야만 하고. 그러니까 아저씨는 지금 ‘더 재미난 이야기’를 위해서 나를 ‘결말’이라는 끔찍한 곳에 집어넣겠다는 의미였다.

    보통 이런 것은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나는 피곤한 존재였다.

    7인의 영웅들, 시작의 원정대.

    나는 머저리 주인공들의 대체품.

    그들의 중심 ‘바바비어’ 그는 결말을 향하는 중이며, 또한 그 결말은 그와 동료를 죽게 만든다. 근데 그건 또 결말과 관계없는 주인공들의 의지라고,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좌우지간 ■■가 만든 결말 때문에, 아저씨가 원하는 결말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바바비어’가 이끄는 7인의 원정대가 제 할 일만 똑바로 했어도 이 세계는 정해진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가 결말만 똑바로 만들었어도.’

    「똑바로 만들었다. 결말을 이끄는 것은 그들의 의지. 단지 똑바로 만들어진 결말을 거부하려고 했던 것일 뿐.」

    ‘절망을 토하는 구멍, 가르강티아.’

    이야기의 비문과 오류들이 모여 만들어진 심연의 구렁텅이. 말 그대로 무저갱이나 지옥 그 자체를 의미하는 구멍. 그것의 심장인 ‘가르강티아’의 형상이 무의 공간에 나타난다.

    ‘절망을 토하는 구멍’은 ‘죽은 천사들이 쌓인 구렁텅이’와 비슷했다. 후자는 죽은 시체들이 모인 느낌이라면, 전자는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전부 가짜다.

    이 무의 공간에서, 아저씨는 가짜를 진짜처럼 표현할 수 있었다. 내게 지금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이야기의 최종국면을 의미하기도 했다.

    ‘보통 주인공들은 강대한 힘을 얻고, 결말 속에서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지 않나?’

    「강대한 힘, 저곳에 사는 일반적인 존재들과는 다른 아득히 남다른 무력, 지혜와 용기, 이 모든 것을 갖추어도 결말을 조정하는 힘이 없다면 정해놓은 끝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결말이 영 시원찮다는 것이고, 주인공도 그렇게 생각하고 거부했으니, 그것을 바꾸기 위해 아저씨는 나를 불렀다는 말인가.

    너무 어렵게 이야기한다. 이 아저씨.

    어디까지 돌려서 말할 심산이냐.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르트. 반쪽짜리 영혼인 그대가 투입하는 것이고.」

    ‘왜 아저씨가 시작한 이야기도 아닌데, 아저씨 멋대로 바꾸려 합니까.’

    「바뀌는 결말은 나로부터 탄생하니까.」

    ‘…또 복잡한 소리 하네.’

    「그대도 ‘비극’보다는 ‘희극’이 좋지 않은가.」

    그렇지, 비극보다는 희극이 좋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비극을 겪다 왔는데. 뭐든지 의심하고도 볼만 한데, 어울리지 않게 수긍하기 시작했다.

    몸이 터져서 죽고 난 다음 이곳으로 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해졌고, 불편했던 감정들이 아무렇지 않게 소멸했다. 반이 텅 빈 느낌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반쪽짜리 영혼이여, 아칸이라는 이야기에서 그대는 이제 ‘노르트’로 새롭게 조형되었다. 그것이 네 의구심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면 그리 받아들이겠는가.」

    “짜증 나네요, 저건 내 이야기도 아닌데.”

    「이곳은 무의 공간, 하물며 그대와 공존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대는 원했기에,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 * *

    아저씨가 만들어 놓은 결말과 이어지는 통로, 약간의 억울함이 물씬 피어오른다. 판타지인데, 어째서 나는 여타 주인공들과 달리 오자마자 결말과 조우해서 피 터지게 싸워야 하는 것인가. 강해질 틈도 없이 강해졌네.

    「저곳에 들어가게 되면, 저것을 없애기 전까진 외부로 나오지 못한다.」

    “아저씨 소원을 제가 이뤄주면, 아저씨는 제게 뭘 줄 건데요.”

    「그대가 이곳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그대의 보상이다. 그대는 그것을 원했고.」

    “그런 거 원한 적 없다니까, 그럼 내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 그쪽이 이야기해 보든가.”

    「…….」

    말이 심했나, 그래도 수류탄에 맞고 죽은 나를 어떻게든 되살린 장본인인데.

    아저씨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고개를 으쓱거리며 결말로 들어가기 전, 몸을 가볍게 풀었다.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단, 오히려 무지한 편이 좋을 때도 있으니.」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네가 이곳을 벗어났을 때부터, 그 일부가 삭제될 것이다.」

    새하얀 모래 언덕, 백사를 밟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은발이 새하얀 공간 속에서 휘날린다. 절제된 걸음걸이. 나를 향해 웃는다.

    그녀는 어느새 새하얀 빛과 함께 내 손아귀에 들어와 ‘검’의 형상으로 모습을 갖춘다. 알고 보니 이것은 내 무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비어있던 무언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텅 빈 반이 하나가 된 느낌이다.

    「네 반을 채워 줄 영혼, 아템이다. 」

    「순수하게 ‘그대를 위해서 조형되어진 인물’이니, 긴 여정에 외롭지 않을 든든한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하, 아템? 급하게 만든 티가 팍팍 나는데.”

    심연으로 이어지는 통로, 아템을 쥐고서 유유히 걸어간다. 아마 긴 시간이 될 것 같다.

    * * *

    「먼저 온 반쪽짜리 영혼이 사는 이야기의 결말, 그 이야기의 기적을 연출하는 또 다른 반쪽짜리 영혼이라.」

    .

    .

    .

    「그 이야기 안에 지독한 결말이 있었으니.」

    「이 부르짖음은 독자의 빛이라.」

    「이야기는 땔감이 되어 비극을 맞이하니, 감히 ‘기계장치의 신’은 ‘일화’의 뜻에 따라 기중기를 내린다.」

    1. ‘■■’ [The ■■■■■■■■]

    2. ‘일화’ [The Anecdote]

    2―1. Setup : ‘deus ex machina’

    「그대가 바라는 희생을 할 수 있으니, 이제는 그대가 구원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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