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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166화 (166/222)
  • 166화

    * * *

    새하얀 빛줄기로부터 일대에 날아다니던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소각된다. 그 빛줄기 사이로 푸른 용이 거침없이 날아다녔다.

    이어서 붉은 용 앞에 유유히 나타난 한 사내가 남은 잔존 병력들에게 입을 연다.

    “내 용을 돌려받으러 왔다.”

    동공의 형태와 색상이 계속해서 새것으로 교체되는 사내, 하늘에 거룩히 떠다니던 수많은 성기사들이 티끌도 없이 소멸한 원인이었다.

    정의의 심판에 위치하고 있던 이그리스 십자회의 심판자는 집중했다. 저 사내가 성하께서 말한 ‘결말과는 상관없는 자’가 분명하다.

    “결말과는 상관없는 자여.”

    “나는 현재 신으로부터 모든 은총을 둘렀다.”

    비르테리아의 모든 은총을 둘렀다. 정의의 심판에는 헤르메딕트 성가대가 위치하여 이 역시도 불사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해볼 만할…….”

    아서는 칼날의 피를 털어냈다. 심판자의 목은 떨어지고, 이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헤르메딕트 성가대는 재빨리 심판자를 복원시켰다. 헤르메딕트 또한 성검 아쉬포르마를 통해 더욱 효율적인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서는 주위를 둘러본다.

    이윽고 이빨을 긁으며 소심한 분노를 표했다. 깃발에 매달린 노튼 아네스의 시체, 우리 여관의 마스코트를 담당하는 붉은 용, 잔뜩 망가져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정신을 차리고 부활에 성공한 심판자의 목은 순식간에 떨어졌다. 정확히 머리가 몸을 벗어나 지면에 부딪치기까지 그 단말마는 이어진다. 단지 애처로울 뿐이었다.

    “…일어.”

    다시금 성가대는 심판자를 복원시켰다. 강대한 마력과 신성력을 촉매로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의 소생만으로도 성가대 중 두 명이 생명력을 다해 쓰러져 죽었다.

    “원하는 만큼 살아나 봐, 불사도 꼭 좋은 게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거야.”

    심판자는 소생과 동시에 소멸했다. 성가대의 노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아서가 심판자의 재탄생을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도, 도대체…. 아니, 이게.’

    그 뒤로 심판자의 머리가 백 번 넘게 떨어졌을 때쯤, 그 완고할 것만 같던 헤르메딕트의 성검에 조금씩 금이 갔다. 성가를 부르던 성가대의 인원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살아나는 속도가 이전보다 줄었는걸.”

    이들에게는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무미건조하게 뱉어대는 저 사내의 말은 너무나도 여유롭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만 같은 기분.

    “빨리, 살려내.”

    헤르메딕트가 주춤거리는 동안 성가대는 계속해서 성가를 부르며 심판자를 강화했지만 점차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심판자도 헤르메딕트와 비슷한 공포감을 느끼며 주춤거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연속적인 소생을 거듭해온 심판자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제, 제발! ……그, 그만!”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은 제 주제에 그릇되지 못한 것이었다. 더 이상 심판자는 검을 쥘 여력이 없다. 이윽고 아서의 압도적인 무력에 정신이 잠식된다.

    “살, 살려…. 아, 아니! 죽여 줘! 제발!”

    결과가 바뀌지 않는 죽음과 부활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오랜 시간 젊은 육을 유지하며 살아오던 심판자의 실증이 공포로 변질했다.

    아서의 표정 없는 얼굴과, 무미건조한 음성에는 이렇다 할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도리어 그것이 심판자와 헤르메딕트를 더욱 공포감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이 연속되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심판자, 이미 그 목은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뭐해, 빨리 안 살리고.”

    아서는 심판자의 떨어져 나간 머리가 자신을 향해 구르는 것을 발끝으로 멈춰 세운다. 이내 헤르메딕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내의 음성은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무미건조했고, 시큰둥했다. 다만 그 사이에서 흉흉한 분위기를 내는 분노감이 가끔 음성을 비집고 올라왔다.

    “혹시 너희가 떠받드는 비르테리아의 기적이란 게, 고작 이 정도가 전부는 아니겠지.”

    정신을 차린 헤르메딕트가 성검 아쉬포르마를 쥐며 심판자를 다시금 소생시킨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콰직.

    이윽고 기적을 다한 성검이 파편을 튀기며 파괴되자, 헤르메딕트는 지면에서 소멸하는 성검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손으로 쓸어 담았다.

    애처로운 그 손을 가볍게 지르밟는다.

    “그래 뭐, 아무튼 고생했다.”

    헤르메딕트의 손을 밟고 있던 아서가 별안간 휘청거리더니, 거친 신음을 뱉으며 그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쥔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약간의 피가 샌다.

    ‘기세 좋던 자가, 갑자기 어째서?’

    헤르메딕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단말마 대신 남은 신성력을 토해내며 심판자를 소생시키기 시작한다.

    다시금 부활에 성공한 심판자는 헤르메딕트를 향해 ‘이제 나를 죽게 놔둬, 제발!’이라며 괴성을 질렀다.

    헤르메딕트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자신을 수차례 죽게 만들었던 사내의 상태가 다소 불안하다는 것을 인지한다.

    ‘시, 신이시여. 이것은 기회란 말입니까.’

    혹시나 싶었다.

    이윽고 심판자에게 저 사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심판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

    놓았던 검을 다시금 쥐고서 순식간에 사내를 향해 달려든다.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검에는 온갖 기적이 부여되어 그 어떠한 상성도 존재하지 않으니.

    ―칭.

    눈앞에 나타난 검기가 심판자의 검과 부딪치며 굉음이 터진 뒤, 차마 볼 수 없었던 두 번째 격에 심판자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란베르크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서 앞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헤르메딕트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검객이 굳게 쥐고 있는 신념, 가문의 의지는 신의 이름을 빙자한 헤르메딕트의 심장을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괜찮으니까, 상황은 어때.”

    애써 아서는 자리에서 별일 없다는 듯 일어났다.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상해볼 수 있는 원인이 있다면 역시 눈이었다. 저 신묘한 힘을 가진 눈.

    “선생님, 눈이.”

    “상황이 어떤지 물었잖아. 란베르크.”

    평소와 같지 않은 아서의 분위기에서 살기가 올라오자 란베르크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아서를 부축하며 입을 연다.

    “많은 세력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서는 정의의 심판에 존재하는 비르테리아 진영의 적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나서야 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절뚝이는 몸을 란베르크가 부축하여 움직임을 도왔다.

    “델타 또한 오스칼로부터 남쪽 대륙의 도움을 받아 정교의 세력을 밀어냈고요, 그것보다 선생님….”

    간신히 렌에게 도착한 아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사실 아서는 감정을 다루는 것에 어색하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다시금 아서를 불러보는 란베르크였다.

    “선, 선생님.”

    가끔 지나친 표현을 하는 것도 감정을 꾸미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아네스가 과거에 ‘숱한 전장을 지나온 듯한’이라는 말을 아서에게 붙인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야만, 혹은 얼마나 많은 전장을 지나쳐야만, 이처럼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퇴색될 정도가 될 수 있는가.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아네스가 보기에도 그랬다면, 아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보정이야.”

    “네?”

    “보정이라고,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신에 의해서 깊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있어.”

    “…….”

    “아마, 미치지 않게끔 만든 거겠지.”

    란베르크는 아서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서는 잔뜩 망가져 버린 렌의 뿔을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조금 늦었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안들의 묶음을 해당 장기(눈)에 결속]

    “시야에 포착된 대상을 치유하기 위한 마안을 결속한다.”

    [대상을 ‘완전 치유’하기 위해 ‘EX 랭크 : 성역을 비추는 시선’ 결속]

    [오류, ‘EX 랭크 : 성역을 비추는 시선’ 결속불가, 사용자 장기(눈)이 과부하 상태 / 강제 실행가능]

    “강제 실….”

    아서의 입을 틀어막고 함께 넘어지는 아이리스, 어느새 꼭대기에 내려와 아서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치유를 돕기 위해 진영에 있었던 레니도 함께 도착했는데, 깃발에 매달려있는 아네스와 처참한 몰골의 렌을 보더니 작은 신음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임자야, 네가 진정 정신이 나가버렸느냐!”

    베를리의 각성을 위해 환계에서 머무를 적, 아황에게 들은 이야기로 아서의 눈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정확히 눈이라기보다는 아서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이었다.

    아서가 아칸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영혼이 버티지 못해 소멸한다는 것. 그것도 아서가 직접 말한 것이었다.

    “이 이상 사용해서는, 큰일이란 말이다!”

    따지고 보면 마안의 뭉치를 사용하여 눈을 수복하지 못하는 단계까지 넘어가 맹인이 된다 하여도, 소멸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니다.

    * * *

    아이리스는 부서진 벽에 기대어 잠깐의 수면을 취하고 있던 아서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괜스레 붉은 용에게 다가가 성을 낸다.

    “이 멍청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무식한 붉은 용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렌.

    인간형으로 서서히 돌아오자, 레니가 렌에게 로브를 둘렀다. 마력 고갈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는지 체력이 거의 없었다. 이를 보고 있던 아이리스의 눈에서 약간의 눈물이 고인다.

    “레니, 치유는 잘 되고 있느냐!”

    “…그, 그럼요!”

    “부디 서둘러라!”

    정령왕, 아와, 로아, 게다가 플로우까지, 초월마법을 동원해야만 상당한 마력을 지닌 붉은 용을 치유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도 치료를 받는 것이 어떤가요?”

    “레니, 짐은 아직 멀쩡하거늘.”

    “그랬다면 렌의 치유를 돕고 있었겠죠.”

    “크흠.”

    아이리스도 환계에서 인계까지 날아오느라 심각하게 많은 마력을 소비한 상태였다.

    이를 보던 레니는 고개를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리스에게 치유마법을 사용했다.

    “…됐다니까.”

    외부의 전시상황은 호전적이었다. 아군에게 승기가 기울고 있다. 가장 큰 역할을 하던 헤르메딕트 성가대가 격파되니, 비르테리아 진영의 절반이 힘을 잃었다.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주연들만 교체된 채, 델타가 승리를 거머쥐는 비슷한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선생님은 휴식이 더 필요합니다!”

    란베르크의 격양된 목소리가 아서를 부르고 있었다.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아니, 마무리를 지어야 해.”

    눈 밑으로 굳은 피를 닦으며 말을 잇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쪽에서 받드는 신과 달리, 내가 따르는 신은 그걸 원하는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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