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64화 (164/222)
  • 164화

    * * *

    “어차피 저들은 베를리의 눈 색깔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무고함을 증명할 차례입니다. 란베르크.”

    첼로니아 대함선 외부, 베를리는 서대륙 데크 에던의 성채가 델타 진영의 공격으로 무너져 가는 것을 직시했다.

    저들을 보라, 그리고 비르테리아를 보라, 저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단이라는 단어는 그저 약탈의 명목밖에 되지 않았다.

    정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바뀌어 있었다. 혹은 신이 바뀌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사계의 결말은 비극과 다를 바가 없으니.

    아네스의 마지막 혁명이라고 했던가, 베를리의 눈이 더 이상 보라색으로 빛나지 않았다. 란베르크는 베를리의 시선 속에 있는 굳건함에 피식하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보라색, 그것은 마녀의 상징이자, 사계를 파멸로 이끈다는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 그러나 베를리는 마녀의 종자가 아니다. 또한 심연이라고 불리는 절망의 종자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깃들은 보랏빛의 무언가는 세계의 유산으로 자연의 보고라고도 불리는 자연마법의 결정체이자 세계의 기적.

    다만 기구하게도 그것이 보라색을 띠고 있었기에 저들의 술수에 넘어가기 좋았을 뿐이다.

    세계의 유산이 프리실라처럼 완전히 육신에 깃들자, 보라색의 눈은 본래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녀로 오인받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무고함을 증명할 차례다.

    “그래, 그대의 유산은 무엇을 뜻하지?”

    “마리, 그게….”

    자신의 군단을 태워 첼로니아의 대함선을 기꺼이 빌려주었던 마계의 통치자, 마리 페르세포 아베스타.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세계의 유산이 깃든 생명체가 세계의 유산이 지닌 모든 힘을 사용하면 육신에 새겨진 고대어와 문양이 서서히 사라진다.

    아네스 몸에 안착했던 ‘언덕을 오르는 늑대’도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사라졌다. 이는 제법 일리가 있는 부분이다.

    공주의 손목에 새겨진 고대어를 해석했다. 이미 흐려져 있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번외세계의 나침반.

    번외세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뜻에 대해서는 아황도 알지 못했으니, 마리도 피차일반이었기에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한 것은 각성과 동시에 이 기적이 소진하여 고대어 또한 연해졌다는 것, 각성과 동시에 힘을 잃는 세계의 유산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베를리의 육신으로부터 각성할 수 있었던 ‘번외세계의 나침반’은 각성하자마자 그 능력을 소실했다. 성가시게 마녀로 오인받게 만든 것 이외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슬, 시작하지.”

    란베르크와 베를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의 주변으로 흉흉한 마력 유동이 발생했다.

    황제의 성채 주변으로 여러 개의 거대한 마력진이 나타났다. 그곳으로부터 마력 파장이 퍼지며 전격이 튀었다.

    허공에 떠 있는 마법진은 문의 역할을 한다. 그 문은 마리의 개별차원이 담긴 곳으로, 이곳에서 사출된 마력구들이 마법진을 통과하며 계속해서 속도를 중첩해갔다.

    여러 개의 헤이스트 존을 중첩하며 범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붙는다.

    그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적군들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뚫고 지나갔다.

    마력구들이 산발적으로 비르테리아 병력의 진열을 뒤집어 전선을 혼란하게 만드는 동안, 델타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진격한다.

    “낭설이 죽었다. 저들도 언젠가 저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터.”

    마리의 눈동자가 마력 유동으로 인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분노를 대신하듯.

    지휘자가 된 것처럼. 양손으로 마력구들을 지휘하며 광기가 들린 비르테리아의 병력을 거리낌 없이 파멸했다.

    그 간에도 마리의 찌푸린 미간은 펴줄지 몰랐다. 어지간히도 화가 오른 것이 분명하다.

    * * *

    며칠 전이었다.

    “홉스!”

    거의 전라라고 볼 수 있었던 홉스가 마계의 대제국 첼로니아의 성문을 두드렸다. 그때의 나는 감히 이렇게 생각했다.

    “아서, 아서가 이렇게 했나!”

    그럴 리가 없었다. 여관주인은 홉스를 그렇게 만들 자가 아니니까. 다만 홉스의 몰골이 여느 고블린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확히 야생의 고블린을 보는 듯했다. 홉스처럼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성이 뛰어난 고블린과는 완전하게 판이한 오리지널 고블린.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천 조각 같은 것으로 간신히 가려야 할 부위만 가린 채로 나타났다. 녀석은 이곳까지 도달하는 동안 숱한 일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래도 홉스의 눈은 여전히 집념에 차 있었다. 금세 쓰러질 것만 같은 숨소리를 뱉으면서도, 녀석의 눈동자엔 신념이 있었다. 무엇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또한, 잘 알고 있다.’

    홉스의 동공이 점멸하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 손에 쥔 몇 장의 종이와 함께 델타를 도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쥐고 있던 종이를 홉스의 손에서 빼내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반드시 놓치면 안 된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 같다.

    전문이었다. 그것도 페지르 정교의 전문. 중요한 맥락만 잡아보자면 이렇게 적혀있다.

    ‘델타제국에 마녀가 출현했다.’

    암, 내가 보았던 전문과 같은 내용이었다. 델타제국에 마녀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동일했다만 ‘월간, 세계의 모험’에서 나온 신문의 내용은 심각했다.

    정교 측이 무고한 델타의 시민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문자가 놓여있다. 내 앞에 고블린이 쓰러지기 전, 내가 가진 세계의 유산은 홉스의 눈동자를, 진실을 읽었다.

    ‘이는 거짓이 아니다.’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종이 쪼가리를 꾹 쥐고서 인계에서 마계까지 홀로 찾아온 홉스를 보라.

    근래 마계에는 월간 세계의 모험 신문사의 보도가 전혀 없었다. 정교가 가진 권력으로부터 온갖 압박과 입막음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당장, 군대를 준비해.”

    정교의 하는 짓이 그리 옳은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녀석들과의 관계가 부서지면 사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기에, 늘 참아왔다.

    “이 마계의 통치자, 아베스타. 정교의 난장질에 더는 놀아줄 수 없다.”

    * * *

    성기사들이 황제의 성채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전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된 것이 분명하다.

    란베르크는 허리에 차고 있던 ‘가문의 의지’를 빼 들고서 대함선의 결계를 깨부수고 들어오는 성기사들과 맞섰다.

    란베르크의 검기에 맞아 지상으로 떨어지는 성기사들은 그의 중첩된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계속해서 검객은 하늘과 지상을 향해 거대한 마력이 밀집된 검기를 쏟아낸다.

    답답했던 란베르크는 저 하늘의 떠다니는 수많은 성기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에 빠진다.

    란베르크와 비슷한 고등급의 전투력을 지닌 성기사들이라 그런지, 검기를 던져서 그들을 맞추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마리,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리가 헤이스트 존을 여럿 운용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대한 물음이었다.

    마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전장으로부터 안면이 트인 인물이었으나, 제가 가진 세계의 유산을 통해 란베르크는 매우 냉철한 사고를 지닌 검객이라고 판단했다.

    “혹시, 저 마법진에 사람이 통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무려 ‘사람이 통과’한다는 무식한 발상이 나올 법한 사내가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마리가 쏘아 올린 여러 마법진은 물체를 가속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차원을 빙자한 공간이다. 생명체가 통과한다면 어떤 괴기스러운 반응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저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떠한 마도학술원에서도 쉽게 나오지 못할 야만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나도 잘 모르겠군, 아마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첼로니아 대함선의 결계도 대부분 파괴되어 성기사들이 함선 주위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먼저 시범 삼아 이 성기사로 해보죠.”

    “이 성기사?”

    성기사는 아무 데도 없었다. 만약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성기사들을 짚은 것이라면 시험해볼 성기사들이 너무 많다.

    헤이스트 존의 마력 유동이 이보다 강해지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콰직.

    란베르크가 별안간 왼쪽에서 공격을 시도하던 성기사를 베어낸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베어낸 것이다.

    “자, 어서.”

    자세히 보니 란베르크의 동공은 사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야가 넓은 것이 아니라 시선 자체에 가속 마법이 적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동공이 재빠르게 요동치고 있다.

    ‘…몇 초 앞의 상황을 읽었다. 이 말인가.’

    마리는 대함선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헤이스트존을 끌어왔다. 그곳을 향해 란베르크가 성기사를 내던지자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어 맥없이 지상에 떨어진다.

    “이런…….”

    저 방식이라면 거대한 마법진을 마리가 이동시켜 성기사들이나 지상의 병력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가능할 법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 마법진의 마력 유동이 이보다 강해지면 술식이 깨져버리고 말 거다.”

    “게다가 성기사들이 저 마법진을 멍청하게 맞고 있을 거 같지도 않고요.”

    “근데, 꼭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잖아.”

    란베르크는 대함선 옆에 위치해 있던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상황이 조금 시급하니, 잠깐 좀 빌리겠습니다. 황제의 성채 주변에 있는 마법진도.”

    란베르크가 마법진을 통과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기사와는 다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란베르크의 우매한 행동이 자멸을 초래했다고 생각한 마리였다. 그런 마리가 전방에서 들리는 굉음에 시선을 돌린다.

    란베르크는 마법진을 통과할 마력구를 대신하여 성기사들을 베어내고 있다. 하늘을 나는 능력이 없었기에 마법진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 * *

    “붉은 용의 참수와 아네스의 부관참시를 시행하라.”

    황제의 성채 꼭대기. 이그리스 십자회의 심판자는 외부 상황을 무시하고 행사를 진행시킨다.

    붉은 용은 자신을 둘러싼 두터운 쇠사슬에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약간의 의식이 남아 현재의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다. 하지만 잘려 나간 용의 뿔은 마력을 재생하는 능력을 잃었으니, 그저 상상에서 그칠 뿐이다. 그들의 심판은 이어졌다.

    “심판하라.”

    비르테리아 깃발에 묶인 아네스의 시체와 붉은 용, 그리고 그것을 노리는 성기사들이 창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친다.

    마법진을 통과하며 이를 지켜보았던 란베르크는 허공에서 황제의 성채 꼭대기를 향해 이동 방향을 변경한다.

    ‘……제길, 늦었어!’

    끝내, 일제히 빛나던 창들이 던져진다.

    성채 꼭대기에서 상당한 굉음과 동시에 일어난 폭발은 사방을 새하얀 빛으로 침묵시킨다.

    ―.

    [ 해당 일대를 ‘침묵’시키기 위해 ‘EX 랭크 : 하델의 마안’ 결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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