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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163화 (163/222)
  • 163화

    * * *

    [ 서대륙 데크 에던 / 황제의 성채 ]

    ‘100일 전장의 아네스, 부관참시.’

    황제의 성채 꼭대기, 정의의 심판. 그곳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지고 있다.

    연속적인 예포의 격발로 인한 뜨거운 열기와 화약 냄새가 뒤섞였다. 광기에 물든 이들을 더욱더 고조시킨다.

    붉은 용, 그리고 아네스의 시체가 정의의 심판 중앙에 놓여있다. 옥좌에 앉아 그들을 노려보던 비르테리아는 생각에 잠긴다.

    붉은 용, 강철 같은 비늘과 뼈는 상인에게 판매가 되어버릴 것이다. 아마도 수집 욕구가 강한 어느 귀족의 소유품이 되겠지. 아네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체가 훼손되어 그 명예도 지천을 구를 것이다.

    비르테리아의 일방적인 복수가, 이미 죽어있는 이단의 종자를 처단한다는 화려한 핑계 속에 숨어있다.

    ‘델타가 숨기고 있는 붉은 용.’

    전력으로 보았을 때, 완벽한 성체라고 할 수 없는 푸른 용은 예외로, 붉은 용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마커스를 통해 붉은 용의 약화 시기를 파악하고 이그리스 십자회를 보내어 광란의 용을 잡아오는 데 성공하였으니, 비르테리아를 막는 모든 요소들은 제거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관주인.’

    그 여관주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비르테리아이기에. 이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비르테리아가 미지의 나무로 얻은 신의 유전자는 특별했다. 각 제국의 심복들 사이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과연, 그자가 짐을 해할 수 있을 것인가.”

    전제국이라 칭했던 과거의 정교, 그가 그곳에서 측정된 규격 외의 존재 ‘EX’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하물며 그가 신의 힘을 대리하여 7인의 영웅들이 막지 못할 멸망을 홀로 막은 것도, 심연의 시작점 가르강튀아에 들어가 영겁의 시간 동안 절망을 파멸시킨 것도, 모두 알고 있다.

    제아무리 그가 비범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비르테리아가 소멸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예언에도 그러하듯.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얻은 교황의 자리, 교황의 자리로부터 얻은 이달리브의 예언, 그 예언으로부터 얻은 미지의 나무는 비르테리아를 신과 필적하게 만들었다.

    교황의 권한을 얻어 그만이 읽을 수 있는 미지의 예언서 ‘이달리브’를 열어, 사계를 장악할 모든 준비는 끝났기에. 그저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미지의 나무를 이루는 열매 중, 마지막 열매를 손에 넣지 못한 것. 세계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계의 비보 중, 가장 중요한 열매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 열매는 결말을 다루는 기적.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비르테리아도 한낱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남들보다 비범한 존재로 남아 생을 마감하는 것? 전자가 교황의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마지막 열매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에는 분명 마지막 열매가 델타 산맥에 존재한다고 했을 터, 여전히 찾지 못했는지 마커스의 입에서는 탐색 중이라는 말만 반복된다.

    하나 상관없다. 비르테리아가 사계를 정복하는 데 문제가 될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 모든 것을 준비한 이가 당장에 취해야 할 것은 눈앞에 놓인 숙적의 시체가 파손되는 것을 유유히 구경하는 것.

    “시행하라.”

    하늘에는 정교의 성기사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새하얀 갑옷의 기사들이 쨍쨍한 하늘을 가득 메꿨다.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거룩함을 만들어낸다.

    비르테리아의 묵직한 저음이 하늘에 퍼지자, 정의의 심판 위에서 창공을 부유하던 성기사들이 내려왔다.

    신성 마력을 두른 긴 창이 일제히 시체를 향했다. 하늘에 부유하고 있던 나머지 성기사들도 창을 들어 시체를 향한다.

    “짐은 먼저 들어갈 터이니.”

    부관참시 행사를 묵묵히 지켜볼 것만 같았던 비르테리아는 ‘대의의 신전’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토록 아네스의 비참한 말로를 구경하고 싶어 했던 그였는데. 교황과 나란히 앉아있던 권력자 심복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꽁무니를 따른다.

    ‘이미 네 패배다. 아네스.’

    ‘짐이 이긴 것이다. 아네스.’

    시체를 훼손하는 것을 구경할 필요도 없이 비르테리아는 완벽한 승리를 만끽했다. 과거의 수치를 드디어 씻어낸다. 나머지 유희는 광기가 잔뜩 오른 저들의 것이다.

    아네스는 죽었고, 이 위대한 복수의 행사가 끝나면 아크론과 데크 에던의 병력이 델타를 향해 진격하여 흔적도 없이 파멸시켜버릴 것이다. 복수를 위해 마땅히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델타의 역사가 사계 속에서 사라질 터, 굳이 없어질 것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감히 알량한 조연 따위가, 짐이 택한 결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아주 어리석고, 우매한 판단이다.’

    ‘아네스. 내 이름이 수 놓인 깃발에서 최후 속의 최후를 맞이하는 기분이 어떠한가.’

    ‘내, 승리다. 과거에 머무른 영웅이여.’

    마력을 두른 창이 강렬하게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예포가 계속해서 발사한다. 함성과 광기 어린 폭소, 신성한 곳으로 비쳐야 할 공간은 지옥의 탈을 두른 것이 분명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비극이기에.’

    ‘신은 짐을 사계의 주인으로 택했다.’

    백 명이 넘어가는 비르테리아의 성기사, 그들이 쥔 창은 모조리 붉은 용과 아네스를 향해 무자비하게 던져질 것들이다.

    교황이 자리에서 벗어난 뒤로, 정의의 심판에는 계속해서 함성이 울렸다. 그 함성 속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울림이 숨어든다.

    ―쿵.

    황제의 성채 꼭대기 아래, 지면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이 비르테리아 진영을 뒤흔든다.

    ―쿵.

    부관참시를 위해 광기 어린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성기사들은 황제의 성채 꼭대기 아래를 바라본다.

    알 수 없는 진영이 비르테리아 진영과 격돌하고 있다. 그 진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네스와 관련된 세력임에 틀림없다.

    분명 아래는 비르테리아의 병력이 성채를 지키고 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성채 아래에서 폭발음과 동시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성채 꼭대기까지 울려 퍼진다.

    성채 아래에서 올라온 비르테리아의 병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이그리스 십자회를 향해 소리친다.

    “반란군입니다!”

    “델타의 반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아네스의 부관참시 및 붉은 용의 참수를 지키던 십자회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원을 분산했다. 기어코 델타의 쥐새끼들이 목숨을 버리러 온 것이다.

    하나는 성채 꼭대기에서 행사를 진행시키고, 둘은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온 진영을 향해 이동한다.

    이어서 이그리스 십자회를 이끄는 아이올레드가 남은 심판자를 이끌고 비르테리아가 향한 황제의 성채 지하, 대의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비르테리아의 병사들은 소규모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분명 상대 진영이 아군 진영에 비해 규모가 부족한데, 왠지 승기는 상대 진영에 있는 듯하다.

    서대륙의 방패라 불리는 데크 에던의 성벽을 파괴하며, 불나방처럼 제 목숨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드는 정신이상자는 서대륙에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족이, 동료가, 전우가, 위험할 때는 그것이 설령 지옥의 끝자락이라도 따라가겠다던 델타의 어느 조합은 예외다.

    그래, 드래곤 길드는 예외이다.

    “하늘에 부유선이 나타났다!”

    “마도사들은 저 부유선을 공격하라!”

    그 부유선을 타고 성채 중심으로 진입한 이들은 곧바로 비르테리아 진영과 격돌했다.

    저 멀리에서 강대한 마력 유동이 일어난다. 얼굴을 찌푸린 이그리스 십자회는 저 멀리 보이는 부유선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확인한다. 이윽고 비르테리아의 병력에서 신음이 터진다.

    “저, 저건.”

    “…마계, 첼로니아의 대함선!”

    마계의 통치자가 이끄는 대함선, 어째서 인계에 나타난 것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병사들은 넋을 놓기 바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첼로니아의 거대한 함선에서 격발되는 강대한 마탄, 계속해서 황제의 성채를 무너뜨렸다.

    지휘관은 이내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대함선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마도중대가 함선을 향해 공성 마법을 사용했지만, 대함선을 단단히 보호하고 있는 마력 결계에는 흠집도 낼 수 없다.

    이어서 델타의 병력이 부서진 성채 안으로 진입했다. 델타의 기사들이었다. 이전처럼, 과거의 일들이 똑같이 재현되는 느낌이다.

    “귀찮은 것들이 상당히 설쳐대는군.”

    이그리스 십자회의 심판자들이 유유히 걸어 나오자, 비르테리아의 병력이 일제히 갈라진다.

    이어서 판금 갑옷을 입은 두 명의 심판자들이 성채에 진입한 델타의 기사들을 가볍게 베어나간다.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무지함이라.”

    전장에 성가가 울려 퍼졌다. 헤르메딕트 성가대의 목소리가 황제의 성채 전체를 뒤집으며 비르테리아 병력의 사기를 올리기 시작한다.

    사실 사기를 올린다는 말보단 광기를 끌어올려 이들을 미친 자로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광신도, 그들은 백안을 띄며 비르테리아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저들의 목을 베어, 성하에게!”

    “우리의 죽음은 거룩한 것이니!”

    “아, 아! 비르테리아 만세!”

    제 목숨을 아까운 줄 모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적들에게 달려들어 진격을 막아섰다.

    팔이 잘려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이들이다. 헤르메딕트의 정신 마법이 그들의 광기를 더욱더 짙게 만들었다.

    헤르메딕트 성가대의 영향으로 이들은 몇 번을 생존했고, 육이 전투가 불가능해질 때까지 처절한 전투를 시행한다.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에도 다시 움직인다. 망령과 다를 바가 없다.

    ‘수 없이 바뀌어야 했던 신념.’

    그 광란의 진격 속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전사, 아니 늑대가 있다. 마치, 노튼 아네스를 닮아있었다.

    ‘모든 과거의 후회는 전사에게 있으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졌다. 지금부터 미소가 그려진 아흐메 투구를 쓰고 전장에 오를 이유가 없다.

    ‘이 또한 나의 선택이었으니.’

    비르테리아가 가진 기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과감하게 베어나간다.

    ‘넘실대는 패배, 그리고.’

    여인은 마력으로 된 푸른 갈퀴를 휘날리며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너짐에 있어, 서러울 것 없다.’

    이그리스 십자회의 심판자가 여인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든다.

    ‘언덕을 올라, 정상을 향하라.’

    당연히 나가떨어질 목이라고 생각한 여인의 목은 멀쩡했다.

    ‘그리 말하는 가슴이 나를 움직였다.’

    날카로운 검이 교차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심판자는 그녀의 검을 비집고 다음 격을 시도했다.

    ‘그 속에서 나를 숨 쉬게 하는 것.’

    심판자의 목이 떨어졌다. 그것은 별안간이었다. 헤르메딕트의 성가가 심판자의 귀로 스며들자 소생이 시작된다.

    ‘노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또 하나의 심판자가 여인을 향해 달려든다. 프리실라는 달려오는 심판자를 노려보다 가슴 위에 주먹을 얹혔다.

    ‘내 어미의 영혼이, 이곳에 깃들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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