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60화 (160/222)
  • 160화

    * * *

    “나, 노튼 아네스.”

    “마지막 전장에 올랐노라.”

    많은 이들이 아네스를 바라봤다.

    이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인가. 과거의 영웅이, 주름 한 점 없는 100일 전쟁의 젊은 넋이, 혼절한 프리실라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목걸이를 걸어준다.

    이어서 심판자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단절된 걸음걸이가 많은 이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으니, 사방이 알 수 없는 그윽함으로 가득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이를 지켜보고 있던 란베르크, 정신을 차린 뒤에는 아네스가 그의 투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투가 한 명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멈춘 것이다.

    ‘아, 아네스 님….’

    미소와 조화롭지 못한 마력 유동이 강함의 척도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분명 아득히 높은 경지의 존재라는 것을 몸소 느끼는 까칠한 검이었다. 강함을 가늠할 수가 없다.

    왠지 젊은 아네스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진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던 위대한 검사가 후세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한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최후를 기억하며.’

    경외를 표하자 아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후세를 향한 웃음이기도 하며, 수고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묵묵히 정면을 바라본다. 이제는 뒤를 돌아볼 일이 없으니.

    ‘훌륭한 검객, 란베르크.’

    ‘프리실라를 부탁하네.’

    프리실라가 어릴 적 들었던 지어미의 목소리를 듣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네스를 멍하게 쳐다본다. 과거에 미치도록 닮고 싶었던 단 한 명, 나의 어미, 노튼 아네스의 젊은 넋이 있다.

    왠지 꿈만 같은 아네스를 부른다.

    ‘하… 알매.’

    그녀의 찢어진 옷, 등에 새겨진 언덕을 오르는 늑대. 문양이 푸르게 불타오르고 있다.

    푸르른 늑대의 탈을 두른 100일 전쟁의 아네스, 목숨을 대가로 발현한 기적. 과거를 가지고 왔다.

    “하알… 매.”

    “할… 매!”

    쉰 목소리에 무슨 힘이 담겨 있으리. 계속해서 아네스를 부른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 상태였는데. 발악도 아무 의미 없었다. 사내 어깨에 짊어져 꼼짝도 못 한 채로 점점 멀어져 가는 아네스를 향해 소리쳤다.

    ‘안, 안 돼! 할매, 할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

    그리 각오한 아네스였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돌아가고 싶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프리실라가 커가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을 테니까. 죽음은 계약되어 있다.

    의지를 굳혀야 이들의 방패가 될 수 있으니 돌아보지 않으리다.

    ‘돌아보지 않겠다. 프리실라.’

    ‘이 어미를 용서하고, 저 멀리 나아가라.’

    멀리서 프리실라의 쉰 목소리가 아네스의 귀를 찌른다. ‘할매’라고 부르는 소리는 프리실라의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나를 부르고 있다.

    ‘목이 많이도 상했구나.’

    ‘많이, 많이도 노력해왔구나.’

    쑥대밭이 되어버린 레르 마을의 지면이 더욱더 만신창이가 된다.

    더는 파괴될 것도 없을 만큼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풍경에 미간을 찌푸리는 아네스. 도망치는 호르게타 일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2명의 심판자가 전방으로 쇄도한다.

    ―.

    철창을 지나친 두 명의 심판자는 몇 보 가지도 못해 멈춰 선다.

    별안간 스산한 바람이 지나친 것 외엔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걸음을 멈춘 두 명의 심판자는 머리가 잘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 뒤로는.”

    “그 누구도 지나가지 못한다.”

    동시에 달려드는 심판자들을 혼자서 막아낸다. 혹여 자신의 뒤로 이동하려는 십자회를 단숨에 추적하여 칼로 베어버린다.

    이를 마지막으로 란베르크는 진정한 검성의 전투를 눈에 담았다.

    “어…. 마.”

    “엄― 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 엄마! …엄마!”

    “…안 돼, …안 돼, 엄마!!!”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던 아네스가 십자회를 바라본 채로 동공을 크게 떴다.

    떨리는 동공이 아네스의 감정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는 무언가가, 어미의 만감을 교차하게 했다.

    ‘그래. 드디어 듣게 되었구나.’

    ‘더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걸로 되었다.’

    ‘이 어미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

    네 목소리로 나를 그리 부르는 것을 들어보고 싶었는데, 내게 어떤 여한이 남겠는가, 세상에 잡념 하나 남길 필요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언덕을 오르는 늑대가 되어라.”

    “프리실라.”

    “네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쫓아라.”

    “프리실라.”

    “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향하는 것이다.”

    아네스에게 피어오르고 있던 푸른 불꽃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꺼질 불꽃처럼.

    그런데도 변함없이 십자회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치며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준다.

    강철의 거친 마찰음이 사방에 퍼졌다.

    목이 잘려 나간 두 명의 심판자들이 헤르메딕트로 인하여 어느새 부활에 성공하고, 다시금 아네스에게 공격을 시도한다.

    시간 끌기. 모두의 방패가 되어, 무사히 심판자들의 추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제국이 정교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을 지금 이곳에 건다.

    ‘아서 군, 부디 뒤를 부탁하네.’

    허리를 베고 지나가는 두 명의 심판자, 아네스의 복부에서 피가 터지는 동시에 그들의 사지도 찢겨 땅을 구른다.

    처참한 몰골을 무시하고 나머지 심판자들의 공격에 대응한다.

    8명의 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반격한다. 일순 코앞에 근접한 아이올레드가 묵직한 검기를 내보냈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따위가 없는 공격, 그저 반항하는 자에게 행사하는 무력.

    ―쾅!

    아네스가 정면으로 쏘아낸 검기가 공기를 찢으며 아이올레드의 검기에 쇄도한다.

    아이올레드가 봐왔던 모든 검기 중에서 단언컨대 가장 거대하고 빠르며 치명적이었다.

    푸르른 불꽃과 황금빛의 찬란함이 뒤섞이다가 사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올레드는 팔 한쪽을 잃었고, 나머지 심판자들은 아네스의 검기로 인하여 죽고서 다시금 부활한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건가.’

    ‘아쉽지만, 내가 이들을 죽일 수는 없는 모양이군.’

    알 수 없는 기적으로 인하여 무한정 부활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법, 별것 없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싸우는 것.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미래를 지닌 이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몸 안에서 타오르는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전투가 1분에서 10분, 10분에서 1시간.

    그간 아이올레드를 제외한 심판자들은 아네스에게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

    ‘불쌍한 이들, 죽는 것도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니.’

    마지막 마력을 다해 전방으로 박차를 가한다. 신을 모방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모습의 아이올레드를 향한다. 그저 검 끝을 바라보며 강렬히 쇄도한다.

    그 와중에도 심판자들이 순식간에 접촉하여 아네스의 정면을 막았으나, 모조리 베어나간다.

    늑대의 투지가 밀집되어있는 최후의 발악은 무자비했다.

    아이올레드는 이를 보며 ‘7인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자의 강함은 예를 무시한다며’ 미간을 찌푸렸고, 근접한 아네스의 빈틈을 노려 신의 기적을 담은 검으로 명치를 쑤셨다.

    ―.

    검을 명치에 찔러 넣는 순간, 빛의 폭발이 강렬하게 일어난다.

    각혈을 토해내는 아이올레드의 명치에도 아네스의 검이 박혀있다. 서로 검을 급소에 찔러 넣고서 이마를 부딪치며 노려본다.

    ‘오만하지 마라 필멸자여, 나는 부활할 것이다.’

    ‘네 녀석은 이렇게 처참히 죽어버릴 테지만.’

    ‘정교를 이바지하는, 이 아이올레드는 죽지 않는다.’

    ‘안타깝고, 덧없는 생명일지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었을 터.’

    부활에 성공한 9명의 심판자가 동시에 아네스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10개의 검이 아네스의 몸을 군데군데 뚫고 지나갔다.

    허공에다 각혈을 토해내며 호탕하게 웃는 늑대들의 어미, 지금의 상황이 죽음과 직결된다는 점을 망각한 사람처럼, 그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표하는 십자회였다.

    10개의 칼날이 몸에서 동시에 뽑혀 나가자 피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서서히 푸르른 불꽃이 녹아들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네스의 눈동자에 피어오르던 푸른 불꽃이 꺼지고 있다.

    아네스는 쓰러지지 않은 채로 굳건하게 서서, 드넓은 창공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산화해버린 아네스의 마지막 음성이 레르 마을에 울린다.

    “…네 녀석들은 억지스러운 불멸을 안고 살아가니, 한참 모를 수밖에.”

    묵직한 눈꺼풀이 시야를 서서히 가리고 있다. 세상의 풍경이 막을 내린다.

    버릴 것이 하나 없었던 삶, 아니었는가.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던 삶.

    아니었는가.

    ‘나의 벗들이여.’

    아, 자네들의 말이 옳았네.

    전장에서는 죽지 않는다던 완고한 아네스라, 웃기는군. 내가 틀렸다네.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 비로소 그 뜻을 이해했다네. 고집이 세서 미안했군, 그건 가서 사과하도록 하지.

    ‘오, 나의 벗들이여.’

    사킨보, 다르도라, 루픽스, 내 전우들이여, 내 벗들이여, 글쎄 프리실라가 나를 드디어 ‘엄마’라고 불러 주웠어. 감복했지. 암, 감복했다.

    비록 울음이 섞인 슬픈 소리였지만, 그 울림이 내 가슴속에서, 귓가에서,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네.

    ‘아, 아…. 프리실라.’

    ‘조금 더 안아보고 싶은 것은.’

    ‘이 어미의 욕심이겠지.’

    덧없는 삶이었다네. 그러나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자신할 수 있네. 마지막 언덕으로 향하는 중인데 말이야, 그대들이 마중을 나왔나 모르겠군.

    자네들과 달리 잔뜩 늙어버린 나를 알아볼까, 무릇 걱정이 앞서는 것은 괜한 설렘 때문인 것 같네.

    이 땅에서의 기나긴 여정을 멈추고, 평화만이 기록된 곳에서, 혼과 혼끼리 만나, 곧이어 그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때.

    그때는 함께 여관을 운영하는 것이 어떤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여관을 말이야.

    “…덧없이 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 있거늘.”

    “…꽃. … 불꽃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 덧없이 지는 것.”

    “그렇기에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게야….”

    무수히 구겨 넣은 신념이라, 내 삶은 마치 오탈자 많은 서시였다.

    비문이 역설처럼 미려한 문장보다 눈에 집힌다더니. 눈에 집히는 아름다운 그 단어가, 그 단어가 너무 예뻐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단다.

    아쉬운 내 이야기에 하물며, 라고 더하여 쓴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것을 프리실라, 라고 불러 본다.

    내 이야기는 내가 죽어서도 네 영혼에 깃들 테니. 나는 또 한 번 전장에서 춤을 추겠구나.

    늑대들의 어미, 노튼 아네스.

    이들이 정착했던 땅, 많은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는 대지에 무릎을 꿇고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보라, 이를 보아라.

    델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꽃이 지는 모습을. 작은 미소가 얼굴에 덧없이 남아있으니.

    ‘늑대처럼.’

    ‘네 가슴 속에.’

    ‘한 마리의 늑대처럼.’

    ‘작은 혁명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란다.’

    ‘프리실라.’

    ‘엄마가 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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