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 *
아이올레드 카미드헬러, 아칸 정교의 철퇴 ‘이그리스 십자회’를 이끄는 자.
철혈을 온몸에 두르고서 덧없이 악한 마녀를 척살하며, 이단을 파멸하는 심판관.
‘몸이 성치 못하군.’
이그리스 십자회는 붉은 용 토벌을 위하여 마브리우스 산맥으로 향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광기의 붉은 용과 한 달을 가까이 싸워댔으니 제아무리 그들이라고 한들 몸이 성하지 않을 수밖에.
광화에 빠진 용은 평시와 다르게 힘이 무척이나 약해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십자회 10인이 달려들었으나 그런데도 밀리기는커녕 광기에 빠진 용이 압도했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개체라.’
결과가 말해주어. 결국, 붉은 용을 포획하여 성하에게 받쳤으니 문제는 없다만. 자칫 실수가 있었더라면 마브리우스의 용암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것은 바위가 아닌 십자회였다.
‘근데, 호탕한 자유는 또 무엇인가.’
십자회의 전력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마력을 회복해야 하는 일원들이 몇몇 있었고, 장비나 무기들이 완전히 파손된 상태였다.
신성력은 당연히 바닥이 나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헤르메딕트 성가대를 통하여 이를 완전히 회복할 예정이었다. 예정이었는데.
‘…예정이었는데.’
‘열등한 벌레 새끼들이 또 초를 쳐놨구나.’
헤르메딕트 추기경이 죽어있다.
거기다가 성가대의 효과를 대폭으로 상승시켜주는 성검 아쉬포르마가 없다.
이를 목격했던 전투성법자는 ‘호탕한 자유’가 추기경을 죽이고 성검을 훔쳐서 달아났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은 목이 잘려 왕의 길바닥을 구르고 있지만.
‘네놈은 왜 살아있는 건지 모르겠군.’
아이올레드는 왕의 길에 잔존하고 있던 임시막사의 전투성법자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나갔다. 자택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델타의 국민들은 제국을 점령하려는 것은 정교가 아닌 악마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물었다. 왜 네 녀석은 살아있고.’
‘추기경은 죽어있는지.’
벌벌 떨며 땅을 기는 전투성법자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민의 눈에는 아이올레드가 덧없이 악마로 보였으나, 전투성법자의 눈에는 지고한 천사가 분개하여 자신을 심판하는 듯했다.
‘그 호탕한 자유라는 녀석은 어떻게 생기었나.’
전투성법자는 거의 반쯤 실성했지만, 최대한 정신을 부여잡고서 입을 열었다.
와중에도 말을 더듬는 전투성법자로 인하여 아이올레드는 기분이 좋지 않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아흐메 투구에.’
‘자유를 상징하는 웃음의 낙서.’
‘그리고… 늑대의 형상. 늑대의 형상?’
‘아, 노튼 아네스.’
‘그러나 흡마철을 마시고 갇혀 있을 터.’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내뱉은 전투성법자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속삭이고 있었던 나머지 무엇이라 떠드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목이 잘려 덩그러니 땅에 놓이는 것은 변함없다.
‘그대들은 신에게 기도할 자격이 없다.’
명치가 뚫려 쓰러져있는 헤르메딕트를 어깨에 짊어지고 유유히 왕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가니 전투성법자들의 목이 계속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일 심산이다.
‘성하에게 헤르메딕트의 부활을 부탁해야겠군.’
‘이어서 십자회를 회복시켜.’
‘곧바로, 호탕한 자유를 심판한다.’
아이올레드 눈앞, 대대 규모의 전투성법자들이 남아있었다. 이리도 많은 자가 남아있었음에도 추기경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이올레드는 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이곳에 잔존하는 성법대, 지휘관에게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것은 이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같은 것. 살 기회가 아닌, 신에게 기도하며 죽을 기회였다.
“호탕한 자유를 추적하라.”
“십자회는 회복할 시간이 다소 필요하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시간을 끌어.”
“우리가 당도할 때까지, 신에게 기도하며 싸워라.”
“그리고 죽어라, 보란 듯이 죽어라.”
“신께서도 그대들을 품으로 안을 것이다.”
아이올레드의 눈이 황금빛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하자, 일전까지만 하여도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전투성법자들이 바른 자세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무릇 동공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전원, 시험을 받들겠나이다.”
* * *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 흐릿한 시야로 주위를 살피는 아네스, 철창 밖에는 프리실라가 앉아있다. 사방에는 전투성법자들의 사체로 보이는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등을 돌린 채 철창에 기대어 있는 프리실라를 향해 호통을 치려 했다.
음식은커녕 물조차도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호통이 아닌 쉰 소리만 허공에 퍼진다.
습도로 인하여 철창에 맺힌 이슬을 입 대어 마셔볼까도 했으나, 레르 마을 사람들의 마음만 아파질까 그리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 것이었다.
‘할매, 일어났군.’
프리실라는 철창 안으로 물이 든 통을 집어넣었다. 더하여 얼른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목마름보다 멍청한 딸의 행동이 모조리 파악되었기 때문에 철창 밖으로 손을 비집어 프리실라의 멱살을 쥐어 잡는다.
“이거 봐, 힘도 없어서는.”
“…이, 이게 무슨 짓….”
“걱정하지 말라고, 늑대들은 이미 도망쳤어.”
레르 마을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프리실라의 말대로 전원 도피에 성공한 듯했다. 어떤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우나, 일단 위협의 여지는 없다.
‘마시지 않으면, 여기서 할매랑 같이 죽어버릴 거니까.’
프리실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네스를 노려보자, 쉰 소리로 ‘쳇’이라는 말과 함께 물통을 뺏어서 단숨에 들이켰다.
황량한 대지에 쏟아지는 폭포를 맞이한 기분처럼 몹시도 상쾌하다.
“꽤, 더 살 것 같은 기분이로구나.”
“할매, 몹쓸 것을 마셨다고 들었는데.”
“거, 정교 놈들의 징그러운 술수를 피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정령계로 가면 할매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이 할미는 곧 죽는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야.”
프리실라는 괜히 철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것에 화들짝 놀라기는커녕 정자세로 앉아 서 있는 프리실라를 노려보는 아네스였다.
몸이 성할 리가 없는 전장을 오랫동안 뛰어다니던 아네스는 프리실라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병약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체내의 마력 유동이 몹시도 약해진 상태라 어차피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다.
사형선고라는 의미로 정교가 건넨 물이 아네스의 죽음을 ‘조금’ 앞당긴 것일 뿐이지,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들 오래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몸이 노쇠해진 이후로 주마다 각혈을 수십 번 토해내는 아네스,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이라면 늑대들의 어미에게 찾아온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프리실라를 보다 못한 아네스가 철창 밖으로 손을 꺼내어 괜스레 엉덩이를 토닥인다.
어릴 때처럼.
‘용맹한 전사는 울지 않는 거란다. 아가.’
프리실라는 로브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성검 아쉬포르마였다.
그 검을 아네스에게 보여주며 ‘할매만 이곳에서 탈출하면 이 작전은 성공이야’라는 말을 더했다.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아네스.
―캉! ―――캉!
―캉! …캉!
……캉! …캉.
캉….
프리실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철창을 검으로 두드렸다.
물론 매정한 철창은 흠집도 나지 않은 채, 프리실라의 거친 호흡을 무시해갔다.
‘어째서….’
아네스의 쪽잠을 방해하기 싫어서 철창을 부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헤르메딕트 성가대 타격부터 시작하여 이어지는 레르 마을의 전투성법대 습격.
단일로 이 작전을 수행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마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프리실라는 훈련소에서 갓 나온 기사보다 전투 능력이 약해진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힘을 충분히 비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네스는 그런 프리실라를 비웃으며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운운한다.
당연히 낙심하는 프리실라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위로해야 하니까.
이내 강한 기합과 함께 철창을 내려치는 프리실라, 온몸에 근육이 풀려 앞으로 쓰러진다.
쓰고 있던 투구가 굴러 아네스의 철창 앞으로 떨어졌다.
‘호탕한 자유라….’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프리실라.’
프리실라는 하늘을 향해 드러누웠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회복하면 충분히 이 철창을 깰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아네스와의 담소나 나누자고 한 것이다.
메마른 입술이나, 잔뜩 흘린 땀으로 인하여 머리가 푹푹 젖어있는 모습이 철창 안에 갇힌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많은 역경을 넘었겠구나.
아네스는 그런 누워있는 프리실라에게 철창 사이로 힘겹게 손을 빼내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칭찬을 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참으로 장하다. 프리실라.”
“갑자기 징그럽게 왜 그래, 할매.”
“언덕을 오르는 늑대는 어떻게 되었느냐.”
“세계의 유산이라면 배꼽에 잘 새겨지고 있어.”
“내 등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구나.”
아네스는 등을 돌려 철창 밖에 누워있는 프리실라에게 새겨져 있던 ‘언덕을 오르는 늑대’를 보였다. 거의 희미해진 상태라 몹시 오래된 문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걷어 올린 옷 안, 세계의 유산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육체에 스며들어 있었다.
온갖 전장을 누볐다는 훈장이라도 되는가, 셀 수 없이 많은 흉터가 보란 듯이 전사의 등에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이 할미가 네게 등을 보인 적이 없었구나.”
프리실라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 프리실라에게 아네스는 ‘상처가 많다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지, 드사덴 아젤은 상처 하나 없다.’고 조언했다.
‘대신, 전사의 상처는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가 보여주는 것.’
‘비록 실력이 부족하나,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
‘늘, 높은 곳을 향한다는 의지와 신념이다.’
언덕을 오르는 늑대는 그저 육체의 깃드는 강인한 전사의 영혼, 특별히 유산 보유자에게 강력한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깃들 곳에 엄연하게 깃드는 것일 뿐. 강인한 영혼은 늘 더욱 높은 곳을 향하려 한다.
“그래도, 현역 때는 내가 최강이었단다.”
“지금도 현역이라며, 현역이잖아. 할매.”
“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레르 마을 사방으로 모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르민족이 모두가 떠났으니 더는 레르 마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외곽의 어느 마을’이 되어버렸지만.
밤하늘은 여전하다.
지금보다 젊었던 아네스가 한참 어린 프리실라를 어깨에 태워 구경했던 별 무리는 레르 마을의 밤하늘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