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 *
“고맙네, 사킨보.”
“이봐, 아네스. 어찌나 녀석의 힘이 강하던지 말이야!”
“아직 녀석은 젖도 떼지 못하는 아기인데, 힘이라니.”
“아내의 가슴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고, 하하하!”
“끙…. 민폐가 아닐 수 없군.”
“아닐세, 아닐세. 안사람도 프리실라를 좋아하니까.”
사킨보는 조심스레 안고 있던 프리실라를 아네스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근래 젖동냥으로 간신히 프리실라의 허기를 달래느라 여간 일이 아니다. 내일은 다르도라의 부인, 그다음 날은 루픽스의 부인….
‘이거 참, 죄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뱉는 울음소리는 매우 컸다. 어른의 검지를 잡는 작은 손아귀의 힘이 비범할 정도로 아기의 근력이라 할 수 없다.
아네스가 직접 낳은 딸이 아님에도 마치 아네스를 쏙 빼닮아 있었고, 운명에 홀린 듯 아이를 품에 안기도 전에 ‘노튼’이라는 성을 주었다. 아네스는 2세를 낳은 사킨보에게 물었다.
“아기는 잘 크고 있나?”
“암, 프리실라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군, 정말 다행이야.”
사킨보는 다르도라와 루픽스를 포함하여 아네스에게 가장 가까운 전우였다.
넷이 모이면 어떠한 전장도 승리로 이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언 늑대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강한 인물들.
이 사내 셋은 근래 2세를 얻었고, 전장에 참여하는 일이 다소 줄어들게 된다.
전부 아네스의 명령이었다. 전장은 죽음과 직결된 곳. 저 갓난아기가 일찍이 부모를 잃게 할 수 없다.
‘네 녀석도 전선에서 나와야 할 것 아니냐.’
물론 아네스는 예외였다. 프리실라라는 딸이 생기고 말았지만, 아네스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델타를 노리는 세력이 너무나도 많다. 방심은 곧 파국을 야기한다.
“나는 전장에서 죽을 일이 없다네, 사킨보.”
“또, 또…. 네가 무슨 불사라도 된 것처럼.”
“크흠, 그리 믿어야 죽지 않는 법이네.”
아네스도 엄마가 되는 것은 처음이라 준비할 것이 많았다. 온갖 전장을 다니며 적장의 머리를 가차 없이 베어내는 전사가 집으로 돌아오면 육아에 대한 것들을 공부했다.
물론 이에 재주는 없다.
젖을 떼기 시작한 프리실라에게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풋내기. 검성이라는 이명 따위가 이 프리실라 앞에선 무슨 소용인가.
‘에잇, 나중에 검을 가르쳐 줄 때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 사내 셋의 2세들도 프리실라와 함께 커가며 조금씩 옹알이를 하거나, 기어 다니거나. 그렇게 세월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자, 엄마라고 불러 보렴.’
‘하알, 미.’
‘응?’
‘할미.’
지켜보고 있던 사내 셋은 폭소를 터뜨렸다. ‘할미’라니, 셋은 유난히 훈수를 많이 두는 아네스를 향해 ‘할매’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이다.
프리실라의 옹알이는 전부 이 셋의 영향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이, 이 자식들이 너희가 그리 부르지만 않았어도!”
“아하하, 미안하네, 할매!”
눈을 가로로 쭉 찢은 채, 사내 셋을 발로 거세게 차버리는 아네스.
그 이후로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프리실라에게 단 한 번도 엄마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엄마라고 부르라니까.’
‘할매, 할매.’
말이 완전히 트였을 때는 할매라는 말이 프리실라에게 이미 적응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가끔 사내 셋의 2세들이 ‘아빠’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억울하다고 호통하는 아네스가 되고 만다.
프리실라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시기가 되자, 아네스는 작은 손을 부여잡고 델타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이때 아네스를 보며 할매라고 부르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많은 의문점을 품었다.
실제로 아네스는 중년 정도의 나이였고. 상당한 미인에 속했기 때문에 델타에 들어서면 관심을 가지는 기사나 전사들이 줄을 섰을 정도였다. 그런 아네스에게 할머니라니.
‘아직 할머니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닌데.’
‘아니면, 자식이 벌써 손주를?’
무릇 시선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매라고 부르는 프리실라에게 호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우리 아이는 나를 할매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자식 교육을 잘못했다고 생각할 테지….’
할머니인들 어떠하리. 이 아이가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기분 좋은 소리로 자신을 불러줄 때는 그 어떠한 것보다 소중한 보물을 얻은 기분인데.
이대로 무사히 자라준다면 자신도 어엿한 부모로 함께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아네스였다. 그 불길 속에서 살려 달라는 듯이 울어 재끼던 작은 것이 운명에 저항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래도 가끔은 엄마라 불러다오.”
“하하, 할매, 할매!”
“요 녀석이.”
한 번은 이곳이 델타의 늑대들이 거주하는 마을인 줄도 모르고 겁 없이 쳐들어온 도적 떼들이 있었는데, 그때 아네스는 ‘언덕을 오르는 늑대’라 일컫는 세계의 유산을 선보였다.
주먹으로도 쉽게 제압이 가능한 도적 떼들에게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의 ‘언덕을 오르는 늑대’를 사용한 이유는 레르민족의 어린아이들에게 일족의 위상을 새겨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할, 할매… 굉장, 굉장했다고!’
그 이후로 프리실라가 한동안 레르 마을에서 늑대 흉내를 내며 돌아다닌다고 몹시도 골치가 아파지는데, 더하여 프리실라에게 동화된 다른 아이들도 온종일 늑대울음 소리를 내며 다녔다.
푸른 늑대의 형상이 아네스를 휘감고 적들을 물리치는 모습. 아이들에게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갔던 것이다.
성인 또한 아네스의 그 모습을 보며 전사를 꿈꾸는 이들이 상당할 정도였으니까.
‘조금 더 강하게 내리쳐라, 프리실라!’
이후로 프리실라가 검술을 배울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 프리실라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감각이 짐승과 비견할 정도였다.
프리실라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검을 바닥에 놓았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아네스에게 입을 열었고,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아 조만간 비루스 제국군과의 전면전에 출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할매, 이번엔 할매가 돌아오지 못한다고 그랬어.”
“못된 놈, 어느 녀석이 그리 말하더냐.”
“할매는 죽으러 간다고 했어.”
“무슨 소리냐, 이 아네스는 전장에서 죽지 않아.”
아네스는 대치할 적도 없지만, 언덕을 오르는 늑대를 사용하며 아네스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절대 꺾이지 않을 생명임을, 네 어미가 이토록 용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화색이 돌아온 프리실라는 다음 날 아침 아네스가 100일 전쟁을 출전하기 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푹 잠들 수 있었다.
“아네스, 함께 가지.”
“무슨 소리, 얼른 집으로 돌아가게!”
“이봐, 다르도라, 루픽스. 할매가 말을 듣지 않는군.”
“그러다가 진짜 할매가 되어버린다고. 아네스.”
이 사내 셋의 표정은 절대 자신의 마음을 굳히지 않겠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마지못해 고개를 흔들며 ‘죽어도 모른다.’는 농담과 함께 말에 올라타는 아네스.
‘우리도 전장에서 죽지 않아.’
세 사내는 말에 올라탔다.
넷은 다시금 전우애를 그리며 델타의 늑대들과 함께 비루스 신성제국의 진격을 향해 움직인다. 레르에서 가장 용맹한 늑대들이 전장을 향해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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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킨보, 다르도라, 루픽스!”
“이 개새끼들아… 죽지 않겠다고 했잖아.”
아네스에 눈엔 처참하게 시체의 모습을 한 전우들이 담겨있다.
커서 처음 흘려보는 눈물이라 익숙함이 전혀 없었던 아네스는 죽은 이들을 향해 주먹질했다. 시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할매라고 부를 것 같은 이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전부 다른 위치에 죽은 이들이 한곳에 모여 시체가 되어있자 통곡하는 아네스, 그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사킨보는 별안간 날아오는 초월 마법의 방패가 되어, 동료의 목 대신 적장에게 자신의 목을 내준 루픽스, 이들을 발견하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SS등급으로 구성된 정예군에게 맞서 사지가 찢긴 다르도라.
“…네놈이렷다.”
“네놈이…. 네놈이!”
아네스가 델타로 진격하는 본진을 격퇴하고, 늦게나마 세 사내가 대적했던 정예군단을 홀로 초토화한 후.
군단을 이끌던 적장 중 한 명이 남아 아네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네스의 이글거리는 눈빛.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어 바닥에 주저앉은 적장에게 향했다. 그 어떠한 분노와도 비견할 수 없는 짐승의 분노와 유사했다.
네놈이라고 말했지만, 아네스 눈에는 전원 다 똑같은 네놈이었다.
모두가 전우를 죽인 적군이며 자신의 검이 향해야 할 대상이었다.
홀몸으로 정예군단을 초토화한 저 늑대의 탈을 두른 전사에게 억울할 정도로 무력함을 느끼는 적장이 투구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이내 아네스의 검은 적장의 목을 향했다.
“죽기 전에 이름을 대라.”
“….”
“이름을 대라, 네가 델타의 마지막 적이니.”
“혹시…. 델타의 기사들은 비루스로 향하는가.”
“빼앗으니, 빼앗기는 법이다.”
적장은 아네스의 대답을 듣고 난 후,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빼내어 사진을 보았다.
아내로 보이는 여인과 프리실라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델타의 기사들이 비루스로 향한다면 제국을 습격하기 위함이니 자택에 있을 가족들이 안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가족의 생사가 앞서는 것이었다.
전쟁 이후, 타 국민을 해하는 것은 사계에서도 허락하지 않는 야만적인 행위.
그러나 비루스 제국의 행보를 되새기면 똑같이 당할 확률이 높다.
‘비루스의 황제는 폭군이었으니까.’
‘우리가 무너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빼앗았으니, 빼앗기는 거겠지.’
아네스는 이를 보며 이빨을 강하게 깨물었다. 근래 프리실라를 키우느라 마음이 유해졌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였을 시 곧바로 죽이기 위해 긴장을 풀지 않는다.
“비루스 신성제국의 정예군 2번대 대장.”
“에드워드 더프.”
“내 이름이다.”
“죽여라.”
투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을 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는 상당히 젊은 편에 속했다.
정예군 본대 중 하나를 이끄는 젊은 넋이 이대로 지는가. 젊은 가장이 내 전우처럼 이렇게 지는가.
아니, 아네스는 에드워드 더프의 목을 베지 못했다.
집에서 애타게 기다릴 프리실라가 떠올라, 더더욱 그러지 못했다.
사킨보, 다르도라, 루픽스를 기다릴 자식들을 생각하니, 당장의 증오보다 가슴에 맺히는 슬픔이 컸다.
“꺼져라.”
“너희들의 행보를 떠올려본다면.”
“지금쯤 네 아이와 아내는….”
“델타의 기사들에게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당장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