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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랭크의 여관주인-154화 (154/222)
  • 154화

    * * *

    [ 헤르메딕트 성가대 행사 中 ]

    우리 할매가 말하길, 목숨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전장에 발을 디딜 때는 ‘차라리 이곳이 내 무덤이라 생각하고 싸우라’라고 충고했다.

    그곳에서 죽으라는 소린 아니고, 필사즉생. 즉 죽고자 싸우면 사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는 할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로브 속에 숨긴 무기나 갑옷보다 마음을 정돈하는 데 시간을 들인다.

    ‘그리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라.’

    할매가 나를 젖동냥으로 키워내던 때부터 하던 말이었다.

    올곧은 생각으로 향하는 곳이라면 ‘후회가 경험될 것이고, 좌절은 영혼의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그리 무식하게 행동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며 혀를 차곤 했다만, 할매가 나를 이리 키웠는데 어쩌겠소.’

    델타 제국, 왕의 길.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교차로에 성가대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전원 헤르메딕트 성가대로 새하얀 로브를 둘러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성가를 읊었다.

    자택에서 쥐 죽은 듯 숨어있던 국민들이 홀린 듯 밖으로 나와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동공에는 영혼이 일찌감치 떠나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성가대의 음악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호르게타 일원과 같이 정령왕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이들은 정신오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일렬로 이동하는 성가대 주변에는 전투성법자들이 함께 행렬을 유지했기에 마치 전쟁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군인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는.’

    ‘음모를 만들어 억지스러운 죄를 씌우고.’

    ‘죄 없는 자들을 해하며.’

    ‘거짓된 믿음을 강요하고, 이 땅을 어지럽힌 죄.’

    ‘노튼 프리실라. 나는 그대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멀리서 로브를 두르고 국민 사이를 비집어 이동하는 프리실라, 로브 안에 숨겨 두었던 투구를 꺼내 든다.

    과거에 사용하고 있었던 투구보다 흠집이 많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격전을 벌인 탓일까. 투구에는 무릇 빠른 세월이 묻어있었다.

    ‘호탕한 자유.’

    얼굴 전체를 가리기에 호르게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좋은 투구였다.

    물론 웃는 얼굴을 애 장난처럼 그려놓은 탓에 특정되기는 쉬웠지만.

    ‘이것은 영웅상, 제국에 희망.’

    ‘100일 전장의 아네스의 뒤를 잇는 영웅상.’

    혁명의 검이라고 불리는 아네스가 죽어 마땅한 상황에 놓여있다.

    헤르메딕트 성가대의 헤르메딕트 사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수 없다.

    ‘할매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네스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흡마철로 만든 철창에 갇혀있는 것도 모자라서 흡마철을 갈아서 만든 물을 섭취했다.

    계속해서 마력은 소모할 테고 산소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마력이 줄어들고 있으니, 가벼운 숨조차도 쉽게 내뱉기 힘들 것이다.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

    ‘혼자 해내야만 한다.’

    아서가 떠올랐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고, 아서와의 첫 만남은 프리실라가 전쟁에서 죽을 뻔했던 상황에서 다시금 태어날 수 있었던 극적인 만남이었다.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아서를 떠올리며, 저 멀리 보이는 헤르메딕트 추기경을 노려본다.

    거슬러야 할 운명을 노려본다.

    ‘이번에는 자네의 도움 없이도.’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죽어도 좋다.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프리실라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자 굳게 다짐했다.

    계속해서 성가대의 행렬을 쫓아간다. 전우도 없이. 홀로.

    ‘저것이 그리 신성한 물건이란다.’

    ‘사람들을 퀭하게 만들어서는.’

    멀리 보이는 헤르메딕트의 성검 ‘아쉬포르마’ 근래 호르게타에서 조사한 바로는 ‘아쉬포르마’는 흡마철로 이루어진 검으로 흡마철을 파괴할 수 있는 강도를 지닌 무기로 게다가 성가대의 초월 마법을 조율하는 장치였다.

    헤르메딕트에게 있어서는 그저 성가대를 지휘하는 봉과 다름이 없는 물건이지만, 현재 제일 가까운 곳에서 얻을 방법, 아네스를 가두고 있는 철창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저 검을 어떻게든 뺏어내 추기경을 사살하고 곧장 아네스에게 향해 철창을 파괴한 뒤, 레르 마을의 일원들을 전원 도망가게 해주는 것이 프리실라의 계획.

    ‘그리고 나는 남아서 쳐들어오는 전투성법자들과 대치한다.’

    레르 마을에 남아있는 전투성법자들의 병력은 프리실라가 충분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

    이어서 레르민족이 몇 보 물러서 도망을 친들, 다시금 자리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남은 민족이니까.’

    ‘비록 지금은 돌아서지만, 반드시 빛이 찾아오리다.’

    검을 꽉 쥐었다.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꽉 쥐었다. 어떠한 잡념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실패하면 의미 없는 개죽음이 될 테니.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집념만을 육신에 남겼다.

    ‘호르게타의 일원이자, 노튼 아네스의 영혼을 잇는 자.’

    ‘드래곤 길드의 돌격대장, 프리실라.’

    ‘각개전투를 시행한다.’

    신성함을 방패 삼는 정교의 무리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강렬하게 코를 쏘는 더러운 마력이 느껴진다.

    이어서 그 많은 성가대의 행렬을 가로막는다. 마치 일당백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왕의 길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내 성가대의 행렬을 수호하는 전투성법자들은 자신의 털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씩 오금이 저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성가대의 행렬 앞에서 길을 막는 신원불명의 인물을 포착한다.

    ‘저 자식이 감히, 당장 저 무례한 자를 잡아라!’

    전투성법자들 중에서 강하다고 여겨지는 상급전투성법자들은 느끼고 만다.

    단언컨대 저 신원불명의 인물은 지금 당장, 이 행렬에 피바람을 불게 할 수 있다고.

    왠지 모르겠지만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검기가 다가온다.

    ―.

    그의 손동작 하나만으로 백을 넘는 전투성법자들의 무기가 깔끔하게 반으로 잘려 나갔다. 이어서 성가대에 그 알 수 없는 검기가 닿았지만 헤르메딕트의 기적으로 인하여 무산된다.

    이어서 로브의 후드가 바람에 의해 걷히고, 웃는 입이 낙서가 되어있는 투구가 드러난다.

    이를 지켜보던 전투성법자들은 동공을 크게 뜨며 외친다.

    ‘저 녀석은 호탕한 자유다!’

    ‘…마녀의, 마녀의 세력이다!’

    ‘저 이단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조용히 ‘가속 마법’을 속삭이던 호탕한 자유가 전방을 향해 돌진하자 이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전투성법자들이 우르르 몰려 공격을 시도하여도 전원 튕겨 나가거나 사지가 골절되어 일어설 수 없다.

    빛을 내뿜는 화살 세례가 호탕한 자유를 향했지만 묵직한 검 하나로 죄다 튕겨내는 데 성공한다.

    움직임이 이전보다 빨라진 그녀는 투구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확실히, 노력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는데.’

    ‘보기보다 강해졌나 보군. 나도.’

    헤르메딕트 성가대는 특이했다.

    급작스러운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행렬을 유지하며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퀭한 눈으로 감정 없이 신성한 성가를 부르고 있다.

    헤르메딕트 추기경도 마찬가지였다.

    ―칭!

    가속 마법으로 인하여 예전에는 발현되지 않았던 마력의 티끌이 호탕한 자유 주변으로 으스러졌다.

    이것은 인간이 낼 수 있는 마력 출력에서 벗어난 현상으로 란베르크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선생의 경지가.’

    계속해서 전투성법자들을 베어나갔다.

    일전에 모의 공성전을 떠올리며 사방을 홀로 두르며 말보다 빠른 속력으로 적의 세력을 줄여나간다.

    ‘늑, 늑대가…!’

    호탕한 자유를 악마라고 칭하던 전투성법자들의 단말마는 ‘늑대’로 바뀌어 있었다.

    호탕한 자유가 두르고 있는 마력이 은은한 푸른색으로 마치 늑대의 형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실로 이그리스 십자회와 붙어볼 만하겠…!’

    빛의 창이 호탕한 자유의 투구 옆을 지나갔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 건물처럼 투구는 물론 얼굴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투구를 스친 것만으로도 철갑으로 된 재질이 종이 찢겨 나가듯 파손되고 말았다.

    다행히 얼굴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고, 이어서 호탕한 자유는 창이 날아온 방향을 직시했다.

    ‘헤르메딕트!’

    황금빛의 동공을 일렁거리는 헤르메딕트 추기경, 성검 아쉬포르마로 빛의 창을 여럿 창조해낸다. 이어서 호탕한 자유를 향해 무자비한 심판을 선사한다.

    주변에 있던 전투성법자들은 그 창으로 인하여 사지가 찢겨 나가더니 완전히 무가 되어버린다. 마치 사라져도 상관없을 존재들처럼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는 빛의 창을 피하며 전방을 향해 가속 마법을 중첩하며 나아간다. 거룩한 눈빛으로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헤르메딕트를 향해 몸을 던진다.

    ‘나의 조상 헤더돌프여, 이 프리실라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전사의 신념을 굽어살피시고.’

    ‘또 다른 신에게 겨누는 칼날이 인류로서 오만무도하다 하여.’

    ‘나를 몇백, 몇천, 몇만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여도 좋으니.’

    ‘자유를 향한 이 의지가 저들의 신에게 닿을 수 있게 해주소서.’

    천둥소리가 왕의 길을 지나갔다.

    헤르메딕트를 보호하고 있던 신성한 결계와 호탕한 자유의 검기가 맞닿는다. 사방이 빛으로 인하여 번뜩거렸다.

    결계 속에서 다수의 창이 호탕한 자유를 스쳐 지나가며 피를 뿌리게 했으나, 투구 속의 이글거리는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네스를 살리게 해주소서.

    번뜩임이 사라지고 헤르메딕트 성가대의 전원은 바닥에 고꾸라져있었다.

    이미 왕의 길은 초토화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성한 전투성법자들도 없다.

    결계를 뚫은 프리실라의 대검은 강력한 마력 파장 때문에 손상이 되어 파편을 튀기며 손에서 사라진다.

    결계를 뚫고 들어온 프리실라가 헤르메딕트의 ‘아쉬포르마’를 순식간에 뺏어 든다.

    “……이럴 수… 가!”

    “아무래도 우리 쪽 신께서, 그쪽 신보다 더.”

    “……카, 칵!”

    “신도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시나 보군.”

    흐릿한 시야, 헤르메딕트가 피를 토하며 프리실라의 어깨에 얼굴을 걸쳤다.

    명치가 거대한 검으로 인하여 완전히 꿰뚫린 상태였다.

    명치에서 검을 뽑아내자 헤르메딕트는 땅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진다.

    처절한 최후. 성가대의 효력이 약해지자, 국민들의 동공에서 서서히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무표정이었지만 이를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호탕한 자유가, 홀로 정교에서 맞서는 모습을 감정 없던 눈으로도 지켜보고 있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전부 호탕한 자유를 향한 것이었다.

    수많은 환호 속에서 자신을 ‘호탕한 자유’라 외치고는 성검 아쉬포르마를 로브 속에 숨기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 환호 속의 ‘호탕한 자유’라는 단어는 전투성법자들이 잔뜩 몰려와 국민들을 제지하기 전까지 왕의 길에서 계속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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