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49화 (149/222)

149화

* * *

[ 조금 먼 과거, 블헤이드 메인의 성 ]

서대륙 검객으로 이름을 떨친 이들은 필히 스쳤던 곳, 델타에 위치한 블헤이드 메인의 성은 그런 곳이었다.

쉽게 ‘선택받은 검객’이라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아무개나 블헤이드 메인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서대륙 검객들의 스승이라 불리는 ‘오’ 그러니까 가주 ‘블헤이드 메인 자르문’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그 허락이 떨어진 검객들은 블헤이드 가문의 훈련을 끝내면 당당히 ‘블헤이드 메인에서 훈련을 수료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블헤이드 메인 가문의 경우 이름 자체가 제국을 상징하는 ‘아젤’가문과 달리 델타의 ‘귀족’에 속하기 때문에 검의 제국이라 불리는 아젤 가문에 비하면 그리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왕실을 상징하는 아젤 가문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가문이 블헤이드 메인이다. 자르문은 늘 아젤 그 자체를 상징하는 ‘아젤 드사덴’에게 도전했던 사내였고, 이 사이에는 ‘노튼 아네스’도 있다.

이들은 7인의 영웅 중 하나인 불세출의 검 ‘베르히만’을 제외한, 사계의 3대 검성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생각해보라 이 셋이 얼마나 많은 격을 서로에게 주고받았는지.

앙숙이라, 서로 간의 예의가 깊다. 대게 검으로 대화를 하는 자들은 그렇다.

게다가 ‘자르문’은 엄격한 인상을 지녔으나, 만났던 자들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점.

‘신사적인 남자’

자르문은 아네스와도 삐뚤어진 드사덴과도 사이가 가까웠다.

물론 그들을 향해 틀었던 칼날은 변함없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검객으로서의 도전이었다.

‘내 딸을 한번 보내도록 하지.’

자르문에게 드사덴 아젤은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 드사덴은 자신의 딸인 모르딕 아젤이 최대한 많은 검을 배우길 바랐다.

특히 검을 맞대어본 자르문이라면 더더욱 맡길만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당시 제국에서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모르딕은 이를 아직도 ‘아바마마는 어릴 적부터 나를 강하게 키워왔다.’고 말한다.

멀리서 성의 거대한 철문을 열고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녀는 액면가라는 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어렸다.

많이 쳐봐야 9살 정도로 제 아들 란베르크와 비슷한 나이였다.

‘여기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르딕이 블헤이드 메인에 찾아와 처음 뱉은 소리였다. 자르문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집사가 그런 소리를 뱉은 것인가,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집사가 꼬맹이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리 생각했다.

‘허, 지아비와 똑같군.’

자르문의 긴 다리를 부여잡고 수줍게 숨어있는 란베르크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게다가 이런 소녀에게 드사덴은 어떤 훈련을 시켜왔다는 말인가. 괜스레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고 있던 란베르크를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젊은 편에 속했던 자르문. 턱수염은 없었으나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 행동에는 ‘이런 아이에게 무슨 훈련을 시켜야 한단 말인가’라는 고충도 섞여 있었다.

‘란베르크는 이제 검을 쥐고 휘두르는 시늉을 할까 말까인데.’

그 소리를 듣자 ‘란베르크라는 녀석이 저 코흘리개라면, 비교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자르문 경.’이라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르딕이 자르문의 웃음보를 터트리기 충분했다.

아주 충분했다.

“그래, 우리 아들 녀석이 조금 소심하긴 하지.”

“자르문 경, 어리다는 것에 편견을 가지진 않으시겠죠.”

“미안하지만, 이 자르문 경은 조금 편견이 있는 사람인데.”

“그, 그렇담.”

“훈련은 시켜주도록 하지, 다만 란베르크의 기준에 맞춰주려무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만.”

이 대화를 보며 웃음이 터지지 않는 검객들은 없다.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임에도 주위에 있던 검객들은 ‘얼른 강해져야겠는걸, 여자애한테 질 순 없잖아. 아하하!’라며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란베르크를 계속해서 놀리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모르딕은 매해 3달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차후에 드사덴이 자객을 보내는 끄나풀을 찾은 뒤로는 찾아오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전까지 란베르크와 모르딕은 늘 함께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상대가 안 되잖아.”

“흑, 흑… 아파, 모르딕.”

“쯧, 그만 울어라, 울보야.”

검도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데다, 넘어지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는 란베르크.

저 코흘리개가 자신의 상대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모르딕이었다.

그렇다고 죽상을 한 울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고개를 흔들며 목검을 맞아 손이 퉁퉁 부어오른 란베르크의 상태를 봐주거나, 달래주거나, 익숙한 것이었다.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래선…. 강해질 수 없어.’

물론 자르문은 아비 웃음으로 녀석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최소한 딸이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피해야 한다던 드사덴의 부탁은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니까.

‘덤벼, 모르딕.’

때는 소년·소녀가 청소년기를 맞이할 때. 란베르크는 질풍노도라 불리는 ‘사춘기’와 죽마고우일 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자르문의 직계혈통이라는 유전이 얼마나 무서운지 본격적으로 나타날 때였다.

‘…제길, 울보 녀석이 이렇게 강했던가!’

허리춤에서 목검을 꺼내기만 하여도 울어 재끼던 란베르크가 아니었다.

울보는 더는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검 끝에 냉정함이 묻어나며 모르딕의 모든 격을 받아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된다.

모르딕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렇다. ‘이제야, 상대가 되는군.’ 모르딕은 누가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검객이 아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가슴을 더더욱 뜨겁게 만드는 촉매의 역할을 기꺼이 해내는 란베르크였다.

“이걸로 내 승리다. 모르딕.”

“…쳇, 앞으로 울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

란베르크에게 있어서 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던 대련으로, ‘다시는 울보라고 부르지 말 것’이라는 약속이 걸려있었다.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니, 까칠한 성격의 란베르크가 잘도 참아온 것이다.

넘어져 있는 모르딕의 목에는 나무로 된 칼날이 승리를 누리고 있다.

이내 손을 내밀어 일으킨다. 피식하고 소녀가 웃음을 짓더니 울보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다.

‘고맙다. 란베르크.’

시간은 계속 흘러 소년·소녀는 성인이 된다.

이제는 서로와 비슷한 적수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모르딕이 이전처럼 블헤이드 메인을 찾아오는 것도 줄어들뿐더러,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바빴던 나머지 만남의 수가 적어졌다.

란베르크는 델타의 기사가 되어, 그중에서도 제국의 위상이라고 알려진 ‘왕실 기사단’에 입성한다. 무훈이 뛰어난 자를 색출하여 왕의 검이 될 수 있는 자.

엄격하게 관리되어 위상을 자아 해내는 델타의 잘 다듬어진 명검을 의미한다.

델타가 성장한 만큼 큰 공을 세운 이들의 물욕과 권력욕도 성장하는 것은 당연했고, 갓 성인이 된 란베르크가 왕실 기사단에 들어온 것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가 많았다.

‘다들 왕의 위상이랍시고, 자기 몫만 닦아대기 바빠서.’

‘그러니 제국이 이 모양이고, 긍지를 잃은 기사가 늘어나는 겁니다.’

‘지금 앉은 자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시지요.’

란베르크가 회의에서 왕실 기사단장의 면전에 대고 뱉은 말이었다.

이 사내는 검 끝을 바라보며 앞을 나아갈 뿐,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건방지구나.’

‘그 잘난 블헤이드 메인의 콧대를 꺾어주지.’

물론 이를 가만히 지켜볼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도 권력자가 아닌 검객으로 돌아왔을 때 엄청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니까.

이어서 예의를 모르는 란베르크를 혼쭐내고자 정식적으로 대련을 신청했다.

‘한심하고, 게다가 무능합니다. 당신들은.’

모두가 예상했듯이 결과는 왕실기사단의 완패, 아니 참패였다.

단 한 명도 란베르크에게 공격에 성공하기는커녕 검 끝이 옷깃을 스치는 것도 불가하다.

‘란베르크 일등기사, 기사 교육대로 전입하다.’

이 내용의 신문은 한때 델타를 떠들썩하게 하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당사자인 일등기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신문에 적힌 활자의 진실은 란베르크가 기사를 관두려고 하던 것을 델타 3세가 직접 부탁을 했기 때문에 기사단의 전입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아닙니다.’

란베르크는 델타라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델타 3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왕실 기사단처럼 면전에 대고서 자신의 주관을 표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이 검객에는 많은 것이 보였다. 델타의 왕관 주위에는 벌레들이 들끓고, 왕은 눈앞을 어지럽히는 그 벌레들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네 녀석을 쉽게 이기긴 글렀군. 란베르크.’

모르딕과 란베르크가 오랜만에 만나 대련을 하던 때였다. 안타깝게도 승리는 란베르크의 것이었고, 대련보다는 서로 어떤 식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담소를 나누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는 아젤의 통치자가 되리다.’

지겹도록 란베르크에게 뱉은 말이었다. 지겨울 정도가 아니라 란베르크가 울보였을 시절부터 지금까지 귀가 아프도록 해왔던 모르딕의 신념이자 목표였다.

근래 철혈의 검이라는 조합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도 지아비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새로운 선택지였다.

‘신념은 좋지만, 가끔 그 신념이 영혼을 삐끗하게 만들기도 해.’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가 줄어드는 란베르크가 모르딕에게 던진 조언이었다.

조언의 뜻보다는 오랜만에 제 생각을 말해준 이 사내 때문에 동공이 잔뜩 커진 소녀였다.

이 순간만큼은 소년과 소녀의 대화처럼 흘러갔다.

‘굵고 짧은 것도 좋지만, 네 목표를 위해서라면 길게 가는 법도 알아야 하고.’

입에 단내가 남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수가 적었던 란베르크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 문장이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위태로워 보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아는 모르딕은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울보 주제에… 감히 내게.’

자리에서 일어나 모르딕은 란베르크에게, 소녀는 소년의 조언에 덧붙였다.

약속이라고 하진 않았으나 어느새 둘은 이 대화가 하나의 약속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끔 나도 생각한다. 집념에 사로잡혀 미쳐버리진 않을까.”

“내가 만약 정신이 나가서, 미치광이 검사가 된다면 말이야.”

“그때, 이 몸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사계의 몇 없으니.”

“부탁한다. 울보야.”

란베르크는 ‘그때가 오면 죽여 달라는 말인가’라고 대답한다.

사방이 소녀의 목소리로 울려 퍼질 만큼 쩌렁쩌렁한 폭소였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라며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덧붙인다.

“미쳐버린 너를 죽이는 것은 어렵진 않다만.”

“네가 죽으면 꿈자리가 사나워진다.”

“미루는 것은 질색인데, 그때가 오면 생각해보지.”

“일단…. 대련 상대가 없어지면 곤란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