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39화 (139/222)
  • 139화

    * * *

    [ 부유하는 구왕 / 마케롯의 거목 ]

    ‘여인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나 세계는 시간이 없지.’

    여인은 베를리를 의미했고, 그녀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의 유산이 각성의 전조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계의 유산이 완전히 영에 깃드는 순간을 기다려야만 눈동자의 색이 바뀌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단다. 어쨌거나 유산을 발현할 때마다 보랏빛의 눈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이 없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세계의 유산이 뭡니까?’

    마케롯이 이 말을 듣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인의 눈을 찢어 어떤 문자가 적혀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만 네 적성이 풀리겠나?’

    그가 예언자라는 말을 듣고 난 이후, 마케롯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한 조력자니까.

    “각성 이후에는 스스로 그 유산에 대한 정체성을 찾을 테니까. 필요한 것은 시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어쩔 수 없지만, 이곳에 숨어있도록.”

    “보랏빛의 눈을 가진 여인을 받아주는 곳은 그 어디도 없으니, 마녀라고 오해받아 화마의 기둥 같은 것에 매달려 죽을 수는 없지 않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베를리를 받아주는 곳은 그 어디도 없다. 하물며 정교 때문에 사계의 모든 제국이 경계가 삼엄할 테니, 어딜 가나 검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네자, 마케롯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일단은 내 회복에 집중하자고 말했다.

    한쪽 다리가 제 모양을 찾긴 했으나 감각이 무뎌져 있어서 걷는데 지장이 많이 가니까.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정령왕을 닮은 마케롯이 연고도 없는 나를 걱정해줬다.

    “팔찌는 푸른 용에게 건네주겠다. 호수에 떨어져 있더군, 누가 만든 것인지 몰라도 그 안에 있던 지도는 상당히 높게 평가하지.”

    “완벽하진 않았다만, 수많은 자료를 모아서 객관적으로 도출했던데.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고고학자들의 엉터리 환계 지도보다는 백배 훌륭했다.”

    마케롯이 아이리스에게 팔찌를 건네주며 했던 말이었다.

    아이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것을 받아 손목에 착용한다.

    “날씨가 좋으니, 얼굴에 바람이라도 맞고 오는 것이 어떻겠나, 어차피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으면 지겨울 테니까. 저기 푸른 용 아가씨도 턱이 빠지라 하품을 하는군.”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야 할 듯하니, 이참에 구왕을 가볍게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크기가 작은 대륙에 필적하니 만만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니지, 아니지. 용 아가씨가 있으니 식은 죽 먹기겠어. 음… 그리고 구왕에 거주하는 수호자들에게 미리 통보했으니, 너희끼리 서로 물어뜯을 일은 없을 거다.”

    베를리는 마케롯이 던진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턱을 괴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이리스. 나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따라가’라는 부탁을 더 했다.

    아황은 정령왕만큼이나 세계를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 게다가 ‘결에 가까운 미래’를 보는 자로 베를리의 눈을 고칠 수 있는 유력한 조력자이기도 하다.

    정령왕은 사계가 문명을 이루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다는데, 내 눈에는 그저 멍청하고 하릴없는 놈팡이였다만.

    그나마 아황 덕에 머리에 있는 지혜가 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자, 여관의 주인 나리께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쉽게 부탁드리죠.”

    “자네는 꽤 많은 일을 해 온 것처럼 보인다만,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나?”

    “그런 건 모릅디다. 그때는 워낙 혼자서 바빴으니까요.”

    “아주 신묘한 눈을 가졌지만, 아는 게 적다. 음….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군. 눈알이 흘러내리기 직전이야. 집어넣지 그래.”

    “….”

    마케롯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변하게 했다. 처음엔 마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신 정도의 권능을 지닌 존재가 부릴 수 있는 기적.

    침대를 제외하고 주위가 몽땅 하얀색이 되어버린다.

    침대에 있는 나를 향해 지긋이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 눈엔 그가 정령왕과 다를 바가 없어 조금 더 진지한 정령왕이 나를 노려보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에 놀라지 않는다는 건가.”

    “당신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쪽입니까?”

    “이런, 그런 취미는 없다고.”

    여관이 부서지는 장면을 보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니고. 그대로 아황에게 말하자, 가볍게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칸. 사계를 통틀어 세계를 일컫는 말.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계속해서 가속한다. 계속해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얘기했던 것처럼 결말이 무엇이 되었든 세계가 살아 움직이려면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니까.’

    결말이 비극이 되어도, 당장 멈춰서 사라지는 것보단 나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지가 잘려 나가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인류. 이들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결말로 향하는 세계는 「그 어떠한 평행세계에 관여되지 않으며, 우리가 밟고 있는 세계의 시간대가 유일무이」하다. 그저 「결을 위한 과거」와 「결을 위한 미래」만이 존재할 뿐.’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바꿔야,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오는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자네가 결말이 가속되는 것을 막지 않았더라면 진즉 세계는 파국을 맞이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결에 가까운 과거」가 있고 「결에 가까운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지. 그래서 바뀌어버린 결에 가까운 미래는 무엇이냐, 정교가 사계를 정복하여 세계의 주인은 교황이 된다.’

    ‘과거에 그 고생을 했는데, 어쨌든 결말이 비극으로 이어지냐는 표정이군. 그래, 당연히 이보다 비극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정교만 제외하면.’

    ‘이어서 사계는 파멸한다. 그 이유를 자세히 알고 싶었으나, 몇 년 전부터 미래를 예언하고자 기적을 부리면 꿈속을 헤집는 느낌이야.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흠, 좌우지간.’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120년이나 남았다. 그다음이 중요한데…. 전자에서 말했던 결말은 내 유산이 두 별(달) 전에 내린 예언이었다.’

    ‘그러니까, 또다시 결에 가까운 미래가 바뀌었다는 말인데. 어때 궁금하지 않나,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반응인걸.’

    파멸로 향하는 이야기 흐름에 ‘아서’라는 예외의 존재가 또다시 섞여버렸으니, 사계의 멸망을 막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사계의 멸망이 늦춰졌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제가 어떻게든 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역할이니까요.”

    “허, 당황스러운 발언이군. 결론은 결말이 더욱 가속된다.”

    “…?”

    “결말까지 ‘몇 별(달)’ 안 남았다는 말이지.”

    마케롯은 주위를 변화시켰다. 우주 같은 공간에 10개의 원형이 ‘한 줄기로 이루어져 있는’ 나무에다 열매처럼 매달려있다.

    마력의 광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한 이것은 하나의 신을 연상하게 했다.

    “현재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결에 가까운 미래, 혹은 과거가 세계를 의미한다면, 모든 평행세계에서 변함이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저 나무이다. 그리고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

    “인류는 이것을 ‘유전의 나무’라고도 일컫더군. 물론 그들이 볼 수 있는 나무의 기관은 3개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이 나무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볼 수 있는 것도 ‘결에서 가까운 미래’를 보는 이 몸이나, ‘과거를 보는 녀석’ 외에는 없으니까.”

    “이름을 짓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 나무를 보라, 그 어떠한 결말에도 변화가 없으며, 심지어는 창조자를 연상하게도 한다.”

    “감히 저것에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지.”

    나무에 있는 원형에는 여러 개의 글자가 적혀있다. 그것은 아칸의 고대언어도 아니었으며, 당연히 지금 사계가 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도 아니었다.

    “저 글자는 창조계의 언어. 나는 저것을 읽을 수 없다. 그들의 영역에서 한참 아래에 속한 미물에 불가하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말의 납득이나, 이해조차 되지 않는, 저 웅장한 나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네 녀석은 알고 있는가, 여관주인?”

    “내가 보기에는 저 모든 원형의 기관을 갖춘 자가 ‘창조자의 유전’을 얻어 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 아무개도 저것들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창조자를 모방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존재에 잠식되는 심연. 그로부터 창조되는 절망이라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인류를 괴롭히는 무언가? 세계를 파괴하는 절대 악?”

    “아니, 아무개나 창조자가 될 수 없도록 막기 위한 장치. 인류에게 있어 절망이라는 꺼림칙한 존재는 그런 역할이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과거에 누군가가 이 나무를 완성할 뻔했는데 말이지, 그때 처음으로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 열렸다.”

    “마치, 나무가 완성되지 못하게끔 훼방을 두는 것처럼.”

    우주에 있던 나무의 열매가 하나씩 빛이 나고 있었다. 마케롯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 괜히 멀쩡한 우주가 ‘절망을 토하는 구멍 안’을 연상하게 만든다.

    “과연, 창조주께서 세계의 결말로 희극을 원하는 것이 맞을까. 과연, 우리의 창조주께서 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세계가 탄생한 이례부터 이 땅을 밟아온 나라는 미물은 창조주께서 현저히 악에 가깝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고찰의 끝은 있는 법이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뇌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해답은 내 머릿속에 있는데, 내 머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더군. 두려워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창조주가.”

    “비극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우주로 변해있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뚫린 구멍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방안을 밝게 만들어 눈을 부시게 했다.

    마케롯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자연스레 늘 하던 습관처럼 검지와 엄지를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다.

    ‘빌어먹을, 지구로 돌아가긴 글렀잖아.’

    ‘하다못해 살만한 곳에서 여관이나 운영하면 그만이었는데.’

    ‘제기랄…. 이래선.’

    마케롯이 다가와 내 머리에 조심히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다시금 공간이 바뀐다.

    장소가 눈에 익었는데, 다름 아닌 메르헨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메르헨은 분명 ‘아주 이질적이고 특별한 곳’인데, 마케롯이 어떻게 이곳을 상상하여 공간을 꾸며냈는지 알 수 없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머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마케롯이 ‘네 상상을 기반으로 구축된 공간이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는 아황. 아무래도 나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네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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