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37화 (137/222)
  • 137화

    * * *

    꿈이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자각몽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나는 꿈을 꾸고 있고,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사실 이렇다 할 좋은 꿈을 꿔왔던 것이 아니지만, 눈앞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너와 내 이야기는 여관 못지않은 행복한 장르다.

    가르강티아, 절망을 토하는 구멍.

    세계를 종말로 이끄는 원천. 구멍 안에서 꾸던 꿈은 늘 악몽이었는데, 좋은 것에 속했다. 일단 잠이라도 잘 수 있었단 얘기니까.

    아템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템에게서 나는 묘한 향이 코끝을 달짝지근하게 만든다. 오랜만이다. 이 향기.

    나는 이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싶다.

    “…아템, 뭐 하는 거야.”

    “그대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 노르트.”

    “그러니까, 치워달라는 말이잖아.”

    “좋다. 그렇다면 그대가 내게 기대겠는가?”

    꿈의 시간대는 가르강티아의 주인을 무찌른 뒤라고 할 수 있었다.

    노르트와 아템의 손등, 서로를 연결해주는 문양이 있는데 그것이 흐릿하게 지워져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구멍을 빠져나온 뒤에 문양은 서서히 사라졌으니, 어림잡아 이곳은 메르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스름을 몽땅 머금고 있는 거대한 꽃밭을 보면 확실하다.

    “나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나도 그대와 함께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템,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라도 가자.”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 설령 구멍이라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다양한 색채를 이루고 있는 들판의 꽃들이 어스름으로 인해 죄다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아름답다.

    에르미가 말하길 이곳의 이름은 ‘황천 고개’라고 했다.

    ‘황천 대신 창천이 어떠냐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러니까 죽어서 가는 황천은 아니고 드넓은 하늘이라 황천(皇天)을 의미하는데, 세계의 창조자가 메르헨을 그 어떠한 곳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직접 빗어냈다.

    ‘그래서 황천은 절대자를 의미하기도 했고.’

    ‘이 들판의 고개는 그 절대자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 절대자가 우리더러 천생연분이래.’

    ‘참, 웃기지도 않아.’

    우주가 금방이라도 코에 닿을 것 같은 굉장한 하늘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창조주가 훔쳐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또 황천이라는 말이 일리가 있을 법도 하다.

    반딧불이 나타나고, 또다시 밤하늘의 별을 흉내 냈다. 아템은 반딧불이 앉을 수 있도록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반딧불이 손에 앉자 미소를 짓는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사실 여관이 하고 싶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난데없이 그렇게 혼자 눈을 감은 이유가 뭔지.’

    ‘이 배신자야.’

    ‘아니야, 그냥 있을 거야. 나는 다 아니까.’

    ‘다른 말을 네게 건넸을 때.’

    ‘이 꿈이 무정하게 끝나버린다는 걸.’

    네가 밉다.

    그것도 모르고 엄한 반딧불이나 매만지면서 사색을 논하고 있으니.

    어깨에 기댄 얼굴을 치우라 했지만, 치워주지 않았으면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면 끝나버리는걸.”

    “노르트, 방금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

    “아니야.”

    아템은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휘날리며 머나먼 지평선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쯤 되면 아템이 ‘언제, 어디로 떠날까.’라고 말을 건넨다. 그것은 꿈에서 깨어남을 암시했다.

    내가 ‘언제든, 어디든’이라고 대답하면 아템이 천천히 내게 걸어오다가 미소를 짓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없다.

    늘 그렇게 꿈에서 깨니까.

    지구에서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그저 흐릿한 기억만 남을 정도로.

    시간을 측정할 수 없는 공허의 구멍에서 지내본 적이 있는가.

    알량한 신의 기적을 품고 있으나 온갖 수렁을 겪으며 피를 흘리고, 흘리고. 또 부활을, 부활을 반복했다.

    지금 와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면 무한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을 반복할 때, 늘 곁에 있었던 것은 아템이었다. 희망이자, 유일한 친구이자, 전우이자, 내 반쪽이자, 내 모든 것에 가까운 무언가.

    “언제든, 어디든.”

    “…기회가 온다면, 용사의 쉼터라는 곳으로 데려가 줄게.”

    아템이 내게 걸어온다.

    꿈이 걸어온다. 그리고 꿈이 끝에 가까워진다. 시야는 여전히 꿈처럼 흐릿하지만, 콧잔등에 남은 네 향기만큼은 확실했다.

    꽃의 이름, 은빛의 여인 프리게(prighe)라고 했던가. 그래. 그 무엇보다 네 모습과 닮아있어서 여관마당에다 잔뜩 심어두고 싶다.

    그러면 그 향기가 그곳에 머물러서, 네가 함께 있는 느낌일까.

    * * *

    [ 부유하는 구왕 / 마케롯의 거목 ]

    무거운 눈꺼풀을 떼어내자,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로 잠을 자는 아이리스, 그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베를리를 볼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몸을 완전히 일으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뻐근한 근육, 쇳덩이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뼈. 육체가 수복되려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거대한 나무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창문을 대신하던 거대한 구멍이 외부의 나무들을 보이게 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린다.

    “일어났나.”

    “…?”

    녹색 장발의 미남, 정령왕이 저 멀리 벽에 기대어 내게 말을 걸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오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황이 있는 곳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아황, 그 녀석. 요즘 안 본 지 좀 되었는데.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까.

    어차피 따라올 생각이었다면 불편함 없이 이곳에 도달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정령왕, 짜증 나게 어째서 도와주지 않은 거죠.”

    “정령왕이라니, 나는 그 양반이 아니야.”

    “헛소리가 나날이 느는군, 딱 봐도 얼굴이 정령왕인데.”

    “나는 아황 마케롯이시다. 형님과 모쪼록 닮긴 했다만.”

    “에?”

    자세히 보니 묘하게 정령왕과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머리칼의 색도 조금 더 짙은 것 같고, 말하는 투나, 목소리도 틀리다. …내가 잘못 짚은 것일지도.

    “망나니랑 똑같은 취급을 하다니, 기분 나쁜데.”

    “크흠, 망나니라는 부분은 동감합니다.”

    “그래, 믿는 눈치군.”

    정령왕….

    아니 아황 마케롯은 침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고, 잠을 자던 아이리스와 베를리를 보며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라고, 네가 쓰러진 지 3일이 지났는데 말이야.’라고는 덧붙였다.

    ‘육체의 수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 보이던데. 내 힘으로도 이렇다 할 치유가 되지 않는 걸 보아, 네가 규격 외의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가?’

    마케롯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마케롯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

    두 마리의 광귀가 일전에 만났던 녀석들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아황 옆에서 온순한 분위기로 누워있다. 강아지 같다고 할까.

    “늑대들이 한 성깔 하던데. 지금은 꼭 강아지 같네.”

    “자네들의 기록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대충 SSS등급은 될 것 같네요.”

    “흠, 그 쌍생아를 상대한 자네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란한 듯이 한숨을 쉬었더니 이를 보던 아황이 피식 웃음을 짓고는 화제를 전환하며 베를리의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저 여인의 눈은 어느 시점부터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보랏빛의 눈. 절망을 숭배하는 마녀를 상징하여 마땅한 것.’

    ‘이를 조합하면,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밖에.’

    ‘기구한 운명이야, 기구한 운명이야.’를 운운하던 마케롯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를리에게 다가갔다. 상체를 숙인 다음, 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직시한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감긴 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세계의 유산이다.

    세계를 꽤 오랫동안 살아온 고인물이 던진 한마디에 토를 달 수밖에 없다.

    인류에게 주어진 세계의 유산은 그것을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고대 문자가 육체에 깃든다는 것이 정설이니까.

    “우매한 것. 어째서 그 흔적이 피부에만 남으리라 멋대로 추측하는 건가, 그 흔적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 수도 있으며, 저 작은 동공 속에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르는 부분일 터.”

    “나는 만물과 그 음률을 동조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 아황이다. 저 여인의 눈은 분명 세계의 유산이고 마녀의 눈보다 더욱 골치 아픈 것이지.”

    “그래서 기구하다는 말이다. 저 여인도, 네 녀석도.”

    신비로운 느낌을 발산하는 아황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백한 증거를 확인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저 말이 진실이라는 듯 받아들여진다.

    “세계의 유산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인류가 말하길 신이 내린 기적?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지의 힘? 자연에서 생성되는 막대한 힘이 내재 된 자연의 보고?”

    “게다가 인류가 아닌 생명체가 그것을 갖게 되면, 너희는 멋대로 그 이름 앞에 ‘고대’라는 말로 정의를 내렸다.”

    “과연, 탁월한 분석임이 틀림없으나. 신에게 가깝지 못한 인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세계의 유산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세계의 유산이라니, 이 촌스러운 학명은 어디다 따온 것인지. 고고학자 월키스도 이를 보며 통탄하더이다.”

    “세계는 다양한 힘과 규칙으로 이루어지고, 이동하며, 변화하고, 진화한다. 이야기가 처음과 끝이 있듯, 이 세계도 당연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타당하지.”

    “너희가 세계의 유산이라 부르는 그것은 책갈피와 같은 것. 책갈피란 무엇이냐, 읽다 말았던 곳을 쉽게 찾기 위해 책의 낱장 사이에 끼워 두는 물건의 이름이 아닌가.”

    “계속해서 종이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것은 절대자도 아닐뿐더러, 심지어 세계를 절망으로 장악하는 심연도 아니다.”

    “긴, 그것도 아주 긴 이야기가 결말을 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마땅히 위치해야 할 곳에 존재하는 세계의 유산은 이야기의 역할을 의미하지.”

    “저 여인은 세계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결말을 향하기 위한 어느 중요한 시점에 책갈피가 되어 이야기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멈췄던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이 좋은 것이 되었든, 나쁜 것이 되었든. 멈추게 되면 세계는 존재의 의미를 잃으니.”

    아황은 다시금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비장한 눈빛으로 나를 직시하는 것이 예사가 아니다. 이를테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델타의 아네스 같이.

    “세계에는 두 예언자가 존재하지.”

    “그래, 또 다른 책갈피의 역할을 가진 진정한 예언자.”

    “한 존재는 ‘결에 가장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자.”

    “한 존재는 ‘결에 가장 가까운 미래’를 들여다보는 자.”

    “후자의 예언자는 늘 때를 기다렸다.”

    “네가 침대에 누워, 나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눴으니.”

    “예상했던 만남이 당겨졌음을 알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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