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30화 (130/222)
  • 130화

    * * *

    용사의 쉼터 휴일. 여유를 즐기기엔 델타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으나, 마당에 나와 차를 홀짝이는 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있나, 우리가 이러겠다는데.

    이렇게 휴일이 찾아와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낼 때, 홉스는 늘 휴식을 마다하고 여관에 찾아와 아이나와 함께 밀린 정산을 하느라 바빴다.

    ‘홉스도 간만에 집에서 푹 쉬겠군.’

    제국이 전체적으로 통제되어 이렇다 할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밀린 정산 따위는 없었고, 모쪼록 피곤할 일도 없었다. 돈이야 뭐, 언제든 벌면 되니까.

    “임자야, 저자는 에이덴이라는 자가 아니더냐.”

    “보여,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옆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던 아이리스가 고고학자 월키스의 서적을 덮고서 했던 말이었다. 멀리서 에이덴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제국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지 알 수 있다.

    “에이덴, 무슨 일이죠?”

    “아서,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언덕 아래, 마차가 한 대 있었다. 특별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것을 보아 에이덴의 것이다. 에이덴만 있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로브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으나, 착용한 로브의 실루엣을 보아 두 명 다 여성으로 추측된다. 언덕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온다.

    언덕에서 검을 휘두르며 가벼운 훈련을 하고 있던 프리실라가 왠지 모를 긴장감에 멀리서 다가오는 두 명 쪽으로 검의 방향을 틀어 미간을 찌푸린다.

    “애송이, 많이 늘었구나.”

    “이 목소리는… 할매!”

    프리실라가 ‘할매!’라고 외치는 순간, 후드를 걷어서 얼굴을 보이는 아네스. 오랜만에 만난 터라 프리실라도 기뻤는지 아네스를 안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블헤이드 메인의 천재에게 훈련받는다더니, 검을 다루는 정교함이 몹시 늘었군!’ 아네스가 주름이 잡힌 손으로 프리실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월이 담긴 위로는 앞으로 나아갈 이에게 축복을 안겨주니까.

    지켜보고 있던 아이리스와 나는 ‘프리실라도 아네스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구나.’라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휙’ 하고 돌리는 프리실라.

    ‘콜록, 콜록.’

    병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지 기침을 자주 하는 아네스였다. 그때처럼 각혈하진 않았지만 대신 프리실라에게 ‘몸도 좋지 않은 양반이 여기까진 왜 온 거야.’라며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서,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네.”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 했는데, 제가 늦었네요.”

    “자리를 내주겠나, 우리끼리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으로.”

    “비밀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이야기해도 상관없네만, 얘기가 길어질 듯해서 말이지.”

    후방건물에 있는 마스터 룸으로 안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캡틴에게 이들이 마실 차를 부탁했고 ‘달그락’이라는 소리와 함께 여관 문을 열고 삼인방에게 향했다.

    아네스에게 꼭 붙어있던 누구는 해골 신사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느라 바빴고, 아네스와 함께 후방 건물을 향해 움직이자 멀어진 것을 알아채고는 헐레벌떡 달려온다.

    * * *

    [ 용사의 쉼터 / 후방건물, 아서의 방 ]

    아네스는 방안을 훑고는 ‘사내가 잠을 자는 곳 치곤, 인테리어에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군.’ 같은 오랜만에 자취방으로 찾아온 부모가 잘 꾸며 놓은 자식 방을 보고할 법한 소리를 했다.

    함께 찾아온 아무개 씨는 캡틴이 가져다준 차를 공손히 받으며, 여전히 동공 없이 잘도 움직이는 해골을 보며 계속해서 ‘우와….’를 운운했다.

    ‘이거, 자네도 방 안에 사진이 꽤 많은걸.’

    내 방에는 몇몇 사진이 있었는데 대부분 여관 일동과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일 뿐인데 시끄러운 게 느껴질 정도라니까요.’라며 피식 웃자, 내 머리맡에 있는 작은 액자로 시선을 옮기는 아무개 씨.

    “아름다운 분….”

    “당신. 아템이 보입니까.”

    “회색 머리칼을 가진 고운 여성이….”

    “과거의 제 동료였습니다.”

    “흠, 늙은이 눈엔 아서 말고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아.”

    아네스가 맹인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 눈이 나빠진 것에 대해 예의 없이 놀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액자의 사진은 바위에 앉은 나, 그리고 검 하나가 그 옆으로 박혀있는 사진.

    ‘도대체 어떻게 본 거야.’

    아템의 형상을 읽은 것은 아무개 씨가 처음이었다. 물론 방에 들어와서까지 검과 함께 찍어놓은 사진을 유심히 볼 사람도 없겠다만.

    아네스는 액자를 눈이 빠지라 쳐다보지만, 여전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애지중지해 보이는 검과 함께 찍은 아서의 단독사진인데.’라는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네스는 여관의 근황 같은 것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고, 당연히 아네스를 반갑게 맞이해야 할 렌, 녀석의 부재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째서인지 란베르크의 부재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이어서 제국의 멸망이 어쩌고…. 관자놀이를 누르게 하는 이야기의 2부가 시작됨을 알린다.

    ‘델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제국이 정교로 인하여 통제 불능이라는 사실은 옆 동네 아크론도 아는 부분이 아니던가, 전문이 용사의 쉼터 근방까지 날아다니는 바람에 주변 농장의 나이 꽤 많으신 노인들이 한숨을 쉬기 바쁘다.

    아네스는 델타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자신이 조사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나둘 설명을 했고, 들으면 들을수록 손이 관자놀이를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현재 정교는 델타를 완전히 장악할 셈이라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보원의 말을 따르면….’

    ‘교황이 이 제국을 원하는 것 같더구나.’

    정교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얻겠다.’라는 말과 같은 셈이었다.

    보통은 세계의 유산 중에서 성유물이라 불리는 것을 수집했다. 예를 들어 어느 땅 아래 성유물로 추측되는 것이 있고, 그 땅 위에 제국이 있으면 ‘성전’을 일으키는 식이었다.

    정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하면 성스러운 도적 떼와 다를 것이 없으니 일단은 말로 구슬리는 것이 시작이다.

    대부분의 제국은 자존심을 세우며 정교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인다. 과거, 여러 국가가 모여 거대한 세력을 이루는 제국이 정교의 전쟁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그렇게 역사에 기록되는 전쟁은 대부분 ‘성전’이라는 단어가 이름 앞에 붙으며, 성전에서 패배한 제국이 정교 앞으로 나열되는 것이다.

    “아서, 교황이 바뀌었다네.”

    “페지르의 왕좌가 그리 쉽게 바뀌는 자리였나요.”

    “그래. 마계의 통솔자를 뽑는 일보다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교황 뽑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네, 지금 정교의 무식한 방식을 보면 더욱 그렇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들어왔던 이야기와 다르게 델타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면 신사적인 느낌으로 와 닿지는 않으니까요.”

    “현 교황은 델타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멸망시킬 심산이야.”

    하필이면 델타라니, 이 거대한 제국이 멸망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네스는 파국을 막을 어떠한 수단을 내게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국은 마녀를 찾고 있다.’

    ‘이유야… 제국을 합당하게 멸망시킬 이유가 필요한 것이지.’

    제아무리 거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정교라고 하여도, 사계를 적으로 돌리면 곤란할 수밖에 없으니까. 적당히 제국을 무너뜨릴 이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축적되는 기적의 힘을 사용하는 그들이기에, 믿는 자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 막강한 권력도 기적을 내지 못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마녀의 추적자는 그림자 기둥.’

    ‘이 사태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제국에 위치하여 준비했던 것 같더군.’

    ‘왕실 기사단의 깁슨을 살해한 것도 그들이야.’

    정교는 한참 전부터 델타를 집어삼키기 위해 준비를 해왔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생각해보니 그림자 기둥 산하 조직의 우두머리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칭하며 여관에도 나타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추적자가 바뀌었다네, 아서.’

    ‘정교의 전력, 이그리스 십자회.’

    ‘이제는 그들이 마녀를 쫓게 될 거야.’

    마녀가 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마녀로 추정되는 자가 잡히면 그야말로 제국의 멸망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지하게 타국으로 여관의 이사를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은퇴를 결심했던, 아니 델타의 늑대들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고 여관이나 운영하라고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뭐였는지 아나.’

    ‘우리가 제국의 검이 되어, 제 땅을 지키다 보니 델타는 어느 순간 범 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리고 필요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지.’

    ‘굳이 먼저 타국의 굳건한 벽을 깨부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게야, 단순히 제국의 영토를 넓히거나 상업의 조건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게 2세 때의 이야기라네.’

    ‘그때 알았다네. 제국에 있어서 전쟁은 일종의 사업이라는 것을.’

    아네스는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미세한 마력 유동조차 없는데 묵직한 기류가 흐른다. 100일 전쟁의 아네스라는 이명이 붙은 젊은 시절의 눈빛은 지금 마주하고 있다.

    ‘나는 제국에 남아, 블헤이드 메인가와 함께 국민을 지킬 것이네.’

    그 옆에 있던 아무개 씨에게 ‘괜찮아, 이제 벗어도 돼.’라며 입을 여는 아네스. 아무개 씨는 푹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델타 3세에게는 자녀가 있다네. 아주 애지중지, 곱게도 키웠어. 지혜는 1세를 닮아 아주 총명하며. 느슨한 성격의 3세와는 달리 눈치가 빨라 자객으로 자란 것처럼 아무나 믿지 않아.’

    ‘3세는 이 아이를 보며 기대했고, 늘 희망했다. 배신자가 주위를 둘러싼 왕좌에 앉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통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제국을 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이 델타의 늑대 아네스 또한 레르마을과 같은 진정한 델타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줄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4세의 눈은 날 적부터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본래 보랏빛의 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딱 정교가 물고 늘어지기 좋은 이유가 되고 만 게야, 적당히 구슬릴 이유도 없이. 황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사계에 밝히면 델타를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으니까.’

    서서히 그 얼굴이 드러난다. 보랏빛의 눈동자는 마녀라는 단어와 직설적으로 이어지는 매개체, 젊은 여인이 그 보랏빛의 눈으로 나를 또렷하게 바라봤다. 일말의 희망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제국왕실의 핏줄. 이름은 델타 베를리. 마녀가 아니지만, 마녀로 오해를 살만한 눈을 가진 델타의 다음 통치자이자, 제국의 희망.

    결의에 가득 찬 공주의 눈은 여타 마녀의 보랏빛 시선과 달리 생기가 가득했다. 탁하기는커녕 보랏빛의 눈이 도리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히 와 닿는다.

    “자네에게, 내 두 번째 혁명을 걸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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