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126화 (126/222)
  • 126화

    * * *

    [ 서대륙 델타 / 제국 황실 ]

    거대한 왕좌 뒤, 거대한 원단에는 자수가 되어있었다. 산하 왕국들과 함께 제국을 통솔하는 황실이 국민들에게 하는 말이자, 위대한 제국을 받치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델타 제국의 발전은 무한할 것이며, 이것을 막을 자 없다. 아무리 강대한 세력이 국문을 뚫고 들어오더라도 델타는 건재하다. 역경이 찾아온들, 굳건한 성벽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한 채 고요히 지나갈 것이다.

    신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황실이었다. 곧이어 대제국에 가까운 세력이 될 수 있었던 델타가, 100일 전쟁의 델타가. 정교의 거룩한 손아귀에 으스러지고 있다.

    “이곳을 싹 다 뒤져라!”

    “무, 무엄하다!”

    “신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에게 발언권은 없다.”

    제국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델타의 왕성. 정교의 일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것도 제국 황실에 쳐들어와 델타 3세가 보는 눈앞에서 온갖 욕치레를 떨며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철컥. 철컥.

    묵직해 보이는 판금 갑옷은 신의 갑주라고 알려진 것이자, 인퀴지터(inquisitor)라 불리는 심판자의 신성한 의장(儀狀).

    황실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제외하고 이 심판관으로 추측되는 자들은 약 10명 정도. 이를 지켜보고 있던 델타의 왕실기사단은 신의 철퇴가 제국에 떨어졌다며 지레 겁을 먹고 만다.

    ‘델타 최고의 검들이 겁을 먹었다고, 한심하다 생각하는가.’

    ‘웃기지 마라, 우리가 겁을 먹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늘.’

    ‘이름 없는 아무개는 그들 앞에서 백안을 뜨고 기절할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델타 최강의 검사들이 모인 그들도 대단하나, 말로만 듣던 ‘이그리스 브라더후드, 십자회’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두 눈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왕실 기사단을 제외하고, 끝이 없는 흉흉한 마력에 공포감을 느낀 병사들은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가위와도 같다. 하물며 끝없는 악몽에 짓눌리는 기분이다.

    ‘이그리스 십자회(egris―brotherhood)’

    악마들과 끝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성화의 심판자.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이름 ‘이그리스’의 남은 칼날이 델타의 황실을 베어내려 하고 있다.

    그것은 페지르에 있어서 최고의 전력이자, 신의 철퇴, 혹은 그 이상을 의미하는 무력의 상징.

    정교의 심판자가 악마의 땅을 밟으면 그 땅이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설, 그것이 델타에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교의 철퇴가 제국을 내려친다.’

    계속해서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의 곳곳을 뒤지며 무언가를 미친 듯이 찾고 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엄하다는 소리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모자란 권력을 휘두르기에는 정교의 무력이 너무나도 강대했다.

    ‘그때였더라면,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터.’

    델타 3세는 아네스가 있었던 과거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재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혁명이라는 기적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날카로운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델타의 자긍심을 찾기 위해서 언성을 높이고는 정교를 향해 검을 치우라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곳에서 델타의 권력이 없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다. 죄책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희생이나, 무고한 국민들의 피가 델타의 땅을 적시고 말 것이다.

    “찾았습니다! 꼭대기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정교의 일원이 심판관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황실의 모든 이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초조해했다.

    구름을 뚫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높게 뻗어있는 성, 그 꼭대기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심판관 몇을 제외하고 이들은 그곳으로 향한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광기가 희망을 먹어 치운다.

    이그리스 십자회, 심판관의 수장. ‘카미드헬러 아이올레드’는 성의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문을 확인했다. 하위 심판관들이 온갖 주술을 사용했으나, 그 문이 너무나도 견고하여 열리지 않으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애 장난 같은 가벼운 손동작 한번, 견고하다는 문이 쉽사리 파괴된다. 그것은 기적과도 흡사했다.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마법도, 강력한 공격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아이올레드의 애 장난 같은 가벼운 손동작으로 탄생한 기적.

    아이올레드는 방에 남아도는 마력이 일절 없음을 느꼈다. 황실에서 작정을 하고 이 공간에 흔적을 말끔하게 지웠다고 볼 수 있었다. 이내 대리석 바닥을 손끝으로 닦아 먼지를 확인한다.

    ‘도망간 지, 꽤 되었나 보군.’

    ‘결국 그림자 기둥도 찾지 못했으니….’

    ‘차라리 사지를 잘라놓고 노예로 써야 수지가 맞거늘.’

    ‘도둑고양이 주제에 꽤 높은 곳에 올라왔구나, 마커스.’

    ‘그러나, 물고 있던 생선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눈을 감고서 추적마법을 사용하는 심판관, 정적이 꽤 길게 이어졌기에 하위 심판관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아이올레드가 서서히 눈을 뜨고서 입을 연다.

    “지금부터, 마녀의 추적을 시작한다.”

    다시 왕좌가 있는 거대한 방에 10명의 심판관이 모여서 델타 3세를 마주하고 있다. 델타의 왕실기사단은 왕의 앞에 서서 옥체를 지키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고기 방패에 불가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꽤, 숨기는 것이 많은 더러운 제국이군.”

    “…시끄럽다. 이놈! 이것이 정녕 신의 뜻이더냐!”

    판금 갑옷의 철 소리를 두르며 황실을 둘러 걷는 아이올레드. ‘그래, 마녀가 잡힌다면 정교의 입장을 밝히라는 사계의 공론화도 없어지고 편해지겠지.’

    정교에서 애타게 찾는 델타의 마녀가 모든 수단이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왕실 기사단 사이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온다.

    “어찌 되었건, 네 제국의 파멸은 머지않았다.”

    “정교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

    아이올레드는 검을 뽑아 델타 3세의 목을 겨눴다. 물론 왕실 기사단이 병신도 아니고 그것을 막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이올레드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왕좌에 다가갈 때부터였다. 이를테면 숨을 내뱉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허락받지 못한 느낌에 가깝다.

    “아, 아. 말해주지. 정교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새로운 교황께서, 이 제국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다.”

    “자, 이유가 충분했는가?”

    페지르 정교가 성을 한껏 들쑤시고 돌아가자, 황실에서 침묵이 끝없이 이어진다. 왕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델타 3세. 그 근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왕실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델타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 제아무리 정교의 무력이 강하다고 한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옥체에 목을 겨누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머지않아, 정교에게 제국의 권한을 모조리 빼앗길 것이야.”

    “…폐, 폐하. 더군다나 데크에던과 아크론의 동태도 수상합니다.”

    “…제국이 무너지고 있다네, 미리 짜놓은 것처럼.”

    “폐하….”

    “자르문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네.”

    블헤이드 메인가의 통솔자, 자르문을 의미했다. 그들의 힘이 황실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100일 전쟁의 아네스처럼은 아니지만, 황실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히만을 떠오르게 하는 젊은 검객.’

    델타 3세는 블헤이드 메인의 마지막 인재가 왕실 기사단에 있었다가 돌연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델타에 내로라하는 최강의 검사들을 모아둔 왕실 기사단. 그 일원 중 단 한 명도 블헤이드 메인의 젊은 인재를 이길 수 없었다.

    ‘블헤이드 메인 란베르크.’ 왕실기사단의 보이지 않는 나태함을 추궁하기까지 했던 사내.

    왕실 기사단은 직접 검이 닿았던 ‘란베르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노쇠한 아네스를 제외하고 델타에 남은 유력한 전력이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말에 수긍한다.

    “우리는 정교의 감시를 피할 수 없으니, 국민을 수호할 자들이 따로 필요하다.”

    “예, 폐하. 자르문 경에게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왕권의 힘은 추락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자르문밖에 없다네.”

    황제의 권한은 헤르메딕트 성가대가 찾아올 때부터 진즉 바닥을 쳤다. 그 어떠한 명령도 제국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권한을 갖지 못한다. 전부 정교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괜한 짓을 했다간, 불필요한 희생을 늘리고 말게야.’

    ‘그리고….’

    ‘사랑하는 베를리. 부디 숨어서, 숨어서, 살아남거라.’

    정교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마치 광기를 집어삼킨 이교도의 마력. 과연 신을 모시는 자들이 맞는 것인가.

    ‘저것은 정교가 아니다. 천사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다.’

    ‘델타는 더욱더 위험해지겠어.’

    지금까지 황실 외벽에 붙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아네스의 부하는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서 주변을 훑은 뒤,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 * *

    손님이 없어서 동굴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리는 던전 할머니, 델타의 늑대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있다. 황실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바탕으로 델타에 피바람이 불 것을 예상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아네스, 공주가 무사히 델타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그자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야.”

    공주는 아네스가 믿고 있다는 그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신뢰를 담고 있는 우두머리 늑대의 눈빛을 보아.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델타 베를리.’

    황실의 유일한 핏줄. 델타 3세의 여식으로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마녀라는 존재와 관계가 일절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랏빛의 눈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

    깁슨의 죽음, 그리고 이야기로 들었던 황실의 현 상황.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으나, 드리운 그림자 속에는 슬픔과 공포가 함께 도사리고 있다.

    ‘…아네스, 그자가 저를 받아줄까요?’ 황제의 충신들이 권력 앞에서 아비규환을 벌이고, 배신을 일삼는 것을 보았다. 베를리는 줄곧 그런 것들을 보며 자라왔다.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그 이름, 100일 전쟁의 아네스, 우두머리 늑대. 그녀를 믿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아직 얼굴도 모르는 존재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정교에게 델타 3세의 자녀가 마녀라고 알린 것도 아바마마와 가장 가까운 자였으니까. 두려운 마음에 아네스의 로브를 강하게 쥐어 잡는다.

    “녀석… 걱정은.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전하도록 하자꾸나.”

    “…그자가 저를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어요. 아네스.”

    가뜩이나 좌절감이 느껴지는 베를리가 고개마저 숙이고 있다. 아네스가 미소를 짓자 상냥한 주름이 얼굴에 내려앉았고, 조용히 로브 위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7인의 영웅과 닮았다고 느낀 유일한 사람이란다.”

    “귀찮은 일은 상당히 기피하지만, 결국 도움을 주는 그런 사내.”

    “이 할미의 소중한 보물을 제 것도 아닌데 거리낌 없이 지켜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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