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97화 (97/222)
  • 097화

    * * *

    [ 베로니카, 전생에 대한 회상록 中 ]

    나는 과거에 ‘영웅’이라는 생명을 사랑했다. 인류의 문장으로, 멸망을 희망으로 그리던 특출한 존재. 사실 과거라고 말하기에도 상당히 오래전 일이다.

    사랑했던 것은 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꿈이라도 보는 것처럼.

    밤하늘, 우주, 나는 그곳에서 종일 그를 불렀지만 무정하게도 닿지 않았다. 그와 나는 아직까지 연결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내가 보는 눈앞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내가 자아를 가지고 영겁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 만들어내는 멸망의 시간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절망 앞에서는 희미한 불꽃에 불과했는지, 쉽게 꺼지기에 십상이었다. ■■는 그런 그를 계속해서 다시 피웠다. 턱없이 역부족이다. 심연을 비추기에는 너무나도 옅은 빛이었기에.

    그 이후, 인류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더 깊어졌다. 그들을 사랑했던 나는, 그들을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목소리가 나에게 닿았다. 나는 그곳을 바라보았고, 그곳엔 어느 생명이 있었다. ‘반쪽짜리 영혼’이었다.

    내가 애타게 불렀던 그 생명의 이름은 ‘마르노프 바바비어.’ 주변의 생명은 그것에게 ‘빛으로 이끄는 자’라 불렀고, 다시금 창조되는 세상에서 불렀던 것처럼 똑같이 영웅이라 추앙된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었다. 분명, 나와 이 인간에게는 ‘운명 이상의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그는 매번 나에게 소원을 빌었다. 오늘도 죽지 않고, 내 신념을 다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말이다. 물론 나는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런 힘이 없었기에.

    나는 나의 창조주처럼 ■■가 아니다.

    곧 인류가 부르는 말로 신이 아니니까.

    그의 목소리란 처음으로 내게 닿은 인간의 울림이었고, 나는 그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크기는 무한했다.

    그의 울림에 귀 기울이며, 시간이 흐르던 중 뉘우치고 말았다. 나는 이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인간이라는 생명을 사랑하게 되었구나.

    인류가 ‘반쪽짜리의 달’이라는 부르는 내 존재를, 그는 진심을 다해 사랑해주었던 생명이었다. 전장의 밤하늘이 뜨고. 나에게 마음의 소리를 내어 불러주던 그 생명을. 오랫동안 기다리며,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에게 내 목소리가 닿았다.

    그와 대화할 때, 나는 너무 행복했다. 인류에 대한 많은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 닿고 만지며 생명체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지만 늘 우리는 함께였다.

    그는 인류가 말하는 멸망의 시초, 절망을 토하는 구멍, 가르강티아를 없애기 위해 홀로 모험을 했다. 그를 멀리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아르마니 대지에 피는, 파르파르의 꽃.’

    그가 말하길, 마치 그 향은 나를 떠올리게 한다고. 그래서 향이라는 것도 궁금했다. 더하여 향은 어떠한 사물을 떠오르게 하는 가장 좋은 그림이라 그가 표현했기에.

    세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그가 무력을 행사할 때. 나는 내가 가진 기적으로 그가 상처 입지 않게끔 도왔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아니 그의 밤하늘이 왔으면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게 된 어느 밤에.’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구름에 가려지고 난 뒤. 다시 걷힌 구름에서 서서히 내가 나타날 때. 그때. 빛으로 이끄는 자는 무참히 죽었다. 동료들과 숲으로 향하는 바바비어를 말리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며 목소리만 낼 수 있었기에. 그가 죽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라는 것에 영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있다면,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를 살려내고 싶었다. 살려내는 것이 불가하다면 다시금 태어나 그와 만나고 싶었다. 나는 간절히 빌었다.

    온 우주여, 세상을 흐르게 만드는 모든 모순이여, 애타게 불렀지만, 창조주를 뜻하는 무언가는 무정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중략.

    끝내 내가 가진 모든 기적을 다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 기적을 통해 태어난 나는 비단 45억 1천만 번의 세계를 반복했는데도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살릴 수 없었다.

    나의 우주, ■■의 소리가 울리길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가 있는 평행세계에 출현 할 수 있는 시기는 늘 달랐다.

    그것이 그가 얽매여 있던 근원에, 무정히 걸쳐진 운명의 흐름이었을까. 너무 강대한 나머지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영웅이었기에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의 동료가 되어보려고 했으나, 단 한 번조차 그의 동료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절망으로 인해 목숨이 사라질 때. 똑같이 인간으로서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다시 또 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이 모든 것을 반복하는 것.

    하지만 이다음. 마지막 남은 기회. 내가 무가 되어 사라지면. 다시 또 절망과 구멍을 마주하는 그의 아픔을 내가 달랠 수 있을까.

    ―중략.

    세계가 새로이 구축되면, 그로부터 시간이 뻗어 나갔다. 앞서 말했듯 내 생명력을 사용하면, 그에 의한 절망을 중재해야 할 세상이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그이는 늘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다.

    이 세계가 구축되는 동시에, 절망이라는 것들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나타났다. 마치 보란 듯 이 세계의 주인인 마냥 행사하는 그것들이었다.

    끝이 없을뿐더러. 큰 문제는 절망을 만드는 핵심의 존재. 하늘을 뒤덮은 재앙 ‘구멍의 중심, 가르강티아.’

    세계가 다시금 구축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가르강티아’의 어둠은 다른 구멍들을 아득히 뛰어넘은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헛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45억 1천만, 그리고 1.’

    마지막 남은 권능을 대가로 기적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내가 겪을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이었다. 멸망을 야기하는 절망으로 태어날 줄 몰랐으니까.

    이렇게 마녀로 태어나 스스로 절망을 피워내는 그릇이었다는 것을. 멸하기 직전에서야 기억이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는 비로소 절망적이고 희망적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괜찮다. 이렇게 기억을 떠올렸으니, 이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다행이었다. 나를 처단할 훌륭한 심판자를 보내 달라며. 소원했던 것이 이루어진다. 마주한 심판자를 통해….

    ―.

    ‘절망의 최후는, 종말로 이어진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마지막 비극은 막을 내린다.’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허락받은 것인가, 저 눈앞에 보이는 심판자가 눈가에 깃털을 흘리며 신성하고 장엄한 단죄의 창으로 나를 꿰뚫었다. 카니로베를 꿰뚫었다.

    ‘아, 아. 신이시여.’

    훌륭한 심판자가 맞았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는지, 그가 직접 올 줄이라고는.

    아니, 혹은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까. 눈앞의 심판자는 제가 보았던 인류의 힘과는 아득히 다른 것을 지녔으니.

    ‘아, 아. 아버지시여.’

    그와의 사소했던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닿았던 것이었다. 애처로운 영혼의 마지막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비극으로 시작하여, 그저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았던 나의 최후가. 저들에게 희극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랬다.’

    ‘그대는…….’

    ‘그래서 나를 보며 울었구나.’

    ‘이 시간의 너는 모르는 듯했지만.’

    ‘그 슬픔의 의미는 그것이었구나.’

    그래, 그대는 어떤 이름일까. 진짜 비극을 양단하는 진정한 신의 기적을 품은 자여.

    모든 비극을 끝내어 그대의 희극을 찾기 위한 삶이 시작되었는데, 또 그것에 눈치 없게도 내가 다시 끼어버린 것인가.

    내게도 마지막이 되는 지금의 세계, 남은 세계도 이것이 마지막이라 들었기에, 착각이 아니라면. 네 이름이 궁금하다.

    비로소 비극을 무찌른.

    …네 이름이 궁금하다.

    * * *

    마안의 뭉치가 꺼낸 하델의 마안, 하델의 창이 카니로베를 깊게 찌르고 통과했다.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하는 흉측한 절망의 말로.

    하델의 빛으로도 그 어둠을 단번에 씻어내지 못하는지, 발레포르와 달리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둡게 깔렸던 구멍의 벽이 서서히 부서져 갔다. 붉은색의 동공을 가진 수많은 눈동자는 눈을 감기 시작했다.

    서리가 주변에 나타나더니 정신을 차린 플로우들. 품 안에서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다시 녀석들을 품었더니 잃었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 무엇보다도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던 카니로베를 아니, 베로니카를 눈앞에 두고도 손 하나 꿈쩍할 수 없었지만,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절망을 멸하는 것에 가차 없었음을.

    ‘어째서, 내가 눈물을 흘렸을까.’

    머리가 아파졌다. 관자놀이를 누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그녀와 만난 인연에서부터 조금 미묘한 감정을 느끼긴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시초가 되었던 것일지도.

    『부탁을… 해도 괜찮을까요.』

    다시금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멀리서 바라보던 렌도 흠칫하더니 기어이 전투준비를 위해 무릎을 누르며 일어났다.

    이번이 확실하다. 아니 이전부터 확실했다. 베로니카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계속해서 흩날리는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그녀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정신의 조각인 듯했다.

    “네,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밤과 낮 중…. 어떤 하늘을 좋아하나요.』

    “굳이 고르라면… 밤하늘인데.”

    “그러니, 나도 여관을 운영하고 있겠죠.”

    『아쉬워요. 당신의 새로운 삶을 지켜볼 수 없어서.』

    “꼭, 내 동료가 했던 말과 비슷한데.”

    『용사의 쉼터도 결국, 가보지 못했어.』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에 떨어진다. 아니, 나는 슬프지 않았다. 이 눈물의 주인은 누구의 것인가. 지금의 나는 완전하게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이 눈물의 정체를….”

    『당신의 이름이요.』

    “뭐, ‘아서’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아니. 저는 ‘당신의 이름’이 궁금해요.』

    “표정을 보아하니, 확실히 뭔갈 아는 듯하네요.”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이름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무가 될 운명을 벗어날 순 없겠지만, 당신의 이름만 있다면.』

    『그곳도 외롭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니까.』

    상체의 전반을 걸쳐, 사방으로 재가 흩날리는 그녀였다. 입을 열지 않는 나를 향해서 애타게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더욱더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결국 기대는 저버리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녀가 피식 웃는다.

    계속해서 사라져갔다.

    “36개의 날개와 무수한 눈을 가진 자.”

    “신의 무력을 대행하는 폭력의 상징.”

    “위대한 ■■의 대리인, 불세출의 구원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음절은 들리지 않았고 내 눈은 그녀의 입 모양을 따라 읽어간다.

    다음을 이야기해 봐. 궁금하니까. 라며.

    “노르트 아템(Nort Atem)”

    “이어서, 이름의 뜻은 이렇다.”

    ―Before my body is holy.

    “이 비극 속에, 신의 기계적 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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