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88화 (88/222)
  • 088화

    * * *

    태풍의 탑에서 나오기 직전. 렌과 나의 뒤를 따라 뛰어오던 남자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또 돌이나 던지겠지, 하며 고개를 흔들고 있자 ‘아저씨.’라고 부르던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태풍의 탑에서 잠시 짝꿍의 역할을 해주었던 학생이었다. 자기 품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검은 반점이 가득한 새끼 정령 하나를 보여주며, ‘아저씨, 마녀를 물리쳐 주세요.’라고 했다.

    녀석은 이 모양새의 나를 본 것은 분명 처음일 텐데. 내가 그때 만난 아저씨… 아니 아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렌은 ‘아까 교장실에 있을 때부터 밖에서 기웃거리던 소년이 한 명 있었어요.’라는 말을 꺼냈다.

    ‘다 듣고 있었나 보군, 파르파르의 꽃을 먹었다는 것도.’

    피식 웃으며 ‘아저씨 아니라니까.’와 같이 태클을 걸었으나, 그때처럼 똑같은 반응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그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빨을 긁으며 속에서 차오르는 여러 감정이 미간을 찌푸리게 했고, 녀석에게는 ‘알겠으니까, 아저씨만 믿어.’라는 말을 무심코 던지고 말았다.

    “마스터.”

    “응.”

    “출격입니까?”

    “그래야지.”

    출격. 용사의 쉼터 일동은 플로우들을 살려내기 위해 최후의 수단 ‘카니로베’ 아니 ‘베로니카’ 토벌을 준비해야만 했다.

    다만 문제는 렌이나 아이리스나, 혹은 란베르크. 아무리 대륙에 알려진 강자라고 한들 대절망 앞에서는 세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다. 분명 베로니카가 부릴 수 있는 검은 정령의 양은 터무니없이 많을 것이다.

    ‘마안의 뭉치도 사용할 수 없는데.’

    물론 세가 어쨌든. 마안의 뭉치를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사실 없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기도 했다.

    베로니카를 상대해야 하는 시간과 기적의 유지 시간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리고 보상 대가를 필요로 하는 지금의 마안의 뭉치는 어쩌면 눈 하나쯤은 우습게 잃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자가 수복되지 않을 확률이 높아.’

    해당 장기를 수복하거나 재창조하는 기적 또한 이미 절망을 토하는 구멍에서 완전히 사용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지금 사용하는 마안의 뭉치란 은퇴 전에 비하면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게다가 마검의 뭉치도 없다.

    ‘녀석을… 깨울 수 있을까.’

    아니, 깨울 수 없다. 녀석은 그것을 선택했으니 내가 편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이유로 녀석의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다시 깨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그 뜻은 어쩌면 여관을 운영하는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시간에 영혼을 맡기는 거였는데.

    “그래도 네가 여관 하라고 했잖아. 망할.”

    “마스터?”

    “아…. 아니야.”

    여관. 녀석의 추천이었다. 자기는 깊은 꿈을 꿀 테니, 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너는 이곳에 삶을 만끽하라며.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영겁의 시간을 구멍에서 보냈으니 남은 시간 동안에는 평온한 삶을 살라며.

    전혀 평온하지 못하잖아…. 혼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걱정하듯이 바라보는 렌에게 ‘아니야, 그냥 사색이 조금 잠겼어.’라는 대답을 보내며 여관에 돌아가기로 한다.

    * * *

    여관에 분위기는 근 3년 가까이 운영을 해온 분위기 중에서 가장 어두웠다고 할 수 있었다. 괜스레 웨라의 음악 소리도 오늘따라 침울하게 들렸다.

    브라운 아저씨가 ‘웨라, 일부로 그런 노래를 켜는 것은 아니겠지?’라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크흠, 내가 눈치가 없어서…. 미안하네.”

    물론 모두가 브라운 아저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령계에서 넘어온 멀쩡한 손님들도 조금씩 검은 반점이 목을 타고 오르는 것이 미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계에 있는 손님들에게 있어 대하기 껄끄러운 소재.

    정령들은 웃으며 괜찮다고 하지만, 용사의 쉼터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전원 단골인 데다가 단골일 수밖에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바바리안이 득실거리는 던전 할머니와는 다른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곧 가족이다.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여관을 운영해왔고, 내 운영방침이 아니지만, 어느새 우리들은 함께 용사의 쉼터를 운영해가고 있었다.

    검은 반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령이 아닌 손님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이를테면 ‘죽음’이라는 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잘 살아있던 식구가 어느 날 시한부가 되었다. 그 죽음을 보며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식구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이런 암울한 분위기는 좋지 않다는 식으로 띄우려고 하더라도.

    딸랑거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여관의 문이 열리자 로아가 나타나 나에게 다가왔다. 황금 광산 사건 이후로 로브를 착용하지 않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서, 정령왕님이 오셨습니다.”

    “응, 왜 들어오지 않고?”

    “네, 근데….”

    조심히 나를 끌어당기며 여관 밖으로 데려가는 로아,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갔다.

    엑스칼리버 앞에는 로브를 쓰고 있는 사내가 한 명 있었는데, 밤 중 내려오는 달빛으로 녀석의 녹색 머리칼이 옅게 보이자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뭐죠. 왜 들어오지 않고.”

    “아서.”

    “사람이, 당신이라도 안부를 전해야 손님들이….”

    정령왕이 로브의 후드를 걷어내자, 나는 입을 벌리고 녀석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령왕의 ‘죽음’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정령왕의 목까지 올라온 검은 반점은 분명 죽음을 의미했다. 베로니카를 없애지 못한다면, 대절망을 없애지 못한다면 플로우들을 떠나 정령계 자체가 무너진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여관에 들어오지 않았군요.”

    “들어가면, 사람들이 놀랄 테니까.”

    정령왕은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최소 델타를 포함한 전 대륙에 있는 제국의 왕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다른 왕.

    여관 손님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겁에 질릴 뿐만 아니라 더욱더 암울해지는 상황을 만들기 싫었던 것이었다.

    “플로우가 오스칼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건 무슨 말인가….”

    로아는 오스칼과 함께 주류 창고에서 플로우들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플로우들은 계속해서 계약자인 오스칼을 앞에 두고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대했다는 것이었다.

    전부 빌어먹을 베로니카의 횡포였다. 내가 태풍의 탑에서 마녀를 만났을 때. 그때 모든 수작을 부려놓았던 모양이다.

    망할 기적 따위는 은퇴 이후에 사용하지 않겠다며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이 사단까지 만들어 버린 나를 자책하며 엄한 관자놀이만 누를 뿐이었다.

    “최대한 현세에 피해가 없도록 하겠느니라.”

    아와는 내 손목을 잡으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물며 내 손목을 잡은 아와의 검은 반점이 올라온 팔을 보면 더욱 그랬다.

    “당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들의 영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아와의 말이 끝나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나를 보고는 로아가 대변했다. 정령왕과 아와 님은 영이 사라질지언정 검은 정령으로 다시는 변모하지 않는다.

    아와의 경우에도 심연을 완전히 씻어 내렸기 때문에 다시금 황금 광산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아시잖아요. 이미 저는 제안(1)을 받아들였다는 걸.”

    마당에 손님도 없다. 고요한 바람 소리와 푸르게 덮인 마당 위에 반딧불이만이 공간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 울리는 어느 여성의 목소리는 어쩌면 정령왕과 아와가 꼭 듣고 싶었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자네는 정체가 뭔가.”

    아와와 정령왕은 여전히 나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으로 변한 상태에서 그들을 만났으니 마안의 뭉치와 같은 기적의 기운은 전혀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연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여관을 운영하는….”

    “델타의 평범한 자영업자입니다.”

    베로니카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정령계의 90% 손실이 일어난다. 사실 90%거나 100%거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안에 단 0.1% 정도도 되지 않을 플로우가 내게는 100% 이상이었으니까.

    .

    .

    .

    정령왕과 아와가 여관마당에서 떠나고, 나는 긴 시간 동안 사색에 빠져있었다. 유난히 사색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아니면 변해버린 몸의 조건 때문에 그런 것인지, 마음이 축축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스터….”

    “렌이구나.”

    렌이 어느새 나타나 잔디에 앉아 있는 내게 목을 축일만 한 따뜻한 홍차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레드드래곤’으로 녀석이 근래에 만든 홍차의 이름이었다.

    마스터만 마실 수 있는 특권의 홍차라기에, 제국 하나를 초토화할 법한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유가 실로 명확하다.

    “미안해.”

    “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갑자기요?”

    “그때, 네 말을 믿었더라면 말이야.”

    “아, 고대어 번역이요?”

    “응.”

    ‘마스터, 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랜 기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고대어에 능통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마스터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아하하.’라며 렌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는 너를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하, 그럼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마커스가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다고 해도, 믿어줄게.”

    “어머, 그 정도면 엄청나게 신뢰받는 존재라는 거네요.”

    “이상하고 짜증 나는 짓만 안 한다면 말이야.”

    따뜻한 홍차의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분명 방금까지 신경이 곤두서있던 터라 머리가 지끈거려 편두통처럼 눈을 찌푸리기에 십상이었는데, 향이 좋다.

    딸기…. 아니 무슨 향이지? 달콤하면서도 너무 짙지 않았다. 은은하게, 그저 은은하게 달콤한 느낌의 향이었다.

    “그거 ‘발프레’라는 찻잎을 발효시켰어요.”

    “발프레?”

    “네, 고룡의 언덕에서만 난다는 차나무의 잎이에요.”

    “향이 좋네. 지금까지 맡았던 것 중에 제일.”

    “용의 마지막 이름은 개체에 가장 어울리는 사물에서 가져오죠.”

    ‘발프레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좋은 기분을 들게 해주는 찻잎이에요. 특별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어서 인간들은 구하지 못하죠.’라고.

    내가 들고 있던 찻잔에 코를 가져다 대 냄새를 맡는 렌. 이어서 ‘아, 그리워라.’ 고요한 탄성을 내었다.

    “발프레라는 차나무의 이름을 가진 붉은 용.”

    “화가 가득한 저를 진정시키는데 특효였죠. 하하.”

    “제 어미의 이름이 ‘발프레’였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