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랭크의 여관주인-83화 (83/222)
  • 083화

    * * *

    『 용사의 쉼터 : 여관 이용 ‘추가 사항’ 』

    ※ 제 ‘21회 서대륙 최고의 요리사’ 자격의 여관.

    ※ ‘드래곤 길드’의 제휴 여관.

    ◈ 정령계의 손님들은 ‘로아’의 안내를 받도록 합시다. ※엑스칼리버 워프 안내원 로아의 절차에 따라 이동해 주십시오.

    ◈ 정령계의 손님들은 피어나는 르파르파의 꽃을 주의해주세요. ※사장이 현재 파르파르의 꽃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르파르파의 꽃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 *

    여관 홀의 분위기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주황’이나 ‘갈색’에 가까운데, 레니의 주사가 발동되기 시작하면 ‘초록’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령왕의 ‘우리를 손님으로 받아라.’는 제안을 통해 며칠 전부터 정령계에서 수많은 정령이 넘어오고. 오지랖이 넓은 단골들과 친화력이 좋은 정령 손님들은 이미 죽마고우가 된 지 오래였다.

    아와는 정령계의 생태계를 보살피는 중이라 여관에서 자주 목격되진 않았다. 대신하여 로아가 엑스칼리버를 직접적으로 관리해 정령들이 용사의 쉼터로 편히 오게끔 안내했다.

    ‘정령들이 케피탄 맥주를 좋아할 줄은.’

    아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우리 가게의 플로우는 하급 정령이기 때문에 대화가 쉽지 않았는데. 반면 중급 정령들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이 포인트였다.

    이런 중급 정령들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연령대(?)의 정령들은 케피탄 맥주를 브라운 아저씨처럼 거의 사랑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폐를 사용하긴 하는가?’라는 의문점을 풀 때쯤 정령들은 생각보다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당한 자본주의가다. 나도 몰랐는데 마계에 있는 어느 여관의 주인은 정령이라더라.

    근래에 들어 정령이 현세로 넘어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미 정령계 항간에서 내가 운영하는 여관이 유명했다고 한다.

    ‘용사의 쉼터에는 망자들이 일한대.’라는 소문부터 시작해서 ‘여관 주인이 얼음 정령을 노예로 쓰고 있대.’라는 소문까지. 심지어 ‘드래곤도 협박에 못 이겨서 서빙이나 하고 있던데.’

    다행히 오해는 금방 풀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변태라서 파르파르의 꽃을 먹었대.’

    나는 소문이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험가들은 대게 수다쟁이라고 했는데, 그 모험가들과 계약하여 세계를 넘나드는 정령도 예외는 아니라고.

    “어때, 좋지 않은가.”

    “나쁘지 않네요. 저도 좋고, 정령들도 좋고.”

    “거기다가, 르파르파의 꽃에 기운도 심어주니까.”

    “그게 참 고맙던데, 빨리 자라겠죠?”

    “아암, 오늘만 해도 정령들의 출입이 30명이 넘었어.”

    그렇다. 근래에 들어 내가 가장 만족하고 있는 부분인데, 아와가 엑스칼리버 뿌리에 르파르파의 꽃을 심었고, 매일 엑스칼리버를 통해 나타나는 정령들이 르파르파의 꽃이 빨리 자라도록 정령의 기운을 부여해준다.

    정령왕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용사의 쉼터에 찾아오는 정령들이 하루에 30명은 족히 넘는다. 하급 정령이 아니라 대게 중급 정령이라 부여해주는 기운의 크기도 작은 편이 아니었고.

    “근데 정령왕께서는 카니로베를 잡으러 가지 않으시고.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자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 것이야. 정령계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령계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현세에 있는 여관에 앉아 계십니까?”

    “크흠. 이곳은 엑스칼리버 덕에 내가 올 수 있는 것이야.”

    카니로베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질 법하더니, 렌에게 케피탄 맥주를 받아 홀짝이는 지고의 존재 정령왕이었다.

    정령들이 여관에 손님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외부 테라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늘었는데 그 이유는 하급 정령을 함께 데리고 오는 상급 정령에 의해서였다.

    여관 건물 자체의 사양도 좋지만, 무엇보다 마당에 깔린 마력초 때문에 정령들은 내부보다 외부를 선호했고, 따라오는 하급 정령들은 마당 위에서 놀거나 허공을 떠돌아다니니, 평소에 찾아오던 손님들은 최고의 눈요기라 생각한 듯하다.

    퍼플의 경우에는 마차 운영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홀에 들어와 있거나 여관 전체를 가볍게 돌아다니는 정도로 시간을 해결하는데, 테라스에 정령들이 늘어나자 좀처럼 퍼플이 홀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벌써 두 번째 말씀하시는데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말해도 부족하니까.”

    정령왕은 케피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캬’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계의 신격이 퇴근 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맥주 한 잔 때리는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

    “자네, 일단은 여자는 아니고.”

    “당, 당연한 소리를 지금!”

    “그런데 자네의 눈은 참으로 신묘하군.”

    미간을 찌푸리며 내 눈을 응시하는 정령왕이었다. 그가 말하는 신묘하다는 의미란 내가 좀처럼 보기 힘든 흑안을 가진 인간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안의 뭉치’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읽을 수가 없어.”

    “난 대상의 눈을 보면 심연을 읽을 수가 있다네.”

    “자네의 심연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너무 깊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지.”

    “읽을 수가 없다는 말이네.”

    “그 말은, 자네가 나보다 상위의 존재일….”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제안(1)을 받아들여달라는 소리를 돌려서 한 거라면 소용없어요.’라고 말을 끊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래, 카니로베는 내 선에서 정리해보지.’라는 정령왕의 대답이 돌아왔다.

    카니로베에 대한 것은 인계를 포함해 전계에 알려지면, 보통 어수선해질 내용이 아녔다. 대절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유적에 봉인되어 있지 않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것은 절망을 토하는 구멍이라는 비극을 겪은 인류에게 아주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선다는 것은 더욱 수지에 맞지 않는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나는 빌어먹을 아칸이 멸망하든 말든, 여관 일이 더욱 중요하니까.

    물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문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대륙에 활보하는 수많은 고랭크의 모험가 및 영웅들을 놔두고 내가 나서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고랭크의 모험가들은 자연스럽게 고위직책에 오르거나 혹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자리에 앉기 십상이라 꼴의 몸값이랍시고 나서지 않는 모양인데, 여차해서 세상이 위험해지면 그들이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카니로베.’

    절망을 토하는 구멍 속에서 수많은 절망과 조우하며 영겁의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절망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 죽이고 죽이는 관계였을 뿐이니까.

    얼추 기억이 나는 것은 72개의 이름. 네임드도 아닌 카니로베 따위는 정령왕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강자들이 발 벗고 나선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 *

    [ 서대륙 델타 / 던전 할머니 여관 ]

    “이거, 자네의 관자놀이가 남아돌지 않겠어.”

    “근래에 횟수가 늘긴 했어요. 아네스.”

    밤이 찾아오기 전에도 여관의 문을 열어두는 던전 할머니 여관에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이점이었다. 나같이 여관을 운영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오랜만에 아네스에게 안부를 전할 겸 여관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풀 플레이트 갑옷을 착용한 아네스의 모습은 매번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언제 어디서나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프리실라의 습관은 델타의 늑대들에 속해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아네스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어쨌거나.

    여자로 변한 내가 잘못이었다. 나는 꽤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네스를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인정하면 안 되는데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아네스는 여자의 모습을 하는 나를 알아볼 리 없었고, 수많은 질문을 맞춤으로 그녀에게 내가 아서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게 된다.

    “녀석이 여관에 찾아오는 일이 많이 줄었어.”

    “이런, 섭섭한가 보네요. 아네스.”

    “섭섭하긴, 골칫덩어리. 안 봐서 좋지.”

    아네스는 섭섭하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으나, 있는 그대로 번역하자면 ‘섭섭하다.’나 다름이 없다. 그녀의 표정만 보아도 그러했다. 마치 본가에 찾아오지 않는 자식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까. 그런 것 같네요.”

    “그래, 자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나에게요? 왜요?”

    “녀석의 응석을 받아줬으니.”

    “계약, 관계나 다름없습니다만.”

    “자네는 생각보다 ‘계약’을 중시하는군.”

    “꼭 그런 것만은….”

    “계약만 하면 무엇이든 해결해 줄 것처럼.”

    ‘계약만 하면 무엇이든 해결해 줄 것처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령왕보다 아네스가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 원래대로 돌아오나?”

    “조만간입니다.”

    “아쉽군그래.”

    “아쉽다니요!”

    “거, 저기 바바리안들이 자네에게 관심을 두는 모양이야.”

    “와, 그런 관심 절대 필요 없는데요!”

    “바바리안들이 관심을 두는 정도면 상당한 미인이라….”

    “아, 좀! 아네스!”

    “하하, 미안하네. 아서. 장난일세.”

    아네스는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더니, 이내 폭소로 인한 눈물을 닦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와중에도 바바리안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좀.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뭔가.”

    “제가 무엇을 부탁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나요?”

    “암, 여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이 그런 표정이던데.”

    천리안을 가진 것처럼 사람 속을 훤하게 들여다보는 아네스에게 술술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믿을 만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정령왕의 제안(1)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저 현세에 정보를 모아 정령왕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났겠다 싶어 고안한 것인데, 사실상 녀석의 허탈한 웃음과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에 신경이 쓰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에 관련된 정보가 들어온다면 자네에게 알려달라는 말인가?”

    “네, 최대한 많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보가 필요한 지인이 있어서요.”

    “알겠네. 자네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서대륙에서 제일가는 정보원은 아네스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이단의 동생인 아이덴도 검찰 기사의 임무 수행을 위해 아네스를 가까운 지인으로 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보력이었다.

    “그리고 꼭 비밀유지를 해주셔야 합니다.”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말게.”

    비밀유지라는 항목을 따로 부탁한 이유는 정령왕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령계로부터 부활한 대절망 카니로베를 수습하러 온 정령왕이 현세에 나타났다고 알려지게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부분이다. 관자놀이가 남아돌지 않을 정도로 골치 아픈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미리 조심해서 나쁜 것 없으니 비밀유지를 철저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칫 전 제국 통합정부까지 움직이게 된다면 더욱더 큰일이다.

    여관 손님들도 대부분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왕과의 중요한 대화는 암암리에 이루어졌으니까.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여관 식구들이었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도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말해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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