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 * *
“마스터가 살았던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었대.”
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 중개를 지켜보고 있던 던전 할머니의 아네스도, 의류 장인 브레드도, 그리고 머나먼 남대륙의 모멧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녀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진다. 녹색의 빛으로 쭉 이어지는 드넓은 초원도 붉은 머리의 여성으로 인하여 풀 끝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이 상황을 필스 진영에서 알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당연한 승리를 예측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연적인 상황 따위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했다.
필스 진영에는 중개를 위한 장치가 없었다. 그저 편안히 숨 쉬는 운동이나 하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승리를 취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중개를 위한 장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필요도 없다.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 그거 고칠 수 있거든.”
그녀가 뱉는 숨소리, 그녀가 뱉는 음성, 이 모든 것에서 두껍고 짙은 마력이 느껴진다. 두 명의 S랭크들은 지금껏 조우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마력에 공포감을 지레 느끼기 시작한다.
“근데 존X 맞아야 그게 고쳐져. 준비됐어?”
렌이 일방적인 통보형 대화를 끝마치자마자 S랭크의 두 인물은 별안간 공격에 들어갔다. 중력을 다루는 마법사는 지반이 가라앉을 정도의 중력을 깔아버렸고, 이에 피해를 받지 않는 사내는 양 검을 쥐더니 상당한 속력을 담아 공격을 시도했다.
“말, 말도 안 돼.”
뒤에서 보조자 역할을 하고 있던 S랭크의 여성은 시야에 잡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연히 보았음에도 믿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S랭크의 여성이 저 붉은 머리의 광인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마법은 ‘대 공성용 요새 전멸기’였다. 크기가 크지 않은 성이라면 단번에 초토화할 수 있는 초월 마법에 가까운 것.
그러나 저 붉은 머리의 여자는 웃고 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S랭크 사내의 격을 손쉽게 회피하고 있다. 마치 내가 사용한 마법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콰직!
S랭크의 사내가 들고 있는 두 개의 검은, 전 대륙을 통틀어 단 30개 밖에 없다는 레어 등급의 장검. 어떠한 마법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최강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무기였다.
사내의 계속되는 공격, 이에 붉은 머리의 여인은 눈에 거슬리는 모기를 대하는 듯했다. 검과 가까운 거리에서 애 장난 같은 합장 한 번으로 그 견고한 칼날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기적을 일으킨다.
“너희들 혹시 뭔가 했구나. 미안 전혀 몰랐어.”
자신의 반경으로 100m가량 지반이 눌러진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그녀였다. 그리고 박수 한 번으로 부러져버린 검을 보며 ‘이거 좀 비싼 거 같은데, 미안하네.’라는 말과 함께 모래 같은 쇳가루를 손에 한 줌 쥐고 일어난다.
“어쨌거나, 이걸로 네 화장을 대신하지.”
그녀의 손아귀에 자리했던 한 줌의 쇳가루는 별안간 불꽃에 타올라 완전히 산화한다. 이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놀라 뒤로 물러나는 사내였다.
“일단 마스터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니까.”
“조금 아파도 이해해 줘.”
S랭크의 사내는 전신에 흐르고 있는 마력을 이용해, 초고도의 집중을 발휘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변 환경의 마력 유동을 완전히 비틀어버린다.
이 사내가 스스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은 ‘마력 검’이라 일컫는 소드마스터의 결정체. 손아귀에서 푸른빛이 눈부시게 발산되어 거대한 검을 만들었다.
‘우리를 무시하기는 이르다.’
‘내 전력을 보여주겠어.’
말 그대로 에너지소드를 연상시킨다. 에너지 파장으로 인한 전격 음이 초원 사방에 울린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검을 쥐고 있으니, 사내는 돌연 승리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콰지직!
그리고 그 화답으로 자신의 다리가 부러진 사내였다. 분명 마력 검을 생성하는 단계까지는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자신의 괴성과 함께 바닥에 무너졌다.
으스러진 다리로 인해 얼굴이 바닥에 닿자, 자신의 동료에게 천천히 걸어가는 저 붉은 머리의 걸음이 눈에 담긴다. 이제야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맹신하는 사내였다.
“이 몸을 1초라도 멈추고 싶다면.”
“S랭크는 터무니없고, 아주 최소한…. 흠.”
“드래곤 정도는 데려오도록 해.”
렌은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아이리스와 대적했던 경우와는 단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담고 있다.
마스터 명령에 따라 가차 없이 저들을 무너뜨리고 있었으나, 프리실라를 포함한 드래곤 길드의 일원들은 렌에게도 소중한 인연이었기 때문에 더욱 격양된 감정을 실을 수밖에 없다.
“다음은 너.”
“잠, 잠시만!”
렌이 다가가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 S랭크의 여성이었다. 이미 공기 중에 돌고 있는 대부분의 마력은 저 붉은 머리의 것으로 판단한 마법사.
환경요소를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정도의 마력을 발산하는, 저 붉은 머리의 정체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사 머리에는 생존을 위한 궁리만 펼쳐질 정도로 저것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토악질이 났다. 매스껍다. 몸서리치는 살기다.
“아, 또 그러기야?”
“그, 그러기라니.”
“정말, 너희 같은 애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그, 그냥 보내주면 좋겠어.”
“왜?”
“그, 그게….”
렌은 좋은 생각이 났다며, 계속해서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마법사는 중력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저력을 다하고 있었다. 다만 무의미한 행위에 불과했다.
“네가 원한다면 보내줄게.”
S랭크 마법사의 두개골을 손아귀로 잡아들어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축 늘어지는 사지였다. 마법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쥐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손을 주먹으로 마구 때려본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눈물을 쥐어짜며, 발악해보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우치고는 자신의 마력을 최대로 출력해서 중력 마법을 사용한다.
―쿠구구궁!
―콰앙!
지반이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앉는다. 그로 인해 흙먼지가 사방에 튀기 시작했다. 엄청난 중력 파장이 머나먼 곳까지 퍼지자, 장외에 있는 여관 손님들의 귀마저도 먹게 만들었다.
“애쓴다. 애써.”
눈물범벅의 S등급 마법사를 보며 ‘자기가 했던 행동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네.’라며 눈살을 찌푸린다.
중력 마법에 의해 계속해서 깎여나가는 지반, 주변이 붕괴한다. 초원 따위의 풍경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는 초월적인 존재 앞, 마법사는 공포감을 느끼며 끝내 실례를 범했다.
“어머, 얘 바둑알 풀린 거 봐.”
“어때, 직접 들으니까 기분 묘하지?”
‘우리 마스터가 너 같은 애들 전부 쳐들어오게 하래. 그러니까 사과하러 오라는 말이야.’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마법사의 머리를 쥔 채로 투포환 던지는 자세를 취한다.
‘아, 추신이 있어. 보내지 않으면 하거먼가를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추신을 남기자 마법사는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꽉 잡힌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빠져나오기 위함이었겠지만, 렌은 그녀의 나약함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서 꼭 전해줘.”
저 멀리에 있는 필스 진영의 건물을 향해 S랭크 마법사를 엄청난 속도로 던져버렸다. ‘적당히 중력을 다룰 줄 아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 살아남겠지.’라며 손날을 이마 위에 올리고는 엄청난 속력으로 건물에 쇄도하는 마법사를 지켜본다.
“으으….”
“프, 프리실라!”
“자네… 렌인가.”
프리실라가 바닥에 누워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키며 각혈을 토하는 그녀는 분명 중상을 입었음에도 주변에 부하들이 우선이었다. 상태를 확인했다.
드래곤 길드의 일원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렌은 이들을 향해 극도로 단련된 육체가 아니었으면 자칫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프리실라를 포함한 길드원들에게 마력이 내포된 마력을 흡수시켜 자가치료의 효율을 최대로 높여주는 렌.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는 이들은 ‘이렇게 어이없게 당하는 일은 처음인데.’라고는 애꿎은 땅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저 녀석들… 모의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
“제가 혼쭐을 내줬어요. 프리실라.”
“면목이 없다. 부단장이 이렇게 약해서야….”
“아니에요. 프리실라의 전투는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하하, 전투를 사랑하는 렌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여태 들어본 칭찬 중 최고라 단언할 수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어구와 장비를 점검하는 프리실라였다.
“모의라는 단어에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 점.”
드래곤 길드는 가라앉은 대지 위에서 일어나 필스 진영의 건물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이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는, 이로써 더욱 강해질 것이다.”
원대한 목표를 정한다. 지금까지 단순히 고향마을을 먹여 살리기 위한 맹목적인 헌신이 이들을 강하게 만들었다면, 이 시점 이례로 각자의 긍지와 누구보다 강해지겠다는 의지를 품고서. 조합의 이름을 전 대륙에 떨치겠다고.
* * *
[ 필스 길드 / 필스 진영 (9명) ]
―콰앙!
돌로 된 건물 외벽을 박살 내고, 9명의 인원 앞에 떨어진 S랭크의 마법사. 중력 마법으로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한 듯했으나 발목이 꺾여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필스는 공포감에 빠져있는 S랭크의 마법사를 보며 뒷걸음칠 쳤다. 이빨이 엄청난 속도로 부딪치며 절망감을 호소하는 그녀를 보자, 필스도 돌연 공포감에 휩쓸렸다.
“괴, 괴, 괴물. 괴물이야. 그건 괴물이야.”
나머지 7명의 S랭크들은 마법사를 부축하며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보라고 했지만, 몸을 미친 듯이 떨며 공포에만 젖어있는 그녀였다. 명확한 대답이 나올 거라곤 기대할 수 없다.
따라간 나머지 한 명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도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심각한 소리를 늘어놓을 뿐, 몸을 움츠리고 자꾸만 구석을 향해 자신의 시야를 숨겼다.
“뭐, 뭐, 뭐야! 도대체!”
필스는 어마한 자금을 들여 고용한 9명의 S랭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에 이들의 대표로 추측되는 자가 고개를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마법사가 조금씩 구석에서 벗어나 필스에게 다가왔다.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연다.
“일, 일곱 명… 전부 여관에 보, 보내야 해.”
“아, 아니면 너희 가문… 소, 소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완전히 혼절해버린 S랭크의 마법사. 귀가 있었다면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었던 문장에 어이가 없음을 표하는 7명이었다.
이 진영에 얼마나 있을 줄도 모르는 S랭크를 몽땅 자신의 진영에 보내라? 그 말은 필스를 떠나 금강석의 별을 걸고 있는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출, 출발해!”
“시끄러워. 알겠으니까.”
“크흠, 흠.”
“그리고 아직 네가 그런 태도로 나오기는 이르다.”
갑작스러운 살기를 방출하는 S랭크 일원들의 리더, 필스는 그 살기로 인하여 다시금 주눅이 들고 말았다.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숙였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