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에필로그
남부의 여름은 현서가 우려했던 것만큼 덥진 않았지만, 바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습도가 높았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현서는 건조한 더위는 잘 참아도 습도가 높은 더위는 유독 참기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방과 밖의 온도 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린다는 콜린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냉기 수정을 24시간 가동해 건조하고 선선한 방을 유지했다. 지금도 딱 살짝 추울 듯 말 듯 한 온도까지 내려 둔 상태에서 솜이불을 덮고 숙면 중이었다.
포근한 솜이불에 폭 파묻혀 토끼 귀 끝만 내민 채 새근새근 꿀 같은 잠을 즐기던 현서는, 누군가 제 몸을 안아 드는 것을 느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현서야. 일어나 봐.”
“으응…….”
다정한 형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귀는 쫑긋거렸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준비에 치여 피곤한 탓인지 눈을 뜰 수 없었다. 현서는 제 몸을 감싸 안는 형의 품에 편하게 안겨 눈을 감은 채 웅얼웅얼 뭉개지는 발음으로 물었다.
“형아…….”
“응. 현서야. 눈 못 뜨겠어?”
“으응… 너무 졸려…….”
“응. 괜찮아. 도착하면 형이 깨워 줄게.”
“응… 우리 어디 가……?”
설마 또 결혼식 관련 일인가 싶어 부스스 눈 뜬 현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공간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어?”
바로 직전까지 누워 있던 제 침실이 아니었다. 땅도 하늘도 없는 순백의 공간은 현서가 이전에도 방문했던 꿈이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흰 양말이 아닌, 형과 함께라는 것 정도였는데, 현서는 저를 안고 있는 형을 흘긋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아……? 머리 잘랐어? 어, 아닌데?”
긴 머리가 아닌, 짧은 머리의 현우가 현서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지었다. 현서는 형의 앳된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곧 지금 저 모습이 지구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라는 걸 알고 손을 뻗다 멈칫했다.
“어?”
자신의 손이 너무 작았다. 목소리도 이비에게 받은 목소리가 아닌 김현서의 목소리였고, 굉장히 어렸다. 무의식중에 머리카락을 만져 보니,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아닌 얇은 생머리였다.
몸이 어려진 것을 확인한 현서는 꿈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형의 목을 끌어안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형아, 이거 꿈이지?”
“응. 형이 만든 꿈이야.”
현서는 그렇구나. 내 꿈을 형이 만들어 줬구나. 정도로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졸리고 피곤한 데다 정신이 멍했다. 원래 신들이 만들어 준 공간에서 꾸는 꿈이라면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맑아야 했는데, 오늘은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현우는 어린 현서의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계속 걸었다. 현서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할 만큼 피곤했지만, 형에게 안겨 있는 게 그저 좋아 아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웅얼거렸다.
“우리 어디 가?”
“비밀~.”
장난스러운 대답을 들은 현서가 히힛 웃으며 현우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더 묻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문이 보였다.
벽도 바닥도 하늘도 없는 공간에 홀로 둥둥 떠 있는 문은 다시 봐도 매우 수상한 모양새였지만,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아마 제 형이 만들어서 그런 거겠지. 정도로 생각한 현서가 볼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저 문, 전에 본 적 있어. 흰 양말 님이 형이 만든 거라고 하셨어…….”
“응. 맞아. 형이 만든 거야. 몰래 만드느라 힘들었어.”
“왜 몰래 만들어?”
“쉿.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말에 또 작게 웃은 현서가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봤다. 어린 시절엔 마냥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모습이었는데, 이제 보니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지금은 필리스에서 함께하고 있지만, 이때의 형이 늘 그리웠던 현서는 현우의 옆얼굴을 감상하다 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상한 옷을 입고 있어?”
평소 제 형이라면 절대 입을 리가 없는 동물 잠옷 같은 스타일의 귀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띠도 하고 있었다. 현우는 저를 살피는 동생을 향해 쿡쿡 웃으며 말했다.
“기억 안 나? 이거 현서가 골라 준 옷이잖아.”
“응? 내가? 언제?”
“할로윈에.”
“……아!”
그러고 보니, 한창 동물 잠옷에 빠져 있던 시기에 온 가족이 세트로 옷을 입고 할로윈 파티를 즐긴 적이 있었다. 아마 예닐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았다. 당시 현서는 최애 다람쥐 잠옷을 골랐었고, 현아는 토끼를 골랐었다.
추억을 회상해서일까? 안개 낀 것처럼 탁했던 정신이 맑아지며 이 상황에 대한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형, 근데, 왜 꿈으로 찾아왔어? 그냥 내 방으로 오지.”
지금 현우는 장기 수면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꿈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고, 저 ‘문’의 용도도 궁금했다. 어느덧 문 앞에 다가온 현우가 현서를 내려 주며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현서야. 형은 이 문을 설명해 줄 수 없어.”
“왜?”
“형이 설명하는 순간, 알게 되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누가 알게 된다는 건지, 그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현우가 현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몰라도 괜찮아. 들어가면 전부 알게 될 거야.”
“나 혼자 들어가?”
“응. 형은 못 들어가. 여기서 이 문을 지켜야 하거든.”
“알았어. 그럼 나 혼자 들어갔다 나오면 돼?”
현서는 현우가 자신을 위험한 곳에 들여보낼 리가 없으니 딱히 겁나지 않았다. 그저 왜 여길 들어가야 하는지 궁금할 뿐이었고, 그건 들어가면 알게 될 터였다.
“응. 그리고 들어가면 안쪽 공간은 몇 분밖에 유지되지 못해. 굉장히 짧은 시간일 거야. 시간이 다 되면 형이 현서를 데리고 나올 거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알았지?”
“응. 알았어.”
“형은 여기서 현서를 기다릴게.”
“응.”
고개를 크게 주억거린 현서가 직접 문손잡이를 돌렸다. 이전 꿈과 달리 이번엔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슬그머니 문을 열자 안으로 화려한 호박 장식이 가득한 공간이 보였다. 현우는 잘 다녀오라며 현서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럼 들어갈게!”
“응.”
짧은 다람쥐 옷을 입은 꼬마 현서는 망설임 없이 문 안쪽 구역으로 쏙 들어갔다. 몸 전체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들어온 문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엄청 화려하네.”
현서는 호박 랜턴이 둥둥 떠다니고 반투명한 유령들이 휙휙 날아다니는 거대한 핼러윈 파티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니, 저가 밟고 선 긴 카펫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화려한 카펫이었다.
쭉 곧게 뻗은 카펫은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롤리팝 캔디를 늘여 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빨간 부분이 번쩍번쩍 점멸하고 있었다. 이 방향으로 가라는 듯이 앞으로 뻗어 나가는 빛을 따라 타박타박 걷기 시작하자 주변 구조물이 30배속으로 재생한 영상처럼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카펫의 빛이 모이는 지점까지 걸어간 현서는 넓은 공터에 도착해 멈춰 섰다. 주변엔 거대한 인형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인형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전부 죽은 상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몸과 머리가 분리된 가장 큰 공룡 인형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누굴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현서의 눈앞에 푸르스름한 반투명 창과 함께 오랜만에 보는 ‘한글’이 팝업됐다.
[던전 유지 시간 9분 48초]
“……응?”
갑자기 눈앞에 뜬 시간에 당황한 현서가 “뭐야? 이건 어떻게 없애지?” 중얼거리고 있으니, 공룡 위에 있던 사람이 땅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아파트 10층 높이는 될 것 같은데, 저기서 그냥 뛰어내린 것도 놀라웠지만, 다가온 이의 얼굴이 훨씬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헉!?”
현서는 저보다 훨씬 큰 사람을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공룡 인형에서 터져 나온 건지 실밥과 솜뭉치를 여기저기 묻힌 장신의 여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빨간 핏빛 눈동자는 불이라도 내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형형했다.
엄청난 위압감이 주변 공기를 짓눌렀지만, 현서에겐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제 앞에 이 사람은 형과 마찬가지로 저를 절대 해칠 리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현아야?”
“……”
고작 1년 조금 안 되게 떨어져 있던 것치고 그새 성숙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20살의 현아가 아니라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현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현서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우와! 현아야! 오랜만이야!”
형이 안내한 공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현서는 현아가 저를 경계하든 말든 반가움에 토토톳 달려가 제 쌍둥이 동생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데 마주 안아 줄 거란 기대와 달리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핼러윈 던전 특별 보상이라며…….”
“어……?”
“비켜.”
“……어어?”
현서를 손쉽게 휙 떨어뜨려 놓은 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치켜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야이 씨! 안식 이 새끼 진짜! 너 진짜 이따위로 굴래!? 그으러케! 어? 그으러케 여기 좀 들어와 달라고 아주 사정 사정을 해 대서 SS급 레이드도 째고 왔더니, 이딴 장난이나 하는 거냐!? 이러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았어!? 어엉!?”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한 현아를 본 현서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 어깨를 움츠렸다. 무서웠다. 제 동생이지만, 정말 무서웠다.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것 같은 열기와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지만, 금세 사라지며 또 푸르스름한 창이 보였다.
[안식의 신이 불의 황제 김현아의 특성은 걁뷃뛣뚫궓에게 통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걁뷃뛣뚫궓? 설마 폰트 깨진 거야?’
대충 급하게 써 보낸 것 같은 글이었지만, 저 문구를 본 건 현서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시선을 뗀 김현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 뭐냐?”
“나 현서…….”
“정보 열람이 이상한데? 몬스터는 아니고.”
“현서라니까……?”
“현혹 스킬인가? 이상하네. 보스는 이미 뒤졌는데.”
“저 공룡 인형이 보스야?”
현서는 제 동생이 무서워 다람쥐 잠옷을 부여잡고 물러서 있었지만, 우물쭈물 대답은 잘했다. 어쨌든 상대가 현아였으니까. 현아는 작은 현서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더니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씨 진짜! 가만 보면 니가 제일 악질이야!”
“……누, 누구?”
“안식의 신! 너지!?”
“…….”
“씨발, 허구한 날 친절한 척하면서 살살 인류의 편인 척 굴더니, 아주 이딴 식으로 사람 마음을 헤집어 놔? 아주 제일 악질이라고 니가!”
“나 안식의 신 아닌데…… 안식의 신은 ㅎ……”
형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쩐지 육성이 나오지 않았다. 투명한 손이 제 입을 막은 것 같은 감각에 놀란 현서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말해선 안 되는 걸까? 눈치껏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자니, 현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또 욕을 했다.
“옘병, 진짜…… 가지가지 하네. 미친놈의 신들…….”
“그, 그렇게 욕하지 마, 왜 이렇게 입이 더 거칠어졌어…….”
“…….”
현아가 눈을 붉게 빛내며 살벌하게 노려봐도, 현서는 더 쫄지 않고 물었다.
“여긴 던전이야?”
“…….”
“우리가 판소에서 읽었던 그 던전?”
“…허, 참…… 빌어먹게 선명하네.”
“…….”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현서를 바라보던 현아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쫄보라 매일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똑같고.”
“내가 언제 그랬어…….”
현아는 제 앞에서 혈육의 모습을 한 어린아이가 겁먹었으면서도 은근히 할 말은 다 하는 반응을 지켜보며 쓰게 웃었다.
“하아… 다 때려치우겠다고 협박했더니, 너를 보여 주네…… 근데 이딴 식으로 만나고 싶다는 건 아니었거든? 이딴 눈속임… 따위…….”
마지막 말은 거의 이를 짓씹는 바람에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처참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현서는 괴로워하는 현아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나 진짜 현서야, 현아야. 믿기 어렵겠지만. 잠깐 여기에 왔어. 곧 다시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일단…….”
띠링-
[안식의 신이 눈속임이 아니라며 가슴을 퍽퍽 칩니다.]
다시 푸르스름한 창이 떴다 사라졌다. 현서는 이 모든 상황이 다 이해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앞에 있는 이가 제 여동생 현아라는 것을,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결심한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야. 나도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너와 만나는지도 몰랐어. 그래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현서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아쉽다. 여기 올 줄 알았으면 네게 할 말이라도 많이 준비하는 건데…….”
그 말에 현아는 옆에 둥둥 떠 점점 줄어드는 시간이 적힌 창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리곤 해탈한 듯이 어린 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현서는 현아의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다가 볼을 꼬집어도 얌전히 있었다. 잠시간 현서를 만지작거린 현아가 폐를 토해 낼 듯한 깊은 한숨을 쏟아 내며 현서의 이름을 읊조렸다.
“김현서.”
“응.”
“김현서…….”
“응.”
“현서야…….”
“응.”
꼬박꼬박 대답한 현서가 제 볼을 만지작거리는 현아의 거친 손에 볼을 비볐다. 그러자 일순, 김현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화내거나 짜증 내는 얼굴이 아닌, 아프고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이…… 피를 토할 듯이 괴로워하는 얼굴이 된 김현아가 침을 크게 삼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뱉었다.
“…보고 싶은 새끼…….”
“…….”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너를… 참 잘도 빚어 놨네… 마치 진짜같이…….”
“응? 아…… 아아!!!”
현서는 그제야 현아가 왜 제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죽었다. 지구에서 이미 죽었으니, 아무리 나라고 말해 봤자 거짓된 환영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그 반응을 확인한 현서가 허둥지둥 말을 쏟아 냈다.
“현아야! 나 현서야! 환상 아니고 진짜야! 우리 읽었던 판소 숲의 마법사 기억나지?! 나 거기에 빙의했어! 못 믿겠지만 진짜야! 형도 필리스에서 만났어!”
“…….”
마구 쏟아 낸 말을 이해한 현아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이번엔 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허허…… 이놈 봐라? 딱 이렇게 써 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현서는 이게 진짜인지 가늠하는 듯한 모습에 확신을 실어 주고자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형은 빙의가 아니라 차원 이동으로 먼저 와 있었어. 나 지금 형이랑 같이 살아! 엄마랑 아빠한테 꼭 전해 줘! 우리 잘 살고 있다고!”
“…….”
“현아야. 이거 가짜 아니야. 나 진짜야. 진짜 현서야. 아, 이 모습은 가짜인데, 음…… 하여간에 내 의식은 진짜야!”
“……진짜라고?”
“응!”
“…네가 진짜…… 현서라고?”
“응! 진짜!”
“…….”
현아는 더 묻는 대신 말랑한 현서의 볼을 꼬집었다.
“아얏!”
“…….”
볼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에 현서의 눈에 물막이 차오른 순간, 띠링-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가로막는 반투명한 하늘색 창이 생겼다.
띠링-
[안식의 신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ㄴ]
메시지가 나오다 끊기더니, 다시 띠링- 하고 신규 메시지가 팝업됐다. 그런데, 안식의 신이 아니었다.
[붉은 달의 신이 수동모드로 던전 관리를 시작합니다. 비정상적인 개입이 확인되었으니, 포털이 닫히기 전에 나가라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개입?”
“……포털?”
현아와 현서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현아는 잠시간 ‘비정상적인 개입’ 부분을 바라보다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추가적인 말은 덧붙이지 않고, 현서의 의문에 대한 답으로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멀리, 블랙홀처럼 시커먼 기운이 이글거리는 곳이 보였다.
“저게 뭐야?”
“포털.”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자주 읽었던 판소에 나오는 그런 포털.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시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
“…….”
그 말은,
“이게 꿈이 아니라… 지구에…… 던전이 생겼다는 거야?”
잔뜩 당황한 물음에 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서는 놀란 토끼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포털로 고개를 돌렸다. 색이 점점 흐려지는 게 불안했다. 저대로 가다가 증발할 것처럼 사라질까 봐…….
“현……”
띠링-
[붉은 달의 신이 어서 포털을 나가라고 합니다.]
띠링-
[안식의 신이 포털 소멸까지 8분 남았으며, 그 시간 안에 절대 소멸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하ㅂ니ㄷㅣㅣㅣㅣㅣㅣ;ㄸㄸㄸㄸㄸㅏㅏㅏㅏㅏㅏ]
“…….”
“…….”
띠링-
[붉은 달의 신이 비정상적인 개입으로 해당 던전에 버그가 발생하여 강제 소멸 절차를 밟아야 하니 어서 나가라고 합니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넣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형이 칼리아르 님께 졌구나…….’
그래, 형이 아무리 대단해도 초월신을 이길 순 없겠지. 납득하며 끄덕이는 찰나, 현아가 어린 현서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
“어이. 빨갱이. 얘도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거야?”
띠링-
[붉은 달의 신이 아쉽게도 그건 안 된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야, 빨갱이. 얘 특성창에 안식 놈이 주는 핼러윈 데이 특별 보상이라고 떴거든?”
허공에 텍스트 창을 노려보는 현아와 달리 현서는 기겁하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현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빨갱이라니……!’
“혀, 현아야, 신을 그렇게 부르면…….”
대충 고개를 틀어 현서의 손을 떼어 낸 현아가 작은 몸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됐고. 시도나 해 보자.”
“어?”
현서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현아가 다람쥐 잠옷을 입은 현서를 안은 채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그러자 굉음에 가까운 쿠콰콰쾅! 소리와 함께 바닥에 금이 쩍 쩍 갈라졌다.
“히익!”
말이 점프지, 저 멀리 포털까지 단 세 번의 도약으로 도착해 사실상 비행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서는 제 동생이 도약하며 밟은 땅이 전부 금이 쩍쩍 가고 깊게 파인 것을 보며 호달달 떨었다.
“와, 현아 너 겁나 세구나?”
“SS급이니 당연하지.”
“몇 급까지 있어?”
“현재는 SS급.”
“대박!”
순수한 감탄에 피식 웃은 현아가 포털 앞에 서서 현서를 꽉 안으며 말했다.
“야. 김현서. 넌 몬스터 열람 정보에 뜨지 않았어. 네 속성은 특별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떴지.”
“……보상?”
갸웃하는 현서를 잠시간 바라본 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상은 던전에서 포털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현아의 말이 다 맺어지기도 전에, 띠링- 띠링- 띠링- 급한 알림과 함께 연속으로 메시지가 다다닥 떴다.
[붉은 달의 신이 기겁하며 말립니다.]
[걁뷃뛣뚫궓은 시스템 버그를 악용해 생성된 보상으로]
[던전 밖으로 나가는 즉시 소멸한다고 합니다.]
“……빨갱이 말은 못 믿겠어. 어이, 안식. 진짜야?”
그러자 또 알림음 소리와 함께 안식의 신의 메시지가 팝업됐다.
[안식의 신이 그건 사실이라며 떨떠름해합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
“…….”
‘혹시…… 형 칼리아르 님께 머리채 잡힌 건 아닐까?’
합당한 의심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걱정도 됐지만, 급한 건 저쪽이 아니었다.
“현아야.”
“……응, 현서야.”
“시간 없으니까, 생각나는 것만 우선 말할게.”
“응.”
“예전에 형이, 네가 죄책감 가졌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어.”
“…….”
“레몬 젤리 말이야. 우리 때문에 사러 간 거 아니고, 그냥 형도 그날따라 공부하기 싫고 답답해서 바람 쐬고 싶었대. 그래서 가드 없이 몰래 나갔던 거래.”
“…….”
현아는 제 어린 시절의 과오를, 제 마음 한구석에 늘 불편하게 존재했던 일을 굳이 언급하는 현서를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이 짧은 말로만 미루어 봐도 저가 아는 형제들이 맞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오빠에게 난 괜찮다고 전해 줘…….”
“응. 내가 꼭 전해 줄게! 너도 엄마랑 아빠한테 형이랑 난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줘.”
“그래. 꼭 그럴게.”
현서는 제 동생의 품에 안겨 잠시 또 뭘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 하며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나 결혼해! 카르젠이랑! 다다음 주에!”
“……뭐?”
“기억 안 나? 바이스 카르젠! 숲의 마법사에 서브 남주!”
“…….”
“아하핫! 완전 놀랐지?”
“…허…허어 참…….”
현아가 황당함에 무어라 더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크게 웃음 터진 현서가 현아의 목을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어쩌지?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생각 안 나…….”
“…….”
“현아 너는 할 말 없어? 너부터 말해 봐. 난 들으면서 생각 좀 할게.”
생각 좀 한다는 말에 피식 웃은 현아가 어린 현서를 꽉 안아 주었다. 하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김현아 역시 이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현서의 작은 등을 도닥일 뿐이었다. 잠시간 현서를 꽉 끌어안고 등을 보듬던 현아가 슬그머니 떨어져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날, 다시 돌아갔었어.”
“…….”
“막 도착했는데, 네 방에서 의사랑 간호사들이 우르르 나오더라… 들어갔는데 넌 이미… 떠났고…….”
현서는 저가 죽은 날의 이야기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구나…… 괜찮아. 많이 속상했겠다.”
“속상한 정도가 아니라…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어…….”
“…….”
“미안해. 그날 혼자 둬서.”
죄책감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현서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은 후,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일 같이 있다가 하루 그런 거잖아! 난 진짜 괜찮아! 하나도 신경 안 썼어! 그냥 마지막 인사를 못 해서 아쉽고, 또 미안할 뿐이었지…… 엄마랑 아빠랑 네가 후회할 거 알았으니까. 난 정말 괜찮지만, 가족들을 위해 조금 더 버텼으면 좋았을걸 하고…….”
“…….”
“음…… 엄마랑 아빠는 잘 계셔?”
“어. 엄마랑 아빠도 각성하셨어. 가이드로. 회사도 그대로 있긴 한데, 지금은 사업은 많이 접고 에스퍼랑 가이드 양성으로 많이 치우쳤어.”
현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에스퍼나 가이드에 대해 묻는 대신 대충 우리가 판타지 소설에서 봤던 그런 거겠구나. 하고 대충 넘겼다. 그리고 또 뭘 말해야 좋을지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 시계가 안 보여.”
“…….”
조금 전에 확인했을 때 대략 6분 정도 남은 것 같았는데, 공중에 떠 있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벼운 띠링 띠링 소리가 아닌, 조금 묵직하게 틔릐링- 하는 듯한 알림음이 들렸다.
[붉은 달의 신이 오류 던전을 강제로 종료합니다. 곧 포털이 닫힙니다.]
“…….”
“…….”
30
29
갑작스럽게 30초부터 카운트가 시작되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봤다.
28
27
26
뚝뚝 떨어지는 숫자를 흘긋 본 현서가 애써 방긋 웃으며 현아를 향해 말했다.
“현아야. 형이랑 나는 둘이 진짜 잘 지내고 있어.”
“…….”
22
21
20
“완전 잘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나가 봐. 나는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그래…….”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에, 현아가 품에 안은 현서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 주었다.
10
9
8
포털 바로 앞에 선 현아가 다시 몸을 돌려 현서와 눈을 맞췄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몇 마디 나누지 못할 만큼.
그럼에도 현서는 아쉬운 얼굴 대신, 최대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김현아는 그런 제 반쪽을 향해 마찬가지로 씩 웃어 보이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널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다음에 보자.”
“응!”
3
2
1
힘차게 끄덕인 현서를 향해 웃어 준 현아가 숫자 0이 뜬 순간 포털로 걸어 나가자, 김현아를 삼긴 포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칼리아르의 개입으로 모든 것이 허무할 만큼 순식간에 끝나 버렸지만, 현서는 딱히 칼리아르가 밉지 않았다. 짧은 메시지만 봐도 아마 형이 편법을 사용한 것 같은데, 그저 형이 벌 받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칼리아르 님… 용서해 주세요… 형도 반성하고 있을 거예요…….’
이후 칼리아르로부터 그 어떤 대답도 없었지만, 던전 저 먼 곳에 호박 장식이 차례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빠르게 붕괴되는 던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서는 형이 데리러 온다는 약속을 기억하고 현아가 사라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아까 봤던 문이 나타났다. 문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밀자, 부드럽게 열린 문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현서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 사이로 쑥 나온 양팔에 기꺼이 몸을 던지다시피 안겼다. 고작 몇 분의 짧은 외출 후, 다시 꿈속으로 돌아온 현서는 형을 마주 안고 다음에 보자던 현아의 인사를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