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김현서와 봄
두근두근- 두근두근-
침대 위에 누워 제 심장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동이 세차게 뛰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던 현서가 눈을 감은 채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점점 더 커지는 고동은 곧 다가올 탄생을 기대하는 듯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다.
‘이비야, 드디어 내일이네. 그치?’
두근두근-
‘그렇게 좋아?’
두근- 두근두근-
‘응~ 나도 기쁘긴 하지. 근데 이비가 바다로 돌아가면 쓸쓸할 것 같아.’
그 생각을 공유받은 이비가 괜찮다는 듯이 전신에 고동을 울렸다. 부드러운 감각이 퍼지며 자신의 온몸을 감싸 안아 주는 기분을 느낀 현서가 작게 웃으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알에서 나오게 되면 꼭 놀러 와. 알았지?’
두근-! 두근두근-!
현서는 꼭 놀러 오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고동을 품은 채 부스스 눈을 떴다.
그동안 현서가 몸에 품고 있었던 이비를 데려가기 위해 인어왕 에이디아가 뭍으로 나오는 것은 내일 오후였다.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은 없어도 현서는 제 안의 이비가 굉장히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긍정 부정 정도의 고동만 느껴졌는데, 이젠 대화 수준으로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고, 장난도 치곤 했으니까.
이비를 제 몸에서 꺼낸다고 하더라도 바로 알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니고 심해에서 인어들의 힘을 나눠 받아야 탄생할 수 있다고 했으니, 제대로 이비와 만나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현서는 지난 늦가을부터 봄인 지금까지 매일 함께한 존재를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 서운해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래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슬픔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이비야. 진짜 꼭 놀러 와. 넌 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너한테 갚아야 할 게 많다고.’
두근-
그럴 필요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고동이 울렸다. 현서는 입술을 또 삐쭉 내밀며 제 의견을 건넸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비 네가 없었다면 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거야.’
지난번에 들은 바로 저를 이 필리스에 오게 한 것은 뚱냥이 상급신 흰 양말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빙의할 수 있는 몸을 내어 준 이비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을 거란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그랬다면 경계선 숲을 찾아온 카르젠도 만나지 못했을 거고, 카르젠의 저택에서 안락한 삶을 지내지도 못했을 수 있었다. 최애 크리시도, 그리고 세 번째로 좋아하는 체스터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무엇보다 형을 만나는 게 더 어려웠거나,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 다 이비 덕분이야.’
두근… 두근두근……
이비가 울리는 고동에 귀를 기울인 현서는 푸흐흐 웃어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원인이 뭐든 난 이비에게 너무 고마워. 그러니까 이비 네가 놀러 오면 매일매일 맛있는 것만 먹여 주고, 좋은 침대에서 재워 주고, 매일매일 같이 놀아 줄게! 갖고 싶은 것도 다 사 줄게!’
두, 두근……
그렇게까지? 라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현서는 네가 돌아오면 꼭 은혜를 갚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토끼 귀를 쫑긋거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비야. 지금 내 몸은 이비 네 몸이잖아? 그럼 다시 태어난 이비도 똑같이 생겼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이 쌍둥이로 생각할지도 몰라!’
두근! 두근두근!
‘그치? 재미있겠지? 만약 그럼 우리 같이 옷도 바꿔 입고 놀고 그러자!’
이비와 쿵짝쿵짝 대화하던 현서는 이비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둘이 나눈 이야기는 전부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서는 지구에 있을 땐 꿈꿀 수 없었던 미래를 필리스에선 당연하게 그려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웠다.
침대에 누워 뒹굴며 이비와 함께 방문하고 싶은 유명 디저트 가게를 30개쯤 떠올렸을 무렵, 이비의 고동이 빠르게 뛰며 현서를 불렀다.
‘응? 아, 맞아! 콜린에게 가야지!’
이비 덕분에 잊고 있던 용무가 떠오른 현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좌관 집무실을 찾아간 현서가 노크하려던 찰나, 콜린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현서는 안쪽에서 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는, 어쩐지 저와 꽤 닮은 콜린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콜린! 어떻게 알았어? 살금살금 왔는데!”
“어쩐지 소가주님께서 오셨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문에서 가까운 소파에 앉아 서류 작업 중이었기에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거였지만, 곧이곧대로 믿은 현서는 그저 신기하다며 방긋 웃을 뿐이었다.
평소 콜린의 집무실에 자주 드나든 현서는 예전에 가져다 둔 제 쿠션이 있는 소파 끝자리에 앉았고, 콜린은 그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차를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니! 곧 카르젠이 올 거니까, 금방 돌아갈 거야. 콜린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
“예. 뭐든 말씀하세요.”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번엔 또 무슨 깜찍한 부탁일까? 생각하던 콜린은 현서의 진지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현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형이 준 팔찌의 녹색 보석을 살살 어루만졌다.
보석을 빙글빙글 돌리듯 두 번 쓰다듬으니 순식간에 주변 소리를 차단한 공간 분리 마법이 가동됐다. 콜린은 현서가 저택 안에 보안 시스템을 피하면서까지 제게 부탁하려는 게 뭔지 가늠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소가주님. 혹시 불법적인…….”
“아냐! 절대 아냐. 단지…… 이건 개인적인 거라 기록되면 안 되거든.”
“……예. 말씀해 주십시오.”
긴장했는지, 침을 크게 삼킨 콜린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현서의 짧은 토끼 귀 역시 콜린을 향해 기울어졌다.
“있지, 영주 인장이 찍힌 편지나 소포는 콜린이 따로 관리하지?”
“예.”
“그럼, 있지,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중으로 프란제르 후작가에서 특급 소포를 보낼 거야.”
“예.”
“그 소포는 꼭 따로 확인하지 말고 내게 바로 줬으면 좋겠어.”
“……예?”
“아리스가 내게 보낸 거야.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돼. 편지 내용도, 소포 내용물도.”
“……하지만, 소가주님. 후작님 지시에 따라 소가주님께 드릴 우편은…….”
“나, 나도 알아! 하지만…… 이건 엄청! 어어엄청! 개인적인 거란 말야……!”
현서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을 본 콜린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후작님께 비밀로 해야 하는 물건입니까?”
“혀, 형이 알아서 좋을 게 전혀 없는 물건이야…….”
“……제게만 말씀해 주시죠. 저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뭔지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현우가 탈탈 털어 댄다면 결국 입을 열기야 하겠지만, 그럴 일이 없길 바라며 묻자 현서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콜린은 현서가 다른 귀족 자제들과 달리 이상한 쪽으론 사고 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후작님이 저를 털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라는 대목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콜린을 전적으로 믿는 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에이로스 라는 꽃 추출물로 만든 크림이야…….”
“……에이로스 꽃이요? 구하기 굉장히 힘든 꽃 아닙니까?”
그 꽃이 뭔지 잘 아는 듯한 콜린의 반응을 확인한 현서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콜린은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약초를 잘 알았고, 루아인 전역에서 가장 구하기 힘들며 가장 비싼 통증을 가라앉히는 약초를 소공자가 대체 왜…까지 떠올리다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예. 알겠습니다… 에이로스 크림이군요…….”
“…으응…….”
“…예… 그… 음. 절대… 후작님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현서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진 것을 본 콜린은 괜히 테이블에 쌓아 둔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 비싼 크림의 용도를 대번 파악한 덕분에 삐걱삐걱 겨우 대답하긴 했지만, 콜린의 얼굴도 현서만큼 붉어진 상태였다.
“그… 호, 혹시… 누가 물어보면… 아리스가 준 개인적인 선물이라고 둘러대…… 알았지?”
“예. 꼭 그러겠습니다…….”
얼굴이 어찌나 확확 달아올랐는지, 콜린은 소가주의 앞이 아니었다면 양손으로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증을 즉시 잡아 주는 만큼 비싼 크림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은 후, 오늘 저가 읽었던 서류 두 장을 현서에게 쓱 내밀었다.
“크흠. 소포 건은 제가 은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소가주님께서도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더군요.”
“이게 뭔데?”
현서가 종이 두 장을 집어 들자, 콜린은 다른 서류로 제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익명으로 정보 길드에 의뢰해 받은 겁니다. 최근 남부에서 거래되는 정보 중 가장 비싼 정보죠.”
“가장 비싼 정보? 아, 설마…….”
현서는 종이의 가장 위에 적힌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이. 김. 현서 소공자의 모든 것……? 아, 그때 우리가 은근히 흘렸던 그거구나!”
종이의 정체를 파악한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케이. 김. 현서 소공자>
성별 남성, 연령 미상(대략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추정, 불확실한 정보)
루아인 영토의 남부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 케이 후작의 유일한 가족이자 소가주인 동생. 밝은 크림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진 묘족 혼혈. (확실한 정보)
갑자기 나타난 8클래스 마법사인 케이 후작에 비해 동생인 소공자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음.
약혼자는 바이스 백작 가의 장남 카르젠 자작. 현 해군 부사령관인 바이스 자작이 열렬하게 구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후작 가문의 소가주이나, 아직 공부 중으로 가주 대행권은 받지 못함. (불확실한 정보)
대외적으로는 공부 중이라고 하지만, 병약해 가주 대행이 어렵다는 소문이 있음. (불확실한 정보, 가주 대행으로 현 콜린 보좌관과 바이스 카르젠이 임시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함.)
케이 후작의 마음을 얻으려면 현서 소공자에게 잘 보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우애가 깊다고 함. (확실한 정보, 실제 케이 후작의 심기를 거스른 사건은 전부 동생 소공자를 걸고넘어졌던 일로 밝혀짐.)
소공자의 알려진 업적으로는 남부 지역 아카데미 설립과 영지민 무상 건강 검진이 있음.
지난 남부 귀족 영지 개발 회의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신분이나 돈이 장벽이 되어선 안 된다며 남부 영지 전체에 무상 교육을 주장함. (당시 남부 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으나, 케이 후작의 헛기침으로 만장일치 통과됨.)
초반 민심 잡기로 의심했으나, 드워프를 대거 고용해 한 달 만에 남부 지역에만 총 네 곳의 아카데미를 완공하고, 현재 학생을 모집하여 전면 무상 수업 진행 중.
교수진도 화려하여 아브델 왕립 아카데미만큼 수준 높은 수업은 물론이고, 아카데미 내에서 하루 세 끼 식사가 무상으로 제공됨.
두 번째 업적인 영지민 무상 건강 검진의 경우 바로 적용되어 세금 납부 이력이 있을 경우 누구든 무상으로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됨.
이 역시 귀족들 반발이 거셌으나, <이상하네요? 돈 없는 사람이 무료로 건강 검진을 받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요? 지금 반대하는 가문들은 회의가 끝나면 후작님과 저와 함께 따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라며 웃는 얼굴로 말해 만장일치를 끌어냄.
우유부단하고 순진하고 심약하다는 소문과 달리 기가 센 것으로 추정됨.
소동물과 달콤한 디저트와 미인에 약함. (확실한 정보)
과한 근육보다 흉부가 발달하고, 허리는 날씬해 슬림해 보이는 근육의 미인에게 약함. (확실한 정보)
왕실 기사단 제복이나 해군 제복과 같은 예장에 약함. (확실한 정보)
파티에 자주 참석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참석한 파티에서 소공자가 관심을 보인 인물은 전부 제복 또는 제복식 예장에 슬림한 근육질 몸매에 미인이었음. (확실한 정보)
“허…….”
첫 장 밑 부분까지 읽은 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서는 저 <확실한 정보> 부분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우선 침착하게 두 번째 장으로 넘겼다.
그 밖의 특이 사항으로 사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나 인맥이 좋음.
체스터 왕세자와 단독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으며, 북부 영주 프란제르 후작 부부의 대자임. 프란제르 아리스 후작 부인이 직접 대자로 삼았으며, 친아들만큼 아낀다고 본인이 언급함.
에벨루스 신전의 유력한 대신관 후보 프리스트 크리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음. 약혼식에서 루아인 왕실 기사단 단장 샤이나 리엔 남작과 친분도 과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루아인 원정대 모두와 친한 것으로 추측됨.
동대륙 북부 수장 구미호의 아들 유사 경이 좋아하는 친구라며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고 함.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가 후작성에 자주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그하르트와도 친분이 있을 수 있음. (케이 후작과는 친분 관계가 확인되었으나 소공자와는 대외적인 확인이 되지 않음, 불확실한 정보)
엘카사트 제국의 카일 드뷔시 공작, 태양신 아르카라스의 아이린 성녀와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됨.
약혼자 카르젠 자작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르카 난민 문제에 관심이 많음. 현서 소공자의 환심을 사려면 난민 구호 정책을 언급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라즈베리 일보 연말 결산에서 <루아인 왕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9위로 언급되었으나, 3위로 언급된 케이 후작의 결정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해당 순위로 집계된 것으로 추정.
묘족 혼혈로 승마가 불가능하여 알파카를 탑승, 최근 남부 귀족들이 죄다 알파카를 선물로 보내 후작성 내부에 알파카 농장이 생겼다고 함. 알파카 선물은 재고해 보는 게 좋음.
보석은 블루 다이아몬드, 핑크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보석 관련 선물은 일절 받지 않고 거절 중.
소공자에게 인상을 주고 싶다면 소공자가 참석하는 회의에 잘생긴 후계자나 보좌관을 동반해 아카데미 장학금 기부나 난민 구호 문제를 언급하는 게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방법.
조만간 아카데미 장학금 기부자들과 간단한 다과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함. (확실한 정보) 케이 후작 가문과 면을 트고 싶다면 빠른 기부 권장. 잘생긴 후계자가 없다면 입양이라도 하길 권장.
-까지 읽은 현서가 문서를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분명 입으로는 “하하…….” 웃고 있는데, 어째 얼굴을 보니 복잡해 보이는 것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정신 차렸는지 고개를 작게 가로 저은 현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와…… 이 정도면 거의 정확한데? 몇 가지만 빼고.”
저 발언에 콜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현서에게 보여 주기 전 미리 읽어 본 결과 100% 일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가지를 뺀다니……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뭇거리자, 의아한 표정을 제대로 해석한 현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아니~ 콜린, 들어 봐. 내가 미인에 약하다는 거랑 제복을 좋아한다는 건 좀 어폐가 있어.”
“예?”
“정확히 말하자면, 난 카르젠이 좋은 거지, 미인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구.”
“……아, 예.”
“제복도 그래. 내 약혼자가 해군 제복을 입은 게 좋은 거지, 제복을 입은 해군이 다 좋은 게 아니야! 콜린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아, 네…….”
자꾸 한 박자씩 늦는 콜린의 반응에 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중을 재는 듯한 귀여운 얼굴을 마주한 콜린은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서가 생각하는 미인의 범주엔 다행스럽게도 제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고, 현서는 미인의 미소에 약하니 이거로 봐줄 거라는 확신 가득 찬 해사한 미소였다.
콜린의 예상대로, 부드러운 눈웃음을 잠시간 바라보던 현서는 사르르 녹아 토라진 표정을 풀고 시선을 흐렸다. 그리곤 괜히 정보지를 다시 집어 들고 착착 정돈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며 말했다.
“어, 어쨌든~ 저번 회의랑 자선 파티에서 일부러 말 흘린 건 성공인 것 같아 다행이다~.”
“예. 덕분에 장학금 기부가 꽤 많아졌습니다. 남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가주들도 기부를 꽤 많이 하는 추세입니다.”
일부러 아카데미에 장학금 기부 이야기를 흘려 과시를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반강제적인 선행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현서의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갔다. 콜린은 현서의 기를 더 세워 주기 위해 은근히 말을 이었다.
“이번 봄 왕실 영주 회의에서도 무상 교육 이야기와 무상 진료 이야기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미 북부에서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려는 추세고요.”
“역시 아리스야! 북부 사람들 쿨하다니까! 다른 지역도 동참하면 좋을 텐데, 그건 어렵겠지?”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흉내 내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워낙 반응이 좋으니까요. 이번 무상 교육 건으로 왕실에서 표창도 검토하고 있다더군요. 이게 다 소가주님께서 훌륭한 제도를 생각해 내신 덕분이죠.”
콜린의 긍정적인 반응과 쏟아지는 칭찬에 현서의 어깨가 더 으쓱해졌다.
그간 ‘난 필리스에 와서도 먹고 뒹구는 것 외에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라며 우울해하던 현서였는데, 남부 영지민 아카데미 무상 교육과 의료 검진 시스템 구축으로 최근 자신감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물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일인지라 사실상 불가능했던 안건들이었으나, 그 천문학적인 비용을 훨씬 웃도는 현우의 재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쉬이 언급하지 않았다. 저 돈을 움직일 발언권을 가진 건 현재 남부에서, 아니. 루아인에서 현서가 유일했으니까.
현우가 평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는 ‘남부의 자랑’인 현서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 준 콜린은 흘긋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6시. 슬슬 현서의 피앙세가 귀가할 시간이었다. 현서 역시 콜린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확인하곤 귀를 쫑긋 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콜린! 그럼 난 카르젠 마중 나갈게! 아! 그리고! 소포는 꼭 나한테 바로 줘! 알았지?”
“예. 소포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습니다.”
“모,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지만…… 헤헤, 그럼 콜린! 좋은 저녁 시간 보내!”
“감사합니다. 소가주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현서가 보좌관 집무실을 나섰다. 후작성 본관 중앙 현관을 빠져나가니 마침 정원사가 공들여 깎은 꽃나무를 열심히 씹는 알파카 막시무스가 보였다.
“막스~.”
“!”
제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막시무스가 고개를 들더니 반가운 걸음으로 총총총 걸어왔다. 현서는 막시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목을 꼬옥 안았다. 그러자 막시무스 역시 현서의 어깨에 제 머리를 비벼 대며 “뿌우~ 뿌우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막스야~ 잘 놀고 있었어? 정문으로 가자~.”
“뿌우~!”
가자는 말을 알아들은 막시무스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딱이더니 곧 현서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현서가 복슬복슬한 등에 자리 잡고 앉아 고삐를 쥔 것을 확인한 막시무스는 천천히 일어나 짧은 보폭으로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알파카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 대략 5분 정도 걸려 도착한 후작성 정문엔 막 순찰을 교대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은 알파카를 타고 등장한 소가주를 향해 꾸벅 인사했고, 현서 역시 화답 인사를 했다.
막시무스의 위에서 내려온 현서는 고비를 잘 정돈해 안장에 묶어 주고 가서 놀라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막시무스가 풍성한 엉덩이를 흔들며 타박타박 걸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귀를 쫑긋 세우고 정문 밖으로 시선을 옮기니, 흑마를 타고 달려오는 카르젠이 보였다. 현서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헤실헤실 웃어 버렸다.
‘해군 제복 역시 최고야……!’
해군 제복을 디자인한 루아인 최고 인기 디자이너 멜리사는 ‘올 블랙으로 금욕적인 디자인’을 강조했다고 인터뷰했지만, 현서가 볼 땐 오히려 섹시함을 강조하는 디자인에 가깝게 보였다.
물론 이는 현서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금장 장식과 카라부터 재킷 이음새까지 쭉 직선으로 떨어지는 은색 자수, 재킷 위로 가죽 벨트를 조이는 형식으로 잘록하게 들어가는 허리 덕분에 입는 이의 몸매 라인을 더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는 디자인이었으니까.
남부 지역의 명물 중 하나가 괜히 ‘해군’이라는 농담이 생긴 게 아닐 정도로 멋진 제복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현재로서 현서가 가장 좋아하는 제복이기도 했다.
현서는 점점 가까워지는 약혼자를 바라보며 귀와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너무 흥분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귀를 잡아당기며 심호흡하고 있으니, 정문을 통과한 카르젠이 현서의 앞에 멈춰서 말에서 내렸다.
“카르젠, 어서 와요!”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현서야. 다녀왔어.”
자연스레 양팔을 벌린 카르젠에게 토토톳 다가가 안긴 현서는 제 몸을 꽉 안아 주는 강인한 압박감에 “헉!” 소리를 내다가도, 질세라 힘껏 마주 안으며 쿡쿡 웃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아침에 출근해 놓고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둘을 못 본 척하며 곧은 자세를 유지했고, 뒤에서 들리는 쪽 하는 소리와 까르르 웃는 소리 역시 못 들은 척했다.
***
최근 현서의 일과는 거의 비슷했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카르젠에 맞춰 아침 일찍이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약혼자와 둘이 식사를 한다.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고 돌아와 현우의 침실로 가 잠든 형 옆에 누워 다시 남은 잠을 청했다.
정오쯤에 부스스 일어나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시간 동안 콜린의 집무실에서 공부를 하고, 잠시 쉬다가 저녁 6시가 되면 제 약혼자의 귀가 시간에 맞춰 막시무스를 타고 마중 나갔다.
귀가한 약혼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거나 성 정원을 산책하며 오늘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카르젠이 자신을 침실까지 데려다주면 굿나잇 키스를 하고, 따로 잠드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곤 했다.
‘평화롭다~.’
오늘도 완벽했던 하루 일과를 떠올려 보곤 평화롭다고 결론지은 현서가 헤실헤실 웃으며 제 눈앞에 분주히 움직이는 카르젠의 손을 바라봤다.
별이 빛나는 밤,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카르젠은 밤바람이 아직 차다며 현서에게 둘러 준 후드 숄을 여며 주고 있었다. 카르젠의 손길이 제 턱 주변을 스칠 때마다 현서는 그의 손등에 볼을 비볐다.
자꾸 흘러내리는 후드 숄을 두 번째 여미던 카르젠은 손등에 볼을 비비는 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입술이 포개지며 쪽- 하고 가볍게 나눈 입맞춤이 아쉬웠는지, 카르젠의 입술이 떨어지려는 찰나, 현서가 뒤꿈치를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현우가 아직 장기 수면 중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간 수많은 경험으로 저도 모르게 흠칫한 카르젠은 한 번 더 입을 맞춰 주고 현서의 팔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리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저를 올려다보며 갸웃하는 약혼자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들어갈까?”
“그래요. 그럼, 오늘 제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줄래요?”
“응. 그럴게.”
짧은 입맞춤이 아쉬웠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형이 깨어나려면 시간이 조금 남은 터였으니, 지금 현서가 걱정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소포가 내일 꼭 도착해야 할 텐데…….’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나른한 얼굴로 눈을 거의 감고 있던 현서는 조용히 열리는 방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방에서 씻고 온 카르젠이 촉촉하게 젖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침대맡에 앉은 그가 이불 밖으로 쏙 빠져나온 현서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눈을 맞추던 현서 역시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정말이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문득 아까 읽었던 정보 길드의 문서 중 한 대목이 생각났지만, 무시하고 넘겨 버린 현서가 카르젠의 손을 꼬옥 맞잡고 말했다.
“에이디아 님은 내일 오후에 오신대요. 그때 같이 있어 줄래요?”
“당연하지. 내가 왜 휴가를 냈는데.”
심플하고도 마음에 드는 답변을 들은 현서가 또 히죽 웃자 가슴에서 기분 좋은 울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밤이 꽤 깊어 이비도 현서만큼 피곤한지 슬슬 잠들 것 같았다.
카르젠은 현서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로 두 사람의 결혼식 준비에 대한 이야기였고, 현서는 한여름으로 잡은 결혼식에 자신이 원했던 얼음 꽃장식이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그대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잠들었다고 인지한 찰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눈부심에 부스스 눈을 뜨자 온통 새하얀 공간이 맞이했다. 현서는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에서 저 멀리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점을 발견했는데, 그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멀리 있던 점이 훅! 하고 현서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뭐, 뭐야? 문?”
갑자기 눈앞으로 달려온 문짝에 놀랄 법도 한데, 지금껏 꾼 꿈들이 제게 해를 끼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매우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아무것도 없이 둥둥 떠 있는 문을 보고도 겁먹지 않은 현서는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어?”
문고리가 돌아가긴 했지만, 당기거나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럼 이번 꿈은 굳이 왜 이 문을 보여 준 걸까? 갸웃하며 요리조리 살피던 찰나, 문 뒤에서 뚱뚱한 노란색 치즈 고양이가 나타났다.
“흰 양말 님!”
“흠흠. 흠흠흠. 오랜만이구나, 아기 토끼야.”
“잘 지내셨어요?”
“그래그래. 난 잘 지냈단다. 일단 앉으렴.”
고양이가 앞발로 툭툭 두드린 지점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자, 흰 양말이 기다렸다는 듯이 현서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몸을 말아 누웠다. 현서는 푸짐한 고양이 뱃살을 주무르며 물었다.
“흰 양말 님, 형은 잘 지내고 있어요?”
흰 양말은 만나자마자 형의 안부부터 묻는 현서를 향해 골골송을 불러 주며 주둥이를 열었다.
“으휴~~~ 말도 마라. 습득하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란다. 이대로라면 예정일보다 일찍 깨어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 그래요?”
“음? 왜 곤란해하는 게냐?”
“아, 아뇨? 곤란하지 않은데요? 전혀 아닌데요? 형이 빨리 깼으면 좋겠어요!”
당황해 마구 말을 뱉는 현서를 올려다보던 흰 양말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서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절~대 아니라고 세 번 정도 더 강조했다.
“허허~ 하여간에, 푸른 별 작은 반도 출신 인간들이 원래 습득이 빠르고 얍삽한 건 잘 알고 있었다만, 네 형은 유독 특출 난 편이더구나. 요즘 강사들이 네 형이 개발한 편법을 막느라 바쁘단다.”
“형이 머리가 좋긴 하죠.”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문을 흘긋 노려본 흰 양말은 현서의 다리 사이에 아예 배를 드러내고 누워 형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수업 내내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고 있으며, 벌써 지구에 도움을 꽤 주었다는 소식이었다. 제 형의 활약상을 들은 현서의 얼굴이 점점 더 밝아졌다.
그 외에도 흰 양말은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선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려고 애썼다. 물론 대부분 언급할 수 없는 규칙에 제재받는 이야기가 주라 자세히 전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을 도우려다 악신에게 오염당한 탓에 고생한 두 형제를 위해 뭐든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조잘조잘 떠들던 주둥이를 잠시 다물고 말을 멈춘 흰 양말이 현서와 눈을 맞추었다. 현서는 흰 양말의 배를 쪼물거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약간의 애정까지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현서 넌 참 속도 없구나. 속도 없어.”
“아닌데요? 저 속 없지 않아요!”
“끄응…….”
흰 양말은 이 태평한 녀석을 볼 때면 늘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오래전, 상대적으로 오염이 심각했던 현우를 먼저 악신이 도달하지 못할 필리스로 옮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가진 힘을 전부 소진한 탓에 현서를 제대로 구할 수 없었으니까.
흰 양말이 저로 인한 파생된 부가적인 일을 수습할 만한 힘을 다시 갖췄을 땐, 이미 현서의 몸의 모든 기능이 멈춰 가고 있었다. 제 형처럼 육신을 필리스로 옮겨 봤자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월신 칼리아르의 도움으로 운 좋게 이비의 육체에 영혼을 안착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을 다해 운신이 불가하여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얼마 전 현서가 푸른 별에서 불치병을 앓았던 이유, 형과 생이별해야 했던 이유를 솔직하게 고했을 때도, 지금도 현서는 한결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한 일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서는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원망 섞인 말도 하지 않았다.
‘착해 빠져선…….’
오히려 신을 이해해 주고, 흰 양말의 탓이 아니라며 위로해 주었다. 이후로도 변함없이 저를 주신으로 남겨 두고, 너무도 쉽게 곁을 내줄 정도로 착한 현서를 바라던 흰 양말은 문득, 그날 제 뒷 목살을 잡고 탈탈 털어 대던 현우가 떠올라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흰 양말 님?”
“!”
“왜 또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현서가 흰 양말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다른 신도였다면 퍽 불경한 손길이라며 솜방망이 펀치로 쳐 냈겠지만, 현서였기에 그대로 방치한 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흰 양말은 괜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다시 현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큼큼. 흠흠. 현서에게 어떻게든 남은 가족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고 싶지만…….’
지구 소식은 과한 개입으로 분류되어 현서에게 남은 가족 소식을 직접 전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물론 아직 열리진 않지만, 지구와 이어진 ‘문’까지 꿈에 등장시킨 현우의 솜씨를 보면, 빠른 시일 내에 편법을 써서 어떻게든 제 동생들을 만나게 해 줄 생각인 것 같지만 말이다.
‘뭐…… 나머지는 안식의 신이 알아서 하겠지.’
바로 앞에 둥실둥실 떠 있는 문을 보고 어이없이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꾹 참아 낸 흰 양말이 현서의 배에 정수리를 비비며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 꿈을 설계한 건 네 형이다.”
“그렇군요.”
뱃살을 조물거리는 손길이 퍽 바빠졌다. 흰 양말은 저 기민한 손길을 즐기며 말했다.
“네 형이 네게 물어보라고 부탁한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단다.”
사실은 강제로 현서의 꿈에 집어 처넣어진 것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지만, 흰 양말은 안식의 신에게 또 뒷 목을 잡아 뜯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대충 좋게 둘러댔다. 형의 질문이라는 말에 현서의 귀가 쫑긋거렸다.
“결혼 날짜는 정했는지 묻더구나.”
“아~ 결혼 날짜 때문이었어요?”
“추가로 혹시 화려한 솔로 생활을 위해 파혼하고 싶어지진 않았냐고도 묻긴 했다만…….”
“아하하, 형 또 그런 농담이나 하고~.”
“허허헛…….”
절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았지만, 흰 양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현서는 카르젠과 상의한 결과 남부는 여름이 가장 예쁜 도시니, 여름으로 날짜를 정했다며 두 사람이 함께 그린 미래를 하나둘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
별이 노래하는 깊은 밤.
제 방 침대에 똑바로 누워 눈을 감은 채 숨을 느리게 몰아쉬던 카르젠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곱게 접어 웃던 현서가 떠올라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눈을 감고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려 애쓰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심호흡해 봤지만, 현서와 나눈 입맞춤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뒤꿈치를 들어 올려 제 목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비비던 깜찍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건전한 생각을 하기 위해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누워도 떠오르는 거라곤 며칠 전 서재에서 제 무릎에 앉아 연신 뽀뽀를 해 대던 현서였다.
단순히 뽀뽀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기억에 남진 않았을 터인데, 은근히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가슴을 더듬거나, 손등으로 턱선을 따라 스윽 훑듯이 만지며 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겨 주거나 하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 현서는 일부러 야릇한 분위기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며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 것 같았다. 즉 현서 본인도 모르게 나온 손짓이었다.
카르젠은 당시, 현서의 고의성 여부를 확신하게 된 계기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수치심을 느꼈다. 자꾸 제 몸 여기저기를 스치는 현서의 무심한 손길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얕은 숨결, 그리고 제 가슴에 볼을 부비던 행위가 이어진 탓에,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억누르고 있던 신체가 반응해 버렸고… 하여간에 그렇게 된 거였다…….
약혼자를 무릎에 앉히고 여기저기 좀 더듬더듬 만짐을 당한(?) 것만으로 그런 반응을 내보이다니……! 평소 자신은 그 누구보다 금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저녁 일이 너무도 민망하여 다음 날 현서를 볼 자신이 없었다. 물론 겉으론 평온함을 유지하며 잘만 봤지만.
‘현서가 굉장히… 굉장히 충격받은 얼굴이었지…….’
내내 끙끙대던 카르젠은 이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흡…….” 침음했다. 제 엉덩이 밑에 갑자기 확 부피를 키운 존재를 눈치채고 눈이 동그래져 올려다보던 현서의 얼굴은 정말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잊을 수 있다면 부디 그 얼굴을 잊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없으니, 그 순간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
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 아니, 그보단 경악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현서의 놀란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차라리 오늘 귀여운 입맞춤을 나누던 시간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뇌 활동은 카르젠의 편이 아니었다.
현서가 가끔, 아니 꽤 자주 그랬던 것처럼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뻥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평온해야 할 호흡은 수치심에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하아…….”
폐를 토해 낼 듯이 깊은 한숨을 쉬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제 업보인가 보다.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러니까, 평소 현서를 놀리느라 제 몸을 몹시 쉽게 사용한 죄…….
현서가 은근히 시선을 피하면서도 몰래 흘끔거리는 귀여운 반응이 보고 싶어 단련된 가슴을 내밀어 보이고, 토끼 귀 털을 펑 곤두세우는 반응이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셔츠 단추 두세 개는 기본으로 풀어 헤치던 품행 단정하지 못했던 과거의 제 탓 같았다.
‘그래. 이건 다 내 탓이지, 내 탓이야…….’
현서의 반응 하나 보겠다고 평소 그렇게 몸을 써 댔으니, 반복될수록 제 몸에 익숙해진 현서가 대범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니까, 어쩜 그 관계가 현서의 행동을 더 느슨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또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긴, 푸른 별에선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몸을 섞는 일은 흔한 경우라고 했었지…….’
올해 초, 후작성에 새로 들어온 푸른별 출신의 부주방장에게 푸른별의 문화를 배우며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는 현서가 살던 나라와 가까운 인접국 출신이라고 했는데, 그가 살던 국가는 서로 마음을 주는 행위가 더 무겁고 부담으로 느껴져서 주로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곳도 그렇게 치면 다를 바가 없긴 하지만…….’
물론 루아인에서도 그런 가벼운 만남은 꽤 흔한 편이었고, 사교 활동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단지 카르젠이나 체스터나 크리시나 리엔 등 주변 친우들이 전부 그런 쪽으로 전혀 관심이 없어 각기 금욕 생활을 했을 뿐…….
‘현서는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서만 생활해서 누굴 만난 적이 없다고 했었으니…….’
아마 현서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허벅지의 묵직함을 느끼고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을 보면, 어쩜 이 방면으로 아예 지식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워낙 순진한 사람이다 보니, 저와 결혼을 하더라도 부부 관계라든가 그런 부분은 상상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순진한 제 약혼자를 생각하던 카르젠은 괜히 심란해져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현서가 살던 곳은 동성혼이 불가능한 국가라고 했으니, 남자끼리도 부부 관계를 한다는 걸 들으면 놀라거나 부담 가질 수도 있어. 일단…… 이건 나중에 대화로 시도해 보자. 어차피 결혼은 여름에나 할 거니 벌써부터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푸른 별에서 온갖 BL소설과 로맨스 소설을 섭렵한 제 약혼자의 이력을 전혀 모르는 카르젠은 그저 순진한 약혼자를 저가 홀라당 채 간 것 같다는 죄책감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순진한 약혼자가 아리스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도 모르고…….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어디서 읽었던 글인지, 실제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인지, 제 기억의 왜곡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현서는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김현서 본인은 그랬다. 뭐든지 잘 순응하는 편이라 그런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이 슬픔에 가까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곧 흐려지고, 순응하고, 이별을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너무 슬퍼서, 헤어짐이 아쉬워서 현서는 제 가슴을 도닥이며 옅게 웃었다.
지난가을부터 봄인 지금까지 함께 했던 존재를, 제 몸에 줄곧 품었던 이비를 바다로 보내 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슬펐다. 지금 제 곁엔 저와 함께 하는 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별이 그 자체가 그저 아쉬웠다.
‘이비야, 나 진짜 욕심쟁이지?’
두근두근- 위로가 분명한 고동이 울렸다. 잠시 떨어져 있을 뿐, 영영 이별하는 것이 아니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도닥임이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이제 앞으로 걸어가라는 격려의 고동이 이어졌다. 이비의 격려에 고개 든 현서는 제게 손을 내민 인어왕 에이디아를 바라봤다.
에이디아는 현우가 후작성 본관과 서관 사이 정원을 밀어 버리고 만든 작은 바다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현서가 자신의 본체를 보고 겁먹을까 봐 하반신은 물에 담근 채 두 사람이 직접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디아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린 현서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발끝에 닿을 듯 말 듯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이곳은 거대한 호수처럼 보이지만, 공간 분리 마법으로 가져온 진짜 바다였다.
“후우…….”
괜스레 손에서 땀이 나고 혀가 바짝 말랐다. 곁에서 긴장해 축 늘어져 바들바들 떠는 토끼 귀를 지켜보던 카르젠이 맞잡은 손을 살포시 들어 현서의 손등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현서야, 천천히 가자. 괜찮아. 수심이 깊어도 에이디아 님께서 지켜 주실 거야.”
그 말에 현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남아있는 미련을 털어 내기 위해 제 안에서 고동치는 이비에게 말했다.
‘이비야…… 최대한 빨리 나 보러 놀러 와야 해. 알았지?’
꼭 그러겠다는 약속의 고동이 울렸다. 그럼에도 현서는 제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이 감정을 도저히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이비와 지난가을부터 봄인 지금까지 거의 반년을 함께하긴 했지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미련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이비를 제 영혼의 반쪽 현아처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게 이비가 어떤 존재든 보내 줄 때가 됐다는 걸 인정한 현서가 심호흡하며 카르젠과 맞잡은 손에 살포시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현서는 제 가슴의 울림이 향한 방향에 에이디아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후우…….” 심호흡한 후, 천천히 바다에 발을 담갔다. 양쪽 발을 전부 담그자 카르젠 역시 함께 보폭을 맞추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발목을 간질이던 바닷물은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갈 때마다 종아리, 무릎, 허벅지로 금세 차올랐다. 현서는 제 가슴 부근까지 바닷물이 차오른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청량감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비가 선물해 준 자신의 작은 몸에 바다를 잔뜩 머금은 기분이었다. 에이디아는 천천히, 하지만 곧바로 제 앞까지 다가온 현서와 카르젠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 네 덕분에 칼리아르의 규칙을 거스르고 내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고맙구나.”
현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끄덕일 뿐이었다. 이비의 고동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에이디아는 현서가 놀라지 않게 자신의 손을 천천히 현서의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거라. 아무 느낌도 없을 거란다.”
“네.”
“그래. 이제 나의 아이를 바다로, 내 품으로 돌려보내다오.”
그의 나지막한 부탁에 끄덕인 현서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에이디아의 신력이 가득한 맑은 바닷물에 잠긴 가슴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물에 막 풀어진 물감처럼 흘러나왔다.
현서는 자신의 가슴과 에이디아의 손바닥 사이에서 흘러넘치는 이비의 생명을 느끼며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리곤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이비가 기뻐하고 있었다. 바다로 돌아와 자신의 부모를 만난 이비가 행복해하고 있었다.
이비의 고동을 확인한 에이디아는 현서의 가슴에서 빠져나온 빛무리가 만들어 낸 알을 소중하게 감싸 잡고 해사하게 웃었다. 반짝이는 알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고동 소리에 현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이비의 고동은 파도를 닮아 있었다.
“이비야…… 우리 나중에 또 보자.”
현서는 에이디아가 소중하게 쥔 반짝이는 알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별이 아닌 재회를 기약한 인사를 들은 이비는 저 대신 바다에게 부탁해 현서를 꼬옥 안아 주었다.
***
‘생각보다 견딜 만하네.’
지금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정의한 현서는 마카롱을 하나 더 먹었다. 이비를 보낼 때만 해도 슬퍼서,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견딜 만했다.
아깐 서운함에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이비와 에이디아를 배웅하고 돌아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카르젠과 차를 마시고 있으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 우울할 일이 뭐가 있어! 다시 볼 수 있잖아!’
이비가 알에서 깨어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 덕분에 마냥 슬프진 않았다. 그저 조금, 아니, 많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혹시 지금 슈가 하이 상태라 멀쩡하게 느껴지는 건가? 그럼 더 먹어 둬야겠네. 오늘 난 슬프니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정의해 놓고, 갑자기 저 좋을 대로 기분을 바꾼 현서가 마카롱을 하나 더 집었다. 가장 좋아하는 레몬 마카롱이었다.
현서의 상실을 채워 주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콜린이 오늘만 소가주의 간식 제한을 해제해 준 덕분에, 현서는 하루에 10개로 제한됐던 마카롱을 무제한으로 흡입 중이었다.
레몬 마카롱만 벌써 10개째 먹은 현서는 이번엔 이름 모를 과일 향이 나는 마카롱을 입에 쏙 넣었다. 쓸쓸함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기분이었다.
색은 노란데, 레몬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마카롱을 집은 현서는 맞은편에 앉은 카르젠의 찻잔을 봤다. 그는 평소 현우와 함께 즐겨 마시던 커피가 아니라 현서와 똑같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르젠, 오늘은 커피 안 마셔요?”
“……!”
마침 입가에 찻잔을 기울이던 카르젠의 손이 흠칫 떨렸다. 현서의 귀가 움찔거리자 그는 침착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 두며 미소 지었다.
“응. 오늘은 현서가 좋아하는 차를 함께 마시고 싶었어.”
“……!!!”
그런 이유였다니!
대번 기분이 좋아져 토끼 귀는 쫑긋 섰고, 꼬리는 바르르 떨렸다. 현서는 제 의지와 관계없이 자꾸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카르젠이 커피 마시고 싶을 때 말해요! 나도 같이 마셔 볼게요!”
현서에게 커피는 아직 그저 떫고, 쓰고, 마시고 나면 입 안에 신맛이 남아 별로였지만, 카르젠이 좋아하는 음료라고 생각하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르젠은 현서가 느끼지 못할 만큼 짧게 멈칫했지만, 곧 고맙다고 대답하며 눈꼬리를 접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미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심에 현서가 커피 생각을 잊을 정도로,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환하게 웃었다.
***
이제 막 노을 진 하늘 저편에서 별이 하나둘 노래하기 시작할 무렵.
후작 가문 기사단장의 요청으로 카르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밍 좋게 콜린이 현서의 방문을 두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능한 보좌관인 콜린이 현서가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지만.
“소가주님. 조금 전에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내용물은 개봉하지 않았고, 다른 마법 흔적이 없는지 검수만 했습니다.”
콜린이 내민 상자를 받아든 현서는 북부 프란제르 후작 가문의 날인을 확인하고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콜린. 이 은혜는 잊지 않고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목욕 시중을 들라 할까요?”
“아, 아니! 혼자 할게!”
“예. 그럼, 편안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 소가주님.”
늘 하는 인사인데, 어째 오늘따라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이 느껴졌다. 덕분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현서는 괜스레 엣헴. 작게 헛기침하고 끄덕였다.
‘타이밍 아주 나이스!’
콜린이 돌아가고 나서 속으로 쾌재를 부른 현서는 총총총 침대로 달려가 그대로 다이빙하듯 엎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프란제르 후작가 인장 봉인을 뜯자 고급스러운 상자와 그 위에 곱게 접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꺼낸 편지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깔끔하게 접힌 편지지를 펼치자 익숙한 아리스의 필체가 보였다.
~ * ~
나의 하나뿐인 귀염둥이 토끼 대자 현서에게.
통신수정 말고 편지로 안부를 전하는 건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니? 내 생각엔 필리스 전역에서 너보다 더 잘 지낼 사람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예의상 적어 본다.
나는 뭐 늘 똑같이 바쁘고, 적당히 잘 지내고,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단다.
북부는 올봄에 들어서만 벌써 두 번째 폭설이 내렸는데, 남부는 슬슬 따뜻한 바람이 불고 새싹이 움트는 시기겠구나.
혹시 또 눈이 보고 싶어지거나, 카르와 싸우거나, 네 형에게 반항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놀러 오렴. 현서 네가 사용할 방은 매일매일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단다.
아, 그리고 현서 네가 보내 준 귀여운 편지와 말린 꽃 장식은 잘 받았다.
남부 해안가에서만 피는 꽃이라니, 나도 이름만 들어 보고 실제 보는 건 처음이었단다.
작고 귀여운 것이 마치 현서 너를 보는 것 같구나.
보답으로 현서 네가 궁금해했던 에이로스 꽃 추출물로 만든 크림을 보내 주마.
에이로스 꽃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에이로스는 이곳 북부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만 피는 귀한 꽃이란다.
워낙 구하기 어렵고, 통증을 줄여 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 7할은 왕실에 납품하는 꽃이지.
네 몫의 크림은 지금 한창 만드는 중이니, 우선 미리 만들어 둔 거라도 보낸다.
아쉬운 대로 아껴 쓰고 있으렴. 더 만들면 바로 보내 주마.
그런데 현서 네가 이 크림을 요청하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고 대견하구나.
이 편지를 읽으며 사과 같은 얼굴로 귀를 파들파들 떨고 있을 네 볼을 콕콕 찔러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통탄할 뿐이란다.
오늘도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편지는 이만 줄여야겠구나.
카르와 케이 후작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부 전해 주렴.
- 네 형이 깨기 전에 이 크림이 편지가 도착하길 바라는 멋진 대모 아리스가. -
추신.
참! 크림은 방부제가 안 들어 있기 때문에, 사용 기한이 생각보다 길지 않단다.
개봉하면 직사광선을 피해 냉장되는 곳에 넣어 두고, 두 달 안에 다 사용하렴.
물론 그 전에 다 쓸 것 같다만…… :D
~ * ~
“…….”
편지에 적힌 것처럼 사과처럼 빨개진 현서는 입술을 앙다문 채 토끼 귀를 파들파들 떨며 편지를 봉투에 고이 넣었다.
민망함에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식히고 상자를 열자, 작고 예쁜 단지가 보였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후…… 침착해. 침착해.”
살짝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어 보니 은은한 향이 물씬 풍겼다. 안쪽 밀봉 덮개를 개봉하지 않았음에도 향이 좋은 걸 보니, 직접 사용했을 땐 훨씬……까지 생각하곤 단지를 협탁에 내려 둔 현서가 별안간 “끄아앙!” 괴성을 질렀다.
그리곤 귀와 꼬리털을 부풀린 채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더니, 혼자 다리를 팡팡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아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조금 발악했을 뿐인데 벌써 지친 몸으로 널브러진 현서는 쓸데없는 일에 체력을 쓰면 곤란하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곤 협탁을 흘긋거렸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어.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이야!’
물론 오늘만 날은 아니었지만, 현우의 예상 기상일이 대략 열흘 남은 시점인 지금. 형이 생각보다 일찍 깨어날 것 같다는 흰 양말의 언질을 간과할 수 없었다. 여기서 빨리 깬다면 그건 당장 오늘일 수도 있었다.
‘형은 항상 뭐든 빨리 습득했으니까…….’
이비를 보내고 나서 카르젠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현우가 깨어 있다면 어쩐지 그러기가 힘들 것 같았다. 결혼식은 여름으로 날을 잡았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그러니 역시 오늘이 제격이었다.
인생 역사적인 날을 오늘로 결정한 현서는 꼼질꼼질 기어가 협탁 위에 올려 둔 크림을 첫 번째 서랍에 넣고 닫았다. 그리곤 그대로 데구루루 굴러 옆으로 누운 채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노을이 잿빛을 띠며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바다 위로 잔뜩 몰린 구름이 보였다.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에 커튼이 흩날렸고, 가슴은 제 의지와 관계없이 마구 두근거렸다.
평소라면 이럴 때 긴장을 풀기 위해 이비와 대화했을 텐데, 철저히 혼자가 된 현서는 긴장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영락없이 음흉한 생각을 한 사람처럼 보여 수치스러웠지만, 어차피 혼자였으므로 괜히 목을 가다듬고 입욕제를 모아 둔 서랍을 열었다.
“후우…….”
서랍 저 구석에 체스터가 선물로 준 입욕제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체스터가 실실 웃으며 왕족이 합방 전에 사용하는 입욕제라고 설명해 흐린 눈으로 서랍 구석에 처박아 뒀었는데, 열 때마다 신경 쓰이는지라 그 존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입욕제가 든 병을 열고 안에 든 파우치 하나를 꺼내자 달콤한 냄새가 훅 끼쳤다.
“우와…… 이, 이게 무슨 향이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현서가 파우치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대체 무슨 형인지 몰라도 어마어마하게 좋은 향기였다. 살면서 저가 맡아 본 향기 중에 가장 달콤하고 산뜻하다는 평을 내릴 정도로 좋았다.
오후에 이비를 돌려보내느라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서 가볍게 목욕을 했지만, 더 박박 씻을 생각으로 욕조에 물을 받으며 입욕제 파우치를 퐁당- 떨어뜨렸다.
‘아… 향기 진짜 좋다… 나중에 체스터에게 답례…… 아냐! 괜히 티 날 것 같아! 으아아!’
눈앞에 그려 둔 듯이 체스터가 저를 보며 피식 웃는 표정이 떠올라 수치심이 밀려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한 것만으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을 가리고 몸을 좌우로 비틀며 낑낑댔다.
1분 정도 혼자 수치스러워하고 있으니 욕조에 물이 어느 정도 차올랐다. 걸친 옷을 전부 벗고 발부터 담근 현서는 토끼 귀와 꼬리를 감추고 천천히 욕조에 몸을 뉘였다.
‘하… 역시 목욕은 혼자 하는 게 최고야…….’
마사지나 피부 관리를 위해 사용인들이 목욕 시중을 들어 줄 때도 싫진 않았지만, 이렇게 혼자 멍때리며 부유하는 생각들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편이 더 좋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목을 젖히고 있으니,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흘긋 옆으로 돌리자 창문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비가 내리네…… 괜찮아. 비 오는 날 밤도 분위기 좋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조용한 것보다 적당한 소음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소음에 대해 생각하니 또 열이 오른 현서는 아예 전신을 물에 담갔다. 몇 초간 물속에 있다 나와 다시 욕조에 고개를 대고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 좋았다.
‘이론은 빠삭한데, 실전 경험은 아예 없어서 조금 걱정이네…… 카르젠도 그렇겠지? 만난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까.’
물론 교제한 사람이 없다는 게 100% 경험이 없다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카르젠은 아닐 것 같았다. 만약 그가 경험이 있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 약혼자의 사랑 충만한 눈빛을 받는 건 세상에 오직 저 하나뿐이었으니까.
‘후우… 저번에 그렇게까지 됐으면서, 전혀 손도 대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참는 거겠지…….’
카르젠이 도통 진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 처음엔 제 약혼자가 흔치 않게 성욕이 없는 타입인 걸까 싶었다. 하지만 현서는 지난번 집무실에서 그의 무릎에 앉아 있을 때, 제 엉덩이에 느껴진 불룩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뭐에 자극받고 그리 커졌는지 몰라 당황한 탓에 휘둥그레진 얼굴로 봤기 때문일까? 늘 차분했던 그가 허둥지둥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카르젠의 얼굴이 티 날 만큼 붉어지는 일은 흔치 않다 보니 멀뚱멀뚱 바라보면서도 신기했던 순간이었다.
‘카르젠 귀여웠는데…….’
항상 멋지기만 했던 그가 참 귀엽게 보인 순간이었다.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거기서 끝난 거라고, 너만의 귀염둥이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와 현아가 자주 말했었는데, 2회 차 생은 역시 카르젠과 살아야 할 것 같았다.
투둑 툭- 툭둑-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점차 거세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혼자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현서는 몸이 점점 뜨거워져 고개를 갸웃했다. 물 온도가 점점 오를 리도 없는데, 분명하게 열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욕조에서 일어난 현서는 오늘 밤 거사를 위해 카르젠을 어떻게 제 방으로 불러야 할까 고민하며 목욕 가운을 걸쳤다. 수도에 있을 땐 한 침대에서 잘만 잤으면서, 남부로 내려온 후엔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이 각방만 쓰는 게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형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가? 형이 그런 거로 눈치 줄 사람은 아닌데…… 처음부터 교제도 쿨하게 허락했고.’
점점 심해지는 열감에 열을 분출하고자 토끼 귀와 꼬리를 다시 현현한 현서는 침대 옆에 작은 테이블이 생긴 것을 보고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둥근 테이블 위엔 카르젠이 좋아하는 와인과 두 개의 잔, 그리고 한입에 먹기 편한 구성의 안주가 보였다.
심지어 테이블엔 작고 예쁜 향초도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방을 둘러보니 테이블뿐만이 아니라 현서의 침대 옆 협탁과 창가 테이블에도 놓여 있었다.
일순 카르젠이 제 계략(?)을 눈치챈 건가 당황했지만, 와인 잔 옆에 세워져 있는 작은 쪽지에 적힌 콜린의 필체를 확인하곤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명일 두 분의 아침 식사는 제가 직접 방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안주 옆 작은 접시의 알약은 근육통에 뛰어난 효과가 있는 몸살약입니다. 술과 마셔도 안전한 성분이니 미리 드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자작님께는 소가주님께서 찾으셨다고 전해 두겠습니다.>
쪽지만 보면 마치 몸살 때문에 몸이 안 좋아 쉬는 것처럼 적어 두었지만, 이 속뜻을 다 이해한 현서는 발을 버둥거리며 의외로 짓궂은 콜린의 이름을 읊조렸다.
보통 빙의물을 보면 주인공 커플이 거사 치른 다음 날엔 사용인들이 방 정리를 하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고 즐거워하는 장면이 꼭 나왔는데, 어째 저가 빙의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수치심이 밀려왔다.
“흠흠.”
새빨개진 얼굴로 끙끙대며 쪽지를 대충 접어 서랍에 넣은 현서는 아리스에게 받은 크림 단지를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까 목욕한 후로 계속 격하게 뛰고 열이 확확 오르고 있었지만, 저 단지를 보니 심장이 요동친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두근거렸다.
‘왜 이렇게 열이 나지?’
심장이 격하게 뛰어 피가 빨리 도는 탓인지 전신에 열이 심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가끔 열이 너무 심하면 피부가 간지럽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피부 겉이 아니라, 안쪽…… 그러니까 근육이나 어딘지 모를 곳이 저린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도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침대에 걸터앉아 카르젠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혼자 진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만 들어도 제 약혼자임을 눈치챈 현서가 벌떡 일어나 토토톳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고개를 쏙 내밀어 보니 저편에서 걸어오는 카르젠이 보였다. 오늘따라 카르젠이 걸친 잠옷이 유난히 몸에 붙는 것 같다는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킨 현서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카르젠은 무슨 일로 부른 거냐고 물으려다 멈칫했다. 방이…… 심상치 않았다. 일단 초가 켜져 있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후작성 내의 모든 곳에서 수정을 사용하는데, 굳이 초를 곳곳에 켜 둔 것도 그렇고 술을 마시지 않는 현서의 침대 옆에 덩그러니 놓인 와인도 매우 수상했다. 저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 라벨을 확인한 카르젠이 머뭇머뭇 문가에 서 있으니, 침대로 가려던 현서가 다시 토토톳 다가와 손목을 슥 잡아끌었다.
“카르젠, 오늘! 오늘 같이 자요!”
순간 창밖이 번쩍! 하더니 우르르릉 하고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듯한 천둥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침을 꼴깍 삼킨 카르젠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네. 남부에 온 후로 카르젠과 같이 못 자서 많이 쓸쓸했어요.”
“…아…… 그, 그래. 현서야… 그…….”
제 손목을 잡아끄는 손길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르젠은 현서가 혼자 술이라도 마신 걸까 싶어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현서야, 혹시 술 마셨어? 얼굴이 빨간데? 열도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말하며 문손잡이를 흘긋거리는 카르젠을 본 현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쩐지 속에서 불이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어지럽고, 마음이 조급해 손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안 마셨어요. 카르젠이랑 같이 마실 건데요? 그리고 목욕해서 열나는 거예요.”
“목욕 때문에 나는 열이 아닌 것……”
“괜찮으니까 빨리 와요.”
결국 카르젠은 현서의 미약한 힘에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 침대에 앉았다.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하게 허리를 펴고 앉은 약혼자를 바라보는 현서의 눈빛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뭐 그리 못마땅한지 입술도 삐죽 오리입이 된 상태였다.
“그, 알았어. 일단…… 일단 그럼 한잔할까?”
여기서 실수하면 오래갈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찬 카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꽤 많이. 갑자기 같이 자자는 이유는 몰라도, 이 방을 보고 확신하건대 잠만 자자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서가,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제 약혼자가 이런 걸 준비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지금 현서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얼굴은 벌겋고 무언가에 취한 듯이 보였는데 와인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현서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향을 맡은 카르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이 향은…….’
아는 향이었다. 왕실 기사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고급 미약의 향이 현서의 몸 전체에서 폴폴 나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 입욕제일 것이고…… 그 입욕제의 출처는 체스터가 분명했다. 앓는 소리를 삼켜 낸 카르젠은 조심스럽게 현서를 제 옆에 앉히고 물었다.
“혀, 현서야. 진정해. 오늘 혹시 입욕제 썼어?”
“네! 체스터 왕세자님이 준 거요!”
“그, 그래…… 목욕은 혹시 오래 했어?”
“쪼금요?”
확신했다. 조금이 아닐 것이다. 이미 현서의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원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오래 담그고 있었던 걸까, 그 입욕제라면 5분 이상 사용하면 안 되는데, 아무리 봐도…….
“목욕은…… 대략 몇 분 정도 했어?”
“……20분? 아니, 30분? 모르겠어요.”
당황해 눈을 크게 뜬 카르젠이 애써 표정 관리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현서야. 생각해보니 자기 전에 술은 안 좋으니까 잠부터 자자.”
“……같이 잘 거예요?”
“응. 같이 잘게.”
“그래요!”
같이 잔다는 말에 안심한 현서가 방긋 웃었다. 카르젠은 과하게 신난 상태인 현서를 먼저 눕히고 방 곳곳에서 은은하게 타오르는 초를 하나하나 껐다. 초에서도 달콤한 향이 나는 게, 딱 봐도 신혼부부를 위한 아이템 티가 폴폴 나서 괜히 머쓱해졌다.
‘현서가 준비한 것 같진 않고, 이런 조력을 해 줄 사람은 역시 콜린밖에 없겠지… 아니면 율리나…….’
용의자를 그 둘로 추정하며 침대로 돌아가자 또 번개가 쳤다. 창밖이 번쩍일 때마다 침대 위로 길게 드리워진 제 그림자가 마치 현서를 잡아먹으러 온 악마처럼 보였다.
조신하게 침대맡에 앉아 수정 램프를 끄려 손을 뻗은 카르젠은 그 옆에 놓인 작은 크림 단지를 알아보고 작게 침음하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하…… 미치겠군.’
평소에 마시지 않는 술을 병째로 준비하고, 향초와 왕족이나 쓰는 미약이 섞인 입욕제까지…… 아주 작정하고 준비한 것만 봐도 오늘 뭔가 하겠다는 현서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엉뚱한 이야기라도 들은 걸까?’
최근 사용인들 사이에서 묘한 이야기가 돈다는 건 카르젠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작인 현우가 부재중인지 오래인데도 약혼 관계인 둘이 전혀 진전이 없어 보였으니까.
현우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거면 몰라도, 굳이 부재중인 시기까지 자제를 하는 건 조금 의외네~ 하고 마는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현서가 들었다면 신경 쓰일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두르는 걸 보면 좋은 이유 같진 않고…….’
우선 반짝반짝 기대하는 얼굴로 누워 있는 현서의 옆에 천천히 누운 카르젠은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이불을 잘 덮어 주며 여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가급적 일찍 돌아올 테니, 저녁에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할까?”
“좋아요!”
해맑게 대답한 현서가 카르젠의 어깨를 밀었다. 당연히 현서의 힘으로 쓰러질 리가 없는 다부진 몸이건만, 어째 저항 없이 그대로 천장을 보고 눕게 된 카르젠은 제 몸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눕는 약혼자 때문에 몸을 펄떡였다.
“혀, 현서야……!”
“하… 하아… 카르젠… 후우… 가만히 있어 봐요. 하아…… 왜,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숨만 찬 게 아니라 눈도 완전히…… 그나마 좋게 말하면 퀭했고, 대놓고 말하자면 완전 맛이 가 있었다. 아무래도 장시간 미약에 몸을 담근 데다가 아마도 생의 첫 미약이었을 테니 그 효과가 더 대단했을 것이다.
우선 진정시키고 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분하게 다시 옆에 눕히려 했지만, 현서가 더 빨랐다. 몸을 벌떡 일으켜 카르젠의 탄탄한 복부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예쁘다.”
“!?”
“카르젠…… 진짜 예뻐!”
그렇게 말한 현서가 자신의 가운 앞섶을 벌리기 시작했다.
“……!!!”
거침없이 옷을 풀어 헤치려는 손길에 기함한 카르젠이 다급하게 현서의 가운을 콱! 여몄다. 어지간히도 강한 힘이었던지라 불만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현서가 카르젠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카르젠 잠깐만. 일단 놔 봐요. 이익, 아 손 좀…….”
제 가슴팍에서 바르르 떨며 옷을 여미고 있는 다부진 손을 잡아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낑낑대다 힘의 차이에 굴복한 현서가 울컥해 따지듯이 물었다.
“지금 그렇게 힘으로, 막, 막 강제로 제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나쁜 짓 하는 것 같잖아…… 그리고 지금 취했어. 체스터가 준 입욕제는 미약이 섞여 있어서 목욕 끝에 살짝 우려내고 바로 나와야 해. 욕조에 오래 있었으니 약에 취한 상태와 같아.”
“아, 진짜요? 그렇구나~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
납득한 현서가 끄덕이는 모습에 안도한 카르젠이 고개를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맞아. 지금 취했어. 그러니까 일단 옆에 누워, 현서야.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그런데 저 정신은 완전 말짱해요!”
“취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
“진짠데? 저 완전 이성적이에요! 지금 좀 심장이 뛰고 몸이 뜨겁긴 한데, 그건 입욕제 때문인 거고, 제 정신은 진짜 멀쩡하다구요. 내 말 안 믿어 주면 결혼해도 평생 각방 쓸 거야.”
“!!!”
갑자기 엄청난 협박을 당한 카르젠은 순간 말문이 막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현서는 그가 평소와 달리 당황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히죽 웃었다.
“왜 자꾸 재우려 해요? 취하긴 했지만, 정신은 진짜 멀쩡해요. 그리고 난 카르젠이랑 조금 더 이것저것 하고 싶다구요.”
“……그, 그래?”
“네. 이것저것. 데이트도 좋지만, 이제 겨우 둘이 있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연인다운 것도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붙들고 있던 카르젠의 손목을 놓고, 아래로 손을 내린 현서가 이번엔 카르젠의 잠옷 허리끈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카르젠은 조금 전과 달리 제 옷을 벗기는 손길만큼은 강하게 거부할 수 없어 침을 꼴깍 삼켰다. 현서의 새하얀 손이 사락사락 끈을 풀어내더니, 앞섶을 벌리고 제 쇄골 부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을 때도 카르젠의 손은 현서의 가운을 여며 쥐고 있었다.
“후우우…… 카르젠 상의 찢어지는 장면 묘사 있는 화마다 흉부가 기가 막혀 베댓 달렸던 거 알아요? 역시 카르젠 가슴이 최고야.”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현서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미약에 취한 현서는 참 대담하고 귀여웠다. 그리고,
“……응. 당연히 맘에 들죠. 아무도 안 줘. 내 거야. 누가 넘보면 혼내 줄 거야.”
부리부리한 눈빛과 타오르는 독점욕도 숨기지 않았다. 잠시간 제 약혼자와 눈을 맞춘 카르젠은 필사적으로 여미고 있던 앞섶에서 손을 떼고 작은 얼굴을 보듬어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난 현서 거야. 평생.”
“…….”
내내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이 동그랗게 떠진 것도, 기분 좋아 히죽 웃으려는 걸 참느라 씰룩거리는 작은 입술도 귀여웠다. 감출 수 없는 토끼 귀 털이 펑 부푼 것도 전부 다.
직전까진 정말로 만취한 사람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은 또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게, 어쩜 정말 정신이 맑은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현서야. 정말 취한 게 아냐?”
“정신은 완전 멀쩡하다니까요.”
“그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마음 같아선 카르젠도 지금 당장 저 새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살 내음을 맡고 싶었다.
놀라 흠칫 떨면 안심하라는 듯이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핥고, 점점 올라가 볼에 키스하고, 자연스럽게 벌어진 잇새로 나온 혀를 마음껏 물고 빨고 싶었다. 그 이상의 일도.
그래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역시 미약에 취한 게 영 신경 쓰였다. 아직 현우가 깰 때까진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차라리 나중에 차근차근 준비해서 제대로 된 첫 동침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을 때……
“그리고 제가 서두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응?”
“형이 생각보다 일찍 깰 것 같대요. 흰 양말 님이 말씀해 주신 거니까, 확실해요. 오늘 깰지도 몰라요.”
“……!?”
생각도 못 한 보고였다. 크게 당황한 탓인지 어째 입이 더 바짝 말랐다. 차라리 와인을 깠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상태에서 현서가 와인을 마신다면 더 취할 것 같아 그러기도 어려웠다.
“그……렇구나. 형님께서…… 곧 깨시는구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카르젠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본 현서가 은근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니까… 음…… 아 취해도 이건 쑥스럽네요. 음음… 하여간에 우린 둘 다 건장한 성인이고…….”
한쪽만 건장하지만, 카르젠은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이미 결혼을 앞두고 있고… 결혼식도 멀지 않았고…….”
그러니까 잘 참다가 지금 와서 폭주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서로 좋아하잖아요. 건장한 성인 남남이 서로 좋아하는데, 뽀뽀만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
대체 누구에게 뭘 들은 걸까? 아니면 어디서 뭘 본 걸까?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현서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초조한 기색 없이 지금껏 내내 보듬던 카르젠의 가슴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려 잘 짜인 복근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물론 결혼식까지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잠시 말을 멈춘 현서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 반응에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현서의 볼을 연신 보듬었다. 현서는 카르젠의 커다란 손에 볼을 비비며 눈꺼풀을 살포시 내리감으며 남은 말을 뱉었다.
“카르젠이 싫은 게 아니라면 오늘 밤은 조금 다른 형태로 같이 보내고 싶어요.”
“…….”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못 해 본 게 해 보고 싶었어요. 가급적이면 형이 깨기 전에.”
“…….”
“참고로 이비를 보내고 나면 이러려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니까, 제가 취해서 급발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솔직한 고백에 연신 볼을 보듬어 주던 손길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작은 입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현서는 제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카르젠의 엄지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 아프게 문 것도 아닌데 흠칫 떤 카르젠의 흉부가 크게 부풀었다. 매만지던 복근 역시 힘이 들어가 더 단단하게 굳었다.
현서는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약혼자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순간, 현서는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유교 사상 없는 세상의 유교맨 약혼자가 정신만큼은 멀쩡하다는 제 주장을 믿게 된 것 같아 흡족했다.
입을 맞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르젠이 입을 벌렸다. 그리곤 현서의 작은 입술 새로 제 혀를 부드럽게 침범시켜 천천히 작은 혀를 찾아 핥았다. 놀라지 않게, 느릿하게 혀를 문질러 주듯 천천히 섞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은 옷을 벗기느라 굉장히 바빴다.
가운만 걸친 저와 달리 상하의를 다 갖춰 입고 온 카르젠이 옷을 전부 벗는 내내 키스하던 현서는 숨이 차다는 핑계로 입술을 떼고 실눈으로 시선을 내렸다.
“…흡……!”
눈앞의 아름다운 몸을 보고 감탄을 뱉으려던 현서가 일순 숨을 삼키더니, 허옇게 질린 얼굴로 카르젠의 고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서가 왜 놀랐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카르젠이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시야를 밝혔다.
“뭘 그리 놀라. 이미 몇 번 봤으면서.”
“아니, 그렇긴 한데, 이, 이게 이렇게 된 건 처음 보잖아요…….”
미약이고 뭐고 취기가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원래도 맨정신이었지만, 정말로 정신이 맑아진 현서가 침을 꼴깍 삼켰다.
‘와…… 거의 어린애 팔뚝만 한데? 진짜 가능한 크기였네…….’
그간 대충 넘겨 봤던 숱한 소설의 꾸금 씬에서 나오는 표현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국적이나 종족이 전혀 다르다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말로…… 저건 정말로 어린아이 팔뚝과 견줄 수밖에 없는 크기였다.
“현서야. 오늘 모든 걸 다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겁먹지 마.”
“…….”
‘내가 겁먹었나?’
자문할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겁날 수밖에 없는 사이즈였다. 게다가 침착하게 달래는 어조와 달리, 카르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육중한 존재는 꺼떡이기까지 했다. 얼떨떨함에 침을 꼴깍 삼킨 현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응?”
“뭐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라는 뜻이에요.”
사실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카르젠이 알 리가 없으니 당당하게 덧붙인 현서가 용기를 내 양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얌전히 이끌려 내려온 그가 엎드려 몸을 포개며 현서의 이마에 츄- 키스했다. 그리곤 눈꺼풀과 코와 볼에도 쪽쪽쪽 소리 나게 키스하더니 입술을 장난스럽게 빨았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기색이 역력한 입맞춤이었다. 다행히 효과는 확실해서, 작게 소리 내 웃은 현서가 카르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저도 그의 볼에 입 맞췄다. 어차피 밤은 이제 막 시작됐으니, 조급할 것 없었다.
창밖의 빗줄기가 강해지고, 번개와 천둥이 몇 번 쳤는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지날 동안 그는 내내 현서의 볼과 입술에 연신 부드럽게 입 맞추고, 새하얀 몸을 보듬었다.
카르젠은 스스로 뱉은 말을 책임지려는 듯이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그 말은 비록 제 성기 끝이 젖어 들다 못해 프리컴을 뚝뚝 흘릴지언정 급하게 달려들지 않았다는 소리지, 입 맞추는 동안 손을 쉬었다는 건 아니었다.
현서도 그의 몸을 만지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카르젠이 거부했다. 조금이라도 조를라치면 키스하며 입을 막다시피 했고, 고개를 틀어 입술을 떼고 “나도, 나도 카르젠의 몸, 만질래요.” 하고 말하면, 몸을 굳히며 “다음에, 그건 다음에 해도 돼. 지금 현서가 만지면 못 참을 것 같아.”라고 속삭이며 도리질했다.
은근히 손을 내려 카르젠의 성기를 잡아 쥐려고 시도해 봤지만, 정말 자제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나중에 하자며 예쁜 얼굴로 애원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 수밖에 없었다.
‘카르젠이 내 손으로 절정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대로 그의 탄탄한 팔뚝이나, 가슴, 어깨, 목, 볼, 귀를 하염없이 어루만지던 현서는 섭섭해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었으니 나중에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카르젠은 현서가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민감한 것 같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팔뚝이나 가슴 부근을 부드럽게 만지는 것만으로도 몸을 굳히는 게 보기 좋았다. 저도 나름대로 카르젠의 몸을 더 집요하게 만지려던 찰나, 내내 입을 맞춰 대던 그가 이번엔 현서의 귀를 핥았다.
“히익!”
고작 볼에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인데, 볼이나 입술에 입 맞추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극이 컸다. 귓불을 깨물고 귓바퀴를 핥을 땐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었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직 현서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소름이었다. 말캉한 혀가 굴곡진 곳을 핥으며 내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몸이 흠칫 떨리고 단단한 팔뚝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카르젠은 현서의 귀를 물고 빠는 동시에 손은 쉬지 않고 예민해진 몸을 어루만졌다. 처음엔 부드럽게 가슴을 보듬다 열기가 몰려 꼿꼿해진 작은 유두를 문지르기도 했고, 엄지와 검지로 슬그머니 꼬집어 보기도 했다.
살면서 제 가슴을 자극해 본 적이 없던 현서의 잇새로 “흐으…….” 하고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기분이 좋다든가 그런 건 모르겠지만, 부드럽게 비비듯 꼬집을 때면 오싹한 것이 확실한 자극을 줬다.
손이 점점 더 내려가 이번엔 아까부터 카르젠 못지않게 기립해 프리컴을 줄줄 흘려 대는 성기를 잡아 쥐자 현서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검을 쥐는 손이라 그런지 굳은살이 많은 탓에 여린 살덩이를 비벼 대는 손길이 더 거칠게 느껴졌다.
“아… 아읏…….”
그만큼 자극이 커 절로 신음이 흘렀다. 현서의 신음을 들은 카르젠이 잠시 멈칫했지만, 싫어서 낸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파악하곤 다시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 현서가 작게 도리질하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아, 뭐야… 어떡하지… 벌써 나올 것 같아…….’
이 모든 행위가 처음인 탓에 잔뜩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이 몸이 원래 예민한 건지, 그가 만지자마자 사정감이 치밀어 당황스러웠다. 어처구니없는 심정과 별개로 그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입술이 절로 벌어지며 자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런데도 밀려오는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꽉 깨무니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현서야, 입술 깨물지 마. 상처 나겠어. 응?”
부탁하는 목소리가 퍽 애처롭게 들렸다. 물고 있던 입술을 놓은 현서가 팔을 뻗어 카르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기꺼이 현서에게 안겨 서로 볼을 비비고, 고개를 살짝 틀어 키스하고, 장난스럽게 입술을 쪽 빨았다. 키스하다 입술을 뗀 현서가 숨을 헐떡이며 파르르 떨자 어르고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현서야, 참지 마. 긴장 풀고. 응, 그래. 괜찮아. 내보내도 돼.”
“흐응, 읍… 읏…….”
현서는 제게 내내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저음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시야를 눈부시게 밝혀 주며 연신 키스를 퍼붓는 다정함도, 거친 손으로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만져 주는 상냥함도 전부 좋았다. 어느 하나 싫은 게 없었다. 다 좋았다.
“아…… 진짜, 나올 것 같아, 카르젠, 나, 나올 것 같아요……!”
“응. 전부 내보내. 내가 받아 줄게.”
밑에서 젖어 질척이는 마찰음에 속도가 더해졌다. 바들바들 떨던 가느다란 다리가 꼿꼿하게 굳더니 허리를 흠칫흠칫 떨기 시작했다.
“하, 읏, 아흑……!”
제대로 된 신음도 내지 못하는 몸이 짧게 경련하더니 이내 카르젠의 손에 점성 짙은 정액을 울컥울컥 쏟아 내기 시작했다.
현서가 제대로 사정한 것을 확인한 카르젠은 기쁘게 웃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만 만지라며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현서에게 응, 알았어.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손은 움직였다.
“아, 안 돼, 그만……! 아, 아앗!”
막 사정해 예민하게 달아오른 살덩이를 계속 비비는 손길이 야속했다. 멈춰 달라고 해도 대답만 잘하지 손은 여전히 아직 열을 다 분출하지 못한 성기를 잡아 비벼 댔다.
그만 만지라고 끙끙대며 도리질하던 현서는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 복수를 다짐했다. 꼭, 꼭 다음에 내 마음대로 하는 날엔 카르젠이 어떤 애원을 해도 절대 봐주지 않겠다고. 아주 묶어 놓고 여기저기 제 마음대로 만질 거라고 다짐하다 보니 연달아 두 번째 사정감이 밀려왔다.
“아, 마, 말도 안, 돼. 아… 흡……!”
말을 다 뱉기도 전, 현서는 또 다시 카르젠의 손에 비벼지는 상태로 정액을 울컥울컥 흘려 댔다. 사람이 원래 사정하자마자 또 사정할 수 있는 걸까?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조금의 텀도 두지 않고 연달아 내리 두 번을 사정한 덕분에 허벅지가 달달 떨리고 호흡이 달렸다. 재차 가까운 미래에 복수를 다짐하며 늘어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수건으로 현서의 배와 제 손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낸 카르젠이 협탁 위에 단지를 집어 들었다.
현서는 반쯤 풀린 눈으로 그의 손을 따라 눈동자만 굴렸다. 뚜껑을 열고, 내부 마개를 대충 비틀어 날려 버린 카르젠은 진한 에이로스 꽃향기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정말 구하기 힘든 건데…….”
“으응… 아리스에게… 하아, 부탁했어요…….”
“그래. 아리스가 우리 덕분에 꽤 웃었겠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한 말에 현서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눈부셨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제 연인의 웃음은 눈부셨다.
저 아름다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나중에 형이 깨어나면 특수한 선글라스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회음부에 카르젠의 손길이 닿았다.
“!”
“현서야,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누워. 다리 벌리고 힘 빼.”
“으응…….”
베개에 옆얼굴을 파묻은 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제 안으로 침범하려는 손가락에 절로 다리가 움츠러들고 온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천천히 주변 잔주름을 문지르며 입구를 두드리듯 꾹꾹 누르자 토끼 귀가 파르르 떨렸다.
아주 천천히, 현서의 몸이 놀라지 않게 계속 주변을 빙글빙글 돌리듯 만지던 손가락 하나가 허벅지 근육이 살짝 풀어진 순간 느릿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흑……!”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이물감이 엄청났다. 이거, 괜찮을까 싶었는데 크림 덕분인지 처음 파고든 순간을 제외하면 통증은 없었다. 베개에 반쯤 파묻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걱정스러운 눈빛이 고스란히 보였다.
“괜찮아? 혹시 아팠어?”
“아, 아뇨… 아플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 그럼, 천천히 할게. 힘들겠지만 최대한 힘을 빼.”
대답 대신 끄덕인 현서가 숨을 얕게 쉬며 몸에 힘을 풀자,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으니 카르젠의 손가락 하나가 끝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헉……!”
생경한 기분이었다.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카르젠과 단둘이 나누는 이 시간이 좋아서, 어서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확실히 아프지 않으니까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크림이 좋긴 좋은지, 카르젠이 손가락을 안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듯 움직여도 버틸 만했다. 이어 잠시 빠져나간 손가락에 크림을 조금 더 바르더니 두 개를 삽입했을 때에도 압박감에 윽 소리가 나왔지만 참을 만했다.
새삼 카르젠의 손가락이 얼마나 길고 굵은지 실감한 현서가 작게 신음하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조급하지 않게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내부를 탐색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던 카르젠은 현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보기가 민망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안으로 삽입해 살살 빙글빙글 돌리며 내벽을 이완시키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뱃가죽 쪽으로 굽히며 위쪽 방향을 꾹꾹 문지르기 시작했다.
현서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풀어 주려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일순 몸이 절로 흠칫할 만큼 자극이 큰 지점을 손가락이 꾹 누르고 스친 순간, 저도 모르게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아, 읏……! 카, 카르젠… 거기… 바, 방금 거기…….”
“어디? 여기?”
어째 장난스러운 말투 같은데, 구분할 여력이 없는 현서는 자꾸 엉뚱한 곳을 헤집는 손가락이 얄미워 도리질하며 끙끙댔다.
방금 거기, 만지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아니, 거기 아닌데… 거기 말고요… 카르젠, 아 거기 아냐, 아… 아아… 응, 거기……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게 육성으로 나온 말인지, 아니면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뱉지 못한 말인지 구분이 안 됐다.
미약의 효과가 이제야 도는 건 아닐 텐데, 갑자기 어지럽고 붕 뜬 기분이었다. 그만큼 흥분한 걸지도 몰랐다.
“아… 우읏… 거, 거기 말고…….”
내내 애타게 신음하던 현서는 저 손가락이 원하는 지점을 만져 주지 않자 스스로 허리를 살살 흔들어 댔다. 가느다란 허리를 들썩이며 끙끙 신음하는 현서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르젠은 퍼뜩 정신 차리곤 도리질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현서가 좋아하는, 내벽에 도톰하게 올라온 볼록한 지점을 두어 번 더 문지른 후, 손가락을 다 끄집어내니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들렸다. 저 작은 숨소리 하나하나가 그저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진 카르젠은 단지에서 크림을 조금 더 덜어 내며 말했다.
“현서야. 세 개로 늘려 볼게.”
“흐으… 좋아요…….”
고통이 없어서인지 뭐든 다 좋다고 대답하며 늘어지는 모습도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고통이 없다고 해서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기에, 카르젠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손가락 세 개를 삽입했다.
“헉……!”
“긴장하지 마. 괜찮아.”
두 개도 압박이 심했는데, 세 개가 들어가자 손가락을 끊어 먹겠다 싶을 만큼 내벽이 조여들었다.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현서가 좋아했던 지점을 비벼 주고, 빙글빙글 돌리듯 움직이다 앞뒤로 왕복할 때마다 안에서 녹아내린 크림 때문에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요란했다.
“하… 으응… 아, 응, 거기… 거기 기분 조하아…….”
“다행이다. 현서가 좋아하는 부분을 바로 찾을 수 있어서.”
카르젠이 이전에 혼자 공부했을 때, 찾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고 했는데 현서가 느끼는 지점을 확실하게 찾아 진심으로 안도했다. 제대로 찾은 걸 증명하듯 현서의 성기가 다시 빳빳하게 섰다.
카르젠은 앞쪽도 만져 주려다 손을 거두었다. 지금 여기서 현서가 또 사정하면 그대로 뻗을 확률이 컸다. 사실 지금도 벌써 눈이 풀린 걸 보니 기절할 것 같은데 억지로 버티는 게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안을 넓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카르젠의 허리에 슬그머니 다리를 두른 현서가 그대로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겼다.
“!”
놀라 손짓을 멈춘 카르젠이 눈을 맞추려 했지만, 현서의 시선은 제 얼굴이 아닌 하체에 고정되어있었다. 카르젠은 볼썽사납게 시퍼런 핏줄이 돋아나 프리컴을 뚝 뚝 흘리는 제 성기를 보는 저 시선에 움찔 몸을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현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지나가다 케이크 가게를 발견한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맛있는 것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당황한 카르젠이 머뭇머뭇 손가락을 스윽 뽑아내자 다리를 바르르 떤 현사가 숨을 얕게 뱉으며 말했다.
“카르젠…… 이제, 이제 넣어도 될 것 같아요.”
안 된다. 아직 손가락 세 개……
“빨리…… 네?”
“…….”
안 되는데… 아직 무리일 텐데…… 육성으로 뱉어지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카르젠이 망설이자 현서는 슬그머니 제 다리로 그의 탄탄한 옆구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크림 덕분에 하나도 안 아프니까, 이제 카르젠이랑 같이 기분 좋아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현서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
그리고 카르젠은, 일순 제 안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뚜둑- 하고 끊어진 것을 느꼈다.
‘헉, 카르젠 방금…… 눈이 살짝 맛이 갔던 것 같은데!?’
현서는 카르젠의 옆구리를 쓸어내리던 다리를 은근히 떨어뜨리며 조심스레 그의 눈을 살폈다. 바로 직전, 분명 눈빛이 확 바뀌는 걸 봤는데, 지금은 또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흥분할 법한 상황에서 광분하는 놈보다 차분하게 구는 놈이 제일 무서운 법이라는 현아의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괜찮겠지?’
잠깐 고삐 풀린다 해도 좀 고생하고 말겠지, 설마 죽기야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동안, 카르젠은 크림을 한껏 떠 제 거대한 성기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행위를 응시하던 현서는 굵은 핏줄이 돋아 있는 저 거대한 살덩이가 징그럽고 무섭게 보이긴커녕, 참 곧고 색도 예쁘다는 감상에 젖어 있었다. 정말이지 카르젠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크림빨 덕분에 두려움을 상실한 현서는 그가 손가락으로 열심히 풀어 준 곳에 귀두를 맞추고 망설이자 슬그머니 또 옆구리를 쓸었다. 그리곤 다리를 허리에 휘감아 꾹 제게 밀착시키듯 당겼다.
고작 자신의 다리에 힘을 준다고 끌려올 카르젠이 아니었지만, 현서는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단단한 팔뚝을 쓰다듬어 주었다. 복근에 힘이 팍 들어간 카르젠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후우…… 현서야.”
“네에?”
왜 이리 뜸 들이냐고, 여기서 더 망설일 게 뭐 있냐고 말하려던 현서가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보자, 카르젠이 제법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힘들거나, 괴롭거나, 못 견디겠으면…… 꼭 말해.”
“당연하죠. 나 엄살 심한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카르젠이 너무 진지하게 말한 탓에 현서는 대충 농담을 섞어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리를 더 꼬아 당겼다. 아직 그와 제 몸의 간격이 꽤 벌어져 있었지만, 뭉툭하게 닿은 귀두가 입구를 꾹 누르며 진입을 시도했다.
“흣…….”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파고들었으면 좋겠는데, 신중을 기한 탓에 오히려 부피에 대한 압박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천천히 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빨리 넣으라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와중에, 작게 끙끙대던 카르젠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저 찌푸린 얼굴을 본 현서는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며 흠칫 몸을 떨었고, 그 순간 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구가 조금 풀어지며 꾹 누르고 있던 뭉툭하고 굵은 선단이 대번 파고들었다.
‘헉……!’
“큭……!”
“……!!!”
헉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부피감이 현서의 몸을 꿰뚫었다. 작은 입술이 절로 벌어지고 혀가 달달 떨렸지만, 낼 수 있는 소리가 없었다.
“아윽… 흐읏……!”
배 속이 전부 다 뚫린 것 같은 통증에 몸이 절로 떨렸다. 숨을 헐떡이며 이 믿을 수 없는 부피감에 참았던 숨을 겨우 뱉어 낸 현서는 제 엉덩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기함을 했다.
‘대, 대체… 이게 뭐지……?’
크림 덕분에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지만, 가히 경악할 만한 수준의 고통이었다. 순간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한 통증에 충격받은 탓인지 머리가 얼얼했다.
카르젠은 두 사람의 접합부를 보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절반보다 조금 덜 삽입된 상황, 다행히 피는 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벽이 그 어떤 틈도 없이 쫙 붙을 만큼 빠듯해 압박이 심했다.
“크읏…….”
현서의 안이 너무 좁아서 제 성기가 이대로 끊어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조임이었다. 작게 신음을 뱉은 카르젠이 고통에 미간을 찌푸린 채 조심스레 현서를 살폈다. 현서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제 하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우…… 현서야, 괜찮아? 아파?”
“아! 자, 잠깐만! 아윽……! 괘, 괜찮긴 한데, 잠깐, 아직 움직이지 말아 봐요.”
현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며 일단 기다려 달라고 했다. 크림 덕분에 고통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팠다. 문제는 여기서 저가 아프다고 하면 카르젠이 겨우 넣은 걸 뺄 것 같은데, 그럼 다시 넣을 엄두가 안 날 것 같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크림이 스며 고통을 완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고 판단 내린 현서가 힘겹게 대답하자, 카르젠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일부러 아프지 않다고 하는 건지 가늠하려는 듯한 표정에 현서가 숨을 헐떡이며 양팔을 뻗었다.
“카, 카르젠… 일단… 일단 나 좀, 어흑, 나 좀 안아 줘요…….”
“응.”
카르젠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몸을 낮추자 접합부 역시 밀착되며 현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일순 그의 몸이 굳었지만, 현서가 끙끙대는 와중에도 목을 둘러 안자 현서의 위로 상체만 바짝 붙여 몸을 마주 안아 주었다. 현서는 카르젠의 품에 안겨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하… 카르젠…….”
“응.”
“카르젠… 아으읏…….”
“응. 현서야.”
현서는 연신 카르젠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귓가에 키스했다. 카르젠이 고개를 더 기울여 주자 그의 뾰족한 귀를 살짝 입술로 깨물고 쪽쪽 뽀뽀한 현서가 호흡을 얕게 내쉬며 속삭였다.
“천천히…… 진짜 천천히 움직여 주세요.”
그 말에 카르젠이 고개를 살짝 들어 현서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히 버거워 보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가 걱정한 것만큼 괴로워 보이진 않았다. 정말 괜찮을까 재고 있자니, 제 얼굴을 간질이는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긴 현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움직여 봐요… 후우…… 크림 덕분인지 생각보다 견딜 만해요.”
반은 거짓말이었다. 사실 크림 덕분에 꾸역꾸역 버티는 것뿐, 이러다 잘못하면 죽겠는데?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미 삽입은 했고, 여기서 빼면 다시 할 엄두가 안 나니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익숙해지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현서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대신 천천히 해요. 알았죠?”
“응…….”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과 첫날밤을 실패해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익숙해지는 게 낫겠지.’
그렇게 판단한 현서가 카르젠의 목을 더 꽉 당겨 안았다. 카르젠 역시 한 손은 현서의 등 아래로 넣어 안아 주며 몸을 지탱했고, 다른 손으로 현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볼에 키스했다. 그리곤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움직여 볼게.”
“으응…….”
카르젠의 허리가 천천히 뒤로 빠지더니, 다시 가까이 밀착하기 시작했다. 크림을 아낌없이 바른 덕에 부가적인 진입은 어렵지 않았다. 느릿하게 절반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만 삽입하자 현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아… 흐읏…….”
힘들어하는 현서의 볼과 입술에 키스해 주며 다시 허리를 뒤로 무르자 제 허벅지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다리가 달달 떠는 게 느껴졌다.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버겁고 힘들 것이 분명했지만, 카르젠 역시 멈추고 싶지 않았다. 현서가 원하는 만큼 저도 둘이 하나가 되는 걸 원하고 있었으니까.
최대한 느릿하게 삽입하며 현서의 얼굴 여기저기에 연신 입 맞추자, 끙끙 앓는 소리에 조금씩 가느다란 비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서 흘러나오는 소리라기보단, 단순히 힘겨워서 나오는 신음에 가깝다는 걸 눈치챈 카르젠이 잠시 허리를 멈추고 현서의 볼을 보듬었다.
“현서야… 하아… 나의 현서…….”
부드럽고도 달콤한 목소리가 제 사랑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이가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다보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도톰한 입술도, 분명 좀 전까진 제 목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어느새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이 작고 요망한 손도 전부 다 좋았다.
카르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현서가 혀를 내밀어 왔다. 자신의 미소 때문에 눈부신데도, 함께 눈을 맞추고 싶어서 고집스레 실눈을 뜬 탓에 저런 귀여운 얼굴이 되는 것도 좋았다.
긴 키스가 이어지며 카르젠의 허리가 다시 움직였다. 맞물린 곳은 여전히 뻑뻑하고 진입이 힘들 정도로 좁았지만,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허리 짓 하자 입술 새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아, 아읏… 카, 카르제엔… 흐응… 읏… 읍…….”
카르젠은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추고, 아까부터 내내 바르르 떠는 허벅지를 보듬어 주며 안심시키고, 조금씩 저를 받아들이는 게 수월해진다고 느껴졌을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절반 정도 삽입을 시도했다. 그러자 아까 손가락 끝에 닿았던 도톰한 부분에 귀두가 닿았다.
“흐앗……!”
“……!”
일순 흠칫 떨린 현서의 다리가 카르젠의 옆구리를 조였다 풀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에 카르젠이 멈칫하자 옆구리를 압박한 다리가 파들파들 더 크게 떨기 시작했다. 제 가슴을 짚은 손과 복근을 어루만지던 손도 움직임을 멈췄다.
내내 비벼 대 젖은 입술을 떼고 지그시 내려다보니 충격받은 얼굴의 현서가 보였다. 카르젠은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허리를 뒤로 쑥 물렀다. 거의 귀두까지 빠져나가기 직전, 앓는 소리를 흘리는 젖은 입술과 잘게 떨리는 눈꺼풀을 바라보며 허리를 다시 밀착했다. 방금 삽입한 것보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자 현서가 느꼈던 지점을 또 귀두가 압박하며 쓸고 지나갔다.
“아……! 아, 거, 거기… 거기, 흣…… 아!!!”
“…….”
카르젠은 홀린 듯이 조금 멍한 얼굴로 현서를 내려다보다 이내 정신 차리고 허리를 급하게 뒤로 물렸다. 그리곤 이번엔 조금 빠른 속도로 깊이 진입했다. 역시나 좋아하는 곳을 스치자 현서의 잇새로 비음 섞인 짙은 숨이 새어 나왔다.
“아, 카르젠… 거기, 으응…….”
그 말에 얕게 움직이던 허리 짓이 조금씩 과감해졌다. 거칠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굳이 현서가 잘 느끼는 지점을 찾아 박을 필요도 없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곳을 뿌듯하게 채운 덕분에 움직이기만 하면 알아서 내벽 전체를 다 압박하고 비벼 댔으니, 전신이 오싹해질 만큼 과한 쾌감이 몸을 자극했다.
“아흑, 어, 어떡해, 카, 카르제엔, 아, 나, 나… 아, 또, 또……!”
말이 다 나오지 않았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한 카르젠이 입술을 포개며 웃었다. 현서는 카르젠의 혀를 쪽쪽 빨며 팔뚝을 꽉 잡았다. 허리 짓이 조금씩 빨라지면서 녹은 크림 덕분에 접합부에서 젖은 마찰음이 격하게 들렸다.
저 소리에 자극받아 털이 곤두선 곰돌이 귀 같은 둥근 토끼 귀가 바르르 떨렸다. 시트에 눌려 티는 나지 않았지만 꼬리 역시 털을 펑 부풀린 채 아까부터 연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카르젠의 성기가 얕게 들락거리다 뽑혀 나갈 듯이 뒤로 물리기 시작하자 놀란 현서가 다리에 힘을 빡 줬다. 그러다 일순 바로 깊은 곳까지 푹 쑤시고 들어온 탓에 “흐으읍!!!” 신음을 내질렀다.
몸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카르젠 역시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잠시 허리를 멈췄다가 뒤로 쑥 뽑아냈다. 귀두가 걸려 뽑힐 듯 말 듯 한 지경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푹 쑤시자 현서의 안쪽이 비교적 부드럽게 카르젠을 받아들였다.
카르젠은 내내 제 성기를 압박하고 밀어내려는 듯이 꽉 조이기만 하던 내벽이 이젠 제 움직임에 맞춰 들러붙으며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손으로 쥐어짜듯 빠듯한 조임이었지만, 연신 이어지는 삽입에 조금씩 풀어져 이젠 좋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제 성기를 감싸고 내벽을 움찔거리며 씹어 댔다.
“하… 현서야, 후우… 현서야…….”
기분 좋은 압박감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현서 역시 더는 끙끙대거나 힘들어하는 소리가 아닌,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카르젠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젠… 아, 거기 기분 좋아, 흐읏, 좋아요… 카르젠, 좋아…….”
이번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기분이 좋다 못해 기절할 것 같았다. 크림 덕분이라는 건 알지만, 더는 고통이 없었고 압박감은 남아 있지만 점점 커지는 쾌감 덕분에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저가 잘 느끼는 지점을 제대로 긁어 주듯 꾹꾹 누르는 거대한 성기 덕분에 기분이 안 좋을 수 없었다. 이러다 정말 매일 하자고 조르면 어쩌나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다는 제 말에 카르젠이 반응이 없어 고개를 들어 바라본 현서는 순간 몸을 흠칫 굳혔다. 카르젠의 눈빛이 약간… 어쩐지, 조금……
‘……맛이 갔어?’
“……카, 카르젠?”
이름을 부르자 그가 생긋 미소 지으며 다시 입 맞춰 왔다. 시야가 대번 밝아진 탓에 눈을 감고 다시 혀를 섞는데, 어째 허리가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기어이 귀두가 뽑혀 나갔다. 갑자기 찾아든 허전함에 놀란 몸이 또 흠칫 들썩였다.
벌어진 작은 구멍에서 녹은 크림이 흘러나오려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조급하게 닿은 귀두에 틀어 막혔다. 현서는 완전히 다 뽑혀 나간 저 거대한 성기가 다시 제 안을 푹 찌르고 들어오자 놀라 카르젠의 팔뚝을 할퀴어 버렸다.
“흐아! 아, 자, 잠깐, 너무 깊어……!”
“후… 괜찮아, 긴장하지 마. 끝까지 넣지 않을게, 현서야…….”
이게 다 들어온 게 아니라니, 현서의 얼굴에 경악이 스친 순간, 카르젠이 다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깊숙하게 쑥 박아 넣었다. 놀란 현서가 뭔가 말하기도 전, 다시 허리가 크게 들썩였다.
“아앗! 자, 잠깐만요, 카르젠……! 너, 너무, 잠깐, 빠, 빠른, 빨라요……!”
“응, 현서야, 천천히 할게. 현서야…….”
대답은 느리고 상냥했지만, 허리 짓은 어째 점점 빨라졌다. 점점 빠르고 깊어지는 움직임에 현서는 제대로 신음도 못 하고 숨을 겨우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쾌감이 너무 컸다. 그의 성기가 빠르게 들락거릴 때마다 밀려오는 쾌감도 너무 커서, 특히 지금처럼 저렇게 쑥 다시 뽑더니 푹 쑤시고 들어올 때면 격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아앙! 자, 잠, 까안, 아흑, 흐읏, 읏, 처, 천, 천천… 히잇……!”
충격적이었다. 제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하지만 경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악할 새가 없었다. 뭐에 불이 붙은 건지 몰라도, 카르젠은 이젠 한쪽 손으로 자꾸만 도망치려는 듯이 뒤틀리던 현서의 허리를 꽉 잡고 조급하게 움직였다.
“으앗! 깊어……! 너무 깊, 아니, 잠깐, 너, 너무 빨라, 조, 조금, 아, 조금만, 천천히……!”
끝까지 다 삽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카르젠의 성기가 워낙 큰 탓에 이미 한계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데다가, 속도가 더해져 박아 넣을 때마다 절로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카르젠은 제 움직임에 따라 몸을 흠칫흠칫 떨며 흔들리는 현서를 향해 말했다.
“하… 현서야, 천천히 할게…….”
“으흑… 읏……! 흐아앗!!!”
말로는 천천히 한다는데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밑에서 들리는 난잡한 젖은 마찰음이 점점 더 커졌다. 현서는 배 속이 엉망이 될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그가 주는 쾌감이 너무 좋아 고개를 뒤로 젖히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단단한 팔뚝을 붙든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생리적인 반응에 눈물이 줄줄 흘렀고, 안을 쑤셔 대던 성기가 빠져나가려 하면 내벽이 제멋대로 수축하며 붙잡으려 들었다.
매정하게 뽑혀 나간 성기가 다시 안을 벌리고 들어온 순간, 현서는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카르젠의 어깨를 앙물었다.
“큭……!”
“흐윽! 읏! 흐으응! 으읏……!”
경악스러울 정도로 깊이 파고든 그의 성기가 안에서 더 부피를 키우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깊이 파고들었는데 아직 두 사람의 몸은 맞닿지 않은 상태였다. 현서가 이를 알아챘다면 기함했겠지만, 다행히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현서는 그의 어깨를 물고, 거대한 성기를 몸에 품은 채, 앞을 만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격하게 밀려오는 절정을 맞고 있었다. 성기 끝에서 묽은 정액이 줄줄 흘렀고, 어깨를 깨물고 있던 입을 뗀 순간 일순 멈췄던 호흡이 터졌다.
“하아…! 흐아아…! 흐아, 하아… 하아아아…….”
여전히 꿰뚫린 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배 속이 뜨거웠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생경한 쾌감에 축 늘어진 현서가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거의 동시에 절정을 느낀 카르젠의 성기가 안에서 뜨거운 정액을 울컥 쏟아 내며 꺼떡였다.
“하… 후우… 후우우…….”
쾌감에 젖어 낮게 울리는 짙은 신음 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한 현서는 기운이 쏙 빠져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잔뜩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얼굴을 살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는 카르젠의 얼굴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저 흐트러진 모습을 본 순간, 이어진 곳부터 머리끝까지 지잉 울리는 기분이 들어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덕분에 안이 꽤 조였는지, “읏…….” 신음하며 찌푸리는 얼굴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이었다.
“하… 하아… 흐으… 후후…….”
“후우… 현서야……?”
저도 모르게 푸흐흐 웃음 터진 현서가 손등으로 급히 입을 가렸지만, 이미 들켜 버린 탓에 그냥 편하게 웃어 버렸다. 처음 경험한 짙은 절정의 여운에 잠겨 있던 카르젠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현서가 해맑게 웃으며 그의 볼을 감싸 잡고 내리 끌어 쪽 키스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일단 뽀뽀해 주니 기껍게 받아들인 카르젠이 더 해 달라는 듯이 볼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현서는 그의 볼과 코와 입술에 쪽쪽쪽 순서대로 뽀뽀해 준 후 팔과 다리로 와락 끌어안으며 쿡쿡 웃었다.
‘내가 왕에 빙의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진짜 카르젠 갖겠다고 나라 먹었을지도 모르겠어…….’
현서의 속을 모르는 카르젠은 그저 현서가 기분 좋아 보이니 됐다는 듯이 옆에 누워 몸을 안고 같이 웃었다. 현서는 저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같이 웃어 주는 그가 그저 좋았다.
‘하… 피곤해…….’
필리스에 와서 오늘처럼 격하게 움직인 건 처음이었기에 피로가 몰려왔다. 이대로 기절할 것 같았지만, 온몸 여기저기 남은 흔적 때문에라도 씻고 자야 했다. 하루에 목욕을 세 번이나 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던 현서는 자꾸만 눈이 감겨 카르젠의 가슴에 이마를 콩 박았다.
“하아… 카르젠… 씻어야 하는데…….”
“응? 벌써 씻어? 다 하고 씻는 게 낫지 않겠어?”
“?”
그 말에 힘 빠져 축 늘어져 있던 현서의 토끼 귀가 쫑긋 섰다. 카르젠은 꼿꼿해진 귀를 손가락 겉면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놀라?”
“…으응? 아, 아니… 안 놀랐는……데엑?”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 화들짝 놀라 고개 든 현서가 제 엉덩이를 슬그머니 잡아 벌리려는 카르젠의 손을 붙들었다.
“……카, 카르젠?”
“응, 현서야.”
“이제…… 이제 씻고 자야죠?”
“밤은 이제 시작인데?”
“…….”
현서의 떨리는 눈동자와 부드럽게 시선을 맞춘 카르젠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현서만 괜찮다면, 이 밤을 온전히 함께하고 싶어.”
“…….”
현서는 제 시야가 너무 밝다는 핑계로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진짜 작정하고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는 게 어이가 없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너무너무 예뻤지만.
카르젠은 애써 제 얼굴을 외면하는 현서의 토끼 귀에 츄- 키스하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작은 속삭임을 이해하고 흠칫한 현서가 실눈을 뜨고 카르젠을 부리부리하게 보다가, 퍽 끌리는 제안이었는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수줍게 고개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밤은 정말로,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죽을 것 같아…….’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겨우 눈을 뜬 현서는 평소보다 현저히 좁아진 시야에 미간을 찌푸렸다. 밤새 시달리며 울어서인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덕분에 좁은 시야로 카르젠의 가슴께만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쇄골과 어깨 부근에 저가 할퀴고 깨문 자국이 잔뜩 있는 걸 보곤 너른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침부터 파렴치한 도피처 선정 덕분인지, 정수리 위로 쿡쿡 웃음소리와 함께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현서야. 잘 잤어?”
“…지금, 그걸… 큼…….”
갈라지다 못해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에 놀란 현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콜린이 핑계 댔던 몸살이 실현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어제 소리를 조금 더 질렀으면 득음하지 않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제 등을 보듬는 손길이 기분 좋아 눈을 감고 숨을 얕게 내쉬었다.
“어쩌지? 곧 나갈 시간인데, 현서만 두고 가기 싫은데… 오늘 그냥 가지 말고, 어제 현서가 말한 대로 제복 입고…….”
“으아악!”
찰싹! 찰싹찰싹!
하하하 소리 내 웃은 카르젠은 제 가슴을 때리는 하찮은 손길을 즐기며, 다가오는 휴일 전날에 현서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해 짧은 토끼 귀와 꼬리를 펑 부풀리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놀리지 말라고 한마디 나올 법도 한데, 제 연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현서는 수치스러워 끙끙댈지언정, 빈말이라도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해군 제복이랑… 기사단 제복도…….”
“음…… 기사단 제복은 내 저택에 있어. 보내 달라고 할게.”
“으응… 좋아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현서는 당분간 절대 눈을 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질끈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시야가 너무도 밝았기에, 잠시간 이대로 포근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을 예정이었다.
***
첫 동침 이후로 하루가 또 지났지만, 현서는 여전히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대는 바람에,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방 안을 걸어 다닐 때조차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야 했다. 그마저도 심히 느린 속도였던지라, 괜히 나다니느니 방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덕분에 현서는 침대에 늘어져 누운 채 수도 카르젠의 저택에 남은 하녀 주디와 통신수정으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된 내용은 안부를 주고받고, 다음 시즌 크리시 기도회 추첨회 일정 등 사적인 내용과, 카르젠의 제복을 부탁하는 이야기였다.
-그럼 빠르게 준비할게요. 아, 그리고 소가주님.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프리스트 크리시 님은 건강에 이상 없다고 오늘 신전에서 공식 발표가 있었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크리시 건강?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소가주님께선 아직 못 들으셨나요?
“전혀…… 무슨 일이야?”
현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수정에서 주디의 슬픈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그저께 밤에 야간 기도회가 시작되자마자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프리스트 크리시 님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셨어요… 급히 나이젤 대신관님으로 교체되고, 크리시님은 성기사 라피엘 님이 부축해 데려가셨거든요……
“뭐!? 부축받을 정도로 아팠다고!?”
-네, 덕분에 난리도 아녔어요. 크리시 님의 열성팬으로 유명한 몇몇 영애는 혼절도 했고요…… 그래도 다행인 건, 크리시 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고, 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신의 권능을 사용해서 그런 거였대요.
“뭐, 뭣……!?!?”
전이 때문이란 것을 눈치챈 현서가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영상 전송 없이 통신만 가능한 수정이었기에 엄청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현서를 볼 수 없는 주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면밀하게 검진해 본 결과 크리시 님의 건강엔 이상이 없다고 신전에서 공식으로 발표했으니까요!
“…아, 으, 으응… 그… 고, 고마워, 주디. 그…… 나 일단 일이 생겨서 끊어야겠어. 잘 지내고, 나중에 수도에 가면 봐.”
-네! 말씀하신 제복이랑 이번 시즌 초상화 세트는 내일 중으로 포장해서 발송할게요! 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으, 으응… 고마워…….”
주디가 한 번 더 건넨 인사를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현서는 은은한 빛을 내다 잠잠해진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주디가 한 말을 곱씹다 보니 저도 모르게 토끼 귀와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수정을 쥔 손도 잘게 떨렸는데, 무의식중에 손을 내려다본 현서는 반질반질한 수정 표면에 비친 사과 같은 제 얼굴을 보곤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현서가 이불을 막 걷어차기 시작하자 노크 소리와 함께 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가주님, 콜린입니다. 차를…….”
“끄아아앙! 끄아악!”
“소가주님?”
실례한다며 문을 열고 들어온 콜린은, 이불 속에서 발차기를 뻥뻥 해 대는 현서를 보고 일순 놀랐지만, 바닥을 구르고 있는 통신 수정을 보고 대충 상황 파악을 마쳤다.
“…차와…… 디저트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끄허어엉, 흐어어어엉……!”
옆에서 이불 굼벵이가 연신 하찮은 발길질을 해 대고 있었지만, 콜린은 훌륭한 보좌관답게 입술을 꾹 말아 넣은 채 침착하게 차를 세팅하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 이젠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곁에서 소가주를 달래는 대신 그의 입장을 고려하여 빠르게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