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김현우와 겨울의 끝자락
“나의 고향은 조금 달랐어. 어느 순간부터 빛이 사라지고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지.”
“저런…….”
“그럴 수가…….”
사자와 비슷한 동물 머리를 달고 있는 이가 한탄하듯 뱉은 말에, 현대식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밝은 행성 머리와 영화 속 크리쳐 에일리언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가 호응하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파레스토 별의 모든 종족들은 태양을 우러러보며 빌고 또 빌었네. 부디 이 별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일회용 컵을 들고 정수기에서 음료를 따르던 현우는 본의 아니게 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자 머리는 어차피 많은 청자를 원해 휴게실에서 굳이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기에, 오히려 현우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기꺼워하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신께 기도가 닿았고, 나의 고향 파레스토도 개혁을 맞이했다네. 물론 별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파레스토의 첫 각성자였던 나는 남은 동족이라도 지키고자 노력했어. 덕분에 동족 사이에서 신격화되었고, 이렇게 그대들과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지.”
참담함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자신이 속한 별에서 최초의 영웅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사자 머리의 말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재앙 에피소드를 대충 흘려들은 현우가 심드렁하니 몸을 돌리려는 찰나, 사자 머리가 현우를 불렀다.
“어린 신. 그대는 인간인가? 아니, 리우레르족인가? 신입인 것 같은데, 어느 별 출신이지?”
컵을 들고 휴게실을 나서려던 현우는 저를 불러 세우는 사자 머리를 향해 돌아섰다. 사자 머리는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이며 말했다.
“기운을 보아하니 이 강의에 꽤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원해서 신이 된 건 아니겠군?”
젠체하는 사자 머리를 무시하자, 이번엔 에일리언이 현우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리우레르는 이마에도 눈이 있다고 하더군. 손도 두 쌍이고. 흠…… 엘프나 인간의 모습 같은데, 신입치고 신력이 매우 강력하군. 그리고 껍질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진짜 인간인가?”
인간이라는 말에 이번엔 3m쯤 돼 보이는, 정장 입은 행성 머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현우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어린 신이여. 나는 플루옌 별을 관리하는 펄이라고 하네. 그대는 진짜 인간인가?”
현우는 자신을 펄이라고 소개한 상급신을 바라봤다. 족히 3m 정도 되어 보이는 장신이지만, 인간의 표준 골격을 완벽하게 갖춘 몸에 스리피스 슈트와 장갑에 구두까지 예장한 것을 보아하니, 전에 ‘흰 양말’이 말했던 ‘인간 오타쿠’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딱히 대답하고 싶진 않은데.”
“!”
다소 삐뚜름한 대답이었지만, 펄은 오히려 반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라면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 토성처럼 띠가 둘러진 아름다운 별이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몸짓이 지금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전해 주고 있었다. 장갑 낀 양손을 심장 부근에 가져가 대더니 교차해 누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펄을 본 현우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고스란히 면으로 보여 주었다.
‘저 위치에 심장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펄의 머리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 코, 입은 없었지만, 그로부터 시선이 느껴지는 지점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눈을 맞추니 뭐 그리 좋은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기운이 아닌 눈으로 시선을 맞추다니! 역시 그대는 진짜 인간인 거지!?”
“…….”
“맙소사! 드디어 나도 진짜 인간 친구를 갖게 되었군! 어린 신이여, 이름을 알려…… 자, 잠깐! 어딜 가는가! 아직 강의 시작까진 시간이…… 이보게! 잠시만! 나의 벗이여!”
“…….”
약간의 소란을 뒤로하고 강의실로 돌아온 현우는 제일 뒷줄 구석 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앉아 있어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반대편 끝자리를 확인했다. 그 자리 역시 이글거리는 분홍색 불덩어리가 하나 앉아 있었다.
“하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차라리 신들도 기피하는 제일 앞줄로 가 앉았다. 다행히 맨 앞줄엔 신이 없었고, 강의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까지도 텅텅 비어 있었다.
두 번째 줄까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앞을 보고 앉은 현우는, 갑자기 제 옆자리 의자를 빼더니 털썩 앉는 신을 바라봤다. 행성 머리 펄이었다.
“…….”
“사랑스러운 아기 신, 나의 새 벗이여. 아직 내 벗의 이름을 듣지 못하였네.”
현우는 펄에게 굳이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귀찮긴 했지만, 그가 보이는 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다른 별의 상급신과 연을 맺는다면 앞으로 활동에 있어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되진 않을 터였다.
“……안식의 신.”
“……!! 그렇군. 그럼 안식이라고 부르면 되겠는가? 반갑네, 안식.”
행성 머리가 대충한 대답을 진지하게 곱씹는 모습에 한숨을 참은 현우가 결국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름은 현우. 김현우. 현우라고 부르면 돼.”
“안식의 신 현우! 무슨 뜻인지 몰라도 좋은 뜻인 게 분명한 이름이군!”
현우는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을 표했다. 옆에서 펄이 흥분해 조잘조잘 떠들려는 기미가 보일쯤, 다행히 이번 시간을 맡은 강사가 도착했다. 어느 별에나 존재한다는 과실 ‘사과’의 모습을 한 강사가 앞에 둥둥 떠오르며 인사했다.
“자, 멘토로 참석하신 상급신 여러분은 강의가 많이 지루하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지금부터는 테라오톤과 지구에서 온 상급신이 꼭 들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펄은 현우가 지구라는 단어에 반응해 앞을 보자 더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상급신이 된 지 오래된 존재였고 멘토로 참석해 전부 아는 내용이었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바른 자세로 앉았다. 앞에 동동 떠다니는 사과는 앞에 자료 화면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최근, 멸망 직전이었던 테라오톤과 지구라는 별이 비슷한 시기에 1차 각성을 했습니다.”
저 두 별 출신 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신들은 전부 아는 내용이라 심드렁했고, 뒤에선 작은 목소리로 수다 떠는 신들도 있었다. 사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테라오톤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에서 격변이 일어났지만, 지구의 경우엔 별의 생명이 다해 소멸하기 직전이었으므로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지구 출신 분들께서는 더 집중해 주세요. 앞으로 당신들의 별이 멸망하지 않도록, 별의 생존을 도와야 합니다.”
현우는 두 개의 별 상황을 보여 주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석한 신을 고려해 해당 지역을 보여 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구를 비춘 화면에 보이고 있는 것은 미국과 한국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이 무너져 협곡을 메우고, 그 너머로 거대한 균열과 사막을 새카맣게 채운 마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뉴욕 한복판에 무너진 빌딩들과 여기저기 생겨난 거대한 싱크홀이 보였다.
“저 정도 대격변이면, 지구라는 별은 진즉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겠군.”
“…….”
펄의 혼잣말을 무시한 현우는 바로 다음에 비춰진 서울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미국에 생긴 것보다 훨씬 큰 싱크홀이 눈에 띄게 많았고, 그 균열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와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탄이 나왔다.
“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한 상황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생긴 싱크홀로 세종대왕 금색 동상이 있어야 할 자리는 푹 꺼져 있었다. 주변 빌딩 역시 대부분 무너졌으며, 멀리 보이는 광화문 너머 궁 안쪽은 마물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현우가 이를 까득 깨물자, 옆에 앉아 있던 펄 역시 진중하게 화면을 바라봤다. 그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했던 ‘진짜 인간’이 있는 별이었다.
잠시간 화면을 응시하던 펄은 조심스레 현우를 살폈다. 처음 강의에 참석한 어린 신들이 으레 그렇듯, 현우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초토화된 고향을 지켜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펄은 따끔거릴 만큼 형형한 기운을 쏟아 내는 어린 신의 신력을 멋대로 갈무리해 준 후, 제 가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그 호의를 받을 여유가 없던 현우가 치우라는 듯이 손등으로 대충 밀어 거절했지만, 그는 고집스레 손수건을 권했다.
“현우. 부끄러워할 것 없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현우는 무슨 소리냐며 따지려다 말았다. 이 행성 머리는 지금 인간의 매너를 흉내 내고 싶었을 뿐일 테니 더 입씨름하느니 그냥 손수건을 받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자 사과 머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구에는 아르카라스 님이, 테라오톤엔 에벨루스 님이 가호를 내리셨습니다.”
현우가 손수건을 콱 틀어쥐자 펄이 고개를 가까이 숙이고 속삭였다.
“태양신 아르카라스가 현 초월신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의 고향은 괜찮을 거네. 너무 염려 말게.”
한마디로 태양신 아르카라스가 직접 개입해야 할 정도로 지구가 엉망이고 구제 불능 상태라는 것을 뜻이었지만, 현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은 화면에 고정했다.
검은 파도처럼 쏟아지는 마물 사이로 아직 소년에 가까워 보이는 한 어린 남성과 중년 여성이 달려들었다. 정장을 입은 여성이 긴 지팡이 같은 무기를 꺼내 들더니 그대로 바람을 일으켜 주변 마물을 초토화시키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이어 그의 바로 옆에 바짝 다가온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남성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초토화된 거리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져 있던 자동차와 금속들이 붕 뜨더니, 강한 바람을 타고 마물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보시다시피 각자 적응기를 거치고 있으며, 신의 가호를 받은 소수의 존재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별을 지킬 수 없습니다.”
초토화된 지구에서 장면이 바뀌며 한 강아지와 고양이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두 동물은 의자에 앉아 온갖 언어로 이루어진 활자 버튼을 분주하게 누르고 있었는데, 둘 다 앞에 작은 스크린을 띄워 둔 상태였다.
강의실 화면이 고양이가 보는 스크린을 그대로 비추자 정글처럼 숲이 우거진 장소를 헤쳐 나가는 인간들이 보였다. 몇몇은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고,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하던 이들이 멈칫한 순간, 수풀 사이에서 거대한 파충류가 튀어나왔다.
다친 인간들을 포함해 모든 일행이 각자 무기를 들고 가진 힘을 발휘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물과 급이 맞지 않았는지, 인간이 심하게 밀리고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인간들을 지켜보던 고양이의 앞발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어의 신’이 ‘에이프릴’에게 ‘축복 Lv. 3’을 부여합니다. 5분 동안 ‘에이프릴’의 모든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SSS급으로 상향되며, 스킬 사용 시 소모되는 마나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팝업 됐다.
메시지가 사라지자마자 바닥에 무릎 꿇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에이프릴로 추정되는 인간 여성이 벌떡 일어나 파충류들을 썰기 시작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파괴력이었다.
괴력을 내기 시작한 그녀가 연이어 등장한 거대한 보스 파충류까지 죽이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허…….”
현우는 정말 게임 같은 화면에 기가 막혀 혀를 찼고, 그 반응을 잘못 해석한 펄이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보듬어 주었다.
“나의 벗이여, 걱정하지 말게. 현우 그대도 곧 고향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
사과 머리 역시 현우와 뒷좌석에 몇몇 상급신들에게 눈짓으로 유감을 표하고 말을 이었다.
“대격변이 일어난 별은 보시다시피 상급신의 가호와 개입이 필요합니다. 본 강의에서는 상급신들이 신의 가호를 받은 존재들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서포트 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끝나면 멘토를 지정할 예정이니…….”
보편적인 설명이 이어지자, 사과 머리의 말을 흘려들은 현우가 “상태창.” 하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눈앞에 푸르스름한 반투명 창이 팟! 하고 떴다.
[관리자를 위한 상급신 강의 참석하기 1/3]
<관리자를 위한 상급신 강의 참석하기 - 1차 퀘스트 완료 보상>
1차 퀘스트 완료 보상 ‘안식의 신의 손길’ 스킬 습득 완료
*던전에 입장한 푸른 별의 종족 ‘3명’에게 스킬 부여 가능. 스킬 부여 시 일시적으로 대상자의 모든 체력과 마력을 100% 회복시키며, 20초간 무적 상태 실드 발동. 한 던전당 1회만 사용 가능. 던전 클리어 후 쿨타임 자동 초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