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5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라고 생각한 콜린은 제 장점인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혹시 주인님, 아니. 후작님이 이중인격인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제 앞에 있는 남자가 1분 전까지 저와 마차에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건드리면 다 물어뜯을 지옥의 파수견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으면서, 마차에서 내린 지금은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상 자애로운 얼굴로 다 큰 동생을 안은 채 부둥부둥하고 있었다.
“우리 현서, 형아 없는 동안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오늘 재미있었어? 누가 귀찮게 굴진 않았고?”
사랑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안부 인사는 덤이었다. 질문을 받는 대상자가 10살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내용이었지만, 콜린은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며 현우의 뒤에서 대기했다.
‘그래도 소공자님이 계셔서 다행이군.’
뾰족한 이를 숨기다 못해 잇몸만 있는 척하는 저 고도의 내숭이라면, 앞으로 현우가 수틀리기 직전 현서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콜린은 이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현서의 입에서 “형, 근데 있지, 나 형한테 물어볼 거 있는데…… 좀 중요한 건데, 잠깐 얘기할 수 있어?”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묘하게 긴장하고 비장하게 묻는 게, 좀 불안한데?’
현서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콜린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것이 분명한 형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며 저리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보통 중대한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았다.
콜린의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와중에, 현우 역시 제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몰라도 저가 반기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예감한 듯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당연하지. 남는 게 시간이야. 없어도 만들어야지.”
곧 다가올 새벽, 영토 탈환을 위해 마르카로 출정 예정이었음에도, 현우는 무조건 제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못 박았다. 제 주인의 성격을 아는 콜린은 별다른 언질을 하는 대신 두 사람에게 인사 후 물러나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이럴 땐 회피가 상책이었다.
***
현우는 제 동생이 지내던 손님용 방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었다. 말이 손님용 방이지 카르젠의 방과 바로 붙어 있었고,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의 방을 이어 주는 내문도 있었다.
이 저택이 지어졌을 당시엔 손님용 방이 아닌, 안주인의 방이 분명했을 방을 손님용 방이라는 명목으로 속여 동생을 지내게 한 것도 불만이었는데, 저택 사용인들 역시 현서를 카르젠의 보좌관이 될 뻔한 사람이 아니라 무슨 안주인 모시듯 대하는 걸 보고 기가 찼다.
지금도 그랬다. 동글동글한 얼굴의 주디라는 귀여운 소녀가 차와 다과를 차려 주며 내내 현서의 상태가 어떤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필요한 건 더 없는지 물으며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다.
관심과 애정이 충만하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줄 수는 있으나, 손님을 위한 시중이라기엔 어째 영 기분이 찝찝했다. 나름 오랜 세월 살아온 현우는 저 친절의 근원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충성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둘만의 끈끈한 유대 관계가 느껴졌는데, 그것이 방금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작은 종이 쪼가리에서 엮여 나온 유대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현우는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현서의 차 취향도 알고 있는지, 미리 우려 둔 차로 만든 얼음까지 준비해 준 주디가 꾸벅 인사했다.
“케이 후작님. 현서 님.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주디는 그간 늘 이비 님이라고 부르느라 현서라고 부르는 데까지 하루 이상이 걸리긴 했지만, 더는 실수하지 않았다. 현서 역시 해사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응. 고마워. 주디.”
주디가 나간 후, 현우는 현서가 손에 소중하게 쥔 작은 종이 쪼가리를 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서야, 그건 뭐야?”
“아, 이거? 이건 내가 좋아하는 프리스트의 초상화야.”
좋아하는 프리스트. 그 말에 현우는 미소를 유지한 채 보여 달라고 했고, 현서가 내민 미니 초상화에 그려진 청초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는 크리시를 본 순간 저 종이 쪼가리를 태워 버리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써야 했다.
“프리스트 크리시네…… 현서는 프리스트 크리시가 좋아?”
“응. 내 최애야.”
‘프란제르 후작 부인의 말이 사실이었군…….’
제 동생이 크리시, 카르젠, 체스터 순으로 셋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남부에서 아리스에게 듣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 묘한 기분이었다.
초상화를 넣을 수 있는 포켓이 달린 전용 수첩에 미니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모시는 동생을 지켜보던 현우는 칼리아르 신전도 저런 상업질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름 칼리아르의 프리스트로 위장 등록해 둔 상태니…….’
언젠가 저 수첩에서 크리시가 가진 지분을 꼭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던 현우는 앞에서 머뭇머뭇 마카롱을 집어 먹는 동생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저렇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쉽게 말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 분명해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아, 현서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야? 용돈 더 줄까? 아니면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어, 아니. 용돈은 괜찮아. 아직도 많이 남았어. 그…… 음, 있지, 형아.”
“응.”
현우는 망설이는 동생에게, 편히 말하라는 의미로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어린 시절부터 현서가 뭔가 말할 때면 집중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제게 귀를 기울인 형의 모습에 묘하게 더 긴장한 현서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있지, 형아는 필리스에 나보다 훨씬 오래 있었으니까, 음…… 필리스 문화는 많이 익숙해졌지?”
현우가 필리스로 소환당했을 당시, 시간선이 꼬이는 바람에 저가 기억하는 것만 150년 이상 지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에, 현서는 제 형이 저보다 딱 10년 먼저 이곳에 와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향해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지내는 동안 서대륙과 동대륙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으니 꽤 익숙해졌지.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
“으응, 사실 형한테 꼭 받고 싶은 게 있는데, 음… 형이 놀랄까 봐 조금 더 천천히 말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기도 하고 해서…….”
제게서 대체 뭘 받고 싶기에 저리 뜸을 들이나 싶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현우는 현서에게 세상 모든 것을 다 쥐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다.
만약 현서가 제국을 원한다면, 엘카사트 황족을 멸문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고, 쥐똥만 한 루아인을 원한다면 체스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평화적으로 빼앗아 줄 것이었다.
“뭐든 말만 해. 형이 줄 수 있는 거면 다 줄게. 없는 것도 만들어 줄 거고, 다른 사람의 것이면 타협해서라도 받아 줄게.”
진심이었지만,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현서가 작게 웃었다. 배시시 웃는 동생의 모습을 본 현우는 제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따뜻한 감각에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따스한 기운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차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음,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은데, 그 사람이 남자거든.”
“…….”
정말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현우는 일단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어, 그, 음… 필리스에선 동성혼이 흔하다고 하지만, 형이 놀랄지도 모르고 해서…….”
“…….”
손에 핏기가 싹 빠질 만큼 매우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교제 허락을 구하는 건 아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 준다면 함께 하고 싶어. 형이 허락해 주지 못한다면 허락받을 때까지 노력할 거야.”
“…….”
감히 제 동생에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리게 만들다니? 괘씸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경청하고 있음을 표했다.
“내가 형한테 받고 싶은 건, 음…… 일종의 응원이야. 내가 누굴 좋아해도 괜찮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계속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
현우는 여전히 상냥한 형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지만, 현서만큼은 느끼지 못하게 제대로 잘 조절하고 있었고, 모든 것은 훌륭하게 통제 중이었다. 굳으려는 입매를 정돈하고자 차를 한 모금 마신 현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형은 항상 현서를 응원해. 현서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다 하게 해 줄 거고, 형이 늘 곁에서 도와줄 거야. 현서가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어. 상대가 만약 오거라도, 뭐…… 현서가 좋다면 형은 찬성이야.”
“!”
“그래서…… 상대는 바이스 공자야?”
“!!!”
현서의 토끼 귀가 펑-하고 부풀었다. 짧은 귀가 부풀어 거의 동그래진 모습을 본 현우가 쿡쿡 웃었다. 속으로는 천불이 끓고 있는 와중에도 제 동생의 모습이 그저 귀여워 온화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받아 준다면이라…… 받아 줘야지. 누구의 마음인데.”
“혀, 형아, 카르젠 기분도 생각해야지…….”
“생각할 것도 없어 보이던데? 바이스 공자도 우리 현서한테 이미 푹 빠진 것 같았거든.”
“아니, 그게, 그게 있지, 형아,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긴 한데, 카르젠은 좀 특별한 사람이라……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해.”
“허?”
“날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좋아하는 감정이 나랑 같지 않을 수도 있어. 카르젠은 박애주의자거든.”
“…….”
카르젠과 저의 첫 만남을 떠올린 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호전적이고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녀석이 박애주의자라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제 동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무조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형은 편견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혹시 놀랄지도 모르니까 미리 확실히 말해 두고 싶었어.”
“그랬구나. 우리 현서 다 컸네.”
‘어려선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울고불고 떼썼는데, 물론 다섯 살 때긴 하지만…….’
착잡했다. 하지만, 제 동생이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 다 줄 거였으니, 이 또한 응원해 주는 것이 맞았다. 다 컸다는 소리를 들은 현서가 쑥스럽다는 듯이 괜히 삐져나오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형아, 계속 말하지만, 나 스무 살이야…….”
“응. 우리 현서 참 잘 컸네.”
내가 곁에 없었지만, 알아서 잘 컸구나. 그래도 형한테 있어 현서는 언제나 꼬마 같은 동생이야. 라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제 동생은 성인이었다. 스무 살이면 아직 핏덩이고 아기같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성인은 성인이었으니, 언제까지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현서야.”
“응.”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형은 항상 현서의 편이야. 누가 뭐라 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고, 늘 현서를 응원할 거야.”
“…….”
현서의 토끼 귀가 살짝 눕는 모습이 보였다. 눈썹을 늘어뜨린 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동생에게, 현우는 부러 더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형이 해결할 일이 있어서 이틀 정도 어디 좀 다녀와야 하거든.”
“어? 갑자기 이틀이나?”
“응. 그런데 현서 덕분에 힘이 샘솟아서 더 빨리 해결하고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네.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인사를 들은 현서가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내가 뭘 했다구…….”
마르카를 점령한 마족들이 들으면 기함할 법한 대사를 이끌어 낸 현서는, 저가 뭘 해냈는지도 모르고 새빨개진 얼굴로 내일쯤엔 카르젠에게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라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형은 새벽에 떠났구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한 현서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물론 어제저녁, 현우가 새벽에 나가 이틀 정도 후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빈자리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
눈을 부스스 뜨고 멍하니 옆자리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주던 형이 떠올랐다.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다시 눈을 감은 현서는 어젯밤 내내 형의 머리카락을 만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간 카르젠과 자 버릇했던 게 문제였는지 제 옆에 누운 형의 머리카락을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계속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인 탓인지 형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그냥 머리가 길어서 신기해서 만져 보는 거라며 얼버무려야 했었다.
‘카르젠 머리카락 만지고 싶다…….’
묘하게 중독성 있는 감촉이 그리워진 현서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빙글빙글 돌리듯 움직였다. 제 손가락을 둘둘 감아도 고운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던 카르젠의 머리카락의 감촉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어 꼬물거리는 제 손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카르젠의 얼굴. 벌어진 앞섶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존재감을 과시하는 넓은 가슴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며 귀의 털이 펑-하고 곤두섰다.
‘아침부터 왜 이런 게 생각난담?’
아리스가 있었다면 두고두고 놀릴 만큼 노골적인 생각에 괜히 민망해진 현서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누가 보면 내가 카르젠 얼굴이랑 몸만 생각하는 줄 알겠어!!!’
듣는 이도 없는데 굳이 해명하듯 생각하자,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고동이 저 생각에 긍정하듯 격하게 퍼졌다.
‘이, 이비야…… 오해야.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은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냐는 듯이 점점 더 고동이 격해졌다. 카르젠의 가슴이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숨을 집어삼킬 만큼 격한 고동이었고, 결국 현서는 제 가슴을 살살 쓰다듬으며 흥분한 이비를 달래곤 일어나 앉았다.
‘이비야. 진정해 봐. 나 고민할 거 있단 말이야.’
애원에 가까운 생각을 들었는지, 조금 전까지 쿵쾅대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현서는 제 가슴을 살살 보듬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 카르젠한테 고백할 건데.’
두근두근- 두근두근-
현서는 다시 거세지려는 고동을 달래듯 토닥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어떻게 운을 떼지?’
두근거리던 고동이 일순 멎었다.
‘이비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아침밥 먼저 먹고, 차 마시면서 말해 볼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듯이 얕은 고동이 느껴졌다.
‘음…… 내가 살면서 고백해 본 적이 있어야지……’
그동안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전부 드라마나 만화, 소설로 접했던 현서였기에 실전 연애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보통 어떻게 고백하더라?’
한국식 고백이면 트렁크를 열고 풍선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쨔잔~ 하며 현수막이 좌라락 나오는 것 정도가 떠올랐고, 외국식이라면 둘이 분위기 좋은 강가를 산책하며 하하 호호 웃다가 은근히 분위기를 타 반지 케이스를 열어 보이며 무릎 꿇는 고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이건 다 청혼이잖아…….’
분명 연인 단계부터 시작하는 것도 있었을 텐데,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다짜고짜 우리 오늘부터 1일 해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없는 반지 만들어서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괜히 허접하게 같지도 않은 이벤트 준비해 사람 짜게 식게 만드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현아의 말이 떠올랐다.
현서의 고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에서 벅벅 씻을 때도, 방으로 찾아온 카르젠의 에스코트를 받아 식당으로 가 전투적으로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카르젠과 제 방 발코니에서 티타임을 가질 때도, 점심 식사를 할 때도,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하아…….”
붉게 노을 진 창밖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민하느라 하루가 다 갈 지경이었다.
‘……고백이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기 전, 침대에 누워 열심히 고민하던 현서의 귀가 축 늘어졌다. 어제 고백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카르젠에게 말을 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일상에서 갑자기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것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환한 대낮에 갑자기 고백을 건네는 것도 부끄러웠다.
평소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틈을 노리려 해도, 일이 많이 밀렸는지 식사 후 티타임을 제외하면 카르젠은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말로가 이런 거였냐며 끙끙대는 사이 창밖엔 벌써 별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우우~ 어휴…….”
연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가슴에서 미약한 울림이 느껴졌다. 이비의 박동에 귀를 기울여 보니, 마치 ‘왜 그렇게 고민해? 꼭 네가 오늘 고백해야 해?’라고 묻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이비의 의사를 유추할 수 있게 된 현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있던 세계에 이런 말이 있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
매를 맞는다니! 그것도 먼저 맞다니!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격한 고동이었다. 현서는 놀란 가슴을 토닥여 주며 말을 이었다.
“진짜 맞는다는 게 아니고, 음……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미루면 괜히 신경 쓰이니까, 미리 하자 이런 뜻이야.”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현서가 카르젠에게 직접 고백하고자 고민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만약 카르젠이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둘의 관계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수습할 시간도 필요했으니까.
“음… 어쩐다…….”
어둑어둑해진 방 안에서 밥시간만 기다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현서는 제 가슴을 토닥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정 반지 맞추자고 했을 때 우정식 말고 결혼식이나 하자고 할걸…….’
만약 그랬다면 카르젠이 어떤 얼굴로 저를 봤을까 싶어 웃음이 나왔다. 아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을까? 아니면, 혹시 나랑 같은 마음이면 해사하게 웃어 줬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몽글몽글 간질간질했다.
‘흠흠. 어쨌든 고백은 완전 큰 이벤트나 마찬가지니까,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넌지시 제 마음을 고백하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았지만, 현서는 고백 자체가 ‘메인이벤트’라도 된 것처럼 다소 부담을 느꼈다.
‘지금까지 우리 관계는 다 카르젠이 주도했으니까. 이번 고백만큼은 내가 하고 싶어!’
필리스에 와서 카르젠과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르젠이 주도했다. 고백에 성공한다면,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이번만큼은 현서가 스스로 개척해 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 다 핑계고 그냥 내 성격이 급한 탓에 빨리 해치우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하아~ 어떻게 말하지? 카르젠, 좋아합니다. 나랑 진지하게 교제해 주세요?’
두근……
누가 봐도 미적지근한 반응이 확실한 고동이었다. 민망해 헛기침한 현서가 몸을 데굴 굴려 옆으로 누웠다. 큰 베개도 끌어안고 나니 안락해져 잠이 쏟아졌지만,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했다.
‘형 덕분이긴 하지만,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요. 저한테 장가오세요.’
두근……?
이번에도 역시 미약한 반응에 현서의 토끼 귀가 추욱 늘어졌다.
아니, 엄밀하게는 이비의 미적지근한 반응보단 밀려오는 졸음에 늘어졌다. 이를 대번 눈치챈 이비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빠르게 고동쳤지만, 졸음이 밀려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스스 일어나 앉아 끌어안은 베개에 턱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안정적으로 편한 자세에 졸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젠, 좋아해요. 저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주세요. 이런 깔끔한 클래식이 나으려나?’
두근.
이번엔 이비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퍽 만족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음…… 이비야. 그럼 이건 어때? 매일 밤마다 카르젠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요. 아 이건 좀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변태 같나?’
두근두근.
변태 같긴 해도 나름 괜찮았는지, 고동이 살짝 빨라졌다. 이비의 긍정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은 현서가 베개에 볼을 비비적거리며 귀를 늘어뜨렸다.
‘으음~ 아니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 보단, 매일 같이 자고 싶다고 할까? 아냐 아냐.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니면 아침을 카르젠과 같이 맞이하고 싶어요? 으음…… 이것도 노골적인 것 같……’
두근!!! 두근두근!!! 두근!!!!!!
“쿨럭!”
이게 심근경색인가, 아니면 부정맥인가 싶을 정도로 불규칙하게 쿵쾅대는 고동에 놀란 현서가 가슴을 꾹 눌렀다.
“이, 이비야. 침착해. 침착해. 이거 괜찮았어?”
두근!!!!!!!!
어찌나 요란하게 고동치는지, 마치 가슴 속에서 찹쌀떡만 한 토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슬슬 잠에 취하는 와중에도 오두방정 떠는 기색 역력한 고동이 그저 웃겨 힘없이 쿡쿡 웃던 현서는 뭐가 그리 재미있냐는 카르젠의 물음에 웅얼대며 대답했다.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매일 아침을 카르… …어……?”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부스스 든 현서의 시야에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이가 들어왔다.
“……으어? 카르젠!?”
대체 언제 온 건지 침대맡에 앉은 카르젠이 어중간하게 길어 흘러내린 현서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응, 현서야.”
제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감각이나, 낮으면서 다정한 동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꿈이 아닌 것 같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카르젠? 왜 여기에, 아니, 아니 아니. 어, 언제 왔어요?”
“지금 막.”
아무리 졸음에 취해 있었다고 해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현서는 저가 꿈이라도 꾸는 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살짝 꼬집었는데도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닌 듯해 카르젠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봤다.
‘진짜잖아…….’
보통 카르젠이라면 기척 정도는 일부러라도 내주는 편이었는데, 사람이 무슨 순간 이동 하듯 갑자기 뿅 옆에 앉아 있는 걸 보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카르젠이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들어온 것을 모르니 당연한 거였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현서는 자신이 너무 생각에 빠져 있는 탓이라 여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노, 놀랐어요…… 제가 잠깐 이비랑 대화에 집중해서 몰랐나 봐요.”
“그런 것 같았어.”
그가 생긋 미소 짓자 시야가 밝아졌다. 현서는 제 시력 보호를 위해 일단 시선을 피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카르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세상 다 가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줄 알 법한 얼굴이었다.
놀란 가슴이 점차 진정될 때쯤, 식당으로 가자며 내민 그의 손을 잡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그의 팔을 꼭 잡고 방을 빠져나가는 동안 현서는 은근히 카르젠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대답하다 중간에 잘라먹었으니 괜찮겠지? 으으…… 그전에 혹시 혼잣말한 건 아니겠지?’
이비랑 대화할 때 분명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 같았는데, 설마 겉으로 내색했나 싶어 괜히 초조해졌다. 카르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걷고 있었다. 저 모습만 봐선 그냥 오늘 기분이 조금 좋아 보인다고 판단한 현서가 놀란 가슴을 꾹 누르며 귀를 쫑긋 세우고 말했다.
“카르젠.”
“응?”
“저기, 괜찮다면 잠시…… 저녁 식사 전에 잠깐 저랑 산책할래요?”
다른 이도 아니고 김현서가 식사 전에 산책을 먼저 하자고 권하다니…… 도플갱어를 의심해 볼만큼 이례적인 요청이었음에도, 카르젠은 놀란 기색 없이 그러자며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가 허리를 살짝 숙여 고개를 끄덕인 덕분에 긴 머리카락이 현서의 손등을 간질였다.
현서는 그의 팔뚝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검지만 세워 머리카락을 살살 감으며 은근히 그를 뒷마당으로 이끌었다. 저택 후문으로 빠져나가 잘 정돈된 산책로를 걷다 보니 저 앞에 해수 풀장이 보였다.
원래라면 이 저택에 필요하지도 않고, 카르젠이 오직 저만을 위해 만들어 준 해수 풀장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약간의 자신감이 차오르며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그래. 어설프게 거창한 고백을 던지느니,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하자.’
현서는 안전한 길을 좋아했다. 훗날 이불 뻥뻥 걷어찰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자는 주의였고, 오늘에야말로 담담하게 굴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박사박 정돈된 길을 밟으며 풀장에 가까워진 현서는 확 풍기는 바다 냄새만으로도 청량함을 느끼며 카르젠의 팔을 더 꼬옥 끌어안았다. 카르젠 역시 제 팔을 옆구리에 더 밀착했고, 현서는 그의 품과 한층 가까워진 상태로 입술을 벌렸다.
“카르젠.”
“응.”
“카르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지금 하려고요.”
“기다리고 있던 보람이 있네.”
기다렸다는 말에 현서가 작게 웃으며 잠시 팔을 풀었다. 그리곤 카르젠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카르젠은 부드러운 눈매를 유지하면서도, 일부러 웃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그의 표정을 대번에 알아차린 현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금 설마 일부러 안 웃는 거예요?”
“응. 현서가 피할까 봐.”
“아하하, 눈부시긴 하지만, 웃어도 돼요. 저 카르젠이 웃는 얼굴 좋아하거든요.”
“…….”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밝아졌지만, 현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카르젠의 모든 얼굴이 다 좋은데, 그중에 웃는 얼굴이 제일 좋아요.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건 별개고… 음…… 그리고 눈부셔도 괜찮으니까, 카르젠이 제게 매일 웃어 줬으면 좋겠어요.”
“…….”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현서는 이제 거의 감았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눈 떴을 때 내 옆에 카르젠이 있으면 좋겠다고.”
“…….”
“앞으로도 쭉, 그랬으면 좋겠다고… 음…… 카르젠. 괜찮다면, 앞으로 저와 매일 아침을 함께해 줄래요?”
넌지시 물었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손을 잡아 오는 큰 손을 맞잡은 현서가 함박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어 꾹 감은 채로.
그러다 일순,
“……어?”
중요한 말을 빼먹은 것을 자각한 현서가 놀라 흠칫 몸을 떨며 귀와 꼬리털을 펑- 부풀렸다.
“흐읍……!”
이 고백에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피가 거꾸로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교, 교제……! 결혼을 전제로 교제부터 하자고 말했어야지! 교제하자는 말을 빼먹으면 어떻게 해! 다 건너뛰었잖아! 으아악!’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각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제 몸을 끌어안고 품에 가두는 단단한 팔 덕분에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카르젠의 품에 안긴 현서는 눈이 부셔서,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눈이 너무 부셔서 제게 내밀어진 넓은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귀와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해명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 일단 놀라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게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지, 이비가 뛰어다니는 건지, 카르젠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지만…….
***
“끝이 없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다소 툴툴거리는 감은 있으나, 비명이 끊이지 않는 불바다를 응시하며 하는 말치고는 굉장히 평온한 어조였다.
“후작이 아니라 공작으로 승격하고, 마르카 땅 중 일부는 공작령으로 주는 게 타산이 맞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왕세자 저하.”
현우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수정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내내 실실 쪼개기만 하는 이가 얄미워 수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침대에 누운 채 앞섶을 훤히 벌리고 있는 체스터가 보였다.
“누구는 혼자 뺑이치고 있는데, 아주 팔자 좋으십니다?”
-좀 봐줘. 나도 밤새 회의하고 이제 막 누운 참이니까. 그래도 케이 후작 덕분에 오늘은 발 뻗고 잘 수 있겠군.-
“예예. 다 불사르고 돌아갈 테니, 푹 주무십시오.”
체스터는 저를 노려보는 현우에게 그래도 이제 루아인 소속이라고, 둘이서만 나누는 대화에도 꼬박꼬박 존대를 해 주는 게 퍽 기특하다며 웃었다.
-그나저나 정말 끝없이 쏟아지는군. 내일 복귀는 어렵지 않겠어?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한가?-
“늦어도 내일 저녁엔 복귀할 겁니다. 지병이 악화되고 있으니까요.”
-지병? 지병이라니?-
지병이란 말에 동요를 숨기지 않은 체스터가 일어나 앉아 수정을 가까이 당겼다. 덕분에 수정엔 그의 얼굴만이 가득하게 보였다.
-케이 후작. 그 사정을 제외하고 지병이 있나?-
사정이란 리치에게 당한 저주 때문에 생명력을 흡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현우가 그걸 지병이라 표현할 리는 없으니, 그가 저리 놀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기에,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예. 전 48시간 내에 동생을 보지 않으면 신경질이 나는 지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주변 생물들에게 좋을 일이 없겠죠.”
-허… 놀랐잖아. 하아아…….-
“왜 안도합니까? 심각한 지병입니다만?”
-그래. 그렇다고 하지. 그럼 타지에서 홀로 고생하는 후작을 위해, 케이 소공자 소식을 하나 들려줘야겠군.-
현서의 소식이라는 말에 발밑에서 불타고 있는 마족에게서 시선을 돌린 현우가 수정으로 눈길을 주었다. 어딘가로 팔을 뻗은 체스터가 신문을 집어 들더니 2면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바이스 카르젠,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크리시의 기도회에 첫 참석. 동석한 이는 약혼자 케이 소공자로 밝혀져…….-
“잠깐. 약혼자?”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다 허락한 줄 알았는데?-
현우는 저 능글능글함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에 반응할 새도 없이 주먹을 콱 쥐었다. 거대한 불의 뱀이 지상을 활보하며 마족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불기둥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전부 하나로 합쳐져 해일처럼 도시를 뒤덮은 마족들을 쓸었다.
발밑에서 끼에에에, 크아아아, 캬라라락 괴기한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했지만, 불길은 그 소리도 삼킬 만큼 점점 더 거세졌다. 돌로 지은 건물까지도 전부 녹일 만큼 강인한 불길을 발밑에 둔 현우가 수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약혼? 약호오오온?”
-기사 내용을 보니 아주 알차게 보냈나 보더군.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기자도 생긴 모양이야. 이 그림 보이나?-
수정에 신문 삽화를 들이민 체스터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현우의 저 벙찐 얼굴을 녹화를 해 두고 싶었는데, 장거리 영상 통신 기능만 탑재한 수정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이, 이게 무슨…….”
신문엔 기도회에 참석한 카르젠과 현서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현서는 주변에 앉은 다른 이들처럼 정면만 보고 있었지만, 카르젠은 현서의 어깨를 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짧은 토끼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가 대 무언가 속삭이는 듯이 보였다. 퍽 다정한 모습에 현우가 이를 부득부득 갈자 체스터가 기사를 마저 읽었다.
-기도회가 끝난 후, 마차를 타고 이국의 수프 전문 레스토랑 ‘치게’로 향했다. 아, 이번에 아리스의 전담 셰프 제논이 수도에 오픈한 레스토랑이군. 후작. 괜찮나? 자네 이가 다 나갈 것 같은데?-
신문이 거둬지며 실실 웃는 낯짝의 체스터가 보이자 주먹을 콱 틀어쥔 현우가 심호흡했다. 체스터는 씩씩대는 현우를 보곤 신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기사를 줄줄 읊었다.
-두 사람은 치게에서 소시지와 야채를 듬뿍 넣고 끓인 새빨간 수프가 나올 때까지 깍지 껴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수프에 불린 쌀을 볶아 먹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남은 수프에 쌀을 볶아 먹다니, 생각도 못 한 방식… 후작? 불길이 후작까지 삼킬 것 같은데,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지? 후작? 후작, 정신 차리게. 후작…….-
현우는 지극히 제정신이라는 대답을 하는 대신, 수정을 제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이를 갈았다. 분명 현서에게 어떤 선택을 해도 형은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결혼은 아직 일렀다. 일러도 너무 일렀다. 자고로 연애는 많이 할수록 좋고, 사람 보는 눈도 키워야 하는 법이었다.
‘일단 신문 기자부터 잡아 정정 기사부터 내야겠어. 약혼이라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 보지?’
현우의 분노를 대변하듯 강한 바람을 타고 오른 불길이 거대한 토네이도 불기둥이 되었다.
‘그 여우 같은 놈의 얼굴이 문제야.’
현서는 어려서부터 유독 잘생기고 예쁜 사람에게 약했다. 원래 아이들이 더 사람 얼굴을 가리는 법이라고 해도, 현서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현아에겐 모르는 사람이 와서 엄마 아빠가 찾는다고 같이 가자고 해도, 현서에겐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이 보여도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해야 할 정도였다.
‘경호원도 그 잘생긴 미국인 경호원만 따라다녔었지…….’
현서가 네다섯 살 무렵엔 특히 자기주장이 강해져서,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미국 특수 부대 출신의 잘생긴 가드가 보이지 않으면 그를 찾아 집 마당을 헤집고 다닌 적이 많았다.
그나마 현우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찾지 않았지만, 현우가 학교에 있는 시간에는 그 잘생긴 가드 옆에만 있으려 해서 결국 부모님이 그를 현서의 전담 가드로 배치했었다.
자신이 하교했을 때 그 가드의 품에 안겨 있던 현서를 떠올린 현우는, 이젠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그의 얼굴과 카르젠의 얼굴이 겹쳐 보여 심히 불쾌해졌다.
“후우… 일단 청소부터 하고 가서 제대로 대화해야겠군…….”
***
페이든력 42년 가을 74일 맑음
카르젠이랑 크리시 기도회에 다녀왔다. 기도회보단 팬미팅 같았지만 재미있었다. 기도회가 끝나고 참석자 한정 굿즈도 받았다. 크리시가 직접 축복한 성수가 담긴 미니어처 병이랑 포카였는데, 굉장히 귀엽다. 카르젠도 받았는데 자긴 필요 없다며 나한테 전부 줬다. 형이 오면 보존 마법 걸어 달라고 해야겠다. 점심엔 제논이 차린 레스토랑에서 부대찌개도 먹고 밥도 볶아 먹었다. 제논이 남부에도 식당을 차렸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제논에게 요리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우…….”
일기를 쓰던 현서가 눈을 찌푸리며 펜을 내려 두고 토끼 귀를 꾸깃꾸깃 눌러 비볐다. 누가 제 이야기라도 하는 건지 갑자기 귀가 간지러웠다.
귀를 충분히 꾹꾹 눌러 비빈 현서가 다시 펜을 잡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자, 내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까부터 왜 소파에 앉지 않고 카펫에 앉는 거지?’
서재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던 카르젠은 현서의 위치 선정에 내내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늘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세우고 앉던 현서가 오늘은 소파와 낮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미끄러졌다가 일어날 힘이 없어서 저대로 있는 걸까 했는데, 안정적으로 일기를 쓰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아 오히려 더 의아했다.
‘본인이 편하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지만…….’
저 좁은 틈에 몸을 구기고 안락하게 앉은 모습을 보니 그저 귀여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젠 하다 하다 별게 다 귀엽다는 자각은 없었다. 어쩌겠는가. 카르젠의 눈에 현서란 그런 존재였다. 뭘 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
현서는 카르젠이 저를 관찰하는 것도 모르고 일기에 집중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자 열심히 쓰고, 빠진 부분은 없는지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 완벽한 일기 쓰기를 마무리한 후엔 펜을 내려놓고 소파에 올려 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에메랄드 빛 휴양 도시 남부 여행 완전 정복>
카르젠과 낮에 서점에서 구입한 책의 표지를 본 현서의 귀가 쫑긋 섰다. 표지엔 시원한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제복을 입은 해군과 바닷가재가 그려져 있었다. 표지를 보고 군침을 삼키며 책장을 넘기자 남부 영지에 대한 소개와 목차가 나왔다.
‘우와, 대박…….’
갑자기 군침을 삼킨 탓에 카르젠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지만, 현서의 시선은 거대한 바닷가재를 들고 환하게 웃는 상의를 탈의한 해군 삽화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담은 것은 살수율 좋아 보이는 바닷가재였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카르젠의 눈엔 바지만 입고 복근을 드러낸 해군 놈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하필 또 컬러 삽화여서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미남들을 보고 있자니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와, 필리스에서도 랍스터는 붉은색이네? 엄청 커 보인다. 남부에 가면 꼭 먹어야지.’
‘저 페이지만 유독 오래 보는군.’
현서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오해한 카르젠은 퍽 신경 쓰였지만 애써 담담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저 삽화에 나온 해군 놈들보다 제 몸이 훨씬 좋을 것이 분명했기에, 종국에 현서가 취하게 될 몸은 제 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늘은 같이 자기로 했으니, 가볍게 운동을 해야겠어.’
현서는 헐벗고 함께 목욕할 때보다 침대에 누워 벌어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가슴을 더 의식하는 타입이었으니, 벌크업과 품이 넉넉한 잠옷이 답이었다.
오늘 밤 일과까지 전부 결정한 카르젠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이 서류의 산을 해치워야 체스터에게 퇴직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테고, 현서를 따라 남부로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
늦은 밤.
서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현서를 먼저 방에 보낸 카르젠은 계획했던 것처럼 열심히 운동해 근육을 잔뜩 성나게 만들었다.
거기에 현서가 좋아하는 레몬 향 비누로 몸을 씻고 나와 상큼한 향기까지 더한 상태였다. 덕분에 현서는 훤히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가슴을 흘끔거리며 시선을 흐리고 있었다.
‘이렇게 심미적인 부분에 약해서야…….’
앞으로도 평생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들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그냥 편하게 봐도 되는데 눈치껏 흘끔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애써 웃음을 참은 카르젠은 현서가 먼저 꺼낸 주제를 은근하게 이어 갔다.
“그럼 우리 약혼식은 수도에서 진행할까? 아니면 남부에서?”
현서는 조금 전 카르젠에게 루아인에선 약혼식을 따로 올리냐고 물었을 뿐인데, 내친김에 장소를 정하려는 듯한 물음에 입술을 말아 넣었다.
카르젠은 현서가 보이는 행동이 곤란하거나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웃음을 참느라 생긴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서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 약혼식은 수도나 남부 둘 다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약혼식은 어떻게 해요? 제가 살던 나라는 약혼은 거의 생략하는 추세라서 주변에서 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약혼식 전에 상견례 같은 것도 하겠죠?”
“으음…….”
보통 루아인에서는 귀족끼리 약혼일 경우 어지간하게 급한 게 아닌 이상 시간을 두고 진행했다. 여기서 급한 일이란 혼전 임신 같은 부분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아 연애를 해도, 결혼은 결국 정략처럼 진행하는 편이었고 양 가문의 허락이 없으면 진행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들이 고분고분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젊은 귀족들은 갖은 수를 동원해 결국 결혼해 내고 마는 경우가 많았는데, 속도위반과 다른 혼담이 오가지 못할 만큼 공개 데이트를 즐기는 여론 조성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문 간의 득실을 따질 경우가 많은 귀족의 이야기였으니, 카르젠 본인은 관계없는 편에 속했다. 애초에 제 어머니는 자신이 선택한 반려를 존중하고 축하해 주는 선에서 그칠 것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버지인 바이스 칸 백작이 반대한다고 해도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어머니께서 허락하신 일 앞에 아버지의 반대는 태풍 앞에 민들레 홀씨만큼의 위력도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
잠시 루아인의 귀족 간의 혼례에 대해 생각한 카르젠이 다시 현서에게 집중하며 대답했다.
“일단 가문끼리 협의를 많이 하지만, 우린 정략결혼이 아니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가볍게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며 약혼할 의사를 밝히고, 형식상 허락을 구하는 거라고 보면 돼.”
굳이 ‘형식상’에 힘을 주어 말했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현서는 한국의 상견례랑 비슷한 것 같다며 말했다.
“가문끼리 허락…… 음, 전 가주인 형에게 받으면 되겠죠? 이미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도 받았으니까 형은 당연히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현우가 절대 제 의견을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깃들어 있는 대답이었다. 카르젠은 곧 돌아올 현우에게 모든 것을 통보하는 격이 되었지만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형님 성격에 내가 진짜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진즉 치워 버리셨겠지.’
엄밀하게는 치우지 못했다는 게 맞는 이야기겠지만, 카르젠에겐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김현우라는 존재에게 있어 소중한 것은 김현서고, 제 동생이 상처받는 꼴을 보느니 저가 인정하기엔 부족한 존재를 곁에 두는 편을 택할 것이 분명했다.
각자 다른 의미로 현우의 허락을 의심치 않고 있을 때, 현서가 말을 이었다.
“아, 에이디아 님이랑 대부모에게도 말해야겠네요.”
“응. 프란제르 후작가에는 약혼하게 됐다는 통보를 하고, 음…… 일단 에이디아 님께는 내가 알아서 연락드릴게.”
어쩌다 보니 처가 같은 존재가 졸지에 셋이나 된 카르젠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북부를 다스리는 프란제르 후작 가문과, 바다를 다스리는 초월신 할탄의 아이인 인어왕 에이디아. 그리고 8서클 마법사 형님까지…….
이러다 처가 등살에 밀려 압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스펙이었다. 애써 현실을 부정하듯 생각에서 밀어 버린 카르젠이 은근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
“현서는 어디서 약혼식을 하고 싶어?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
지역에 이어 구체적인 장소 언급에 현서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카르젠은 현서가 저기서 조금 더 고민하게 되면 입술을 삐죽 내미는 단계가 올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귀여운 오리 입을 기대하며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우우움…….”
“…….”
조금 더 눈이 가늘어졌지만, 아쉽게도 오리 입술이 되기 전에 먼저 운을 뗐다.
“약혼식이나 결혼식을 신전에서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자기가 믿는 신이 있으면 신전에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수도 저택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다양해. 딱히 정해진 건 없어. 결혼할 커플 마음이지.”
‘커플’ 부분에 은근히 악센트를 강하게 넣은 탓인지, 저 단어를 들은 현서의 귀가 쫑긋거렸다. 카르젠은 현서의 귀를 손가락 바깥 부분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아래에서 위로 털을 보듬어 주듯 쓸어 올려 줄 때마다 귀가 연신 쫑긋쫑긋 움직였다.
간지러워서인지 얼굴이 달아오른 현서는 카르젠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시선을 살짝 내려 카르젠의 가슴께를 보며 말했다.
“어, 그럼. 바닷가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가능하다면 약혼식이나 결혼식 중 한 번은 프리스트의 축복을 받고 싶은데요…….”
프리스트의 축복이 아니라 크리시의 축복이라는 것을 눈치챈 카르젠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에벨루스의 대신관 나이젤 님께 말씀드려 볼까?”
“네? 어, 음…….”
바로 긍정하지 못한 현서가 카르젠의 가운을 슬며시 잡아당기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카르젠은 저 소심한 반응이 귀여워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대신관님의 축복을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 부탁이라면 들어주실 거야.”
“굳이 어렵게 높으신 분을 모실 것까진 없어요. 전 대신관님이 아니라도 괜찮은데요…….”
반대하며 긴장했는지 짧은 토끼 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귀여웠다. 여기서 더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지만, 현서의 반응은 가끔 상식을 뛰어넘었으니, 이러다 가슴을 맞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크리시가 좋겠지?”
“……! 네!”
카르젠은 이제야 저와 눈을 맞추는 현서에게 눈을 흘기며 덧붙였다.
“현서는 크리시를 너무 좋아해.”
“…….”
“부정도 안 하다니…….”
“…….”
현서의 시선이 다시 흐려졌다.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 모습에 어째 더 속이 아파진 카르젠은 일부러 제 가슴을 짚으며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크리시를 이길 수 있도록 평생 노력해야겠어.”
“아, 아니이…… 카르젠. 크리시는 최애지, 연애 대상이 아니잖아요.”
“그 최애라는 것도 내가 하고 싶어. 현서에게 있어서 형님을 제외한 다른 최애는 나만 하고 싶어.”
“…….”
현서는 연출된 표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잘생긴 얼굴로 저리 씁쓸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콕콕 쑤셨다. 양심이 실존한다면, 저 부근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최애랑 연인은 다른 거라며 끝까지 못 박은 후, 은근히 주제를 돌렸다.
“부모님께 인사는 언제 드려요?”
“현서가 원할 때.”
“그럼 이번에 남부로 내려가기 전에 뵙는 게 낫겠죠?”
“그럴까? 날이 밝는 대로 말씀드릴게.”
“네. 으으, 이제 좀 실감 나고 떨리네요.”
연인의 부모님을 처음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했는지, 현서의 토끼 귀가 추욱 늘어졌다. 카르젠은 그런 현서의 귀를 손으로 다시 세워 주며 말했다.
“긴장돼?”
“당연하죠. 카르젠의 부모님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셔야 할 텐데…….”
카르젠 입장에선 대체 뭐가 문제인지 전혀 예상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니, 긴장이라기보단 걱정에 가까운 듯한 모습에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두 분은 걱정하지 마. 오히려 나는 현서가 내 부모님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물으려던 현서는 물음표 가득한 얼굴의 카르젠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내 부모님의 생각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듯해서, 그래서 그저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자정이 지날 때까지 약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초대할 지인 리스트가 어마어마했다. 카르젠 측은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어쩌면 엘프 조부모도 참석할 수 있었다. 또 바이스 백작 가문과 친한 가문도 일부는 초대해야 할 터였다.
체스터도 참석할 것이 분명했고, 약혼식 케이크는 내가 먼저 먹겠다며 맨 앞줄에 앉은 리엔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리엔과 체스터 사이에 앉아 풍성한 꼬리를 끌어안고 있을 유사까지 떠올린 카르젠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 했지만, 현서 측 참석자 맨 앞줄을 떠올린 순간 입매가 굳었다.
저를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영혼 없이 짝. 짝. 짝. 박수 치고 있을 현우. 그 옆으로는 모든 상황을 재미있어할 아리스와 칼라일 후작 부부와, 해사하게 웃기만 해도 위압감 넘치는 에이디아까지…….
‘에이디아 님이 만약 참석하신다면, 파트너는…….’
아마도 지그하르트일 것이다.
“…….”
‘별일 없겠지…… 반지나 빨리 완성됐으면 좋겠군.’
다른 걱정 다 미뤄 두고 프러포즈를 위해 주문한 반지를 생각할 동안, 잠깐 사이에 잠든 건지 색색 느리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막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현서를 바라보던 카르젠은 조심스럽게 협탁으로 팔을 뻗어 수정 램프를 껐다. 이어 아까부터 자꾸 눈이 마주쳤던 크리시의 미니 초상화 액자도 엎어 두고 약혼식을 어떻게 올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서가 좋다고 했던 꽃은 전부 봄꽃이었으니, 마법으로 개화시켜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동생 레오닉에게 연락해 꽃을 부탁하고, 크리시에게 말해 에벨루스 신전에서 약혼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미리 말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은 현서 말대로 다가올 봄에 바닷가에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마침 바이스 가문에서 소유한 섬이 있으니,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섬 별장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약혼식 예복 디자인을 같이 고르는 것도 재미있겠네.’
항상 제 아들들의 결혼식 예복은 직접 지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어머니가 떠오른 카르젠은, 현서만 좋다면 결혼식 예복은 어머니께 부탁드리고 싶었다.
약혼식과 결혼식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진 순간, 얕게 잠든 현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누응… 브셔어…….”
“…….”
웅얼웅얼 뭉개지는 발음 속에 눈부시다는 뜻을 이해한 카르젠은 제 반려를 품에 안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제 가슴을 주무르는 요망한 손길에 결국 소리 내 웃어 버렸다.
***
현서는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르젠이나 크리시, 형을 만났던 것처럼 선명한 자각몽은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신은 깨어 있었다.
꿈에서 현서는 유니콘을 타고 무지개 위를 달렸다. 무지개 끝에서 점프한 유니콘이 큼지막한 구름 위로 착지했다. 이어 다른 구름과 구름 사이를 계속 넘나들다 점점 지상으로 향했다. 유니콘은 거대한 빌딩을 타고 내려가더니 이내 넓은 실내로 들어가 곧 딱딱한 플라스틱 회전목마로 바뀌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난간 밖으로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쌍둥이 동생 현아와 부모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현서는 어느새 제 몸을 안고 회전목마에 함께 탄 형의 가슴에 편히 기대앉아 까르르 웃으며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신이 나 몸이 들썩이자 흥분한 동생을 달래려는 듯, 허리를 안고 있는 형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 바퀴 크게 돈 회전목마가 다시 가족들과 마주하게 되자 이번엔 나이가 든 부모님과 훌쩍 큰 현아가 보였다. 저 모습을 보니 대략 헤어지기 직전이거나, 저가 죽고 몇 년 정도 후처럼 보였다.
손을 흔들던 현서는 점점 느려지는 회전목마를 느끼며 이제 꿈에서 깨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다른 세계에서 형을 만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다지 자유도가 높은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 현서는 하고 싶은 수많은 말 중에 몇 마디만 겨우 육성으로 낼 수 있었다.
괜찮아.
있지, 나는 잘 있어.
보고 싶어.
사랑해.
어머니와 현아가 힘차게 손을 흔들고,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 안은 아버지가 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회전목마가 빙글 돌아 다시 유니콘으로 변해 하늘로 솟아오른 바람에 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현서는 저를 끌어안은 이의 품에 기댄 채 눈을 부스스 떴다.
겨우 뜬 시야에 가장 먼저 새하얀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굳건한 팔이 느껴져 뒤척뒤척 몸을 돌려 누우니, 잠들기 직전까지 봤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현서야, 잘 잤어?”
아침 인사를 건네며 눈을 곱게 접어 웃는 탓에 현서는 그의 품에 파고든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꿈 때문인지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륵 흘렀다. 코도 살짝 막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대로 조금 더 자고 싶었다.
눈가를 닦아 주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현서는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카르젠의 체향을 좋아했다.
아직 잠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핑계로 너른 가슴에 볼을 비볐다. 잠결이니 할 수 있는 과감한 행동 때문인지 정수리 위로 쿡쿡 웃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귀가 쫑긋해진 현서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바로 잠들면 미련 가득히 붙들고 있는 꿈결에 다시 닿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꿈보단 저를 안아 주는 이에게 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젠.”
“응.”
“…카르젠…….”
“응. 현서야.”
“꿈에서 엄마랑 아빠랑 동생을 봤어요…….”
“응.”
“지금 다시 잠들면,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응.”
큰 손이 현서의 등을 보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길은 마치 더 자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부스럭 고개 든 현서가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등을 보듬던 손길이 올라와 현서의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어루만지다 토끼 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털의 결을 고려한 섬세한 손길이었다. 현서는 카르젠의 큰 손에 귀를 가져다 비비며 말했다.
“그냥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카르젠과 함께 아침을 먹고 싶어요.”
“…….”
“아침 먹고 나서 어제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요.”
“응. 분명 즐거울 거야.”
“형이 돌아오면, 빠른 시일 내로 약혼하고 싶다고 말할래요. 깜짝 놀라겠죠?”
“어마어마하게 놀라시겠지.”
고저 없는 답변에 스며든 긴장감을 눈치챈 현서가 쿡쿡 웃었다.
카르젠은 해사하게 웃으면서도 다시 물기를 머금은 현서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놀랐는지 눈이 커지고 토끼 귀 털이 펑 부푼 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이번엔 볼에 입을 맞췄다.
달싹이며 벌어진 작은 입술은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하고 앙다물렸다. 현서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본 카르젠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우리는 앞으로 많은 날을 함께할 거야.”
“…….”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어떤 날은 특별하고, 어떤 날은 평범하고, 어떤 날은 굉장히 즐겁기도 하겠지. 또, 아주 가끔은 속상한 날도 생길지도 모르지만.”
“…….”
“내게 남은 모든 날을 현서와 보내고 싶어.”
“…….”
나지막한 말에 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들고 천천히 카르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살포시 맞닿았다 떨어질 때, 쪽- 소리가 났다. 토끼 수인이나 하프엘프가 아니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저 작은 소리를 기점으로 시야를 방해하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서가 눈을 조금 편히 뜨자 놀란 얼굴의 카르젠이 보였다. 그러다 현서가 대비하기 전, 폭발적으로 강한 빛이 망막을 공격했다.
‘아악, 내 눈, 내 눈!’
강렬한 빛에 놀란 현서가 눈을 꾹 감고 낑낑대는 짧은 찰나에 쪽- 쪽쪽- 세 번이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현서는 지금 자긴 누구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데, 신나서 쿡쿡 웃으며 연신 뽀뽀해 대는 카르젠이 얄미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아 정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이렇게 개그로 끝날 줄 알았다고!’
지금껏 내내 숨죽이고 있던 이비의 고동 역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문제는 설레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느낌이 강한 기색의 고동이었다.
이비의 반응까지 더해져 확 붉어진 현서는 입술을 더 말아 넣었다. 두근두근 핑크빛 로맨스 감성 터지는 첫 키스는 무슨, 내 인생이 그렇게 알콩달콩 흘러갈 리가 없다며 버둥대는 동안에도 카르젠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 애인 웃는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게 말이 되냐구! 평생 이렇게 살 순 없어!’
이 체질을 바꿀 방법이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현서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
“……-까지 섬멸해 수도는 확보했습니다. 슬슬 진짜 토벌대를 출정하는 게 유리한 시기입니다.”
왕세자의 집무실에서 단독보고를 마친 현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제 무릎을 두드리는 체스터의 긴 손가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툭- 툭- 투툭-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손길이 일순 멎자 시선은 자연스레 다시 위로 향했다. 현우와 시선을 맞춘 체스터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누가 들어도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혼자서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는데…….”
“…….”
“케이 후작. 아쉽지 않나?”
마족에게 뺏긴 마르카 토지 탈환은 현우 혼자 출정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프란제르 후작가의 기사단과 각 신전의 성기사 팔라딘이 함께 출정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즉, 케이 후작 혼자만의 공이 아닌, 북부의 프란제르 후작과 각 신전들과 공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 했으면서, 그래도 정말 괜찮냐는 물음에 현우는 어차피 이미 귀환 쇼까지 다 보여 준 마당에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냐는 물음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약조하신 것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음…… 뭐, 알겠네. 곧 케이 소공자와 함께 만나는 게 좋겠군.”
체스터는 제 앞의 남자가 정말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하게 웃었다. 케이 후작의 가주인 현우가 이 말도 안 되는 토벌을 대가로 요구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고결한 맹세>
고결한 맹세는 귀하디귀한 <용의 눈물>이라는 보석을 제물 삼아 초월신을 잠시간 중간계에 부를 수 있는 의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초월신의 힘을 담은 형상을 잠깐 강림시키는 것이지만, 이 행위는 어마어마한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초월신의 신력을 통해 나눈 맹세는 영혼이 결속되어 절대 어길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맹세를 어긴다면 죽느니만 못한 끔찍한 벌을 받게 되는 탓에 누구도 이 맹세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용의 눈물 보석을 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서 못 하는 게 맞다고 해야겠지만.
‘용의 눈물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과거 동대륙에서 지내던 시절, 동대륙 남쪽을 다스리는 수룡에게 받은 보석이라고 이야기하던 현우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지나가던 수용이 오다 주웠다며 나한테 버리다시피 했다.’수준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게 어찌나 얄밉던지…….
‘용의 눈물 정도면 제국에서 공국을 하나 떼어 내준다고 했을 텐데.’
용의 눈물이 가진 힘은 실로 대단해서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 이도 살릴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보석이었다. 드래곤들 역시 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 대단한 보석으로 굳이 고결한 맹세를 하겠다는 현우의 목적은 하나였다. 루아인 왕가와 케이 후작가의 변치 않는 관계. 즉 배신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체스터는 현우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를 것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케이 후작. 내친김에 소공자와 내일 입궁하는 건 어떻겠나. 아, 조금 쉬는 게 낫겠군. 그대가 앞으로 꽤 바빠질 것 같으니 말이야.”
“…….”
“작은 선물로 약혼식 예복을 맞추도록 멜리사 디자이너를 보냈네. 슬슬 귀가하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것 같군.”
현우는 체스터가 실실 웃으며 제 동생의 약혼을 언급하는 모습을 보고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고작 이틀. 사나흘도 아니고 고작 이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벌써 현서와 그 여우 같은 놈의 약혼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바로 입궁해 보고하느라 동생을 만나진 못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지금쯤이면 분명 제게 약혼하기로 한 것을 어떻게 ‘통보’해야 할지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현서는 어려서부터 마음먹은 건 바로 하려고 했으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집안 내력인지 불도저가 따로 없었다. 불도저 기질이 나타나는 상황만 조금씩 다를 뿐, 가족 모두 마음에 불도저 하나씩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군요. 동생을 위한 선물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
현우의 담담한 반응을 본 체스터가 노골적으로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그럼 약혼식 전에 소공자와 입궁하는 거로 알고 있도록 하지. 출정 건은 미리 맞춘 대로 발표할 테니, 후작은 이제 돌아가게.”
“예.”
어서 사랑하는 동생에게 썩 꺼지라는 무언의 축객령을 받은 현우는 기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찌 보면 지금의 저도 이 녀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 크리시가 한숨을 참았다. 인정하고 나니 입이 썼다. 달콤한 디저트라도 먹어야 하나 싶었는데 이 팔불출 녀석은 여전히 꽃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곧 네 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녀석은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결혼식만큼 화려하게 파티를 열더니, 올해엔 어쩐 일로 단둘이 보낼 예정이라는 말에 크리시는 안도하면서도 의아했다.
‘이 녀석은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제 친구의 반려가 비밀로 해 달라고, 나중에 직접 알려 주고 싶다고 부탁하는 바람에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수상했다.
-올해는 결혼기념 파티 진짜 안 할 거냐?
-응. 둘이 여행 가기로 했어.
일부러 은근하게 물어본 크리시는 친구의 대답 이후 들린 사념에 안도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 경사를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오늘 울지 않을까.’
눈물을 직접적으로 흘릴 수는 없으니, 아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 반려를 꽉 끌어안지 않을까? 아마 제 반려를 안아 들고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사용인들에게 전부 기쁜 소식을 알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분명……
‘당장 축복하러 오라며 나를 찾겠지! 젠장! 당분간 저녁엔 시간 비워 놔야겠군.’
빛이 있는 세계 개정판 3권 53페이지 中
***
늦은 밤.
북부 프란제르 후작성 본관 저택 앞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던 아리스는 침실로 향하는 대신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백색 소음이 전부 눈에게 잡아먹힌 탓인지, 오늘따라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데다가 딱히 잠도 오지 않았다.
괜히 서랍을 열어 본 아리스는 두 달 전에 받아 보관해 둔 석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따로 10부를 더 보관해 둔 상태였지만, 가끔 꺼내 보느라 한 부만 서랍에 넣어 둔 신문은 2면이 제일 앞으로 오게 접혀 있었다.
신문 2면엔 장면 기록 수정으로 찍은 익숙한 인물들이 나온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카르젠과 현서, 그리고 유사였다. 사진 속에 현서는 아기 여우 요괴 유사를 안고 카르젠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현서와 유사는 정확하게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카르젠만큼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오직 현서만 보고 있어 화제가 됐던 사진이었다.
<성대한 약혼식을 치른 케이 소공자와 바이스 공자, 튜르카 영지로 떠나다.>
참석자 리스트부터 시작해 그 규모까지, 온갖 신기록을 갈아 치우며 루아인 역사상 가장 성대했다고 기록된 약혼식의 주인공 바이스 카르젠 공자와 케이 현서 소공자가 금일 오전 튜르카 영지로 떠났다.
이들의 여행길엔 튜르카 영지와 오델림 영지를 기준으로 남부 지역을 다스릴 케이 후작과 동대륙 북부 지역을 다스리는 구미호 수장의 아들 유사 경도 동행했다. 루아인 수도 아브델에서 2년간 유학한 유사 경은 앞으로 케이 후작 가문에 의탁하여 남부에서 단기간 유학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스 카르젠 공자는 루아인 왕성 제1기사단 단장직에서 사퇴 후, 남부 튜르카 영지 해군 기지의 부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이에 제1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셰이어스 마이어가 바이스 카르젠 공자를 이어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케이 후작은 모든 계층이 살기 좋은 남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인터뷰하며……
“살기 좋은 남부라…….”
이미 읽었던 기사지만, 두 달 만에 다시 읽으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 이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다만 본질이 달랐다. 살기 좋은 남부가 아닌, 제 동생에게 안전한 남부로 만들겠다는 말이었을 텐데, 이게 이렇게 포장이 되는구나 싶어 자꾸만 웃음이 났다.
“유사만 신나겠네.”
유사의 유학은 약혼식 날, 곧 남부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기 여우가 나는 아직 현서와 제대로 놀지 못했다며 드러누워 오열하는 바람에 거의 즉흥적으로 결정된 부분이었다.
이어 매일 밤 같이 자도 되냐고 묻는 유사에게 현서가 웃으며 끄덕인 순간, 카르젠이 표정 관리에 실패했던 것도 가관이었다.
당황해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진지하게 아기 여우를 설득하려는 카르젠과, 뒤에서 세상 다 가진 얼굴로 해사하게 웃는 현우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길 수 없었던 것은 리엔과 체스터와 크리시에게 있어 천추의 한이 되었다.
‘재미있었지…….’
아리스는 약혼식 내내 행복하게 웃던 대자 현서를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와 크리시 사이를 막아서며 짧은 귀를 파르르 떨던 녀석을 마주했던 때만 해도 마냥 아이 같았는데, 그 짧은 새 훌쩍 커선 갑자기 약혼하겠다고 통보하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 호로록 약혼식을 올렸다.
아리스는 약혼식 내내 저와 팔짱을 끼고 다니며 웃던 현서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 눈이 내리면 꼭 눈 구경을 하러 온다고 했으면서, 통 연락이 없었다.
‘설마 남부에 눈이라도 내린 건 아니겠지?’
현서가 지내고 있는 튜르카 영지는 근 30년째 눈이 내리지 않았다. 눈이 내렸다는 관측이 있던 날에도 진눈깨비가 흩날린 정도였지, 쌓인 적은 없었다.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곧 제 대자가 놀러 올 거라는 기대감을 안은 아리스가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땐 굳이 통신 수정을 두고 편지를 쓰는 게 최고였다.
***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야 할 새벽녘이지만, 평소와 달리 음소거라도 된 것처럼 고요했다.
이질적인 고요함에 부스스 눈 뜬 현서는 방구석에서 은은하게 발광하는 수정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한겨울인 밖과 훈풍 도는 실내의 온도 차 덕분에 창문은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겨우 실눈을 뜬 상태로 비실비실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보온 마법이 둘러진 숄을 몸에 두르고 창가로 향했다.
달칵-
창틀의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열자, 생각지도 못한 새하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헛? 눈이네?”
남부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거의 호두알만 한 사이즈의 함박눈이었다.
정원은 이미 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모래사장 역시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설경에 시선을 뺏긴 현서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
잠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현서는 훅 들이닥치는 겨울바람에 눈을 감았다 떴다. 얼굴이 차가워지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코니로 나가고 싶었지만, 눈이 쌓인 탓에 보송보송한 슬리퍼가 젖을까 봐 창문을 닫고 침대 옆 내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카르젠?”
평소 저가 내문 가까이만 와도 일어났을 그가 지금은 깊이 숨을 내쉬며 자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현서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뭐 피곤할 일이라도 있었나?’
자는 거면 굳이 깨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시간 그를 살피던 현서는, 갑자기 뒤척이며 잠옷 앞섶을 은근히 푸는 손길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카르젠. 설마 자는 척하는 거예요?”
“…….”
“…풉…….”
“…….”
대답은 없었지만, 카르젠의 입술이 묘하게 떨린 것을 캐치한 현서가 그의 몸 위로 발라당 엎드렸다.
“카르젠. 일어나 봐요. 밖에 함박눈이 내려요.”
“응. 봤어.”
“봤으면 깨우지!”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면 볼 텐데…….”
“밖에 나가요!”
“으음…… 안 돼. 아침에 나가자.”
“지금 나가요~ 네?”
“흠…….”
카르젠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위에 엎드린 현서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려다봤다. 저 간절한 눈빛에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던 카르젠이 결심한 듯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데굴 굴러 누운 현서가 빨리 나가자며 벌떡 앉아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굳건한 팔이 몸을 끌어안았다.
“으앗!”
와락- 당겨져 다시 발라당 누운 현서는 순식간에 제 몸을 덮는 이불을 뻥 차려 했지만, 이불 위로 몸을 토닥여 주는 카르젠의 손길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였다.
“해 뜨고 녹을지도 모르잖아요?”
“저 정도 눈이면 안 녹을 거야. 장담해.”
“그래도요…….”
“진짜야. 안 녹으니까 날 밝고 나가자. 응?”
현서는 자그마치 10년 만에 눈을 직접 밟을 수 있는 기회를 한시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저를 말리는 카르젠을 두고 혼자라도 당장 튀어 나가고 싶었지만, 다정하게 달래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제 욕구를 억누르며 물었다.
“진짜 안 녹을까요?”
“응. 걱정하지 마.”
“……진짜?”
“응. 진짜. 그러니 더 자. 늦게 잠들어서 몇 시간 못 잤잖아.”
책을 읽다 늦게 잠들긴 했으니 할 말이 없었던 현서가 억지로 눈을 감으며 투덜댔다.
“설레서 못 잘 것 같은데…….”
토닥- 토닥토닥-
“카르젠. 그냥 나가면 안 돼요? 우리 눈사람 만들기로 한 거 기억하죠?”
“응. 그럼. 기억하지. 아침에 만들자. 일단 조금 더 자.”
토닥토닥-
“…이미 잠 다 깼는데…….”
토닥토닥-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등 두드린다고 잠들 줄 알아요?”
그 물음에 대답 대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박자로 계속 토닥여 주는 따뜻한 손길에 점점 눈이 감긴 현서가 카르젠의 가슴에 이마를 콩-박고 말했다.
“일어나면 유사랑 셋이 놀아야 하니까, 그전에 카르젠이랑 단둘이 첫눈을 밟고 싶었는데…….”
“…….”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이따 유사랑 셋이 눈사람이나 만들어요.”
“…….”
등을 두드려 주던 손길이 뚝 멎었다. 이어 몸을 일으켜 앉은 카르젠이 현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따뜻하게 입고 나가자.”
“좋아요!”
“카르젠. 같이 눈사람 만들자는 거였지, 나를 눈사람으로 만들라는 건 아니었는데…….”
“따뜻하게 입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카르젠이 어찌나 두툼하게 껴입혔는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현서는 마치 오목눈이새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팔이 내려가지 않아 허수아비처럼 어정쩡하게 팔을 벌리고 카르젠과 손잡은 현서는 저택을 나가 정원으로 내려가며 연신 감탄했다.
“우와, 눈 진짜 많이 내렸네요? 남부는 눈이 안 내린다더니……!”
“이례적인 현상이긴 하네.”
옷 덕분에 뒤뚱뒤뚱 걷던 현서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정원에 다 내려서니 눈이 무릎까지 닿았다. 천진한 아이처럼 까르르 웃은 현서가 카르젠과 손을 맞잡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와, 눈 진짜 오랜만에 밟아요. 모처럼 눈이 내렸으니까 눈사람 대회를 하자고 할까요?”
“좋은 생각이야.”
현서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처음으로 밟는 게 너무 기분 좋다며 웃었고, 카르젠 역시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함께 도란도란 대화하며 정원을 빙 돌아 저택 뒤편으로 향하는 동안 맞잡은 손을 앞뒤로 붕붕 흔들던 현서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후아아~하고 내쉬었다. 공중에 흩어지는 입김을 따라 하늘로 시선을 돌린 카르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서와 처음 했던 산책도 밤이었지.”
“네. 그땐 별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눈 때문에 보이지 않네요.”
평소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현서였기에, 혹시나 아쉬워하면 어쩌나 싶었던 카르젠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 내리는 밤하늘은 처음 본다고 행복해하는 얼굴엔 천진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우주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게.”
‘현서라면 분명 팝콘에 비유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별이라니…….’
함박눈이 어지간히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싶었던 카르젠이 작게 웃자, 그가 웃는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웃은 현서가 뒤뚱뒤뚱 걸으며 말을 이었다.
“이따 아침에 밥 먹고, 유사랑 형이랑 다 같이 눈사람 만들어요.”
“꼭 만들자. 재미있겠다.”
“응, 그리고, 눈이 내리니까 아침 메뉴는 따뜻한 국밥이 좋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카르젠은 현우가 어디선가 잡아 온, 아니. 어디선가 섭외해 온 같은 별 출신의 쉐프 덕분에 이런저런 메뉴를 도전하는 중이었는데, 그중 국밥이라는 음식은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실 현서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저도 맛있게 먹게 되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제 입맛까지 자연스럽게 바꿔 버린 현서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던 카르젠은, 일정하던 현서의 발걸음 끝에 뭔가 툭 걸린 것을 눈치채고 두리뭉실한 몸이 무너지기 전에 와락 끌어안았다.
“헉!”
발을 헛디뎠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 카르젠이 먼저 끌어안아 놀란 현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 옷깃을 잡고 자세를 다잡은 현서가 고개를 든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흩날리는 눈발에 안면을 얻어맞으며 눈을 가늘게 뜬 현서는, 제 볼을 간질이는 카르젠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쿡쿡 웃었다.
“그때 산책할 때도 카르젠의 머리카락이 간지럽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그땐 자신이 카르젠과 손을 잡고 함께 눈을 밟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카르젠 역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던 현서는, 그의 큰 손이 제 볼을 보듬어 주기 시작하자 배시시 웃으며 살짝 뒤꿈치를 들었다.
시야가 밝아지며 입술이 포개진 순간 현서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무실 창밖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현우 역시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잠이나 잘걸…….”
내일 처리해도 될 서류를 굳이 오늘 끝내려 한 자신을 탓한 현우는 제 시야에 들어온 액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둘이 붙어 헬렐레하는 꼴을 안 보려고 기껏 책상에 앉았더니, 보이는 거라곤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카르젠과 현서였다.
물론 카르젠 얼굴 부근에 펜 꽂이를 세워 둬 잘 보이지 않았지만, 행복해 보이는 제 동생의 얼굴은 사진 속이나, 창밖의 실물이나 똑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말없이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우의 얼굴이 점점 풀어지더니, 이내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이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제 동생이 행복하면 그거로 됐다고 생각한 현우가 다시 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