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9)

### 챕터 14

재판일 당일.

‘망할 왕세자 녀석…….’

현우가 벌써 속으로 스무 번은 넘게 삼킨 말이었다.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법정에서 혼자 무도회에 온 것처럼 필요 이상으로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체스터를 보고 있으니 더 약이 올랐다.

법정에 모인 참관객들이 실형을 선고받은 남부의 귀족에게 시선을 줄 동안, 현우의 원망 섞인 시선은 내내 체스터 왕세자에게 머물고 있었다.

‘우리 현서랑 점심 먹어야 하는데! 이놈의 재판은 언제 끝나!’

현우는 동생 현서와 재회한 후, 매시간을 분, 아니 초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토끼 같은 동생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게 너무 아까웠지만, 이미 참석한 것을 어쩌겠는가…… 체스터가 원하는 대로 ‘그’를 저가 데리고 가는 모습을 만인에게 보여 주면 제 할 일은 끝날 테니 인내하려 노력했다.

‘빨리 끝내라, 좀.’

애석하게도 지루한 재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현우의 입장에서 지루한 재판이고, 다른 이들에겐 전대미문의 흥미진진한 재판이었다.

죄를 저지른 이들이 귀족임에도 실형이 선고되었고, 형벌이 무거워 가문 척결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보기 드문 케이스긴 했지만, 정신이 이미 그놈의 저택에 돌아가 있는 현우의 흥미를 끌진 못했다.

“……-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환각을 일으키는 캔디를 유통한 죄. 소수 종족 납치 및 불법 매매에 직접 관여한 죄가 인정되었다. 하여, 트레보 남작의 남작 작위를 박탈하고, 북부 프란제르 영지의 얼음 감옥에 20년간 투옥한다. 또한 트레보 남작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지그하르트에게 산 채로 잡혀 온 남부 귀족들의 죄를 줄줄 읊는 체스터의 친부이자 루아인의 현왕 페이든의 선고에 겨우 버티던 트레보 남작의 몸이 무너졌다. 페이든은 트레보 남작의 작위를 박탈하고, 그를 척박한 얼음 감옥에 투옥하는 것으로 사실상 사형을 선고했다.

“으흐흑…… 어흐흐흑…….”

바닥에 납작 엎드린 트레보 남작이 꺽꺽대며 울기 시작했지만, 재판에 참석한 이들 중 그를 가엽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기사들이 다가와 트레보 남작을 질질 끌고 나가며 짧은 소란이 있었지만, 법정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재판에 참석한 이들 중 대부분이 지금 이 부자의 판결을 보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페이든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페이든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앉은 체스터 왕세자의 시선이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그의 차남 콜린에게 옮겨 갔다.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담담한 얼굴로 제게 내려질 형벌을 기다리고 있었고, 콜린은 아버지의 곁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배심원석에는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 중엔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현우도 있었다.

“이어,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콜린 공자에 대한 판결을 고한다. 중부 마법사 길드의 정신 감정 결과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흑마법사의 세뇌를 당한 것이 인정되었다.”

흑마법 세뇌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피어났지만,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페일리 남작이 착잡한 눈빛으로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잡자, 페이든이 말을 이었다.

“모든 감정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의 검수를 거쳤으며, 페일리 남작이 세뇌당한 동안 사리 분별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정신계 마법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여, 페일리 남작이 환각 및 심장 질환을 일으키는 일명 캔디의 레시피를 제작하고, 흑마법사의 하수인인 트레보 남작과 힐드레드 자작에게 제공한 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죄를 묻는 것은 부당하다 판단, 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배심원들과 일반 참여자들이 대부분 눈에 띄게 안도한 데 반해, 세비어 페일리 남작이 침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보면 사형이라도 선고받은 줄 알 법한 모습이었다. 현우는 그런 페일리 남작을 바라보며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가만히 있어, 남작.”

현우의 속삭임을 들은 건지, 세비어 페일리가 고개를 숙였다. 남작에 대한 선고를 마친 페이든의 시선이 바로 옆 콜린에게 향했다. 콜린은 제 아버지처럼 두 손을 모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페이든은 저가 들고 있던 기록을 훑어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운을 뗐다.

“세비어 콜린 공자. 남부 영지의 도둑 길드 길드원 일곱 명, 그리고 아브델의 불법 노예상 여섯 명에 대한 살해 혐의에 대해 왕실 수사관이 철저하고도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살해 혐의라는 말에 참관석에 앉아 있던 노인과 그의 손자가 콜린을 지켜봤다. 얼마 전 노예상에게서 구조된 아이와 할아버지는 여차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왕의 앞에 넙죽 엎드려 콜린을 변호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둘뿐이 아니었다.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강림한 ‘안식의 신’의 대리인인 콜린에게 도움받고 목숨을 빚진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콜린은 그나마 사형수를 빼돌린 것은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조했다.

그래봤자 열이 넘는 인간의 살해 혐의를 받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겠는가…… 재판 전에 면회 온 현우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술렁이던 법정이 점차 진정되자 페이든이 말을 이었다.

“살인에 대한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

놀란 콜린이 고개를 들고 저도 모르게 현우를 바라봤지만, 현우는 오로지 국왕 페이든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한 차례 술렁임이 법정을 휩쓸었지만, 페이든이 손을 들어 올리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애초에 살인 사건 제보가 아닌, 노예상에게 납치당한 이들의 증언으로 인한 참고 조사였던 점과 살해 현장 및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점. 그리고 평소 콜린 공자의 검술 능력으로 미루어 볼 때 혼자 다수의 장정을 상대하기 어려운 점…….”

페이든의 판결문이 이어질수록 콜린은 입술을 말아 넣었다. 아이들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노예상에게 납치당한 아이들의 증언대로 콜린이 들어간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이후 납치범들이 증발한 게 사실인지라 충분히 조사 가능한 부분이었을 텐데, 굳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자신의 검술 수준이 낮은 것은 알지만, 그런 이유로 용의자 선상에서 배제되었다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현우는 피식거리려는 입술을 말아 넣고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로 사실상 실종에 가까워 살해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으나, 다수의 기물 파손 및 인신매매범의 소굴을 파괴하여 지반이 무너져 총 세 가구에 피해를 입혔으므로, 이에 4천 500만 클로의 벌금을 선고한다.”

“!?”

4천 500만 클로. 이전의 세비어 가문이었다면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었겠지만, 체스터가 내린 상여로 4천 500만 클로의 벌금 따위 가볍게 낼 수 있었다. 가문의 재산 몰수 역시 세비어 페일리 남작이 사망하여 작위가 상실된 후에 이뤄질 예정이었으니, 사실상 그전까지 상여를 다 쓴다고 하여 문제 될 건 없었다.

내내 체스터와 페이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현우는, 조금 전부터 제게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콜린을 향해 고개를 흘긋 돌렸다. 콜린의 표정은 딱 ‘주인님, 대체 뭘 하신 겁니까.’ 라고 쓰여 있었고, 현우는 황당해하는 콜린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재판에 참석한 몇몇 귀족들은 대놓고 편파적인 형벌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말 그대로 시신도 없었고 혈흔도 없었다. 살인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게다가 누가 봐도 유약한 콜린이 무시무시한 잡배들을 혼자 살해하고 흔적도 없이 시체를 치웠다?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찜찜함은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남작 작위 계승의 단절에 있었다. 아무리 세뇌를 당했다 하더라도 캔디로 인한 사망자가 나온 범죄에 가담한 점을 쉬이 넘어갈 수 없으니, 실질적으로 세비어 남작 가문은 페일리 남작이 마지막 대가 될 터였다.

콜린은 작위를 계승받지 못하고, 페일리 남작이 사망할 경우 남작가의 재산은 대부분 왕실에 묶이게 되며, 콜린과 여동생 시엘라는 평민이 될 터였다. 귀족에서 평민 신분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치욕스러운 일이었으니, 타 귀족들이 보기엔 죽느니만 못한 판결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작위 욕심이 없던 콜린과, 자신은 더 강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삼키고 있는 세비어 페일리 남작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형벌이었지만…….

***

“콜린.”

족쇄를 풀고 소지품을 돌려받은 콜린은, 저를 부르는 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더는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에게, 콜린은 입술을 달싹이다 곧 꾸벅 인사를 올렸다.

“케이 후작님.”

“윽……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촌스러워 죽을 것 같으니까.”

체스터의 곁에서 쭉 도움을 주는 대가로 사면받은 현우는 앞으로의 활동을 핑계로 작위를 요구했고, 그 결과 ‘케이 후작’이 되어 버렸다. 그럴싸한 성을 지어내려 했지만, 체스터가 귀찮다는 이유로 대충 인가해 버린 탓에 졸지에 케이 후작가의 가주가 된 현우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간 고생 많았다. 잘 끝나서 다행이구나. 이제 돌아가자.”

“예…… 말도 안 되는 판결이지만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콜린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말도 안 되긴. 넌 이제 평민 신세라고. 원래도 평민처럼 살긴 했다만.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실형보다 더한 거 아니겠어?”

“보통이라면 그렇겠죠.”

웃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콜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체스터에게 삥…… 정당하게 받아 낸 제 마차로 콜린을 데려가며 말했다.

“그렇게 죽상 짓지 마라. 남작 때문에 그러냐?”

“솔직히 아버지는 걱정되지 않습니다. 체스터 왕세자님께서 어련히 거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쉽게 끝나도 될 일인지…….”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최종적으로 왕세자를 위해 평생 봉사를 하게 되었고, 콜린은 체스터의 명으로 케이 후작의 보좌관이 되었다.

한마디로 둘 다 체스터가 제 곁에 두고 관리할 터이니, 누구든지 이에 반감을 갖지 말라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꽉 조여드는 판결이었다.

현우는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 주자 콜린을 먼저 밀어 넣으며 말했다.

“세상사가 원래 다 그런 것이다. 자꾸 징징대면 네 입을 딱 붙여 주마.”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마차에 올라탄 현우는 마부에게 바이스 카르젠의 저택으로 가라고 명했다. 마차가 바로 출발했지만, 체스터 왕세자가 직접 하사한 마차답게 승차감이 매우 좋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이동하는 내내 콜린은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내리떴다. 어쩜 이 풍경을 다신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풀려나 버렸다. 다리를 꼬고 앉은 현우는 착잡해 보이는 콜린의 무릎을 발로 툭 치며 말했다.

“콜린. 이미 끝난 일이니 현재에 집중해라. 앞으로 내 보좌관으로 널 많이 부려 먹을 계획이다.”

“아, 예. 그러고 보니 고민이군요. 소공자님께 드릴 선물로 뭐가 적당할지……”

제 동생을 언급하자 현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니, 부드러운 정도가 아니라, 현우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맙소사…….’

저가 나름 오래 모신 주인의 처음 보는 얼굴에 놀란 콜린이 애써 안면 근육을 통제하는 동안, 현우는 세상을 다 가진 이처럼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선물은 됐고, 앞으로 잘 보필하면 된다. 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할 거야.”

“마음의 준비요?”

“내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플지도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다.”

주접 1막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콜린이 재빨리 맞장구쳤다.

“아, 예…… 매우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소문을 듣긴 했습니다.”

“소문이 제대로 났군.”

“왕성 지하에 구금된 제게 닿을 정도로 소문이 아주 자자하던데요. 그리고 저와 닮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흠……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난 것 같다만, 내 동생이 훨씬 귀엽다.”

“아, 예…….”

딱히 현우에게 귀여움받고 싶지 않았던 콜린은 쓰게 웃으며, 일부러 또 다른 소문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곧 카르 형님과 혼인……”

“콜린. 네가 오늘까지 살고 싶은가 보구나?”

소문대로의 반응을 확인한 콜린은 피식거리며 웃어 버렸고, 현우는 불만스레 콜린의 무릎을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콜린. 앞으로 누가 그런 헛소리 하면 절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예예…… 그런데, 연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던데요?”

“다 거짓말이다! 우리 현서가 확실하게 친구라고 말했다!”

“그게, 웨딩 반지까지 제작했다는 소문이…….”

“헛소리! 우정 반지인지 뭔지 하는 거라고 하더구나.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 현서가 핑크 다이아몬드에 빠져서…… 젠장. 어떤 미친놈이 핑크 다이아몬드를 전부 사재기했나 했더니, 그놈이었어. 뱀 같은 놈.”

현우는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카르젠을 신랄하게 까고 까고 또 깠다. 아주 속이 시커멓고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며,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꿍얼거렸는데, 대부분은 제 순진한 동생을 얼굴로 꾀어냈다는 이야기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동대륙 언어까지 동원해 카르젠을 까는 현우를 바라보던 콜린은, 곧 만나게 될 제 주인의 동생이 궁금했다.

‘외적으로 나와 많이 닮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굉장히 아끼다 못해 대자로 삼은 데다가, 크리시 형님이 직접 에벨루스의 축복을 내려 주고, 카르 형님이 공개적으로 구애하는 상대…….’

저것만 해도 참 대단한 사람처럼 들렸다. 물론 그 외에도 무성한 소문이 있었지만, 사교계 활동은 하지 않는 터라 대부분 카더라~ 하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최근 사교계 소문의 중심에 있는 이를 만나게 된 콜린은 그에 대한 소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기억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빠졌다.

맞은편에서 카르젠 욕을 하던 현우가 이젠 타겟을 에벨루스의 얼굴만 번지르르한 프리스트들로 바꿨음에도, 콜린은 대충 예 예 대답만 했다. 분명 현우의 동생에 대해 자주 듣던 소문 하나가 더 있었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사이, 마차는 벌써 도착해 카르젠의 저택 정원에 멈춰 서 있었다.

마부가 마차 문을 열자마자 현우가 먼저 내리고 콜린 역시 따라 내리던 찰나, 저택 현관이 열리며 누군가가 탓탓탓 달려오는 게 보였다. 상대를 보기도 전에 현우가 “현서야, 뛰지 마!” 하고 초조하게 외친 탓에 그 대상이 누군지 대번에 파악한 콜린은,

“형아~! 어서 와~!”

해맑은 인사를 들은 순간 생각난 소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듣던 대로, 천상의 목소리구나…….’

맑게 웃는 얼굴로 제 동생을 와락 안아 주는 현우를 지켜보던 콜린은 자꾸만 불경해지려는 안면 근육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비록 눈앞에 펼쳐진 광경 덕분에 어처구니를 상실하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자주…… 아니, 거의 매일 보게 될 제 주인의 동생이니 첫인상을 좋게 심어 주고 싶었다.

형에게 달랑 들려 안긴 채 좌우로 흔들흔들 부둥부둥 당한 현서는 형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콜린을 보며 속삭였다.

“형, 뒤에 손님…….”

“아, 그래. 맞아. 현서야. 소개해 줄게.”

그제야 안고 있던 동생을 놓아준 현우가 콜린에게 현서를 소개했다. 콜린은 현우가 평소 저와 대화하던 것과 전혀 다른 나긋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동생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다정한 형의 모습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제게 동생을 소개해 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냥함이 묻어나고, 동생을 향한 눈빛엔 사랑이 충만했다.

콜린은 지금 이 모습이 연기가 아닌, 가장 현우다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가 뜬금없이 레몬 젤리를 받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

제 주인을 따라 바이스 카르젠의 저택에 온 콜린은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해 차분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저택 뒷마당엔 네모나고 거대한 연못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못이 아닌, 매우 깔끔하게 지어진 수영장이었다.

“그러니까…… 카르 형님께서 뒷마당에 해수로 채운 수영장을 만드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답을 구하려고 묻는 말은 아니었지만, 친절한 카르젠은 현서의 입에 작은 마카롱을 넣어 주며 성실하게 대꾸했다.

“응. 케이 후작님께서 생각해 내신 방법이야. 현서가 바닷물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많이 좋아지는 체질이거든. 며칠 머무는 거지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들었어.”

“…….”

콜린은 본격적으로 시공한 규모만 봐도 며칠만 쓸 생각은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젠은 마치 지나가다 잡화점에서 손수건 따위를 가볍게 구매한 것처럼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수도에 있는 드워프들을 급하게 초대했는데, 그래도 하루 만에 만든 것치고 괜찮지?”

“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과했다. 카르젠 저택에서 가장 큰 응접실보다 더 큰 규모의 수영장이었고, 저 안을 채운 것이 진짜 바닷물이라는 것과, 실제 바다와 연결된 마나 터널을 통해 물이 쉼 없이 순환 중이라는 것도 콜린의 어이를 쏙 빼놨다.

처음 수영장을 본 콜린이 인공 연못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안을 채운 바닷물이 실제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공 연못도 저렇게 파도가 일진 않겠지만…….’

아무리 드워프의 기술력이 좋아도 그렇지, 하루 하고 반나절 만에 마법 장치가 연동된 수영장을 만들다니…… 어벙벙해진 콜린과 달리 현우는 현서의 옆에 앉아 진하게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며칠뿐이라고 해도 우리 현서가 머물 곳인데, 이 정도 신경은 써 줘야지.”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해수 풀장이라니, 형님의 지혜에 거듭 놀랐습니다.”

오래전부터 저택 지하에 해수조를 만들 계획이었으면서, 마치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구변 좋게 맞장구친 카르젠이 커피를 마셨다. 현우가 직접 가져온 원두로 내린 커피였다.

현서는 형이 내린 커피를 잘 마시는 그가 신기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저는 너무 써서 한 모금 마시고 손도 대지 않고 있는데, 카르젠은 이렇게 향이 좋은 커피는 처음이라며 벌써 두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형과 카르젠은 쓴 커피를 좋아하는구나…… 둘이 취향도 맞고, 말도 잘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짧게 며칠간 지켜본 바로 둘은 통하는 게 꽤 많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보단 카르젠이 현우를 희대의 현자처럼 여기며 존경을 표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쨌든 제 형을 저리 좋게 봐 주는데 현서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카르젠은 현우가 무슨 말만 하면 곁에서 연신 옳다며 공감하고, 멋진 생각이라며 주의 깊게 듣곤 했다. 가끔 현우가 하는 말이 허무맹랑할지라도 절대 흘려듣지 않고 경청하는 걸 봐선 둘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커피 대신 율리가 가져다준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현서는 입 안에 퍼지는 꽃향기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형을 만난 것도, 이비를 제 몸에 품은 것도, 형과 카르젠과 함께하는 시간도, 그리고 이 향긋한 차와 다과도.

현서가 현 상황에 큰 만족감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시자, 가슴을 간질이는 미약한 울림이 퍼졌다. 마치 향기로운 차를 마셔서 너무 좋다고 말하는 듯한 고동이었다.

‘이비도 이 차가 마음에 들어? 내가 좋아하는 차야. 향기롭지?’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건넨 질문에 긍정하는 것처럼 따뜻한 고동이 전신을 감쌌다. 제 안에 이비를 느끼며 생긋 미소 짓는 현서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무의식중에 습관처럼 현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제게 기대앉게끔 하려다 멈칫했다.

동생 옆에 앉아 차분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는 현우가 생긋 웃는 얼굴로 카르젠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어딘가 그늘진 얼굴을 본 카르젠이 자연스럽게 팔을 거두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넌지시 다른 주제를 꺼냈다.

“형님께서 말씀하셨던 보석은 오늘 저녁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제 조부께서 직접 세공한 보석으로 최상품만 준비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값은 콜린에게 받아. 집사를 구하기 전까지 콜린이 내정 관리도 할 예정이니까.”

내정 관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콜린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내정 관리뿐만 아니라, 며칠 후 입주하게 될 수도 케이 후작가 타운하우스와 남부의 저택을 관리해야 할 집사 둘을 구하는 것도 제 몫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무슨 보석?”

보석이란 말에 현서가 반응하자 커피 잔을 내려 둔 현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서야, 형이 당분간 바쁠 것 같아.”

“응.”

현서도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분간 체스터 왕세자를 도와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됐다고 했었고, 왕세자의 일을 돕는 거니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보석과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니, 현우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이 없는 동안 현서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엘프가 세공한 보석에 방어 마법을 가공해 액세서리를 만들 거야. 형이 완성하면 바로 줄 테니까 몸에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해. 알았지?”

“응. 근데 어떤 방어 마법인데?”

현서가 조심스레 묻는 모습에 현우는 서글서글 웃는 낯으로 설명했다.

“일단 구상 중인데, 크라바트에 붙일 핀 브로치는 분해 요소가 들어간 근접 방어 마법으로 할까 해. 누군가 현서에게 허락 없이 손을 대거나, 위협하려 들면 자체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서 그런 행위 자체를 못 하게 만드는 거지.”

제대로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현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정확하게 알아들은 콜린과 카르젠은 웃는 낯을 유지하며 분해 마법을 떠올렸다.

‘주인님 주특기지. 사람을 먼지로 만들어 세상에서 증발시키는 것.’

‘분해 요소라면, 상대를 재로 만드는 마법이겠군.’

카르젠은 남부에서 현우가 이성을 잃고 날뛰던 당시, 인어왕이 앉아 있던 바위섬을 순식간에 격파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광인처럼 날뛰다가도 부서진 바위 파편으로 인해 주변에 피해가 갈까 봐, 순식간에 그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었던 대단한 실력도…….

당시의 처참한 전투를 크리시와 아리스와 함께 멀찍이서 지켜봤던 카르젠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바위였던 먼지를 보며 슬픈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슬프고 고된 아주 험난한 미래를. 카르젠이 제 암울한 앞날을 예감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사이 현우가 말을 이었다.

“커프스도 만들까 해. 커프스 같은 경우엔 혹시 누가 현서를 납치하려고 하면 발동될 거야. 일단 상대의 발을 묶고 손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결박 마법을 거는 게 좋겠지.”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른 마법이 나오는 게 가능해?”

“그럼.”

상냥한 현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콜린은 살포시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제 안면 근육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말은…….

‘발동되는 즉시 납치를 시도한 이들의 아킬레스건을 끊어지게 만들고, 손가락부터 손목까지 뼈가 순식간에 으스러지게 만들어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구나. 하지만 뒷배가 있을 수 있으니 죽이진 않겠다는 거지…….’

이 역시 현우가 악질 범죄자들이 주제 모르고 날뛸 때 사용한 방식이었다. 고갈되는 생명력을 채우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치긴커녕 여기서 나가면 피해자에게 보복하겠다고 윽박질렀을 때 현우가 보였던 반응이 저런 류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목격한 적이 없는 카르젠 역시 대충 짐작 간다는 듯이 미소를 유지하며 생각했다.

‘뭔지 몰라도 일단 상대의 손발을 망가뜨리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두 사람이 애써 미소를 유지하는 동안, 현서는 그 정도로 체계적인 마법이 아티펙트로도 가능하냐고, 역시 형은 대단하다며 진지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또 상시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목걸이도 만들까 해. 목걸이 같은 경우엔 옷 안에 넣고 있어. 만약 누군가 어떤 방식이든 현서가 원치 않는 일을 하려고 하면, 상대가 다신 치근대지 못하게 만들 거야.”

“어, 으응…… 대부분 집에만 있겠지만…… 그래도 형이 준 거니까 꼭 할게.”

“응. 집에서도 꼭 하고 다녀.”

현서는 이게 다 저가 걱정되는 마음에 만들어 주겠다는 아티펙트였으니, 답답하더라도 늘 착용하겠다며 형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 노력했다. 현우는 그런 동생이 기특하다는 듯이 해사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콜린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상대의 생식기를 태우고, 허리를 뒤로 접어 척추를 부러뜨림으로써 하반신을 못 쓰게 만드는 마법이 분명하군…… 그래. 주인님은 성범죄자를 특히 경멸하셨지…….’

남부 영지 힐드레드 자작의 장남이 저 방식대로 명을 달리했다. 더러웠던 인간의 최후를 떠올린 콜린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본 카르젠은,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방어 마법이라는 것을 예상하며 무해한 미소를 유지했다.

***

깊은 밤.

색색 일정하고 느리게 숨을 쉬던 현서의 토끼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으응…….”

작게 숨을 뱉으며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귀가 또 쫑긋 움직였다. 숙면을 방해받은 현서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부스스 눈을 떴다. 내내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는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큰 아치형 창문이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온도를 조절해 주는 난방 마법 수정이 창문과 침대 사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수면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빛을 내며 도는 수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서가 상체를 들고 침대 옆 빈자리를 살폈다.

“형?”

조용히 부르며 방을 둘러봐도 현우는 보이지 않았다. 옆자리를 보듬어 보니 온기가 전혀 없는 걸 봐선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것 같았다.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앉아 눈을 비빈 현서는 토끼 귀도 꾸깃꾸깃 비비며 수정을 지나쳐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밖으론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별이 떠 있었고, 푸른 달과 저 멀리 붉은 달이 보였다. 잠시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현서는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찬바람이 훅 끼쳐 왔지만, 그와 별개로 상쾌한 밤공기에 “스읍~”하고 크게 호흡했다.

숨을 몇 번 크게 몰아 쉰 후, 발코니 난간을 짚고 주변을 살펴도 여전히 형은 보이지 않았다. 카르젠의 저택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의 마법으로 보호받는 구역이다 보니, 따로 저택을 지키는 이가 없어 더 고요했다.

‘형은 어디에 간 거지?’

카르젠이 준 숄을 두른 현서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바깥 역시 수정 덕분에 밝아 복도 끝까지 다 보였는데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 후 저택 후문을 나서 해수 풀과 유리온실이 있는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토끼 귀가 쫑긋거렸다. 현서는 저가 움직이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아 아쉬움을 느꼈다.

‘남부에 가기 전까진 풀벌레 소리가 들렸었는데…….’

반딧불처럼 정원에서 반짝이며 찌르르르 울던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많았는데, 이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현서가 필리스에서 보낸 첫 계절인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빨리 겨울이 오면 좋겠다.’

지구에서 보냈던 겨울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계절이었지만, 필리스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기대됐다. 현서는 겨울이 오고, 눈이 쌓이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자는 카르젠과의 약속을 상기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래. 눈이 내리면 같이 만들어 보자.”

당시 카르젠에게 저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가. 지구에서라면 제 몸이 언제 기능을 상실할지 몰라 절대로 하지 않았을 약속이었다.

고작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자는 이 하찮고 귀여운 약속은, 김현서가 병상 생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미래를 약속했던 날이었다.

‘카르젠은 기억할까? 그때 나랑 눈사람 만들기로 약속한 거.’

그가 혹시나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땐 자신이 수도에 없을 수도 있고, 또 만약 연말을 수도에서 보내게 된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자고 권하면 될 일이었다.

일말의 근심 없이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걷고 있을 때, 기척을 감지한 토끼 귀가 쫑긋 섰다. 청력을 자극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유리온실 뒤에서 걸어 나오는 카르젠이 보였다.

“어? 카르젠 님? 아, 아니. 카르젠…….”

어색하게 호칭을 고쳐 부르자, 그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현서야. 자다 깬 거야?”

“어, 네…….”

“아직도 어색해?”

그러니까 후작가의 소공자가 되었지만, 제게 말을 편히 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냐는 물음이었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니, 왜…… 왜 저렇게 훌륭한 모습으로……!’

오밤중에 홀로 검술 수련이라도 한 건지, 검을 들고 있는 카르젠의 옷차림은 굉장히 가벼웠다. 하의는 검은색 바지, 상의는 흰 셔츠였는데, 셔츠 단추가 네다섯 개 정도 풀어져 있는 데다 앞섶이 벌어져 있었다.

수련으로 잔뜩 성난 근육이 고스란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든 현서가 괜히 해수 풀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혼자 수련하고 있었어요?”

“응. 잠이 안 와서. 현서는 아직 안 잤어? 아니면 자다 깬 거야?”

가뜩이나 복슬복슬한 머리가 새집처럼 뻗쳐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도둑 길드 길드장처럼 민첩하게 굴리는 모습을 보니, 잠은 이미 다 깬 것 같았다.

현서는 자꾸만 그의 몸으로 굴러가려는 눈동자를 제어하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자다 깼어요. 형이 없어서 창밖을 살피다가 바람이 시원해서 나와 봤거든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눈동자는 기민하게 카르젠의 가슴께를 지나쳤다. 카르젠은 시선은 피하면서 토끼 귀는 제 쪽으로 쫑긋 세우고 있는 현서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셨다면, 체스가 급하게 호출했을 수도 있어.”

현우가 밤중에 나간 이유를 알았지만, 카르젠은 일부러 추측하듯이 말했다. 따지고 보면 체스터가 불러서 나간 건 맞았으니까.

‘형님께서 집행자가 된 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현우는 동생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서가 안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일이니, 비밀을 유지해 달라며 몇 번이고 강조했다.

현재 현우의 생명력을 꾸준히 갉아먹는 흑마법사 리치의 저주를 풀 방법은 지그하르트가 연구 중이었지만, 그가 답을 찾을 때까진 어쩔 수 없이 체스터와 협의한 대로 사형수의 형 집행을 하는 것으로 생명력 고갈을 채우기로 한 터였다.

“이렇게 새벽에도 부르는 경우도 있나요?”

“간혹 있어. 긴급한 일이 생길 경우도 있고.”

“긴급한 일…….”

이대로라면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새벽에 부르냐는 이야기가 나올 차례가 분명했다.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카르젠은 현서를 향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떤 일이 생겨도 형님은 안전하실 거야. 게다가 체스가 형님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일 리도 없고.”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아마 그 위험을 만든 게 현우일 확률이 컸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보다 이런 표현이 훨씬 나았다. 속으로 제 화법을 칭찬한 카르젠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

이어 단추를 또 하나 풀어내는 모습을 본 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서는 카르젠이 검을 자신의 반지에 넣는 신기한 광경보다 탄탄한 복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흠칫 몸을 떨며 눈을 꾹 감았다.

‘아, 어쩌지? 너무 대놓고 빤히 봤는데, 사과해야 하나? 아님 그냥 자연스럽게 시선 흐리면 될까?’

당황해 카르젠의 반대편으로 고개 돌린 채 실눈 뜨고 있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응?”

바짝 고개 들고 올려다보니, 시야가 밝다 못해 아주 찬란했다.

‘카르젠, 또 웃고 있구나!’

이젠 척하면 척이었다. 알아서 실눈을 유지하고 후광 찬란한 그를 마주 보니,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현서야. 잠이 안 오면 물에 들어가지 않을래?”

“……지금요?”

“응. 온도 조절 마법도 걸어 놔서 따뜻할 거야.”

“으음…….”

인어왕 에이디아의 말로는 이틀에 한 번꼴이라도 바닷물에 들어가면 좋다고 했으니, 발이라도 담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 수영을 못해요.”

현서는 태생이 맥주병이었다. 가벼운 몸이었지만, 물에 뜨는 법이 없었고, 어떤 노력을 해도 늘 수영장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병세가 심해진 후로는 수영을 배울 수도 없었으니, 제 몸은 여전히 맥주병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이비의 몸이 인어 혼혈이라도, 알맹이는 김현서였으니 영 자신 없었다.

앞에서 실눈을 뜨고 저를 올려다보며 끙끙대는 현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웃음 참기 챌린지 중이었던 카르젠이 목에 힘주어 말했다.

“내가 잡아 줄게. 걱정하지 마.”

“으음…….”

“자. 들어가 볼까?”

현서는 카르젠의 저 나긋나긋하면서도 낮은 동굴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와 손을 잡는 것도 좋았고, 그와 하는 것은 뭐든 다 좋았다. 그러니 어쩌면 수영도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제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해수 풀장 주변은 조명 수정을 설치해 둔 덕분에 호텔 수영장처럼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영장 앞에 도착한 현서는 긴장해 침을 꼴깍 삼키며 “내가 물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고 중얼거렸지만, 먼저 물에 들어간 카르젠을 본 순간 근거 없는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칼리아르 신이시여!’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올 뻔한 현서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카르젠이 수영장 깊이를 알려 주겠다며 먼저 입수해 수영장 끝과 끝을 걸어서 왕복했는데, 덕분에 현서가 서 있는 쪽은 카르젠의 허리 정도, 반대편 끝은 카르젠의 코까지 잠길 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수심을 알려 줬다고 감탄한 건 아니었다. 현서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온 카르젠은 푹 젖어 있었다. 덕분에 흰 셔츠가 몸에 쫙 붙어 살색이 만연했고, 그 모습은 흡사 라이스페이퍼 같았다.

현서는 차라리 카르젠이 셔츠를 벗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젖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현서야. 신발 벗고 끝에 걸터앉아 봐. 일단 발부터 담그는 건 괜찮지?”

“네. 훌륭해요.”

“응?”

“아…… 후, 훌륭한, 굉장히 훌륭한 수영 수업이 될 것 같다고요.”

둘러댄 것 같아도 저 말의 반은 진심이었다. 수영 수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진 현서가 숄을 벗어 놓고 슬리퍼를 벗었다. 이어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을 짚고 조심스럽게 앉아 다리를 내렸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해수에 발을 담그자 청량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전신이 바닷물에 잠긴 것 같은 시원한 감각 때문인지, 가슴 속 이비의 고동이 격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서 수영하고 싶다고, 빨리 물에 들어가자고 보채는 고동이 분명했다.

격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살포시 누르며 이비를 달래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카르젠이 물에 담근 현서의 양쪽 발을 조심스레 감싸 잡았다. 현서는 그가 제 발을 잡고 천천히 당기는 대로 다리를 뻗었다.

“생각해 보니 준비 운동을 하지 않았네. 물에 들어가기 전엔 충분히 근육을 풀어 주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곤 현서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 작은 발을 당겨 제 복근에 딛게 하고 종아리를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 현서는 저가 아프지 않게 강도를 조절하며 부드럽게 근육을 풀어 주는 카르젠의 실력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마사지를 따로 배운 거예요?”

“음…… 배운 건 아니고, 근육 풀어 주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해야 할 것 같네. 어렸을 적에 막 검술 훈련을 시작했을 때, 종아리 근육에 경련이 자주 일어났거든.”

현서의 귀가 쫑긋해졌다. 타고난 신체 능력이 뛰어난 하프엘프도 종아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구나 싶어 진지하게 끄덕이니,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제 몸을 단련하는 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일단 나는 아픈 걸 극도로 싫어해서, 경련이 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 차원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사지를 했어.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라고.”

“그렇구나…… 저도 아픈 건 싫어요. 특히 종아리 근육 경련이요.”

“하하. 현서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한 탓이었을까. 현서는 카르젠과 공통점이 생겼다는 생각에 헤실헤실 웃었다.

물론 한 박자 늦게 누가 아픈 걸 좋아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르젠과 자신의 공통점이 생겼다는 기쁨이 더 컸던 탓인지, ‘세상엔 아픈 걸 좋아하는 취향의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카르젠과 내 공통점이 맞지.’라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서의 왼쪽 다리를 충분히 풀어 준 카르젠은 이번엔 오른쪽 다리 마사지를 시작했다. 얌전히 다리를 맡긴 현서는 오른발로 디딘 그의 복근을 멍하니 바라보다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나 진짜, 왜 이러냐…… 정신 차려. 카르젠에게 실례잖아.’

아무리 훌륭한 몸이라고 해도, 타인의 몸에 자꾸 시선을 두는 게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제 눈이 말을 듣지 않으니, 결국 현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극단적인 선택은…….

“음? 현서야. 왜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있어? 혹시 두통이라도 생긴 거야?”

“아, 아뇨.”

“그럼?”

“어…… 그냥요…….”

어물쩍 대답하며 눈을 꾹 감고 있으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웃음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잘 듣고 싶다는 듯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토끼 귀가 카르젠을 향해 기울었다. 카르젠은 눈을 꾹 감고 있으면서 귀는 제게 기울인 현서의 다리를 조심스레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슬슬 물에 들어와 볼래?”

찔끔 눈을 뜨고 바라보니 시야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서는 실눈을 유지하고 제게 내민 카르젠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에게 이끌려 수영장으로 폴짝 뛰어내리듯 입수했다.

가슴 근처까지 물에 잠기자 이대로 수영을 하고 싶은 충동이 우러나왔는데, 이는 이비에게서 나오는 욕구라는 것을 알고 카르젠의 손을 꽉 붙든 채 말했다.

“이비가 수영이 하고 싶대요.”

“오랜만에 바다에 들어와서 그런가 보네. 천천히 해 볼까?”

현서는 대답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줌으로써, 카르젠에게 자신의 수영 실력을 재차 상기시켜 주었다. 약한 악력이 담은 뜻을 제대로 이해한 그는 손을 놓지 않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현서를 이끌었다.

“일단 다리에 천천히 힘을 빼면서 몸을 앞으로 엎드려 보자.”

“어, 음…… 어…… 으앗!”

시키는 대로 몸에 힘을 빼고 앞으로 쭉 엎드리려 했지만, 쇳덩이마냥 바로 가라앉으려는 몸에 화들짝 놀란 현서가 다리를 딛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놀란 탓인지, 가슴을 울리던 잔잔한 고동 역시 기겁한 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 이비야, 미안해…….’

저 때문에 놀란 이비에게 마음으로 사과한 현서는 의기소침해진 귀를 쭉 늘어뜨리며 말했다.

“다시 해 볼게요.”

“응. 몸에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내가 붙잡아 줄 테니까. 얼굴은 물에 빠지지 않도록 잘 잡아 줄게.”

“네. 그럼 다시……!”

호기롭게 끄덕인 현서가 다시 다리에 힘을 빼려는 찰나, 무언가 허벅지를 툭 쳤다.

“어?”

반사적으로 카르젠의 고간, 아니. 물속을 들여다본 현서는 카르젠과 제 다리밖에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맑은 바닷물 속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 제 다리를 툭 치고 지나간 감각을 선명하게 느낀 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카, 카르젠. 방금 뭐가 제 다리를 쳤는데…….”

혹시나 물고기일까 싶어 잔뜩 긴장한 채 경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현서는, 카르젠의 등 뒤에서 저들을 향해 헤엄쳐 오는 검은 생명체를 발견하곤 토끼 귀 털을 펑! 부풀렸다.

“카, 카르젠! 뒤에! 뒤에!!! 흐아악!”

카르젠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 손을 놓은 현서가 기겁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꽉 둘러 안았다. 한 손으로 자연스레 현서의 엉덩이를 받치고 돌아선 카르젠은 저들을 향해 맹렬히 헤엄쳐 오는 큼지막한 물고기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마나 터널에서 유입된 것 같네.”

“무, 물에서 나가요! 나가요! 당장! 나갈래! 나갈래요! 아악! 히야악!!!”

다가온 물고기가 카르젠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기 시작하자 혼비백산한 현서가 버둥거렸다. 저리 가라며 하찮은 발길질도 했지만, 카르젠의 허벅지만 한 큰 물고기는 도망가긴커녕 주변을 돌며 동그란 눈알을 굴렸다.

물이 너무 맑은 데다 조명 시설까지 완벽해 물고기의 시커먼 동공과 시선이 얽힌 현서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격한 반응에 놀란 카르젠은 제 목을 끌어안고 파들파들 떠는 현서를 꼭 안아 주며 수영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현서야. 진정해. 저건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물고기야. 평범한 물고기.”

평범하지만, 크기는 몬스터 급인 물고기가 옆으로 다가와 카르젠의 허리춤에서 펄떡거렸다.

“히야아아악!!!”

현서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메아리침과 동시에 저택에 불이 하나둘 켜졌다. 카르젠은 제게 꽉 매달린 현서를 급히 수영장 밖으로 내려 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현서는 몸이 땅에 닿자마자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수영장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야 숨을 헉헉 몰아쉬다, 발라당 쓰러져 누워 호흡을 고르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으흐흑, 흐어엉…….”

K국 특유의 한이 녹아든 구슬픈 울음이었다. 어린 시절엔 한식집 반찬으로 나온 조기만 봐도 무서워 울곤 했고, 형 무릎에 앉아 눈을 감고 형이 입에 넣어 주는 대로 식사했던 김현서였다. 접시 위에 죽어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도 무서운데, 저렇게 큰 살아 있는 물고기와 같은 물에 있었다니…….

너무 놀란 탓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쇄골 부근이 저릿저릿했다. 더 심하게 놀랐다면 뒷 목부터 날개뼈 부근까지 담이 왔을 텐데, 그 지경까진 안 가서 다행이었다.

물에서 나와 바닥에 내려 둔 숄을 들어 현서의 몸을 감싼 카르젠이 웅크린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슬슬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현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놀란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니 수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현서야, 미안해. 물고기는 꼭 돌려보낼게.”

훌쩍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현서는 저 때문에 아까부터 놀라 콩닥콩닥 뛰고 있는 가슴께를 부드럽게 누르며 사과했다.

‘이비야, 미안해……. 수영은 다음에…… 다음에 하자…….’

따뜻한 물로 빠르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카르젠은 함께 씻고 나와 보송보송해진 현서에게 푸딩을 건네며 재차 사과했다.

“현서가 그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랐어. 단순히 먹기 싫은 수준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미안해.”

일전에 현서가 물고기를 무서워한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카르젠이 진심으로 사과를 건넸다. 물론 함께 목욕하기 전에도 사과를 하긴 했다. 다만, 그땐 현서가 넋이 나간 터였기에 수치심에 끙끙댈 정도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다시 사과해 두는 편이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괘,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해요…… 특히 귀에 대고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푸딩을 받은 현서가 저도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카르젠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

“현서가 미안할 건 전혀 없어. 애초에 물고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수를 썼어야 했는데, 급하게 공사하느라 그 부분을 간과한 내 잘못이야. 날이 밝으면 바로 보수하도록 할게.”

현서는 다 저를 위해 만든 시설이고, 카르젠이 직접 물에 들어가서까지 수영을 알려 주려 했는데, 혼비백산해 몸부림치고 악을 쓴 게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며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말고, 푸딩부터 먹자.”

“넵…….”

카르젠은 계속 제 눈치를 보는 현서에게 일단 푸딩부터 먹으라며 침착하게 달래 주었다.

과연 수도에서 유명한 가게의 한정판 푸딩이라 그런지, 한 입 크게 떠먹은 현서의 귀가 쫑긋해지고 눈이 커졌다. 세 입 만에 푸딩을 거덜 내고 입술을 핥는 현서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씁쓸한 눈빛을 애써 감췄다.

지금 현서의 머릿속엔 제 성난 근육과 젖은 셔츠도, 발바닥을 복근에 대고 해 준 종아리 마사지도, 함께 손을 잡고 했던 수영 연습도 아닌, 거대한 물고기의 공격과 푸딩만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처럼 둘이 보낼 수 있는 밤이었는데 말이지…….’

그놈의 물고기 때문에 대차게 말아먹은 게 못내 아쉬웠지만, 저가 씁쓸해하는 짧은 틈에 푸딩 네 개를 해치우고 기분 좋다는 듯이 웃는 현서를 보자 아쉬움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주디가 좋아하는 가게 푸딩이래. 입에 잘 맞아?”

“네! 엄청 맛있는데요! 이 정도 맛있는 푸딩이라면 매일 먹어도 될 것 같아요.”

현서라면 뭐든 매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답 대신, 생긋 웃어 보인 카르젠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디 말로는 이 가게의 포장 불가능한 메뉴들이 오히려 더 맛있다더라.”

“네? 포장이 불가능해요? 어째서요?”

놀라 눈이 동그래진 현서를 향해 저도 모르겠다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카르젠이 넌지시 덧붙였다.

“신선도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궁금해지더라고. 얼마나 신선하고 맛있기에 가게 홀에서만 먹고 가야 하는지 말이야.”

“와~ 얼마나 신선해야 포장도 안 되는 거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렇지?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편이라. 내일 점심 전에 가 볼까 하는데…….”

미리 체스터에게 언급해 둔 터라 최대한 현우를 붙잡아 두겠지만, 체스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 붙잡는 건 어려울 게 분명했다. 현우가 돌아오기 전에 일찍 나갈 것을 은근히 언급하자, 미끼를 덥석 문 현서가 냉큼 대답했다.

“저도 궁금한 건 못 참아요!”

“정말?”

“네! 궁금한 게 해소되지 않아서 앓아누운 적도 있어요!”

엄밀히 말해 이미 앓아누운 상태에서 읽던 웹소설의 떡밥이 궁금해 끙끙대며 정주행 했던 거지만, 그만큼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어필을 들은 카르젠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현서 역시 가늘게 뜬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당당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공통점을 또 발견했네요!”

“그러게. 현서랑 나는 공통점이 참 많은 것 같아.”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카르젠도 오늘부로 눈치 없는 물고기를 싫어하게 됐으니, 공통점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

협탁에 올려 둔 회중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카르젠의 방을 밝히는 수정 조명은 낮처럼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카르젠은 손에 든 책에서 제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옆에 엎드려 누운 현서는 책에 집중하느라 카르젠이 저를 지그시 바라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르젠은 현서가 열심히 메모한 내용을 눈으로 쭉 따라 읽어 내렸다.

<카르젠이랑 푸딩 가게 가서 홀 한정 메뉴 격파하기★>

별 표시로 강조한 부분을 본 카르젠은 고개를 갸웃했다. 격파라니…… 가게를 부술 생각인가 싶었지만, 저가 아는 현서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대충 모든 메뉴를 섭렵하려는 뜻으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아래 메모는 보다 길고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벨루스 신전 뒤 노란색 천막에 갈색 나무 간판 존스 형의 푸줏간-생고기 튀김/1인 2개 구매 제한/개당 1500 클로/생고기 튀김은 아침 11시부터 판매>

<바로 옆집 줄스 동생의 꼬치구이-크라켄 다리 특제 양념 소스 꼬치구이/개수 제한 없음/개당 2000 클로/크라켄 다리 철판 볶음 누들/개당 5000 클로/존스의 푸줏간에서 고기 튀김 산 고객에 한해 200 클로 할인>

<콥스 아저씨의 레스토랑 옆 옆 옆 헬레나 카페-오델림 영지 특산 벌꿀 아이스크림/3000 클로/특제 쿠키를 곁들인 허니 크림 우유 세트 5000 클로>

까지 읽은 카르젠은 현서가 펜을 내려 두고 다시 책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짧은 귀가 바짝 선 채로 끝을 움찔움찔 떨고 있었는데, 그 떨림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집중한 상태였다.

다음 챕터는 가게가 아닌 노점상을 소개한 페이지였다. 현서는 에벨루스 신전 앞 분수대 광장에 즐비한 노점상을 전부 방문할 생각인지 <노점상 뿌수기!!!>라고 적고 있었다. 옆에서 쭉 보던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메모한 곳 중 딱 한 곳만 제외하고 전부 음식점이었다. 유일하게 음식점이 아닌 곳은 에벨루스 신전 종탑 최상층 전망대였다.

<에벨루스 신전 종탑 전망대-입장료 2000 클로/입장 시 팔라딘or프리스트 비매품 포카 1개 무작위 제공>

카르젠은 ‘포카’라는 단어가 뭔지 몰랐지만, 맥락상 에벨루스 신전에서 판매하는 프리스트 미니 초상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끄덕였다. 그리곤 협탁 위에 올려 둔 회중시계를 흘긋 보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서야.”

“네?”

“일찍 외출하려면 이제 슬슬 자야지.”

현우가 돌아오기 전에 외출해야 했으니, 사실 지금 자도 몇 시간 못 잘 터였다. 카르젠의 말을 들은 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첩을 덮고 전부 협탁에 올려 두었다. 이어 자연스럽게 카르젠의 옆에 큰 베개를 베고 누워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 그래. 음…… 그런데 현서야.”

“네?”

카르젠은 이불을 코끝까지 덮은 채 눈만 내밀고 저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현서를 향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당분간 잠은 따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

갑작스러운(?) 각방 선언에 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르젠은 급히 덧붙였다.

“혹시 현서가 또 몸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오늘도 꽤 오래 함께 있었고…….”

물론 크리시를 통해 제 안의 슬픔을 전부 추출하고, 성수로 만든 해독 포션을 필요 이상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가급적이면 잠자리만큼은 따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현서는 저가 아직 인어왕 에이디아에게 슬픔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대번 이해하고 귀를 추우욱 늘어뜨렸다.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카르젠은 지금 현서가 이불을 코끝까지 덮고 있어 보이진 않아도, 분명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다고 확신했다. 침울한 눈빛으로 애처롭게 저를 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방까지 데려다줄게.”

“…….”

이불을 내리고 일어나 앉은 현서는 카르젠의 예상대로 오리 입을 하고 있었다. 같이 자지 못하는 게 퍽 섭섭했는지 귀도 늘어뜨린 상태였지만, 다 저를 걱정해서 결정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카르젠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협탁에 올려 둔 <빛이 잠들지 않는 도시, 아브델의 명소들> 책과 수첩을 챙겨 든 카르젠은 바로 옆방임에도 그 짧은 거리를 굳이 에스코트해 주었다. 현서가 제 방 침대에 누운 것까지 확인한 카르젠은 문을 닫기 직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럼 아침에 봐.”

큰 베개에 폭 파묻혀 이불을 덮고 얼굴만 빼꼼 내민 현서가 귀를 쫑긋거리며 인사했다.

“카르젠도 좋은 꿈 꾸세요.”

“응. 좋은 꿈 꿔. 현서야.”

카르젠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문을 닫자, 잠시 쫑긋했던 토끼 귀가 다시 늘어졌다.

‘같이 자도 될 것 같은데…….’

물론 그동안 쭉 카르젠의 슬픔을 저가 흡수해 몸이 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카르젠은 크리시에게 따로 관리를 받기도 했고, 약도 먹고 있었다. 또 저도 남부에서 머물다 온 후로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아진 데다가, 뒷마당엔 해수 풀장도 있지 않은가. 아브델에서 지낼 당시엔 대부분 카르젠과 함께 잤었는데, 제 건강을 염려해서 따로 자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아쉬웠다.

‘남부에 돌아가면 꼭 인어왕에게 슬픔 해소하는 방법부터 배워야겠어. 그럼 같이 자도 카르젠이 신경 안 쓰겠지?’

그리 생각하던 현서는 일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어?”

의식의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카르젠과 남부에서 함께 지내는 전제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 실없는 상상에 당황한 현서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카르젠은 여기에 남을 텐데…….’

형과 함께 잠들기 전에 나눴던 대화로는, 체스터가 남부 지역에 후작성을 지어 줄 예정이라고 했으니, 형과 저는 남부에 완전히 터를 잡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 그러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현서가 손등으로 이마를 덮었다. 제 손에 반쯤 가려진 시야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니, 아리스가 북부로 돌아가기 직전 카르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 포기하면 편하다. 너 은퇴시켜 줄 거였으면 체스가 벌써 옛날에 놔줬어.”

기사단장 자리를 꽤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 슬슬 복귀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도 했었다. 무의식중에 남부에서 형과 카르젠과 셋이 오손도손 보내는 나날을 그리고 있던 현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수도를 떠나면 카르젠이랑 크리시도 만나기 힘들어지겠구나…….’

다신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형과 재회하고, 앞으로 둘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이 행복했지만, 이 세계에 와서 저가 사귄 이들을 보기 힘들어진다는 것은 무척 아쉬웠다. 현서는 이곳 아브델이, 그리고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다.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 남부 저택 정리가 끝나면 바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남부 저택은 앞으로 사흘 안에 정리가 끝날 예정이라고 했다. 카르젠과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현우는 하루빨리 남부로 내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현서는 혹시 남부에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저 앞으로 둘이 살 생각에 들떠서 그런다며 웃으며 얼버무리기만 할 뿐이었다.

‘형은 아직도 내가 열 살 꼬마로 보이나 봐. 그러니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 거겠지…….’

형이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아 혼자 추측해 본 바로는, 남부 귀족 중 무려 다섯 가문이 숙청당했다고 들었으니, 어쩌면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케이 후작을 보내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서가 귀족 사회를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다수의 웹소설 독서 경력으로 추측해 보자면, 한 지역의 많은 가문이 갑자기 기능을 못 하게 될 경우 해당 영지를 다스릴 수 있도록 새로운 영주를 보내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흔했으니, 어쩌면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를 받은 제 형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가가 설정하는 세계관마다 다르긴 했지만, 적어도 <숲의 마법사>에서는 성을 가진 귀족이 해당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였다. 그렇기에 독자들 사이에서 ‘북부 대공’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상 작위는 후작인 아리스의 남편 프란제르 칼라일 역시 후작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가 되면 엄청 바쁠 텐데…….’

물론 체스터가 영주 맡길 생각도 없는데, 혼자 김칫국부터 한 사발 들이켜는 걸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후작성을 받게 됐다는 것은 영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니 아예 김칫국은 아니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 현서는 여전히 손등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귀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카르젠과 외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울적해졌다.

‘다 알고 있었는데 왜 이리 섭섭할까…….’

자신은 분명 형과 남부로 내려가고, 카르젠이 수도에 남을 거라는 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말은 수도에서 보내고 싶다거나, 카르젠이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분명 머리로도 이해했고,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가올 이별을 처음 자각한 것처럼 속상했다.

“하아아…….”

급격하게 가라앉는 기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심란함에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젠과 멀어지고 싶지 않은데…….’

문제는 이 몸의 체질이었다. 제 건강을 유지하려면 자신은 남부로 가야 했고, 카르젠은 기사단장직에서 은퇴하는 게 아닌 이상 수도에 머무를 터였다. 물론 진짜 바닷물이 있는 해수 풀장이 있으니, 카르젠에게 허락받고 여기서 지낸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난 무조건 형이랑 살 거니까.’

미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현재로선 겨우 만난 형과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카르젠과 헤어지지 않으려면 그가 남부로 함께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형이랑 카르젠이랑 취향도 잘 맞고, 잘 지내는 것 같으니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문제는 카르젠이 남부로 내려갈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현서가 직접 그에게 권유할만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에휴…….”

답답한 심정으로 연신 한숨을 뱉어 낸 현서는 일단 자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새로운 고민에 직면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아 고개를 갸웃했다. 현서의 고개가 기우는 방향으로 토끼 귀 역시 기울어졌다.

“…….”

잠시간 제 생각을 정리해 본 현서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 누워 천장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카르젠하고 헤어지는 게 왜 이렇게 싫지?’

***

루아인 왕성의 밤은 평소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은은한 조명이 매력적인 곳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새벽 2시인 지금까지 긴급회의가 이어지고 있는 탓에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현우는 심드렁한 눈으로 회의실을 쭉 둘러봤다. 회의실엔 갑자기 소환당해 당황했을 법도 한데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동, 서, 북을 다스리는 가문의 수장들이 보였다.

현우는 그 중 북쪽을 다스리는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칼라일의 대각선으로 뒤에 앉은 보좌관은 녹음 수정을 두 개나 띄워 놓고 열심히 회의 내용을 적고 있었고, 그건 현우의 대각선 뒤에 앉은 콜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석에 앉은 현왕 페이든과 바로 옆에 앉은 체스터 둘 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내내 반듯하게 앉아 왕과 왕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칼라일의 시선이 흘긋 현우를 향했다. 현우는 눈을 돌리지 않고 그와 얽힌 시선에서 묘한 기류를 읽었다. 마치 ‘케이 후작님, 저와 함께하시죠.’라고 쓰여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칼라일뿐만이 아니었다. 참석한 귀족들 전부 현우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체스터 왕세자를 도와 루아인에 큰 공을 세워 ‘후작’ 작위를 부여받은 동대륙 출신의 정체 모를 마법사인 것만으로도 이미 화제에 오른 상태였는데, 얼마 전 지그하르트의 말실수(현우는 이게 실수가 아니라고 장담했다.) 덕분에 그가 8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며 더 주목받고 있었다.

서대륙에 알려진 8서클 마법사는 단 한 명, 숲 엘프의 수장 길리언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신비로운 8서클 마법사가 루아인 소속이 되었다니, 소문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망할 파충류 같으니…….’

엄밀히 말하면 지그하르트가 파충류는 아니었으나, 지그하르트 덕분에 긴급회의까지 들어와 앉아 있다 보니 화가 치밀었다. 이리 걱정되는 이유는 단 하나, 제 동생 현서였다.

‘현서가 자다 깨서 나를 찾으면 어쩌지?’

현우의 머릿속에 현서는 아직도 혼자 못 자는 10살 꼬마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무서운 게 너무 많은 탓에, 방 벽지에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무늬가 있다며 자다 깨 울던 유약하고 겁 많은 제 동생…….

물론 현서가 스무 살에 사망하여 필리스로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현우의 기억 속에 현서는 아직도 꼬마였다. 아직도 약했고, 너무 사랑스럽고, 후 불면 날아갈까 싶어 품에 안고 놓아줄 수 없는 그런 민들레 홀씨 같은 존재.

‘이렇게 착하고 순진한 우리 현서를 홀랑 채 가다니…….’

동생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동생 곁에 찰싹 붙어 눈웃음을 살살 치던 여우 같은 놈이 떠올라 회의에 집중되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피어올랐지만, 회의 안건이 생각보다 무거워 그럴 수도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건지, 체스터가 현우를 향해 말했다.

“케이 후작. 어떻게 생각하나? 후방에서 범위 마법 지원이 가능하겠나?”

“…….”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곤 하나, 회의 내용은 다 듣고 있던 현우였기에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저라도 현왕 앞에서 예의상 한숨 정도는 참아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 없어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방치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당 지역에 생존자가 없는 게 확실합니까?”

왕세자의 질문에 대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 탓인지, 맞은편에 앉은 칼라일이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현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현우는 동생과 둘이 평생 살겠다는 저를 향해 피식 웃던 아리스가 떠올랐지만, 이내 체스터의 이어지는 대답에 다시 잡생각을 멈췄다.

“안타깝게도 더는 생존자 수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됐다네.”

이웃 나라 마르카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갑자기 발생한 차원의 틈새라는 균열로 마족과 마물이 쏟아져 나왔고, 마르카는 삽시간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겨우겨우 주변 국가로 피난했지만,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루아인에서도 꾸준히 마르카에 유학 중이거나 파견 가 있던 루아인 국민을 구조하고자 구조 인력을 파견했는데, 반년 넘게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제 구조 활동을 멈추고 영토 탈환을 위한 토벌을 준비할 때였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마족들이 루아인까지 넘볼 수도 있었다.

‘상대가 마족이라 소드 익서퍼트급은 되어야 상대할 수 있을 테고…….’

다행스럽게도 현우는 다른 인간들과 달리 마족이 무섭지 않았다. 현우에게 있어 마족은 개미 떼 같았다. 성가시긴 하지만 쓸어 버리면 그만인 것들. 딱 그 정도였다. 게다가 마족은 한낱 마물과 달리 이지를 갖춘 생명이기 때문에, 흡수한다면 어느 정도 제 허기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난 팔자가 참 더러워.’

이제 겨우 동생을 만났는데, 웬 장애물이 이리 많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동생과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라면 반짝 고생하는 게 낫다는 K국 출신다운 생각도 들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구조할 생존자가 없다면 오히려 일은 쉬워지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현우는 체스터가 어차피 저를 보낼 생각이면서 굳이 묻는 게 더 얄미웠지만, 장단은 맞춰 줬다. 현우가 대답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라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함께 출정하겠습니다.”

체스터가 어디 더 자원해 보라는 듯이 회의실을 둘러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현우가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대신 최상급 마나포션을 많이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포션만 넉넉하다면 이틀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케이 후작님.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급이 다르다고 합니다. 관측된 몬스터만 이미 도시를 뒤덮을 정도로…….”

칼라일이 현우의 의견에 반박하려 했지만, 현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프란제르 후작님. 제겐 몬스터 웨이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생존자나 아군이 섞여 있으면 처리가 더 복잡해지니, 혼자 다녀오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은 금지된 흑마법이 제격이었다. 저가 흑마법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으니 생존자와 아군을 핑계 삼은 것이지만,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감동 반, 놀라움 반 섞인 얼굴로 현우를 바라봤다.

홀로 그 위험한 지역에 가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족과 마물을 단 이틀 만에 처리하겠다니……. 저 압도적인 자신감과 아군을 배려하는 자세는 군주로서 능히 지녀야 할 덕목이었다. 현왕 페이든을 포함한 모두가 감동 어린 시선으로 현우를 보고 있을 때, 체스터와 콜린만이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인간이 저럴 인간이 아닌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 반응이 어쨌든 간에 현우는 그저 이 회의를 빨리 끝내고 동생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안건이 계속해서 줄지어 올라왔고, 현우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오후 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인 데다가 회의에 참석한 이들과 함께 초췌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

‘현서 보고 싶다……. 내 동생 보고 싶다고…….’

***

“…….”

“…….”

카르젠은 현서가 힘없는 얼굴로 케이크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라면 분명 여섯 접시는 비웠을 속도인데, 이제 겨우 세 접시째였다. 일곱 번째 한정 메뉴를 시키려던 카르젠은 현서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포시 넘겨 주며 말했다.

“현서야.”

“네?”

“입에 안 맞아? 다른 가게로 갈까?”

그 물음에 최근 수도를 화끈하게 달군 커플을 몰래 훔쳐보던 손님들과 점원들이 뜨악한 얼굴로 몸을 흠칫 떨었다. 제발 가지 말고 여기에 더 있어 달라는 그들의 염원이 통한 것일까, 현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직 세 접시밖에 못 먹었는걸요…….”

열심히 메모한 음식은 전부 다 먹겠다고 다짐하고 나왔는데, 내내 마음에 걸리는 일 탓인지 케이크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계획했던 음식은 전부 먹긴 했다. 이 케이크 가게의 홀 한정 메뉴만 빼고.

케이크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없어 침울한 얼굴로 카르젠을 흘긋 살핀 현서는, 그가 오롯이 제게 집중한 모습을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카르젠이랑 멀어지기 싫어요.’

-라고 말하면, 그가 어떤 반응을 할까. 아마도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나도 현서와 멀어지는 게 섭섭하다고 말해 주겠지. 그리고 조금 더 관심을 보인다면 자신과 멀어지기 싫은 이유가 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서는 네 번째 케이크 접시를 앞으로 당겨다 놓고 푹 퍼먹었다.

순식간에 케이크 절반가량이 사라진 것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남은 케이크가 두 접시뿐인 것을 확인하고 점원에게 눈짓했다. 흐름이 끊기지 않게 일곱 번째 접시를 가져온 점원이 조용히 두고 물러나자 카르젠이 입을 열었다.

“현서야. 고민이라도 있어?”

“…….”

고민이랄까. 고민이 맞긴 하지. 그렇게 생각한 현서가 작게 끄덕이며 두 입 만에 케이크 한 조각을 순삭했다. 카르젠은 알아서 다섯 번째 케이크 접시를 현서 앞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현서가 이렇게 식욕 없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되려고 하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도와줄게. 그러니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

카르젠이 도와줄 수 있는 문제는 맞았다. 카르젠이 저와 같이 남부로 가서 하하 호호 옆집에 살아 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아니, 같은 집에 살면 더 좋고. 문제는 현서가 그걸 말할 용기가 없다는 거였다.

카르젠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웃지 않는 현서를 살피다 은근히 달콤한 과일 주스를 쓱 내밀었다. 크림 케이크만 먹다가 상큼한 과일 주스를 마신 덕분에 현서의 토끼 귀가 쫑긋 섰지만, 말문은 쉽게 트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자신이 카르젠에게 ‘헤어지기 싫으니, 나와 함께 남부에 갑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직 생각을 정리 못 했어……. 하지만 저택 공사가 끝나면 바로 돌아갈 텐데…….’

현서는 제 감정도 모를 만큼 아둔하진 않았다.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난……. 카르젠을 좋아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같이 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현서는 그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카르젠이 생각나고, 그와 손을 잡고 걸으면 기분이 좋았다.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흘렀고, 카르젠이 없는 옆자리가 허전했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너무 좋았고, 아니, 당연히 성격이 너무너무 좋았다. 이렇게 자애롭고 착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착한 남자였다. 물론 자애로움이 가슴에서 나올 정도로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기도 했고.

저가 남부로 내려가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매일 보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 감정이 좋아하는 감정이 아닐 리가 없었다. 깨닫고 나니 이 단순한 것을 그동안 왜 의식하지 못했나 싶었다.

‘와……. 만약 내가 주인공인 빙의물이 있었으면 독자들이 엄청 욕했겠다. 쟨 하는 것도 없이 먹기만 하고 눈치도 없고, 심지어 마음도 깨달았으면서 바로 고백도 못 한다고…….’

현서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겁 많고, 수동적인 자신을 카르젠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괜히 침울해졌다.

‘그래도 우정 반지까지 맞춘다는 거 보면 일단 나를 인간적으로는 좋아한다는 건데…….’

그냥 확 질러 볼까 했지만, 인생은 실전이었다. 특히 귀족의 가십이 그 무엇보다 큰 유희인 세계였으니, 공공장소에서 한번 꺼낸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감정에 휩쓸려 냅다 저질렀다가 대차게 차이고, 친구로도 지내기 어색해질 만큼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지느니, 단둘이 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현서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카르젠…….”

“응.”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여기서는 조금 그러니까……. 여기 메뉴만 다 먹어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서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알겠어.”

카르젠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홀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한정 메뉴를 전부 다 시켰다. 그러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현서가 케이크를 잡아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

카르젠의 저택에 돌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정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진 현서는 카페 한정 메뉴를 전부 격파한 후, 남은 코스를 차근차근 밟았다.

카페를 나와 수많은 빙의물에 꼭 나왔던 노점상 표 꼬치구이도 먹고, 그동안 꼭 방문하고 싶었던 ‘원정대 굿즈’로 유명한 수공예점의 귀여운 아기 여우 인형, 그리고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와 그 위에 크리시(로 보이는 2등신 인형이 얹어진)가 페어로 있는 인형도 샀다.

현서는 아무래도 원정대를 모티브로 만든 굿즈가 많은 가게다 보니 카르젠이 불편할까 싶어 가게 밖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꿋꿋하게 곁을 지켰다. 덕분에 카르젠은 실물을 곁에 두고도, 익명의 작가들이 그리거나 만든 자신과 크리시 관련된 물건을 열심히 담는 현서를 실컷 감상했다.

현서가 북부 프란제르 영지 기사단 제복을 입은 카르젠의 미니 초상화를 집어 들며 “이건 랜덤 뽑기가 아니라 다행이네요.”라고 속삭이면, “현서야. 진짜 나는 여기에 있는데……”라며 장난스럽게 대답하기도 했고, 카르젠이 분명한 긴 머리 엘프 인형을 품에 안아 보고 “와 엄청 부드러워, 이것도 살래요.”라며 쇼핑 바구니에 넣었을 땐, “그냥 나를 안아 주는 게 어떨까?”라고 나긋하게 말해 흘끔거리던 주변인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두 사람 옆에서 쇼핑을 도와주던 점원 역시 새빨개져서 못 들은 척하느라 손부채질을 하고 괜히 헛기침을 해 대는 와중에, 쇼핑 삼매경이었던 현서만이 “네네, 그럼 오늘은 같이 자요.”라고 생각 없이 대충 대답해 듣는 이들을 소리 없이 열광하게 만들었다.

현서의 쇼핑을 쭉 지켜보던 카르젠은 왜 똑같은 물건을 두 개씩 사냐고, 설마 형님께 선물로 주려는 거냐고 묻기도 했는데, 현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실사용 용도예요.”라고 대답해 카르젠을 제외한 주변인들을 납득시켰다.

카르젠과 에벨루스 신전에 들어선 현서는 소망의 제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젠과 체스터와 리엔이 대륙을 구할 여정을 떠나기 전, 에벨루스 신께 기도를 올렸다고 해서 유명해진 제단엔 다양한 색의 양초가 가득했다. 제단을 빼곡하게 채운 양초의 길이는 제각각이었고, 이젠 다 타서 흘러내린 흔적만 남은 양초들도 많았다.

“와, 초가 엄청 많네요.”

“그렇지? 이게 하루 만에 생기는 양이래. 제단은 매일 밤에 치우거든.”

카르젠은 에벨루스 신전이 원래 돈을 잘 번다고 말하는 대신 저 정도로만 대답했다.

“누구나 빌고 싶은 소원이 있을 테니, 무리도 아니네요.”

현서는 제각각 다른 높이에서 타오르는 양초들을 바라보며 양초를 판매하는 가판대로 시선을 돌렸다.

다양한 색의 양초가 많았는데, 파스텔 색 양초는 개당 1000 클로였고, 순백의 양초는 3000 클로였다. 제단을 채운 양초는 반 이상이 저 순백의 양초였는데, 순백의 양초는 에벨루스의 프리스트가 직접 축복한 고래기름을 써서 만들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기름에도 축복을 불어 넣을 수 있구나…….”

성수만 가능한 줄 알았더니, 기름도 된다는 사실에 놀란 현서의 귀가 쫑긋거렸다. 카르젠은 쓰게 웃으며 그래 봤자 한낱 양초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양초 옆에 함께 판매 중인 엽서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딱히 말을 얹지는 못했다.

손바닥보다 큰 엽서엔 제단 앞에서 경건하게 소원을 비는 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세 사람은 누가 봐도 체스터와 리엔과 카르젠이었다. 카르젠이 에벨루스 신전의 상업성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현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엽서 네 장과 순백의 양초 하나를 계산했다.

두 장은 체스터와 리엔과 카르젠 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진 엽서였고, 다른 두 장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는 포즈로 해사하게 미소 짓는 크리시의 엽서였다. 말간 얼굴로 웃는 크리시 엽서를 본 카르젠은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물었다.

“현서도 소원 빌려고?”

“네. 카르젠이랑 처음 왔을 때부터 꼭 빌어 보고 싶었어요.”

“그랬어? 전혀 몰랐네. 그때 말하지…….”

“그땐 아직 카르젠이랑 서먹해서 부탁하기 좀 그랬어요. 돈도 없었고…….”

지금은 형에게 받은 용돈이 넉넉하니 상관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카르젠과 데면데면한 데다가 무일푼이었으니 뭔가 사 달라는 말을 하긴 어려웠다고 대답하며 옅게 웃었다.

‘시간 참 빠르네. 그땐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웠는데…….’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엔 갑자기 이 세상에 뚝 떨어져 모든 것이 불안하고, 낯설고,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카르젠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었다. 자신을 숨기고 기억 상실인 척하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됐었는데, 지금은 제 이름을 현서라고 부르는 그와 앞으로도 함께하길 바라다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추억하며 백색 양초를 받아 제단으로 다가가자 제단을 담당하는 프리스트가 직접 불을 붙여 주었다. 제단을 빼곡하게 밝히는 소원들 사이로 테트리스 하듯 자신의 초를 끼워 넣은 현서는 한 걸음 물러나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에벨루스 님. 3천 원, 아니. 3천 클로짜리 양초니까 소원 더 빨리 들어주시는 거 맞죠?’

너무 속물 같은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서는 뻔뻔함을 유지하며 기도를 이어 나갔다.

‘제가 조금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저녁이나 내일 중에는 꼭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제 소원은요.’

침을 꼴깍 삼킨 현서는 육성이 아닌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인데도, 혹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조금 더 신중하게 소원을 빌었다.

‘제 소원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도 저를 좋아해 주는 거예요.’

혼자 속으로 비는 건데도, 카르젠이라고 칭하기가 쑥스러워 ‘그 사람’이라고 칭하고 나니 괜히 더 멋쩍었다. 가슴에 퍼지는 몽글몽글한 기분 탓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고, 이비 역시 덩달아 콩닥거리며 제 존재를 과시했다.

‘이비야. 나 소원 비는 중이니까 잠시 귀 막아.’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듯이 이비의 고동이 더 거세지며 다음 이어질 소원에 귀 기울이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현서는 제 은밀한 소원을 공유하는 게 쑥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저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이 세계는 원작과 틀어졌으니, 카르젠이 저랑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요?’

소원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지만, 현서는 이 신전의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이미 한번 틀어져서 신들이 되돌린 세계가 아닌가. 그러니 저가 서브 남주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고 원작 파괴도 아니라며 당당하게 소원을 빌었다.

‘그러니까, 많이는 안 바라고요. 음…… 딱 저랑 남부로 같이 가 줄 정도로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남부에서 저랑 한집에 살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저가 생각해도 참 뻔뻔했다. 칼만 안 들었지, 거의 날강도 수준의 소원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조금 전까지 같이 콩닥거리던 이비 역시 잠잠해졌다. 만약 이비의 실체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저를 묘한 얼굴로 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귓가도 홧홧 달아올랐지만, 눈을 꾹 감은 현서가 소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저도 카르젠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음…… 아멘? 아니지, 감사합니다? 음…… 이상, 끝입니다.’

대충 마무리하고 눈을 뜨자 제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르젠이 보였다. 현서는 조각 같은 그의 옆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가까이 붙어 말했다.

“소원 다 빌었어요. 카르젠은 소원 안 빌어요?”

조금 전까지 그를 대상으로 빈 소원이 민망해 대충 아무 질문이나 던진 격이었지만, 카르젠은 나긋한 목소리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응. 내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거든.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안 될 것 같네.”

“…….”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은 현서의 귀가 쫑긋해졌다. <숲의 마법사>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된 소설이긴 했지만, 대부분 시점이 주인공 리엔에 맞춰 진행되다 보니, 세 사람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전부 알 수는 없었다.

‘리엔은 소원으로 필리스의 평화를 빌었는데, 체스터랑 카르젠의 소원은 안 나왔었지?’

덕분에 독자들이 댓글로 열심히 추리를 했었지만, 이후로도 두 사람의 소원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현서는 카르젠에게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라 판단해 질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카르젠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러게. 정말 다행이지.”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대답한 카르젠이 손을 내밀었다.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맞잡은 현서는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 배시시 웃었다. 그와 손을 잡고 걷을 뿐인데도, 이 평범한 순간이 너무 좋았다. 카르젠이 저를 내려다보며 웃어 주는 것도, 덕분에 주변이 밝아진 것도, 맞잡은 손에 적당하게 힘이 들어간 것도, 그가 제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걷는 것도 포함해 전부.

‘신기하네. 카르젠이랑 같이 있는 건 편하고 좋아.’

원래도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성격이긴 했지만, 카르젠과 함께 있으면 모든 일상이 설레고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어도 전부 다 좋았으니까.

‘오늘은 모든 일이 다 술술 풀릴 것 같아.’

긍정적인 기운이 샘솟다 못해 이젠 빨리 귀가하고 싶었다. 어떤 시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작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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