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9)
  • ### 챕터 13

    “훌쩍… 흑… 훌쩍…….”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을 한참 동안 걷던 이비는 훌쩍이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 방향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 돌아보고 싶었지만, 앞만 보고 쭉 걸어가라던 칼리아르의 말이 생각나 손등으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 방향이 맞나?’

    조금 불안했지만, 만약 길을 잘못 들더라도 칼리아르가 도와줄 것이 분명했기에 이비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훌쩍이며 걷다 보니 서럽다 못해 비통했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쉼 없이 흐르던 눈물도 조금씩 잦아들었고, 히끅히끅 딸꾹질까지 동반했던 울음도 그치게 되었다. 그렇게 훌쩍이며 걷고 있을 때…….

    ‘으응? 레몬 향?’

    어디선가 싱그럽고 상큼한 레몬 향기가 확 풍겼다. 조금 더 자세히 맡고 싶었지만 코가 막힌 탓에 잘 맡을 수가 없어 답답해 훌쩍이고 있자니, 이번엔 달콤한 초콜릿 향이 났다.

    ‘그냥 초콜릿도 아니고, 휘테커 아저씨가 만든 퐁당 쇼콜라 같은데?’

    주방장 휘테커의 특제 디저트인 퐁당 쇼콜라가 분명하다고 판단한 이비가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를 따라 걷다 보니, 허공을 베어 물면 초콜릿 맛이 날 정도로 향이 진해졌다. 시야엔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마치 코앞에 투명한 퐁당 쇼콜라가 있는 것 같았다.

    “훌쩍…….”

    이젠 향기뿐만 아니라 촉촉하고 포슬포슬한 케이크가 제 코를 톡톡 건드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공간이 꿈이라는 것을 상기한 이비는 실험 삼아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촉촉하고 달콤한 디저트가 입에 쏙 들어왔다. 익히 아는 맛이었다.

    ‘역시 퐁당 쇼콜라야!’

    어찌나 달콤한지,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 눈을 감은 이비는 천천히 디저트를 음미했다. 달콤한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너무 맛있어서 한 입 더 먹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실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라 부스스 눈 뜬 이비의 시야에 낯선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살며시 눈동자만 굴리자, 어처구니를 상실한 표정의 크리시와 아리스가 보였다. 아리스는 손수건을 들고 있었고, 크리시는 왼손엔 노랗고 작은 케이크 접시를, 오른손엔 케이크를 조금 뜬 디저트 포크를 들고 있었다.

    “…….”

    “…….”

    “훌쩍……?”

    침묵 속에서 입을 작게 오물거린 이비가 눈동자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두 사람의 맞은편엔 놀란 얼굴로 퐁당 쇼콜라와 초콜릿이 묻은 스푼을 든 카르젠이 보였다.

    “…….”

    “……훌쩍…….”

    이비와 눈이 마주친 카르젠은 뒤늦게 제 얼굴에서 황당함을 지우고 해사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세 사람을 쭉 둘러본 이비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비는 아직 꿈속에 있었……

    “아가. 잠 깬 거 다 아니까, 입 벌려. 너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해.”

    “우우…….”

    밀려오는 민망함에 은근하게 눈을 뜨자, 크리시의 실소가 들렸다.

    “와…… 이게 진짜 되네…….”

    “훌쩍…….”

    온갖 웹소설, 특히 빙의물 경력만 최소 5년인 이비는 크리시와 아리스와 카르젠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가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잤다는 것을.

    ‘확실히 몸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며칠이나 잤지? 설마 일주일은 아니겠지?’

    이비가 눈치 보며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니,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흘째야.”

    나흘이면 생각보다 양호한 편이었다. 혼자 안도한 이비가 긴장을 풀자 익숙한 소음이 청력을 자극했다.

    ‘어? 이 소리는…….’

    짧은 토끼 귀를 쫑긋 세운 이비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늘 보던 제 방이나 카르젠 방의 창문은 아니었지만 크고 넓은 창문 밖 머나먼 곳에 붉은 달이 보였다. 귀를 쫑긋거리는 반응을 본 카르젠이 협탁에 퐁당 쇼콜라를 내려 두며 말했다.

    “창밖이 보고 싶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비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카르젠이 더 빨랐다. 그는 이비가 덮은 이불을 들추고, 이비의 등과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카르젠에게 달랑 안겨 창가에 도달한 이비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놀라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 아우우……!?”

    그 어떤 뜻도 담아내지 못한 소리였지만, 카르젠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비. 바다야.”

    “아우, 우우!”

    “응? 아아…… 그래. 갑자기 바다에 와서 많이 놀랐구나. 이비가 잠든 나흘간 많은 일이 있었어.”

    ‘아, 아니! 카르젠, 그게 아니라!!!’

    파르르 떨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따라 고개를 든 카르젠은, 이비의 시선이 까마득하게 높은 밤하늘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붉은 별 한 쌍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이비. 괜찮아. 저분은 우릴 여기까지 태워다 주신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님이셔.”

    ‘말도 안 되게 크다…….’

    이비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밤하늘을 품은 아름다운 바다가 아닌, 거대한 블랙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니 당연히 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했다. 새카만 블랙드래곤의 붉은 눈동자는 붉은 별이라고 착각할 만큼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일순 지그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느낀 이비는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목을 꼭 끌어안고 귀를 늘어뜨렸다. 카르젠이 슬그머니 창가에 더 가까이 붙자, 더 강하게 끌어안은 이비가 아예 카르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비, 괜찮아. 지그하르트 님은 이비가 아는 것처럼 원정대와 우정을 나눈 친구니까.”

    물론 그가 이 방에 있는 카르젠과 크리시의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드래곤이 지닌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그저 저택 밖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중간계에 존재해선 안 될 것만 같은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초월신처럼 그가 재채기라도 하면 이 저택은 민들레홀씨마냥 날아갈 것 같았다. 카르젠은 제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낑낑대는 이비를 안고 침대로 돌아와 천천히 눕혔다. 이비가 제대로 잘 누운 것을 확인한 크리시는 자신이 들고 있던 레몬 케이크를 떠먹으며 말했다.

    “칼리아르 님은 잘 만나고 왔습니까?”

    ‘헛? 어떻게 알았지?’

    이비의 눈이 동그래지자, 크리시는 평소와 같이 뚱한 얼굴로 레몬케이크를 뜨며 말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비가 잠든 나흘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꼴 안 보고 나흘간 잠을 잤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 꼴?’

    그러고 보니, 크리시의 눈가에 평소보다 훨씬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크리시만큼은 아니지만, 옆에 아리스와 카르젠도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나흘간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니 크리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미 대부분 해결됐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전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설명은 이 두 사람에게 들으세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비는 당황한 와중에도 크리시에게 잘 자라고 입술로 인사했다. 대충 인사를 받아 주고 비척비척 방을 나서는 크리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잠든 동안 혹시 전이가 힘들었나? 아니면 내가 어떻게 될까 봐 신력을 많이 썼나?’

    이비는 크리시가 지친 이유가 어째 제 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리스를 흘긋 봤다. 다행히 아리스는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니니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나흘 동안 여러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거든. 덕분에 엘카사트 제국도, 루아인도, 각 신들을 모시는 신전도 바빴지.”

    아리스의 말을 이해한 이비가 입을 쩍 벌렸다. <숲의 마법사>에서 루아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엘카사트 제국까지라니…… 원작 내용 중 제국과 루아인이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잔뜩 긴장한 이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 무슨 일이었는데요? 설마 전쟁이 나서 여기로 피난 온 건 아니죠? 다들 괜찮은 거 맞아요?’

    카르젠은 침대맡에 다리를 꼬고 앉아 초조해하는 이비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음……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이비는 괜찮으니, 전부 다 말해 달라는 의미로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에 아리스가 픽 웃었지만, 카르젠만큼은 진지하게 이비의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른 일은 당장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비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야기만 먼저 들려주자면, 이비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게 됐어.”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이비의 토끼 귀 털이 크게 부풀었다. 카르젠은 이비의 짧은 귀에 곤두선 털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비의 가족도 찾게 되었거든. 날이 밝는 대로 이비의 가족을 만날 예정이야.”

    ‘이비의 가족’이라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카르젠이 말하는 가족은 제 형이 아닌, 이 몸. 즉 진짜 이비의 가족이 분명했다. 너무 놀라고 긴장한 탓에 피가 다 빠진 것처럼 손끝이 차가워진 이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 가슴을 꾹 누르다 멈칫했다.

    ‘어……?’

    손바닥 아래로 동그란 구체가 눌렸다. 이비는 굳이 옷을 들춰 보지 않아도, 제 손바닥에 닿은 것이 칼리아르에게 받은 구슬 펜던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처럼 펜던트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생명력이 이비의 손바닥을 타고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듯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괜찮으니 진정하라고 저를 다독여 주고 안아 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전신에 퍼졌다. 목걸이로부터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을 받은 이비가 심호흡하며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젠 님. 제가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비의 입술을 집중해서 읽은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는 찰나, 아리스의 목소리가 더 빠르게 들렸다.

    “카르, 말 고르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들려주자. 그게 이비에게도 나은 일이니까.”

    아리스의 지적에 카르젠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끄덕였다.

    “일단, 이비. 물 좀 마시자.”

    갑자기 물을 먹이려는 걸 봐선,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보통 이야기가 아닐 거라 예감한 이비가 얌전히 물을 받아 마셨다. 카르젠이 따라 준 물을 다 마신 이비는 제 가슴의 펜던트를 살포시 누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비를 기다리고 있는 분은 이비의 아버지셔. 그분은 바다의 신 할탄 님의 유일한 아이, 인어왕 에이디아 님이라고 해.”

    “…….”

    인어왕.

    짧은 세 음절이 담은 뜻을 이해한 이비는 토끼 귀의 털을 한껏 부풀린 채, 해탈한 미소를 머금고 베개에 몸을 스르르 기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구에서 죽었다가 다른 세계에 빙의한 시점에 현실적인 이야기를 찾는 게 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애초에 빙의도 말이 안 되잖아? 빙의한 몸이 인어왕의 자식일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응. 그래. 그럴 수 있고 말고.’

    현기증이 날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웃고 있으니, 아리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애가 충격이 심한 것 같으니 이제 좋은 소식을 전해 주자며 중얼거리는 소리와, 이비가 왜 아리스의 애냐고, 그런 경솔한 말은 인어왕을 자극할 수 있으니 말을 조심하자고 침착하게 지적하는 소리도 들린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몸의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 막상 듣고 나니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웃을 수밖에…….

    ‘그럼 원래 이비는 어떻게 된 거지…… 역시 죽은 건가? 원래 이비가 죽은 거라면, 인어왕은 날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인어왕은 어떤 인물이지?’

    혼란해하고 있는 와중에, 아리스가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참고로 인어왕도 너에 대해 알고 있어.”

    “아우우!?”

    아리스는 식겁하는 이비를 보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이 아이가 앞으로 더 충격받을 이야기가 남아 있지만, 일단 그것들은 나중에 들어도 된다고 판단해 중요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가. 인어왕은 너무 걱정하지 마. 에벨루스 님과 할탄 님이 그를 잘 설득했거든. 너를 만나도 화내거나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야.”

    ‘초월신들이 설득을 했다니, 어떻게…… 아니, 잠깐. 그보다 자기 자식이 아닌 걸 아는데 괜찮다고요?’

    중간계에 강림할 수 없는 초월신이 인어왕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보다 의문인 것은 인어왕의 반응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식의 몸을 다른 영혼이 들어와 차지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가슴을 누른 손에 살짝 힘을 주니, 꾹 눌린 구슬에서 또다시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아…….”

    ‘그러고 보니, 칼리아르 님이 나를 불렀던 이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를 내게 주려고 라고 했었지? 곧 이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칼리아르가 찹쌀떡만 한 토끼를 목걸이로 변형시켜 제게 주었을 때 했던 말을, 그리고 귀가 유난히 짧고 작은 아기 토끼의 모습을 떠올린 이비가 구슬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보듬으며 물었다.

    ‘혹시…… 네가 진짜 이비니?’

    당연하게도 대답이 없었지만, 구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고동이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비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기운이 너무 포근해서, 마치 괜찮으니까 안심하라고 도닥여 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연신 구슬을 쓸었다.

    불안해하다가 점차 안정하는 이비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이비는 자연스레 카르젠의 가슴에 제 머리를 기댔고, 카르젠은 그런 이비의 어깨를 안아 주며 말했다.

    “현서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현서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할게.”

    이비는 카르젠이 이렇게까지 제 편을 자처해 주다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기댔다. 카르젠은 제게 온전히 몸을 맡기는 이비를 보듬어 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먼저 했으니, 이제 나흘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설명해 줄게. 현서가 들으면 기뻐할 소식도 있어.”

    “아우?”

    이제부터 당장 날이 밝으면 인어왕과 어떻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려고 했는데, 기뻐할 소식이 있다는 말에 이비의 귀가 쫑긋해졌다. 카르젠은 사실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다며 운을 뗐다.

    “아주 오랫동안 현서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을 찾았어. 당장 사정이 생겨서 며칠 후에 여기로 올 예정이라 바로 만날 수는 없지만, 현서가 깨어나면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어.”

    이비의 눈이 커지며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설마? 라고 소리 없이 말한 이비를 향해, 카르젠이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 말했다.

    “‘현서야, 며칠만 기다려. 형이 레몬 젤리 잔뜩 사 올게.’라고.”

    ‘레몬 젤리…….’

    레몬 젤리가 뜻하는 바를 인지한 이비의 토끼 귀가 쭉 늘어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레몬 젤리는 김현우와 김현서 사이에 아직 이뤄지지 못한 재회를 담은 약속이었다.

    이비는 눈을 크게 뜨고 카르젠을 향해 진짜냐는 듯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재차 확답을 요구하는 모습에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형…….’

    형과 생이별한 지 자그마치 10년…… 형이 제 투정을 달래 주고 집을 나섰던 날부터 지금까지 김현서는 이비가 되어서도 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떤 날은 형과 즐거웠던 단편적인 추억을 떠올리며 울었지만, 대부분은 어린 자신이 형에게 부렸던 투정을 상기하며 자책하는 날이 훨씬 많았다.

    10년을 꽉 채운 햇수만큼 형을 그리워하고, 미안해하고,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 여겼던 이비는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꼭 잡아 쥐었다.

    ‘며칠…… 며칠만 기다리면 형을 만날 수 있어…….’

    카르젠은 이비의 눈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닦아 주며 이야기를 마저 전했다.

    “그리고 형님께서 현서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최대한 빨리 현서의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형이 최대한 빨리,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 말만 들어도 행복해진 이비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칼리아르 님, 감사합니다. 저 이제 칼리아르 님을 믿고 열심히 섬길래요…….’

    형에 대한 문제는 곧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이렇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처리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리스는 신에게 감사드리는 이비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봤다. 카르젠 역시 아리스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는데,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한 이비는 행복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아리스, 아리스. 그럼 형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중요한 일은 뭐예요?’

    “음…….”

    ‘아, 카르젠이 같이 있어서 이렇게 대화하는 건 불편하겠구나.’

    직전까지 아리스가 제 생각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는 걸 망각한 이비가 눈치껏 입술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리스의 대답이 더 빨랐다.

    “괜찮아. 카르도 알아. 며칠 전에 내 능력에 대해 말했거든. 쟤가 말하고 다닐 녀석도 아니고.”

    대충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듯한 뉘앙스였지만, 손으로 제 가슴을 짚은 카르젠이 감동 어린 얼굴로 이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리스의 능력을 듣고 처음엔 많이 놀랐지만, 아리스에게 있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내 소중한 친구가 나를 믿어 주어서 굉장히 기뻤어.”

    세상 감동은 혼자 다 받은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카르젠을 본 아리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얼씨구? 그동안 눈치챘으면서 굳이 내 입으로 듣겠다고 지금까지 입 싹 닫고 있던 게 누구더라? 그리고 그 말을 왜 애한테 눈웃음까지 치면서 말하는 건데?’ 라는 말이 목울대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참았다. 아직 이비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았으니, 다른 주제는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일단, 그건 됐고. 형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지? 지금 네 형은 루아인을 위해 일하고 있는 상태야.”

    “……아우?”

    “엘카사트 제국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체스터랑 정예 요원, 아니. 정예 기사들만 데리고 잠입했어. 그래서 며칠 걸린다고 했던 거고.”

    ‘네? 잠입이요? 제가 아는 그 잠입 맞아요? 몰래 들어가는 거? 그것도 제국에요?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놀란 이비가 기함하며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카르젠이 더 빨랐다. 그는 침착하게 이비의 어깨를 감싸 제게 기대게끔 꼭 당겨 안았다. 그리곤 진정하라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내리 누워 있던 탓인지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카르젠 품에 편하게 기대앉은 이비가 귀를 쫑긋거리며 아리스를 바라봤다. 형이 위험한 게 아니냐는 걱정 어린 생각을 들은 아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바로 덧붙였다.

    “걱정할 것 없어. 네 형이 생각보다 강하더라고. 체스가 직접 어려운 일을 부탁할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형이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아으?”

    아리스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잠시 생각을 골랐다. 문제는 나흘간 밝혀진 일이 너무 광범위한 데다가 극비로 처리된 부분이 많다 보니 쉽게 정리가 안 됐다.

    아리스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자, 카르젠이 만인에게 신뢰를 주는 저음의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알고 보니 아리스 말대로, 형님이 굉장히 강한 분이셨거든.”

    ‘우리 형이? 형이 강해? 현우 형이?’

    이비의 고개가 의아함에 비례해 갸우뚱 기울어졌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왜곡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가 아는 형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여리면서도 누구보다 올곧고, 약간은 유약한 그런 사람. 그랬던 형이 강해진 데다가 타국에 몰래 침투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얼떨떨해하자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그동안 평민들을 괴롭히는 나쁜 귀족이나 흉악범들을 직접 징벌하고 계셨어. 게다가 이비가 말했던 나쁜 마법사 리치도, 꽤 오래전에 형님께서 직접 처단하신 거로 확인되었고.”

    ‘아, 그렇구나. 리치도 형이…… 뭐!?’

    카르젠의 담담한 말에 끄덕이던 이비의 귀와 꼬리털이 펑- 부풀었다. 카르젠은 아무렇지 않게 이비의 곤두선 토끼 귀 털을 손가락으로 살살 만져 눕혀 주었다.

    “형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안전해진 거나 다름없어. 정말 굉장하지?”

    최종 흑막 리치는 대단한 실력의 흑마법사였다. 그런 리치를 자신의 형이 처단했다니, 이비는 찾은 사람이 진짜 내 형이 맞냐고 물으려 했지만, 카르젠이 마저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독자적인 징벌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지만, 형님께서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어느 정도 감형도 됐고, 또 체스가 봤을 때 형님의 능력이 매우 출중해서 왕실을 위해 일하면 사면해 주기로 약속하게 된 거야.”

    ‘형이…… 형이 리치도 이길 만큼 강하다니…….’

    어린 제 기억 속의 유약한 형이 리치를 이길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지만,

    ‘힘든 사람들을 도왔다면…… 그럼 형이 맞아!’

    이타심은 이전 삶에서 부모님이 삼 남매에게 항상 과할 정도로 강조했던 부분이었고, 형은 어려운 이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형이 먼치킨이었다니! 역시 형이야!’

    이비는 자신의 형이 역시 굉장한 사람이라며 납득했고, 지금까지 이어진 설명과 이비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아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결론적으로 카르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엄청나게 왜곡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는 지금 막 깨어나서 정신없는 이비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일단 침묵했다.

    즉, 네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형이 오래전 리치와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리치가 죽기 전에 최후의 발악으로 자신의 남은 목숨을 대가 삼아 형에게 지울 수 없는 저주를 걸었고, 덕분에 네 형의 생명력이 마모되어 살기 위해 흉악범들의 생명을 썩션하다시피 흡수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려주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 차라리 카르 녀석의 왜곡된 설명이 낫지…….’

    그동안 이비의 형 케이가 저지른 일은 체스터 선에서 국가 비밀로 처리될 터였다. 케이의 존재나 자취는 대중에게 평생 공표하지 않을 일이었으니, 굳이 이비가 몰라도 될 일이었다. 기밀로 부쳐질 일에 대해서 알리지 않는 게 맞다는 걸 아는데도, 아리스는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비는 카르젠의 말만 듣고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이비가 형을 추억하며 충분히 감동할 시간을 준 아리스는, 막 깨어난 이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아가. 일단 지금 몸은 좀 어때? 아픈 곳은 없어?”

    제일 중요한 인어왕과 형의 이야기는 했으니, 이제 미뤄 뒀던 부가적인 문제들을 논할 차례였다. 이비는 제 몸에 대해 잠시 가늠해 보듯 여기저기 움직여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가 꿈을 꾸는 동안, 나도 크리시도 몸 상태가 좋아졌어.”

    다행이라며 입술로 대답한 이비는, 저가 아팠던 이유 중에 하나가 카르젠의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숨기기로 했다. 혹시라도 카르젠이 알면 제게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그의 성정이라면 자신이 다루는 방법을 터득할 때까지 저와 거리를 두려 할지도 몰랐다.

    ‘칼리아르 님이 카르젠의 슬픔도 내가 곧 다룰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셨으니까, 빨리 배웠으면 좋겠다. 카르젠이랑 멀어지긴 싫으니까…….’

    카르젠에게 도움을 주는 자신의 멋진 미래를 상상하던 이비는, 제 생각을 고스란히 듣고 찌푸린 아리스를 향해 급히 해명했다.

    ‘아, 아리스! 지금은 괜찮으니까요! 그리고 전 태생이 연약하게 태어났대요! 또 몸이 안 좋은 건 바다에 가면 건강해진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아직 비밀로 해 주세요! 제발요!’

    퍽 다급한 요청에 아리스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이비를 바라봤다. 마주한 이비의 눈망울은 애절함을 넘어 거의 울상이었다. 저 눈빛을 오래 마주할 자신이 없던 아리스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고갯짓에 안도한 이비는 제 손을 슬며시 깍지 껴 잡는 카르젠을 바라보며 입술로 물었다.

    -제가 잠든 나흘간 무슨 일이 있었어요?-

    손을 꼬옥 맞잡고 이비의 입술을 집중해서 읽은 카르젠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가 잠든 날, 나는 긴급 회의로 호출받고 아침 일찍 입궁했어. 그리고 체스터에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지.”

    ***

    “-였고…… 정신 차려 보니 신의 부름을 받아 엘카사트 제국의 아이린 성녀와 만나게 됐어.”

    나흘 전. 카르젠이 체스터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말이었다. 먼저 와 있던 리엔은 체스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고, 체스터의 옆에는 여정을 함께했던 드워프 장로 멀린이 앉아 있었다.

    또 테이블 위에는 영상 통신 수정이 있었는데, 수정구가 보여 주는 화면 속엔 수도를 향해 날아오는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와 그의 등에 올라탄 레오닉이 보였다. 카르젠이 리엔의 옆에 앉은 것을 확인한 체스터는, 두통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골을 문지르며 말했다.

    “카르. 어서 와. 이제 막 이야기 시작했으니, 대충 들어. 하여간에 성녀가 말하길…… 자신은 재앙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양신의 가호로 필리스에 강림했지만, 엘카사트 제국에서 성녀를 억압하고 있어서 루아인에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고 했어.”

    재앙의 반복이라는 말에 지그하르트를 제외한 모두의 눈빛이 술렁였다. 하지만 다들 침착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체스터는 저를 재촉하지 않는 이들에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성녀의 말을 전했다.

    “성녀가 말하길, 나 루아인 체스터는 반년 후, 그러니까 내년 봄에 죽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

    체스터의 말에 지그하르트를 제외한 모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리엔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습관적으로 복슬복슬한 턱수염을 쓰다듬던 멀린은 화들짝 놀라 제 수염을 한 움큼 잡아 뜯을 뻔했다.

    지그하르트 위에 탑승한 레오닉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경악했고, 카르젠은 입을 가린 채 심각한 얼굴로 체스터를 바라봤다. 모두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핀 체스터는 수정구 속의 블랙드래곤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그하르트 님은 예상하셨습니까?”

    집무실에 모인 이들이 전부 수정구를 바라봤다. 앞만 보고 비행하던 지그하르트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예상한 건 아니지만,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되는군.”

    무엇이 이해가 된다는 것인지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성급하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레오닉을 제외하고 지그하르트와 여정을 함께한 이들이었으니, 드래곤의 화법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인내했다.

    모두가 숨죽인 집무실엔 수정구에서 들리는 거센 바람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때쯤, 지그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칼리아르를 포함한 초월신들의 힘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약해졌지. 대기에 흐르는 신력이 눈에 띄게 흐려졌네. 태양신 아르카라스만 빼고.”

    태양신을 제외한 초월신들의 힘이 약해졌다니……. 카르젠은 칼리아르 외에 다른 초월신들도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멀린 역시 그러했고, 리엔도 놀란 듯이 보였다. 레오닉은 수정을 통해 제 형 카르젠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체스터가 지그하르트의 말에 맞장구쳤다.

    “예. 맞습니다. 지그하르트 님께서 느끼신 것처럼… 칼리아르님께서 유독 많은 힘을 잃긴 하셨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초월신들이 힘을 잃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각 신전 대신관들도 느끼고 있었으나, 중간계가 혼란해질까 봐 함구하고 있었다더군요. 동대륙도 마찬가지고요.”

    지그하르트와 체스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가를 매만지던 카르젠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년 봄에 죽은 적이 있다는 말은…… 체스, 네가 다가올 미래에 죽은 과거가 있다는 뜻이야?”

    “성녀의 말로는 그랬어.”

    체스터 옆에 앉은 멀린은 제 복슬복슬한 수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양새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입술을 잘근거리던 리엔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물었다.

    “그 말은 체스 네가… 회귀…했다는 거지?”

    저가 물으면서도 내용이 퍽 현실성 없어서인지, 리엔의 목소리엔 약간의 주저함이 섞여 있었다. 체스터는 그런 리엔에게 긍정의 의미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녀에게 들은 바로는 회귀가 맞아. 정확히는 나뿐만이 아니라, 필리스가.”

    “…….”

    이 별이 시간을 거슬렀다는 말을 들은 카르젠은 문득 꿈에서 들었던 이비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요, 카르젠 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었던 책이랑 지금 이 세계는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리치도 그렇고……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이나 아리스도 그렇고요. 어쩌면 다른 점이 더 많은데, 제가 여기 소식이 어두워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비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만 해도 여러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필리스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며 변수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체스터가 말을 이었다.

    “성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보자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초월신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라고 했어. 필리스뿐만이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의 시간축이 뒤틀릴 수 있다고 했지. 게다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초월신 하나가 소멸할 만큼 힘을 써도,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모두 침착하게 듣고 있자니, 체스터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성녀의 말로는 이 별의 시간을 되돌린 이유는 대재앙이라고 했다. 대재앙의 징후를 느낀 각 초월신의 대신관들은 몇 가지 가설을 추렸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해일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해일이 아닌, 루아인 전역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해일.

    엘카사트 제국은 해일이 제국까지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루아인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국경을 봉쇄했다. 그리곤 국경 개방과 망명을 받아 준다는 핑계로 제국의 속국이 될 것을 압박했다.

    루아인 왕실은 국민들을 위해 고려할 것 없이 속국이 되기로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바다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 인어왕이 유일하게 뭍의 존재와 사랑을 나눠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의 죽음이 바다로 흘러간 날,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루아인 남부에서부터 육지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해일은 바다를 다스리는 인어왕의 눈물이 만든 파도였다. 이 땅에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겠다는 인어왕의 분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 결과 루아인과 마르카는 삽시간에 수장당했고, 엘카사트 제국 역시 남부에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엘카사트 제국과 그 외 국가들은 살아남은 것처럼 들리겠지만…….

    “문제는, 우리 선조들이 설치해 둔 ‘잊혀진 숲’의 결계가 수장당하면서 모두 파괴됐다는 거지.”

    카르젠은 개국공신인 제 가문의 선조가 만든 결계를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루아인의 건국 전쟁 당시 다크엘프를 사지로 몰아넣고, 그들과 이계의 틈새가 대륙과 이어지지 않게 봉인한 강력한 결계.

    선조들의 결계 때문에 다크엘프들은 평생 ‘잊혀진 숲’이라 불리는 숨겨진 땅에 갇힌 채, 홀로 이계인을 막아야 했지만, 결계가 무너진 후 하늘이 뚫려 버렸다.

    “결계가 무너지고, 필리스의 모든 하늘을 통해 이계인들이 공중전함을 끌고 침략했다고 해. 이계인의 존재나 그들의 기술에 대응하는 방법을 몰랐던 동대륙과 제국은 순식간에 전멸당했고…….”

    방 안엔 여전히 체스터의 목소리와 수정구슬을 통해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리엔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멀린은 드워프어로 작게 욕을 읊조렸다.

    이어진 이야기는 뻔했다. 결국 중간계에 겨우 살아남은 소수 종족들은 이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필리스가 이계인들의 터전으로 거듭나는가 했으나, 이계인들은 세월이 흘러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이계인이 정착 후 ‘제2의 푸른 별’이 된 필리스는 한동안 평화로웠으나, 몇 세기가 지나자 그들은 또 서로를 나눠 편을 가르고, 타인의 것을 욕심내고 서로를 해치며 이 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들이 사랑하는 필리스가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초월신들은 몹시 슬퍼했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일을 바로잡길 바랐지만, 그렇게 된다면 저들이 소멸할지도 몰랐기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이계인들이 원래 살던 ‘푸른 별’을 사랑했던 칼리아르가 나섰다. 칼리아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푸른 별의 미물들을 더 굽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자책했다. 그리곤 시간을 되돌리고자 스스로 소멸의 길을 택했다.

    “그때 칼리아르 님은 대부분의 힘을 잃으셨다고 해.”

    태양신 아르카라스가 성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성녀가 체스터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체스터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아르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도운 것이 에벨루스였겠군.”

    지그하르트의 추측에 체스터가 긍정했다.

    “맞습니다. 에벨루스 님께서 힘을 보태셨고, 루이사 님과 할탄 님께서도 힘을 보태셨습니다. 아르카라스 님 역시 힘을 보태려 했지만, 만에 하나 태양이 소멸할 경우 아르카라스 님이 돌보는 별들이 모두 망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껏 얌전히 듣던 멀린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광물이 머금은 빛이 약해지기 시작했지. 같은 광산에서 나는 광물임에도 이전 같은 영롱한 별빛을 머금지 못했어… 우린 그저…….”

    멀린은 잠시 말을 고르다 슬픈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먹먹함이 가득 차오른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루이사 님께서 더는 필리스를 예전만큼 굽어살피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네만, 여전히 이 별을 사랑하고 계셨군… 자신을 깎아 가면서까지…….”

    드워프 장로의 침통한 읊조림에 분위기가 한층 더 숙연해졌다. 두툼한 입술을 짓씹은 멀린은 다부진 주먹을 콱 틀어쥐며 물었다.

    “체스터 왕세자여. 어떻게 해야 그 재앙을 막을 수 있는지도 성녀에게 들은 건가?”

    저 질문에 이미 과거가 된 미래를 듣고 충격에 빠졌던 이들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다가오지 않은 지난 일보다 현재가 중요했다. 체스터는 성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다행히 큰 단서를 얻었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재앙을 막기 위해 우선 필수적으로 세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명은 엘카사트에 억압된 상태로 있는 성녀. 다른 한 명은 신력과 마력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특별한 존재. 마지막으로…….”

    카르젠은 체스터가 마지막으로 언급할 이가 누군지 예상할 수 있었다.

    “뭍의 종족과 맺은 결실로 인어왕이 직접 낳은 마지막 아이.”

    ***

    카르젠의 이야기를 들은 이비는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이비의 침대 옆에 앉아 함께 듣던 아리스는 두 번째 듣는 이야기지만,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치맛자락에 슬며시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 아우…….”

    겨우 정신 차린 이비는 혼란함을 지우지 못한 채 베개에 몸을 파묻었다. 카르젠은 제 이야기를 듣고 충격 받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이비를 향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엔 막을 수 있어. 일단 인어왕께서 진정하셨으니까.”

    “…우우…….”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비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인어왕이 며칠 전까지 길길이 날뛰었다는 것과, 지그하르트에게 뒷목 잡혀 온 케이가 내 동생을 건드리면 인어왕이고 자시고 무조건 회 쳐 먹을 거라며 그를 상대로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는 것은 철저히 비밀로 부쳤다.

    아리스가 자주 하는 말처럼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었으니, 굳이 모든 진실을 들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비는 인어왕이 진정했다는 것, 그리고 칼리아르와 할탄이 인어왕을 설득했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며 고민했다.

    ‘곧 이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거란다.’

    제 추측이 맞다면, 이 목걸이에 깃든 것은 이비의 영혼인 것 같았다. 처음 목걸이를 받고 느꼈던 파동이나 따스함을 막역하게 이비의 일부라고만 생각했지, 이비 그 자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혼란스러웠다.

    ‘그럼…… 인어왕에게 이비를 돌려주게 되면 나는…… 이비의 몸에 들어온 나는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저릿해지려던 찰나, 아리스가 이비의 생각을 부정하며 칼같이 끊어냈다.

    “아니. 칼리아르 님께서 그 부분까지 다 생각해 두셨다고 해.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건 성녀와 네 형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런 이유로 체스터가 직접 정예 기사들과 케이와 함께 제국에 갇힌 성녀를 몰래 구출하기 위해 잠입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비는 형이 강하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형…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이비의 걱정을 들은 아리스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물론 한밤중이라 밖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낮에 봤던 풍경이 눈앞에 선했다.

    그러니까, 진짜 이비를 돌려받는 방법을 듣고 흥분한 케이가 지그하르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어왕에게 달려들었다가 풍비박산 난 돌섬이나, 드래곤레어만큼 거대한 구멍이 생긴 백사장의 풍경이…….

    “아가. 형 걱정은 하지 말고. 다른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렴. 우리가 아는 건 다 알려 줄게.”

    물론 어느 정도 필터링을 거쳐서. 라는 말은 카르젠도 아리스도 굳이 하지 않았다. 이비는 두 사람이 태연한 모습을 보고 저도 진정하며 자세를 편히 했다.

    ‘형은 어떻게 찾았어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자,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 형이 제 발로 찾아왔어.”

    ‘형이 직접 찾아왔어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비의 쫑긋거리는 토끼 귀를 지켜보던 아리스는 그날 카르젠의 저택에 찾아온 케이가 저를 현서로 착각해 와락 끌어안고 오열했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상황만 설명했다. 저 이야기는 나중에 충분히 우려먹을 예정이었다.

    “네 형이 요괴를 부릴 줄 알아서, 크리시에게 몰래 요괴를 붙여 감시했대. 그러다 크리시가 카르 집에 방문했을 때 몰래 따라온 거고.”

    ‘네? 형이 요괴를 다뤄요?’

    “정확히는 마나로 만들어 낸 인공 식신(式神)에 가깝다던데…… 솔직히 난 뭔지 잘 모르겠어.”

    이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리스의 말에 이어 카르젠이 설명을 보탰다.

    “식신은 동대륙 주술사들이 쓰는 방식이야. 마법사가 만들어 내는 사역마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돼. 그리고 지그하르트 님 말씀으로는 형님이 마나를 다루는 솜씨가 너무 정교해서 8서클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 같다고 하셨어.”

    이비는 하다 하다 이젠 형이 8서클 이상의 실력을 겸비했다는 말에 현기증을 느꼈다. 거기에다가 동대륙의 주술까지 다룰 줄 알다니…… 자신의 형이 필리스에서 대체 뭘 하고 지냈는지 상상하는 것도 어려웠다.

    ‘물론 형이…… 노력파긴 했지만…….’

    김현서의 기억 속의 형 김현우는 전형적인 한국 학생이었다. 한마디로 공부를 밤낮없이 열심히 했다는 뜻이었다.

    ‘형에 대해 가장 선명한 기억도, 공부하는 모습이었지…… 전교 2등 아래로 떨어진 적도 없다고 했고.’

    ‘형아 놀자~’ 부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형을 볼 수 있었다. 어린 김현서가 가장 많이 봤던 형의 모습이었다.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기업 경영에 뛰어들 내정자였기에 형은 24시간이 부족했었다.

    ‘그런데도 나랑 현아랑도 많이 놀아 주고…… 생각해 보면 형도 어렸는데, 대단해.’

    새삼 형의 대담함을 상기한 이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처럼 성실한 사람이라면 분명 뭐든 다 이룰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8서클 수준의 마법사라는 것은 너무 나간 것 같아 얼떨떨했지만.

    내내 이비를 면밀히 살피던 카르젠은 컵에 물을 따라 직접 먹여 주기 시작했다. 카르젠에게 부축받아 물을 몇 모금 마신 이비가 작게 숨을 몰아쉬며 생각으로 물었다.

    ‘진짜 형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죠? 형은 개미도 못 죽인단 말이에요. 만약 잠입이 들키면…….’

    이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아리스가 학을 떼듯이 손사래 쳤다.

    “어휴. 아가. 정 걱정되거든 네 형과 마주칠 제국 놈들을 걱정해.”

    아리스가 확신하며 말하는 모습을 본 이비는 일단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형이 혼자 간 것도 아니고, 소드마스터 체스터와 정예 기사들이 함께 갔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게다가 8서클 마법사라니…… 아리스 말대로 형 일행을 상대해야 하는 제국을 걱정할 상황이긴 했다.

    ‘음, 그럼 일단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면…….’

    잠에서 깨자마자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비는 지금 저가 들은 것들을 다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잠시 정리했다.

    ‘내가 빙의한 이비의 몸은 인어왕이 낳은 아이라는 거고…… 원래라면 이비가 그 숲에서 죽는 바람에 인어왕이 해일을 일으켰고, 덕분에 결계가 다 파괴되어 우주를 떠돌던 지구인들이 침략한 거구나…….’

    이비는 원작에서 나왔던 이계인에 대해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우주 난민이 된 지구인들은 고등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필리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기를 주렁주렁 단 우주 전함을 이끌고 필리스 전역을 동시에 침략했다면, 필리스의 종족들이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아인이 수장된 거라면, 내가 만난 사람들도 전부 죽었겠지…….’

    자신이 사랑했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전부 죽고 그 세계가 파괴되는 결말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새드 엔딩도 이런 새드 엔딩이 없었다. 만약 이 내용이 <숲의 마법사>로 연재됐다면, 작가는 300살까지 거뜬히 살 만큼 욕을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나 과거가 되었지만, 초월신들이 소멸을 감수하고 힘을 쓴 덕분에 시간이 돌아왔다고 했으니 일을 바로잡으면 될 거였다.

    ‘내가 걱정할 건 이비를 어떻게 돌려주느냐 인데…… 아리스! 이 목걸이를 인어왕에게 주면 되나요?’

    제 가슴을 살짝 짚으며 고민하니 아리스가 은근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인어왕의 아이를 돌려주는 방법은, 내일 인어왕에게 직접 들으렴.”

    “아우?”

    대놓고 시선을 피하는 아리스의 모습을 처음 본 이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데요? 아리스는 알고 있죠? 무슨 방법인데요? 왜 자꾸 눈을 피해요?’

    “흠흠. 일단, 너 먹일 것 좀 준비하라고 해야겠다. 주방에 다녀올게.”

    설렁줄을 당겨도 될 것을, 굳이 주방에 직접 가서 일러 주겠다며 급하게 일어나는 모습이 몹시 수상해 보였다.

    ‘왜요, 뭔데요! 아리스는 아는 거 맞죠?’

    “나도 잘 몰라. 내일 인어왕한테 들어. 그나저나 아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제논이 육개장 했거든? 아아, 아니다. 나흘간 엘릭서만 먹어서 육개장은 좀 그렇겠네. 아니면 맑은 스튜랑 곰탕도 있어.”

    ‘그럼 곰탕이요. 아니, 그 전에 말해 주고 가요!’

    이비가 손을 뻗었지만, 잽싼 아리스를 잡을 순 없었다. 아리스가 곰탕을 가져다주겠다며 도망치다시피 방을 나가 버리자 이비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르젠을 향했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를 향해 변명하듯이 말했다.

    “음…… 그게, 우린 에이디아 님, 지그하르트 님, 형님 셋이 대화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라…….”

    드물게 말끝을 흐리는 카르젠을 지켜보던 이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왜 멀리서 지켜봤어요?-

    입술을 벙긋거린 이비를 지켜본 카르젠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세 분에게 다가갈 상황이 아니었거든. 멀리서 듣기론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첫 번째 방법은 제대로 듣지 못했고…….”

    사실 대충 듣기는 했다. 문젠 첫 번째 방법을 들은 케이의 반응이었다. 블랙드래곤이 곁에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길이 날뛰며 화내던 케이를 떠올리면, 모른 척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형님이 가진 신력과 성녀가 가진 신력이 필요하다는 것 같았어. 방법은 나도 몰라. 아마 내일 에이디아 님께서 직접 알려 주실 것 같아.”

    이비는 깨어난 후 들은 설명을 종합해 봤다. 즉, 원래 이비를 인어왕에게 돌려줄 방법은 두 가지라는 거고. 그중 첫 번째 방법이 뭔진 모르지만, 그게 어려우니 형이 직접 성녀를 구하러 제국에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성녀와 형의 성력이 필요하다던 말을 곱씹던 와중에 이비의 토끼 귀 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잠깐…… 형이 가진 신력?’

    당황한 이비가 카르젠의 손바닥을 끌어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쓱쓱 썼다.

    [형이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응. 형님은 굉장히 훌륭한 마법사이셔.”

    카르젠의 답을 들은 이비의 손가락이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신력이 있다고요? 어떻게 마력과 신력이 한 몸에 있어요?]

    이비가 아는 <숲의 마법사>의 중간계 종족들은 모두 마력이나 신력 둘 중 하나만 몸에 지닐 수 있었다. 저 둘이 한 몸에 섞일 경우 큰 고통을 동반하고, 심한 경우 몸의 기능이 일부 상실되기도 했다. 글을 다 쓴 이비가 대답을 기다리며 걱정스레 바라보자 카르젠이 저도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형님이 다른 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고 있어. 형님은 성녀처럼 육신 그대로 필리스에 강림하셨으니까.”

    “아…….”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비가 납득한 얼굴로 끄덕이는 것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신력을 마치 마력처럼 공격용으로 응용해 쓰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는 말도 아꼈다. 지금 이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르젠은 은근하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 이비. 형님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

    “아우?”

    “앞으로 형님을 자주 뵐 테니,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선물을 준비할까 하거든. 형님은 뭘 좋아하셔?”

    형의 취향을 묻는 말에 놀란 토끼 눈으로 카르젠을 바라보던 이비는 이내 활짝 미소 지으며 그의 손바닥에 여러 목록을 써 주기 시작했다.

    ***

    “누가 내 이야기 하나…….”

    중얼거리며 귀를 매만진 남자가 제 옆에 로브를 뒤집어쓴 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세자야. 성녀는 저 탑에 있는 것 같다. 함정도 한두 개가 아니니, 나 혼자 다녀와야겠다.”

    그의 말에 체스터는 태양신 아르카라스 프리스트의 로브를 더 여미며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저들 앞엔 아르카라스 신전 개인 기도실이 있는 3층짜리 건물 외에 탑은 보이지 않았다. 체스터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그저 제국 귀족들의 기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멋진 정원뿐이었다.

    “현혹마법입니까?”

    “비슷한데, 강한 신력으로 꽁꽁 둘러서 감춰 뒀다. 이중 구조로 이뤄져 있는 걸 보니 드래곤이 아닌 이상 보지 못할 거야.”

    마법으로 색을 바꾼 체스터의 갈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는 것을 보다니,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정도 실력이 있으니 소드마스터인 저를 물가에 애처럼 대하고, 겁도 없이 바다에서 인어왕에게 달려들었겠지만…….

    “그럼 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아니다. 네 기사들 데리고 탈출 지점에 먼저 가 있어.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할 거야.”

    “함정이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함정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아. 이 정도쯤이야 식은 스튜 먹기다. 그리고 혼자가 편해.”

    체스터는 고집을 꺾을 생각 없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체스터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케이. 말했던 것처럼…….”

    재차 당부하려는 체스터에게, 케이가 후드를 눌러쓰며 지겹다는 듯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다. 알아. 누구도 죽이지 말라고.”

    “예. 지금부터 한 명이라도 더 죽일 경우 사면은 없던 일로 할 겁니다.”

    그 말에 앞으로 나서려던 케이가 체스터를 향해 고개 돌리며 무해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왕세자야.”

    “불허합니다.”

    일부러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게 무색할 만큼, 케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아직 말도 안 꺼냈다.”

    “뭐든 안 됩니다. 무조건 살생 없이 성녀를 구해야 합니다.”

    “들어 봐라, 왕세자야. 건물이 무너져서 깔려 죽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럼 건물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내 말은 뭐로 들은 거냐? 저 탑에 지금 함정이 몇 갠지는 아냐?”

    “그래도 안 됩니다.”

    “…….”

    “음?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식은 스튜 먹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낱 소드마스터인 저는 없는 편이 낫다고 하셨으니, 이만 물러나 탈출 지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냐고 따지려던 케이는 제게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기척을 숨기고 자리를 잽싸게 뜬 체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 저, 저…… 하! 현서는 대체 저런 애송이가 뭐 좋다고…….”

    케이는 프란제르 아리스가 직접 소개해 주었던 동생의 최애 셋을 본 순간 주먹을 절로 쥐었었다. 저가 볼 때 크리시, 카르젠, 체스터 셋 다 얼굴만 번지르르한 애송이들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셋 다 동생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멀리 치워 버리고 싶은 면상이었다. 저 셋이 사라지면 동생이 매우 슬퍼할 거라는 아리스의 말에 실행하진 않았지만.

    ‘하아…… 현서야. 형이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저 얄미운 왕세자가 동생이 세 번째로 좋아하는 녀석만 아니었다면 쥐어박고도 남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케이는 마력과 신력으로 꽁꽁 감춰진 탑으로 향하며 제 성력과 마력을 끌어 올렸다.

    숨겨진 탑에 함정은 다 파악했으니, 이제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보초 선 팔라딘을 한 명도 죽이지 않으며 성녀를 구하고, 한시라도 빨리 동생 곁으로 돌아갈 때였다.

    ***

    어슴푸레한 새벽이 천천히 걷히고, 밤을 노래하던 별이 흐려질 무렵. 이른 시간부터 카르젠에게 부축받으며 방을 나선 이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와, 구름 좀 봐. 날이 흐린 걸 보니 불길해…….’

    복도의 창밖으로 바다를 보니, 바다엔 해무가,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 어두컴컴했다. 바다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운지라 이런 꿉꿉한 아침은 꽤 흔한 일이었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이비의 눈엔 모든 것이 불길하게 보였다. 아리스는 긴장한 탓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토끼를 진정시키듯 말했다.

    “아가. 긴장하지 마. 지그하르트 님도 계시니까.”

    단 한 톨도 걱정할 일 없다는 듯한 여상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리스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으며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하품한 크리시 역시 거들었다.

    “대화만 하는 자리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잠이 덜 깼는지,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였다. 최애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이비의 토끼 귀가 자연스레 크리시 쪽으로 쫑긋 기울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카르젠은 은근히 허리를 숙여 이비의 토끼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나도 이비의 곁에 있을게.”

    “아, 아우…….”

    평소보다 낮은 동굴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워진 이비가 토끼 귀를 꾸깃꾸깃 비볐다. 카르젠은 이비의 반응이 그저 귀엽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그 결과 아리스와 크리시를 동시에 질색하게 만들었다. 둘의 반응을 보지 못한 이비는 귀를 문지르며 어둑한 창밖을 살폈다.

    ‘지그하르트는 안 보이네. 어제 저기쯤에 앉아 있던 것 같은데…… 폴리모프해서 저택에 들어왔나? 인어왕은 어떤 모습일까? 바다 밖에 나와 있으니 다리가 있겠지?’

    물고기를 무서워하는 이비는 혹시나 인어왕 에이디아가 비늘을 달고 있어도 놀라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도 자신은 그의 아이의 몸을 멋대로 쓰는 입장이었으니, 첫 만남부터 인어왕에게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뭐가 됐든 나는 불청객인 걸 잊지 말고, 꼭 납작 엎드려야지.’

    이비의 몸에 빙의 후, 제대로 마주한 첫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웬 잡배에게 끌려가 취업 사기를 당할 뻔한 적도 있었고, 그 외에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늘 카르젠이나 크리시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해결해 주었으니 사실상 저가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비는 인어왕과 마주하게 된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초월신이 이유 없이 나서서 도움을 줬을 리가 없으니, 그만큼 이 문제가 어렵거나 또는 해결하기 힘들다는 암시 같았다. 거기에 겨우 다시 만난 형의 부재도 신경 쓰였다.

    ‘형이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었겠지만, 첫 번째 방법이 뭐든 형은 그게 싫었던 게 분명해. 분명 두 번째 방법을 위해 성녀를 구하러 제국에 잠입했겠지……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려고…….’

    잠든 동안 일을 전부 다 듣진 못했지만, 형이 곧 깨어날 자신을 남겨 두고 무리하게 움직인 데에는 분명 제 안위가 달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함께 걷던 아리스와 크리시가 놀라 저를 흘긋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이비가 생각을 이었다.

    ‘일단 두 가지 방법 다 들어 보고 결정해야지. 두 번째 방법은 형이나 성녀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두 사람이 뭔가 희생할 수도 있는 거고…… 내 문제를 대신 짊어지게 할 수는 없어.’

    이비가 심호흡하며 긴장을 다스리고 있을 때,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카르젠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이비는 당연히 그동안 쭉 봤던 부집사 할리스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고개 돌리고 마주한 이는 희끗한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집사 바론이었다.

    ‘어, 집사 할아버지 돌아오셨네?’

    카르젠에게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넨 바론은 이어 이비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비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인자한 얼굴로 지그하르트와 에이디아가 기다리고 있다며 응접실 문을 열어 주었다.

    이비의 시선이 자연스레 밝은 응접실 안으로 향했다. 넓은 응접실 안엔 지그하르트일 것이 분명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순히 흑발에 붉은 눈동자여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누가 봐도 그냥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드래곤의 기운에 짓눌릴 법도 한데, 이비는 긴장 외에 다른 압박은 느끼지 못했다. 물론 이는 이비가 졸도하지 않도록 제 기운을 갈무리한 지그하르트의 배려였다. 카르젠과 크리시가 지그하르트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지만, 이를 모르는 이비의 시선은 지그하르트의 맞은편에는 앉은 이의 푸른 머리카락에 꽂혔다.

    ‘어?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건가?’

    응접실 문을 등지고 앉은 이의 웨이브 진 머리카락은 특이하게도 한 가지 색이 아닌, 바다가 가진 모든 푸른색을 머금은 듯했다. 게다가 응접실 내부에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그의 머리카락만이 파도처럼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것이 아닌, 여러 푸른색이 섞여 각도에 따라 색이 반사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청량하고 맑은 기운이 응접실을 채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이비가 카르젠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거의 굳어 있던 이비는 그가 저를 향해 돌아선 순간, 물결치듯 찰랑이는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은빛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비는 그가 자신을 향해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였을 땐 무의식중에 헤벌쭉 웃을 뻔하고 놀라 입을 가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칼리아르에게 받은 목걸이에서 거센 파동이 느껴졌다. 그 파동을 느낀 건지 그의 시선이 이비의 가슴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가.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단다.”

    에이디아가 양팔을 벌리며 환하게 미소 짓자, 이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카르젠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제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였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강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천천히 그의 앞에 다가간 이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잠식한 그리움이 목걸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비의 안에 있는 김현서도 그를 보자마자 그리움을 느꼈다.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마치 지구에 계신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았다.

    에이디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이비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의 품에 포옥 안겼다. 그가 팔을 둘러 마주 안은 순간, 칼리아르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안도감이 몸을 잠식했다. 인어왕 역시 자신을 포함한 만물을 포용해 줄 것이고, 그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 생겨도 전부 괜찮을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엄마 아빠 같아…….’

    인어왕의 품에 안긴 이비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네.”

    “어련히 잘하겠지.”

    다른 층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는 아리스와 맞은편 소파에 널브러진 크리시와 달리 카르젠은 시종일관 왔다 갔다 하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원래라면 아리스가 말을 못 하는 이비 대신 대화를 도와주려 했으나, 인어왕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청했다.

    카르젠은 저라도 이비의 곁에 남아 있으려 했지만, 지그하르트가 점잖게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야 했다. 이후 저들이 있는 응접실에 찻주전자가 두 번 바뀔 정도로 시간이 지났지만, 이비와 에이디아와 지그하르트는 여전히 아래층 응접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야, 카르. 좀 앉아. 정신 사납다.”

    “아니면 누워. 누우면 마음도 편해져.”

    “…….”

    카르젠은 두 사람에게 대꾸할 여유도 없이 초조하게 응접실을 서성였다. 뭔가에 홀린 듯이 인어왕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안겨 흐느끼던 이비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어왕이 할탄의 자식이라는 걸 망각했어…….’

    바다의 신 할탄은 모든 생명의 어버이라 불렸다. 중간계의 종족들은 죽어서 땅에 묻히고, 그들의 죽음은 바다로 흘러가는 게 이 별의 이치였고, 인어왕 에이디아는 초월신인 할탄 대신 중간계에 남아 바다로 흘러온 모든 죽음의 어버이가 되어 주는 존재였다.

    카르젠 역시 며칠 전 인어왕과 처음 마주한 순간, 격한 그리움을 느꼈었다. 친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 살 아이처럼 그의 품에 안겨 응석 부리고 싶었다. 저도 이런 격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느꼈는데, 부모와 생이별한 이비는 얼마나 격한 그리움을 느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형님이 빨리 돌아오셔야 인어왕의 그리움에 현혹되지 않겠지. 이비의 가족은 여기에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줘야겠어. 또 심해에는 디저트도 없고, 이비가 무서워하는 물고기도 잔뜩 있으니 적응하기 힘들 게 분명해. 아, 바론에게 어류 도감을 구해 오라고 해야겠군.’

    아리스는 솜사탕을 은근히 물에 빠뜨리거나, 무시무시한 심해어 그림을 보여 주는 등 다소 유치한 카르젠의 생각을 무시하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카르. 일단 좀 앉아. 이비가 아기도 아니고, 잘 대화하고 오겠지.”

    “그래. 이비는 아기가 아니지.”

    비록 이비가 말을 못 하는 데다 온순하고, 순진무구해도 아기처럼 제 의견 하나 피력하지 못하는 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비가 좋아하는 건 전부 뭍에 있으니 굳이 심해에 갈 리가 없지. 또 이비는 내 얼굴을 좋아하고…… 크리시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카르젠은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비가 자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잠결에 입맛을 다시며 제 몸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곤 했으니까.

    ‘못 만지게 하면 귀엽게 성내곤 했지.’

    제 가슴을 만져 대는 이비의 손을 슬그머니 떼어 놨던 날, 잠결에 칭얼칭얼 짜증 내며 팔뚝을 더듬던 집요한 손길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다시 손을 떼어 놨을 땐 거의 울상이 됐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더듬더듬 복근과 허벅지를 만지며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 혹시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래. 인어가 아무리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허벅지가 없지.’

    물론 뭍으로 나오면 에이디아처럼 다리가 생기겠지만, 오랜 시간 단련한 제 허벅지만큼 만족스러운 그립감을 줄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이비의 취향 분석을 마친 카르젠은 두 친구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가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아리스의 옆에 앉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부에 정착해야 할 것 같으니, 정말로 퇴직해야겠어.”

    “퇴직은 고사하고 남부 제독 자리나 안 맡으면 다행인 줄 알아라.”

    “루아인엔 훌륭한 해군이 많아. 그리고 난 적임자가 아냐. 바다에 대해 잘 모르니까.”

    아리스의 심드렁한 대꾸에 카르젠이 진지하게 부정했다. 혹여나 체스터가 맡긴다고 해도 절대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크리시는 이비의 꿈속에서 카르젠의 착장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흠…… 그런데 저 사람은 네가 해군 제복 입으면 좋아할 것 같은데…….”

    “…….”

    그건 카르젠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비와 꿈에서 만날 때마다 저가 입은 옷만 봐도, 제복을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제복을 입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이비가 원한다면 어떤 제복이든 취향껏 맞춰 입어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카르젠이 제복에 대한 상념으로 빠지려던 찰나, 크리시가 은근히 덧붙였다.

    “아, 이건 다른 이야기긴 한데, 해군들 동계 훈련이 대단하다나 봐.”

    “동계 훈련?”

    “어. 여기 실비아 프리스트 말로는 매일 아침 반바지만 입고 해변을 달린대. 그대로 물에도 들어가고 말이지. 몸에서 김이 날 정도로 훈련한다더라. 여기서도 아침마다 뜀박질하는 거 보이겠네.”

    크리시의 말대로 카르젠의 별택은 바닷가에 위치해 창밖으로 해변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해군 기지도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저택 앞으로 상의를 탈의한 해군이 무더기로 지나갈 확률이 컸다.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다행이지, 혈기 왕성한 해군들이 어디 달리기만 하겠는가. 군가도 부르고 함성도 지르며 요란하게 훈련할 것이 뻔했다. 수면의 질은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비의 숙면에 방해가 될 요소는 뿌리를 뽑는 게 옳았다.

    ‘일단 저택에 방음 마법부터 둘러야겠군. 해군 기지 주변은 시끄러우니, 먼 해변에 땅을 사야겠어.’

    카르젠이 파도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별택에서 소음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동안, 아래층 응접실에 앉아 있던 이비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말아 넣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에이디아 님 말씀은, 탄생과 창조 중에 선택해야 한다는 거죠?’

    ***

    창밖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를 ASMR 삼은 이비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레몬 마카롱을 베어 물었다. 우선 당분을 섭취하고, 인어왕 에이디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침착하게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방법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진짜 세상에 쉬운 일이 없네.’

    어쩌면 단순하게 에이디아에게 목걸이만 돌려주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은근하게 기대했던 이비는 마카롱을 오물거리며 두 가지 방법에 대해 곱씹어 봤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정리해 보면, 자신이 칼리아르에게 받은 찹쌀떡만 한 작은 토끼는 원래 이비가 맞긴 했다.

    ‘문제는 온전한 이비가 아니라, 이비의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목소리라는 거지…… 그리고 이비의 다른 일부도 이 몸에 여전히 남아 있고…….’

    칼리아르에게 받은 목걸이를 본 에이디아는 이비의 영혼을 유리구슬로 비유해 설명해 주었다. 경계선 숲에서 산산조각 난 영혼의 파편 대부분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지만, 일부 파편은 이비의 몸속에 잔류 중이고, ‘목소리’를 담고 있는 큰 파편은 칼리아르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칼리아르에게 받은 영혼의 파편은 이미 많은 부분이 마모된 터라, 원래 이비의 영혼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탄생’ 또는 완벽한 ‘창조’를 거쳐야 했는데, 에이디아로부터 저 두 개의 과정을 들은 이비는 해탈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번엔 분홍색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탄생…… 임신으로 출산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필리스의 중간계 종족은 남성체도 임신할 수 있는 체질이 많다는 설정이 있던 터라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실제 이전 삶에서 <숲의 마법사>의 이런 설정이 밝혀지자 2차 창작이 활발하기도 했었고…… 아니, 활발한 정도가 아니라 sns에 온갖 2차 창작이 봇물 터진 것처럼 넘쳐 났었다.

    그래서 꽤나 걱정한 부분이었는데, 다행히 첫 번째 방법인 ‘탄생’은 칼리아르에게 받은 진짜 이비를 몸에 품고, 제 안에 잔류하는 이비의 조각들이 모여들게 만들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법이었다.

    ‘에이디아 님의 신력으로 달걀 정도 되는 알을 내 몸에 넣었다가, 반년 후에 빼는 거니 출산은 아니지…….’

    몸에 알을 넣고 꺼낸다는 것 자체가 두렵긴 했지만, 신력으로 이루어지는 삽입과 적출로 육체적인 고통도 없을 거라고 했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이비는 두 번째 방법도 다시 곱씹어 봤다. 중간계에 속한 이들 중 둘 이상의 신력을 소모하여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이었다.

    필리스에서 태어난 종족들은 모두 신력이나 마력 중 하나를 타고나는데, 이를 전부 잃으면 사망에 이르다 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신력과 마력을 한 몸에 지닌 이가 필요했고, 태양신 아르카라스 덕분에 그런 이가 현재 필리스에 존재하긴 했다.

    ‘지구에서 필리스로 강림한 성녀와 우리 형…….’

    두 가지 방법을 다 들은 이비는, 형이 굳이 곧 깨어날 저를 두고 급히 제국에 갔던 이유를 확신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형은 두 번째 방법인 창조를 원하는 거겠지만…… 성녀가 버틸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하니 그건 어려울 거고…….’

    문제가 있다면 바로 에이디아가 들려준 성녀 아이린의 상태였다. 제국에서 꽤 오래 혹사당한 성녀는 현재 마력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마나의 흐름을 유지하는 정신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어 마나가 줄줄 새고 있어, 신력을 전부 쏟게 되면 성녀가 죽거나 또는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이비의 마음이 묵직해졌다.

    ‘그 말을 듣고도 누가 창조를 택하겠어? 당연히 내가 알을 품고 있다가 돌려 드리는 게 낫지.’

    아픈 것도 아니고, 장기가 손상되거나 합병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반년 동안 몸조리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누구 하나 다치거나 죽을 일 없이 저만 반년 희생하면 될 일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에이디아가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제 안위를 걱정해 창조를 선택할 인간이 더 많단다.”

    “아우!?”

    “아가. 아까 말한 것처럼 탄생은 내 아이를 보다 완벽하게 태어나게 해 주겠지만, 네가 많이 힘들 거란다. 최소 반년은 신경 써서 지내야 하니,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 것이고…….”

    설명은 이미 몇 번이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출산과 다르지만 엄연히 하나의 ‘생명’을 반년 동안 몸에 품고 성장시키는 것이니, 평소보다 더 잘 먹어서 에너지를 비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쉬고, 또다시 태어날 이비에게 세상의 지식을 주입해 주어야 했다.

    분명 병약한 몸으론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비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방법과 동일 선상에 두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였다.

    ‘괜찮아요. 전 필리스에 와서 외출도 거의 안 하고 저택에서 지냈어요. 그것도 침대나 소파에 있는 경우가 많았는걸요. 죽기 전에도 10년 정도는 병원에서 보냈고…….’

    그러니 반년 더 그렇게 지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몸에 품어야 하는 알은 수술 같은 방법이 아니라 신력으로 삽입 후 적출한다고 했다. 그 과정엔 고통도 없고 후유증도 없다고 했으니 걱정되지 않았다.

    이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을 들은 에이디아는 곤란한 기색이 비치는 얼굴로 웃더니, 이내 지그하르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지그하르트. 그대도 봤지? 어쩜 이리 똑같이 착하고 고운 아이가 온 건지…… 이비가 지구에 갔다가 돌아온 게 아닌 게 확실한가? 시간선이 뒤틀렸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에 거의 끼지 않던 지그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군.”

    “칼리아르의 말은 맹신하지 마. 자기도 모르는 게 많으면서 일단 뱉고 보는 경우가 많으니.”

    에이디아의 말에 놀란 이비의 귀가 쫑긋해졌다. 이비의 토끼 귀를 확인한 에이디아는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재차 강조했다.

    “하여간에, 아가. 정말 괜찮겠니? 반년 동안은 아가 몸에 품은 것이 알이라는 걸 자각하고 정말 조심해야 해. 깨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하고…….”

    ‘네, 괜찮아요! 지금까지 조심하게 지냈는걸요!’

    “가급적이면 외출도 삼가는 게 좋아. 네가 많이 답답할 거란다.”

    ‘10년 넘게 그렇게 지냈어요. 그동안 공부하고, 책도 읽고, 맛있는 것도 열심히 먹으면 되죠.’

    이비는 그가 저를 신경 써 주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기꺼워하며 생긋 웃어 보였다.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고작 반년인데요.’

    누가 들으면 반년씩이나 고생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비에겐 딱 반년만 참으면 인어왕의 아이를 온전히 품에 안겨 줄 수 있고, 저도 평범하게 살 수 있는 해피 엔딩 루트였다. 이 몸이 약해진 이유도 바다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남부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이었고.

    ‘집……은 어디서 지내지? 형이 돈이 있으려나…… 8서클 마법사라고 했으니 돈 많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자 에이디아가 살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가. 집은 내가 마련해 주마. 이 근처가 좋겠어. 해군 기지가 바로 근처라 치안이 굉장히 좋은 지역이란다.”

    ‘그, 그래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내 아이를 품느라 반년이나 고생할 텐데, 저택 하나 못 구해 줄까. 아주 크고 예쁜 저택으로 구해 주마.”

    지금까지 둘을 방해하지 않았던 지그하르트는 이비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은근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 레어에 굴러다니는 보석도 몇 개 챙겨다 줘야겠군. 내다 팔면 그대의 형과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그하르트. 고맙네. 역시 그대밖에 없어.”

    에이디아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에 이비 역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런 건 줄 때 거절하지 않는 게 좋았다. 에이디아가 저가 살 집을, 지그하르트가 평생 생활비를 준다고 했으니 정말 반년만 고생하면 아무 걱정 없이 형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젠은 곧 돌아가야겠지? 카르젠이 재택 근무 중이긴 해도, 계속 남부에 머물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정말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아야 하나…….’

    이비의 생각을 들은 에이디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음? 둘이 남부에서 결혼식 올리고 정착하려던 게 아니었니?”

    “아, 아우우?”

    “그 아이는 너와 혼인해 남부에서 살 생각이 충만했던 것 같……”

    쿠콰콰쾅!!!

    에이디아가 말을 맺기 전, 갑자기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응접실 벽면이 터져 나갔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큰 소리에 기겁한 이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에이디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너무 놀라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이비와 달리 에이디아와 지그하르트는 평온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파괴된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격해라…… 둘이 어쩜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에이디아가 먼저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자, 지그하르트가 바로 대답했다.

    “같은 피를 나눴다고 해서 성격까지 비슷한 건 아니지. 그런데 먼지 한 톨까지 제어하다니, 정말 훌륭한 공간 제어 능력이군.”

    에이디아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벌벌 떨던 이비는 지그하르트의 말에 토끼 귀를 쫑긋 세웠다. 놀란 가슴을 꾹 누르며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어깨를 감싼 에이디아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아가. 괜찮아. 고개 들어 보렴.”

    파들파들 떨며 겨우 고개 든 이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몸을 굳혔다. 조금 전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간 벽에서 떨어져 나온 잔해가 모두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동영상을 일시 정지 해 둔 것처럼 미동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잔해 사이로, 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

    이비는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큰 파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스윽 밀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을 크게 떴다. 부서진 구멍으로 쏟아지는 햇살 탓에 역광으로 그늘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군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는 무의식중에 남자의 움직임을 좇았고, 토끼 귀는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는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쫑긋하게 섰다.

    “인어왕. 내가 없는 동안 허튼짓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짜증을 꾹 누른 목소리는 이비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음색이었지만, 너무도 그리운 울림이었다. 그가 소파까지 다가오자 허공에 떠 있던 파편들이 저절로 벽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온전하게 복원되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이비는 앞에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패기 넘치게 남의 집 벽을 부술 땐 언제고, 지금은 처연한 얼굴로 무어라 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인어왕에게 한 소리 던지며 짜증 내던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곧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어딘가 찔려 아픈 듯이 괴로워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올려 보는 이비와 지그시 눈을 맞춘 그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어린 김현서의 기억에 가장 가까운 나긋나긋하면서도 상냥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게 돌아왔지……. 오래 기다렸을 텐데, 정말 미안해.”

    나지막하게 건넨 사과를 들은 이비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저보다 훨씬 큰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후아?”

    육성으로 채 나오지 못한 부름을 제대로 알아들은 남자가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현서야. 형아 왔어.”

    ***

    “형아. 공부해?”

    방문을 빼꼼히 열며 고개를 살짝 밀어 넣는 어린 김현서의 모습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문을 향해 고개 돌린 김현우는 베개를 안고 온 어린 동생을 향해 웃어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서 왔어? 아직 공부할 거 많이 남았는데, 먼저 잘래?”

    “응~.”

    토토톳 달려와 베개를 침대에 두고, 형의 품에 파고들어 치대는 동생의 모습만 봐도 이 형제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알 수 있었다. 현서는 침대에 눕는 대신 형의 무릎에 앉아 책상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형아, 공부 어려워?”

    “음…… 할 만해.”

    퍽 여유가 느껴지는 대답을 들은 현서는 역시 형아는 굉장하다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엔 일곱 살 아이가 할 법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주말에 형이랑 같이 놀 수 있는지, 뭐 하고 놀지 묻는 이야기가 주였고, 주말에 함께 외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현서가 형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하품했다.

    “졸리지?”

    “……조금.”

    아니라고는 말 못 하는 동생이 귀여워 볼에 쪽 뽀뽀해 주니, 살짝 풀린 눈으로 배시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먼저 자.”

    “형아랑 잘래.”

    “그럼 일단 눕자.”

    현우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수첩만 한 사이즈의 작은 요약집을 들고 현서와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현서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저는 침대맡에 앉아 작은 배를 도닥여 주기 시작하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 애 아닌데~.”

    “일곱 살이면 애지.”

    “아닌데~ 나도 내년에 학교 가는데~ 형아가 입었던 교복이랑 똑같은 거 입을 거야~.”

    현서와 현아는 현우가 다녔던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역시 유치원과 같은 재단의 사립 학교라 에스컬레이터로 입학이 확정된 터였다.

    “그렇게 교복이 입고 싶어?”

    “응! 형아가 입었던 옷!”

    형바라기인 제 동생이 그저 귀엽다는 듯이 배를 도닥여 주는 현우의 모습은 나이에 비해 꽤 어른스러워 보였다. 영상은 느리게 흘러갔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일곱 살 동생의 엉뚱한 이야기는 벌써 후계자 수업에 찌들어 있는 현우를 진심으로 웃게 했다.

    꽤 오래 조잘조잘 떠들며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새근새근 잠든 현서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엔 사랑이 충만했다. 제 어린 동생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언제나처럼 제 동생이 찾아올 시간에 맞춰 책상에 휴대폰을 세워 두고 촬영해 둔 덕에 퍽 자연스러운 모습이 찍힌 이 영상은 김현우의 sns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영상이었다.

    ‘나도 가장 좋아했던 영상이었지.’

    꿈에서 새삼스럽게 그리운 영상을 다시 본 현서가 몸을 살짝 뒤척이니, 등을 도닥여 주던 손길이 주춤했다가 다시 토닥토닥 두드렸다. 현서는 밤새 저를 품에 안고 도닥여 준 이를 보고 싶은데 눈이 떠지지 않아 힘없이 웃었다.

    ‘어제 너무 울었어…….’

    분명 기뻐서 눈물이 났지만, 울면서 소모된 체력은 슬퍼서 울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슬피 오열하느냐, 기뻐하며 우느냐의 차이였다. 돌이켜 보면 형을 잃었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보다 어제 더 많이 울었던 것 같았다.

    퉁퉁 부어 무거운 눈꺼풀 탓에 힘겹게 눈 뜬 현서는, 저를 품에 가두듯이 꼭 안고 있는 형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저는 웃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피곤한데, 현우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현서야. 잘 잤어?”

    밤새 안 잔 건지, 아니면 일찍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멀끔한 얼굴로 현서와 시선을 맞춘 현우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현서는 그런 형을 향해 살포시 미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옛날 꿈 꿨어.”

    잔뜩 쉬어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음색이 맑고 청아해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현서는 ‘이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다가도 이내 제 가슴을 살포시 누르며 생긋 웃었다. 칼리아르에게 돌려받은 이비의 일부를 제 몸에 받아들인 덕분에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아직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고 많이 어색했다.

    “이 목소리는 적응이 안 되네.”

    “원래 현서 목소리랑 비슷한데?”

    “음…… 형아 기억 속에 내 목소리가 많이 미화됐나 봐…….”

    “내가 설마 네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할까.”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현우를 바라보는 현서의 눈에 일순 불신이 스쳤지만, 이내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 형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퉁퉁하게 부은 눈을 살포시 감은 현서가 현우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아직도 꿈같아.”

    꽤 오랜 시간 형을 다시 만나길 바랐어도, 정말 만날 줄은 몰랐기에 아직도 얼떨떨했다. 혹시나 꿈이면 어쩌나 싶어 볼을 꼬집어 보려 했지만, 심장 부근에서 뭉근하게 울리는 얕은 고동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비야, 잘 잤어?’

    가슴 속에서 존재감을 나타낸 이비에게 마음속으로 인사하니,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고동이 강해졌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제 가슴을 부드러이 두드린 현서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아, 이제 수도로 가야 하지?”

    “응. 그런데 굳이 내가 안 가도 될 거야.”

    “어제 지그하르트 님이 아침 일찍 떠날 준비하라고 한 거 다 들었어.”

    수도에서 모레 아침부터 열릴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오늘 아침엔 출발해야 할 터였다. 형뿐만 아니라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역시 재판에 쓰일 증거 검수 문제로 참석한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보통 재판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남부 귀족들의 불법 사업 관련이랬지…….’

    현서는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환각제 ‘캔디’와 저도 사용했다가 며칠간 깨지 못했던 ‘꿈 수정’에 얽힌 남부 귀족들에 대한 재판이라는 것만 주워들었지, 왜 형이 그 재판에 참석해야 하는지는 몰랐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그하르트 님이 남부에 부패한 귀족들을 잡았다고 듣긴 했는데…… 형도 도와준 거야?”

    “비슷해.”

    “역시 형은 굉장해!”

    현우의 목적은 흑마법사에게 정신 지배를 당해 흥분제인 ‘캔디’ 레시피를 만든 세비어 페일리 남작을 돕기 위해서지만, 일단 그렇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 특별한 ‘식사’를 위해 악질 범죄자들을 조달해 줬던 콜린도 도와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항상 솔직하다는 것을 간과했어…… 노래가 화근이 될 줄은…….’

    남부에서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콜린에게 도움받은 아이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가사가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였다. 동네에 무서운 불량배들을 콜린 공자님이 전부 무찔러 주셨다는 노래가 퍼지고 퍼져, 그간의 실종자들이 콜린과 엮이는 바람에 수사 대상에 포함이 된 터였다.

    게다가 수도에서 노예상들에게 잡힌 인질들을 구출했던 당시, 하필 콜린의 여동생 시엘라가 가문의 문양을 수놓아 준 손수건을 흘린 터라 덜미를 잡혔다. 물론 사전에 남작과 콜린이 무혐의로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수를 써 두긴 했지만, 체스터가 무조건 재판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가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아~ 어쩌지? 현서만 여기에 두고 가기 싫은데. 형이랑 같이 갈래? 용이 남부 텔레포트 좌표 복구해 준다고 했으니 같이 가도 될 것 같은데.”

    저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겨우 만난 제 동생과 하루밖에 함께하지 못했는데, 동생만 두고 수도로 가야 한다니……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현우가 현서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니, 품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도 될까? 당분간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형이 안고 다닐게.”

    “형…… 나 이젠 정말로 다 컸어…….”

    “그래도 나한텐 아직도 꼬마야.”

    딱히 웃긴 농담도 아닌데, 꼬마라는 말을 들은 현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현우는 맑게 웃는 제 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은근히 덧붙였다.

    “인어왕에겐 내가 물어볼게.”

    “응. 나도 형아랑 같이 가면 좋아.”

    ‘형아랑 같이 하는 게 좋아.’ 라는 말은 어린 시절, 꼬마 김현서에게 거의 매일 듣던 말이었다. 현우는 뭉클한 기분으로 제 동생을 더 당겨 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김현우가 필리스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완벽한 날이었다.

    ***

    바다가 훤히 보이는 2층 응접실.

    푹신한 최고급 소파엔 현우와 카르젠. 그리고 맞은편에 인어왕 에이디아가 앉아 있었다. 원래는 둘이 이야기하려 했지만, 무려 카르젠이 시키지도 않은 차를 직접 가져와 준 덕에 합석하게 된 터였다.

    “그런 이유로, 오전 중에 텔레포트 좌표가 복구되면, 며칠간 동생과 수도에 다녀올까 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바닷물 좀 담아 갈 수 있게 해 줬으면 해.”

    지그하르트가 새벽부터 남부 지역의 텔레포트 좌표를 복구하러 나섰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전부 완료되었을 터였다. 현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디아를 향해 넌지시 덧붙였다.

    “재판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거야. 그전까지 내 동생 명의로 제대로 된 집 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해군 기지에서 가까웠으면 좋겠어.”

    새로운 집과 해군 기지라는 말에 카르젠이 움찔했지만, 현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에이디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간 고민한 에이디아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래. 지금 아가 컨디션으로 봤을 때,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면 괜찮을 것 같군.”

    이어 가급적이면 그 전에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이는 말에 현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생의 체질을 알게 된 이상 그렇게 오래 수도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 전에 올 거야. 집이나 준비해 둬.”

    다소 불퉁한 목소리였지만, 에이디아는 마치 귀여운 손자를 보는 조부모처럼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괜찮겠지. 하나, 말했다시피 이비는 안정이 필요해. 그 말은 현서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거고.”

    “내 동생 어련히 내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허락한 거로 알지.”

    현우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본 카르젠은 에이디아에게 인사한 후, 빠른 걸음으로 그를 앞질러 응접실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형님. 아브델은 아직 남부 좌표 이동을 막아 둔 상태입니다.”

    “흠…… 그럼 수도 외곽 칼리아르 신전 좌표로 가면 된다.”

    “예. 칼리아르 신전도 괜찮지만, 더 안전하고 가까운 곳도 있습니다. 제 저택의 서재입니다.”

    퍽 정중한 권유였지만, 현우의 눈매가 대번 날카로워졌다. 그 찌르르한 시선을 정통으로 받은 카르젠은 여유 있게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그하르트 님께서 개설한 마나 터널 좌표로 안정적인 데다가 언제든 사용 가능합니다. 그리로 가시죠.”

    “…….”

    “그리고 이비, 아니. 현서의 물건들도 다 제 저택에 있고, 현서가 필리스에 와서 처음부터 쭉 지낸 곳이다 보니 친한 사용인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수도에 있는 동안 현서가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있을 겁니다.”

    “…….”

    “형님께서 최고 재판소에 오가신다면 제 저택만큼 가까운 곳도 없습니다.”

    현우는 저 말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째 끌리지 않았다. 뭔가 찝찝했다. 저 웃는 낯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시커먼 구렁이가 들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딱 잘라 거절하려던 현우는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기척에 입을 다물고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등 뒤로 뻗은 복도엔 아무도 없었지만, 잠시 후 모퉁이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현서가 귀를 쫑긋거리며 총총 다가왔다.

    저들에게 다가오는 동생을 향해 팔을 벌려 보인 현우는, 환하게 웃는 낯과 대비되는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럼 며칠만 머물러 주도록 하지. 단, 동생은 나와 함께 잘 거야.”

    “예. 편히 머무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카르젠은 넘어야 할 산이 생각보다 높을 것 같다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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