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4권) (13/19)

### 챕터 12

붉게 타오르는 석양이 꿈의 끝을 예고해 주기 시작할 무렵. 내내 큰 바위에 기대앉아 있던 크리시는 카르젠과 이비의 대화를 들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크리시가 이 꿈에 진입했을 때 카르젠과 이비는 이미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중간부터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둘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비가 카르젠에게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부 털어놓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매번 속으로 끙끙 앓더니, 드디어 털어놨구나. 이제 둘 사이에 비밀은 없겠구나. 속 편하게 생각하던 크리시는 카르젠이 ‘그 책’에서 현서는 누구를 제일 좋아했냐고 물었을 때, 사레가 들릴 뻔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질문에 쉽게 대답하진 못하던 이비는 이내 솔직하게 크리시라고 대답했다. 크리시는 저 대목에서 카르젠이 얼마나 실망한 표정을 지었는지 볼 수 없었지만, 이비가 허둥지둥하며 그래도 카르젠을 두 번째로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것을 보니 대충 상상이 갔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카르젠은 주로 이비와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고, 이비는 카르젠이랑 하는 거라면 뭐든 다 좋다고 마냥 해맑게 웃었다.

또 프란제르 후작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카르젠은 이비가 입양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지금처럼 자신의 저택에서 쭉 카르젠의 특별한 친구로 지내면 굳이 작위가 없더라도 사는 데 불편할 일이 없을 거라며 ‘특별한 친구’라는 말을 강조했다.

바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저 말도 안 되는 친구 놀이를 감상하던 크리시는, 파도 소리와 둘의 대화를 백색 소음 삼아 얼마 남지 않은 휴식을 즐겼다. 노을 색이 더 깊어질 때쯤, 이제 슬슬 꿈이 끝날 것을 예감한 크리시가 잠시 놓고 있던 정신을 붙들자, 이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만약 형이 여기에 있다면 꼭 찾고 싶어요.”

형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크리시가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위 뒤로 돌아가 보니, 저를 등지고 앉은 이비가 보였다. 바로 곁에 앉은 카르젠은 크리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이비에게 집중하며 물었다.

“꼭 필리스에 있으면 좋겠다. 우선 방법을 찾아보자. 형의 이름은 뭐야?”

“김현우요.”

“김현우, 김현서. 둘이 이름이 비슷하네.”

“네. 제 쌍둥이 여동생 이름은 김현아인데, 제가 살던 나라는 형제끼리 돌림자로 이름을 비슷하게 짓는 경우가 꽤 많았어요.”

대략적인 설명임에도 카르젠은 단번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부분은 대신전에 가서 논해 볼게. 꿈에서 깨면 형에 대한 정보를 메모해서 줄래?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최대한 많이 적어 줘.”

“그럴게요. 음…… 그런데요, 카르젠 님. 갑자기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을 찾는다고 하면 대신전에서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카르젠은 이비의 어깨를 보듬어 주며 제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부드럽게 당기곤 말했다.

“놀라긴 하겠지만, 괜찮을 거야. 신이 필리스에 강림시키는 성녀라는 존재도 전부 다른 별에서 오니까.”

“아…… 성녀…….”

성녀라는 존재를 잠시 잊고 있던 이비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숲의 마법사>로 배운 성녀라는 존재는 이비나 아리스처럼 빙의가 아닌, 신의 권능으로 차원 이동을 당하는 존재였다. 즉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신까지 온전하게 필리스로 오게 된 경우였다. 성녀에 대해 생각하던 이비는 카르젠을 향해 상체를 조금 틀어 앉으며 물었다.

“성녀는 전부 여성인가요?”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록으로는 전부 여성이었어.”

“혹시…… 혹시요, 남성인 경우는 아예 없었어요?”

그 질문에 카르젠이 답하기 전, 내내 뒤에서 듣던 크리시가 대신 대답했다.

“루아인은 아니지만, 아주 오래전 신탁으로 강림했던 남성체가 있긴 했습니다. 인간은 아니었지만요.”

“흐아악!”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비가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품에 파고들었다. 크리시는 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놀라는 모습에 당황해 사과하려 했지만, 카르젠이 제 품에 파고든 이비를 꼭 안아 주며 도닥여 주기 시작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둘이 친구면 난 친구가 없네.’

“허, 허억…… 헉…… 헉…….”

갑작스러운 크리시의 등장에 기겁한 이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젠은 심장 고동이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놀란 이비를 진정시켜 주려는 듯이 등을 도닥여 주며 말했다.

“괜찮아, 이비. 숨 쉬어. 천천히 숨 쉬어. 천천히.”

“헉…… 흐…… 흐읍…… 흡…….”

카르젠의 품에 안겨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비가 고개만 살짝 돌려 크리시를 바라봤다. 크리시는 두 사람이 눈꼴시다는 듯이 찌푸린 얼굴로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비의 형이 성녀처럼 육신까지 필리스에 강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현재 엘카사트 제국에 강림한 태양신의 성녀 아이린을 제외하면 성인에 대한 신탁은 없었습니다.”

이비는 크리시가 자신의 정체나 형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카르젠과 저가 나눴던 이야기를 거의 다 들은 것 같은데, 어쩜 저리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건지 그저 혼란스러웠다.

크리시는 이비가 숨을 고르게 쉴 때까지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이비와 눈을 맞췄다. 저를 향한 연한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혼란해 보이는 얼굴을 살핀 크리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그리 놀랍니까. 처음 만난 날에 말했잖습니까. 에벨루스 님께서 당신에 대해 짧게 언급해 주셨다고요.”

“그, 그럼 그때부터…… 알고 계셨어요? 흡…….”

적잖게 충격받았는지, 또 숨을 삼키는 모습을 본 크리시는 진정하라며 이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다른 별에서 왔으면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제가 맺은 인연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크리시의 말이 맞아. 이비는 처음부터 이비였잖아. 신경 쓸 것 없어.”

이비는 저가 그동안 정체를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너무 쉽게 저를 받아들여 주어 크게 감동했다.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이비는 작은 목소리지만, 또박또박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비의 감사 인사에 카르젠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크리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며 운을 뗐다.

“하여간에 중요한 건 이비의 출신이 아니라, 건강입니다, 건강. 가족을 찾는 문제는 카르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세요.”

“그래. 이비의 형이라면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형님을 찾는 데 절대 소홀히 하지 않을게.”

“카르젠 님…….”

“이비는 그동안 편하게 요양하는 거야.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회복에 집중하자. 알았지?”

“네!”

‘내 가족’ 부분에 유독 힘주어 말한 덕분인지 이비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자신을 특별한 친구로 삼아 주고, 거기에 제 가족까지 살뜰하게 챙겨 주겠다니…… 정말이지 카르젠은 보통 자애로운 이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동해 뭉클해진 이비가 무한한 신뢰를 담은 눈망울로 바라보자, 카르젠 역시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제 품에 이비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덕분에 눈을 질끈 감고 끙끙대는 이비와, 뭐 그리 즐거운지 쿡쿡 웃는 카르젠을 지켜보던 크리시는 둘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오늘따라 꿈이 길었다.

***

어슴푸레한 새벽녘.

옅은 잠을 겨우 이어 가던 콜린이 부스스 눈 뜨자, 언제 돌아온 건지 퇴창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케이가 보였다.

보통은 저렇게 말없이 들어와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기함하거나 불쾌할 법도 한데, 콜린은 익숙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밤새 말라 갈라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주인님. 언제 귀가하셨습니까?”

늦가을의 건조함 때문인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케이는 대답 대신 시선만으로 협탁에 놓여 있던 물병을 띄웠다. 그리곤 천천히 기울여 유리컵에 물을 적당량 따랐다. 깨끗한 물을 담은 컵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콜린의 입가에 도달해 멈췄다.

누운 상태로 고개를 살짝 들어 목을 축인 콜린이 다시 눕자, 컵이 왔던 길 그대로 둥실둥실 날아가 협탁에 착지했다. 케이는 콜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네 아비의 방에 다녀왔다. 최대한 보존하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네 첫걸음마 때의 기억이 상실된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과나 다름없는 말을 들은 콜린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기억입니다.”

콜린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버지가 제 어린 시절 기억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은 분명히 아쉬웠지만, 그의 마음을 갉아먹는 지독한 세뇌를 거둘 수만 있다면, 혹여 저라는 존재를 온전히 잊는다 해도 감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주인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버지나 나나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을 테니…….’

케이는 세비어 페일리 남작의 의식을 잠식한 세뇌를 매일 조금씩 제거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애초에 세뇌를 건 흑마법사가 페일리 남작을 살려 둘 생각이 없어 제멋대로 걸어 둔 터라 정신의 오염 상태가 극심했다.

마치 솜사탕 같은 페일리 남작의 정신에 몇 겹의 거미줄이 들러붙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 중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전부 뜯겨져 나갈까 봐 한 줄 한 줄 매우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했다.

케이가 오늘 제거한 세뇌는 안타깝게도 콜린이 부모님과 누나 일라나드와 보냈던 추억에 깊게 침투해 있었다. 남작이 오랜 세월 동안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을 최대한 보존해 보려 했지만, 세뇌에 찌들어 오염된 기억을 따로 분리할 방도가 없어 함께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죽을 때까지 제 아들이 첫 걸음마를 뗀 순간의 감동과, 곁에서 함께 웃던 부인과 딸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없게 되었다. 케이는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확신했지만, 그럼에도 미련이 남았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 중 소중하지 않은 기억은 없다. 게다가 네 아비가 이날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이었으니, 너라도 잊지 말거라.”

“안타깝게도 걸음마를 뗐을 때 기억은 없습니다만…….”

콜린이 쓰게 웃으며 대답하니, 케이 역시 픽 웃으며 끄덕였다.

“하긴…… 보통은 그렇겠지.”

“제 첫걸음마는 어땠습니까?”

다소 장난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케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작은 병원과 주거 공간이 합쳐진 낡은 주택이더구나. 아마 가문을 잇기 전에 지냈던 곳이겠지.”

“예. 제가 다섯 살쯤에 가문을 이으신 것으로 압니다.”

세비어 남작가 직계가 마차 사고로 절멸한 후, 사생아였던 페일리가 원치 않게 세비어 가문의 가주가 된 과정을 남작에게 직접 들어 알고 있던 케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바람은 다소 차가웠지만,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담 너머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온갖 들꽃이 제멋대로 핀 덕에 나름대로 예쁜 마당도 있었지.”

“…….”

“네가 첫걸음을 뗀 순간, 네 어린 누이는 손뼉 치며 환호했고, 네 부모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

콜린이 잔잔히 미소 지으며 경청하자, 케이는 콜린 몰래 마법으로 그를 재우며 덧붙였다.

“참고로 굉장히 형편없지만, 나름 귀여운 걸음마였다.”

그 말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다 서서히 흐려졌다. 케이는 저로 인해 깊이 잠든 콜린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눈앞의 저 아이의 걸음마는 선명한데, 막상 저가 기억하고 싶은 걸음마는 필리스의 세월에 짓눌려 상실해 버렸다.

그럼에도 케이는 슬퍼하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머나먼 하늘 저편에서 점점 흐려지는 붉은 달을 지켜보던 케이는 낮에 받은 수정을 꺼냈다. 수정 구석엔 여전히 응축된 검은 찌꺼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잠시간 찌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는 수정을 공중에 띄운 후, 손가락을 살살 흔들었다. 그러자 봉인된 찌꺼기가 수정 밖으로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에 손을 가져다 댄 케이는 허공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느른한 눈매로 잠시간 넘실거리는 연기를 방치하던 케이가 대번 연기를 움켜잡았다. 콱 틀어 잡힌 연기는 반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흡수되었다. 눈을 감은 케이는 제 손을 통해 의식에 파고든 연기를 따라 아주 오래된 기억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양이 얼마 없어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리운 기억을 되새기기에 무리는 없었다. 케이의 시야에 침대에 엎드려 오열하는 어린아이와, 침대맡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소년이 보였다.

우는 아이보다 열 살 정도는 많아 보이는 소년은 난감한 얼굴로 아이의 옆에 누워 달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형아 미워’라는 말만 반복했다. 평소라면 다정한 형의 손길에 고개 돌리고 금세 화를 풀었을 녀석이었지만, 이날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버둥거렸다.

꺼이꺼이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베개에 파묻은 얼굴을 돌려 보게 하려다 실패한 소년이 볼에 뽀뽀해 주며 달래도 소용없었다. 결국 소년은 서럽게 우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형이 후딱 나가서 레몬 젤리 사 올게. 그럼 형 안 미워할 거지?

다정한 제안을 들은 아이가 멈칫했지만, 퍽 서러웠는지 울음을 그치진 않았다.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제 어린 동생을 한 번 더 꼬오옥 안아 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형 금방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의식 속에 겨우 도달한 공간은 삽시간에 블랙홀에 흡수되듯 뒤틀려 버렸다.

순간 케이의 시야에 다시 붉은 달이 들어왔다. 케케묵은 기억의 열람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던 찌꺼기만큼이나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밀려오는 그리움과 애틋함을 억지로 삼켜 낸 케이는 물막 너머로 일렁이는 붉은 달을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작 이 한 줌의 찌꺼기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지친 그의 영혼처럼 무겁게 빛나던 붉은 달빛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벌써 수만 번째의 달이 지고 있었다.

***

볼을 간질이는 감각에 부스스 눈을 뜬 이비는 곤히 잠든 카르젠을 멍하니 바라봤다. 얕고 느리게 호흡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은 자는 척이 아니라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카르젠 얼굴이라니…….’

늦가을 아침이라 약간 쌀쌀하지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덕분에 따뜻한 침대, 포근한 잠자리,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새 지저귀는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곁엔 절세미인……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잘생길 수가 있지?’

정말이지 매일 봐도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아침부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해서일까, 이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호흡이 가빠질 정도였다.

아침부터 카르젠의 얼굴에 흠뻑 취해 있던 이비는 또 볼이 간질거려 손을 부스럭대며 뺨을 쓸었다. 카르젠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제 볼에 닿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슬며시 걷어 낸 이비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바로 옆에 찰싹 붙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데도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꿈에서 크리시랑 이야기 중인가?’

이비는 앞으로 흘러내린 카르젠의 머리카락을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비는 엘프의 머리카락이 주는 촉감을 무엇과 비교해야 할지 골똘히 떠올려 보았다.

그간 늘 고운 모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손에 절대 묻지 않는 물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액체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비의 상식선에서 그것 말고는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이비는 미동 없는 카르젠을 응시하며 제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둘둘 감았다가 놓았다. 부드럽게 스르르 풀어지며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감각이 간지러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원래 손가락 사이가 이렇게 간지러운 부위였나 싶을 정도로 묘한 느낌이었는데, 그 감각이 중독성 있어서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자니, 카르젠이 뒤척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큰 호흡에 따라 흉부가 크게 부풀며 잠옷 앞섶이 벌어졌다. 갑자기 드러난 카르젠의 가슴에 놀란 이비가 숨을 참았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남신 조각상을 전부 가져다 놓고 비교해도 압승할 만큼 기가 막히게 훌륭한 몸이었다.

카르젠이 깨어날 때까지 얌전히 있으려던 이비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악몽으로 잠결에 저 훌륭한 가슴을 후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카르젠의 가슴을 때렸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자는 척하다 진짜 다시 잠들어 버렸던 기억도 연달아 떠올랐다. 새삼 미안함과 수치심을 느낀 이비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신경 쓰인 탓에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했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눈을 뜨고 또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자신의 의지박약한 면을 질책한 이비는 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카르젠의 잠옷을 여며 주었다. 목 끝까지 꼭꼭 여며 가리니, 확실히 덜 신경 쓰였다.

“아…….”

물론 덜 신경 쓰일 뿐,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옷을 너무 꽉 여몄는지, 카르젠의 훌륭한 가슴에 옷이 착 붙어 오히려 윤곽이 두드러져 보여 괜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저, 저런 좋은 몸은 처음 보니까, 그러니까 자꾸 눈이 가는 거야…… 난 변태가 아냐…….’

스스로 변태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 시선은 카르젠의 날렵한 턱선을 따라 내려가 쇄골로 향했다. 이 정도면 무의식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자꾸 카르젠의 얼굴을 보거나, 아무 생각 없다 해도 그의 몸을 그렇게 대놓고 보는 것은 역시 실례라는 생각이 든 이비가 뒤척뒤척 몸을 돌렸다.

카르젠을 등지고 누우니 괜히 두근대던 심장이 조금씩 호흡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 몸에 긴장이 풀리며 나른함이 밀려왔다. 아직 이른 아침 같으니 늦장 부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베개를 끌어안자, 등 뒤에서 팔이 쑥 나와 이비의 몸을 당겨 안았다.

“!!!”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갑자기 안겨 놀란 이비의 귀와 꼬리털이 펑 부풀었다. 당황해 돌아보자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카르젠이 보였다. 깬 건가 싶어 제 배를 안고 있는 그의 손등에 슬며시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일어나셨어요?-

잠결에 끌어안은 건지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호흡도 여전히 규칙적으로 느렸다. 이비는 갑자기 안겨 놀란 탓에 긴장한 몸에 힘을 풀고,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로 가다듬었다. 그러자 저를 안고 있는 팔에 슬며시 힘이 들어가더니 몸이 더 밀착됐다.

이비의 포실한 꼬리가 탄탄한 그의 복근에 짓눌렸다. 이어 다른 팔이 이비의 목 아래로 들어오더니 반대편 어깨를 잡고 꽉 당겨 안았다. 방심한 틈에 그의 양팔에 갇히다시피 안긴 이비는 이번엔 그의 팔뚝에 글씨를 썼다.

-카르젠 님. 일어나신 거죠?-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이비는 어쩐지 카르젠이 자는 척을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삐죽이며 손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톡톡 쳤다. 그러다 빙글빙글 돌리며 회오리를 그리기도 했고, 별 모양을 그려 보기도 했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일어난 것 같은데…….’

등을 돌리고 있으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 파악이 어려웠다. 할리스가 깨우러 올 때까지 빈둥거려도 좋겠지만, 어째 구속당하다시피 안긴 터라 조금 불편했다. 조심스레 몸을 꿈틀거리며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카르젠의 팔은 굳건했고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몇 번이고 일어난 거 아니냐고 글씨로 물어도 대답이 없는 걸 봐서는 그의 성격상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한 이비는 그의 팔을 베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너무 꽉 끌어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가 조금 묘하긴 했지만, 이제부터 카르젠과 자신은 친구였다. 김현서였을 적에는 평범한 친구 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원래 친구끼리는 어깨동무도 하고, 같이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자기도 하고 그러는 거일 테다.

‘현아 덕분에 알게 된 거지만…….’

제 쌍둥이 여동생 현아의 sns를 보면 늘 친구와 나란히 앉아 팔짱을 끼고 있거나, 어깨에 서로 머리를 기대고 있거나, 친구 집에서 자는 날이면 침대에 누워 볼을 맞대고 셀카를 찍어 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처음엔 여자끼리라서 그런 건가 했지만, 현아가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을 떠올려 보면 남자끼리도 친한 사이에 그 정도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현아가 보여 준 아이돌의 sns엔 친한 멤버끼리 어깨동무를 하거나 볼 뽀뽀를 하는 사진이나, 합숙소에서 한 침대에 누워 셀카를 찍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방송이나 셀카만 저런 모습이라면 아마 팬들을 노리고 일부러 보여 주는 브로맨스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파파라치나 팬들이 선명한 화질로 찍은 사진 중엔 더한 모습도 많았다.

물론 아이돌이라고 모든 멤버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았고, 특정하게 친하게 지내는 멤버들이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팬들도 인정한 ‘영혼의 단짝’, ‘베스트 프렌드’, ‘특별한 친구’였다.

이비는 만약 저가 김현서였을 적에 그런 자연스러운 친구 관계의 스킨십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지금쯤 카르젠의 스킨십이나 과한 친절에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현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좋아. 내 소원대로 카르젠이랑 친구가 됐으니, 가능하다면 앞으로 크리시랑 리엔하고도…… 어? 잠깐…….’

잠시간 카르젠의 친구 관계를 연상하던 이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카르젠은 <숲의 마법사>에서 타인과 접촉을 가급적이면 피하는 인물이었다. 크리시와 친하다고 해도 그를 안거나 어깨동무를 했던 장면도 없었을뿐더러, 숲의 마법사에게 제 눈물을 거래하면서까지 살린 체스터와도 그 어떤 스킨십이 없었다.

방대한 이야기 중에 어떻게 그런 장면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냐 하면, 아카데미 시절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제게 화가 많이 난 리엔을 달래고자 카르젠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던 바로 옆자리를 리엔에게 내주었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까지 허락해 주었다.

저 에피소드가 업로드된 날엔 당시 김현서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이 난리가 났었다. 비록 엉덩이가 붙을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 앉아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뿐이었지만,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독자들은 댓글로 온갖 주접을 다 떨었었다.

‘원작에선 카르젠이 유사 말고는 안아 준 사람이 없었지…….’

이 역시 연재 당시 댓글로 한 독자가 ‘와, 카르젠 섭남 맞아? 굴러들어온 리엔을 침착하게 앉혀 줌ㅋㅋㅋ 카르젠에게 안길 수 있는 건 우리 유사밖에 없나봐ㅋㅋㅋ’라고 달았던 게 베스트 댓글로 올라가서 기억하고 있었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리엔은 동료를 거듭 잃어 슬픔에 빠져 있었음에도 누구에게도 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홀로 꾹 참다 결국 모든 감정이 봇물 터지듯 흘러넘쳤던 순간,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리엔이 카르젠의 어깨에, 정확히는 가슴팍 부근에 제 이마를 콩 가져다 박는 장면이 있었다.

독자들은 모두 여기서 카르젠이 리엔을 안아 주며 달래 줄 거라 생각했지만, 카르젠은 침착하게 리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미약하게나마 차분해진 리엔을 바위에 앉혔다. 그리고 리엔의 눈물을 못 본 척하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리엔의 곁에서 손을 잡아 주거나 안아 주거나 기댈 어깨를 내어 준 것도 아니라 그저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심지어 리엔의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아니었다.

‘카르젠이 누구보다 리엔의 성격을 잘 아니까 배려해 줬던 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 부분이 배려라고 해도 그 외에도 카르젠은 늘 타인과 일정 거리를 두는 등장인물이었다. <숲의 마법사> 속의 그를 돌이켜 본 이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제 와서 원작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르젠의 성격이 어쩌다 이렇게 바뀐 건지 궁금했다.

함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찰싹 붙어 있거나, 자주 머리를 쓰다듬거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거나, 꼭 안아 주는 것만 봐도 원작과 달리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뭔가 바뀌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보면…….’

지금은 아예 이비의 목덜미와 어깨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내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워 몸을 달싹이는 이비를 더 강하게 끌어안더니, “현서야……” 하고 작게 잠꼬대하며 볼을 비볐다.

이비의 토끼 귀가 일순 쫑긋! 섰다. 낮고 부드러운 카르젠의 목소리는 늘 이비의 고막을 자극했는데, 지금은 평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또한 아침이라 더 가라앉은 데다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섹시했다.

“으음…… 현서야…….”

“아, 아우…….”

저리 감미롭고 나른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니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고막이 간지럽다 못해 녹을 것 같다고 느낀 이비는 제 토끼 귀를 잡아당겨 꾸깃꾸깃 비비며 카르젠이 어서 일어나기만을 바랐다. 이대로 있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스트라우 영지의 최남단에 위치한 트레보 남작 가문의 별택은 더는 별택이라 부를 수 없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건물은 마치 오래된 유적지마냥 전부 무너져 내려 한쪽 벽면만 건재했는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폭삭 주저앉듯 무너졌다.

건물이 세워졌던 터 바로 옆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구덩이가 생겨났다. 정확히는 구덩이라기보다 정원을 통째로 쥐어뜯어 낸 모양새였다. 거대한 구멍 덕분에 지하에 금이 쩍쩍 가서 내용물이 질질 흐르는 수조가 보였다.

수조에 담긴 물은 탁하게 썩어 지독한 악취가 올라오고 있었다. 정원에 퍼지는 썩은 내에 헛구역질이 난 트레보 남작은 입을 틀어막고 벌벌 떨었다. 어찌나 겁에 질렸는지, 끅끅 우는 부인에게 평소처럼 조용히 하라며 호통치지도 못했다. 생각 같아선 저도 제 부인처럼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트레보 남작은 지금 위대한 존재를 마주한 탓에 오금이 저려 겨우 무릎 꿇은 자세를 유지 중이었고, 그 위대한 존재의 분노가 저를 향한 것을 알기에 벌벌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바닥과 하나 되어 엎드린 남작 부부의 앞으로 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밤을 담은 것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세상 만물을 눈동자로 태워 죽일 듯이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거대한 수조를 정원으로 붕 띄웠다.

어두운 지하에 숨겨 두었던 수조가 아침 햇살 비추는 정원으로 떠오르자 참혹한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당에 엎드려 있던 사용인들은 수조 안에 모든 것이 부패한 것을 보며 신음했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존재 하나가 수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애써 삭이는 남자에게 다가간 청년 역시 제 손에서 마나가 피어오르려는 것을 제어해야 했다.

단단히 잠긴 수조 안에 죽어 있는 존재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해 탁한 눈동자로 트레보 남작을 노려보는 듯했다. 슬며시 고개 들었다가 수조 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남작이 기함하며 다시 이마를 땅에 박았다.

붉은 눈을 번뜩이던 남자는 제 곁에 다가와 호흡을 크게 내쉬는 청년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레오닉. 여기 이 인간은 체스터가 아끼는 인간인가?”

그 물음에 레오닉과 그의 어깨에 앉은 작은 뱁새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체스 형이 혐오하는 귀족 중 하나죠.”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붉은 눈의 남자가 이를 뿌드득 갈며 씨근거렸다.

“그럼 저 치들을 전부 수조에 넣고, 몇 달 후에 꺼내도 크게 슬퍼하지 않겠군?”

여기저기서 제대로 내뱉지 못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트레보 남작과 그의 부인 역시 바르르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레오닉은 분노한 남자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지그하르트 님. 물론 그러셔도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났지만, 지그하르트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끄덕였다. 레오닉은 그런 지그하르트를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그동안 일에 대한 증거도 확보해야 하니……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잠시 살려 두신다면 체스 형이 크게 기뻐할 겁니다.”

“굳이 그래야 하나? 이미 수정으로 다 기록했을 텐데?”

지그하르트의 시선이 레오닉의 손에 영상 기록 수정으로 향했다. 레오닉은 트레보 남작 가문을 포함해 남부의 몇몇 더러운 귀족들이 벌인 입에 담지 못할 짓거리를 전부 기록한 수정을 쥔 채 고개를 저었다.

“더 캐낼 것이 있을지도 모르죠. 생각보다 더 얽힌 놈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더 캐낸다는 말을 들은 지그하르트는 잠시 분노를 접어 두고, 착잡한 얼굴로 수조에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눈도 감지 못한 수조 안의 불쌍한 존재를 잠시간 바라보던 그는 벽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읊조리기 시작했다.

트레보 남작 부부와 사용인들은 저들을 죽일 저주인 줄 알고 졸도하기 시작했지만, 레오닉은 조용히 묵념했다. 짧은 블랙드래곤의 배웅 인사가 끝나자, 마치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버텼다는 듯이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 물속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참혹한 마음을 애써 삼킨 지그하르트는, 수조를 잠시간 살펴보았다. 트레보 남작과 친한 힐드레드 자작의 저택에 있던 수조와 같은 형태였고, 마나로 된 잠금장치 역시 똑같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힐드레드 자작의 저택 수조는 비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지그하르트는 바닥에 엎드린 트레보 남작에게 다가가 벌벌 떨고 있는 그의 손을 지그시 밟았다. “끅…… 끄읍…….” 억눌린 신음이 들렸지만, 감히 손을 내빼지 못한 남작이 고통을 감내하며 벌벌 떨었다.

“힐드레드 자작의 별택에도 이런 수조가 있더군.”

“크흡…… 끕…….”

“헌데, 그 수조는 비어 있었지.”

“!”

비어 있었다는 말에 트레보 남작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지그하르트는 그런 남작의 손을 더 짓이겨 밟으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힐드레드 자작에겐 수조에 가뒀던 아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묻지 못했네.”

“흐…… 흐읍…… 끕…….”

“이 몸이…… 이성을 잃고 힘 조절을 못 해서 그가 대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네.”

“커흑……!”

“그러니. 내가 또 힘 조절에 실수하지 않도록, 그대의 뚫린 구멍은 바른 말만 해야 할 거야.”

“흡…… 흐읍…… 읍…….”

입을 막은 것도 아닌데, 트레보 남작은 재갈 물린 소리를 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지그하르트는 그의 손이 전부 으스러지도록 지르밟으며 물었다.

“병든 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했지?”

손의 뼈가 전부 가루가 되는 와중에도, 트레보 남작은 일순 고민했다. 사실대로 고한다면 과연 블랙드래곤이 저들을 살려 줄까? 솔직히 말한다 해서, 얻을 것 없이 돌아갈 그가 과연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까?

끙끙대며 뜸 들이는 짧은 찰나, 레오닉의 어깨에 앉아 있던 작은 뱁새가 파다닥 날아 내려왔다. 뱁새는 지그하르트의 발 옆으로 총총총 다가와 남작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남작은 말하는 새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웠지만, 감히 그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싸한 기분이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새가 침음을 내뱉더니 눈을 질끈 감고 비틀거렸다.

그 반응을 확인한 레오닉이 허리를 숙여 작은 뱁새를 집어 들고 제 어깨에 올려 주자, 부리 사이로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잠시간 진정할 시간을 준 레오닉은 부리를 다물지 못하는 뱁새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시바. 봤어?”

그 물음에 트레보 남작이 고개를 들어 레오닉의 어깨에 뱁새를 올려다봤다. 저 작은 새가 대체 뭘 봤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를 내려다보며 분을 이기지 못해 깃을 부풀리고 부리를 바르르 떠는 모양새를 보니 불안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남작의 기억의 일면을 훔쳐본 시바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지그하르트를 바라봤다. 시바와 눈이 마주친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이자, 새 부리가 열리며 침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이자가 힐드레드 자작에게 병든 아이들을 처리하라며 공간 이동 수정을 준 과거를 보았습니다.”

공간 이동 수정이라는 말에 지그하르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저를 향한 분노가 아님에도 어마어마한 기세에 짓눌린 시바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온몸의 깃털을 부풀린 시바는 제 몸을 쓰다듬는 레오닉의 손길에 안정하며 겨우 말을 이었다.

“아마도 바다로 가는 수정이라며 속이고 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지그하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요한 그와 달리 드래곤의 분노를 머금은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르르릉 쿠르르릉 울기 시작했다. 지반은 멀쩡해 보이지만, 저택 지하는 풍비박산이 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그하르트의 구두 앞굽이 트레보 남작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를 딱딱 부딪치던 남작은 저를 태워 버릴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그하르트가 제발 그 질문만은 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남작의 기대를 저버리다 못해 짓이겨 발겼다.

“아이들에게 준 수정의 목적지가 어디지?”

트레보 남작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블랙드래곤의 분노에 짓눌려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그는 제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진실을 입에 담았다.

“경계선 숲의…… 경계입니다…….”

***

“아이고, 허리야…….”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추임새였다. 대신관 집무실 소파에 누워 있던 크리시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소파 위엔 대신관이라는 위치를 포즈로 증명하려는 듯, 매우 자유분방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나이젤이 보였다. 허리가 아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한쪽 다리는 곧게 펴고, 반대편 다리는 소파 등받이에 올려 둔 채 상체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허리 삐끗합니다. 그만하세요.”

“이렇게 해야 조금이나마 시원해진다. 흐랴앗!”

나이젤은 기합을 넣어 상체를 몇 번 뒤틀더니, 기어이 허리에서 우두둑 두두둑 소리가 난 후에야 기행을 멈췄다.

“그러다 허리 나가도 전 못 업어 드립니다.”

“허, 참. 라피엘 경. 봤나? 저 녀석이 저런다네. 아주 불효자식이지, 안 그런가?”

나이젤의 투덜거림에, 지금껏 조용히 1인용 소파에 혼자 각 잡고 앉아 있던 팔라딘 라피엘이 쓰게 웃었다. 그는 점잖게 앉아 있으면서도 내심 크리시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저가 아는 크리시라면 내가 왜 대신관님의 자식이냐고 반박할 법도 한데, 그저 뚱하니 바라보는 모습에 설마 진짜 대신관님의 아들인가? 싶어 놀라고 있을 무렵…….

“라피엘 경. 오해입니다. 대신관님과 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아, 예. 그렇군요.”

라피엘이 민망해하는 모습을 본 나이젤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배 아파 낳은 녀석은 맞지. 크리시, 넌 나한테 잘해야 한다. 어, 이놈아.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크리시가 대꾸하지 않는 모습에 라피엘이 점점 더 혼란해하자, 잔뜩 찌푸리고 있던 크리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매그위드 후작가의 삼남인 건 아시죠?”

“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라피엘이 진중한 얼굴로 끄덕이며 답하니, 크리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제 모친이신 매그위드 후작 부인께서 첫째 형님의 출산 당시 크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둘째 형님부터는 신력이 강한 신관들을 섭외해 출산의 고통을 전이하셨죠.”

“아아…….”

즉, 대신관 나이젤이 크리시가 태어나던 날 매그위드 후작 부인의 출산의 고통을 전이받았다는 뜻이었다. 출산의 고통을 전이받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천문학적인 기부를 할 경우엔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납득한 라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내가 그땐 기부금에 눈이 멀어서 참석했지만, 그 후론 다신 안 하고 있다네.”

“대신관님께서도 차마 거절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나 보군요?”

나이젤은 당시 기부금 덕분에 남부와 북부 영지에 에벨루스 신전을 화려하게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부와 북부의 관광 명소가 된 에벨루스 신전이 그렇게 지어진 거였냐며 감탄하는 라피엘과 달리 크리시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벌써 백 번은 들었을 겁니다.”

“앞으로 천 번은 더 우려먹을 거다.”

“예예. 그러시죠. 그나저나 칼리아르 신전에서 늦는군요.”

크리시의 말에 나이젤과 라피엘의 시선이 소파 사이 테이블로 향했다. 그 위엔 성력으로 봉인된 나무 상자가 있었다. 크리시는 상자 속 수정에 봉인한 것을 당장 치워 버리고 싶었다. 또한 이것의 정체와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지, 건강에 해로운 건 아닌지 등등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나마 칼리아르 신관 중 이것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다니 다행이지만…….’

크리시는 저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가 겨우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다가도 속이 답답해졌다. 꿈에서 어린 상급 신이 알려 주었던 이가 누군지도 찾아야 했으니까.

‘흠…… 어린 신이 찾으라던 사람은 이비의 실종된 형인 것 같은데…… 하지만 빨리 찾아야 한다고 했지. 신변에 문제가 있다고…….’

신이 빨리 찾아야 한다고 했을 정도면 아마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 것이라는 추측이 들어 크리시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생각 같아선 에벨루스를 협박해 계시라도 받고 싶었지만, 중간계 개입으로 인한 대가성을 잘 아는 크리시는 초월신들이 그 정도로 크게 개입하여 판을 짜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버렸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에벨루스 님. 이비의 건강 문제나 형 찾기. 둘 중 하나라도 좋으니 힌트 좀 크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에 제대로 도와주시면 제가 차기 대신관 이어받겠습니다. 맹세하죠.’

이미 몇 번이고 거절했던 자리지만, 이번에 제대로 도와준다면, 그래서 이비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가 건강하게 카르젠 곁에 남아 제 친우가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시는 까짓 대신관 자리 정도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어려울 거 없잖습니까. 그냥 모른 척해 드릴 테니, 이비가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제 노트에 메모해 주시거나, 아니면 이비의 형이 제 앞에 나타나게 해 주시죠. 어떻습니까?’

속으로만 한 생각이었지만, 저가 생각해도 참 부질없다고 느낀 크리시가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괜한 미련 갖지 말고, 이 기이한 정체 모를 것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이비 형을 찾는 문제는 이따 카르젠의 저택에서 머리를 맞대고 다 같이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똑. 똑. 똑.

누군가 대신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신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로 일어나 앉은 나이젤과 크리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이젤은 평소와 같이 온화한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고, 문이 열리며 에벨루스의 프리스트가 먼저 들어서며 말했다.

“나이젤 대신관님. 칼리아르 신전에서 프리스트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젤이 다가가자, 칼리아르의 고위 사제임을 나타내는 검은 로브를 입은 프리스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시의 위치에선 그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긴 흑발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시는 현재 루아인에 있는 칼리아르의 고위 사제라면 저가 모르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들어선 이를 면밀히 살폈다. 칼리아르의 고위 사제 중 저런 긴 흑발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나이젤 앞에 선 그가 후드를 벗는 모습을 지켜봤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짙은 고동색으로 보였는데, 크리시가 서 있는 각도에선 늘어진 머리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후드를 잘 정리한 그는 나이젤이 내민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나이젤 대신관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리아르 님을 모시는 케이입니다.”

순식간에 집무실이 청아해지는 느낌이 들 만큼 맑고 고운 미성(美聲)이었다. 어쩌면 칼리아르의 현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맑게 울리는 목소리에 놀란 라피엘이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이젤 역시 케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칼리아르 사제 중 저런 사제가 있었나?’

라피엘의 생각을 들은 크리시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전에도 들어 봤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인사를 마친 나이젤이 케이에게 크리시와 라피엘을 소개해 주었다.

“먼저, 팔라딘 라피엘 경입니다. 라피엘 경은 이것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대동했습니다.”

“반갑습니다. 팔라딘 라피엘 경.”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스트 케이 님.”

라피엘 역시 화답 인사를 하자, 나이젤이 이번엔 크리시를 향해 손을 내밀며 소개했다.

“여긴 이것을 찾아 봉인한 프리스트 크리시입니다.”

크리시는 자신의 소개를 들으며 돌아선 케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허…… 맙소사…….’

놀란 얼굴로 케이를 마주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안면 근육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크리시가 일부러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인사했다.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크리시입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시의 해사한 미소를 거의 몇 년 만에 본 나이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노련한 대신관에게 공포감을 줄 만큼 완벽한 미소를 유지한 크리시는 케이를 보며 흥분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스렸다.

부드럽게 꼬리가 내려간 눈매 덕분에 선한 인상을 주는 미남을 보고 있자니, 얇고 헐렁한 옷을 입고 바닷가에 앉아 웃던 이비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꿈에서 만났던 이비가 머리를 기르고 10년 정도 지나면 딱 지금 제 앞에 케이와 똑같은 모습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눈웃음을 짓자, 자연스럽게 호선을 이루며 곱게 접히는 눈매가 판박이였다. 마치 틀로 찍어 낸 것처럼 닮은 모습을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크리시는 나이젤과 함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케이를 보는 내내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이를 갈았다.

‘이건, 이건 안 쳐줄 겁니다. 이비의 건강 문제. 건강 문제 해결해 주지 않으면 대신관 안 할 겁니다. 이건 무효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이건 무효로 쳐주셔야죠.’

무려 상급신까지 꿈에 강림해 제게 부탁했던 문제가 제 발로 찾아왔으나, 크리시는 기쁨보다 기이함을 느꼈다. 집무실 내부가 너무 고요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이젤과 라피엘의 소리만 들릴 뿐, 케이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이젤이 성력으로 봉인한 나무 상자를 케이의 앞으로 내밀어 주는 순간에도, 상자를 처음 열었을 때에도 케이에게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육성으로 내는 “양이 굉장히 많군요.” 라는 말만 들렸다. 크리시는 동요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의 정체가 뭔지 알고 계십니까?”

크리시의 물음을 들은 나이젤과 라피엘을 통해 두 사람의 생각이 흘러나왔지만, 케이의 생각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케이는 수정을 손으로 집어 들어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더니 곧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연구 중이라, 아직 이름을 붙이진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크리시는 생전 처음 느끼는 답답함에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존재는 이전에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꿈에서 마주했던 뚱뚱한 고양이 모습을 한 상급신과 지그하르트가 그러했다.

기나긴 여정에서 지그하르트와, 꿈속에서 고양이 모습의 신과 시간을 보내던 당시의 크리시는 그 어떤 불편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이 평온하기만 했었다. 한데 지금은 케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아니, 불쾌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저를 밀어내는 것 같기도 했고, 일부러 듣지 못하게 누군가 제 귀를 강제로 틀어막은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쾌함에 표정 관리를 하고 앉아 있을 때, 케이의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걸 어디서 얻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공자는 아직 아브델에 있습니까?”

제공자가 수도에 있다는 확신을 담은 물음에 나이젤이 크리시를 흘긋 살폈다. 크리시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칼리아르의 신전에서 보낸 이에게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밝히고 조언을 구할 작정이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성직자라면 신탁을 통해 필리스에 강림하는 성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보니,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를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모만 두고 봤을 때, 그는 저가 찾는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한데 어쩐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불안함이 드는 건지,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인 크리시가 수정으로 시선을 내리자, 케이가 넌지시 말했다.

“가까운 사이인가 보군요.”

“……예?”

“이걸 제공한 사람 말입니다.”

“…….”

“저야 표본을 더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밝히기 어려우시다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답을 망설인 크리시에게 그 어떤 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상냥한 어조였다. 저 담담한 반응에 속을 다스린 크리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제공자의 신변에 대해서는, 제가 임의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다음에 만나면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괜찮습니다. 먼저, 이것의 정체가 뭔지 물으셨죠? 제가 연구한 바로는 이건 일종의 감정인 것 같습니다.”

나이젤과 라피엘의 시선이 다시 수정으로 향했다. 크리시는 케이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해가 어렵군요. 감정, 그 자체를 말씀하신 겁니까?”

“으음…… 정확히는 감정에서 파생된 불순물, 그러니까 필요 없는 찌꺼기에 가깝습니다.”

“…….”

“이걸 지니고 있던 제공자는 아마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중간계 종족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그리움을 지닌 존재였겠지요.”

크리시는 케이의 설명에 집중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임으로써 긍정했다. 케이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이 가진 비통. 고통. 불안. 원망. 우울. 그리고 괴로울 만큼의 그리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이 뭉쳐서 이런 찌꺼기가 형성되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크리시는 자신이 이비에게서 저것을 떼어 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이비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저 시커먼 것이 이비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고, 이비를 현혹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정도의 강한 불안과 슬픔…… 크리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며 물었다.

“혹시 이게 생명을 갉아먹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의 몸에 기생하며 건강을 망친다거나…… 혹은 정신 건강을 망치거나 말입니다.”

질문의 뜻을 대번 이해한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체적인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못 봤지만, 정신에 악영향을 끼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이도 있었죠. 다행히 늦기 전에 이걸 뜯어 내 막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생기더군요.”

그 말은 이비의 몸에 이것이 다시 커졌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크리시의 눈빛이 심각함으로 물들자 케이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걸 완전히 없애는 방법도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케이는 제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한 크리시를 향해 눈매를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지체 없이 말했다.

“필리스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겁니다.”

“진정한 행복이요?”

“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거나,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린 이들은 이것의 양이 점점 줄다가 완전히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필리스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경우로 이해한 크리시가 조용히 끄덕이자 케이가 말을 이었다.

“단, 이것이 완벽하게 소멸한 경우……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거나, 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소 추상적인 대답이었지만, 대번 이해한 크리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처럼, 이것도 함께 소멸하는 거군요.”

“대부분은 그러했습니다. 애초에 필리스에 있어선 안 될 것이니 사라지는 게 맞는 일이겠지만요.”

필리스에 있어선 안 될 존재.

케이의 대답은 수정에 담긴 것을 설명하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지만, 크리시에겐 마치 슬픔과 자조가 섞인 것처럼 들렸다.

“그럼…… 행복을 찾은 이들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완벽하게 잊는 겁니까?”

저 질문에 대답하려다 입을 다문 케이가 시선을 내려 수정을 바라봤다. 검은 연기처럼 이글거리던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얌전해져 있었다. 잠시간 대답을 망설인 케이는 수정을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필리스에 순응했더라도 자신을 잊고 싶지 않아서 그리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정말 드문 경우긴 하지만요.”

크리시는 저 대답이 어쩌면 케이 자신을 말하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만약 그렇다면,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로 이비의 형이라면…….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 확실하게 확인하고 알리는 게 낫겠지. 워낙 심약한 사람이니…….’

궁금한 것은 대충 알았으니, 이제 저가 찾는 이가 맞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때였다. 물론 얼굴만 봐선 맞는 것 같지만, 그래도 민감한 문제이니만큼 더 정확해야 했다. 짧게 고민한 크리시가 케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프리스트 케이 님. 괜찮으시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제 집무실에서 나눠도 될까요?”

***

크리시가 집무실 창가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낀 케이는 에벨루스 신전을 나와 광장에 줄지어 서 있는 사설 마차 중 하나를 잡아탔다. 칼리아르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가 달라고 지시한 후, 마차에 오르자마자 제 손바닥 위에 작고 검은 공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검은 공은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이내 작은 토끼의 모양으로 변했다. 주머니에서 크리시에게 받은 통신용 수정을 꺼낸 케이가 검게 이글거리는 토끼의 형상을 한 사역마를 향해 내밀며 명령했다.

“이 냄새를 기억하렴.”

작은 토끼의 형상이 수정에 묻은 냄새를 몇 번 맡더니 귀를 쫑긋했다. 다 맡았다는 듯이 케이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는 사역마는 진짜 토끼처럼 퍽 귀여운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당분간 이 냄새를 지닌 녀석에게 붙어 있어. 그리고 그가 혹시나 이들을 만나면 돌아와서 내게 알려 줘.”

케이는 최근 꿈에서 만났던 부쩍 자란 소년과, 북부 영지에서 마주쳤던 프란제르 후작 부인의 모습을 토끼에게 흘려보냈다. 고개를 주억거린 토끼가 마차 벽을 통과해 뛰어내리더니, 에벨루스 신전으로 향했다.

광장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사역마의 존재를 보지 못했다. 케이는 저가 만든 사역마를 보려면 최소 8서클 이상의 마법사이거나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 사역마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고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크리시와 단둘이 그의 집무실에서 나눈 대화는 유익한 것 같으면서도 수박 겉 핥기식의 대화였다. 크리시가 아무리 현명하고 똑똑한 이라 한들, 그보다 거의 일곱 배는 더 살아온 케이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를 신뢰하지 못하니, 그릇에 대해 더 밝히길 꺼려 한 거겠지.’

대화하는 내내 케이는 크리시가 깔아 둔 판에 맞춰 주며, 그저 감정의 불순물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 사제인 척을 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상대가 허락만 한다면 연구를 위해 표본을 얻을 수 있도록 이걸 지닌 이를 소개해 달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크리시는 그릇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에게 물어보고 연락을 주겠다며 장거리 통신용 수정을 주었다. 크리시가 간혹 떨떠름한 기색을 애써 숨기려는 것을 눈치챈 케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성직자 연기에 실수는 없었을 터인데, 뭐가 문제였지?’

저도 몸에 신력을 가지고 있으니, 프리스트를 연기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니 크리시가 저를 경계하는 이유는 자신의 연기나 외적인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케이는 스스로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수려한 외모와 타인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미성을 가진 제게 크리시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깜찍하게 이런 것까지 몰래 붙이고 말이지. 에벨루스가 총애를 넘어서 편애하는 프리스트 중 하나라더니, 진짜인가 보군.’

케이는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는 작은 토끼 형상의 하얀 덩어리를 흘긋 봤다. 저가 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해 붙인 이 신력 덩어리는 크리시의 힘이 아니었다. 대신관도 보기 힘든,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신성력으로 이뤄진 덩어리였다.

보나마나 크리시가 에벨루스에게 졸라서 제게 붙인 것이 분명했다. 이 토끼의 존재를 눈치챈 케이 역시 똑같이 검은 토끼 형상으로 사역마를 보낸 것은 일종의 심술이었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이는 없으니 괜히 유치하게 굴었다며 쓰게 웃었다.

‘건방진 게 마음에 안 들어.’

크리시 딴에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보여 저를 감시하기 위해 이 덩어리를 붙인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크리시의 바람과 달리 에벨루스는 제게 이것을 감시역으로 붙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다 판단한 케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칼리아르라면 몰라도 에벨루스가 보이는 친절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방해는 하지 마시죠. 당신 아이를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집착과 편애가 심하고, 또 가장 응석이 심한 초월신을 향해 조금 투덜거리자, 어깨에 앉은 토끼가 고개를 들고 케이의 턱에 머리를 비볐다. 그 모양새가 마치 안심하라는 듯이 보여서 더 기가 찼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마차 벽에 기댄 케이는 형편없는 쿠션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도 아팠고, 영 허접스러워 성에 차지 않았다. 마법이라도 써서 편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힘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오래 굶었군.’

배가 몹시 고팠다. 케이는 콜린이 조사해 두었던 악질 범죄자로 구성된 길드 위치를 기억해 내며 오늘의 ‘식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다 먹자니 너무 인원이 많았고, 그렇다고 남겨 두고 아껴 먹자니 도망갈 것이 분명했다.

자각하고 나니 더 격해진 허기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솜방망이가 케이의 볼을 툭툭 때렸다. 케이는 저 하찮은 앞발질이 성가시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토끼가 케이의 어깨에서 허벅지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곤 앞발로 귀를 잡아당겨 쭉 끌어 내리더니 머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이는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

놀랍게도 허기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굉장히 좋은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마셨던 더러운 흙탕물이 아닌, 순수하고 맑은 물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퍼지는 청량한 포만감에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끼는 케이의 손길이 기분 좋다는 듯이 알아서 몸을 가져가 비비고 머리를 마구 비벼 대며 제 신성력을 흘려보내 주었다. 맛없는 거 먹지 말고 나랑 있자는 무언의 요구가 느껴지는 행동에 케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토끼를 바라봤다.

이 귀여운 토끼 형상을 하고 제게 기꺼이 개입한 에벨루스의 목적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 모든 것이 순수한 호의는 아닌 게 분명해 영 찝찝했다. 애초에 초월신에게 있어 순수한 호의란 없는 법이었다.

‘바보 같은 칼리아르가 아닌 이상…… 떼쟁이 에벨루스가 아무 대가 없이 개입할 리가 없는데.’

단순한 개입도 아니었다. 오직 타인의 생명으로 충족할 수 있는 케이의 허기를 채워 주었다는 것은 에벨루스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상당하다는 것을 뜻했다. 즉 초월자의 전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지금쯤 갖은 엄살을 다 떨고 있을 게 분명하다 파악한 케이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난 당신에게 빚진 게 없습니다.’

머리를 비벼 대던 토끼가 멈칫하더니, 케이의 손을 앞발로 퍽퍽 때렸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예 뒷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간지럽지도 않아 잠시간 참아 주던 케이는 괜히 토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갑자기 딱밤을 맞은 토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케이를 올려다봤다.

‘당신 멋대로 개입해서 도와준 거니 감사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토끼는 이제 손가락을 깨물며 뒷발을 팡팡 굴렀다. 케이는 작은 토끼를 보며 어이없어하다가도 피식피식 웃었다. 토끼가 제게 접촉하고 깨물거나 때릴 때마다 포만감이 커졌다. 몸도 마음도 편해질 정도로 충만함을 느낀 케이가 오늘 식사를 취소하기로 하고 목적지를 바꾼 후에야 토끼가 얌전해졌다.

마차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케이는 크리시가 알고 있는 그릇에 대해 생각했다. 크리시와 프란제르 아리스 후작 부인에 대해 조사한 결과, 과거 아카데미에서 꽤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기록은 몇 년 전에 두 사람이 크게 싸우고 이후 얼굴만 마주해도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는 기록뿐이었지만, 케이는 저게 연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숨기려고 거짓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겠지. 프란제르 아리스가 수도에 있다면,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고.’

케이는 제 동생이 필리스에 몇 살에, 어떤 모습으로 왔는지 알지 못했기에 다방면으로 조사를 하느라 지쳐 있었지만, 조금씩 원하는 것에 근접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집을 지어야겠어. 남부 영지가 좋겠군.’

제 기억 속에 동생은 바다를 좋아했다. 부산에 있는 집에 가면 항상 거실 전면 창에 바짝 붙어 앉아 바다를 구경하곤 했었다. 오도카니 앉아 있는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작은 몸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다가가 꼬옥 안아 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동생이 어떤 얼굴로 저를 보며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제 동생은 바다를 매우 좋아했으니,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집을 짓는다면 층을 높게 짓거나 전망대를 따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누가 내 이야기 하나?’

침대에 누워 힘없는 손길로 귀를 만지작거리던 이비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미신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따라 누가 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귀가 간지러웠다. 짧은 토끼 귀를 꾸깃꾸깃 비비고 있자니, 침대 옆에 앉은 아리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귀 간지러워하는 걸 보니, 누가 네 욕하나 봐.”

지난 삶에서 쌍둥이 동생 현아가 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소리였다. 아리스가 툭 던진 말에 힘없이 웃은 이비가 손을 내렸다. 오늘도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지, 팔을 올리는 것도 힘들어서 편하게 누운 자세를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침대 옆 협탁 위엔 절반 정도 남은 죽 그릇과 엘릭서 병이 있었다. 제논이 직접 만들어 준 죽이었는데, 어째 다 먹기가 힘들었다. 밥을 남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비는 저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많이 아픈 상태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게다가 엘릭서도 평소와 달리 먹을 만했다. 즉, 저 엘릭서의 역한 맛이 변했거나, 혹은 제 미각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각을 느끼지 못하던 당시의 고통과 삶의 무료함을 떠올리던 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몸이 유독 안 좋아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일 거야…….’

혼잣말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리스가 긍정하며 대답했다.

“그래.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걸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후 늦게 크리시가 방문한다고 했으니, 걔 부려 먹자.”

힘없이 배시시 웃은 이비가 아리스를 향해 물었다.

‘카르젠은 체스터랑 만나고 있어요? 혹시 유사도 왔어요?’

“아니. 원래는 체스가 오기로 했는데, 성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나 봐. 덕분에 카르도 급하게 참석하러 갔어.”

‘긴급회의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글쎄. 그냥 긴급회의가 있다고만 하고 급하게 나갔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비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돌아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누군가가 제 침대를 격하게 빙글빙글 돌리는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극심한 현기증에 힘든 와중에도 카르젠과 크리시가 걱정되었다. 특히 카르젠은 왕성에서 긴급회의에 참석하고 있는데 저 때문에 혹시나 무리하고 있으면 어쩌나 싶어 침울해지려던 찰나, 입에 사탕이 쏙 들어왔다.

“걔넨 튼튼해. 그냥 마음 편히 쉬어.”

아리스의 말에 위로를 얻은 이비는 입안에서 퍼지는 향긋한 레몬 향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 향과 맛이 느껴진다. 지금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씁쓸한 얼굴을 감추고 이비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무 살. 말이 스무 살이지, 아리스가 볼 땐 스무 살도 한참 애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의 아리스는 카르젠이 어서 지그하르트를 데리고 오기만을 바랐다.

물론, 갑자기 블랙드래곤이 방문할 수도 있다고 하면 이 심약한 녀석이 놀랄 수 있으니, 굳이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비는 지금 심신의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이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이비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작은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침대맡에 앉아 손으로 이비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자 식은땀이 묻어났다.

물수건을 올려 준 후 손등을 볼에 대 보니 단시간에 열이 꽤 오른 상태였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지, 숨을 색색 쉬던 이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며 몽롱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아리스. 저 열 많이 나요?’

“조금 나네. 해열제 먹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이비의 협탁을 열자 온갖 약병이 보였다. 아리스는 병에 붙은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다 해열제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리본으로 묶어 둔 라벨엔 ‘해열제 크게 한 스푼’이라고 적혀 있었다. 뚜껑을 연 아리스가 이비의 입가에 약병을 가져가 대며 말했다.

“아 해 봐.”

이비는 엘릭서를 먹을 때와 달리 순순히 입을 벌렸다. 아리스는 병을 기울여 약을 적당량 흘려보냈다. 이비는 그동안 엘릭서의 역한 맛에 단련된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먹었다. 해열제를 먹인 후 뚜껑을 닫은 아리스는 병을 서랍에 넣지 않고 엘릭서 옆에 세워 두며 말했다.

“피곤하면 더 자. 커튼 칠까?”

그 말에 거대한 베개에 파묻힌 이비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생각으로 대답했다.

‘조금 더 이야기해도 돼요.’

“그래. 무슨 이야기 할까?”

아리스가 이비의 손을 잡고 조물조물 주물러 주며 물었다. 이비는 아리스의 악력이 생각보다 강하다고 느끼며 작게 웃었다.

‘있잖아요, 아리스. 카르젠하고 크리시한테 솔직하게 다 말했어요. 둘 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줬어요. 그동안 속였다고 화내지도 않았고요. 기분도 상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거봐. 그럴 거라니까. 잘했어. 이제 건강해져서 형만 찾으면 되는 거네. 그리고 내 아들 하자.”

이비는 자연스럽게 제 아들 하라는 이야기로 넘어가는 아리스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리스 특유의 툭 던지는 농담이 정말 재미있는데, 그래서 조금 더 크게 웃고 싶은데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비의 상태를 대번 파악한 아리스는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계속 손을 주물렀다.

‘그리고, 제가 용기 내서 친구 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 줬어요.’

친구라는 말에 아리스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바로 이비의 손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친구…… 그래. 친구 좋지. 만족했어?”

‘네, 엄청 기분 좋아요! 게다가 그냥 친구도 아니고, 특별한 친구 하기로 했거든요.’

“……특별한 친구는 뭔데?”

‘카르젠이 그랬는데, 루아인에서 특별한 친구는 한 명만 만들 수 있대요.’

“…….”

‘그리고 평생을 특별한 친구로 함께 지낸대요. 소울메이트 같은 건가 봐요.’

“어, 으음…… 응, 그래. 비슷한 것 같네. 아마도.”

아리스는 아무래도 저 특별한 친구라는 개념이 엘프들 사이에 맺는 동반자를 말하는 것 같아 웃음을 애써 참았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사망하지 않는 이상 영생을 사는 엘프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 종족으로, 평생을 함께할 제 반려를 ‘동반자’ 또는 ‘오직 하나뿐인 특별한 친구’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는 엘프끼리의 이야기고, 엘프가 타 종족과 함께 언약을 맺는다면 제 반려 종족에 맞춰 결혼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카르젠의 어머니만 해도 엘프지만 카르젠의 아버지인 바이스 칸 백작과 인간 귀족의 방식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카르 놈,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무슨 짓이야…….’

가만 보면 정말 도둑놈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 아리스가 안면 근육을 통제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이비가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리고 특별한 친구끼리 우정을 기리는 의미로 반지도 교환한다더라고요? 남자끼리는 추가로 브로치나 커프스를 맞추기도 한대요. 아마 우정 아이템 같은 건가 봐요.’

“…….”

‘전 돈이 없어서 그건 생략하고 싶다고 했는데, 원래 돈이 많은 쪽이 준비하는 거라며 카르젠이 제 것까지 간단하게 준비하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아리스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굳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이비가 아리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아리스도 특별한 친구가 있어요?’

그 물음에 아리스는 잠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어, 응…… 있지…… 내 남편……”하고 얼버무렸다. 저도 제 남편 칼라일과 부부임과 동시에 소울메이트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카르젠이 이비에게 한 말은 어째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홀랑 보쌈 하는 것 같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예물 교환이라니, 본격적이네. 이러다 친구끼리 식도 올리겠어.”

아무리 카르젠이라도 얘한테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농담 삼아 꺼낸 이야기였지만, 귀가 쫑긋해진 이비는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워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카르젠이 벌써 말했어요?’

“어? 뭐, 뭐를?”

‘우정식이요!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았어요!’

“…우정…식…….”

이비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 그 와중에 반짝이는 눈망울로 카르젠이 말해 준 우정식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특별한 친구가 자주 바뀌는 사람은 우정식을 여러 번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한 번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아리스는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이어, 우정식엔 보통 가족과 친구들을 무조건 부르는데, 이비에게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전부 다 불러도 좋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던 터라 아리스는 잠시 이비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타일렀다.

“그…… 이비. 아가. 그 웃기는, 아니. 그 우정식이건 뭐건 간에, 일단 네 형부터 찾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비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자, 아리스가 괜한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 카르 말대로라면 딱 한 번 있는 이벤트나 마찬가진데, 네 형도 그 자리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엇! 그러네요. 어차피 전 결혼 생각도 없으니, 결혼식을 올릴 일도 없을 거고…… 딱 한 번 하는 이벤트니까 역시 형이 있으면 더 좋겠어요.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요, 형을 만나면 형이랑 살고 싶어요.’

“…그래… 그렇구나…….”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었다. 뭐든지 일단 네 형에게 허락부터 받는 게 좋겠다는 말은 아껴 둔 아리스는 부디 이비의 형이 평범한 사람이길 바랐다. 이비의 형이 아무 힘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카르젠에게 도둑놈이라며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도, 섣불리 반격하거나 무력을 행사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말이다.

‘반대로 이비의 형도 검술에 능하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혹여라도 이비의 형이 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게 뻔했다. 만약 기사의 결투라도 주고받거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반대할 경우, 카르젠은 허락을 받아 낼 때까지 친절하게 직접 흙을 넣어 줄지도 몰랐다. 어째 뒷 목이 싸해진 아리스가 이비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아가.”

“우?”

“네 형 말인데, 음…… 성격은 어떤 편이야?”

형의 성격을 묻는 말에 이비는 아무 의심 없이 해사하게 웃으며 속으로 줄줄 읊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성실하고 자상한 사람이요. 매일 늦게까지 공부했는데, 제가 방해해도 화낸 적 한 번도 없고, 혼자 자는 거 무서워서 형 방에 가서 자면 절 안고 단어장 외우고 그랬어요. 음…… 어렸을 때라 기억나는 게 많이 없긴 한데, 확실한 건 엄청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에요.’

“그, 그래?”

아리스의 반응이 미묘하게 보였는지, 이비는 계속해서 자신의 형 현우가 얼마나 성실하고 착하고 멋지고 대단한 사람인지 생각으로 말했다. 마음도 여린 사람이라, 형의 손을 잡고 걷다 길가에 작은 벌레라도 있으면 밟지 않게 피해서 가자며 제 손을 잡아끌곤 했다고, 정말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형의 자상함과 착함을 강조했다.

아리스는 이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부디 형이 그 성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만을 바랐다. 아니면 차라리 엄청나게 약한 사람이라, 카르젠이 차마 그에게 결투 신청을 받는다고 해도 무를 정도로 허접한 실력의 소유자이기만을 바랐다.

‘아니, 뭐…… 카르 걔도 설마…… 이비 형에겐 알아서 먼저 살살 숙이고 들어가겠지.’

애써 모두가 행복한 미래를 그린 아리스는 잠시 동안 이비에게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생각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약 기운이 제대로 돌기 시작했는지, 열심히 형 자랑을 하던 이비의 생각이 점차 몽롱하게 끊기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그런 이비를 조급하게 재우려 들지 않고, 그래. 그랬구나. 멋진 형이었네. 정도로 대답해 주며 이비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추억 어린 이야기를 들어 주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이 고요해졌다.

잠든 이비를 조용히 응시하던 아리스는 벌겋게 물든 볼과 목덜미에 제 손등을 가져가 댔다. 해열제를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열이 더 올랐다. 거기에 호흡도 버거운 듯이 색색 힘겹게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영 걱정스러웠다. 짧게 고민한 아리스는 지체 없이 통신용 수정을 꺼내 크리시에게 연락을 시도하며 이비를 향해 속삭였다.

“아가, 조금만 더 힘내자. 형 만나야지.”

***

‘맞아요. 형 만나야 하니까 힘낼…… 어? 아리스?’

귀를 쫑긋 세운 이비가 두리번거리며 아리스를 찾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마도 대화하다 중간에 잠든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싱그러운 녹음이 드리운 숲으로, 우거진 나무가 가득했다.

이비는 마치 이 길을 따라오라는 듯이 잘 닦인 오솔길 위에 서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조금 전까지 안구가 녹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이 뜨거웠는데, 나뭇잎이 내는 바람 소리에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청량하게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이번엔 바다가 아니네?’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어서 이 길을 따라 걸으라는 듯이 이비의 등을 떠밀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이비는 무의식중에 바닥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짧은 머리 위로 미약하게나마 존재감을 뽐내는 토끼 귀가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올려 보니 김현서의 생머리가 아닌, 이비의 곱슬머리와 짧은 토끼 귀가 만져졌다. 이비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잠옷을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다. 발은 맨발이었는데, 오솔길이 고운 흙으로 잘 닦여 있어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잠시간 망설인 이비가 입을 벌리고 육성을 내 보았다.

“아우, 우우…… 아우…….”

‘어? 안 되네? 뭐야. 꿈속에선 뭐든 다 가능한 게 아녔어?’

당황해 갸웃하고 있을 때. 오솔길 저편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춘 이비는, 저 멀리서부터 저를 향해 다가오는 동그란 존재가 뭔지 알아보고 저도 모르게 푸흡! 웃어 버렸다.

오솔길 저 끄트머리에서부터 매우 통통하다 못해 둥그런 치즈 고양이가 이비를 향해 반갑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기민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

……-는 말에 놀란 소년의 눈이 커졌다. 맑고 투명한 소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온전히 마법사만을 담은 채 일렁였다.

-좋다. 그렇다면 네 형을 살리기 위해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가져가마.

음유 시인의 노래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이, 숲의 마법사가 말했다. 소년의 머리에 솟은 짧은 토끼 귀가 쫑긋거리며 숲의 마법사의 모든 음절을 흡음했다. 숲의 마법사가 제시한 조건을 이해한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원하시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소년은 숲의 마법사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숲의 마법사는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위대한 숲의 마법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그리고 약속대로 소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져갔기에, 저 감사의 인사가 소년이 낼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다. 소년은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벙긋거리며 숲의 마법사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하염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소년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숲의 마법사 1권 프롤로그 6페이지 中

***

‘꿈에서 봤던 고양이네?’

이비가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고양이를 향해 걸어가니, 다가오던 덩어리가 그 자리에서 멈추고 이비를 바라봤다.

‘나더러 따라오라는 거구나?’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저만치에서 기다리는 고양이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리곤 어서 오라는 듯이 아예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그시 저를 향한 시선에 조금 부담을 느낀 이비가 걸음을 빨리했다.

고양이는 언덕 꼭대기에 앉아 있었는데, 이비가 가까이 다가가자 몸을 일으키더니 쭈우욱 기지개를 켰다. 이비는 기지개를 켜는데 배가 땅에 닿는 고양이가 귀여워 쿡쿡 웃었다. 이비를 한 번 흘긋 본 고양이는 무심하게 몸을 휙 돌리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비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고양이를 따라 걸었다. 경사가 그리 높지 않지만, 대신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꿈인데 걷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축축 늘어지는 기분에 갈증까지 느껴졌다. 지금까지 꿈은 항상 모든 것이 적당하고 충만했는데, 이번 꿈은 어째 조금 힘든 느낌이었다. 그래도 꾹 참고 고양이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헉, 허억…… 힘들어. 이번 꿈은 고양이가 있는 것 빼곤 다 별로야. 허억…… 헉?’

힘겨워 숨을 몰아쉬는 이비의 시야에 언덕 아래 오두막이 들어왔다.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조촐한 오두막이었다.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오솔길의 끝이 오두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상에서 잠시 멈춰선 이비는 앞서 걷는 고양이의 풍만한 뒤태를 감상했다. 걸을 때마다 뱃살이 좌우로 흔들렸는데, 너무 귀여워서 자꾸 실실 웃음이 났다. 그런 이비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고양이가 흘긋 돌아보며 불만스럽게 “꾸우우웅” 하고 울었다.

이비는 고양이의 저 못마땅한 표정도 너무 귀여워 생글생글 웃으며 빠르게 걸어가 고양이의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바탕에 갈색 줄무늬가 마치 아기 호랑이같이 보였다.

오두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귀여운 고양이를 감상하며 걷다 보니, 정상에서 볼 땐 멀게 느껴졌던 오두막에 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덧 오두막 현관문 앞에 선 이비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노크…… 해야겠지?’

멀뚱히 서 있으니, 고양이가 S자로 왔다 갔다 하며 이비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 와중에 착실하게 이비의 발등도 밟고 지나갔는데, 그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귀여웠다. 고양이 덕분에 쿡쿡 웃은 이비는 고민을 끝내고 조심스레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다리고 있으니, 안에서 달그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문틈 사이로 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일자 앞머리에 칼같이 반듯하게 자른 단발머리를 한 두 소년은 실크 같은 천으로 눈을 가려 묶고 있었는데, 이비는 이 둘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헉……! 숲의 마법사와 같이 다니는 쌍둥이잖아?’

놀란 이비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자, 문을 열어 준 소년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뒤에 선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앞에 미소를 머금은 소년이 문을 활짝 열자 들어오라는 듯이 비켜서 주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오두막에 들어선 이비는, 오두막 구석에서 펄펄 끓는 냄비를 휘젓는 사람을 발견하곤 입술을 말아 넣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이비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냄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무표정한 소년이 한숨을 쉬더니, 탁탁탁 달려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냄비만 보던 이가 소년을 향해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춰 주자, 소년이 까치발을 하고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린 그는 다시 허리를 펴고 천천히 이비와 고양이를 향해 돌아섰다. 이비는 여전히 입을 막고 있었지만, 리엔보다 훨씬 더 붉게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저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숲의 마법사…… 님이죠?’

다소 자신 없는 뉘앙스로 물었지만, 그는 잔잔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비의 다리엔 여전히 고양이가 찰싹 붙어 있었는데, 이젠 아예 이비의 발등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그릉그릉 소리를 내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숲의 마법사가 허리를 숙여 고양이를 안아 들더니, 오두막 중앙에 나무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홀린 듯이 그의 손이 가리키는 의자로 걸어가 앉은 이비는, 오두막 안을 흘긋 둘러봤다.

벽면은 전부 선반으로 되어 있었고, 선반을 빼곡하게 채운 유리병이 보였다. 유리병은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고, 대체 뭘 담은 건지 모르겠지만 온갖 색을 띠고 있었다. 개중엔 투명하거나 반딧불처럼 빛만 있거나, 또는 안에서 파도처럼 넘실대는 물도 있었다.

벽면을 둘러보던 이비는 맞은편에 숲의 마법사가 의자를 빼고 앉자, 자연스레 그를 바라봤다. 숲의 마법사의 무릎엔 고양이도 앉아 있었는데, 고양이는 근엄한 얼굴로 이비를 바라보며 앞발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입을 틀어막자 고양이의 귀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파닥거렸다.

‘귀… 귀여워……!’

“내가 볼 땐 네가 훨씬 더 귀엽구나.”

“흣?!”

이비는 갑자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기겁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자 숲의 마법사가 곤란한 얼굴로 쓰게 미소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것도 많이 낮춘 것이니 이해해 주렴.”

“…….”

여전히 온 세상을 울리는 것 같은 육성이었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짙은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마치 세상 만물을 전부 보듬고 품어 줄 것처럼 자애로운 목소리에 안도한 이비가 작게 끄덕였다.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는 이비를 지켜보던 숲의 마법사가 눈매를 곱게 접어 웃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골골대며 숲의 마법사의 손길을 느꼈고, 안대를 두른 두 소년은 숲의 마법사의 뒤로 다가가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대가 있어도 보고 있는 게 느껴지네…….’

둘 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비를 살피고 있었다. 숲의 마법사는 이제 고양이의 턱을 긁어 주며 말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니 이해해 주렴.”

양해를 구하는 말에 이비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숲의 마법사는 그런 이비를 향해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 아이에게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사정이 있어서 아직 네게 언질을 줄 수 있는 힘이 없단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대신 대답해 주마.”

그가 고양이를 향해 시선을 내리자, 이비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무릎 위에 고양이는 눈을 감은 채 숲의 마법사의 손길을 느끼느라 여념 없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보면 영락없는 보통 고양이 같았지만…….

‘저 고양이가…… 아리스가 말했던 저를 담당하는 신인가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터라, 사실상 확신을 가진 물음이었다. 이비의 질문을 들은 숲의 마법사가 곤란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아가. 미안하지만, 내가 오늘 만남에서 이 아이 대신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란다. 정말 그게 궁금한 거니? 내 생각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숲의 마법사의 부드러운 반문에 놀란 이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맞다. 이것도 질문으로 들어가는구나…… 그럼 이건 취소할래요. 저 아직 질문한 거 아니에요!’

다급하게 덧붙이자 그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숲의 마법사 뒤에 서 있던 안대를 한 두 소년 역시 이비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비는 저들이 저를 보고 웃는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리스의 말대로라면, 이번 꿈 이후에 또 언제 자신의 담당신을 마주할지 알 수 없었으니, 신중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질문의 후보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음…… 내가 어떻게 해야 건강해질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할까…….’

아무래도 건강이 점점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으니, 이게 더 급한 것 같다가도……

‘아냐. 생사에 관련된 질문은 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으니 괜히 질문을 날리면 아깝잖아. 아픈 원인을 알아도 혹시나 불치병이면 어떡해…… 차라리 형이랑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볼까?’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담당 신들은 생사에 관여한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한다는 아리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만약 저가 어떻게 해야 건강해질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답을 받지 못하거나, 또는 답을 받는다 해도 불치병이라 건강해질 수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그럴 바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차라리 형이라도 보고 죽는 게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어 봤어도 죽는 건 역시 무서워…….’

대체 누가 죽음이 종국엔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했는가. 죽어 본 적 없으니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김현서는 죽음이 무섭고 외롭고 서럽고 슬프고 쓸쓸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아프기만 하다 죽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도 있었다.

이비가 전생의 죽음에 대해 떠올리자 고양이의 귀가 축 늘어졌다. 숲의 마법사는 시무룩해진 고양이의 턱을 계속 살살 긁으며 이비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신도 대답할 수 없다고 했으니…….’

괜히 소중한 질답 기회를 날리는 것보다, 답을 얻을 확률이 큰 질문을 하는 게 나았다. 짧지 않은 고민 끝에 결심한 이비가 숲의 마법사를 바라보자 그가 잔잔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결정했니?”

세상 모든 걱정거리를 녹여 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저를 향한 애정 충만한 목소리를 들은 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결정했어요. 칼리아르 님.’

「칼리아르 님」이라고 불린 숲의 마법사가 제 무릎에 앉은 고양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거봐. 똑똑한 아이라고 했지?”

칼리아르의 손길을 만끽하며 눈을 가늘게 뜬 고양이가 정면에 앉은 이비를 바라봤다. 칼리아르 역시 긴장해 어깨가 굳은 이비를 향해 해사하게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라면 나를 바로 알아봐 줄 거라 예상했단다.”

‘보통은 알아볼 것 같은데요…….’

중간계 종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붉은 달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 눈동자.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세상 만물을 포용해 줄 것만 같은 안도감을 주는 존재가 신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이비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은 칼리아르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눈빛으로 이비와 눈을 맞췄다. 계속 눈을 맞추고 있으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비는 칼리아르가 자신을 봐 주는 게 좋았다. 오히려 제 앞에 앉은 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이 꿈이 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원래 신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이비는 신이라는 존재와 이렇게 제대로 마주한 것이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의 칼리아르와 고양이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낯선 곳에 오게 되어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고, 온전히 편안함을 느끼게 된 이비가 저가 정한 질문을 하려는 찰나, 칼리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아이가 네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니, 질문을 듣기 전에 먼저 이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아우?”

이비는 칼리아르가 한 말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갸웃했지만, 칼리아르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양이의 턱을 긁어 주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 아이가 직접 해 줄 거란다. 그때 조금이나마 이 아이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가지 알려 주자면, 지금 네가 결정한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 다음으로 미뤄 둔 질문을 하는 게 더 좋겠구나.”

“!”

그 말에 이비의 토끼 귀가 쫑긋하고 섰다. 아리스와 신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 이후로 쭉 우선순위로 생각해 둔 질문은 자신에 대한 문제와 형을 만나는 문제였다. 건강 문제는 생사에 관련되어 대답을 듣지 못할까 봐 형을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려 했는데, 묻지 않아도 된다니…….

이비는 저 말을 형에 대한 문제가 곧 해결될 거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칼리아르 역시 부정하지 않고 잔잔한 미소만 지어 보임으로서 이비의 생각에 긍정을 표했다.

‘다행이다…… 혹시나 내가 떠나게 되더라도, 그전에 형을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럼 다른 질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누른 이비는 아리스가 해 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질문할 수 있는 개수가 적을수록 최대한 뭉뚱그려 범위를 크게 질문을 던지라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형을 제외하고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을 떠올리며 칼리아르와 눈을 맞췄다. 이비가 질문 내용을 정하자 칼리아르는 흥미롭다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네가 노련한 아이를 멘토로 둔 덕분에 내가 애를 먹게 생겼구나. 이게 다 루이사가 그 아이에게 너무 무른 탓이지만…….”

이비는 칼리아르의 저 반응을 자신이 결정한 질문과, 신과 만나기 전 여러 팁을 알려 준 아리스에 대한 칭찬으로 여겼다. 너무 신을 떠보는 것 같아 ‘버릇없이 편법을 쓰는 것 같아 죄송해요……’ 라고 조심스럽게 포석을 깐 이비가 칼리아르에게 질문했다.

‘제 몸이 안 좋아지는 원인을 알고 싶어요.’

지금의 이비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두 번째로 염두에 둔 질문이었고, 칼리아르가 직접 이 질문을 하라고 한 것을 봐선 대답해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하게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만 묻는 게 아니라 원인에 대해 묻는다면, 어쩌면 운이 좋을 경우 아픈 이유에 내재된 다른 정보까지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칼리아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지만…….

칼리아르의 뒤에 서 있던 두 소년도 질문을 들은 건지, 저들끼리 무언가 속닥거렸다. 이비는 너무 모호한 질문에 그가 혹시라도 꾸중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약간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근거는 없지만,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칼리아르는 한낱 미물인 자신을 사랑해 주고, 품어 줄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칼리아르는 저를 맹신하는 이비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훗날 내 아이를 위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겠지. 네 질문에 관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노력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란다. 괜찮겠니?”

이비는 자신이 먼저 질문을 명확하지 않게 던졌으니, 그 정돈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우선 네 몸이 안 좋아지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란다. 가장 큰 이유는 네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해서고. 두 번째 이유는…….”

칼리아르가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이비는 저를 향해 손바닥을 위로한 채 내민 손을 바라보다 망설였다.

‘손…… 잡아요?’

그 물음에 칼리아르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굽히기 시작했다. 이비는 칼리아르의 검지가 굽어 든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가슴이 아팠다. 아니, 가슴뿐이 아니라 전신이 욱신욱신거리고, 온몸에 피가 가슴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흐읏…….”

끙끙대며 옷깃을 움켜잡고 내려다보니, 가느다란 제 손가락 사이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칼리아르가 손가락을 전부 접자, 연기가 그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이비는 제 몸에서 끝없이 나오는 시커먼 연기를 알아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카르젠이 지니고 있는 슬픔과 똑같은 형태였다.

칼리아르의 뒤에 있던 소년 중 하나가 벽면으로 가더니 유리병 하나를 가져와 뚜껑을 빼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시커먼 슬픔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칼리아르는 제 손에 쥔 것들을 전부 병 안으로 넣은 후 뚜껑을 막았다.

‘이제 안 아파요.’

가슴을 움켜잡은 손을 놓으며 생각으로 말했다. 저게 뽑혀 나갈 땐 온몸이 조이는 기분이 들면서 통증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병 안에서 희미한 안개처럼 맴도는 것을 본 이비가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카르젠의 몸에서 크리시가 뽑았던 거랑 똑같은 것 같아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네가 받아들인 그 아이의 슬픔이란다. 오랜 시간 몸에 지녀선 안 될 것이지.”

카르젠의 슬픔이 맞다는 말에 이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카르젠의 슬픔을 해소한 게 아니라, 가져와 보관한 거였구나…… 어떻게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마법사>를 통해 읽은 슬픔은 독 그 자체였다. 몸에 독을 이렇게나 많이 담고 있었으니, 아픈 건 당연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째 이유를 듣기 위해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이비가 침을 꼴깍 삼키며 집중하자 칼리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처음부터 연약하게 태어난 아이였단다.”

“아……?”

설마 했는데, 진짜 병약한 몸이었다니…… 당황한 이비가 구체적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칼리아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태생이 약한 데다가, 네 일부를 잃었지. 그래서 가뜩이나 연약했던 몸에 균열이 생기면서 더 약해지기 시작한 거란다.”

일부를 잃었다니…… 어째 상황이 퍽 안 좋다는 의미로 느껴진 이비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치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적, 희귀병 판정을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비의 귀가 축 늘어지자 앞에 고양이 역시 귀를 눕히며 “꾸우웅……”하고 울었다. 그 우는 소리가 어쩐지 침통하게 들렸다.

‘이 몸으로 여기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이비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형을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이대로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단다. 첫 번째 이유만 해결되면 건강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테니. 음……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이비는 어쩐지 칼리아르가 힘겨워 보인다고 느꼈다. 질문 하나에 여러 대답을 해 주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니, 그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대가는 견딜 수 있으니, 걱정 말렴. 내가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들은 네가 깨어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란다. 처음에 말했던 돌아가야 할 장소는 어딘지 알고 있지?”

칼리아르의 물음에 이비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저가 머무는 동안 몸도 마음도 편안했던,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완벽했던 장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장소. 어딘지 듣지 않아도 평소에 그가 계속해서 알려 주었던 곳.

‘바다…….’

그 포근했던 바다를 떠올린 순간, 칼리아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 고양이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냐아~”하고 울었다.

“그곳에 가면,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배우게 될 거란다.”

이비는 칼리아르가 말한 것이 병 안에 담긴 카르젠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스스로 저걸 제어할 수 있다면, 앞으로 분명 카르젠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음…… 근데 내가 바다에 가면 카르젠과 멀어지겠지…… 그래도, 이 핑계로 가끔이라도 카르젠이랑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이비는, 칼리아르의 무릎 위에 고양이와, 칼리아르 뒤에 두 소년이 저를 뚱하게 보는 얼굴에 당황해 움찔했다. 소년 둘은 안대를 끼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탄식 섞인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뚱한 얼굴의 고양이는 이내 앞발로 이마를 짚고 “끄우웅……” 소리를 냈다. 칼리아르는 너무 그러지 말라는 듯이 고양이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아가.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됐단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아…….”

이비는 이미 질답이 끝났는데도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조금 더 칼리아르의 곁에 있고 싶었다. 이대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섭섭함을 넘어서 서럽게 느껴졌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난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

저 다정한 말은 마치 앞으로 칼리아르를 볼 수 없다는 위로처럼 들려서 더 서러웠다. 신의 곁에 더 머물게 해 달라고 응석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비는 차마 조를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차피 제 마음을 다 듣고 있겠지만 말이다.

애써 울음을 참고 시무룩한 얼굴로 귀를 늘어뜨리고 조심스럽게 바라보니, 칼리아르의 미소 띤 얼굴이 일순 움찔한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여기서 조금 더 조르면, 어쩌면 성공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 때 즈음. 벽면 선반에서 작은 병 하나가 조금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둥실둥실 날아왔다.

“아우?”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이비는, 뚜껑 없이 동그랗고 투명한 병 속에 있는 새하얀 존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오늘 너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질문에 대한 대답보단 이걸 돌려주기 위해서란다.”

동그란 병 안엔 매우 짧은 토끼 귀를 가진 아기 토끼가 잠들어 있었다.

‘아기 토끼? 아니, 아무리 아기라고 해도 너무 작은데? 토끼 모습을 한 정령인가?’

새근새근 잠든 토끼는 찹쌀떡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작았다. 미니어처 같은 토끼를 보고 있자니, 칼리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훗날 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들었을 때, 너그럽게 봐달라는 의미로 네게 돌려주마. 곧 이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잘 데리고 있으렴.”

칼리아르의 말이 끝나자, 토끼를 품은 병이 반짝이는 반딧불처럼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허공을 부유하는 작은 토끼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이비는 저와 칼리아르 사이에 동실동실 떠 있는 토끼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어떻게 데려가지? 그냥 손으로 잡으면 되나?’

잘못 쥐면 다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토끼였다. 주머니에 넣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토끼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형태를 바꿔 작은 유리구슬 펜던트로 변했다. 이어 펜던트의 고리 부분에서 은빛 실선이 덩굴처럼 돋아나기 시작했고, 길게 늘어선 실선 양쪽 끝이 맞물리며 가느다란 실버 체인이 되었다.

목걸이 형태로 완성된 구슬 펜던트는 둥실둥실 떠올라 이비의 머리 위로 씌워졌다. 이비는 제 목을 두르며 가슴에 사뿐히 내려앉은 구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구슬에서 미약한 생명이 느껴졌다. 마치 저와 함께 숨을 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토끼가 뭔지 듣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느낀 이비가 구슬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건…… 이비인가요?’

저도 모르게 질문했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은 토끼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칼리아르는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가. 아쉽게도 더는 설명이 어려울 것 같구나. 자. 배웅해 주마.”

배웅. 그 말을 들은 이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비는 자신을 오두막 밖으로 이끌 저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울고 떼를 써서라도 여기에 남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칼리아르의 곁에 더 머물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자, 설마 또 패닉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칼리아르는 그런 이비를 달래려는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으면 누구나 너와 같아지니 걱정할 것 없단다.”

‘누구나 같아져요?’

“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를 마주했으니, 이별이 아쉽고 슬픈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어떤 아이는 부모와 생이별하는 기분이라고 하더구나.”

“우우…….”

부모와 생이별. 딱 그 말이 어울릴 감정이었다. 이비는 조금 더 있고 싶다고 바라며 칼리아르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와 함께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이제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는지, 서두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 있고 싶은데,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자꾸 저를 보내려는 그의 말이 몹시 서운했다. 칼리아르는 다정한 손길로 이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가 언급한 누군가의 표현대로, 마치 부모의 품에서 억지로 떨어져야 하는 아이처럼 머뭇머뭇 일어난 이비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칼리아르의 크고 따뜻한 손을 잡고 오두막을 가로질러 도달한 곳은 들어왔던 문이 아닌 뒷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숲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 보였다.

“흑… 우우… 아우우…….”

문밖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한 이비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애처롭게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다가온 고양이가 이비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야옹야옹 울었다. 칼리아르는 이비를 향해 애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흐윽, 으흑…… 흐어엉…….”

그 다정한 손길에 오히려 더 서러워져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흐느끼는 이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준 칼리아르가 맞잡은 손을 문밖으로 뻗었다. 자연스레 문밖으로 한 발짝 나선 이비는 칼리아르의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꿈에서만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렴. 언젠간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어.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란다.”

“아우… 우우… 우으읏…….”

그와 함께하는 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어떻게 이렇게 슬플 수 있을까. 그저 잠깐의 꿈일 뿐인데, 대체 왜 이리 가슴이 아프고 시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이성을 찾으려 했다. 이 슬픔은 저가 깨어나면 전부 사라질 거라고 재차 되뇐 이비는, 칼리아르가 제 손을 놓았을 때 다시 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 냈다.

“아가. 이제 정말 가야 해. 널 기다리는 아이들이 걱정하고 있단다.”

안심하라는 듯이 다정하게 미소 지어 보인 칼리아르가 맞잡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이비의 몸을 빙그르르 반대편으로 돌려세우며 말했다.

“자. 이제 앞만 보고 걸어가렴. 할 수 있지?”

“흑…… 으흑…….”

여전히 머리 위로 칼리아르의 손을 잡은 이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꼭 맞잡은 손이 조심스럽게 풀어졌다. 칼리아르와 손을 놓은 이비는 양손으로 제 가슴에 구슬을 꼭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흑…… 으흐흑…….”

두 걸음.

“흐읍…….”

세 걸음.

“우웃…… 으흑…….”

네 걸음.

“흐어어엉…….”

천천히 발을 옮길 때마다 흩뿌려진 눈물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적셨다. 코가 꽉 막혀 입으로 숨을 쉬던 이비는, 복받치는 설움에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젖히고 엉엉 오열했다. 끝없이 고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다 훔치지 못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손바닥으로 쓸어 내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만난 그와의 이별이 이토록 아픈 이유가 뭘까. 단순히 신 앞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감정이라기엔 너무 버거웠다. 이별의 슬픔에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이대로 꿈에서 깨면, 아주 오랫동안 칼리아르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칼리아르와 지금 막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그가 너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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