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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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챕터 11

    루아인 왕국의 적법한 왕세자이자, 대륙을 구한 영웅 원정대의 일원인 체스터. 그는 이미 소드마스터 경지에 오른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정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문제는 이 나른함이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마치 포근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졸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그리운 기분이었다.

    제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동생이 함께한 날의 추억을 연상한 체스터는 깃털이 달린 펜을 내려 두고,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앉았다. 두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이 이리도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오랜만이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 두고 낙원으로 향하는 먼 여정을 떠난 어머니와 동생을 떠올리고 있으니, 정수리 부근에 부드러운 바람이 스쳤다. 마치 보듬어 주는 것처럼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체스터는 이 감각이 진짜 어머니의 손길처럼 느껴져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립습니다.”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뱉은 말은, 왕세자의 집무실 문밖을 지키는 엘프 기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들어선 곤란한 말이니, 삼켰으면 좋았을 텐데 육성으로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하루도 그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젠가는 그립지 않은 날이 올 거야. 시간이 약이라고 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어린 동생은 저 말을 듣고 견디려 노력했을 것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리움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작은 몸으로 혼자 슬픔을 삼켰을 것이다.

    차라리 그때 저가 슬픔은 언젠가 사그라지지만, 그리운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대신 시간이 지나면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고 말해 줬다면, 그랬다면 제 어린 동생이 여전히 곁에 있었을까. 매일 몇 번이고 하는 후회. 후회해 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지만, 체스터는 늘 어린 날의 자신을 질책했다.

    “미안하구나. 그땐 나도 많이 어렸어.”

    체스터는 작은 한숨에 섞어 공중에 사과를 흩뿌렸다. 그러자 몽롱한 감각에 취해서인지, 손등에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동생의 작은 손이 제 손등을 보듬는 것 같았다.

    체스터는 밀려오는 나른함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더 버티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이대로 잠시 잠을 청하게 된다면, 꿈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는 왕세자의 집무실이 고요해졌다.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자 오랜만에 느끼는 안락함이 체스터의 몸을 감쌌다. 오래전, 어머니의 품에 안기길 좋아했던 어린 날에나 느낄 수 있었던 포근함이었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 행복한 감각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지척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두 사람이었다. 둘은 저와 꽤 가까웠고, 체스터는 여전히 조는 척을 하며 주변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집무실 문밖엔 엘프 기사들이 있을 터였는데, 그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 기사를 제치고 집무실 안까지 들어왔다니, 그 소란을 저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건가?’

    분명 자신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펜을 내려 두고, 몸을 감싸는 포근함에 그대로 잠시 졸겠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 전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살기는 없는데.’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체스터는 제 팔찌에서 검을 현현하려 했지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했지만, 다시 침착하게 검을 소환하려 했다. 여전히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굉장히 강력한 마나 장치라도 가져온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의아해졌다.

    왕세자의 검을 현현할 수 있는 마법 팔찌는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가 만든 것이었다. 그보다 강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제 검의 현현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신이라면 모를까.

    ‘설마…….’

    눈을 떠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작게 속삭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드디어 체스터 왕세자님을 만나다니. 초상화보다 실물이 훨씬 멋지네요.”

    ‘엘카사트 제국어군.’

    순수하게 감탄한 여성과 달리, 그녀의 옆에 있는 이는 딱히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감탄하던 여성은 상대의 노골적인 반응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루아인 왕족의 상징이 백금발이라죠? 마치 보석 가루를 머리에 바른 것 같아요. 반짝반짝하고, 정말 아름답네요.”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지만, 전부 다 선명하게 들렸다. 체스터는 저 태평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몰라도 암살자 같진 않다는 생각에 기묘함을 느꼈다.

    “아아, 정말…… 초상화로도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네요. 루아인 왕족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영롱하다던데, 어서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그러자 이번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히 다를 것 없이 그저 푸른 눈일 뿐입니다. 그리고 루아인에선 왕족과 눈을 오래 마주치는 건 예법에 어긋납니다.”

    역시 제국어로 말한 대답을 들은 체스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다. 생전 처음 듣는 예법이었다. 루아인에 왕족과 눈을 오래 마주치면 안 된다는 예법은 당연히 없었다. 오히려 체스터는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절도 있고 딱딱한 발음이 특징인 제국어를 쓰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감미로웠는데, 체스터는 저 남자가 자신의 목소리의 매력을 알고 일부러 부드럽게 말한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물증은 없지만, 분명 그러했다. 이는 같은 남자로서의 감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대체 어쩌다 저 제국 남녀 사이에 끼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체스터는 기운을 감지해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나 정령이 걸어 다니는 길이나 희미한 신력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 다양한 가지각색의 기운이 있었고, 필리스에선 공기 중에 당연하게도 저 모든 것들이 공존했다. 그렇기에 체스터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 공간이 굉장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살던 세상과 단절된 장소 같았다. 내심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자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물었다.

    “공작님. 어떡하죠? 왕세자님이 깊게 잠드신 것 같은데…….”

    체스터가 여전히 자는 척하며 가만히 있으니, 이번엔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척하시는 것 같군요. 여기에 처음 오셨을 테니, 당황하셨을 겁니다. 알아서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려 보죠.”

    “어머…… 진짜요? 제가 한 말은 듣지 못하셨겠죠? 제가 혹시 실례되는 말 하진 않았죠?”

    천진한 반응에 체스터는 더 이상 자는 척하는 게 무의미하다 판단해 입을 열었다.

    “전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헉…….”

    제국어로 대답한 체스터가 눈을 뜨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숨을 삼켰다. 여유 있게 일어난 체스터는 그녀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보고 내심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체스터의 눈을 잠시간 빤히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휙 돌리며 작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눈을 오래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에 체스터는 언제 누웠는지 알 수 없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본 여인은 긴장했는지 체스터의 손 위로 얕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살포시 얹었다.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손가락 끝을 살포시 잡은 체스터는, 손등에 조심스럽게 키스하곤, 입술을 떼지 않고 그대로 부비며 제국어로 인사했다.

    “루아인 체스터, 태양신 아르카라스 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아이린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인사를 건넨 체스터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시선만 올려 성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한눈에도 보일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체스터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성녀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손은 그대로 잡혀 준 채 거두지 않았다.

    새빨개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감개무량한 얼굴로 또 저를 흘긋거리는 성녀를 본 체스터는, 얕게 웃으며 덧붙였다.

    “루아인 왕실 예법 중, 왕족과 눈을 오래 마주치면 안 된다는 예법은 없으니, 성녀님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기 무섭게 성녀가 다시 체스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를 향한 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체스터가 해사하게 미소 지으니, 성녀가 반대편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흐읍…….”

    거의 넘어가려는 숨을 삼킨 성녀는 파르르 떨면서도 체스터에게 잡힌 손을 떼지 않았다. 본디 레이디라면 남성에게 인사를 받고 화답 인사 후 먼저 손을 거두었겠지만, 자긴 필리스에 강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성녀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체스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짙은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다가와 성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뗐다. 그 과정에서 성녀가 미약하게 힘을 주며 반항하려 하였으나, 남자는 손쉽게 체스터의 입술에서 성녀의 손을 떼고, 손수건까지 꺼내 성녀의 손등을 닦아 주려 했다. 손등을 닦이기 전에 손을 샤샥 뒤로 뺀 성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 네. 체스터 왕세자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태양신 아르카라스의 신탁을 받고 필리스에 발을 디딘 성녀 아이린입니다.”

    화답 인사를 받은 후에야 허리를 곧게 편 체스터는 옆에 남자도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카일 드뷔시 공작. 오랜만이군.”

    “예. 체스터 왕세자님. 평안하셨습니까.”

    이웃 나라 왕세자에게 하는 인사치고 말도 안 될 만큼 형편없는 인사였지만, 체스터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성녀만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뭐예요, 공작님? 체스터 왕세자님과 아는 사이였어요?”

    “오래전 건국제에서 인사드린 적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별 사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성녀는 충격적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럼 왜 저한테는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것처럼 말했어요!?”

    “딱히 그런 적은…….”

    너무한다느니, 어떻게 그동안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했냐느니 이야기를 주고받는 성녀와 카일을 앞에 둔 체스터는 저가 있는 공간을 둘러봤다.

    ‘침실이군.’

    조금 전까지 저가 누워 있던 큰 사이즈의 침대가 중심에 있고, 침대 옆엔 협탁이 있었다. 협탁 위엔 작은 메모지와 펜이 놓여 있었고, 침대 너머로 큰 창문이 보였다. 창가엔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창밖으로 펼쳐진 것은 암흑뿐이었다.

    체스터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욕실이 보였는데, 드워프가 만든 욕실인지 수도 시설이 굉장히 깔끔해 보였다. 분명 어떻게 봐도 침실인데, 묘하게 가구나 욕실이나 테이블 등 어느 하나 필리스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의 물건들 같았고, 전부 다 새것 같았다.

    성녀와 카일 공작 뒤로 보이는 굳건한 철문 역시 이 세계의 문 같지가 않았다. 처음 보는 장치가 붙어 있었는데, 이계인들의 전함에서 떼어 내던 부속품 같이 생겼다는 것을 파악한 체스터는 골이 아파 옴을 느꼈다. 체스터가 방을 둘러보는 것을 눈치챈 성녀가 카일 공작과 사소한 언쟁을 마치고 말했다.

    “왕세자님! 여기에 처음 오셔서 놀라셨겠지만, 걱정 마세요. 방이 제시하는 규칙만 따르면 다시 돌아갈 수 있고, 여기서 며칠을 지내다 나가도 현실에선 1초도 흐르지 않아요.”

    체스터는 이미 이곳에 몇 번 와 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는 성녀에게 여유 있는 얼굴로 살풋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여긴 어디죠? 규칙이라는 건 누가 정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성녀와 카일 공작 둘 다 미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체스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혹시 왕세자님께는 그게 안 보이는 걸까요?”

    체스터는 성녀가 말한 ‘안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또 저를 보는 두 사람이 왜 의문 가득한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성녀의 물음에 이번엔 카일 공작이 대답했다.

    “이상하군요. 어쩌면 보여 주는 것을 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작이 미묘하게 대답한 순간, 누군가 급히 헐레벌떡 들이민 것처럼 반투명한 무언가가 체스터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졌다. 화들짝 놀란 체스터를 본 둘은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먹고 안 보여 주고 있었나 봐요.”

    “그것참. 변함없이 허술하군요.”

    “앗! 혹시! 신께서 보시기에도 체스터 왕세자님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칭찬과 부정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체스터는 둘의 대화에 전혀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저와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반투명하고 거대한 네모난 형상이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체스터는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네모난 형상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 중 제일 윗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와 함께 대륙에 닥칠 대재앙을 극복할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설명서♡]

    “이…… 이게 무슨…….”

    체스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

    뚜벅뚜벅 발소리가 조용한 지하를 울렸다. 아무도 없는 신전 복도를 걷던 케이는 가장 구석에 위치한 기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용자가 없는 기도실 안은 어두웠지만, 케이는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모든 양초에 손쉽게 불을 밝혔다.

    환해진 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네 개, 테이블 위, 돌벽 홈 사이에 자리한 양초들, 그리고 한 벽면에 걸린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의 휘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는 평범한 사람의 시선을 기준으로 둔 것들이었고, 케이의 눈엔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이 보였다.

    ‘정신 사납군.’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로 내부 벽면에 걸린 휘장을 흘긋 노려본 케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공기 중에 맴도는 마나의 흐름이 전혀 없는 신전은 보통 마법사라면 견디기 힘들어할 장소였지만, 케이는 아니었다. 마나는 없지만, 허공을 부유하는 신력의 빛무리를 눈여겨보던 케이는 그 은은한 신력이 제게 다가와 몸을 감싸고 흡수되는 것을 지켜보며 픽 웃었다.

    “살갑게 굴지 마.”

    케이는 까칠하게 말하면서도, 제 몸에 멋대로 잔류하려는 신력을 거부하진 않았다. 필리스에서 태어난 평범한 마법사라면 메스꺼움과 온몸의 고통을 호소했을 법한 양의 신력이 케이의 어린 육신에 스미기 시작했다.

    신력이 멋대로 파고들게 방치하고 있자니, 케이가 들어온 문이 아닌 반대편 벽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며 한 프리스트가 들어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프리스트는 케이의 몸에 흡수 중인 신력을 보자마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케이 형제님. 칼리아르 님께서도 형제님의 방문을 환영해 주시는군요.”

    프리스트의 인사에 케이는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라이오넬. 매번 은근슬쩍 형제라고 끼워 넣지 마.”

    점잖게 미소 지으며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은 라이오넬이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 중앙에 올려 두었다. 케이는 늘어져 앉은 상태로 손가락만 까딱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입이 스스로 쫙 벌어지고, 성력이 깃든 천으로 묶인 함이 둥실 떠올랐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함을 감싸 묶은 매듭이 스르르 풀어짐과 동시에 뚜껑이 열렸다. 케이는 안에 봉인된 작은 수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개미 눈물이야?”

    “개미 눈물까진 아니고…… 제 눈물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

    “흠흠. 크흠. 그…… 원래는 더 적었는데, 이것도 나름 고생해서 얻은 겁니다. 일부러 눈물 짜낼 만한 이야기를 꺼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제 노고를 은근하게 곁들인 말에 케이가 인상을 풀고, 픽 웃으며 물었다.

    “전에 말한 그릇 둘은 아직 못 찾았고?”

    “그게……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정보가 있긴 합니다.”

    케이가 말해 보라는 듯이 라이오넬을 바라보니, 그는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라며 입을 열었다.

    “형제님께서 공격하셨던 사람은 프란제르 아리스 후작 부인과 그녀의 전담 셰프 제논입니다.”

    “그릇을 지닌 남자가 요리사였나…… 알 만한 관계군. 그리고 공격이 아니라니까.”

    케이가 찌푸리며 반론해도 라이오넬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후작 부인의 망토는 공격당했을 때만 방어 마법이 발동한다고 하더군요.”

    “애초에 난 그릇을 해칠 생각이 없어. 그저 허연 도마뱀의 마법이 그녀를 과보호했을 뿐이야. 하여간에, 늙으면 다들 걱정밖에 안 느나 보군. 쯧.”

    케이가 불만스레 혀를 찼지만, 라이오넬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희소식은,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제논을 데리고 비밀리에 이곳 아브델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확실하진 않지만 신빙성 있는 소문이고, 정확한 소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케이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저가 새로운 그릇을 둘이나 발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호위 기사들과 나름 평민처럼 입고 마을 시장에 잠행 나온 아리스를 처음 봤을 때, 케이는 그녀보다 그녀의 호위 기사들의 수준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아리스의 호위 기사들은 보통 귀족이 고용하기 어려울 수준인 5서클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법사와 소드 익스퍼트급의 기사였는데, 마법사가 가진 힘을 가늠해 보니 거의 6서클에 근접한 자였다. 저 정도면 왕실 마법 기사단의 단장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케이는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저런 실력자들을 호위 기사로 부릴 정도의 재력을 가진 그녀가, 그 유명한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정체를 파악한 직후 케이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려 했었다.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든 케이에겐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새의 형상을 한 제 사역마가 그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아리스의 사용인의 머리 위에 잠시 착지했다가 아리스의 어깨에 앉는 것을 본 순간, 케이의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

    제 기운을 갈무리하고 평범한 행인인 것처럼 근처에 다가간 케이는,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아리스와 곁에 있는 사용인 남자의 몸에 기생하는 찌꺼기를. 이 세계에 융화되지 못한 그릇이 둘이나 붙어 있다는 사실은 케이를 극도로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이 필리스에서 살아갈 운명이라면 저 기생충 같은 존재는 하등 도움이 안 될 것이고, 제겐 필요한 것이었으니 그저 몰래 떼어 가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케이가 아리스에게 손을 뻗은 순간, 깃들어 있는 줄도 몰랐던 화이트드래곤의 방어 마법이 저를 공격한 탓에 그녀의 호위 기사들과 대치하게 되어 버렸다.

    방심한 채 드래곤의 방어 마법을 직격으로 맞은 탓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녀의 망토에 깃든 것은 어디까지나 화이트드래곤이 아닌 드래곤의 방어 마법이 담겨 있는 아티펙트였다. 드래곤이 아닌 이상 상대해 볼 만하다 판단한 케이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몸에 붙은 찌꺼기를 가져가려 했다. 필리스의 세월이 저를 짓눌러,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이 전부 흐려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케이의 사정 따위 알 리가 없는 아리스의 호위 기사들은 저들이 가진 능력을 전부 개방했고, 덕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었다. 이후 콜린은 너덜너덜한 상태로 귀가한 케이가 결국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는 말에 꽤 크게 놀랐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케이 역시 제 실패에 누구보다 놀란 터였다.

    ‘제 부인 사랑이 지극한 후작의 재력을 생각 못 한 내 탓이지만…….’

    프란제르 후작이 아무리 돈이 넘쳐도, 후작 부인의 호위 기사들에게까지 화이트드래곤의 방어 마법이 깃든 아티펙트를 지급해 주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당시 케이는 상처를 크게 입은 탓에 마나를 줄줄 흘리면서도, 프란제르 칼라일은 진성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며 헛웃음을 터뜨렸었다.

    ‘호위 기사 장비에도 그렇게 투자하는데, 몸을 숨긴 곳은 드래곤 레어 수준의 요새일 수도 있겠군.’

    잠시간 아리스와의 대치를 생각하던 케이는, 저가 허공에 띄워 둔 수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은 라이오넬 역시 수정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는 수정 안에 봉인된 것을 응시하며 말했다.

    “매번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형제님 앞에만 내밀면 이리 얌전해지는 것이 신기합니다. 이지를 갖춘 걸까요?”

    “이지까지는 아닐걸. 그냥 본능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케이의 대답을 들은 라이오넬은 저런 존재가 본능 수준이라 해도, 지능을 갖췄다는 것에 기이함을 느꼈다. 저가 봉인할 때만 해도 달려들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더니, 지금은 케이에게 겁먹은 듯이 수정 구석에 응축된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동도 않는 검은 찌꺼기를 보던 케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이오넬.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작정하고 숨었다면 나도 찾기 힘들 것 같으니, 자네는 일단 새 그릇 찾는 거에 주력해 줬으면 좋겠군. 새 그릇을 찾으면 그에 대한 정보도 내게 주고.”

    라이오넬은 평소와 달리 그릇이라 불리는 대상의 정보까지 요구하는 케이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마침 새 그릇에 대한 소식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에벨루스의 아이가 어디선가 이걸 얻은 것 같더군요.”

    그는 ‘이걸’ 부분을 언급하며 슬쩍 수정을 올려다보곤 다시 케이와 눈을 맞췄다. 케이는 에벨루스의 아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벨루스의 프리스트가?”

    “예.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크리시가 얼마 전 모든 신전의 삿된 존재에 대한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람을 극도의 불안감에 빠지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기운을 가지고 있고,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검은 연기처럼 흩어지면서도 신력으로 봉인하면 액체 같은 형상의 것을 아는 이가 있는지 말입니다.”

    퍽 자세한 설명이었다. 누가 들어도 저가 찾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케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지?”

    “당시 대신관님께서 확인은 해 보겠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아직 정식 답장은 발송하지 않으셨고요. 어차피 대신관님께서 바쁘시니 답장은 제가 처리할 것 같습니다.”

    “그릇이 누군지는 언급 없었고?”

    “예.”

    프리스트의 대답에 케이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곧 직접 손을 움직여 수정을 잡았다. 봉인당한 검은 형상은 케이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수정 구석에 굳어 있었다. 잔뜩 움츠러든 모습을 확인한 케이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크리시라…… 이것도 인연인가 보군. 조사할 사람을 보내겠다고 답장해. 내가 직접 만나 보도록 하지.”

    라이오넬은 케이가 언급한 인연이라는 말도 그렇고, 평소와 다르게 직접 움직이겠다는 말에도 의아함을 느꼈지만 딱히 되묻지 않고 끄덕였다. 이후 잠시간 수정에 든 내용물을 살피던 케이가 묘한 얼굴로 물었다.

    “고작 이만큼 나온 걸 보니, 그릇이 요즘 살 만한가 봐?”

    “예. 그는 이제 필리스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약혼도 했더군요. 저도 하객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가서 축사를 해 주기로 했죠.”

    “그 그릇에게서 더 구하긴 어렵겠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 아쉬운 소리였지만, 케이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작은 주머니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라이오넬은 주머니 안에 가득 찬 금화를 보고 갸웃하며 물었다.

    “기부금입니까?”

    “하나는 자네 수고비고. 하나는 제공자에게 결혼 축하 선물로 줘. 이젠 그 그릇도 행복해질 때가 됐지.”

    사람을 그릇이라고 지칭하는 주제에, 말에 담은 뜻은 덕담에 가까웠다. 케이의 이런 모습에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 라이오넬은 주머니를 하나만 챙기고, 나머지 하나는 케이에게 쓱 밀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선물만 전해 주겠습니다.”

    “곧 자네 손자가 태어난다며. 앞으로 더 혹독하게 부려 먹을 대가라고 치고 챙겨 둬.”

    “형제님. 전 칼리아르 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고집스럽게 받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던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가만 보면 칼리아르도 그렇고, 칼리아를 섬기는 제자들도 그렇고 전부 다 손해만 보는 족속들이라며 혀를 찼다. 누가 봐도 비꼰 것인데, 라이오넬은 마치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케이는 수정을 제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그건 신전에 기부하도록 하지. 슬슬 돌아가야겠군.”

    “예. 감사합니다.”

    라이오넬 역시 제 수고비에서 기부금이 된 주머니를 챙겨 일어났다. 그는 어쩐 일로 텔레포트가 아닌, 걸어 나가려는 케이를 배웅하겠다며 함께 나섰다. 들어올 때처럼 여전히 텅 빈 신전 지하 복도를 걷던 케이는 빈 기도실들을 보며 혀를 찼다.

    “칼리아르 신도가 적은 건, 반은 홍보 부족이야.”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머리 맞대 보고 있습니다.”

    “아이디어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모방이라도 해. 에벨루스 신전 보니 얼굴 반반한 프리스트들 초상화도 팔던데. 대체 어떤 멍청이가 저런 걸 사나 했더니, 엄청나게 팔리더군.”

    “저희도 건의해 봤지만, 대신관님께서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 말에 케이는 하여간 어딜 가나 대가리가 문제라며 라이오넬의 앞에서 대신관을 흉봤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가 로비로 나오니, 해가 짧아져서인지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신전 밖까지 배웅 나온 라이오넬은 케이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 형제님. 사실, 칼리아르 님으로부터 전언이 있었습니다.”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의 전언이라는 말에, 케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잔뜩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추고 그런 이야기는 단둘이 있을 때나 말하지, 왜 밖에서 꺼내는 거냐며 타박했다. 물론 라이오넬은 케이의 트집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해사하게 미소 띤 채 양팔을 벌리더니 그대로 케이를 꽉 끌어안았다.

    “뭐, 뭐냐! 지금 뭐 하는 짓…….”

    “이것이 칼리아르 님의 전언입니다.”

    “노망난 달이 혹시 내게 얻어맞으라는 명령을 했나?”

    “하하하~ 아닙니다. 그저 칼리아르 님 대신 이렇게 꼬옥. 포옹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얼굴이 더 구겨진 케이가 라이오넬을 거칠게 밀어냈다. 라이오넬은 마치 뭐라도 묻은 것처럼 옷을 열심히 털어 대는 케이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케이 형제님. 부디 길을 잃으셨을 땐, 빛을 따라 걸으십시오.”

    “…….”

    케이는 저 말이야말로 칼리아르의 전언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대꾸하는 대신 몰래 라이오넬의 신관복 주머니에 보석 몇 개를 흘려 넣어 주고 물러서서 그의 작별 인사를 받았다.

    ***

    리엔과 유사가 탄 마차가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저녁 시간대였지만, 해가 짧아진 탓에 벌써 별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푸른 달과 붉은 달로 향하는 은하수를 응시하다 고개를 숙이자, 곳곳에 설치한 수정 덕분에 루아인 왕성만큼 환하게 빛나는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수정 조명으로 밝은 정원을 빙 둘러본 카르젠은 2층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방 테라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쯤 저 방의 주인은 제 몸보다 큰 베개에 파묻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리엔과 유사를 배웅하러 나오기 전에 협탁에 가져다 둔 엘릭서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카르젠 님. 저 오늘 카르젠 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 손바닥에 조심조심 써 주었던 말을 떠올린 카르젠은 기대감을 안고 저택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밤, 이비가 과연 제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몹시 궁금했다. 저택에 들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자, 멀리 이비의 방에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젠은 복도에 멈춰 서서 아리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어르고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잠시간 말이 없던 아리스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때. 말했잖아. 나랑 북부로 가자고. 내 아들 해.”

    카르젠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대체 어쩌다 저런 이야기가 나온 건지 몰라도, 병약한 이비가 추운 북부로 갈 일은 없었다. 북부의 겨울은 아브델보다 훨씬 길고 혹독했다. 물론 북부에 묘족이 많이 살긴 했지만, 몸이 약한 이비와 평범한 묘족의 경우를 동일 선상에 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병약한 이비는 북부에 가자마자 감기에 걸리거나 크게 앓을 것이 분명했다. 절대 가선 안 될 지역이었다.

    “응, 물론이지. 후작성은 마법으로 온도 조절을 하고 있어서 사계절 내내 따뜻하고, 여름엔 선선해서 오히려 북부가 지내기 더 좋을 거야. 아브델의 여름은 엄청 덥거든.”

    아리스의 목소리에 카르젠은 보는 이도 없는데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물론 수도 아브델의 여름이 북부에 비해 훨씬 더운 것은 사실이지만,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공기를 차게 식혀 주는 얼음 속성 마법으로 가공된 냉기 수정이라면 몇 개든 살 수 있었고, 이비가 원한다면 저택 전체에 가동할 수도 있었다. 수정 비용은 카르젠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참에 냉기 수정을 미리 주문해야겠군. 지금 시기에 주문해 둬야 재고 확보가 쉽겠지. 여름 내내 온종일 가동할 수 있을 만큼 주문해야겠어.’

    냉기 수정은 통상 봄부터 재고가 확 줄어들기 마련이었으니, 구매한다면 늦가을인 지금이 적격이었다. 할리스에게 대량 구매를 지시해야겠다고 다짐한 카르젠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비의 방에 가까워지니 아리스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아들만 셋도 나쁘지 않지, 뭐. 특히 나르샤가 좋아할 거야. 매일 형이나 누나 낳아 달라고 얼마나 졸랐는지 몰라.”

    카르젠이 방문에 노크하려는 찰나, 아리스가 보지 않아도 실실 웃는 낯임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오늘 대화해 보고, 만에 하나 결과가 안 좋으면 말하렴.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한 것을 아는 카르젠이 피식 웃으며 노크 후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아리스와 다소 힘없이 웃는 이비가 보였다. 얼굴색이 많이 돌아온 걸 보니 해열제 덕분에 열이 내린 듯싶었지만, 카르젠은 안도하지 못했다.

    제 몸은 평소보다 훨씬 찌뿌둥한 상태로, 전신의 근육이 통증으로 욱신욱신거렸다. 그나마 저가 단련된 몸이고, 크리시와 전이를 나눠 받아 이 정도 통증에서 그치는 것이지, 만약 이비가 저 작고 연약한 몸으로 이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다면 아마 저렇게 웃지도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전이가 거두어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가가니, 아리스가 침대 옆에 끌어다 둔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푹 쉬렴.”

    이비가 살풋 미소 지으며 힘없이 끄덕이니,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고마워, 아리스. 이제부터 내가 이비 곁에 있을게. 푹 쉬어.”

    “그래. 그럼 가 볼게. 아, 그리고 카르. 이비한테 잘해. 어쩌면 내 아들이 될지도 모르거든.”

    “저런…… 이비. 기억해 둬. 북부는 정말 추워. 거리에 곰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여러모로 위험한 곳이야.”

    “아니, 무슨 곰…… 아, 음…… 그래. 아주 가끔 곰이 나타나긴 하는데, 아브델도 경비대원이 많아서 그렇지, 식량이 부족하면 마을로 짐승이나 마물이 자주 내려와.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다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가 꽤 재미있는 농담으로 들렸는지, 얌전히 듣던 이비가 힘없이 푸흐흐 웃었다. 웃는 것조차 기운이 쪽 빠진 모습을 본 아리스는 어서 쉬라며 두 사람에게 재차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아리스가 나간 후, 카르젠은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아 이비의 상태를 살폈다. 전이 덕분에 이비 본인은 통증이 없는 듯했지만, 전에 말했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은 여전했는지 숨을 잘게 쉬고 있었다. 카르젠이 협탁에 미리 가져다 둔 엘릭서 병을 집어 들자, 이비의 고개가 자연스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이, 이비…… 조금만 마시자. 한 스푼만.”

    “…….”

    제게 고개를 돌리고, 아예 입술까지 말아 넣으며 회피하는 모습을 본 카르젠은 굴하지 않고 엘릭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미리 가져다 두었던 큼지막한 스푼에 조심스레 따르며 말했다.

    “자. 일단 이만큼만 먹자.”

    “…….”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전부 다 선명하게 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비의 토끼 귀가 잘게 떨렸다. 노골적인 거부 반응을 본 카르젠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스푼을 더 가까이 가져가 대며 덧붙였다.

    “이비. 엘릭서의 품질이 올라갈수록 고약한 맛이 나는 것은 나도 먹어 봐서 알고 있어. 그래도 이비의 몸을 위해서 조금만 참아 줘. 오늘 자기 전에 딱 두 스푼만 먹으면 이비에게 선물을 줄게.”

    분명 한 스푼이라더니, 어느새 두 스푼으로 말이 바뀌었다. 이비 역시 이를 눈치챘지만, 선물이라는 말에 바르르 떨던 귀가 일순 쫑긋해졌다. 저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은 카르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딱 두 스푼만 먹으면, 이비가 원하는 소원 하나 들어줄게.”

    애절한 제안에 이비의 고개가 아주 조금, 카르젠 쪽을 향했다. 카르젠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이비에게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가 말한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 능력으로 가능한 거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들어준다고 약속할게.”

    ‘무엇이든 들어주는 소원…….’

    확실히 오늘 밤 꿈에서 그와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소원권 하나 정도는 담보로 가지고 있어야 쉽게 입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소원권을 받는다고 해도, 높은 확률로 오늘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귀를 파르르 떨며 끄덕였다.

    ***

    ‘으…… 괴로워, 토할 것 같아…….’

    엘릭서를 마신 지 10분이 지났음에도 역한 비린내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잠재우기 위해 사탕을 네 개나 물고 있으니,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향해 고개 돌린 이비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카르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에 든 책이 아닌 이비의 볼록한 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곱게 접으며 웃고 있었다. 반짝이는 얼굴을 마주한 이비는 침착하게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잠이 안 와?”

    끄덕끄덕.

    “억지로 자려 하면 더 잠들기 힘들 거야. 그럼 그동안 이야기나 할까?”

    이야기라는 말에 이비가 실눈을 뜨고 카르젠을 바라봤다. 오늘 이비가 카르젠에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고, 설명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꿈속에서 만나 대화하기로 한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는 눈빛을 한 이비가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워 손가락을 내밀었다. 카르젠이 알아서 이비의 손가락에 제 손바닥을 가져가 대 주니 바로 샥샥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쓱쓱- 쓱쓱쓱-

    손바닥을 간질이며 써진 글을 이해한 카르젠은 이비와 마주 보게끔 옆으로 머리를 괴고 누워 말했다.

    “북부? 북부에 가고 싶어? 혹시 야생 곰이나 혹독한 추위에 관심이 있어?”

    카르젠에게 북부에 가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 반응에 이비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궁금하긴 해요. 아까 아리스가 초대했거든요. 여름에 아브델은 더우니까 놀러 오라고.]

    “흠…….”

    잠시 제 손바닥을 뚱하니 바라본 카르젠이 글쎄…… 운을 떼며 말했다.

    “북부는 딱히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아니고…… 단순히 더위를 피할 목적이면 아까 말한 것처럼 냉기 수정을 사용하면 돼. 작은 냉기 수정 하나만 있어도 이 방은 봄날 아침처럼 시원해지거든.”

    [하지만 마법 수정은 비싸잖아요? 매일 사용하는 건 어렵]

    “별로 비싸지 않아. 여름 내내 온종일 사용할 수 있어. 북부가 부럽지 않게 저택 곳곳에 설치할 예정이야. 걱정하지 마. 원하면 눈을 내리게 하는 수정도 설치해 줄게.”

    이비가 글을 다 맺기도 전에, 카르젠이 다소 급하게 대답했다. 가공된 마법 수정이 싸다니…… 눈을 가늘게 뜬 이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봤고, 카르젠은 태연하게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비싸다는 기준은 개개인마다 다르잖아? 내겐 전혀 비싸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마디로 엄청 비싸다는 거구나.’

    이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불경하다 싶을 정도로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본 카르젠은 웃음을 참기 어려웠는지, 쿡쿡 소리 내 웃으며 이비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 정리를 해 주는 척하며 제 손등을 가져가 대 열을 가늠하고 있자니, 이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열 체크를 하고 다시 손바닥을 가져다 대 주자 조금 전보다 더 기운이 빠진 듯 힘없이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혹시 저 때문에 아프진 않으세요?]

    글을 이해한 카르젠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전혀 아프지 않아.”

    하얀 거짓말이었다. 온몸에 퍼진 통증은 마치 거인이 제 몸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 하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론 이 정도 통증이야 카르젠에겐 별거 아니었다. 여유 있게 참을 만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이비였다. 전이를 절반 나눠 받는 크리시가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그가 이 정도 고통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약하진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저들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아픈 것은 이비의 잘못이 아니었다. 카르젠은 머뭇거리는 이비의 손가락을 감싸 잡으며 말했다.

    “이비가 엘릭서를 열심히 먹어 준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 아, 물론 엘릭서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아프거나 한 건 아냐.”

    엘릭서 이야기에 이비가 대번 기운 없이 눈썹을 늘어뜨리자 카르젠이 급하게 덧붙였다. 이비는 정말 괜찮다고 재차 말해 주는 카르젠을 바라보다 그의 손에 잡힌 손가락을 슬그머니 빼냈다. 카르젠이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펴 보이자, 한층 더 약해진 악력으로 열심히 글씨를 썼다.

    [엘릭서에는 어떤 재료가 들어가나요?]

    “어, 음… 엘릭서 재료는…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카르젠이 묘하게 시선을 흐리는 모습을 본 이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주시했다. 카르젠은 저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비의 눈빛에 멋쩍어하며 다시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지금 이비가 마시는 특등급 엘릭서의 핵심 재료는 깊은 숲에서 만월 밤에만 피어나는 어떤 약초의 씨앗이라고 알고 있어.”

    카르젠은 그 <약초>가 숲에서 마물이나 동물, 그리고 숲속 깊이 들어온 인간까지 잡아먹는 거대한 식인 식물 플루에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누구보다 유약한 이비는 식인 식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기절할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카르젠의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플루에라고 불리는 식물형 상급 몬스터를 사냥 후, 사후 경직이 오기 전에 몸을 갈라 심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쪼개 보면 안에 씨앗이 몇 개 있는데, 이 씨앗이 바로 상급 엘릭서의 핵심 재료였다.

    그리고 플루에의 줄기나 잎사귀에는 상처 회복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있어서, 고급 연고를 만들 때 쓰이는 재료였다. 그러니 플루에라는 몬스터가 <약초>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카르젠은 이런 부분을 이비에게 굳이 밝히지 않았다.

    평소 이비가 깜짝 놀라거나 다소 곤란해하는 모습은 카르젠에게 퍽 즐거움을 주었지만, 진심으로 겁먹고 졸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비를 배려한 하얀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줄줄 읊고 나니, 가느다란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쓱- 쓱- 쓰슥-

    점점 움직임이 약해지는 손가락의 악력을 파악한 카르젠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갑자기 일어나 앉은 저를 향해 갸웃하는 이비의 베개를 잘 정리해 편한 자세로 만들어 주며 손을 잡았다. 이비는 카르젠이 제 손을 잡는 것은 이제 익숙해진 듯 놀라지 않았다. 카르젠은 이비의 작고 가는 손을 조심조심 주물러 주며 질문에 대답을 시작했다.

    “가짜 수정 말이구나. 지금은 나도 보고만 전해 듣고 있어서 일부만 들었지만, 잘 해결됐대. 물론 안타깝게도 사망자가 아예 없는 건 아냐. 하지만 수정에 문제가 있으니 사용하지 말라고 발표한 직후 꿈에서 깨지 못하던 이들이 전부 깨어났어.”

    이비가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니, 카르젠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왜 깨어났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무사히 깨어났다니 잘된 일이지. 오래 잠든 이들은 신관이나 마법사를 고용할 수 없는 형편인 이들이 대부분이었거든. 그래서 각 신전 프리스트들이 자원봉사로 들러서 억지로 깨우던 참이었어.”

    이비는 크리시가 신력을 사용해 카르젠과 자신의 꿈에 들어와 깨워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카르젠은 이비의 손을 계속 조물조물 주물러 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보니 뒷 순서를 받아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하급 엘릭서를 먹이며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모두 한날한시에 일어났다니…… 설명할 길은 없지만, 다들 신이 도왔다고 추측 중이래.”

    이비는 신이 도왔다는 말에 동의하며 감격한 얼굴로 끄덕였다. 어떤 신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인간사에 관여했으니, 지금쯤 그만큼 고생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숲의 마법사>를 통해 초월신이 힘을 사용했을 때 받는 페널티를 알고 있던 이비는 누군지 모를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마음속으로 읊었다.

    감격한 얼굴로 안도하는 이비를 바라보던 카르젠은 이 부분 또한 모든 것을 말하진 않았다. 왕성에서 조사했을 당시 깨어난 이들은 대부분 꿈에서 칠흑같이 검은 기운을 마주했다고 증언했다.

    갑자기 제 꿈속에 찾아온 검은 형상을 따라 걷다 보니 꿈에서 깼다고…… 보통 검은 형상을 보면 겁먹고 물러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라고 했다. 저를 찾아온 저 존재가 ‘신’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입 모아 말했다. 새카맣게 일렁이는 존재는 성스러운 기운으로 감싸여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신이었기에, 어떤 신인지 몰라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들 했다. 그러니 꼭 제대로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한 이들도 많았다. 왕실 수사 기관은 이 부분에 대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다. 어차피 소문은 곧 퍼지겠지만, 그저 모든 이들이 무사히 깨어났다는 부분만 발표했을 뿐이었다.

    ‘항간에서는 안식의 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이 한 일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안식의 신>

    최근 왕실 직속 보고를 들으며 처음 들은 이름이었지만, 카르젠은 그 신의 이름을 읽었을 때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언젠가 안식의 신을 마주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데, 내가 만났을 리는 없겠지.’

    보고서에 의하면 얼마 전, 흥분제 성분이 섞인 캔디 사건으로 사망한 가족들에게 안식의 신의 사용인이라는 자가 나타나 안식의 신께서 당신들을 도우라 하셨다며 상당한 금화를 위로금으로 주고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캔디건에 대해 수사 중인 리엔의 직속 부하들이 조사했을 때,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실제로 위로금을 받은 서민들은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안식의 신이 준 돈 덕분에 사망자의 가족들이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 노예상들에게 잡혀간 빈민가의 아이들이 안식의 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했다는 이야기 역시 최근에 보고받은 터였다. 기사단이 노예상들의 아지트를 급습했지만, 이미 누가 다녀간 후라 내부는 엉망이었고, 잡배들 모두 도망갔는지 사라져 있었다고 보고했다.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 등 기득권층보다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있다는 안식의 신 이야기에 각 신전들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다만 남부 영지에 있는 칼리아르 신전에서 왕실에 귀띔해 준 바로는, 안식의 신이 수도에선 최근에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훨씬 전부터 약자의 편에 선 신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고 했다.

    ‘왜 이리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군.’

    카르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시감과 불쾌감에 의아함을 느꼈다. 보고된 내용만 축약해 봐도 선한 신이 분명했으나, 안식의 신이라는 이름을 곱씹다 보면 묘한 적대감과 불쾌감이 느껴졌다.

    아니, 적대감뿐이 아니었다. 마치 안식의 신이라는 자가 제게 있어 소중한 이를 망치거나, 해칠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를 마주한 기분이었고, 덕분에 살의가 일 정도였다.

    어째서 그 이름이 익숙하면서 거북하게 느껴지는지, 저조차 그 이유를 몰라 눈을 내리뜬 채 이비의 손을 주무르다 보니 작게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앓는 소리에 놀란 카르젠이 고개를 드니, 찌푸린 채 바르작거리는 이비가 보였다.

    “아, 미안해. 이비. 너무 세게 주물렀어?”

    이비가 끄덕이자 카르젠은 재차 사과하며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하여간에, 수정 건은 잘 해결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르젠은 이후로도 이비가 물은 ‘바깥소식’에 대해 일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기후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이번 겨울은 작년보다 훨씬 빨리 올 것 같다는 발표를 한 덕분에 벌써 겨울 의상들이 거리에서 판매 중이라든가, 지금까지는 손가락장갑이 유행이었는데, 올해 겨울 카탈로그에 유명 디자이너가 손모아 장갑을 실어 벌써 인기라든가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장갑 이야기를 하던 카르젠은 벌써 이비에게 줄 손모아 장갑을 주문해 놨다고, 분명 잘 어울리고 귀여울 것 같다고 덧붙여 열심히 듣던 이비의 얼굴을 조금 붉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카르젠은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다가올 수확제나 신년제 같은 축제 이야기는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급적이면 이비가 외출 욕구를 느낄 만한 것은 미뤄 두고 싶었다. 혹시나 희망을 품었다가 나갈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 받을지 몰라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깥소식을 들려주는 동안 이비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모른 척하고 계속 이비의 손과 팔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비의 호흡이 느려졌다.

    천천히 눈을 감은 이비가 색색 힘겹게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한 카르젠은 조심스럽게 이비의 손을 내려 두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는 침대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수정 램프 하나만 남기고, 방 곳곳에 밝혀 둔 램프들을 하나하나 껐다. 방문으로 다가간 카르젠은 순식간에 깊이 잠에 든 이비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 푹 자고 있어. 바로 돌아올게.”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 준 카르젠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아까부터 마나의 파동이 울리는 장소,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도착한 카르젠은 통신 수정을 사용해 크리시에게 연락했다. 통신 수정을 감싼 마나가 한동안 산만하게 웅웅 울리다 멈추더니, 이내 흐름이 잔잔해지며 크리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다 이제 연락해? 아까부터 계속 연락했어.

    “미안. 잠시 일이 좀 있었어. 콜린이랑 저녁은 잘 먹었어?”

    -…아…… 음…… 그렇지 않아도 콜린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콜린의 이름을 입에 담은 크리시의 목소리가 어쩐지 무겁게 들렸다.

    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답에 이어, 크리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콜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어. 일단 너랑 이 부분에 대해 대화하고 싶은데…… 가능하면 체스도 함께. 아, 너 체스 연락도 못 받았지?

    “응. 지금 바로 네게 먼저 연락한 거야.”

    -아까 체스랑 연락했는데, 내일 네 저택으로 가겠대. 근데 체스 녀석 상태가 좀 이상했어. 완전 얼이 빠져 가지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통 말을 안 하더라.

    체스터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이야기에 카르젠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확실히 체스가 요즘 과로하긴 했지. 그럼 내일 둘이 같이 와.”

    -같이 가긴 힘들 것 같아. 점심쯤에 칼리아르 신전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거든. 그 사람 먼저 만나고 가야 해서 언제 갈지 모르겠어. 아, 하나 더. 지그하르트 님과 연락이 닿았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가 수면기에 들어간 게 아니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카르젠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계시는지 알아?”

    -체스 말로는 남부에서 볼일 보고 바로 아브델로 오실 예정이라고 들었어.

    “남부? 남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카르젠의 질문에 크리시가 피곤에 잔뜩 절어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세한 건 아니지만, 힐드레드 자작 가문이 가진 땅과 저택을 전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만 들었어. 그 멍청한 인간이 기어이 건드려선 안 될 것에 손댔나 보지 뭐…….

    “허…….”

    카르젠은 희귀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힐드레드 자작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그 미련한 작자라면, 드래곤을 자극할 만한 짓을 벌이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힐드레드 자작 본인은 저가 그런 짓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일단 알겠어.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크리시. 미안하지만, 오늘 꿈에서 이비와 둘이 대화하고 싶어.”

    -나야 혼자 쉬면 편하긴 한데,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크리시는 여러모로 심란해하면서도, 대번 걱정을 감추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르젠은 보는 이도 없는데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이비가 내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거든. 아무래도 둘인 편이 편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라. 그럼 난 이만 쉴게. 내일 봐.

    “힘들 텐데 푹 쉬어. 그리고 내일 방문할 때 부탁했던 것도 꼭 가져다줘.”

    -…오냐…….

    다소 떨떠름한 대답이 들려온 후, 통신 수정에 맴돌던 마나가 잔잔하게 흩어졌다. 크리시와 연결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카르젠은 통신 수정을 책상에 내려놓고, 지금쯤 저를 기다리고 있을 이비를 만나러 서재를 나섰다.

    ***

    ‘으음…… 역시 이번에도 바다네.’

    혹시나 이번 꿈엔 다른 장소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 게 무색하게도, 꿈의 배경은 여전히 바다였다. 에메랄드빛 잔잔한 파도를 바라보던 이비는 생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나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길게 뻗은 나무 몸통만 보면 야자수 같은데, 잎은 마치 버드나무 같았다.

    주변엔 나무와 바위가 전부였고, 지구와 필리스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비는 아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나무와 바위에 혹시나 신이 숨겨 둔 힌트가 있을까 싶어 열심히 살폈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꽤 큰 바위도 있었지만,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그저 바위와 나무, 새하얗고 고운 모래와 바다뿐이었다. 하늘로 시선을 올린 이비는 구름 모양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봐도 평범한 구름이지만, 굳이 끼워 맞춘다면 저가 좋아했던 캐릭터의 얼굴 형태를 닮은 것 같았다.

    “음…… 저 구름은 미키마우스 얼굴 같네…….”

    “미키마우스가 누군데?”

    저가 말해 놓고도 민망해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던 이비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언제 꿈에 들어온 건지 카르젠이 보였다. 그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긴 후, 머리끈 대신 크라바트를 풀어 꽉 묶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는 모습을 지켜보자, 꿈에서 만난 형이 떠올랐지만, 이비는 현재에 집중하려 애쓰며 옅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미키마우스는…… 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쥐예요.”

    “두 발로 걷는 쥐? 혹시 몬스터야?”

    “아, 아뇨…… 몬스터는 아니고…… 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특별한 쥐거든요. 굳이 분류하자면 수인에 가까워요.”

    “으음…… 그렇구나. 쥐 수인은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어.”

    대충 둘러댄 말에도 성실하게 대답한 카르젠이 먼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비 역시 카르젠의 옆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그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어디서부터 운을 떼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다행히 카르젠은 이비를 재촉하거나 먼저 말을 꺼내는 대신, 평온한 얼굴로 바다를 응시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카르젠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본 이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람조차 카르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네…….’

    새삼스럽지만, 카르젠은 미남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미남이었고, 세상 그 누가 봐도 미남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존재만으로도 반짝이는 체스터나 피곤해 보여도 감출 수 없는 잘생김을 두른 크리시도 있었지만, 이비가 볼 땐 카르젠의 미모가 필리스 세계 원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작가님이 카르젠의 얼굴에 대해 왜 그렇게 자주 언급했는지 알 것 같아…….’

    <숲의 마법사> 원작에선 독자들이 알았으니 이제 그만 말하라고 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특정 요소가 있었는데, 바로 유사의 풍성하고 크고 폭신하고 귀여운 꼬리와 카르젠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책을 읽던 김현서 역시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매화마다 이렇게 언급해 대는 거야……’라고 생각한 적이 자주 있었는데, 저런 의문을 품은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기운이 샘솟는지 모르겠지만, 저 얼굴과 함께, 아니. 카르젠과 함께라면 세상만사가 다 좋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심미적인 만족도를 충족해 주는 아름다운 얼굴 덕분에 마음이 평온해진 이비는 시선을 내려 제 손을 확인했다.

    오늘도 역시 걸친 옷은 병원복이었고, 손엔 멍 자국과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멍으로 얼룩덜룩한 손에서 다시 카르젠을 향해 고개 돌린 이비는, 그가 저를 향해 고개 돌려 시선을 마주한 순간,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카르젠 님. 제가…… 제가 오늘 카르젠 님께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응.”

    카르젠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이는 모습을 본 이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가 또 이비를 눈부시게 만들었다는 것을 눈치챈 카르젠이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정답이었는지, 막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던 이비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말했다.

    “음, 그게……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카르젠 님께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사과?”

    뜻밖의 말이라는 듯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비를 바라봤다. 카르젠이 순수하게 놀라는 모습조차 너무 아름답게 보여 이비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과요. 제가… 음… 제가… 음… 제가 카르젠 님을…….”

    말끝을 흐린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직전까진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말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르젠은 이비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잠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비는 제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작게 심호흡했다. 스읍- 하아- 숨을 몰아쉰 후, 다시 카르젠과 눈을 마주했다. 이후에도 바로 말하지 못하고 잠시간 망설이던 이비는 저를 향한 그의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용기 내어 말했다.

    “제가… 제가 처음부터 카르젠 님을… 속였어요. 죄송해요…….”

    속였다는 말에도 카르젠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다정한 얼굴로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이비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와 거리가 좁혀진 이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음…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이비가 아니에요. 그리고 전 이 세계…… 그러니까, 필리스 사람이 아니에요.”

    “…….”

    “전 원래 지구라는 전혀 다른 별에서 살던 사람인데, 거기서 병으로 죽었어요…… 그런데 죽고 나서 눈 떠 보니 웬 숲에 누워 있었어요.”

    카르젠은 진지하게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안심한 이비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주위에 괴물들이 절 둘러싸고 있었어요. 이대로 또 죽는구나 싶었는데, 그때 카르젠님이 절 구해 주셨어요…….”

    “…….”

    “그리고 저택에서… 기억 상실 같다고 하셨을 때…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다른 세상에서 눈 뜨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카르젠 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잠시 말을 멈춘 이비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 입술을 핥았다. 그리곤 마른침을 삼킨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땐 정말… 나 혼자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지금까지 쭉 기억 상실인 것처럼 굴었어요… 처음부터 카르젠 님을 속여서 정말 죄송해요…….”

    느릿느릿 힘겹게 말을 맺은 이비가 조심스레 카르젠을 살폈다. 지금껏 조용히 경청하던 카르젠은 변함없는 얼굴로 이비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을 텐데,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

    이비는 지금 제 머리엔 없는 토끼 귀가 뒤로 바짝 눕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여상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미안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사과를 받아 주는 카르젠에게 그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 전에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비는 카르젠이 묻는 거라면 뭐든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반응을 본 카르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비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이비의, 아니. 너의 진짜 이름이 알고 싶어.”

    “진짜 이름…….”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질문을 곱씹으며 짧게 숨을 고른 이비는 카르젠의 바다와 같이 맑고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김현서예요.”

    “김현서.”

    카르젠이 김현서라는 이름 세 글자를 음미하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 주자, 이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살면서 그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들을 거라곤 상상한 적도 없는데, 정말 듣기 좋았다.

    이비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열이 화르륵 오른 것을 들킬까 봐 제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카르젠의 손길을 피했다. 느릿하게 손을 거둔 카르젠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부르면 돼? 그냥 김현서라고 부르면 돼? 성은?”

    “어…… 김이 성씨고요, 현서가 이름인데…… 그래서 보통…… 어른들이나 친한 사이끼리는 현서야. 라고 부르는 편이에요.”

    “현서야. 이렇게?”

    지나치게 감미로운 목소리에 당황한 이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반응을 본 카르젠이 쿡쿡 웃으며 “왜? 발음이 조금 이상했어?”라며 여상하게 묻자, 급히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고, 어, 음…… 이름은 그냥 이비라고 불러 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편이 여러모로 나을 것 같고, 또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도 알려지면 조금…… 복잡해지지 않을까요?”

    이러다 제 고막이 녹거나 심장에 무리가 올까 봐 괜한 핑계를 둘러댄 제안이었지만, 카르젠은 달리 고민도 하지 않고 긍정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가급적이면 극소수, 아니. 나만 아는 거로도 충분하겠지. 현서의 비밀을 굳이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은 것도 사실이고.”

    카르젠의 대답에 이비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저 말의 뜻은 그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지구’라는 또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을 숨겨야 한다는 내용이겠지만, 마치 ‘네 비밀은 나만 알고 싶어.’처럼 들려서 괜히 볼이 더 뜨거워졌다.

    ‘아, 진짜…… 카르젠은 사람이 착각하게 말을 한다니까…….’

    문제의 저 화법 덕분에 <숲의 마법사> 팬덤에서 일명 ‘노빠꾸 직진남’ 소리 듣던 카르젠이었다. 작중 카르젠은 무슨 말을 해도 난 언제나 사실만 말한다며 상대에게 돌직구로 칭찬하곤 했다. 오죽하면 천하의 리엔조차 카르젠의 화법에 기함한 적이 더러 있었다.

    이비가 민망함에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흐리고 있으니, 그는 뭐 그리 즐거운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비라고 부르고. 단둘이 있을 땐 가끔 현서라고 불러도 될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왜 이리 황홀하게 들리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려 심호흡한 이비가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봐. 저 봐. 저렇게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면 누가 안 된다고 하겠어…….’

    붉게 물든 가느다란 목덜미를 물끄러미 보던 카르젠이 몸을 더 가까이 움직여 이비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밀착에 온몸을 흠칫 떤 이비가 옆을 돌아보자, 흔들리는 동공과 눈을 맞춘 카르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현서야.”

    “흡!”

    “현서야?”

    “느, 느에, 네, 네……!”

    일순 혀를 씹을 뻔한 이비가 이상한 발음으로 겨우 대꾸했지만, 카르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비의 진짜 이름을 알게 돼서 정말 기쁘다.”

    “아으으…….”

    해사하게 웃는 눈부신 카르젠을 견디지 못한 이비가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르젠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지만, 지금 여기서 손을 떼면 그의 눈부신 얼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얼굴을 가린 채 심호흡했다.

    몇 번이고 크게 숨을 골랐지만, 두근대는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얼굴을 가린 상태로 끙끙대던 이비가 대화의 주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어, 그…… 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유가 뭐든, 지금까지 카르젠 님께 거짓말해서 죄송했어요. 앞으로는 카르젠 님께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손에 가려 웅얼웅얼 뭉개져서 나오는 발음이었지만, 뜻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카르젠이 바로 긍정하며 대답했다.

    “그래. 이비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사과하니, 사과는 받아 줄게. 그리고 정말 화나지 않았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 얼굴 가리지 않아도 돼.”

    “으…… 가, 감사합니다…….”

    “괜찮아. 살다 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각자 숨기는 것도 있는 법이야.”

    그야 그렇지만, 다른 이도 아닌 카르젠의 입에서 저런 대답이 나오다니, 놀란 이비가 무의식중에 손을 떼고 동그래진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응? 뭐지? 설마 진짜 카르젠이 아니라, 꿈속의 카르젠인가? 허? 혹시 내 뇌가 만든 가상의 카르젠인 거 아냐?’

    카르젠은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이비에게 고개를 더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내 대답이 그렇게 놀라워?”

    황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이비는 상체를 조금 옆으로 빼 거리를 벌려 두고, 우물쭈물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 음, 네. 조금…… 솔직히, 가짜 카르젠 님이 아닐까 했어요…….”

    “왜 가짜라고 생각했어?”

    “그야…… 카르젠 님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니까요…… 알면서 모른 척 숨기는 사람도 엄청 싫어하시고…….”

    이비가 <숲의 마법사>를 통해 알게 된 카르젠은 그랬다. 그는 늘 진실했으며, 거짓말을 싫어하고, 특히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는 행위를 비겁하다 여겼다. 제 성격에 대해 꽤나 확신을 갖고 있는 이비의 대답을 들은 카르젠이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물었다.

    “흠. 이비가 왜 그렇게 확신하는지 궁금하네.”

    “어…… 왜냐하면요…….”

    “응.”

    “왜냐하면…… 음, 그게…….”

    이비가 웅얼웅얼 망설이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카르젠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이비는 오늘에야말로 카르젠에게 전부 다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으면서, 하나하나 운 떼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잔잔한 파도를 응시하던 이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괜찮아. 편하게 말해.”

    신기하게도 카르젠은 정말 괜찮아 보였다. 이비가 무엇을 말하든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 줄 것 같았다. 짧게 격려해 주고 저가 부담 갖지 않게 기다려 주는 다정한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걱정거리가 사르르 녹아내린 것을 느낀 이비가 어렵게 운을 뗐다.

    “책에서 읽었어요.”

    “책?”

    “네. 제가 살던 지구에서 읽은 책인데요. 제목은 ‘숲의 마법사’였어요. 책으로 리엔 님이랑 카르젠 님이랑 크리시랑 체스터 왕세자님이랑…… 유사랑……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책에서 읽었던 카르젠 님은 거짓말을 싫어한다고 해서…… 아니, 혐오한다고 해서…….”

    이비가 <숲의 마법사>를 언급하자 카르젠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리곤 이내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우리를 봤다면, 우리가 겪은 일, 그러니까 알려지지 않은 대륙에 도달했던 여정에 대해서도 읽은 거야?”

    제 선조들이 다크엘프들을 봉인한 대륙과 이계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들은 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젠은 흥미롭다는 듯이 이비를 살피며 물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그 전에 내가 숲의 마법사와 거래한 내용도 알고 있겠네?”

    이비는 카르젠이 혹시나 이 상황에 기분 나빠하거나, 충격받거나, 또는 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길까 봐 조심조심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카르젠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얼굴로 이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평온한 모습에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한 이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네. 체스터 왕세자님을 살리기 위해 거래하신 것도 알고 있어요. 예전에 축약해서 말씀해 주셨을 때, 이것도 모른 척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어. 누군가가 기록한 이야기를 읽었을 뿐이잖아?”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카르젠은 이 상황이 꽤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그나저나 책이라니, 재미있네. 책의 주인공은 누구였어?”

    “리엔 님이요.”

    “하긴. 그 여정을 다룬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리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순수한 인정을 들은 이비 역시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카르젠은 계속해서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나도 읽고 싶네. 그 책, 끝까지 봤어?”

    “네.”

    “그럼 미래의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어? 어려우면 이비의 건강이 좋아질 수 있는 정보라도 듣고 싶은데.”

    뜻밖의 질문에 놀란 이비는 잠시간 대답을 못 하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으며 대답했다.

    “어, 그게…… 미래는 저도 몰라요.”

    “왜?”

    “책 결말은 카르젠 님이 기사단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출가해 전쟁고아들과 난민들을 돕는 시점에서 끝나거든요. 제가 필리스에 온 시점이 책의 결말보다 1년 정도 지난 시점인 것 같았어요.”

    집중해 듣던 카르젠은 희미하게 씁쓸한 얼굴로 끄덕이며 안타까워했다.

    “그렇구나. 아쉽네. 이비의 건강 문제도 그렇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혹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했거든. 아, 이비의 잘못이 아니니 그런 얼굴 하지 마. 절대 이비를 탓하는 게 아냐.”

    이비는 당황한 그의 반응만 봐도 저가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있었다. 굳이 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침울함을 느꼈다. 원작 종료 후에 빙의한 터라 치트키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으니 훨씬 씁쓸했다.

    물론 카르젠의 말대로 이비의 탓이 아니고, 모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심지어 현시점도 저가 읽은 내용과 꽤 다른 부분이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런데 사실 책이랑 실제랑 조금 다른 부분도 있어요. 그래서 아마 미래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랑 많이 달랐을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이?”

    이비는 오늘 잠들기 전, 아리스에게 미리 허락을 구한 대로 아리스의 이야기를 했다. 원작에서 아리스가 어린 시절에 죽고,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이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리치에게 속아 넘어가 벌이는 끔찍한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리치가 끝까지 카르젠과 친구들을 괴롭히다 결국 지그하르트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잠시간 이비의 이야기에 집중한 카르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랬구나…… 사실 아리스는 아카데미에 편입하기 전에 몸이 굉장히 안 좋았어. 당시 의사가 오진해서 사망 판정을 내린 적이 있었을 정도야.”

    ‘오진은 아니고, 진짜 아리스는 그때 죽었겠지만…….’

    이비는 아리스가 빙의했다는 이야기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원작으로 읽었던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에 아리스를 공격한 게 혹시나 리치가 아닐까 추측 중이라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밝혔다. 전부 일리 있다며 끄덕이던 카르젠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전혀 없었어?”

    “네…… 정말 좋아했던 책이라 몇 번이나 읽었는데, 저 같은 엑스트라는 기억도 안 나요. 완전 이름도 안 나오는 마을 사람 아무개였나 봐요…….”

    “이비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마을 사람 아무개일 리가 없잖아.”

    ‘또, 또! 또 저런다! 또!’

    저 화법에 또 심장을 두드려 맞은 이비가 결국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카르젠은 귀와 목덜미가 발개져 웅크린 이비를 향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이비는 절대 마을 사람 아무개가 아니었을 거야. 책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년쯤 전에 끝났다고 했으니, 지금 시점의 이야기까지 있었다면, 이비와 나의 이야기도 나왔겠지.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까지.”

    “…….”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이비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딱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카르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비가 읽은 이후의 이야기가 쭉 이어졌다면, 예정대로 카르젠이라는 등장인물이 경계선 숲에 갔을 거고.”

    “…….”

    “거기서 우연히 이비라는 사람을 발견해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가는 장면도 나올 거야.”

    “…….”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알면서도 사정상 밝힐 수 없는 이비와 시간을 보내며 차츰 서로에 대해 알아 갔을 거고.”

    “…….”

    “이전까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던 등장인물 카르젠은, 이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이상할 정도로 편하게 느껴지겠지.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거야.”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려 보니 온종일 이비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간 멍하니 있던 이비는 카르젠의 말을 곡해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후…… 심장아, 진정해. 카르젠의 말은 들은 그대로 해석해야 해. 저 말은 한마디로 내가 신기하니 연구 대상쯤으로 여기고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일 거야.’

    ‘정신 차리고 보니, 온종일 너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다’는 말을 카르젠의 화법을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그 뜻을 오해하고 마음속으로 온갖 타악기를 연주하다 종국엔 그를 흠모하게 될 만한 말이었다.

    <숲의 마법사>에서 아카데미 시절에만 해도 숱하게 많은 이들을 홀리고 다녔던 카르젠이 아닌가. 성별과 종족에 관계없이 누구든 카르젠과 대화하고 나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 버렸다.

    물론, 같은 말을 카르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읊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지만…….

    ‘확실히 카르젠의 얼굴에 저런 화법은 위험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두근거리게 한다니까…… 하, 심장 떨려…….’

    이비의 떨리는 숨소리가 카르젠의 귀에 선명히 들렸다. 아니, 숨소리뿐만이 아니라 빨라진 심장 고동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카르젠은 이비의 붉어진 목덜미를 손가락 바깥 부분으로 스윽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이비의 몸이 눈에 띄게 흠칫 떨렸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잠시간 지켜본 카르젠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궁금하다. 이후에 등장인물 카르젠과 이비는 어떻게 됐을까? 이비가 진짜 보좌관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저택에서 이비에게 맞는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겨 다른 형태로 곁에 있을 수도 있고.”

    이비는 카르젠이 말한 가정들이 모두 자신이 카르젠의 곁에 남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내 무릎에 파묻은 고개를 들려는 찰나, 카르젠이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미래를 알 수 없어 확신하기 어렵지만, 내 생각엔 이비는 어떻게든 건강해져서 등장인물 카르젠과 오래오래 함께하는 내용이었을 것 같아.”

    ‘관계의 변화가 생겨 다른 형태로…… 오래오래 함께…….’

    카르젠의 말을 곱씹어 본 이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번지는 것을 보니, 그가 저를 향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빛을 마주하니, 예상대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카르젠이 보였다.

    입술을 말아 넣고 실눈 뜬 상태로 제 시야를 자극하는 빛과 마주하던 이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카르젠 님.”

    “응.”

    “제가요…… 제가 카르젠 님의 곁에 오래오래 있어도 될까요?”

    그가 직구로 말한다면, 저도 직구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이비의 가감 없는 질문을 들은 카르젠은 보다 해사한 미소를 띠며 끄덕였다.

    “당연하지.”

    “흡……!”

    눈부심이 한층 더 심해져 잠시 숨을 삼킨 이비는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제 마음에 간직해 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카르젠 님. 저… 보좌관 일도 물론 하고 싶지만… 그보다 카르젠 님과 조금 다른 관계도… 맺고 싶은데요…….”

    카르젠은 수줍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우물쭈물하면서도, 할 말은 솔직하게 다 하는 이비가 귀여워 실실 웃으며 물었다.

    “이비는 나와 어떤 관계를 원하는데?”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이비가 숨을 삼키더니 곧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 저, 저는 카르젠 님과…….”

    “응.”

    카르젠은 머뭇거리는 이비에게,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더 기울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이비의 거센 심장 소리가 카르젠의 귓가에 닿았다.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저러다 호흡 곤란으로 기절하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될 정도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던 이비는 결심한 듯이 카르젠을 향해 말했다.

    “카르젠 님과…… 치,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래. 나도 이비와…… 응? 지금…… 친구라고 했어?”

    “어…… 네…….”

    이비는 분명 저를 향해 함박 미소를 지으려던 카르젠이 일순 휘둥그레진 모습에, 저 역시 놀라 우물쭈물 변명하게 시작했다.

    “어, 그, 그게…… 카, 카르젠 님, 그러니까…… 어…… 전…….”

    뭐라 운을 떼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한 와중에, 카르젠의 뒤 바위 근처에서 작게 푸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평소 이비라면 누가 있나 두리번거릴 법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황당해하는 카르젠의 얼굴을 보고 놀란 탓에 주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비는 카르젠의 말문 막힌 모습을 보고, 혹시나 저가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해서 화난 거면 어쩌나 싶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아리, 아니. 어떤 분께 조언을 들었거든요…… 아무래도 몸이 안 좋으니까 보좌관 일을 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겠냐고…… 카르젠 님이랑 함께 지내고 싶다면, 보좌관 말고 그럴듯한 관계를 고민해 보라고…….”

    “…….”

    “그래서 만약 카르젠 님과 친구가 된다면,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열심히 설명해 봐도 당황한 표정을 쉽사리 지우지 못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저가 엄청나게 바보 같은 소리를 했나 보다 싶어 침울해졌다.

    ‘혹시 친구 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경우인 걸까? 그치만, 내가 후작가에 양자로 입양되면 나도 공자의 위치가 되는 거고, 백작가 공자 카르젠과 친구가 되는 게 불가능한 위치는 아니잖아?’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를 상실한 카르젠의 표정이 마치 명백한 거절로 느껴진 이비는 여기서 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딱 30초만 뒤로 돌리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며 거의 울상이 된 찰나, 표정을 갈무리한 카르젠이 제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친구, 친구라…….”

    “…….”

    “흠…… 함께 있기 위해 친구가 되고 싶다니, 어떤 의미로는 이것도 굉장한 발상인데.”

    “…….”

    놀란 마음을 겨우 추스른 카르젠이 이비를 살피자, 거의 울상이 되어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카르젠은 이비가 겁먹은 얼굴로 제 눈치를 보는 모습에 재차 당황했지만, 그 이유가 저가 보인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즉시 사과했다.

    “아, 이비. 나 때문에 놀랐구나. 미안해.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조금 놀라서 그랬어. 그러니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가 재까닥 해명하자 울기 직전이었던 이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치 살피는 모습에 카르젠이 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일단 친구라는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싶은데, 이비가 살던 별에서 친구는 어떤 관계야? 필리스에서 말하는 친구와 같은 관계인지 알고 싶어.”

    “아…….”

    저 질문을 듣고 나니 자신이 말실수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에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비가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잠시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10살 이후엔 쭉 병원에서 생활했다 보니, 저가 아는 친구 관계는 거의 쌍둥이 동생 현아를 통해서, 또는 영화, 소설, 드라마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비는 제 경험보단, 동생 현아에게 들은 간접적인 친구들과의 추억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음…… 친구는 일단 항상 곁에 있고요. 아니,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락도 주고받고, 자주 만나고요, 피치 못하게 멀어지면 가끔 서로를 생각하고요…….”

    “응.”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녀요.”

    “응.”

    “그리고 같이 영화도 자주…… 아, 여긴 영화가 없구나. 같이 공연 같은 걸 보기도 해요.”

    공연이라는 말에 카르젠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공연이라면, 필리스의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것 말이지?”

    “네, 그런 거요.”

    “루아인에서도 같아. 친구끼리 공연을 보기도 하거든.”

    루아인에서 연극이나 오페라를 단둘이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쨌든 간에 염문설이 생기는 것은 불가항력이었고, 불특정 다수의 이들에게 서로가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즉, 친구에서 다른 관계로 발전하기 위한 단계였지만, 친구끼리 본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그리고 또?”

    카르젠이 진지하게 묻는 모습을 보고 용기 얻은 이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음…… 또 같이 여행도 다녀요.”

    “여행 좋지. 여기도 똑같아.”

    루아인에서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란, 결혼 이야기를 끌어내기에 가장 좋은 행보였다. 보통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커플이 각자 가문에게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시위가 바로 둘만의 여행이었다. 보호자 없이 단둘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퍼진다면 어지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카르젠이 뭘 생각하는지 알 턱이 없는 이비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카르젠에게 상체를 살짝 가까이 기울이며 말했다.

    “어, 그리고 가끔 같이 자기도 해요. 각자 잠옷을 챙겨 가거나 그 친구 집에서 잠옷을 빌려 입고 자는 거예요.”

    “그렇구나. 같이 자는 건 우리도 이미 하고 있네.”

    “아! 그런데 조금 달라요. 밤새 같이 맛있는 것을 먹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면서 놀다 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 신나게 노는 거예요.”

    “완전 신나게?”

    “네. 전투에 나간 용병대장처럼요.”

    “?”

    ‘용병대장? 밤새 술을 마시고 소란스럽게 놀다가 테이블을 부수자는 뜻인가?’

    카르젠은 대체 뭘 하고 놀아야 저런 비유를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인 반면, 이비는 전생에 품었던 버킷리스트를 떠올리느라 들떠 있었다. 몸이 다 나아서 친구가 생긴다면 꼭 해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파자마 파티였다. 정확히는 친구 집에서 밤새 야식을 먹으며 열성적으로 노는 소박한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현아가 올린 파자마 파티 할리갈리 게임 동영상이 sns에 퍼져서 해외에서도 엄청 유명했었지. <남한의 여중생들의 전쟁 같은 할리갈리>라는 제목으로…… 대학생들이었지만.’

    이비는 저 동영상을 통해 현아와 친구들이 거의 용병대장급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라도 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카르젠이랑 크리시랑 아리스랑!’

    카르젠은 이비가 뭘 상상하든,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 차마 다른 내색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비는 나와 저걸 다 하고 싶다는 거지?”

    “네!”

    이비와 멀리 떨어져 있을 일은 없지만, 연락을 주고받고 싶다면 통신 수정을 하나 사 주면 될 일이었다. 또 가끔 서로를 생각하는 부분이야, 이미 종일 이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외에 둘이 공연도 보고. 함께 여행도 가고. 같이 자기 전에 용병대장처럼 노는 것도 이비가 건강해진다면 매일매일 해 줄 수 있었다. 하나하나 짚어 본 카르젠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비가 살았던 별에서 친구들이 하는 일은 여기서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비의 눈이 동그래진 것을 본 카르젠이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비의 방식대로, 친구부터 해 보자.”

    “!!!”

    카르젠의 시원한 대답을 들은 이비는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실눈을 뜬 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카르젠과 친구가 되다니!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어디선가 “아이고야……”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파도 소리에 묻혀 이비에겐 닿지 못했다.

    드디어(?) 카르젠과 친구가 된 이비가 해맑게 웃었다.

    카르젠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얼굴로 웃는 이비를 보고 있자니, 주변이 화사해진 느낌이 들어 작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네!”

    망설임 없이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카르젠은 이비가 저 작은 머리로 대체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앞으로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에 일단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으니…….’

    아리스야 제 저택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할 테니, 이비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해야 할 일을 상기하고 있으니, 옆에서 고개를 갸웃한 이비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젠 님은 별로 놀라지 않네요?”

    “놀라지 않다니?”

    “제가 다른 별에서 왔다는 거요. 놀랍지 않으세요? 아, 예전에 이계인을 만나서 그런가요?”

    이비가 숲의 마법사 최종장에 나왔던 이계인에 대해 언급하자, 카르젠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굉장히 놀랐는데.”

    “진짜요?”

    “응.”

    물론 카르젠이 놀랐다는 부분은 이비의 친구 신청이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놀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실제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낱낱이 기록되었다는 것도 퍽 신기했다.

    “그런데, 이비.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이비는 언제부터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처음 같이 밤에 산책했던 날부터요.”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는지, 이비의 입에서 바로 대답이 나왔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밤에 산책했던 날. 카르젠 역시 그 밤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별의 노래가 유독 맑게 울려 퍼지던 날이었다. 그 아름다운 밤에 천천히 정원을 산책하다 이비가 넘어질 뻔했던 순간을 떠올린 카르젠은 다시금 의아함을 느꼈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이 아닌, 온전히 저만을 담고 있던 이비의 눈동자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사랑에 빠졌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단순히 제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 카르젠은 자신에게 푹 빠진 이들의 넋 나간 얼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저를 바라봐 놓고 친구라니…… 제 감정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자각이 늦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기쁘다며 저리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긴, 이전 생에서 어려서부터 병원에서만 지냈다고 했지. 그럼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그 전에…….’

    어떠한 생각이 카르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 대번 진지해진 얼굴로 이비를 돌아봤다. 반사적으로 카르젠을 마주한 이비는 갑자기 저를 가늠하는 듯한 예리한 눈빛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말없이 이비를 뜯어보던 카르젠은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이비를 불렀다.

    “현서야.”

    “!”

    현서라고 부르니 눈에 띄게 놀란 이비가 바짝 긴장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를 살폈다. 카르젠 역시 이비 못지않게 긴장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이건 그냥 묻는 건데.”

    “네? 뭔데요?”

    “음…… 다른 뜻은 없고. 정말 의미 없이 묻는 거야.”

    “네! 물어보세요!”

    이비는 앞으로 카르젠에게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다는 결의가 담긴 얼굴로 아예 몸을 돌리고 앉았다. 마찬가지로 몸을 돌려 이비와 마주 앉은 카르젠은 망설이다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현서는 지금…… 혹시 몇 살이야?”

    “제가 살던 별에선 스무 살이었어요. 스무 살 겨울에 죽었거든요. 며칠만 더 살았으면 스물한 살이었을 텐데…….”

    스무 살이라는 말에 안도하려던 카르젠이 다시 긴장한 듯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이비가 살던 별에서 인간 기준으로 성년식은 지난 거야?”

    “네. 스무 살부터 성인이라고 보면 돼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모습에, 덩달아 긴장했던 이비 역시 안도하다 일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필리스에서도 친구끼리 나이를 따지나 싶어 불안해졌다.

    ‘어…… 잠깐. 카르젠이 몇 살이더라? 지금 20대 후반인가? 아니, 애초에 하프엘프니까 나이는 중요하지 않잖아? 설마 어리다고 친구 안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나이를 묻는 걸 보면, 아무래도 루아인에서 친구가 되는 데 나이가 장벽이 되는 게 분명하다 판단한 이비가 다급하게 카르젠의 팔뚝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카르젠 님!”

    “응?”

    “나이는 관계없어요!”

    “어?”

    “나이 차이가 나도, 친구 하는 데는 관계없어요!”

    “아…… 응. 그래. 그렇지…….”

    그답지 않게 다소 얼떨떨한 반응을 보고 불안해진 이비가 확답을 얻고자 집요하게 물었다.

    “우리 오늘부터 친구 맞죠?”

    “응. 그럼. 친구지. 우린 아주 특별한 친구가 될 거야. 루아인에서, 아니. 필리스에서 보기 드문 그런 각별한 사이.”

    “진짜죠? 무르기 없어요! 알았죠?”

    이비의 불안한 마음을 파악한 카르젠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대번 눈이 가늘어진 이비는 눈부셔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살폈다. 다행히 대충 넘기려고 하는 말 같진 않았기에 일단 끄덕였지만, 어쩐지 뒷 목이 싸한 기분이 들어 한참 동안 카르젠의 단단한 팔뚝을 놓지 않았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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