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9)
  • ### 챕터 10

    외출 전. 콜린의 동생 시엘라의 방에 방문한 케이는,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침대맡에 앉아 오늘의 계획을 줄줄 늘어놓았다.

    “전에 갔던 장난감 가게도 가고, 상점가 구경도 하고, 누님 겨울 로브도 사려고요!”

    큰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엘라는 얼마 전 아버지가 입양한 어린 동생 케이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고마워, 케이. 모처럼 날이 좋으니 콜린 오라버니와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렴.”

    “네! 누님, 다른 건 필요한 거 없어요? 드레스? 구두? 아니면 보석은요?”

    케이가 이것저것 물어도 시엘라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체스터 왕세자가 세비어 페일리 남작에게 어마어마한 상여를 내린 덕에 남작 가문도 이제 나름 부자 반열에 들었지만, 콜린도 그렇고 시엘라도 그렇고 어째 사치를 모르는 것처럼 살았다.

    “괜찮아. 체스터 왕세자님 덕분에 보석도 드레스도 이미 차고 넘친단다.”

    시엘라의 대답을 들은 케이는 짐짓 시무룩한 얼굴로 그건 체스터 왕세자가 선물로 준 것이지, 누님 취향은 아니지 않냐고 웅얼거렸다. 시엘라는 왕세자가 준 드레스나 보석 모두 귀하고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며 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히 필요한 건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나가서 재미있게 놀고 오렴.”

    “정말 필요한 거 없어요? 네? 네에에?”

    케이가 애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시엘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끄덕였다.

    “그럼 전에 케이가 사다 줬던 레몬 젤리가 좋겠구나.”

    “레몬 젤리! 꼭 사 올게요!”

    힘차게 끄덕인 케이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콜린은 시엘라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사락 쓸어 넘겨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 푹 쉬고 있어.”

    “응. 잘 다녀와.”

    인사를 나눈 콜린은 시엘라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레네스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프리스트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콜린 공자.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체스터가 세비어 남작에게 내린 상여는 저택과 온갖 보석과 사용인뿐이 아니었다. 에벨루스 신전의 고위 사제 레네스가 시엘라의 곁에 상주할 수 있도록 신전에 천문학적인 기부를 했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았다.

    레네스는 문 앞에서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흑요석같이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케이는 레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더니 곧 꾸벅 인사했다.

    “프리스트님. 누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레네스는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끄덕여 보였다.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 케이는 시엘라에게 다시 인사하고 콜린과 방을 나섰다.

    부집사가 미리 마부와 마차를 대기시켜 둔 덕분에 두 사람은 현관을 나서자마자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키자 헤실헤실 웃던 케이가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짧은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하…… 피곤하군.”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 주인님이 혹시나 진짜 어려진 게 아닐까 싶어 내심 걱정했습니다.”

    콜린이 놀리듯 말하자 케이의 미간이 확 찌그러졌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콜린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케이도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잘 알기에 더 성내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저녁에 크리시를 만난다고?”

    “예. 아마 카르젠 형님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체스터 왕세자가 이미 네 아비를 의심하는 것 같으니, 너도 떠보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 자리는 경계하는 게 좋겠다며 덧붙인 말에 콜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시 형님이나 카르젠 형님은 그저 제가 반가워서 만나자고 했을 겁니다. 오래 수도를 떠나 있었으니까요. 가볍게 저녁을 먹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케이가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나도 너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보고 싶구나.”

    “제 어디가 순수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콜린은 케이가 저런 식으로 순진한 아이 다루듯이 제게 말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케이에게 현혹된 아버지와 다르게, 저는 맨정신으로 그에게 산 사람을 바치고 있었다. 물론 죄질이 무거운 이들만 골라 바친다고 하지만, 그들의 죄를 저가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콜린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새삼 제 죄의 무게에 착잡함을 느꼈다. 울적한 기분 탓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며 입술을 깨물자,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기운이 꽉 다물린 입술을 매만졌다. 놀란 콜린이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리며 케이를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깨물지 마라. 피 난다.”

    “…….”

    “또 허튼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

    “말했지만. 이 모든 죄는 내가 가져갈 것이다. 넌 아무 걱정할 것 없다.”

    “…….”

    케이가 저렇게 말해 줄 때면, 콜린은 안도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비겁하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케이는 여전히 콜린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 목적을 이루면, 그땐 너와 네 아비의 모든 기억도 함께 가져갈 것이다. 그러니 넌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살면 돼.”

    “…….”

    콜린의 입술을 매만지던 보이지 않는 손길은, 그의 짧게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사라락 넘겨 준 후에야 떨어졌다.

    잠시간 케이를 바라보던 콜린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마차 벽에 고개를 대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양식의 건물과 깨끗하게 닦인 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점점 낡고 색이 바래거나 금이 간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달려 수도의 외곽 빈민가에서 내린 두 사람은 마부에게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다. 마부가 골목을 흘긋 살피곤 호위 없이 둘이 가도 괜찮으시겠냐며 걱정했지만, 콜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콜린의 해사한 미소를 본 마부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 끄덕였고, 케이는 콜린의 손을 잡고 골목 안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을 앞장서 걷던 케이는 여전히 콜린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가만 보면, 너도 얼굴을 잘 쓴단 말이지.”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콜린이 깔끔하게 인정하자, 케이는 여태껏 꼭 잡고 있던 콜린의 손을 패대기쳤다. 정수리 위에서 콜린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는 대꾸하는 대신 혀를 찼다. 하여간, 조금 봐줬다고 편하게 맞먹으려는 게 참 당돌했다.

    ‘그런데 밉지 않단 말이지. 그 점이 더 얄밉지만.’

    케이는 제 생각을 절대 육성으로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떠올렸다. 그렇게 한참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 깊이 들어간 둘은 쓰러져 가는 집 앞에서 멈췄다.

    똑똑.

    노크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초췌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케이와 콜린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고개를 조아렸다. 노인의 반응을 확인한 콜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다행히 손자가 무사히 돌아왔나 보군요.”

    그 말에 노인이 굵은 눈물을 후두둑후두둑 흘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예… 예… 나으리 덕분에… 손자 녀석을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노인이 감사하다며 흐느끼자 좁은 집구석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꼬마 아이가 기어 나왔다. 타박타박 걸어온 아이는 할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콜린과 케이를 멀뚱히 바라보다 꾸벅 인사했다. 노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의 없이 굴어 죄송하다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손자가… 그놈들에게 끌려가 많이 무서웠는지… 돌아와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나으리. 누추한 곳이라 면목 없습니다만…….”

    노인이 옆으로 비켜서자 케이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콜린 역시 케이를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낮인데도 집안은 어둑어둑했다. 좁고 지저분했지만,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인지 비교적 안정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딱 붙어 있었다. 케이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작은 손을 아이의 이마에 올리며 말했다.

    “꼬마야. 네가 가진 무서운 기억은 지워 주마.”

    “그, 그게 가능합니까?”

    노인이 놀라 물었지만, 케이는 대답 대신 소년에게 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순수한 검은 마력이 소년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소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작은 몸을 둘러싼 검은 마력은 은은한 빛을 내며 천천히 흐려졌다.

    마력이 소년의 몸에 흡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이마에서 새카만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노인은 저게 뭔지 몰라도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입을 틀어막았다.

    콜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노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는 콜린의 깨끗한 손이 제 어깨에 닿는 것만으로도 황송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의 작은 머리에서 뽑아낸 검은 연기를 흡수한 케이가 천천히 손을 거두자, 부스스 눈 뜬 소년이 노인을 불렀다.

    “……할아버지…….”

    손자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케이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콜린은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오열하는 노인에게, 깨끗한 손수건을 쥐여 주며 말했다.

    “모든 것은 안식의 신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감사 인사는 그분을 섬기고 기도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인은 끅끅 우느라 제대로 말하기가 힘든 와중에도, 앞으로 저가 죽는 날까지 평생 안식의 신을 믿고 섬기겠다고 맹세했다.

    ***

    보통의 손님이었다면 응접실에서 접대하겠지만, 카르젠의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늘 서재에 모이곤 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젠은 제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아리스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리엔을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크리시야 어려서부터 눕는 것을 좋아했다 쳐도, 리엔과 체스터는 아니었는데, 둘 다 어느 순간부터 제 서재에 들어오기만 하면 일단 소파에 눕고 봤다. 게다가 눕는 자세도 점점 크리시에 버금가게 편안해 보여 절로 웃음이 났다.

    ‘눕기 편하게 만든 소파라 그런가?’

    누가 들으면 생각 없이 웃어넘길 법한 이야기였지만, 카르젠의 저택 서재에 있는 소파는 실로 특별한 소파였다. 앉았을 때는 물론이고 누우면 웬만한 고급 침대보다 훨씬 편안했으며, 트롤이 소파에 올라가 방방 뛰어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기도 했다.

    이 특별한 소파는 드워프 장로 멀린이 긴 여정을 함께한 카르젠과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물론 이 저택도 멀린의 솜씨였지만, 건축 외에 멀린이 직접 제작한 가구는 서재에 둔 두 개의 소파와 책상 의자, 그리고 카르젠의 침대뿐이었다.

    카르젠은 제 허리 부근까지 오는 작은 키의 드워프가 다부진 몸으로 의자와 소파 팔걸이 지지대를 조각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팔걸이의 지지대부터 소파 다리까지, 덩굴처럼 수많은 나뭇잎을 직접 조각칼로 파며 새겨 주었었다. 왜 나뭇잎이냐 물었을 때 그는 숲에서 야영할 때면 카르젠이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버릇을 떠올리고 조각했다고 했었다.

    그 말 때문인지, 카르젠은 서재에서 생각에 잠길 때면, 늘 그가 새겨 준 나뭇잎 모양을 쓰다듬거나 매만지곤 했다. 손가락으로 새겨진 결을 따라 보듬으며 상념에 빠진 카르젠은 서재가 아닌 그들과 함께한 여정의 어느 날 밤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날 밤의 카르젠은 큰 바위 위에 앉아 옆구리쯤까지 드리운 작은 나뭇가지의 잎을 매만지고 있었다. 곁엔 묘족 장로 루가 앉아 곰방대를 물고 약초를 태우며 바위 바로 아래에서 대련 중인 리엔과 체스터를 관찰하고 있었다.

    바위 근처 모닥불 주변엔 담요를 대충 펴고 누운 크리시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곁엔 스튜를 끓이는 멀린과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지그하르트와 일라나드가 앉아 있었다. 유사는 언제나처럼 일라나드의 무릎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래서 엘카사트 쪽에선…… 카르. 듣고 있어?”

    “…….”

    “카르?”

    “아…….”

    바위 위에 앉아 모닥불을 둘러싼 일행들을 바라보던 카르젠은 순식간에 서재로 돌아왔다. 리엔은 여전히 아리스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카르젠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피곤해?”

    “아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미안.”

    “어쩐지 멍하더라니~ 어디까지 들었어?”

    “엘카사트에서 사절단이 겨울 전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까지.”

    “오, 그래도 다 들었네. 하여튼 엘카사트 측에서 체스터가 어떻게 나올지 간 보려는 것 같아. 그리고 마르카 건도 터치하려는 것 같고.”

    마르카의 어린 공주들을 루아인 왕실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제국 측에도 퍼졌을 테니,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르카의 마지막 왕족인 만큼, 적어도 의탁할 곳은 공주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며 제국으로 회유하려는 수가 뻔히 보였다.

    “일단, 사절단이 와 있는 동안엔 나도 성에 머무는 게 좋겠네.”

    “응. 물론 당장 복직하라는 건 아냐. 그저 사절단이 머무는 동안만 체스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곁을 지켜야지. 그런데, 아르카라스 대신전 쪽은 안 오고 제국 사절단만 오는 거야? 성녀는?”

    “일단 공식적으로 연락하긴 했는데, 신전에서 성녀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행사를 다 취소하고 있는 상황이더라고. 대외적으로는 성녀의 건강 문제라고 하는데, 뭔가 구린내가 나.”

    “지들이 성녀 건강에 문제를 만드는 중인 건 아닐까?”

    아리스가 툭 던진 말에 리엔과 카르젠이 동시에 실소했다. 아직 사실 유무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엘카사트 제국 내에서 성녀가 루아인으로 망명을 희망한다는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퍼진 상태였다. 공식적인 확인 요청에 대신전이 답을 제대로 주지 않고 있으니, 비공식적으로 조사 중일 터라 기다리면 답이 나오겠지만, 잠시간 최근 정세를 곱씹어 본 카르젠은 고개를 갸웃하며 운을 뗐다.

    “그런데 왜일까?”

    “뭐가? 루아인으로 오려는 거? 아니면 체스를 콕 찍어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

    “둘 다. 성녀가 굳이 ‘망명’ 목적으로 국교가 없는 루아인에 오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잠시간 둘의 대화를 듣던 아리스는 자신의 이전 삶의 경험을 생각하며 눈을 내리떴다. 특수 부대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티어 팀에 몸담고 있던 아리스는, 인질 구출이나 적국의 주요 인물 중 조국을 위협하는 자들을 생포, 사살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망명을 돕는 기밀 작전에 투입된 적도 더러 있었다.

    돈, 명예, 지위, 어느 하나 부족할 것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제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미국으로 망명을 갈구한 이들의 목적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살고 싶어서가 아닐까?”

    나지막하게 들려온 말에, 카르젠과 리엔이 동시에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소문을 성녀가 직접 흘린 게 맞다면, 안전하지 못한데다가 한시가 급한 상황이겠지. 기준은 모르겠지만, 성녀 입장에선 여기가 그나마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거고. 체스를 콕 찍어 만나고 싶다는 걸 보면, 왕실과 거래를 제안할 만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

    “나도 아리스의 말에 동감하지만, 사실 유무를 확인하기 전까지 성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시국이 이 지경이니…….”

    그렇게 대답한 리엔은 “성녀에겐 미안한 소리지만.”이라고 작게 덧붙였다. 자국 내 문제만 해도 당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랐다. 그런 상황에 확실하지 않은 정보로 섣불리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아리스도 리엔의 의견에 동의하고 넘겼겠지만, 뭔가 찜찜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성녀가 굳이 다른 국가가 아닌, 루아인으로 오고 싶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왜 체스터를 만나야 한다고 했을까. 만약……

    “그런데, 리엔. 만약 성녀가 신탁을 받은 거면?”

    “신탁?”

    “성녀가 만약 신탁을 받았는데, 그 신탁이 제국에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루아인에서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인 경우는?”

    아리스의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음에, 카르젠이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 말했다.

    “아리스. 성녀가 닥칠 재앙에 관한 신탁을 받았다면, 그건 숨길 수 없어.”

    “성녀가 신전에 숨길 수도 있잖아?”

    성녀도 인간이니, 제 안위가 달려 있다면 신탁을 숨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추론이었으나, 이번엔 리엔이 부정했다.

    “카르 말이 맞아. 재앙을 알리는 신탁이 내려오면 신탁의 내용은 몰라도, 신탁이 내려왔다는 건 모든 신전의 대신관들이 알게 돼. 태양신 아르카라스 교단뿐만 아니라, 에벨루스나 칼리아르나 루이사나 할탄의 대신관도 알 수 있어.”

    대륙을 위협할 대재앙 관련 신탁이 내려올 경우, 모든 초월신의 대신관들이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리스도 알고 있었다.

    ‘내 말은, 신들이 싸지른 똥을 성녀한테만 말해서 은밀하게 처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였지만…….’

    굳이 이전 삶에 비유해 보자면, 신은 국가, 신탁은 일급 기밀 작전, 성녀는 국가 비밀 요원이나 티어 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리스는 차마 이 둘에게 초월신이라는 존재들이 생각보다 허접한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기에, 몰랐던 척하며 끄덕였다.

    이후 셋의 대화 주제는 성녀 이야기에서 북부 영지의 새로 심은 개량 작물 이야기, 동부 마수 토벌 출정 이야기 등으로 휙휙 바뀌었다. 그리고, 리엔은 내내 망설였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아리스. 마력 분석가가 네 망토에 남은 잔존 마력을 확인 중인데, 아직은 명확하게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 상태야. 뭐라도 확실히 알게 되면 바로 알려 줄게. 미안해…….”

    “리엔, 사과할 거 없어. 네 잘못이 아니잖아. 난 괜찮아. 친구들 잘 둔 덕분에 안전한 곳에서 놀고먹는 것도 최고야.”

    사뭇 태평한 반응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리엔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친구가 웬 정체 모를 마법사에게 공격당했는데, 그 마법사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했다.

    아리스를 습격했을 당시 망토에 직접적인 흠집을 낸 데다가, 화이트드래곤의 보호 마법이 발동하며 반격을 받았을 텐데, 즉사하지 않고 도망친 것만 봐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즉, 마법사들이 등급 시험을 치를 때 측정하는 레벨 단위인 서클로 치자면, 8서클을 넘어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법사 길드도 발칵 뒤집혔다. 필리스 전 대륙을 통틀어 현존하는 8서클 마법사는 숲 엘프의 수장 길리언이 유일했다. 아주 오래전, 드래곤을 제외하고 대마법사라 불렸던 9서클 마법사가 있었으나, 그가 어느 순간 필리스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 9서클 마법사는 화이트드래곤 엘리시드와 레드드래곤 오르펜이 전부였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초월자로 알려진 10서클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와 드래곤 로드였지만, 저 둘은 자신들이 10서클에 도달했다는 것은 부정했다. 굳이 너희 인간들이 나눈 잣대로 기준을 재 보자면 저들은 대략 9.49 정도의 수준이라며 애매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결국 금일 오전. 마력 분석가는 잔존 마력 분석 불가 판정을 내리고, 숲 엘프의 왕 길리언이나 드래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린 터였다. 문제는 숲 엘프의 왕 길리언과 드래곤 로드는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거였다. 화이트드래곤은 수면기였고, 레드드래곤은 어딘가에서 유희 중일 터였다.

    저들과 우정을 나눈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는 꽤 오래 연락 두절 상태였는데, 지그하르트가 주변인들에게 알리지 않고 수면기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한다는 왕실 마법사의 조언에 체스터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서류 업무에 시달리는 중이었지만.

    리엔의 복잡한 생각을 들으며 상황 파악을 마친 아리스가 여상스럽게 말을 돌렸다.

    “난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리엔. 다른 좋은 소식은 없어?”

    “좋은 일은 없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만 많아. 기사단 녀석들 전부 카르가 복귀하거나 아니면 이참에 결혼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 정도? 뭐 카르의 결혼을 핑계로 새 예복이나 맞추려는 생각이겠지만.”

    “흐음…… 내 결혼이라.”

    결혼이라는 단어를 곱씹더니, 어째 부정하지 않고 묘하게 웃는 카르젠을 본 리엔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뭐냐?”

    “응? 뭐가?”

    “‘뭐가?’가 아니라, 너 왜 부정 안 해? 설마 결혼 생각 있어?”

    그동안 체스터나 마이어나 크리시 등 다른 이들이 이비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카르젠이 보인 반응은 ‘손님일 뿐이다.’ ‘사정이 있어 내가 잠시 보호하는 사람이다.’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 오히려 내가 신세 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이제 내 보좌관이 되었다.’ 정도였다.

    늘 일정 선을 그으며 대답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저런 재미없고 건조한 반응을 예상하고 꺼낸 말이었건만, 카르젠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웃기만 했다. 그간 들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어쩐지 울컥한 리엔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뭐야? 어? 야! 안 돼! 난 너 ‘결혼 안 한다’에 걸었단 말이야! 뭐야? 아리스 넌 왜 웃어? 설마 넌 알고 있었어?”

    “진정해. 리엔. 결혼이라는 게 카르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대체 얼마나 건 거야?”

    “돈이야 얼마 안 걸었지만…….”

    ‘많이도 걸었구먼.’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리엔을 잠시간 바라본 아리스가 픽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리엔이 내기는 가볍게 즐길 만큼만 해야 좋다는 교훈을 이렇게 몸소 얻었네.”

    “아니, 아리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 저 녀석 얼굴 좀 봐. 쟤 옛날부터 저렇게 웃고 나면 꼭 엄청난 사고를 쳤잖아.”

    리엔은 카르젠이 어려서부터 점잖은 척은 혼자 다 하고, 늘 제일 큰 사고를 치고 다녔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물었다.

    “카르. 너 진짜 결혼 생각 있어? 아니, 이건 내기 때문에 묻는 게 아니라, 야! 어떻게 나한테도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아리스는 늘 생각했던 부분이지만, 리엔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며 추궁하는데도 점잖게 웃기만 하는 카르젠이 꽤 짓궂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피식거렸다. 리엔은 여전히 혼란해하며 내심 섭섭해하고 있었고,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고 판단한 카르젠은 그런 게 아니라며 차분하게 운을 뗐다.

    “하하하. 리엔, 진정해. 아리스의 말대로,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카르젠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

    시간이 훌쩍 지나, 벌써 점심 식사를 앞둔 이비는 옷을 고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라면 집에만 있으면서 굳이 옷을 갈아입지 않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잘 차려입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리엔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너무 편하게 입고 나간 것 같아…….’

    갑작스러운 패닉에 빠졌다가 아리스의 도움으로 정신 차린 이비는, 넌 뭘 입어도 귀여우니까 괜찮다는 말만 믿고 그대로 나간 것을 조금 후회했다. 유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와 거울은 보니, 부족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비교적 수수한 차림으로 리엔을 맞이한 것 같아 괜히 신경 쓰였다.

    그런 이비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주디와 율리에게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했을 때, 둘은 평소보다 훨씬 의욕적인 모습으로 아직 뜯지도 않은 새 옷상자를 잔뜩 가져왔다. 양이 너무 많아 율리와 주디만으로 부족해 할리스와 다른 사용인들까지 동원해 들고 온 상자는 총 14개였는데, 전부 카르젠이 이비를 위해 주문한 간절기 옷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내 옷이야? 앞으로 성에 자주 방문해야 해서 많이 필요한가 봐…….’

    저도 모르고 있던 새 옷의 존재만으로도 놀랐는데, 이비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모든 상자마다 예쁜 필기체로 적힌 디자이너의 이름과 이비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이비의 이름은 무려 반짝이는 황금 잉크로 쓰여 있었다. 금으로 쓰인 제 이름을 보고 입을 쩍 벌린 이비가 귀여웠는지, 다가온 주디가 상자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멜리사 디자이너는 체스터 왕세자님 전속 디자이너로 유명한 분이세요. 수도 유행의 선두 주자인데, 따지고 보면 수도에서 유행이 전국적으로 퍼지니, 루아인의 모든 유행이 멜리사의 손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요.”

    이비가 끄덕이자, 이번엔 율리가 다른 상자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전부 도련님께서 직접 고른 옷들이랍니다. 디자인도 이비 님 체형에 맞게 조금씩 바꿔서 주문하신 거예요.”

    “!”

    율리와 주디와 사용인들이 열심히 상자 뚜껑을 열어 잘 포개 놓고 늘어놓은 옷은 전부 고급스럽고 예뻤다. 편안해 보이는 잠옷도 있었고, 평소 저택에서 입거나 가볍게 외출할 때 입기 좋은 심플한 일상복도 있었다. 그 외에 화려한 연회복도 있었고, 포인트를 잘 잡아 은근히 화려하면서 과하지 않게 절제된 디자인의 외출복까지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었다.

    게다가 이 의상들은 전부 기성복이 아닌, 이비 체형에 꼭 맞게 만든 옷이었다. 덕분에 모든 바지와 기장이 긴 셔츠나 원피스 잠옷 허리 부근엔 작은 트임과 여밈 단추가 따로 있어, 꼬리를 꺼내거나 넣었을 때 편하게끔 제작되어 있었다.

    ‘으음…… 이런 셔츠는 집에서 입기엔 화려한가?’

    이비는 외출복임이 분명한 옷이었지만, 유독 시선이 가는 셔츠를 보며 고민했다. 벚꽃처럼 은은한 연분홍빛 셔츠는 실크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며 하늘거렸다. 소매나 트임 마감 부분은 전부 은은한 은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고, 가슴 트임 부분엔 후크로 거는 고리 장식이 둥글게 세공된 에메랄드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비의 시선 끝에 머문 옷을 확인한 율리가 셔츠를 들고 다가와 가까이 보여 주며 말했다.

    “와! 이찌, 이찌, 이비! 그 옷 이뿐 거 같아!”

    “이 셔츠엔 이 바지가 어울릴 것 같아요.”

    율리와 유사에게 인정받은 옷을 본 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도 다시 빗어 드릴게요! 이번엔 이비 님이 좋아하시는 상큼한 향의 향유를 가져왔어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입술이랑 손 관리만 빠르게 해 드릴게요!”

    끄덕끄덕.

    평소라면 율리나 주디의 시중을 받는 게 민망하고 부담스러웠겠지만, 오늘은 둘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옷을 고르자마자 얌전히 거울 앞으로 끌려갔다.

    ‘아까보단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필리스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이비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그와 별개로 리엔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아리스와 열심히 연습해 놓고, 카르젠이 맞잡은 손을 놓지 않는 바람에 리엔에게 첫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리엔은 카르젠과 친하니까 너그럽게 넘어간 거겠지만…… 어쨌든 리엔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싶어.’

    리엔은 저를 전혀 모르겠지만, <숲의 마법사>를 통해 그녀의 유년 시절부터 소드마스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다 지켜본 이비는 리엔이 마치 제 오랜 동료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비의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이었지만, 동경하던 리엔을 직접 만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와 주디는 아리스를 맞이한 날보다 훨씬 더 공들여 이비를 치장해 주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비를 식당으로 에스코트하기 위해 데리러 온 카르젠이 보고 놀랄 정도로.

    “이비. 혹시 또 나만 두고 외출하는 거 아니지?”

    “…….”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짐짓 진지한 말투에 당황해 아니라고 의사를 표현하려던 이비는, 그가 잔잔히 미소 짓는 얼굴에 눈부셔 시선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카르젠 진짜아…… 진담인 줄 알았네. 으음…… 확실히 조금 과하게 꾸민 것 같긴 하지만…….’

    물론 이비의 기준으로 평소보다 과하다는 의미지, 다른 귀족 공자들처럼 작정하고 꾸민 건 절대 아니었다. 이비는 그저 새 옷을 입고, 머리를 다시 빗고 향유도 조금 바르고, 손과 입술을 부드럽게 해 주는 크림을 발랐을 뿐이었다. 거기에 카르젠이 선물로 준 새 구두와 에메랄드 커프스를 착용하긴 했지만. 수줍어하는 이비를 지켜보던 유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카르! 이비 옷 유사가 골라 줘떠!”

    엄밀히 말하면, 율리와 주디가 골라 준 옷에 맞장구쳐 준 것이었지만, 이비는 격하게 끄덕이며 유사의 공을 인정했다.

    “그리구, 이거! 이것두 유사가 하자구 해떠! 같은 녹색이니까!”

    유사가 이비의 소매에 커프스를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셔츠에 후크 장식이 에메랄드니 커프스도 같은 색으로 하자고 했다는 말에 카르젠 역시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 골랐다. 유사가 안목이 좋네.”

    “그치? 엣헴!”

    칭찬을 들은 유사는 허리에 손을 착 올리고 배를 내밀며 크게 끄덕였다. 카르젠은 저 귀여운 아기 여우를 한 팔로 안아 들고, 다른 팔을 이비에게 내밀며 말했다.

    “전부 이비를 생각하며 주문한 것들인데, 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으면서 감미롭게 들린 탓인지, 가슴께가 간질거려 수줍게 미소 지은 이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퍼뜩 정신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젠 님, 고맙습니다.]

    입술로 인사한 후, 자연스럽게 카르젠의 팔을 살포시 잡았다. 카르젠의 품에 안겨 있던 유사는 얼굴이 붉어진 이비를 보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평소라면 “이비, 얼굴이 빨개져떠!”라며 사실을 고할 법도 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조용히 이비와 카르젠을 구경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복도 모퉁이 부근에 서 있던 리엔과 아리스 역시 유사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같이 식당으로 이동하려고 다가가려다 멈칫한 리엔이 아리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멜리사 의상실에서 주문했다고?”

    “응.”

    “네게 내정 관리도 배우기 시작했고?”

    그 물음에 아리스가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정 관리는 아직 시작 안 했어. 내일이나 모레부터 수업해 볼까 해.”

    “저 사람, 보통 보좌관은 내정 관리를 맡지 않는다는 거…… 아니, 애초에 저택 내정 관리를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어?”

    루아인에서 출가해 독립한 귀족 자제의 경우, 내정 관리는 본인이 직접 하거나, 집사가 맡게 된다. 그 외의 사람이 맡게 된다면 주로 약혼 관계이거나, 배우자가 맡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리엔의 질문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는 아리스가 씩 웃으며 소곤소곤 대답했다.

    “아니. 전혀 몰라. 카르가 딱히 설명한 것 같진 않더라고. 그래서 이비가 스스로 눈치챌 때까지 조용히 하려고. 재미있겠지?”

    짓궂은 대답에 리엔 역시 씨익 웃으며 아리스의 어깨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중에 눈치채면 반응 어땠는지 들려줘.”

    ***

    쏴아- 촤아아-

    규칙적인 잔잔한 파도 소리에 눈뜬 이비의 시야에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정말이지 필리스의 밤하늘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가까이에는 푸른 달이, 저 멀리 붉은 달이 보였고, 그 둘 사이를 잇는 별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아무리 신이라도 저 많은 별은 다 세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작게 웃던 이비는 순간 정신이 들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 뭐야?”

    육성으로 나오는 제 목소리에 꿈이라는 것을 파악한 이비는 이 상황에 의아함을 느꼈다. 카르젠과 리엔과 유사와 아리스와 한국식 양념 소갈비를 먹었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 저가 언제 잠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밥을 먹던 도중 살짝 어지럽고, 몸이 조금 안 좋다고 느끼긴 했지만…….

    ‘……설마 밥 먹다가 잠든 거야? 그게 말이 돼?’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꿈인 것을 확인한 이비는 가장 먼저 제 손을 봤다. 마르고 군데군데 멍과 주사 바늘 자국이 많은 김현서의 손이었다. 소매를 보니 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카르젠 님?”

    소리 내어 불러 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크리시?”

    역시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천천히 일어난 이비는 엉덩이에 모래를 털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저 외에 다른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 잠든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 해도, 마치 누군가 괜찮다는 듯이 저를 보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고, 무엇이든 다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이고 평온한 기운이 이비의 몸을 감싸 안는 듯했다. 이비는 언젠가 이런 기운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갸웃하다 곧 떠올려 냈다.

    ‘똥똥한 고양이가 나왔던 꿈…….’

    토실토실 동그란 고양이가 나왔던 꿈. 그때도 분명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아주 따뜻하고, 자신을 매우 사랑해 주는 절대적인 보호자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온함을…… 그때처럼 마음이 편해진 이비는 태평하게 바다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새카맣게 펼쳐진 바다는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거울에 반사한 것처럼 빛을 품고 있었는데,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아 하나의 우주처럼 보였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바다를 보고 있자니, 무섭게만 느껴졌던 물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수영은 못 하지만…….’

    천천히 바다로 다가간 이비는 파도가 쓸고 지나간 젖은 자리를 밟고 섰다. 축축한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각은 전혀 꿈 같지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자 촤아아아- 파도가 이비의 발목을 간질이며 밀려왔다가 다시 쏴아아아아- 빠져나갔다.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웃던 이비는, 문득 형의 손을 잡고 수영했던 날이 떠올랐다. 절대 놓지 말라고 울먹이던 제 손을 꼭 잡은 형은, 놓지 않을 테니 몸에 힘을 빼라며 웃곤 했었다.

    ‘형은 수영을 잘했던 것 같은데…….’

    이비는 김현서였을 적에도 형을 자주 생각하긴 했지만, 필리스에 와서는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형과 함께 나눴던 추억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너무 사랑스러운 기억이었지만, 너무도 짧은 기억뿐이었고, 그나마도 점점 흐려졌다.

    형이 실종되었을 당시 김현서는 10살이었다. 점점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이비는 김현서의 기억을 조금도 잊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잊어버리기엔 너무 소중한 기억이었다.

    ‘꿈 수정이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꿈 수정에 대해 떠올린 순간, 다시 밀려온 파도가 이비의 발목을 적셨다.

    ‘제주도 여행만 기억나지 않아. 다시 보고 싶은데, 카르젠이 반대하겠지?’

    카르젠에게 미리 말하고 누군가 자신을 깨워 준다면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놀라고 걱정했던가. 또 그날 일로 카르젠과 크리시는 전이도 거두지 못하고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이비는 수정에 대한 생각은 지우기로 했다.

    ‘운 좋으면 언젠가 갑자기 기억이 날 수도 있고.’

    나름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할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이 꿈이군.”

    “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서자, 한 남자가 보였다. 이비는 그 남자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굳어 버렸다. 저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은 남자였다. 물론, 자신이 아는 사진 속의 그 사람보다 나이는 훨씬 많아 보였지만, 분명 닮은 얼굴이었다.

    키가 훤칠한 미남은 카르젠처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프의 머리카락과는 확연히 다른 인간의 머리카락이라는 게 느껴졌다. 깔끔하게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갑자기 불어온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이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그가 걸친 옷을 살폈다. 이곳 루아인이나 저가 아는 서대륙의 복식이 아니었다. 어쩐지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옷이었지만, 한복이나 일본, 중국의 전통 의상처럼 지구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바닷바람에 품이 큰 소매가 바람에 하늘하늘 펄럭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처연한 미남인 그는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눈앞의 남자를 마주한 이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불렀다.

    “……형?”

    형이냐는 물음에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픽 웃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뾰족한 말투로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이딴 짓거리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응?”

    “소용없으니 괜히 힘 빼지 말라는 소리야. 내 소원은 변함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

    “……요?”

    대번 살벌해진 눈빛에 슬쩍 ‘요’를 붙인 이비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지만, 이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꿈은 카르젠과 크리시와 함께 만났을 때처럼, 신이 주선해 준 꿈이 아닌 것 같다고, 형을 너무 그리워해서 제 뇌가 보여 주는 선명한 자각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어쩌면, 형을 기억하지 못하고 슬퍼하는 저에게 신이 자비를 베풀어 형의 얼굴을 보여 주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간에, 상대가 17살에 헤어져서, 27살쯤이 된 형의 모습이라는 것을 확신한 이비는 여기가 꿈이라도 상관없이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다.

    “역시 현우 형 맞지? 와, 이거 신기한 꿈이다. 내 뇌가 엄청 노력했나 봐. 안 그래도 형 생각하고 있었어.”

    “…….”

    “형은 지금쯤이면 이런 얼굴이겠구나…….”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대답 대신 묘한 시선으로 이비를 살피기 시작했다.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여긴 사진도 없으니까…….”

    “…….”

    남자가 불편한 얼굴로 이비를 살폈지만, 이비는 그가 제 형 ‘김현우’라고 확신하고 계속 형이라고 불렀다.

    “사진이라도 간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핸드폰이라도 가져올 수 있으면…… 아, 여긴 그런 장치는 없나? 영상 수정도 있는 세계니까, 분명 있을 텐데…….”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는데, 이비는 그가 차라리 저를 노려보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퍼 보이는 얼굴이네…… 무슨 꿈이 이래? 난 형이 슬퍼하는 모습 따위 보기 싫은데. 내 뇌야, 힘내 봐.’

    이비는 그가 제게 가까이 다가와도 피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천천히 제 앞에 다가온 남자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몸이 조금 굳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함 역시 느꼈다. 체온도 느껴지는 꿈이라니,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선명한 자각몽은 왜 지구에서 살 때는 한 번도 꾸지 못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형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늘 소원했던 대로, 그동안 매일매일 혼자 후회했던 만큼 이비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형, 이건 다 꿈이지만…… 내가…… 그날 내가 형 밉다고 해서 미안해.”

    “…….”

    “솔직히 그때 나 하나도 안 속상했어. 아니, 솔직히 조금 속상했는데, 형이 미안하다고 해서 바로 다 풀렸었어. 근데 형이 나만 신경 써 주고 걱정해 주니까…… 그게 좋아서 계속 화난 척하고 그랬어…….”

    “…….”

    “나 형 하나도 안 미워. 형 진짜 진짜 사랑해. 꿈 말고 진짜 형에게 말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말에 남자의 굳었던 몸이 조금 풀어지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이비의 등을 당겨 안았다. 이비는 이 꿈이 참 좋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남자가 제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그의 체향은 너무도 그리운 향이어서,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고였다.

    이후로도 이비는 꽉 메인 목소리로 드문드문 말을 이어 나갔다.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울먹이며 내뱉는 말은 두서없었지만, 혹시나 상대가 듣지 못할까 봐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하나도 밉지 않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내 사과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이비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나 형 생각 많이 했어…… 형이 너무 보고 싶어…….”

    등을 도닥이던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그리곤 저를 안고 있는 이비의 어깨를 잡아 살짝 떨어뜨려 세웠다. 힘없이 팔을 푼 이비는 흐느끼며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이비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인 탓에 이비의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꿈이라도 좋으니, 겨우 만난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탓에 숨이 차올랐다. 흐느끼며 딸꾹질까지 하게 될쯤이 되자, 남자가 이비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래. 그쪽 시간선에서는 벌써 이 정도로 많이 컸겠구나. 어차피 다 꿈이고 부질없지만…… 그래도 장난은 여기까지 해.”

    “……무슨 장난?”

    흐느끼며 묻자, 남자는 이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흐르는 눈물을 느릿하게 닦아 주며 말했다.

    “당신은 참 잔인한 악몽 같아. 어떤 날은 아직 어린 너를 보여 주고.”

    “…….”

    “오늘은 이렇게 네가 자란 모습을 보여 주고.”

    말하다 멈춘 남자가 괴로운 듯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지 말라고, 피 나겠다고 말하려던 이비는 목이 잔뜩 메어 와 말 대신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보듬었다. 그러자 입술을 달싹인 그가 괴로움에 젖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 하루도.”

    “…….”

    “단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어.”

    “…….”

    “하지만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건 칼리아르 당신이 아니야. 그러니 이제 그 모습으로 날 설득하려는 짓거리는 그만둬.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는 당신들의 자리에 올라갈 거야.”

    ‘어? 잠깐. 칼리아르?’

    방금까지 남자가 하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던 이비는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의 이름을 듣고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것도 내 뇌에서 나온 말인가? 하는 생각과, 설마 자각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섞여 혼란한 와중에, 이비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볼을 보듬었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뺨에 손이 닿자, 더는 이걸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후두둑후두둑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만히 내버려 둔 이비가 설마설마하는 기분으로 입을 연 순간, 남자가 먼저 말했다.

    “그리고 난 돌아갈 거야.”

    쏴아아아- 파도가 두 사람의 다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에 정신 차린 이비가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물었다.

    “현우 형? 돌아간다니? 어디로?”

    이비의 부름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비는 겁먹지 않고 말했다.

    “현우 형 맞아? 이거 꿈 아니야? 설마 진짜 형이야?”

    “…….”

    “형, 칼리아르라고…… 방금…… 필리스의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 말한 거 맞아?”

    그러자 이번엔 남자의 눈이 커졌다. 이비는 남자를 향해 매달리다시피 옷을 꽉 잡아 쥐며 말했다.

    “형! 현우 형! 이거 꿈 아니야? 진짜 형이야? 형 지금 필리스에 있어!? 필리스 어디에 있어? 동대륙에 있는 거야? 이 옷은 어느 나라 옷이야? 내가, 내가 어떻게든 찾아갈게! 형 지금 어디에 있어?”

    “잠깐…… 뭐야 이거? 이딴 장난치지 마.”

    그는 이비가 한 말의 뜻을 마치 이제야 이해한 사람처럼 크게 동요하는 얼굴로 이비의 어깨를 밀어내려다 말고 꽉 잡았다. 혼란해하는 그의 반응을 확인한 이비는, 지금 뇌가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이지를 가진 인격체와 대화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급하게 외쳤다.

    “형! 나 현서야! 현서라고!”

    “너…… 너, 진짜…….”

    남자의 눈동자가 떨리는 게 보였다. 그가 무어라 더 물으려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그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비는 본능적으로 그가 제 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역시 다가오는 단절을 느꼈는지 제 어깨를 붙든 이비의 손을 꽉 잡고 다급하게 외쳐 물었다.

    “내가, 내가 갈게! 현서 너 지금 어디에 있어!?”

    “루아인 왕국 수도 아브델에 있어! 바이스 카르…… 형!? 형!!!”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제 손을 꽉 잡은 악력이 사라졌다. 기댈 곳이 사라져 중심을 잃고 앞으로 털퍼덕 넘어진 이비는 젖은 모래 위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

    “주인님!”

    “!!!”

    누군가 거칠게 제 몸을 잡고 흔들어 댄 탓에, 억눌렸던 숨을 터뜨린 케이가 눈을 번쩍 떴다.

    “헉, 허억…… 헉…….”

    벌떡 일어나 앉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두리번거린 케이는 밤바다가 아닌, 마차 의자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허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꿈이었는데, 평소와 다른 꿈이었다. 분명 다른 꿈이었는데, 깨 버렸다. 깨선 안 됐는데. 더 들었어야 했는데……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온갖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호흡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 정말 놀랐습니다.”

    “…….”

    콜린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케이를 살피며 연신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케이는 그런 콜린에게 대답 대신 손을 내저은 후, 제 이마를 짚었다. 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고 일어나 앉아 창밖을 살폈다. 푸른 하늘이 옅은 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늦은 오후쯤인 것 같았다.

    소탕한 노예상들에게 납치당했던 빈민가 아이들의 집을 순회하던 도중에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제 의식을 신에게 머리채 잡히다시피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을 파악한 케이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다 죽어 가는 노인네 행색이더니, 초월신은 초월신이라는 건가…….”

    씨근거리고 있으니,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콜린이 손수건으로 땀이 흥건한 케이의 이마를 닦아 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소란 피울 것 없다.”

    뒤늦게 괜찮다고 했지만, 콜린은 걱정을 거두지 못하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저녁 약속은 미루겠습니다. 일단 함께 돌아가서…….”

    “됐다. 괜히 미뤘다가 왕세자가 관심 가지면 더 곤란해질 테니 네 볼일 보거라. 난 따로 알아볼 것이 있다.”

    아마도 초월신이 제 육신에서 혼을 끄집어내 어딘가에 잠시 강제로 묶어 두었을 테니, 콜린의 말대로 쉬어야 하는 게 맞았다. 신이 저지를 짓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폭력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제게 보여 준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콜린이 못마땅한 얼굴로 케이의 작은 손을 감싸 잡으며 말했다.

    “역시 상처가 깊으신 겁니다. 회복이 더디지 않습니까…… 본 모습도 오래 유지 못 하시면서, 혼자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다 제가 없는 곳에서 또 쓰러지면 어쩌시려고요.”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하면서도 나무라는 내용뿐이라, 헛웃음이 터진 케이가 콜린을 향해 건방지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콜린의 염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화이트드래곤의 보호 마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릇의 찌꺼기를 탐내다가 큰 상처를 입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강력한 마나가 할퀴어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덕분에 본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하나하나 언급하는 콜린이 참 얄미웠다.

    “콜린. 점점 더 기어오르는구나? 이러다 내 정수리를 밟고 올라서겠다?”

    “이게 다 주인님이 오냐오냐해서 제가 이렇게 버릇없어진 겁니다. 기왕 버릇없어진 김에 더 참견하게 해 주시죠. 오늘은 돌아가야겠습니다.”

    “허…… 집집마다 들려 생색내는 게 도움 될 거라던 녀석이 누구더라?”

    “몇 곳 들렀고 저들끼리 알아서 소문내 줄 테니 괜찮을 겁니다. 아니면 나중에 다시 오면 됩니다. 역시 좀 더 회복하시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케이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제 안색을 살피는 콜린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심약한 녀석 같으니.”

    “예. 제가 이렇게 심약합니다. 안식의 신이 되시기 전에 주인님이 먼저 안식하실까 봐 아주 심장 떨려 죽겠습니다. 이 심약한 종이 뒷목 잡고 쓰러지는 꼴 보기 싫으시면 이제 쉬러 가시죠.”

    역시나 조근조근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내용은 전혀 점잖지 않았다. 투정에 가까운 볼멘소리를 듣던 케이는 콜린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들를 곳이 생겼다. 넌 저녁 약속이나 잘 다녀오거라. 네 아비 일찍 재우는 거 잊지 말고.”

    “주인님! 하아…….”

    콜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마차 안에서 케이의 모습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젖은 바닥에 엎어져 연신 파도를 맞으며 청승맞게 오열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토닥토닥. 토닥토닥.

    규칙적으로 등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이비가 부스스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흑진주같이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초점을 맞추고자 눈을 가늘게 뜬 이비는 고개를 들어 머리카락의 주인과 잠시간 눈을 맞추다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카르젠은 늘 그랬던 것처럼 편히 기대라는 듯이 이비를 더 당겨 안았다.

    그의 팔 힘에 의지해 몸에 힘을 풀고 안긴 이비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이젠 제 방보다 더 익숙한 카르젠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카르젠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무릎에 이비를 앉히고 규칙적으로 도닥여 주었다.

    ‘벌써 저녁이네…… 카르젠 저녁 약속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점심 식사 도중 들었던 이야기대로라면 카르젠은 오늘 크리시와 일라나드의 동생과 저녁 약속이 있을 터였다. 아직 나갈 시간이 되지 않은 건지, 혹은 늦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비는 자신 때문에 카르젠이 약속을 미루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가슴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훌륭하게 단련된 남자의 가슴은 너무나도 안락했다.

    힘없이 늘어진 채 그의 말랑한 가슴에 한쪽 볼을 완전히 눌러 기댄 이비는, 카르젠의 큰 손이 제 얼굴을 보듬어 주는 것을 느끼곤 눈을 살포시 감았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기 직전에 보인 것은 눈물에 젖은 카르젠의 손가락이었다. 깨어나기 전부터 울고 있었는지 얼굴은 축축했고, 지금도 쉼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카르젠의 가슴이 기분 좋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서럽게 울다니…… 카르젠이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라고 생각한 이비는, 이런 제 모습이 저가 봐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울음도 터져 나왔다.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웃길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뇌는 한 번에 하나의 생각만 할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이비는 제 앞에서 사라져 버린 형을 붙잡지 못하여 슬퍼함과 동시에, 카르젠의 가슴에 취한 자신이 어이없어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술을 마셔 본 적은 없지만, 취한 게 분명했다. 뭐에 취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몽롱하네…… 또 마취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야.’

    약물에 의해 강제로 잠든 후 힘겹게 깨어나는 기분은 이비가 싫어하는 감각이었다. 전신 마취가 없는 필리스에서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비는 그나마 자신이 말을 못 하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카르젠의 가슴을 육성으로 찬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토끼 귀가 파르르 떨렸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런데 난 왜 갑자기 잠든 거지?’

    점심을 먹던 도중 갑자기 잠든 것만 해도 이상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졸렸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몸에 힘이 없고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대체 왜 꿈의 배경은 늘 바다일까? 설마…… 형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 설마 형이 바다가 있는 곳에 있나?’

    찰나의 순간, 갑자기 소름이 돋으며 토끼 귀 털이 쭈뼛 섰다. 마치 누군가 격렬하게 그게 아니라며 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몸이 안 좋아 으슬으슬한 탓이라고 여긴 이비는 카르젠의 가슴에 은근히 귀를 비볐다.

    ‘형이 내가 루아인 수도에 있다고 말한 것까진 들었을까? 만약 들었다면 당연히 수도로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보자.’

    수도에서 뼈를 묻을 결심을 하니, 쭈뼛 섰던 털이 사르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게 다 카르젠의 체온을 나눠 받아 그런 거라 여긴 이비는 열심히 고민했다.

    ‘내가 형이라면…… 날 어떻게 찾으려 할까? 나는 형에게 어떻게 여기에 있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아리스처럼 책이라도 써야 하나?’

    ***

    벌컥-

    에벨루스 신전 대신관의 집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힐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 잘 아는 나이젤은 굳이 읽던 책에서 시선을 들지 않고 말했다.

    “외출 시에는 꼭 라피엘 경과 동반해야 한다.”

    “저 애 아닙니다.”

    “안다.”

    “그럼 대체 왜 귀한 팔라딘을 한낱 저녁 약속 자리까지 달고 가야 하는 겁니까?”

    나이젤은 심드렁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늙은이의 걱정이지.”

    “대체 무슨 걱정…….”

    말을 하려던 크리시가 멈칫했다. 나이젤은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긴장으로 손이 저린 것까진 막을 수 없어 책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크리시는 잠시간 나이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그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요?”

    “그래.”

    “언제부터였습니까?”

    “대략 엘카사트 제국에 성녀가 강림한 후인 것 같은데, 점점 심해지는구나.”

    “혹시 신탁을 받으신 건 아닙니까?”

    “아니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

    “…….”

    크리시는 혼란해하는 나이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헛소리나 헛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렇기에 나이젤이 원인 모를 불안감에 저에게 팔라딘까지 붙이는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공개적인 신탁이 아닌, 신이 대신관에게 은밀하게 신탁을 내리꽂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아니라고 하니…….

    “늙으면 걱정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안다. 그러니 늙은이의 불안이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왜 불안한지 이유도 모르시고…… 불안한 대상이 혹시 저로 국한된 문제입니까?”

    그 물음에 나이젤이 고개를 저었다. 크리시는 그의 복잡한 머릿속에서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만 캐치해 조합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광범위적이라는 거군요.”

    “그래.”

    “그렇다면 대신관님 주변에도 팔라딘을 상주시키는 것이…….”

    말하다 멈춘 크리시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이내 그의 책상 위에 책을 팩 덮어 버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늙긴 뭐가 늙었습니까. 아직 창창합니다. 적어도 300년은 더 사실 것 같군요.”

    “언제는 노망났다더니?”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습니까? 생각만 했습니다. 생각만.”

    까칠한 말투로 서슴없이 던지는 농담에 나이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시는 저가 들고 온 성력이 깃든 천으로 감싼 상자를 나이젤의 책상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하여간에…… 이상한 말씀 마시고. 대신관님도 일단은 인간에 가까우니, 정 불안하시면 상담이라도 받아 보세요.”

    “…….”

    “다른 대신관님들끼리 모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모인 김에 이것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이것만 두고 나가자니 신경 쓰여서 여기에 잠시 두고 다녀오겠습니다.”

    크리시가 성력으로 봉인한 상자를 마치 잡화 다루듯 툭툭 치자, 쓰게 웃은 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크리시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잠시간 책상에 얌전히 걸터앉아있던 크리시는 나이젤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신전 대신관님들 전부, 내일 말입니까?”

    “그래.”

    “보통 자리가 아닐 텐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공식적인 일정은 아니겠군요?”

    나이젤이 끄덕이니 크리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대신관님들이 비공식적으로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모든 신의 아이들이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

    늙은이의 기우인 것처럼 말했으면서, 모든 대신관이 동일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의 뜻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젤이 요즘 매일같이 꾸는 악몽의 내용까지도 들은 크리시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골루딘 산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해일…… 거기서 제 손을 놓치신다고요?”

    루아인 3대 산 중 하나인 골루딘 산을 집어삼킬 정도의 해일이라면 일단 루아인과 인접국 마르카는 수장당했다고 봐도 무방할 규모의 자연재해였다.

    “그럼, 전 해일에 떠내려가는군요. 그런데 골루딘 산을 덮을 정도의 해일이라면서요? 대신관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나이젤은 침통한 얼굴로 대답 대신, 당시 꿈을 더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크리시는 나이젤이 산 정상에 지어진 거대한 배에 겨우 올라탄 후, 위태롭게 매달린 채 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오열하는 장면을 전해 받곤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산 위에 배라니…… 누가 산 위에 배를 짓는단 말인가?

    ***

    “출판이라…….”

    손님을 그냥 두면 어떻게 하냐는 핑계로 카르젠을 리엔과 유사에게 보내고, 제 방에서 아리스와 둘이 간단히 저녁을 먹은 이비는, 은근히 긴장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조금 전에 이비가 한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잠시간 말이 없다 이내 끄덕이며 말했다.

    “출판도 괜찮은 생각인데?”

    ‘진짜요?’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책과 신문만큼 효과가 좋은 건 없거든. 출판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문제가 있어. 일단 신문은 못 보고 지나칠 확률이 크고, 출판은 시간이 좀 걸려. 그리고 네 형이 책에 접근이 어려운 상황일 경우도 대비해야겠지.”

    이비는 큰 베개에 몸을 더 깊게 파묻으며 입술을 앙다물고 집중했다. 확실히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책을 쓴다는 것은 시간도 걸리고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써서 출간한다고 하더라도 접근성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형이 필리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아브델에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제 외침을 형이 제대로 들었을 때 이야기지만…….

    “네 생각대로 형이 아브델로 온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짤 수밖에 없는 상황 같네. 넌 네 형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리스의 질문에 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으로 대답했다.

    ‘꿈은 바다만 보여 줬어요. 붉은 달과 푸른 달이 있는 바다. 붉은 달이 훨씬 멀리 있었지만, 어딘지 전혀 모르겠어요. 첫 꿈을 빼면 건물도 없었거든요. 계속 바다만 보여 주고 있긴 한데…… 형이 바다에 있는 게 아닐까요?’

    일순, 또 토끼 귀 털이 쭈뼛 서며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감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비가 작게 몸서리치는 모습을 본 아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끄덕였다.

    “같은 배경만 보여 주는 거라면 역시 뭔가 있을 거야. 일단 네가 말한 꿈 패턴은 제논이나 내가 신과 대화하는 꿈과 비슷해. 전에 말했지? 가끔 면담처럼 꿈에서 대화한다고.”

    끄덕.

    “그땐 일반 꿈과 확실히 다른 자각몽을 꾸거든. 꿈이라기보단 현실 같지.”

    아리스의 말에 이비가 격하게 끄덕였다. 확실히 꿈이라기보단 다른 세계에 잠시 소환된 기분이 드는 꿈이었다.

    “그럴 때 보통 꿈에서 보여 주는 건 일종의 힌트일 확률이 커. 말했다시피 신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게 훨씬 많아. 질문 100개 중 하나 정도 확실히 해 줄까 말까야.”

    ‘알고는 있었지만, 심하게 적네요.’

    “뭐…… 너무 깊게 관여할 수 없다나 뭐라나. 하여간에, 만약 또 그런 꿈을 꾸게 되면 유독 강조된 것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봐야 해.”

    강조라는 말에 이비가 고개를 갸웃하니 아리스가 덧붙여 설명했다.

    “예를 들어 넌 바다 꿈을 자주 꾼다고 했으니 주변에 혼자 우뚝 서 있는 조형물이나 동물, 나무, 바위 같은 게 없는지.”

    아리스의 말을 들으며 반사적으로 끄덕이던 이비가 일순 “허억!”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꿈에서 바위가 있었어요!’

    문제는 바위를 살펴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카르젠과 대화하느라 정신 팔려 이런저런 이야기만 하고 꿈에서 깼더랬다. 토끼 귀가 축 늘어지니, 아리스가 손으로 이비의 귀를 꼿꼿하게 세워 주며 말했다.

    “이미 지나간 꿈은 어쩔 수 없고, 다음에 또 그 꿈을 꾸면 주변에 뭔가 없는지 잘 찾아봐. 가끔은 정말 생각도 못 한 형태로 나타나거든. 무슨 신이 이렇게 하찮나 싶을 정도로.”

    중간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하급~상급 신도 아니고, 초월신이 하찮다니…… 이비 입장에선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꿈에서 신을 만나지 못했으니 일단 아리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제 수첩을 보여 주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지만…… 꿈에서 본 형은 이런 옷을 입고 있었어요.’

    “흐음…….”

    이비가 수첩에 그린 옷을 본 아리스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확실히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일단 옷깃을 교차시키는 형태에 허리끈이 있고, 소매통이 넓고 펄럭일 정도로 넓은 옷이라는 것은 알아볼 법했다.

    “확실히 루아인 스타일은 아니네.”

    ‘그렇죠? 다른 대륙 옷을 정리한 책도 있을까요?’

    “이따 카르 서재에서 찾아볼게. 없으면 율리였나? 그 아이가 내일 부집사와 외출할 예정이라고 하니 사다 달라고 하면 되고.”

    ‘고맙습니다.’

    수첩을 돌려주고 이비에게 조금 더 붙어 앉은 아리스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은근히 염두에 둔 주제를 꺼냈다.

    “그런데, 아가. 이제 슬슬 카르랑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지 정해야 하지 않겠어?”

    ‘카르젠과의 관계요?’

    “응. 물론 지금 고민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확실하게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나도 그 마법사가 잡혀야 돌아가든 말든 하니까, 그때까지 천천히 고민해 봐. 나와 북부로 갈지, 아니면 여기에 남을지.”

    갑자기 함께 북부로 가자는 제안에 놀란 이비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지금 몸 상태로 보좌관 일을 하는 건 무리일 것 같거든. 네가 굳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나랑 북부로 가서 요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아리스의 말에 이비는 내심 침울함을 느꼈다. 사실 아리스의 말이 다 맞았다. 제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데다, 원인도 찾지 못한 터였다. 이대로 가다간 보좌관 업무는 고사하고 지난 생처럼 다시…….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마. 북부에도 훌륭한 의사와 프리스트가 많단다. 네가 내 아들이 되면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요양만 할 수 있고.”

    “…….”

    “나도 여기 얼마나 머물지 알 수 없지만, 당장 해결될 것 같진 않네. 그동안 진지하게 고려해 봐. 알았지?”

    전부 저에게 과분할 만큼 좋은 조건이었기에, 반사적으로 끄덕이던 이비가 움찔하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요양만 하는 거면, 저 백수 되는 거 아니에요?’

    “백수야말로 최고의 직업 아냐? 백수 아들 하나 둔다고 후작가가 망할 일은 없어.”

    ‘아니, 그, 물론 그렇긴 한데요…….’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냐. 단지 네가 카르젠 곁에 남고 싶다면 그 이유가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는 거지.”

    ‘으음…… 카르젠이랑 친구가 되고 싶긴 하지만…….’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천진한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어째 뒷목이 뻐근해 목을 우두둑 꺾었다. 아리스의 뒷목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이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집중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말대로 후작가의 양아들이 된다면, 필리스에서 생존을 넘어서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거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아브델을 떠난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카르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숙제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비는, 아리스가 묘한 얼굴로 씩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리스 말대로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둘러댔지만, 이비의 작은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난 왜 굳이 카르젠이랑 있고 싶은 거지?’

    ***

    아리스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눈 이비는, 그녀가 방을 나서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르젠과의 관계…….’

    이비는 갑자기 생긴 숙제에 대해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진 카르젠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가 직접 정의해 주었으니까.

    처음은 요구조자였고, 이후엔 손님이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도 이비에 대한 정보를 찾기 힘들어지자, 보좌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받았다. 카르젠이 제시한 관계 외에,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자각한 이비는 고개를 기울이며 끙끙댔다.

    그동안 이비는 카르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데 바빴다. 애초에 카르젠의 곁에서 얌전히 생존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곁에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민할 필요 없이 그가 제게 준 것만 받으며 수동적으로 그를 따르는 게 좋았다. 카르젠은 제게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았고, 저를 많이 생각하고 배려해 주었고, 늘 다정했으니까.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옆에서 얌전히 따르는 것 정도야 쉽지.’

    그가 제 차애라서, 생명의 은인이라서, 다정하게 대해 주고 이 세계에서의 생존을 보장해 준다는 이유로 그간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도 못하고 얌전히 있었지만, 아리스의 말대로 후작가에 입양될 경우 생존 관련 문제는 전부 해결될 터였다. 형을 찾는 일은 아리스가 가진 재력으로 쉽게 해결해 주겠다고 했고, 입양되면 후작 성에서 굳이 노동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는 행복한 백수 생활을 보장해 준다고도 했다.

    ‘확실히 내 상태로 바로 일하는 건 무리이기도 하고…….’

    원인은 모르겠지만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보좌관 일을 바로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카르젠도 보좌관 일보다는 우선 회복에 집중하자고 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해 장기요양을 할 경우,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아리스의 말대로 북부로 가는 게 옳은 상황이야…… 말이 좋아서 손님이자 보좌관이지, 지금의 난 카르젠에게 붙은 빈대밖에 안 돼…….’

    빈대 붙었다는 말이 너무 비약적일 수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이비 스스로도 잘 알았다. 현재 이비 자신이 카르젠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곤 딱 하나였다. 그의 슬픔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것뿐, 그 외엔 제 존재가 도움 될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직접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굳이 내가 없어도, 크리시나 다른 신력이 강한 신관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아리스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저에게도 그렇고 카르젠에게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비는 쉽게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지극히 이상하게 느껴져 스스로도 의아해 입술을 깨물었다.

    ‘북부로 가면 카르젠과 자주 연락하기도 힘들겠지? 아니, 카르젠은 굳이 나랑 연락할 이유가 없겠네.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카르젠과 자신이 친구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저 연약한 저를 거두어 준 보호자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제까진 그렇게라도 그와 함께하는 관계에 안락을 느꼈던 이비지만, 아리스의 말을 듣고 나니 어째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괜히 속이 답답해졌다.

    ‘후작가에 입양되면, 나도 공자가 되는 건가? 그럼 카르젠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신분이 되는 거니까, 가끔 편지라도 하자고 하면…….’

    편지에 대해 떠올린 이비는 더 시무룩해져서 귀를 늘어뜨렸다. 지금도 충분히 바쁜 그가 굳이 저와 편지를 주고받을까 싶었다. 물론 카르젠은 자애로운 사람이고, 누구에게나 상냥하니, 편지를 보내면 안부 답장이라도 해 주겠지만……

    ‘그런 거 말고……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비는 처음으로 둘이 밤 산책을 하며 휘청거리다 카르젠에게 안긴 순간, 그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스파크가 팍 튀는 것처럼 강렬한 충동을 느꼈었다. 꼭. 꼭 이 남자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의 곁에 머물며 함께 우정을 나누고 싶다고.

    찰나의 순간이 뇌리에 얼마나 강렬하게 남았는지,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사진을 보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늘을 수놓은 반짝이는 별보다, 카르젠의 맑은 눈동자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놀라 저를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뜬 모습은 마치 신이 깎아 놓은 조각 같아서, 만져 보고 싶고, 갖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다. 카르젠과의 첫 산책을 생각하던 이비는 침울한 기분을 꾹 눌러 삼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심란해…… 오늘은 따로 자자고 해야겠어.’

    아리스는 천천히 생각하라고 했지만, 여유가 한 톨도 없었다. 가중되는 초조함에 오히려 마음만 복잡해졌다. 이대로 카르젠과 동침한다면 진지하게 고민은커녕, 자신과 친구 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를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지금 자 버릴까? 어지러운 것 같은데.’

    어째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온몸이 뜨끈뜨끈해 이마를 짚는다 해도 딱히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비실비실 일어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 이비는, 힘없이 씻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얼굴이 붉은 것을 보니 확실히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사실 열이 나지 않는 날보다 열나는 날이 더 많았으니, 유난떨 것 없다 생각하며 수건 하나를 적셔 물을 쭉 짰다. 악력이 약해 몇 번이고 낑낑대며 짜낸 이비는 그거 좀 짰다고 더 지친 상태로 욕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침대로 다가가 털퍼덕 눕고, 이불을 덮은 후 수건을 접어 제 눈과 이마에 올렸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어째 몸이 더 뜨거워지고,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 괜히 서러웠다. 왜 서러운지 모르겠지만, 아마 컨디션이 안 좋은 탓이라 여기며 잠에 집중하려 했다.

    이건 다 고민할 게 많아서 그런 거라고, 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고, 아리스가 한 제안도 검토해야 하고, 그저 생각할 게 많아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거라며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다.

    “훌쩍…….”

    열 때문인지 서러워 눈물이 났다. 하루 이틀 아파 본 것도 아니면서, 오늘은 유독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이비는 입술을 말아 넣고 울음을 애써 참았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당장 고민할 것도 많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은데…….

    ‘엄마 아빠 보고 싶어…… 현아도 보고 싶고, 형도 보고 싶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한번 차오른 그리움은 눈물이 되어 넘쳐흘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눈물은 흐르지 않고, 얼굴에 올려 둔 수건에 흡수됐다. 덕분에 이비는 마음 놓고 흐느껴 울었다.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면서, 좋은 사람들 덕분에 걱정거리 없이 지내면서, 그러니 슬퍼할 거 하나 없으면서 바보같이 왜 우냐고 자신을 질책해도 그리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젠 저가 아파도 곁에서 손잡아 줄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 시리게 아팠다.

    “아우…… 으흑…… 흐윽…….”

    이미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실인데, 갑자기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저를 슬프게 만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홀로 흐느끼던 이비는 아무래도 지금 제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고 자각했다. 분명 조금 전 아리스와 있을 때는 괜찮았으면서, 갑자기 푹 꺼진 기분이 드는 것도, 열이 나는 것도, 기분 나쁜 무언가가 제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도 전부 다 자신의 마음이 약한 탓이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흑…… 으흑, 으읏…….”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흐르며 숨이 차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왜 또 이렇게 우는 걸까, 대체 난 뭐가 문제인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제 다리를 타고 올라와 목을 조를 것 같아 두려웠다. 진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 않았다. 여기서 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늪에 빠질까 봐 무서웠다. 지금은 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저를 구해 줄 아리스도, 카르젠도, 크리시도 없이 저 혼자라 더 두려웠다.

    ‘대체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이…….’

    「이건 강하고 약하고 문제가 아냐. 네가 심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흑…… 아우우…….”

    혼자라는 두려움에, 다 저가 나약해서 그렇다는 자책감에 끙끙대던 이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당연하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일 뿐이야. 그러니 겁먹고 주눅 들 것 없어.」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내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나 혼자서도…… 혼자서도 진정할 수 있어. 괜찮아. 침착해. 아리스가 뭐라고 했었지? 눈에 보이는 거 먼저 찾아보라고 했었나?’

    조심스레 물수건을 들어 올린 이비는 아리스가 알려 준 대로 제 뇌를 잠식하려는 먹먹하고 슬픈 생각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인지하려 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니 천장이 보였다.

    “흑…… 흐윽…… 으흑…… 흐읍…….”

    울음을 참을 때마다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벌벌 떨며 눈동자만 굴려 옆을 보니 저가 좋아하는 큰 베개가 보였다. 긴장해 굳은 손을 천천히 뻗어 베갯잇을 쓸어내리자, 부드럽게 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에게 배운 대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집중한 이비는 다음 단계를 시도했다.

    ‘다음은 뭐라도 집어 던지거나 내 마음대로 다루라고 했지?’

    훌쩍이며 가쁜 숨을 내쉰 이비가 용기를 내 손에 잡고 있던 물수건을 팩 던졌다. 다행히 수건은 이비가 던진 대로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틀비틀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앉으니, 어지럽고 여전히 몸을 옥죄는 기분이 들었지만, 조금 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아리스의 말대로, 두려움은 제 목을 조를 수 없었다. 천천히 계속 심호흡하며 제 탓이 아니라고, 자신의 마음이 약한 탓이 아니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울던 이비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이를 알아보고 힘없이 미소 지으며 그를 불렀다.

    [카르젠 님.]

    무언가에 억눌렸던 듯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온 카르젠을 마주한 이비는 그간 저가 품고 있던 불안이 전부 눈 녹듯이 사라짐을 느꼈다. 막연한 공포에 휩싸여 몸을 잠식하려던 두려움이 지워진 자리엔 따스함만이 맴돌았다.

    이비는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저를 조심스레 살피며 괜찮냐고 묻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젖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보듬어 주는 그의 손길이, 오로지 저만 담고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좋았다. 역시 그와 조금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비가 바라는 대로 카르젠과 친구가 되려면, 자신은 첫 단추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미 잘못 끼워 틀어진 단추를 풀어내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채워야 했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이비가 쥐고 있었다.

    이비는 잠시간 카르젠과 눈을 맞췄다. 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만 봐도, 지금 카르젠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언제나 진실했다.

    ‘상대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싶으면,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지.’

    ‘현아야.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친절하고 거짓 없이 진실하게 대해야 한단다. 관심 받고 싶어서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고 놀리는 건, 상대를 상처 입히고 결국 너를 미워하게 만들 뿐이야. 그러니 내일 학교에 가면 네 짝꿍에게 꼭 사과하렴. 그리고 네가 좋으니까 친해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렴. 알았지?’

    어릴 적, 어머니가 쌍둥이 동생 현아를 타이르던 모습을 떠올린 이비는, 제 볼을 보듬는 카르젠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그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카르젠 님. 저 오늘 카르젠 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손가락을 멈추고 살며시 시선을 들어 올리니, 고개를 끄덕이는 카르젠 너머로 아리스가 보였다. 팔짱 낀 채 방문에 기대선 아리스는 이비를 향해 대견하다는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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