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9)

### 챕터 9

쏴아아아-

촤아아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에 눈을 뜬 이비는, 여기가 꿈이라는 것을 대번 알아챘다.

‘해운대는 아니네?’

이전 꿈과는 다르게 보이는 거라곤 그저 큰 바위와 모래사장과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카르젠이 전부였다.

그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고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비가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려 미소 지으며 반겼다.

“이비, 어서 와. 이번에도 같은 꿈을 꾸게 됐네.”

“제가 먼저 잠들었는데, 카르젠님이 꿈에 먼저 와 계시네요?”

꿈에 먼저 왔다는 말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비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비의 말을 이해한 카르젠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그러게. 내가 더 늦게 잠들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여기에 혼자 있었어. 잠든 순서는 상관없나 봐.”

그의 대답을 들은 이비가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난 꿈처럼 크리시도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카르젠과 이비 외엔 아무도 없었다.

카르젠이 먼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이비 역시 옆에 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해운대와 달리 참 맑고 깨끗했다.

“지난번 꿈도 그렇고, 오늘도 바다네요.”

“응. 이비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아뇨. 카르젠 님은요?”

“나도 어딘지 모르겠어. 처음 보는 곳이야.”

카르젠도 모르는 장소라는 말에 이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 꿈은 카르젠과 크리시에게 비밀로 했지만 저가 아는 해운대였다. 그렇다면 이번 꿈도 둘 중 하나가 아는 장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어도 이비의 기억엔 없는 곳이었다.

‘카르젠이 거짓말할 리는 없으니…… 그냥 꿈이라 그렇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주변을 둘러본 이비가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이비를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비와 이렇게 대화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비는 그의 눈부신 미소에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카르젠이 쿡쿡 웃으며 물었다.

“또 눈부셔?”

“네. 잘 아시네요…….”

불퉁한 대답에 카르젠의 미소가 짙어지고, 이비의 눈은 점점 더 가늘어지다 못해 거의 감은 상태가 되었다.

“으으…… 솔직히 최근엔 카르젠 님 미소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그래? 그럼 또 연습해 볼까?”

“네? 연…… 으앗!”

연습이라며 대뜸 화사하게 미소 짓는 카르젠을 정면으로 마주한 이비는 식겁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곤 아예 몸까지 조금 틀어 앉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마치 멍 자국 같은 덩어리들이 동동 떠다니며 시야를 방해해, 낑낑대며 눈을 비볐다.

“어흑, 내 눈, 내 눈…….”

매일 마주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비현실적인 외모라 그런지 놀란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뒤에서 카르젠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까지 확 붉어진 이비가 눈을 비비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하하, 미안. 미안. 이비. 자제하려 해도 버티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둘 수가 없네.”

“놀리지 마세요, 진짜아…… 아으, 내 눈…… 그렇지 않아도 엄청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뭐가 신경 쓰여?”

그 물음에 겨우 진정한 이비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카르젠을 마주했다. 그는 이제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은은하게 눈이 부셔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의 어깨 부근을 보며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이유요…… 앞으로 카르젠 님의 보좌관으로 일해야 하는데, 만약 밖에서 카르젠 님이 웃는 걸 보고 이런 반응 보이면 곤란할 것 같으니까 그렇죠…….”

보좌관으로서 차질이 생길까 봐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 다른 고민이 더 컸다. <숲의 마법사> 원작에서 토끼 묘족은 ‘이상적인 반려’로 인식하면 눈부심을 느끼곤 했는데, 이게 그와 동일한 현상이면 어쩌나 하는 그런 고민…….

‘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 최애는 크리시잖아. 크리시가 웃는 걸 봤어도 빛나진 않았단 말이지…… 체스터도 잘생겼지만, 일단 크리시는 내 최애인데 왜 반응이 없어?’

어째서 차애인 카르젠이 웃을 때만 이렇게 눈이 부실까. 카르젠은 뭐가 다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을 때. 상체를 가까이 기울인 카르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비.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크리시…… 헉!”

저도 모르게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낸 이비가 놀라 입술을 말아 넣었다. 카르젠의 고개가 갸웃했다.

“크리시 생각을 했다고?”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방금 크리시라고 했잖아?”

“아뇨, 카르젠 님이 웃을 때 왜 눈부신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급하게 둘러댄 말에 카르젠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그럼 크리시 이름은 왜 나왔을까?”

‘엄청 집요하네!’

꼭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 가득한 물음에, 새빨개진 이비가 여전히 어깨쯤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아니, 그게, 크리시 님 얼굴은 빛난 적이 없는데…… 왜 카르젠 님 얼굴만 빛날까 해서요…….”

“…….”

“어, 음, 그리고, 체스터 왕세자님도 안 빛났고요…… 솔직히 크리시 님하고 체스터 왕세자님도 엄청 잘생겼잖아요?”

카르젠은 제 시선을 피하며 더듬더듬 겨우 대답한 이비에게 가까이 붙어 앉으며 물었다.

“그럼, 이비에게 눈부신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는 거지?”

“어어…….”

맞긴 한데, 막상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어째 엄청난 것을 인정하는 기분이 든 이비가 대답 대신 작게 끄덕였다. 그 주억거림을 본 카르젠은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내가 유일하다니. 그건 마치 이비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네.”

‘특별한 사람…….’

다섯 음절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담겨 있는 뜻을 금세 이해한 이비는 갑자기 제 볼과 목덜미 부근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어깨를 움츠렸다. 이 간질거림은 아마도, 바람에 흩날린 카르젠의 머리카락이 닿아서 그런 게 분명했다.

역풍이지만 그런 걸 인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비는 괜스레 바람 탓을 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 그를 마주하기엔, 시야가 너무 밝았다.

***

하늘은 푸르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으며, 파도 소리는 잔잔한 꿈이었다.

사람이라고는 카르젠과 이비 외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 이전에 봤던 높은 건물도, 발달한 문명도 없는 그저 바다일 뿐인 꿈에서, 한 곳만…… 유난히 한 지점만 훈훈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훈훈하다 못해 후끈하게 느껴질 만한 기운이 맴도는 곳에 앉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크리시는 대화에 낄 타이밍을 놓친 게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저런 묘한 분위기의 둘 사이에 끼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카르젠이야 이미 제 존재를 눈치채고 있겠지만, 돌아보지 않는 걸 봐선 이대로 자리 피하는 걸 묵인해 줄 테니 이비에게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거리를 벌렸다.

파도 소리에 맞춰 조심조심 이동한 크리시는 저 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에서 멈췄다.

바위가 워낙 큰 덕분에 드리워진 그늘도 넓고, 엄폐물로 삼기 딱 좋았다. 물론 카르젠 위치에서 이비 너머로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잘 보이는 위치였지만, 이비는 아예 돌아앉아야 볼 수 있는 각도였다.

크리시는 여기야말로 저 둘에게 떨어져 방해받지 않고 쉬기에 최적인 장소라 여기며 상의를 벗었다. 오늘도 크리시는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에벨루스 프리스트들이 평소 착용하는 신관복이 아닌, 연말 행사에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옷이었다.

이런 의복은 겹겹이 둘러 입어야 해서 착용이 번거롭지만, 덕분에 바닥에 깔았을 때 면적이 넓었다. 고운 모래에 드리운 바위 그늘에 옷을 깔고 털썩 앉은 크리시는 자연스럽게 드러누웠다.

현실의 제 몸은 지금쯤 격한 마나 몸살에 시달리고 있을 테니, 여기서 푹 쉬다 가면 될 것이다. 이 정도 거리면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한 두 사람의 대화도 들리지 않고, 잡음 없이 쉴 수 있었다.

여유롭게 대자로 누운 크리시는 푸른 하늘을 보며 오랜만에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좋군.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저가 아는 바다는 아니니, 아마 이 꿈은 이비의 꿈일 확률이 높았다. 지난번 바다와 차이가 심한 곳이긴 했지만, 카르젠의 꿈 같지는 않았다. 물론 100% 확신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크리시가 이비의 꿈이라 단정 지은 이유는…….

‘카르의 꿈이었다면, 저 제복을 입을 리가 없지.’

현재 카르젠이 입고 있는 제복은 왕실 중요 행사에 기사단장으로 참석할 때 착용하는 제복이었다. 저 제복을 입기만 하면 평범한 외모의 기사도 루아인 최고 미남으로 보이게끔 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과거 카르젠은 아무 기능 없이 예쁘기만 한 제복은 선호하지 않는다며 체스터에게 대놓고 불평한 적도 있었으니, 이 꿈은 이비의 꿈이 분명했다. 크리시는 지난 꿈에서도 카르젠과 저가 입었던 옷이 같은 것을 파악하곤 픽 웃었다.

‘저 사람이 본 우리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나…….’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의식 기반인 꿈에서 이렇게 갖춰 입을 리가 없으니까.

크리시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돌려 이비를 확인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마르고 가녀린 몸은 이전 꿈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입고 있는 옷은 처음 수정에 빨려 들어간 이비를 깨우러 갔을 때 입었던 것과 같았다. 소매통이 다 넓고 헐렁한 옷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환자용 의복 같았다. 크리시는 이비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금 저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착잡함을 느꼈다.

‘이상한 사람.’

아프면서 저가 아픈지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하는 자신이 앞에 있는데 꼴도 보기 싫은 미니 초상화에 반응하는 이상한 사람. 그게 크리시가 보는 이비에 대한 인상이었다.

이비는 마주할 때마다 저를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굳이 이비의 마음의 소리가 아니더라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비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뭐…… 실실 웃는 낯으로 겉과 속이 다른 부류보다 훨씬 낫지.’

본의 아니게 카르젠을 속였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 친우를 ‘읽었기에’ 그다지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겁쟁이.

크리시는 이비가 카르젠에게 제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가 ‘읽은’ 카르젠의 어떤 모습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어차피 저 둘의 문제니 저 둘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만약 손쓰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꼬인다면, 그땐 이비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카르젠이 나설 것이니 저가 걱정할 건 없었다.

지금 자신은 그저 편히 쉬기만 하면…….

“?”

크리시의 시선이 바위 위로 향했다. 방금 뭔가 휙 하고 움직인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위에 뭔가 있을 수도 있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피곤했고 쉬고 싶었다.

기척을 무시하려던 크리시는 바위 위에 또 무언가 휙 하고 움직인 것을 확실히 보고야 말았다. 푸른 하늘과 햇빛의 역광으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동물의 꼬리 같았다.

“…….”

찌푸린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바위 끄트머리를 노려보니, 휘리릭 하고 꽤 요란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상대 쪽에서 크리시가 먼저 알은척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 귀찮아…… 직접 내려올 것이지.’

차마 겉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의 꿈에 개입한 이라면 적어도 상급신일 것이고, 상급신의 심기를 수틀리게 해서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크리시는 지금 너무 피곤했다.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고민할 것도 많았다. 잠들기 직전 나이젤이 했던 생각을 들어보면 그는 일라나드의 남동생 콜린을 의심하고 있었다. 크리시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만 고민해도 부족할 판에, 자꾸 이리 오라는 듯이 꼬리를 휙휙 움직여 대는 저 존재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도 못 본 척하며 눈을 감으려는데, 바위 끄트머리 밖으로 삐져나온 꼬리가 대놓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이가 없었다. 남의 꿈에 들어와서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극도의 피곤함과 짜증을 꾹 누른 크리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직접 내려오시죠. 저 피곤합니다.”

그러자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가 멈추더니 축 늘어졌다. 시무룩한 꼬리짓이 참 없어 보였다. 크리시는 저 꼬리의 주인이 상급 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양새에 실소하며 물었다.

“설마 내려올 수 없는 겁니까?”

그 물음에 꼬리가 바위를 탁 쳤다.

“하아…….”

크리시는 정말 귀찮아 죽겠다고, 꿈에서조차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꿍얼거리며 일어났다. 바위를 돌아가 낮은 지점을 밟고 경사를 올라가니 위쪽 평평한 곳 끄트머리에 엎드려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노란 털에 갈색 무늬가 있는 토실토실한 고양이의 상태를 파악한 크리시는 한숨을 참았다.

‘어린 신이군…….’

저 신이 꼬리 외에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다가간 크리시가 조심스레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얌전히 안긴 것에 비해 꼬리로 팔을 계속 탁탁탁 치는 것을 보니 자세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를 안고 바위를 내려간 크리시는 그늘에 깔아 둔 옷에 고양이를 먼저 내려놓고 옆에 누웠다. 엎드린 고양이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니 영 불편해 보였다.

조심스레 고양이를 만지작거리며 옆으로 눕게끔 자세를 교정해 주어도 표정은 여전히 찌푸린 상태였다.

“뭘 어쩌라고, ……요?”

크리시는 찌푸린 채 불만스레 꾸웅…… 우는 고양이의 푸짐한 뱃살을 잡고 밀어 등을 바닥에 대고 눕게 만들었다. 배를 훤히 드러내고 네 다리를 자유분방하게 뻗도록 내버려 두니 그제야 편한 얼굴이 되었다.

크리시는 눈 뜰 힘도 없는 상태의 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힘이 없는 상태라면 제 신도를 지킬 힘도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이 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비나 카르젠의 신으로서 할 말이 있다는 건데, 카르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할 뿐, 신을 섬기진 않았다.

“저 사람…… 이비의 신입니까?”

고양이의 꼬리가 탁- 바닥을 쳤다. 긍정임이 분명한 움직임에 크리시가 실소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신을 달고 와도 자기 같은 신을 달고 오는군요.”

그 말에 고양이가 꼬리로 바닥을 두 번 탁탁 쳤다. 새침한 동작은 불쾌함을 담고 있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픽 웃은 크리시가 고양이의 턱을 살살 긁어 주며 물었다.

“그냥 저를 불렀을 리는 없을 거고. 이 꿈을 직접 만드셨습니까?”

그 물음에 꼬리가 바닥을 두 번 탁탁 쳤다.

“아니라는 겁니까?”

이번엔 꼬리가 바닥을 한 번 탁 쳤다. 상급 신이 꿈에 있지만, 그가 만든 꿈이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명백했다. 충분한 힌트를 확인한 크리시가 이번엔 고양이의 귀 뒷부분을 긁어 주며 말했다.

“흠…… 그럼 초월 신께서 만드신 꿈이겠군요.”

탁.

“에벨루스 님입니까?”

탁탁.

“아르카라스 님입니까?”

탁탁.

“그것도 아니면, 알하탄 님?”

탁탁.

“그럼…… 루이사 님?”

탁탁.

점점 꼬리짓에 짜증이 묻기 시작했다. 크리시는 그럼…… 하고 뜸을 들이며 계속 귀 뒤를 긁어 주었다. 남은 초월 신은 하나였다.

“칼리아르 님이군요.”

탁.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라는 것을 확인한 크리시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다.

***

……-다고 생각했다.

‘마족은 동족을 죽이고 동족의 피를 마시며 강해진다고 배웠지…… 우리는…….’

물론 지금까지 마주쳤던 마물은 대부분 그랬다. 이지가 없고 피에 굶주려 살생을 하고 동족 의식보단 눈앞의 먹잇감을 함께 노릴 뿐이었다. 하지만 저들 앞의 ‘마족’이라 알고 있는 종족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동족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통해 리엔은 그동안 지그하르트가 저들과 마족을 구분 짓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블랙드래곤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때 ‘이 여정의 끝에 진실을 마주한 그대들이 과연 무엇을 얻을지 궁금하군.’이라는 말 따위를 했던 것이었다.

리엔은 자신의 신념을 지탱해 왔던 무언가가 크게 뒤틀림을 느꼈다. 그래서 저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마족’의 수장을 향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리엔의 동요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말이 없어 지금이 기회라 여긴 것인지 칼스타인이 자신의 힘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그대가 알던, 아니, 아니지. 그대가 듣고 배웠던 ‘마족’과 우리가 너무 달라서 놀랐나? 당연히 혼란스럽겠지만, 괜찮네. 그대들은 선조가 가르친 대로 배운 것뿐이잖나.

혼란한 와중에도 리엔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오히려 잘됐어. 말이 통하는 존재라면 협상도 괜찮겠지. 우린 너희들이 훔쳐 간 것을 되찾으러 왔을 뿐이다.

훔쳐 간 것이라는 말에 칼스타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는 마족은 칼스타인 하나뿐이었다. 뒤에 마족들은 모두 리엔을 씹어 먹을 듯이 분노한 얼굴로 핏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칼스타인은 흥분한 마족들을 향해 진정하라는 듯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며 말했다.

-훔쳐 간 것이라. 정말이지…… 그대들의 선조들은 대단하군. 꽤 긴 세월이긴 했지만, 고작 천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리도 완벽하게 역사를 바꿔 놓다니.

그의 말에 카르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루는 지팡이를 거둔 상태였다. 칼스타인은 이번엔 루를 향해 말했다.

-먼 동방 대륙에서 온 손님은 오랜만이군.

루는 노련한 묘족 장로답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칼스타인은 그런 루의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보듯 말했다.

-동쪽에서 온 손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소만. 그대는 어떻게 쓰여진 역사를 보고 이들과 함께 동행했소?

-…….

-그대는 누가 쓴 역사를 보고, 누구를 돕기 위해,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이 먼 땅까지 온 것이오?

루가 질문에 대답하려는 찰나, 체스터가 앞으로 나서며 속삭였다.

-루. 간악한 혀가 놀리는 이야기에 현혹돼선 안 됩니다.

루는 별다른 대답 없이 칼스타인을 응시했고, 체스터는 저들이 지금껏 상대한 마물과는 전혀 다른 ‘마족’의 수장을 살피며 말했다.

-마족의 수장 칼스타인. 우린 무의미한 싸움을 원치 않습니다. 우린 이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기 전에 붉은 달을 찾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 별이 끝장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평화롭게 해결하자는 제안이었으나, 루아인 왕족의 상징인 백금발에 보석같이 푸른 눈동자를 알아본 마족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당장이라도 체스터를 찢어 죽일 듯이 분노한 그들을 보며 당황했다. 체스터 역시 저들의 살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칼스타인은 고의적으로 체스터를 딱하다는 듯이 동정을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다신 없을 천치를 보는 눈빛이었지만, 체스터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무언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 때쯤.

-먼 길 오느라 지친 그대들의 혼란함에 관대함을 베풀어 주지. 자문해 보게. 왜 빛이 드리우는 땅에만 달이 두 개일까.

-…….

-처음부터 ‘마족’들이 그대들과 같은 땅에 있지 않았다면, ‘마족’이 마계라고 불리는 지하에서만 사는 존재들이었다면. 그대의 선조들은 어떻게 ‘마족’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그때,

-크리시? 왜 구래? 크리시?

유사의 목소리에 대부분의 시선이 크리시를 향해 쏠렸다. 유사를 안고 있는 크리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유사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크리시를 잠시 돌아본 루는 천천히 칼스타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체스터보다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나도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퍽 혼란스럽구려. 그대 덕분에 떠오른 어떤 가설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싶으니, 나도 질문을 하겠소.

관대한 미소를 머금고, 루가 할 질문이 몹시 궁금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칼스타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루는 말을 잃은 자신의 오랜 동료들을 뒤로한 채 물었다.

-그대들…… ‘마족’들은 원래 이들의 선조와 함께 빛이 닿는 땅에 살던 존재들이었소?

모두의 시선이 루를 거쳐 칼스타인에게 집중되었다. 칼스타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사실만 말하듯이 확고하면서도 담담한 대답에, 루의 뒤로 누군가 침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족들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이글거렸다. 루는 그들의 얼굴에 서린 억겁의 한을 느끼며, 아마도 그들이 가장 기다렸을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마족…… 아니, 그대들은 오래전 빛의 땅에서 무엇이라 불리었소?

마족들조차 숨죽인 순간. 칼스타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와 동족을 이 땅에 버리고 봉인해 버린 그대들의 선조들은, 우리를 다크엘프라고 불렀소.

숲의 마법사 11권 256~258페이지 中

***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

“하…….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군요. 하필 칼리아르 님이라니.”

탁탁탁. 탁탁.

그 말에 꼬리가 불만스레 바닥을 쳤지만, 무시한 크리시는 제 할 말만 했다.

“푸른 달도, 태양도, 바다도, 은하수도 아닌 붉은 달이라니…….”

탁탁탁. 탁탁탁탁탁.

“하…… 제가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습니까? 칼리아르 님은 이미 많은 힘을 잃으셨잖습니까.”

그 말에 꼬리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축 늘어진 모양새를 보니 어째 시무룩해 보였다.

크리시는 초월 신이지만 많은 힘을 잃어버린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를 떠올렸다. 그가 새 아이를 들일 만큼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고양이를 향해 물었다.

“그럼 고양이 신님은 칼리아르 님의 마지막 자손이십니까?”

탁.

“그리고 저 사람. 이비의 신이시고요?”

탁.

반응을 확인한 크리시는 무의식중에 이비와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비는 여전히 크리시가 있는 것도 모르고 카르젠과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리더니,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다 참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카르젠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카르젠은 이비에게 얻어맞은 게 뭐 그리 즐거운지 환하게 웃었고, 덕분에 눈을 가린 이비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보였다. 쯔쯧……. 혀를 찬 크리시가 다시 고양이를 향해 물었다.

“굳이 이비가 아닌 저를 찾아온 이유는…… 혹시 이비는 자신의 신을 모릅니까?”

탁.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절 찾으셨다는 것은 저 사람의 신변에 관련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까?”

탁.

그렇다는 뜻으로 해석하려는 찰나, 꼬리가 또 움직였다.

탁탁.

“…….”

꼬리의 움직임을 본 크리시는 잠시간 생각하다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탁. 탁탁.

“비슷했지만 틀렸다는 겁니까?”

탁.

“그럼 이비의 신변 문제는 아니지만, 이비가 관련된 문제라면…… 이비와 관련된 사람의 신변 문제입니까?”

탁.

“눈도 못 뜨시면서 찾아오신 걸 보니 상황이 안 좋은 것 같군요…… 그 사람은 지금 이비가 있는 저택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탁탁.

크리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양이의 얼굴을 살피니, 누워만 있는 주제에 퍽 힘들어 보였다. 이렇게 의사소통하는 것 자체도 힘겨울 정도로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만약 하급이나 중급 신이 이 정도로 힘이 없다면 소멸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래도 나름 상급 신이라고 겨우 버티는 게 분명했다.

크리시는 이비와 관련된 사람, 즉 이비가 아는 사람 중 카르젠의 저택에 머물지 않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봤자 저랑 체스터랑 유사일 텐데…… 설마 이 셋 중에 있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힘겹게 꼬리가 두 번 땅을 쳤다. 잠시간 생각에 잠긴 크리시는 이비의 인간관계를 다시 짚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저 사람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비는 카르젠에게 구조된 후 한정적인 생활을 해 왔다. 이비의 곁엔 늘 카르젠이 있었고, 이비가 가는 곳은 전부 카르젠이 동행했다.

딱 한 번 카르젠 없이 이비가 혼자 외출했던 날엔 저가 발견했고, 그날 새 친구를 사귀었을 리도 없었다. 즉 이비가 현재 필리스에서 아는 사람은 전부 카르젠이 알고 있었고, 크리시 저 역시 알고 있었다.

“……저도, 카르젠도 모르지만, 이비와 관련된 사람이겠군요.”

탁.

꼬리가 거의 올라가지 못한 상태로 바닥을 쳤다. 모든 힘이 다한 것을 눈치 챈 크리시는 고양이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어 주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일단 쉬십시오.”

그 말에 고양이의 표정이 편해지려는 찰나, 크리시가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꽤 비싼 몸입니다. 절 부리신 만큼 상응하는 보상도 나중에 꼭 받을 테니, 빨리 추스르시길 바랍니다.”

꾸웅…… 하는 작은 소리가 났지만 크리시의 신경은 신이 무리해서까지 제게 알려 주려는 존재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비와 관련이 있으면서, 저들이 모르는 사람도 찾아야 했고, 콜린도 만나 봐야 했다. 이 모든 걸 혼자 처리할 수는 없으니 꿈에서 깨는 대로 힘이 될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크리시가 고양이를 슬쩍 품에 안았다.

완전히 기력이 다한 것인지 주둥이를 살짝 벌리고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을 본 크리시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어디서 자기 같은 신을 달고 왔네…….’

***

깊은 새벽.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얕게 자다 깬 콜린이 몸을 일으켰다. 고요한 방은 어두웠지만 큰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별빛 덕분에 은은한 빛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침대 옆으로 고개 돌린 콜린은 큰 퇴창에 앉아 별을 감상하는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무심한 눈길로 콜린을 훑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잠이 안 오나 보군.”

“……예.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방이 지나치게 넓고 좋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체스터 왕세자가 제 충신 세비어 페일리 남작에게 작정하고 수도에 마련해 준 집이니 당연했다.

저택은 크고 정원은 아름다웠으며 모든 방과 응접실이 넓었다. 서재는 제 부친이 좋아할 만한 책으로 가득했고, 저택의 가구나 장식품, 집기 등 모든 것은 최고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체스터가 직접 선별해 보내 준 사용인들은 전부 숙련된 이들이었고, 하나부터 백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게다가 저택에서 상주할 수 있도록 에벨루스의 프리스트까지 보내 주었는데, 덕분에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제 여동생 시엘라가 더 편해졌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물론 콜린 입장에선 신경 쓰이는 점도 있었지만…….

“주인님. 시엘라 곁에 있는 프리스트는 괜찮겠습니까?”

“왕세자가 뭔가 속셈이 있어서 보낸 것 같긴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소년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덕분에 안도한 콜린이 은근하게 사과했다.

“역시…… 요괴에 대해 잘 몰랐던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신관이 상주하면 오히려 네 동생에게 좋은 일이니, 제멋대로 드나들게 둬라.”

콜린은 아예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고 앉아 소년을 바라봤다. 퇴창에 둔 큰 쿠션에 몸을 파묻은 그는 공허한 눈동자로 별을 보고 있었다. 공허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는 눈동자를 본 콜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적어도 150살이 넘은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저리 있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콜린은 일어나 담요를 챙겨 다가갔다.

소년은 콜린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하지 말라 해도 할 녀석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가 제 몸에 담요를 덮어 주도록 내버려 두었다. 작은 몸에 담요를 꼼꼼하게 둘러 준 콜린은 퇴창 한구석에 있는 작은 봉투를 보며 갸웃했다.

“저건 뭔가요?”

그 물음에 소년은 대답 대신 봉투를 허공에 띄워 콜린에게 보냈다. 봉투를 받은 콜린은 안에 들어있는 노란 젤리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또 레몬 젤리군요. 언제 사 오셨습니까?”

“…….”

“향이 좋네요. 아? 이건 통스의 캔디 가게에서 파는 젤리군요? 통스의 캔디 가게에서 파는 젤리는 다 맛있어서 좋아합니다. 수도에 오면 누나와 시엘라와 셋이 사 먹곤 했죠.”

“…….”

딱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콜린은 혼자 이야기하며 소년의 맞은편에 멋대로 앉았다. 퇴창이 워낙 넓어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했기에 소년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향긋한 레몬 향을 충분히 즐긴 콜린이 봉투를 접어 내려 두려 하니, 그가 입을 열었다.

“먹어라.”

“아…… 역시 제 거였나요?”

그는 종종 콜린에게 뜬금없이 레몬이나 상큼한 과일 맛이 나는 젤리를 사다 주곤 했는데, 덕분에 젤리를 받는 것이 익숙해진 콜린은 봉투를 꼭꼭 접어 옆에 내려 두었다.

“감사합니다. 이건 내일 먹겠습니다.”

“…….”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소년은, 저를 향해 평소처럼 생긋 웃는 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요한 밤이었다.

***

……-듯이 심각한 얼굴로 이마를 짚고 앉아 있던 체스터는 제 품에 파고든 유사를 보듬어 주며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의 서대륙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오래전, 마족과의 전쟁에서 목숨 바쳐 싸운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 때문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제 선조들이 세운 역사가 모두 거짓이었고, 선조들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는…… 즉 자신이 알고 있던 영광스럽고 위대한 역사가 전부 가짜였다는 것을 이 아기 여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사는 며칠간 일행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말했다.

-지그하르트 아저씨가 그랬는데. 체스 할부지들이 잘못했대.

-…….

-근데, 근데, 이찌. 그건 체스 할부지 잘못이지, 체스 잘못이 아니쟈나? 체스는 잘못한 고 없눈데…… 체스는 착해! 유사는 체스 져아!

나름대로 위로를 시도하는 아기 여우에게 미안함을 느낀 체스터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 아버지와 내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잘못한 일이야.

-그럼, 체스가 집에 가면 체스 아빠랑 할부지한테 잘못해따구 말해 주면 대게따. 그치이~.

아기 여우의 천진한 말에 드러누워 있던 크리시가 픽 웃었다. 그 반응에 이마를 짚은 채 차에 손도 대지 않고 있던 리엔 역시 푸흐흐 웃었다.

거의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늘어져 있던 이들이 하나둘 조금씩 웃기 시작하니, 조금 처져 있던 유사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리구 체스. 이찌. 만약 체스 아빠가 잘못한 거 안 고치면. 유사가 유사 아빠한테 이를게. 유사 아빠 엄청 쎄다? 유사가 아빠한테…….

부우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에 체스터가 반사적으로 유사를 끌어안고 검을 뽑아 들었다. 누워 있던 크리시 역시 벌떡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고, 리엔도 검을 뽑았다. 함께 막사 밖으로 나가니 다크엘프의 수장 칼스타인과 지그하르트가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체스터는 유사를 안은 채 검을 들고 지그하르트와 칼스타인에게 다가가면서도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사 역시 하늘을 보고 놀라 눈이 커졌다.

-체스! 저게 머야? 엄청 커! 반짝거려! 예쁘다!

붉은 달 주변 하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구름이 게이트처럼 둥글게 몰려 있었고, 하늘 저편에서 반짝이는 거대한 존재가 필리스로 들어오기 위해 구름을 비집고 있었다.

유사를 고쳐 안은 체스터는 경악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힘을 개방하며 칼스타인을 바라봤다. 그는 팔짱 낀 채 여유 있는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린 저걸 공중 전함이라고 부르고 있지. 전함 말고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더군. 그래도 다행히 이번엔 두 개밖에 통과하지 못했나 보군. 뒤에 있는 전함은 꽤 상처 입은 걸 보니 온전하게 통과하진 못한 모양이야. 이게 다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 님 덕분이지.

-저게…… 저렇게 큰 전함을 공중에 띄워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존재가…… 진짜 인간이라는 겁니까?

칼스타인 역시 슬슬 자신의 마력을 개방하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놀라긴 이르다네. 이제 저 전함은 열을 함축한 빛을 비처럼 뿌리며 우릴 공격해 댈 테니까.

칼스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크엘프들이 마나 실드를 펼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실드가 겹치자 지그하르트 역시 손을 뻗어 거대한 돔 실드를 만들며 혀를 찼다.

-나도 말년에 고생이군. 네 대 남은 것만 아니었어도…….

블랙드래곤의 중얼거림에 아기 여우의 시선이 크리시의 엉덩이로 향했다.

숲의 마법사 11권 446~447페이지 中

***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던 크리시는 누군가 제 머리맡에 앉는 소리를 듣고도 눈을 뜨지 않았다. 상대도 개의치 않고 크리시의 품에 고양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는데, 꼬리 까딱할 힘도 없는 주제에 손길은 기분 좋은지 골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시간 고양이의 그릉그릉 골골송을 들으며 어이없어하던 크리시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먼저 깼어. 우리도 곧 깨야 할 거야.”

카르젠의 대답에 크리시는 굳이 눈을 떠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이비가 깨어났으니, 현실에서 그가 꿈의 여운을 느끼는 동안만 이 공간이 유지될 터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중요한 소식을 전해야 했기에, 카르젠이 가장 알아 줬으면 하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 아프다. 마나 몸살 걸렸어.”

“마나 몸살? 어쩌다?”

“체스가 나이젤 대신관님께 변신 물약 주고 갔거든.”

“뭐? 네게 그걸 마시게 했어?”

“어쩔 수 없었어. 확인할 게 있었거든.”

크리시는 나이젤 대신관에게 전해 들은 페일리 남작이 입궁했던 날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유사가 봤다는 정체 모를 기운과,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남작의 상태에 대해 빠르게 들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카르젠의 손이 멈추자, 고양이가 불만스레 꾸우웅…… 울었다. 카르젠은 다시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체스와 여러 머리 아픈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 문제는 내게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체스도 아직 확신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응. 그리고 확인 결과 남작님은 결백해. 단지, 대신관님은 콜린이 남작님에게 준 팔찌가 수상하다고 여기고 계셔. 아니, 솔직히 콜린을 의심하고 계신 상태야.”

카르젠은 저가 아는 콜린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고결하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은 뿌리부터 썩어 있었다는 것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크리시는 카르젠의 침통함을 뒤로하고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남작과 만났던 날 파악한 것들을 전부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일라나드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도 털어놓자 카르젠이 이를 짓씹었다.

“여하튼, 콜린을 최대한 빨리 만날 생각이야. 남작님께 팔찌를 준 건 콜린이니, 먼저 접촉했을 거야. 현혹됐을 수도 있고. 정신 지배라도 당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니까.”

“…….”

“콜린과 저녁에 식사 자리라도 만들 생각이야. 일어나서 내 컨디션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오늘이라도 부르려고.”

그 말에 카르젠은 잠시간 고민하다 끄덕이며 말했다.

“저녁이라면 나도 불러 줘. 콜린을 직접 봐야겠어.”

“알았어.”

카르젠은 꿈이 끝나 가는 것을 둘러보며 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크리시.”

“…….”

아직 용건도 꺼내지 않았는데 크리시의 미간이 확 찌그러지는 게 보였지만, 카르젠은 담담하게 제 할 말을 했다.

“올 때 초상화 세트 하나만 사다 줘.”

“…….”

“부탁할게. 내가 사긴 조금…… 그렇잖아?”

“……내가 사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크리시는 하필 끝나는 타이밍도 제게 너무 불리한 게 아니냐고 잠결에 투덜대다 멈칫했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시끄러운 사람이.

물론 육성을 내어 시끄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운 기운이 느껴져 잠의 여운이 확 달아났다. 살짝 눈 뜨고 보니, 얇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탄탄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라피엘 경?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아, 크리시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나이젤 대신관님께서 마나 몸살 때문에 많이 힘드실 거라며 간호를 부탁하셨습니다.”

분명 같은 물약을 마셨는데, 당신은 왜 멀쩡하냐고 물으려던 크리시는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건장한 몸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입술 새로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뻐근한 몸을 삐걱거리며 겨우 앉으니 이마에서 툭-하고 물수건이 떨어졌다. 라피엘은 생긋 미소 띤 얼굴로 잽싸게 물수건을 치우며 말했다.

“그리고 당분간 크리시 님 곁을 지키고, 외출하실 경우 필히 무장 동행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예? 무장 동행이요?”

“예. 크리시 님의 곁을 지키며 도움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무려 성기사 팔라딘의 무장 동행이라니…… 크리시는 나이젤의 걱정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경도 아시겠지만, 저는 보호가 필요할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라피엘은 눈꼬리를 내리며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얼굴로 크리시를 응시했다. 크리시는 그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보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일부러 지어 보이는 뻔뻔함이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뻔히 보이는 수를 쓰고…… 경은 제가 불편하지도 않으십니까?”

바로 어제저녁. 나이젤의 주관하에 누설하지 않기로 약식 맹세를 하고 제 비밀을 알려 줬음에도, 그는 크리시를 평소처럼 대했다. 대놓고 자신이 불편하지 않냐고 묻는 질문에, 라피엘은 대답 대신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크리시를 바라봤다. 잠시간 그를 마주하던 크리시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다시 누웠다.

“일단…… 알겠으니 나가 주시죠. 저는 더 쉬어야겠습니다.”

“예. 그럼 방으로 아침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쉬겠…….”

“식사는 하고 쉬셔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하죠. 달리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잔심부름이라도 괜찮습니다. 편히 부려 주세요.”

그 말에 없다고 대답하려던 크리시가 멈칫하며 라피엘을 바라봤다. 뭔가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라피엘이 의욕 가득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아아…… 마침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 이 일은 극비리에 처리해야 합니다.”

“은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신중하게 처리할 문제입니다. 절대…… 절대로 그 누구도 제가 이걸 구한다는 것을 알아선 안 됩니다. 인파에 섞여 들어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데, 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로 들키면 모든 것은 경이 독박 써야 합니다.”

크리시가 재차 은밀함과 독박을 강조하며 부담을 줬지만, 라피엘은 꺾이는 기세 없이 끄덕이며 호언장담했다.

“예.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팔라딘의 의욕 가득한 대답을 들은 크리시는 답지 않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제 돈주머니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볼을 스치며, 눈가를 간지럽히던 잔머리를 쓸어 갔다. 살포시 귀 뒤로 머리를 정리해 주곤, 곱슬곱슬한 앞머리도 천천히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다정한 손길에 기분 좋아진 이비는 눈을 뜨고 싶었지만, 어째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굳이 힘들게 눈 뜨지 않고 꼬물꼬물 움직여 이불에 고개를 파묻으니, 보송보송한 면이 이마에 닿았다. 그런데 느낌이 익숙하면서도 이불의 것과는 달랐다. 움푹 들어가지 않고 말랑하면서도 탄탄한 탄성 덕분에, 고개를 파묻은 것이 이불 뭉치가 아니라는 것을 대번 알 수 있었다.

‘아…… 어제도 카르젠과 한 침대에서 잠들었지.’

이마를 파묻은 위치가 카르젠의 가슴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나니, 고개 들기가 민망해진 이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는 척을 했다. 뻣뻣하게 굳어 언제 일어나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으니, 제 의지와 관계없이 토끼 귀가 쫑긋거렸다. 솜털로 보송보송한 귀가 카르젠의 쇄골 부근을 스쳤는지, 작게 웃는 소리가 정수리에 닿았다.

‘추우니까…… 늦가을이고, 추우니까 파고든 거야. 아침은 추우니까.’

어제부터 저택에 난방 수정을 가동한 덕분에 침실은 훈훈했지만, 본인이 춥다면 추운 거였다. 이비가 얌전히 있으니, 머리를 넘겨 주던 손이 이비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점점 내려가 등허리 부근에서 멈췄다. 그리곤 과하지 않게 힘주어 당겨 안았다.

귀가 움찔했지만, 카르젠은 이비를 부르지 않았다. 제 자는 척이 통했다 생각한 이비는 몸에 긴장을 풀고 얌전히 그가 당기는 대로 밀착해 안겼다. 몸이 붙자, 당기던 손이 떨어지고 꼬리 바로 윗부분을 살살 도닥이기 시작했다.

도닥도닥. 도닥도닥.

일정한 박자로 부드럽게 두드리는 손길에, 놀라지도 않은 꼬리가 털을 부풀렸다. 저 큰 손이 허리를 도닥일 때마다 꼬리 부근이 묘하게 간지러워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다시 잠들 것 같아…….’

시종일관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른함을 느낀 이비는 조금씩 몽롱함에 젖어 들었다. 느릿한 손길에 맞춰 호흡도 따라 느려지고, 짧은 귀는 사르르 풀어져 카르젠의 가슴에 내려앉듯 늘어져 닿았다. 기분 좋게 늦잠에 빠지려는 찰나,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비를 현실로 이끌었다.

“이비. 지금 자면 아침 식사는 건너뛰어야 할 것 같은데.”

“!”

아침 식사라는 말에 귀가 먼저 쫑긋! 하고 반응했다. 아침 식사를 거르다니,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지만, 어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딱히 아프거나 호흡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몸이 무거웠고, 자꾸 눈이 감기려 했다. 지금 막 깼음에도 피곤하다는 것을 인지한 이비는 뒤늦게 전이를 자각하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맞다. 두 사람이 나 대신 아파 주고 있었지…… 카르젠은 괜찮나?’

눈이 마주치자 카르젠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미소 띤 얼굴로 잘 잤냐고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이비는, 작게 끄덕이며 카르젠의 너른 가슴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가슴에 쓰인 글을 쉽게 이해한 그가 대답했다.

“응. 난 괜찮아. 이비는?”

그 질문에 이비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을 썼다.

[아프진 않은데, 몸이 무거운 것 같아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응. 난 정말 괜찮아. 그래도 이비는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게.”

그 말에 이비는 잠시간 고민하다 힘없이 끄덕였다. 아리스도 있으니 마음 같아선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몸이 영 무거운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근육이 뭉친 건지 고개를 끄덕일 때 목부터 승모근까지 당기는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뻐근한 어깨를 작은 손으로 주무르자, 그 하찮은 손짓을 본 카르젠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비. 아침은 일단 가볍게 먹고, 같이 목욕하자. 따뜻한 물에 몸 풀며 마사지해 줄게.”

“!”

마사지라는 말에 이비의 눈동자가 카르젠의 어깨로 향했다. 제 어깨 부근을 살피는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본 카르젠은 자신은 정말 괜찮다고 덧붙이는 대신 생긋 웃어 주었다. 민망함에 벌써 붉어진 얼굴로 작게 끄덕이는 이비를 보고 있자니, 조금은 엄살 부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정말 목도 뻐근한 것 같았다.

***

……-했으나, 리엔은 그들이 쓰고 있는 특이한 모자를 벗겨 내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주변 다크엘프들이 하는 것처럼 목 뒤에 어떤 단추를 누른 후에야 푸슈슈 소리가 나며 모자가 벗겨졌고, 그 안에 보인 것은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칼스타인의 말대로 이들이 순수 인간이라면, 1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차게 식어 버린 소년의 몸을 바라보던 리엔은 부서진 전함에서 유해를 수습 중인 다크엘프들을 바라보았다. 한 그룹은 전함 내부로 들어가 생존자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한 그룹은 전함에서 여러 부품을 떼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전투가 익숙한 듯이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오늘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인 십여 년 전쯤 이곳을 침공했던 전함의 생존자들이자 이곳에 정착한 이계인들 역시 다크엘프들을 돕고 있었다. 당시 생존자들은 현재 대부분 2~30대였다. 즉 저들도 침공 당시엔 이 소년과 같은 또래였다는 것이 리엔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리엔은 소년의 주검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들이 사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왜 이런 어린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일까? 그 모든 해답은 칼스타인과 이계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리엔은 그 해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도망치고 싶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꿈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전혀 다른 고등 문명을 가진 이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보다 거짓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한 좌절감이 리엔의 가슴을 덮쳤다.

<역사를 지운 국가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과 같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기사단장들과 귀족원들이 회의하는 루아인 성 서관 회의실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오래된 석판에 새겨진 글귀였다. 저 글귀대로라면 루아인은 곧 무너질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리엔은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제 안에서 요동치는 화를 억제하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저 전함이라도 때려 부수면 이 기분이 풀릴까? 이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걸까. 온갖 생각에 무릎 꿇고 앉아 동그랗고 딱딱한 이계인의 모자를 바라보고 있던 리엔은, 모자의 표면 반들반들한 부분에 누군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카르…….

카르젠은 리엔의 옆에 앉아 동그란 이계인의 모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참 힘든 하루네. 그렇지?

-그냥……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어.

-그건 걱정하지 마. 저 전함에서 쓸 만한 것들 다 떼면 부술 거래. 그때 껴 달라고 하자. 우리가 부수는 건 또 잘하잖아?

-하하… 하… 하아아…… 카르, 넌…… 괜찮아?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한 카르젠은 마치 개구리 눈알처럼 기이하게 생긴 동그란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 곧 제 머리에 슬쩍 써 보았다. 반질반질한 부분 너머로 리엔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문자가 허공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 기술력에 순수하게 감탄한 카르젠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런 와중에 이계인들의 기술력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걸 보면, 역시 난 반은 엘프가 맞나 봐.

카르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리엔에겐 어쩐지 처연하게 들렸다. 리엔은 모자 앞면에 비치는 제 얼굴이 아주 엉망인 것을 보며 픽 웃었고, 카르젠은 그런 리엔을 잠시간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대답을 이었다.

-유서 깊은 개국 공신 바이스 가문과, 고결한 엘프의 피가 반씩 섞여 있다는 내 긍지와 자부심이 구겨진 날이긴 하지. 거짓말쟁이 앞잡이 가문과 고결하지 못한 종족의 피를 반씩 이어받았는데. 괜찮냐고 묻는다면 글쎄…… 안 괜찮은 것 같네.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인간의 피가 절반 섞여서 그런가 봐…….

-…….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는 것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런 의미에서 내 아버지는 명예로운 기사가 아니었고…… 그 사실이 나는…… 몹시 실망스러워.

리엔은 모자에 비치는 제 얼굴이 점점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도 대답하지 못했다.

숲의 마법사 12권 90~91페이지 中

***

‘엄마야…….’

저도 모르게 국적 추적이 가능한 감탄사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비는 제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침대에서 식사 후 카르젠과 목욕을 하며 마사지를 받아서 그런지 어째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목욕하며 카르젠의 몸으로 자꾸 눈이 가는 바람에 신경 쓰느라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해진 상태였다.

이전에도 함께 목욕하며 이미 그의 몸을 보긴 했지만, 오늘 다시 보니 새삼 아름다운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정성스럽게 빚어낸 예술의 결정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비는 카르젠의 아름다운 몸을 떠올리지 않으려 다리를 버둥거리다 바로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점점 체력이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처음엔 몰랐지만, 지금은 제 몸 상태가 영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전반적으로 점점 더 빠르게 피곤해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연약하디 연약한 몸을 전이받은 탓에, 손을 덜덜 떨던 크리시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무리 전이가 거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제 잘못같이 느껴졌다.

‘여기선 진짜 열심히 먹고, 최선을 다해 쉬는데 왜 자꾸 힘이 빠질까…….’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해 가슴을 퍽퍽 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전 삶, 김현서였을 적에도 병명조차 없는 희귀 불치병 덕분에 갖은 고생을 했는데,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걸 자각하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설마 또 불치병이거나 이전처럼 아프면 어떡하지…… 하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대로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 또 중증을 앓거나, 최악의 경우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물론 전이가 없이도 크게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이상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침울해진 탓에 짧은 토끼 귀가 축 늘어졌다. 침대에 엎드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이비는 새하얀 시트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 의지와 관계없이 억울함이 치솟았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전생도 아파서 앓다 죽었는데, 이번 생에도 만약 그런 거라면 신을 두고두고 원망할 것 같았다. 혹시나 이런 생각만으로도 벌 받는 건 아닐까 하는 소심한 우려가 피어나려던 찰나…….

-형 미워! 맨날 현아만 감싸고! 형 진짜 미워!

그 순간 귓전에 울린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이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바로,

-엄마… 아빠… 있잖아…… 나 스위스 가면 안 돼……?

고통을 머금은 소년의 목소리를 들은 이비는 눈을 크게 뜬 채 깜빡이지도 못하고 숨도 쉬지 못했다. 불현듯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세상에서 김현서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직접 대못을 박은 김현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잊고 싶은데, 다 잊고 싶은데도, 무의식은 이 모든 것이 네 잘못이니 절대 잊지 말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고, 그런데, 우리 현서한테 정말 너무 미안한데, 현서가 조금만 더 엄마 아빠랑 힘내 주면 안 될까? 응? 애원하며 오열하던 부모님의 모습과……

형이 왜 밉냐고, 형은 현서랑 현아랑 둘 다 똑같이 좋아한다고. 그러니 형 미워하지 말라고, 형이 나중에 현아가 네 젤리 못 먹게 타이를 테니까 울지 말라고, 대신 형이 지금 바로 사다 주겠다며 웃던 모습이 연달아 떠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

“헉… 허억…….”

제대로 숨 쉬기가 힘들어 헐떡대며 시트를 부여잡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이내 눈물이 줄줄 흐르며 시트를 적셨다. 코가 벌써 꽉 막혀 버린 탓에 입으로 겨우 얕은 호흡을 유지하던 이비는 괴로움에 눈을 감았다.

‘숨 막혀…… 벌… 벌 받는 게 맞구나…… 다 내가 잘못해서…….’

저가 준 상처의 크기가 너무도 커서, 지금도 잊지 못해 이렇게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로 심장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열다섯 살 무렵.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정말 죽을 것같이 아파서, 몇 날 며칠간 통증이 줄지 않아서 딱 한 번…… 딱 한 번 부모님께 안락사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던 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우는 부모님을 본 김현서는, 이미 자식을 잃어 본 부모님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김현서는 부모님이 형을 잃은 이유가 사실은 다 제 탓이라는 것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 열 살 어린 나이에 형을 잃은 김현서는 죽을 때까지 자문했었다. 자신이 그날, 유독 동생 현아 편만 드는 형이 밉다고 울며 짜증 부리지 않았더라면…… 형이 저를 달래 준다고 잠시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그 말에 이미 다 풀어졌으니 괜찮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형은 여전히 곁에 있었을까…… 엄마 아빠가 만약 형이 나 때문에 실종된 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헉, 흐윽… 윽…….”

‘다 내 잘못이라 벌 받는 건가…… 혹시 이게 아리스가 말한 업보…….’

“헛소리.”

철썩!

“흐읏!?”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엉덩이에 불같은 통증이 퍼졌다. 고통에 발딱 일어나 앉은 이비는, 방 안에 아리스를 보고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리스는 귀와 꼬리털이 펑 부푼 상태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이비의 옆에 다가와 앉아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아니. 헛생각인가. 어쨌든. 전부 바보 같은 생각이야.”

“흑……?”

아리스는 혼란함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책하는 이비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순간 낑 하는 소리가 나며 이비가 이마를 부여잡고 엎어졌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엔 엉덩이를 또 팡팡! 때렸다.

‘아, 아파요! 아리스, 아프다구요!’

“아파서 정신 차리라고 때렸다. 이놈아. 이 바보야! 네 부모님이 들으면 억장 무너질 생각이나 하고 있어! 이 쪼꼬만 게 어디서! 어! 아주 그냥!”

‘으악! 잘못했어요!’

이후로도 이비의 엉덩이를 서너 대 때려 준 아리스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엔 이비의 코를 꼬집으며 말했다.

“다신 그런 생각 하지 마. 세상 쓸데없는 생각이야. 알았어?”

‘아파요!’

팡!

‘끄악!’

또 엉덩이를 맞은 이비가 활어마냥 펄떡거렸지만, 아리스는 정신 차리라며 가차 없이 철썩철썩 때렸다.

“아읏!”

몇 초 전만 해도 자책감에 울던 이비는, 이젠 엉덩이가 아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겉보기엔 하늘하늘 솜사탕 같은 소녀의 모습이면서 무슨 손이 이리 매운지, 현역 특수 부대원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악! 아리스, 진짜 아파요!’

아프다고 꿈틀대던 이비는, 아리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함하며 아리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우웅!”

“뭐가 또 아우웅이야, 아우웅은. 귀여운 척하지 마.”

‘귀여운 척한 거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울먹울먹 올려다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웠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이비를 엄하게 내려다보던 아리스의 입꼬리가 결국 피식 소리를 내며 올라가 버렸다.

“이제 정신 좀 들었어?”

‘네…… 아주 확 들었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비는 조금 전, 자신의 정신 상태가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카르젠과 목욕하고 나왔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훅 튀어나온 상념에 이성을 잡아먹힌 기분이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비는 이 나락으로 끌려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분명 이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카르젠이랑 카페 거리를 걷던 날이랑 납치당할 뻔했던 날에도 그랬었어…….’

이상하리만큼 감정 제어가 안 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격해지면서 호흡이 부족해짐과 동시에 불쾌한 무언가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 혼란스러워하는 이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노크하고 불렀는지 모르지?”

‘전혀 못 들었어요…….’

“그런 것 같더라. 심각해질 것 같아서 정신 끌려고 궁디 팡팡 좀 했다. 이제 정신 좀 들었어?”

‘……네, 아주 번쩍 들었어요. 그리고 엉덩이에 멍들지도 몰라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투덜 생각하니,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이비는 또 엉덩이를 맞을까 봐 잽싸게 아리스의 손목을 잡고 살살 움직이며 제 머리를 계속 쓰다듬도록 유도했다. 저 하찮은 손길에 실소가 터진 아리스는 이제 안 때려. 안 때린다고.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신 차리라고 때린 거야. 너 완전히 패닉이었거든.”

‘패닉이요?’

“응. 더 심각하게 패닉에 빠지면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거든. 어쩔 수 없이 때릴 수밖에 없었어. 늦었지만 미안.”

괜찮다며 사과를 받아 준 이비는 그런 건 어떻게 그리 잘 아냐며 궁금해했고, 저 순수한 의문을 들은 아리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강도 높은 훈련이나 전시 상황에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트라우마로 발작을 일으키는 대원들이 종종 있었거든.”

‘진짜요? 특수 부대원들은 다 강한 줄 알았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아리스의 손이 멈춘 바람에 이비가 또 긴장했지만, 이번엔 손을 내려 어깨를 도닥여 주며 말했다.

“이건 강하고 약하고 문제가 아냐. 네가 심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진짜요?’

아리스는 손으로 축 늘어진 이비의 토끼 귀를 쫑긋하게 세우며 끄덕였다.

“당연하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일 뿐이야. 그러니 겁먹고 주눅 들 것 없어.”

겁먹거나 주눅들 필요 없다는 말에, 이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리스는 조금씩 안정 중인 이비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그땐 어떻게 넘겼어?”

‘그땐 카르젠이랑 크리시가 도와줬었어요. 어…… 근데 어떻게 도와줬더라?’

필리스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카르젠과 함께 케이크를 구경하던 이비는 문득 동생을 떠올린 것만으로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펑펑 쏟았었다. 닥치지도 않은 일에 겁먹고, 움츠러든 날도 있었는데, 당시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혼란해 불순한 감정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자신이 대체 어떻게 진정했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겨우 정신 차렸을 때 카르젠과 크리시가 곁에 있었다. 두 사람이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알겠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지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이비가 갸웃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려 애쓰고 있으니, 아리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약 또 그런 기분이 들면 침착하게 주변부터 살펴. 그리고 바로 앞에 뭐가 보이는지 먼저 명확하게 파악해 봐.”

‘눈에 보이는 거요?’

아리스는 패닉 상태에서 현실 감각을 깨우는 방법을 전생의 기억대로 설명하려다 관뒀다. 군대도 안 간 어린애한테 먼저 주먹을 쥐었다 펴고, 발을 까딱이며 팔다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귀와 등과 옆구리를 쓸어서 묻어난 혈흔이 없으면 당장 쓸 수 있는 화기부터 손에 쥐고. 남은 탄약 확인과 보조 병기를 파악하고…… 또 엄폐물과 동료가 곁에 있는지 살피며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만약 대치 상황이면 총성이 들리는 방향을 유추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 보라는 조언은 하등 쓸모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리스는 잠시간 고민하다 눈앞의 토끼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했다.

“음…… 일단 제일 먼저 네 곁에 누가 있는지 먼저 파악해. 만약 아무도 없다면 어떤 물건이 있는지를 눈여겨보는 거야. 어떤 소리가 나는지 집중하는 것도 좋아. 뭐 바람 소리나, 새소리나, 물소리나, 누가 떠드는 소리나…….”

끄덕.

“네 손으로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에 집중하며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해 봐. 지금 같은 경우 베개를 잡아 보는 것도 좋고, 베개를 눌러 보며 네 손으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을 파악하는 게 중요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직접 베개를 집어 던질 수 있다는 것만 인지해도 네 뇌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거든.”

“…….”

이비의 시선이 베개로 향했다. 저걸 집어 던진다고 자신감이 생길 것 같진 않았지만, 확실히 조금 전처럼 정신 제어가 어려운 상태면 뭐라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끄덕였다. 아리스는 이비가 어느 정도 이해하자 마저 설명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두려움은 네 목을 조를 수 없고, 널 삼킬 수 없다는 걸 상기하는 거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때 이것만 기억해 내도 반은 성공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소 추상적인 마지막 말에 이비가 눈만 깜빡이니, 아리스가 헛기침하며 덧붙였다.

“크흠. 흠. 내가 있던 티어 팀에서 자주 하던 말이었지. 한마디로 걱정은 물리적으로 널 해칠 수 없다는 거야.”

잠시간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본 이비는 곧 끄덕이며 마음으로 대답했다.

‘다음에 또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약 또 이렇게 힘들어지면 아리스 말대로 침착하게 해 볼게요.’

이비는 이 세계에 와서 겪은 패닉이라는 증상이 그저 낯설고 무서웠지만, 아리스의 말을 곱씹으며 각오를 다졌다. 다음엔 꼭 혼자 해결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이비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격려했다.

“아가. 만약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절대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것은 네 탓이 아니야. 애초에 사람들이 이걸 능숙하게 제어할 수 있으면 패닉이라고 하지도 않아.”

끄덕끄덕.

“그리고. 진정했으니 하는 말인데…… 과거 일어난 일은 그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을 뿐이야. 네 잘못 하나도 없어.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절대로 네 탓이 아니야. 넌 그저 앞으로 행복하게 살면 돼.”

“…….”

그 말에 이비는 저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시무룩해지려 했지만, 아리스는 틈을 주지 않고 덧붙였다.

“날 믿어. 나도 아이가 둘 있잖아.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내 아이가 나보다 먼저 떠나고, 우연히 다른 세상에서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면, 그땐 날 떠올리면서 슬퍼하기보단 거기서 언제나 행복하길 바랄 거야.”

단호함과 다정함이 녹아든 말에 어느 정도 진정한 이비는 아리스의 허리에 매달려 훌쩍였다. 그래서 아리스는 이비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주인공’ 리엔이 유사와 함께 조금 전에 막 도착했다는 소식과, 마중 나간 카르젠과 정원에서 말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나중에 알려 주기로 했다.

우선은 이 심약한 녀석이 완벽하게 안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비는 그간 꾹 억눌렀던 상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제 형을 보내 줘야 했지만, 아직 놓지 못해 가슴이 아팠다.

남은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머리로 인정했지만, 유독 형에 대해서만큼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저도 죽어서 필리스로 왔으니, 어쩌면 형도 필리스나 다른 세계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만약 부모님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면 이비도 형을 잃은 것을 인정했을 수도 있지만, 김현서의 부모님은 장남 김현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단순히 그러길 바라는 헛된 희망이 아니라, 제 아이의 생존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단지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만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현우는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그러니 그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현우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인터뷰하며 김현우의 이름으로 크게 기부하곤 했다.

그리고 김현서가 불치병 진단을 받은 후에는 아예 김현우와 김현서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기부를 매달 크게 했었다. 아마 지금도 형과 제 이름으로 좋은 일을 앞장서서 하고 계실 게 분명했다.

“훌륭한 분들이셨네.”

조용히 도닥여 주며 이비의 상념을 들은 아리스가 운을 떼자, 무릎을 베고 누운 이비가 훌쩍이며 끄덕였다.

‘네. 두 분 다 정말 멋지고 현명하고 다정한 분들이었어요.’

준 대기업이었던 김현서의 집안은 보통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 가족들과는 전혀 달랐다. 가족끼리 화목하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늘 함께했다. 이비는 형이 곁에 있고 자신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가족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다른 소설 주인공들처럼 고아였다면 이렇게 슬프진 않을 텐데…….’

이비가 봤던 숱한 빙의물 주인공들은 거의 고아거나, 이전 삶이 퍽 불행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빙의 후, 새 삶에 금방 적응하고 더 행복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행복하냐만 두고 본다면, 현재 이비도 자신의 상황 자체에는 만족하고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아리스는 가족들을 잊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그 물음에 아리스는 잠시간 고민하다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못 잊었어.”

이비의 귀가 다시 축 늘어졌다. 아리스는 짧은 토끼 귀를 손으로 꼿꼿하게 세워 주며 덧붙였다.

“나는 아직도 이맘때면 핼러윈 분장을 한 조카들 손을 잡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으러 다니던 순간이 눈에 선해.”

“…….”

“겨울이면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즐기던 추수 감사절이, 연말이면 거실에 세워 둔 트리를 꾸미던 날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해.”

“…….”

“네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할게.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은 흐려지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며 그리워질 때도 많을 거야. 그리고 그때마다 많이 슬프겠지.”

“…….”

“그런데 말야. 그리움은 여전해도 슬픔은 점점 옅어지더라…… 그래서 지금은 내가 두고 온 소중한 이들이 생각나도 가슴이 아프거나 괴롭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아리스는 기억의 파편에 찔려 아파하는 이비를 최선을 다해 보듬어 주었지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저가 아무리 공감해 준다고 해도, 이건 이비 스스로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이비의 생각이 들려왔다.

‘아리스, 있잖아요…… 만약 제가 여기서 형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면…… 그건 너무 무모한 일일까요?’

“으음…….”

‘형을 찾아볼 만큼 찾아보고 나서도 못 찾으면…… 미련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해서…….’

이비는 평소의 저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곳 필리스에 와서부터 어째 부모님의 믿음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이 세계 어딘가에 제 형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어떤 실마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근거 없는 믿음이 피어났다.

아리스가 당연히 헛된 일이라고 말할 줄 알고 다른 생각을 하려는 찰나, 또 축 늘어지려는 귀가 강제로 꼿꼿하게 세워졌다. 이비가 고개를 살짝 틀어 올려다보니, 아리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모하면 어때. 그럼 나는 뭐 확신을 가지고 그런 책들을 썼겠어? 나도 무모하게 저지르고 본 거야.”

“!”

이비는 아리스가 머니마니 달러스 필명으로 펴낸 <나를 찾아와 줘.> 책 말고 남사스럽던 제목들이 떠올라 확 붉어졌다.

‘아 진짜. 아리스, 생각해 보니 진짜아…… 아니, 무슨 책 제목을 어떻게 그렇게 지어요! 그러다 고소당하면 어쩌려고!’

“차암나. 여기서 고소당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리고 제목만 그렇게 지은 거야. 제목만. 너 같은 사람들 눈에 확 띄어야 하니까.”

‘확실히 엄청 눈에 띄긴 했죠…… 저도 보자마자 알아봤고. 아, 그리고 주디가 알려 줬는데, 해피포터 시리즈 신간 또 나와요?’

이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물으니, 아리스가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뭐…… 해피포터와 대물 기사단도 곧 퇴고 예정이지. 넌 보지 마. 애가 보는 거 아니다.”

애라는 말보다 대물 기사단이라는 말이 귀에 박힌 이비는 불현듯 카르젠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마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아리스는, 너 때문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얻었다며 한숨 쉬어 이비를 더 격하게 굴렸다.

“카르. 이비는 언제 와?”

거대한 말 위에 인간화해 앉아 있는 유사의 물음에, 카르젠은 이비의 방 발코니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아리스가 데리러 갔으니, 곧 나올 거야.”

이비를 곧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유사의 꼬리가 힘차게 파닥거렸다. 고삐를 잡고 천천히 마당을 걷던 리엔은 드디어 소문의 그를 보게 되는 건가 싶어 기대하다가도,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떠올라 짐짓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렌델이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많이 안 좋은 거야?”

“솔직히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야.”

“하렌델은 뭐라고 해?”

“원인을 찾지는 못했어. 아직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는 지표도 없는 상태라……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도움 될 만한 것들을 알아보고 있어.”

“그래…… 걱정이네. 단원들은 네 결혼식 때 입을 예복 맞추자며 속 편하게 떠들고 있는데 말이지.”

리엔의 푸념에 카르젠은 조금 풀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인에서 결혼으로 발전했나 보네.”

안 들어도 알 만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보다 더 앞서 나간 소문도 많지만,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아 리엔은 은근하게 화제를 돌렸다.

“체스 말로는 심약한 사람이니 말도 가려서 하라고 하던데, 내가 특별히 조심할 건 없어?”

리엔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간 이비에 대해 생각한 카르젠은 이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나도 아직은 이비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서.”

말 그대로 카르젠은 저가 이비에 대해 아는 거라곤 단편적인 것뿐이라 생각했다. 매일 붙어 있으면서, 아직 이비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심지어 이비가 그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듣지 못했지…… 고민하지 말고 내게 전부 말해 준다면 좋을 텐데…….’

카르젠도 이비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라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리엔의 질문과 멀어지는 것을 느낀 카르젠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음, 일단. 이비는 묘족의 피가 섞여서 청각에 예민해. 천둥 같은 큰 소리에 약하고, 평소에도 잘 놀라는 편이야.”

“유사. 들었지? 오늘은 떼쓰고 울면 안 된다?”

“유사는 매일 울지 않아!”

유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 깜찍한 모습을 본 리엔이 쿡쿡 웃으며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카르젠 역시 유사의 꼬리를 한번 쓸어 주며 말을 이었다.

“이비는 물고기를 무서워해.”

“물고기?”

“응. 그리고 조류도 무섭다고 했어. 그런 의미에서 전서구도 조심해 줘.”

리엔은 카르젠과는 통신 수정을 이용하기에 딱히 전서구를 보낼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 기억해 두겠다며 물었다.

“무서운 게 뭐 그리 많아? 그럼 해산물이나 조류는 못 먹어? 닭도?”

“닭 맛있는데!”

리엔과 유사가 제각각 반응하는 모습에 카르젠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비늘이 보이거나 날개같이 모습이 드러나는 부위는 안 건드리지만, 살만 발라 요리하면 잘 먹더라고.”

“크리시보다 더 까다롭네.”

“유사는 날개 잘 먹어! 유사가 이비 꺼 대신 먹어 주면 되겠다, 그치!”

“응. 유사가 이비 옆에서 많이 도와주면 되겠네.”

카르젠이 호응해 주며 유사만 믿겠다고 말하자, 대번 기분 좋아진 아기 여우의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렸다. 뭔가 더 없나 고민하던 카르젠은 이비가 콥스 아저씨의 레스토랑에서 매운 닭 요리를 먹고 눈물 흘리던 모습을 기억하고 덧붙였다.

“매운 음식은 못 먹고…… 야채는 잘 먹지만, 고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

“차는 가향차를 곧잘 마시고, 디저트는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야.”

“…….”

“아, 그리고. 상큼한 걸 좋아해. 생레몬도 잘 먹더라고.”

레몬을 생으로 먹는다는 이야기에 유사는 상상만 해도 시다는 듯이 눈을 꾹 감고 몸서리쳤다. 아기 여우가 바르르 떠는 모습에 잠시 웃은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아리스가 데려온 주방장이 만든 음식도 잘 먹는 걸 보면 딱히 가리는 건 없는 것 같은데…….”

카르젠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리엔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느긋하게 걷던 카르젠은 리엔의 뚱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먹는 거 말고, 뭔가 다른 건 없어?”

“먹는 거 말고?”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것만 연상한 카르젠은 차분하게 음식 외적인 것을 떠올려 보기 시작하니, 가장 먼저 꿈에서 만났던 이비의 검은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이어 저가 웃어 주면 눈부시다며 실눈 뜨던 모습이나, 함께 잠들기 전에 늘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고, 제 몸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가슴은 잘만 만지는 모순된 행동들이 연달아 떠올라 괜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글씨를 쓰겠다고 제 신체 부위 중 넓은 면을 이용한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해 보니 재미있었다.

서재 소파나 침대에 앉을 땐 무릎을 세우고 앉는 걸 편하게 여겼고, 창가에 앉아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고, 눈물도 많고, 간지러움을 많이 타고, 체구가 작고 체온이 높아 안고 있으면 편했다.

평소 생각하는 모든 게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솔직하면서, 작은 몸에 참 많은 비밀을 품은 사람…… 바로 직전까지 이비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의외로 많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르젠은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다른 모습도 많긴 한데, 그건 나만 알고 싶어.”

그 대답에 눈이 커진 리엔은, 이내 카르젠을 따라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 말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유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찌. 이찌, 카르. 유사도 알고 시푼데…… 유사한테만 살짝 말해 주면 앙 대?”

솔직한 아기 여우의 반응에 카르젠과 리엔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바다는 필리스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이 바다로부터 태어났으며, 중간계의 모든 생명은 땅에 묻혀도 결국엔 바다로 흘러갔다. 별을 품고 생명을 아우르는 바다는 온전한 신의 영역이었다.

수많은 해양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 심해를 연구해 왔지만, 신력과 마나가 어우러질 수 없는 탓에 마나 장비는 깊은 바다에 도달할 수 없었고, 지금껏 살아서 심해를 본 중간계의 종족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나를 가졌어도 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했다. 피 대신 마나가 흐른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전해지는, 태초부터 마나를 지배해 온 드래곤조차 심해를 정복할 수는 없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에벨루스가 편애하는 프리스트의 친구이자 위대한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는 인어왕의 키스를 받은 유일한 드래곤이었으며, 인어왕의 오랜 친구였다. 그렇기에 지그하르트는 제 친구가 원하면 응당 심해에 찾아와 곁에 머물며 슬픔을 함께 나누고, 품어선 안 될 것들을 심해의 균열에 흩뿌려 주었다.

심해의 바닥, 너무도 깊어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검은 슬픔을 바라보던 지그하르트가 제 옆에 인어왕 에이디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이디아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지그하르트는 흐를 새 없이 바닷물에 흩어져 버리는 인어왕의 눈물을 보다 못해 말했다.

“에이디아. 그대가 어서 기운을 차려야 바다가 안정되지 않겠나.”

심해의 균열에서 뿜어져 올라온 공기 방울이 마치 에이디아를 위로하듯 그의 뺨을 훑으며 뽀글뽀글 올라갔다. 에이디아의 긴 머리카락 역시 균열의 물살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는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균열로 떨어져 내리는 시커먼 슬픔을 응시했다.

“에이디아.”

“뭍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겠군…… 어서 가 보게.”

언제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지그하르트는 에이디아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보듬어 주며 말했다.

“이리 슬퍼하는 그대를 두고 마음 편히 갈 수 있겠나.”

드래곤답지 않게 다정한 말에, 에이디아가 힘없이 웃으며 속삭였다.

“미안하네. 이토록 오랫동안 드래곤의 발목을 잡는 이는 나밖에 없겠지…….”

지그하르트는 슬픔에 젖은 친구를 위로하는 것은 자아를 가진 존재의 본능과 같다며 그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지그하르트, 그대는 나를 자꾸 약하게 만들어.”

에이디아는 블랙드래곤이 제 버릇을 나쁘게 만든다며, 꼬리로 그의 하체를 휘감았다. 지그하르트는 저를 속박하는 인어왕의 응석을 받아 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에이디아. 이제 난 떠나야 하네.”

안타까움이 묻어난 육성에, 에이디아는 대답 대신 끄덕이며 제 손을 가슴에 대고 슬픔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에이디아의 손짓을 따라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슬픔이 심해의 바닥 균열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 전, 바다로 흘러 들어온 제 아이의 죽음을 느낀 후로 인어왕은 가슴에 휘몰아치는 슬픔을 다스릴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바다를 돌보지 못했다. 그저 비우고 또 비워도 금세 차올라 흘러넘치는 슬픔을 심해의 균열로 버리는 데 온 시간을 쏟고 있었다.

자식 잃은 슬픔을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인어왕이 품은 슬픔이 너무 커 재앙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 블랙드래곤은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 밖에서 삿된 마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한 이상 그는 뭍으로 가야 했다. 심해가 아니라면 존재해선 안 될 균열이, 바다에서 먼 뭍에서 선연하게 느껴졌다.

지그하르트는 제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에이디아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 주며 말했다.

“그대에게 약속하겠네. 최선을 다해 남은 아이를 찾아보겠다고. 그리고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내가 꼭 그대 곁으로, 바다로 돌려보내 주겠네.”

여전히 꼬리를 감은 채, 상체를 지그하르트의 품에서 살포시 떨어뜨린 에이디아는, 물결치는 제 머리카락에 감싸인 그를 응시하다 곧 슬픈 눈으로 애써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지그하르트 그대를 믿어. 부디 내 아이를 찾아 줘. 그리고 그 아이를 내 곁으로 돌려보내 줘. 내가…….”

잠시 말을 멈춘 에이디아가 괴로움을 삼켜 낸 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다스리며 말을 맺었다.

“직접 내 아이를 찾으러 뭍으로 가기 전에…….”

진중한 얼굴로 끄덕인 지그하르트는 수백 년 만에 미약한 긴장을 느꼈다. 블랙드래곤은 인어왕의 해일이 육지를 집어삼키기 전에, 아직 바다로 흘러들어오지 못한 그의 아이를 서둘러 찾아야 했다.

***

“쯧.”

짜증스레 혀를 차는 소리는 슬슬 제 성질머리를 보여 주려는 파도 소리에 묻혀 버렸다. 분명 오전에만 해도, 아니 조금 전만 해도 잔잔했던 파도가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를 잘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비웃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는 명백하게 바다가 성난 모습이었다.

허공을 부유하며 격렬한 마나 거부 현상을 지켜보던 남자는 결국 아공간 주머니를 거두었다. 그러자 주변 파도가 천천히 잦아들더니,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파도가 잦아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그대로 공중에 드러누워 투덜거렸다.

“물 좀 퍼 가자는데, 비싸게 구네. 하아…… 형이 나한테 처음 부탁한 일인데…… 시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가 바다를 노려보며 흑진주같이 검고 부드러운 머리를 쓸어 넘기자, 보통 인간과 다르게 길고 뾰족하면서, 엘프보다는 짧은 귀가 드러났다. 제멋대로 흐트러졌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앉으며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뱁새의 정수리를 스쳤다.

각각 푸른색과 짙은 회색 눈동자를 나눠 가진 남자는 야심 차게 준비해 온 아공간 주머니를 거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지?”

이젠 완벽하게 잔잔해진 파도를 보며 불만스레 고개를 까딱였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어떻게 생각해, 시바?”

남자의 물음에 지금껏 그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뱁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리를 열었다.

“바다가 화난 것 같군.”

작고 귀여운 뱁새의 부리에서 나온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역시 그런 것 같지?” 정도로 맞장구치며 끄덕였다. 남부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이 마법 아이템으로 바닷물을 길을 수 없다고 보고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저가 직접 시도해도 도통 담기지 않으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분명 예전에 남부 귀족들이 수족관 만들 때는 문제 없이 퍼다 날랐다고 했는데…….”

남부 영지에 힐드레드 자작이 저택 지하에 수족관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고위 귀족이나 극소수의 지인만 초대하여 수족관을 공개하는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진 힐드레드 자작 덕분에, 남부 마법사 길드가 제법 쏠쏠한 벌이를 했다는 이야기는 북부 마법사 길드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북부에서 아공간 아이템 상용화 연구를 앞당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

“다른 바다에서 길어 간 것도 아닐 거고.”

루아인 영토는 남부만 바다와 닿아 있었으니, 분명 이 바다가 맞을 터였지만, 바다는 약간의 마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남자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는 것을 확인한 시바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그런데 네 형은 바닷물을 왜 길어 오라고 한 거지? 그는 사치스러운 사람인가?”

시바의 물음에 남자는 여전히 바다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카르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형이 수족관을 만든다면 과시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시바는 과시가 아니라면 굳이 수도 저택에 수족관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하는 대신, 끄덕이며 부리를 앙다물었다. 의도가 어쨌든, 이 남자의 형은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마법사가 바닷물을 긷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잔잔해진 바다의 눈치를 살피다 은근하게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지만, 이내 포기했다. 파도가 다시 울렁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남자가 크게 실망한 모습에 시바는 작은 날개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 달쯤 전부터 마나 동력 배는 띄울 수가 없어서 구시대에 제작한 석탄 연료를 동력 삼는 배만 겨우 띄우고 있다더군. 성녀까지 등장한 탓에 대재앙이 가까워졌다고 떠드는 이들도 많은 것 같아.”

엘카사트 제국에 80년 만의 성녀가 강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바다가 변했다. 그동안 바다는 필리스의 어버이답게 피조물들의 마나를 어느 정도 포용해 주었지만, 현재는 작은 마나조차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니, 뱃사람들의 불안한 말 한두 마디가 와전되어 퍼지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처음엔 ‘바다에서 잘 작동하던 마나 동력 장치가 전부 먹통이 되었다.’라는 내용이었지만, 이야기가 부풀며 ‘마나 동력 장치 배를 바다가 삼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거대한 해일이 뭍을 삼켜 고대처럼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까지 변형되어 남부에서 퍼지고 있었다.

“왜 갑자기 거부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바다가 이토록 화난 이유가 뭘까?”

“…….”

남자의 혼잣말에 시바는 고개를 기울이며 잔잔한 해수면을 응시했다. 그 이유를 저가 알면 이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쪽쪽 빨아 먹으며 빌붙는 대신, 예언자 놀음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바도 궁금하긴 했다. 바다가 이렇게 갑자기…….

벌떡!

“짹! 갑자기 뭐냐! 놀랐잖…… 째액!”

식겁해 따지려던 찰나, 남자가 시바를 움켜잡더니 제 셔츠 가슴 포켓에 쑤셔 박고 높이 날아올랐다. 불평할 새도 없이 쑤셔 박힌 시바가 주머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을 때 남자는 이미 해수면에서 꽤 높이 오른 상태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고도를 올렸는지 파악하려던 시바는, 이내 바닷물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고 부리를 쩍 벌렸다.

“바, 바다가! 검게 물들다니……!”

부리를 파르르 떨며 겨우 뱉은 말에, 남자가 무언가에 홀린 목소리로 시바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시바. 잘 봐. 저건 바다가 물드는 게 아니라…….”

어둠으로 물드는 면적이 점점 넓어졌다. 남자가 조금 더 위로 날아오르고 나서야 시바는 남자의 말뜻을 알아챘다. 거대한 존재가 깊은 바다에서 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 빠른 속도로 헤엄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경악했다.

그 크기가 너무 거대하여 바다에 가라앉아 있던 섬이 떠오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자가 고도를 계속 높여도 저 거대한 존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황한 시바가 도망가지 않고 뭐 하냐고, 텔레포트라도 하라고 남자의 셔츠 주머니를 부여잡고 부리를 나불댔지만, 남자는 묘한 미소를 띠며 제 몸 하나 겨우 가릴 정도의 둥근 보호막을 생성했다.

시바는 부리를 다물지 못하고 발발 떨기만 했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바다를 찢다시피 가르며 솟아올랐다.

블랙드래곤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얼떨떨해하던 시바는 저도 모르게 드래곤과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삐, 삐이이…….”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

아리스와 막 저택 현관을 나서며 카르젠이 웃는 모습을 본 이비는, 무의식중에 귀를 쫑긋 세우고 청각에 집중했다.

‘카르젠, 기분 좋아 보이네.’

현관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가니 유사가 “유사한테만 살짝 말해 주면 앙 대?”라며 묻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유사의 뒤에 말고삐를 잡은 장신의 여인이 보였다. 저택을 등지고 있었지만, 이비는 그녀가 리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 같은 머리카락…….’

<숲의 마법사> 작중에서 리엔의 외양을 묘사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었다. 이비는 그렇게 비유한 이유를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단순히 ‘붉다’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강렬한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석양 같다.’

유사의 맞은편에 서 있는 카르젠은 마치 사랑스럽고 애틋한 이를 보는 것처럼, 애정 충만한 눈빛으로 리엔을 향해 웃고 있었다. 저 미소만 봐도 카르젠이 리엔을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카르젠은…… 역시 리엔을 좋아하는 건가…….’

분명 <숲의 마법사>에서 카르젠이 서브 남주이긴 했지만, 애초에 원작은 로맨스가 주가 아닌 판타지가 주인 소설이었기에 메인 남주 체스터와 리엔의 관계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상태로 완결이 났었다.

작중 체스터가 리엔을 좋아하는 대목은 종종 드러났었지만, 카르젠은 리엔의 곁을 묵묵하게 지키는 친구로만 서술됐기에, 독자들도 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다. 아니다. 파로 나뉘었었다. 카르젠이 리엔을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독자들은 그가 머리카락을 리엔에게 허락했으니, 특별한 게 맞다는 주장을 펼쳤고, 반대파 독자들은 유사도 카르젠의 머리를 만진다며 반박했었다.

이비 역시 원작을 읽을 당시엔 연애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워낙 상냥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다 보니, 제 친구 리엔이 고생하는 모습이 싫어서 더 신경 쓰고 도와주는 게 아닐까 했었다.

‘카르젠은 누구에게나 다정하니까…….’

그래서 막연하게 카르젠이 리엔을 이성으로 좋아한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었는데, 지금 리엔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 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제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원작의 완결 이후, 카르젠과 리엔의 관계에 대한 제 추측이 틀린 것을 눈으로 확인해서였을까? 기분이 이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기애애한 저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마치 저가 방해꾼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하는 거 아닌가? 조금 있다가 나올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옆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

‘헛! 아리스!’

카르젠의 처음 보는 얼굴에 놀란 탓에, 아리스가 곁에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온갖 생각을 다 해 버린 이비는 새빨개져서 아리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리스, 나중에 나올까요? 어쩌죠? 저 두 사람 분위기가 너무 좋은데?’

“아가.”

“아우?”

“……아니다. 됐다.”

뭔가 말하려다 마는 모습을 보고 갸웃하는 토끼에게, 아리스는 별다른 설명 대신 이비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핫! 이비다! 이비~ 안냥!”

이비는 제 기척을 느끼고 반갑게 인사하는 유사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리엔이 제 쪽을 바라봤다. 천천히 돌아선 리엔의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이비는, 미약한 긴장을 느꼈다. 카르젠이 계단 앞으로 다가오더니, 아리스와 맞잡은 이비의 손을 저가 부드럽게 받아 잡으며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이비. 내 친구를 소개해 줄게.”

드디어 <숲의 마법사>의 진정한 주인공, 샤이나 리엔을 마주한 이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조금 전, 두 사람 사이에 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스러웠던 마음은 리엔을 마주한 순간 증발해 버렸다. 벅차오르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카르젠의 손을 꽉 잡았다.

‘리엔…… 완전 멋있어…….’

가까이서 본 리엔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작중 180cm는 넘지 않는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토끼 귀까지 다 합쳐도 이비보다 리엔이 더 컸으며, 몸도 크리시보다 훨씬 더 다부지고 건장하게 느껴졌다. 리엔이 가까이 다가오자 카르젠이 먼저 리엔을 소개해 주었다.

“이비. 소개할게. 내 오랜 친구이자 루아인 제2기사단 단장 샤이나 리엔이야.”

이비는 리엔을 올려다보다 아리스에게 배운 대로 예를 갖춰 인사하려 했지만, 카르젠이 손을 놓지 않은 탓에 어중간하게 인사를 했다. 배운 대로 완벽한 인사를 하지 못한 아쉬움에 손을 살짝 빼려 했지만, 카르젠은 이비의 손을 놓아주는 대신 깍지를 껴 잡았다.

리엔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바라보다 곧 이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곧게 숙여 절도 있게 인사했다.

“카르젠과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 샤이나 리엔입니다.”

나지막하게 말한 리엔이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카르젠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내밀었고, 리엔은 이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

이비의 토끼 귀와 꼬리털이 펑-부풀었다.

‘이, 이건……!’

이비는 리엔이 보여 준 인사법이 기사의 인사라는 것을 알고 격한 감동을 느꼈다. 루아인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상대가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저가 지켜야 할 왕족이 아닌 이상 약식 인사를 주로 했다. 귀족 역시 왕가의 기사에게 인사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런 기사가 손등에 키스를 하는 경우는, 인사를 받는 이가 왕족이거나, 혹은 기사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일 때였다. 즉, 기사가 왕족 다음으로 존중하고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숲의 마법사>에서 리엔은 체스터의 왕세자 책봉식 이외엔 다른 이들 앞에서 기사의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원작에서 기사의 인사에 대해 리엔이 교육받을 때 보였던 반응 때문인지 이비는 더 감동을 느꼈다.

어쩐지 리엔에게 자신이 ‘카르젠의 친구’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물론, 단순히 친구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라 예를 갖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뺨이 붉어지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몸을 일으킨 리엔은 이비의 손을 조심스레 놓아주며 나긋하면서도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비 역시 너무 반가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실제 리엔은 김현서가 상상했던 리엔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소설 표지로 봤던 리엔도, 아껴 두다 결국 보지 못한 웹툰 표지로 봤던 리엔도 지금 제 눈앞의 리엔의 카리스마와 멋짐을 10%도 담아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견디지 못한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카르젠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비는 이러다 쓰러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카르젠에게 살짝 몸을 기댔다. 이비의 반응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짐짓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토끼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가 대며 속삭였다.

“이비. 혹시 몸이 안 좋으면 무리할 것 없어. 들어가서 쉬어도…….”

도리도리.

“지금 다리 후들후들 떨고 있는 거 알아?”

도리도리. 도리도리.

그 반응에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던 유사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차박차박 걸어와 이비의 다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이비, 힘드러? 유사랑 침대에서 뒹굴기 놀이 할래?”

평소 유사가 체스터와 뭘 하고 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이비는 지금 유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리스에 와서 이비의 꿈은 카르젠의 친구가 되고, 그의 곁에서 보좌관 일을 하며 돈도 적당히 벌고 곁에 머무는 거였는데, 리엔을 만난 순간 인생 설계가 바뀌려 하고 있었다.

‘제2기사단 잡일해 줄 하인은 필요 없나……?’

아리스가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이비의 온 청각은 리엔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카르젠이 아무래도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다며 설득하려는 목소리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저를 응시하는 리엔의 작은 웃음소리가 더 귀에 박혔다.

“음.”

“흠.”

“허.”

“…….”

리엔과 카르젠과 아리스의 짧은 침음에, 이비의 귀가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리엔의 어깨 위에 목말 탄 유사는 말 위에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비. 왜 그렇게 떨어? 반이 무서워? 반은 착한 말이야! 엄청 크지만, 착해! 하나두 안 무서어!”

“…….”

반이 착한 것과 별개로, 덩치가 너무 큰 게 문제였다. 반은 명마이자 군마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혈통 좋은 말이었는데, 덕분에 이비가 반의 위에 앉으려면 다리를 한껏 벌려야 했다. 안장을 나름 작게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버티지 못해 자세 유지조차 힘겨워했다.

리엔은 이비의 골반 상태나 현재 벌벌 떠는 정도로 미루어 근력 상태를 가늠하곤 고개를 저었다.

“반이 아니더라도, 말은 무리겠어.”

“응. 나도 동감이야.”

“!!!”

이비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지만, 리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체 구조상의 문제가 더 크니, 그리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본디 묘족은 산을 오르고 내리며 땅을 박차고 진화한지라, 말 타는 것을 힘겨워하는 종족 중 하나였다. 물론 열심히 연습하면 능숙하게 탈 수 있었지만, 이비의 경우에는 말을 탈 체력조차 없다는 게 큰 문제였다. 앉아 있는 것도 고작인데, 반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휘청이다 떨어질 게 뻔했다.

‘내가 말을 못 타면 보좌관 일을 못 할 텐데!’

카르젠과 눈이 마주치자 이비는 입술을 움직였다.

[더 연습하고 싶어요. 보좌관 일도 꼭 하고 싶어요.]

아직 저를 포기하지 말라는 염원을 담아 애절하게 바라봤지만, 카르젠이 말리기 전에 아리스가 먼저 반대했다.

“이비. 무리할 것 없어. 보좌관 일은 나중에 할 거잖아. 그리고 꼭 말을 타지 않아도 보좌관 일은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왕성에 심부름도 자주 갈 텐데, 걸어 다니면서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이비의 귀가 더 늘어지는 모습을 본 리엔이 살며시 입을 가렸다. 아리스 역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꾹 참고 카르젠의 옆구리를 툭 치며 이비를 향해 턱짓했다.

카르젠이 가까이 다가오자 고삐를 더 꽉 쥔 이비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내리기 싫다고, 조금 더 노력해 보겠다는 의사 표현이었지만, 그가 양팔을 뻗어 제 허리를 잡고 들어 내려 주는 바람에 결국 땅을 딛고 섰다.

잔뜩 긴장한 채로 다리를 벌리고 있었던 탓에, 비틀거리며 카르젠의 품에 기댄 이비는 속상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타는 건 고사하고, 위에 앉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니, 너무 서러웠다. 아무리 제 체형 탓이라고 해도 저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져서 속상해하던 찰나, 리엔이 다가와 반의 고삐를 대신 잡아 쥐며 말했다.

“꼭 말이 아니어도 이동 수단으로 탈 수 있는 동물은 많습니다.”

위로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다. 아리스 역시 거들었다.

“맞아.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탈 수 있는 동물은 많지. 제논도 신체 구조상 말을 못 타거든. 그래서 북부에서 사슴을 타고 다녔어.”

“!?”

‘사슴!?’

이비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카르젠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끄덕였다.

“체격적인 조건 때문에 사슴이나 알파카를 타는 경우도 많아. 대륙 횡단 같은 장거리 이동은 힘들지만, 영지 하나 정도는 오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온순하니까.”

“!!!”

알파카라는 말에 이비의 눈이 더 커졌다. 침울한 이비를 지켜보던 유사도 꼬리를 마구 파닥이며 끄덕였다.

“유사는 알파카 잘 타! 이비야! 체스한테 알파카 한 마리 달라구 하자! 체스 알파카두 많아! 사슴두 이써!”

“알파카와 사슴은 온순해서 훈련도 쉬워. 이비에게 맞는 아이로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필리스에 알파카가 있다니!’

물론 닭, 돼지, 소 등 가축도 있었지만, 알파카까지는 생각도 못 했던 탓에 놀란 이비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이어 아리스와 카르젠의 끊임없는 위로에 기운 차린 이비는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해사하게 웃으며 더는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

부집사의 도움으로 체스터가 직접 선물해 준 의복으로 갈아입은 콜린은 멋쩍게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저택에 집사와 부집사가 있는 것도, 주방이나 정원사나 마부 등 전문 사용인을 제외하고 단순히 저택을 돌보는 사용인만 스물이 넘는 것도 모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아직도 어색했다.

그래도 나름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왔지만, 검소한 아버지와 귀족답지 못하게 팍팍하게 지내 왔던 삶이 더 익숙했다. 어찌 보면 청승 떤다고 할 수 있었지만, 콜린은 이런 과한 상여가 전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특히 저가 떳떳하게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옆에 어린 소년은 콜린보다 훨씬 더 귀족처럼 부집사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고 있었다. 직접 카탈로그로 주문한 맞춤복을 입고 나니 평소보다 훨씬 더 귀여워 보였다. 단정한 흑발도 고급 향유를 발라 정돈해 넘기니 평소보다 더 멀끔했다.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확인한 소년이 부집사 앞이라고 답지 않게 방긋 웃으며 콜린을 향해 아이처럼 말했다.

“콜린 형님. 저 어때요? 잘 어울려요?”

잔뜩 들뜬 목소리에 부집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마 이 소년 또래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부집사의 가족도 살뜰히 챙겨 줘야겠다고 다짐한 콜린이 끄덕이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잘 어울려. 케이. 이제 시엘라에게 인사하고 외출하자.”

“좋아요! 누님께 인사하러 가요!”

다정한 말에 배시시 웃은 케이가 힘차게 끄덕이며 콜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린 동생의 천진한 모습에, 콜린은 다정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손을 맞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