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3권) (9/19)

### 챕터 8

-그렇다면 동대륙에도 혼이 모이는 곳이 있다는 거죠?

-그렇지.

-그럼… 전에 그 녀석 말대로, 신의 경지에 오른다면… 만약 신이 된다면 혼을 이 세계로 다시 불러오는 것도 가능한 건가요?

-그건 아닐세.

-어째서요? 우리가 본 것도 분명 영혼의 조각이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루는 대답 대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쭈우욱 빨아들였다. 리엔은 그가 잠시 담뱃잎을 음미할 시간을 주며 말을 멈췄다. 후우우- 약초 향이 나는 연기를 내뱉은 루는 리엔이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묻지도 않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리엔. 우리가 본 것은 혼이 아니었네. 그 간악한 존재가 교묘하게 혼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을 두고 보면 자네의 기억을 투영해 흡수한 것뿐이라네.

-네. 하지만 루가 그때 그랬잖아요. 혼이 빠져나간 몸을 다른 혼이 차지하기도 한다고…….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승을 떠난 혼과 잡귀는 다른 걸세. 잡귀는 얼핏 보면 혼과 비슷하지만, 이 세상에 미련이 많아 떠나지 않고 방황하다 길을 잃은 가여운 존재야. 보통 온전히 떠난 혼을 우린 영혼이라고 부르지. 영혼은 이미 마음의 평온을 찾아 자네가 물은 그들만의 세계에 가 있지. 우리 동대륙에서는 영혼이 안착하는 낙원을 명계라고 부른다네. 그리고 명계에 간 영혼은 다시 이 땅에 불러올 수 없지. 그게 세상의 이치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루도 아까 네크로멘서가 불러온 걸 봤잖아요. 우리가 마주쳤던 악귀라는 것과는 달랐어요. 루도 느꼈죠? 만약 네크로멘서가 진짜 신의 경지에 도달하면…….

리엔이 열띠게 말하려 했지만, 루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엔. 그 네크로멘서가 만들어 낸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네. 죽은 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일세.

-…….

-세상엔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지. 흘러간 것은 그대로 흘려보내 줘야 하네.

-…….

-삶과 죽음의 굴레는 제아무리 신의 경지에 오른다 한들 바꿀 수 없는 법이야. 만약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땐 경계해야 하네. 보통 그런 자들이 가진 오만함은 주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니까.

-…….

-세상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존재하지. 하늘이 땅이 될 수 없고, 땅이 하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불변을 바꿀 수 없다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네.

-…….

루의 다정한 말에 리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루는 제 작은 손으로 리엔의 거친 손등을 토닥토닥 도닥여 주며 말을 이었다.

-감정을 가진 존재는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지. 우리가 그들을 불러올 방법은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우리가 그들을 직접 만나러 가게 된다는 걸세. 그러니 먼 훗날 그리웠던 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현재를 열심히 살아볼 수는 있겠지. 난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다네.

숲의 마법사 10권 164페이지 中

***

“그래서. 오늘 떠나는 건가?”

“도련님께서 돌아오라 명하셨으니 귀환해야지. 수확이 없어 아쉽지만 그래도 간만에 자네 얼굴을 보니 좋군.”

카르젠으로부터 귀환 명을 받은 바론은 간단하게 꾸린 짐을 옆에 두고 제 옛 동료 마커스가 타 준 차를 마셨다. 오랜만의 반가운 조우에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의 얼굴엔 주름이 깊었다.

“바로 돌아오라고 한 걸 보면 다른 일이 급한가 보군. 아니면 필요 없어졌거나.”

“뭐든 죄송할 뿐이네. 뭐라도 건졌어야 했는데…….”

바론은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다. 과거 정보관리청이라는 이름의 유령 기관인 왕실 직속 비밀부서에서 오랜 기간 그림자로 지내며 많은 임무를 완수한 이였다. 그런 바론조차 이비와 목걸이에 적힌 레인이라는 이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 제 앞에 마커스처럼 사설탐정 사무소를 차린 옛 정보관리청 동료들을 찾았으나, 최근 실종자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최근 실종자 수가 이상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많아도 너무 많군…….’

베일리즈 영지와 스트라우 영지뿐만이 아니었다. 바론이 카르젠의 명을 받고 그동안 들른 영지에서 영지민 명부를 살피며 확인한 것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실종자 수였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여파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던 데다가 전쟁으로 인한 실종자는 대부분 기록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갔다. 의문을 품고 쭉 살펴본 결과 지난 5년간의 실종자를 합친 것보다 최근 반년 안에 일어난 실종 사건이 훨씬 많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 머물고 있는 스트라우 영지만 해도 최근 반년 동안 실종된 이는 총 열여섯. 이렇게 많은 이가 실종되었음에도 영주는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종된 이들이 전부 범죄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 폭행이나 절도 수준이 아닌, 인명 피해를 낸 강도나 강간을 저지른 흉악범뿐이었다.

거대한 범죄 길드에 속해 죄를 짓고도 영지의 뒷골목에 숨어 잘만 살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잡배만 실종된 것도 아니었다. 실종자 중엔 남작가와 자작가의 자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커스. 그럼 힐드레드 자작가의 차남도 못 찾은 건가?”

“말도 말게. 착수금 빼고 다 뱉어야 할 판이야. 소득이 하나도 없더군. 그래도 흔적은 남기기 마련인데, 전부 증발하다시피 사라졌어. 흉악범만 골라 실종되는 걸 봐선 내심 자경단이 생긴 건 아닐까 기대하고 있네. 누군지 몰라도 실력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

“흠. 자경단이라… 하지만 그런 것치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이가 아무도 없어. 보통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은 제 공을 인정받으려는 성향이 강하기 마련인데,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네. 힐드레드 자작과 트레보스 남작도 제 아들들이 저지른 짓을 쉬쉬하려고 돈을 뿌려 댔을 뿐, 법의 심판을 받지도 않았지. 피해자들과 합의했거든. 말이 합의지… 제길…….”

마커스가 짜증스레 혀를 차는 모습에 바론 역시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귀족이 연관된 범죄는 늘 이렇게 뻔했다. 특히 귀족이 가해자인 성범죄는 재범률이 굉장히 높았다.

“피해자에게 합의를 가장한 협박을 했나 보군.”

“맞아. 협박이지. 힐드레드 자작의 장남 새끼에게 변을 당한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네. 자작가에서 합의를 한다고 찾아가 애들 목숨 가지고 겁박했다는 말이 있어. 그런 주제에 합의금도 제대로 주지 않은 것 같더군.”

“…….”

“우리끼리니 말인데, 난 그 버러지들이 실종된 게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네. 그런 놈들은 분명 또 같은 짓을 저지를 테니까.”

“쯧. 찔러 보면 다 똑같은 피를 흘리는 존재이거늘…….”

“우습지. 우스워. 심지어 자작가 망나니 새끼는 그녀의 코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했어. 마침 영지에 머물던 세비어 남작님이 무료 진료소를 개설했을 시기라 다행이지, 아니면 그녀는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을 게야.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평생 거울을 볼 때마다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겠지.”

세비어 남작의 이야기에 바론이 끄덕이며 찝찝한 주제에서 말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베일리즈 영지에서 세비어 남작님을 만났었네. 아들 콜린 공자님도 만났는데 못 본 새 장성하셨더군.”

“아아, 나도 잠시 뵈었다네. 여기 직접 찾아오셨었지.”

마커스의 말에 바론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세비어 남작님이 자네를 왜 찾아오셨나?”

“어허. 이 사람. 모든 의뢰 내용은 비밀일세.”

조금 전 힐드레드 자작가와 트레보스 남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잘만 나불거렸으면서, 비밀이라는 말에 바론의 미간이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마커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어디 가서 말할 인간도 아니니, 내 조금만 흘려 보자면, 또 남 좋은 일을 부탁하려고 들르셨다는 것만 말해 두겠네.”

“흠…….”

늘 그렇듯 남 좋은 일만 실컷 하고 갔다는 이야기에 바론은 피곤해 보이던 세비어 남작을 떠올렸다. 원래도 그랬지만, 장녀 일라나드를 잃은 후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자신을 혹사시켜 가며 남을 돕는 데 집중했다. 보는 이들이 걱정할 정도로.

“그동안 들른 영지들을 보니, 세비어 남작님이 모두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셨더군. 심지어 그 공도 모두 각 영지 영주들이 가져가게끔 처리해 두셨다지. 급식소를 유지하기 위함이라지만… 정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여기에도 만들어 두고 가셨네. 심지어 흥분제가 들은 캔디를 주워 먹고 발작했던 아이들도 무료로 치료해 주시고, 입원비까지 지원해 주고 가셨어.”

정말이지 세비어 남작은 까고 또 까도 선행이 계속 나오는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저가 몰랐던 캔디 이야기까지 들은 바론은 돌아가서 세비어 페일리 남작의 선행을 꼭 알리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젠 정말 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갈 때였다.

***

어쩌다 보니 좌 카르젠, 우 크리시 사이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된 이비는 맞은편에서 실실 웃고 있는 아리스를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숙였다. 웃는 얼굴만으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다니, 제법 대단한 기술이었다.

아리스와 대화 도중 눈물을 보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오해를 풀었지만, 이후 카르젠이 곁에 붙어 있는 바람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바쁘다던 크리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크리시는 언제 돌아가지? 안 돌아갔으면 좋겠다. 며칠 더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주디도 좋아할 거고…….’

크리시의 팬인 주디가 차 리필이 필요하지 않냐며 벌써 세 번째 기웃거린 것을 떠올린 이비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주디도 주디지만, 저 역시 최애 크리시와 함께 하고 싶은 게 은근히 많았다.

먼저 아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세계의 신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제논이 준비할 음식도 함께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리시. 바쁘다더니 왜 안 돌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차를 마신 크리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갈 거야.”

‘역시 돌아가는구나… 많이 바쁘겠지?’

이비는 슬쩍 수첩 귀퉁이에 –저녁은 안 드시고 가세요?- 메모해 보여 주었다. 메모를 본 크리시는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나이젤 대신관님이 호출하셔서 가 봐야 합니다.”

대신관의 호출이라는 말에 이비의 짧은 귀가 축 늘어졌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의 귀를 흘긋거리며 물었다.

“나이젤 대신관님 호출이면 급한 거 아냐?”

“저녁 시간 전까지만 복귀하라고 하신 걸 보면 급한 건 아니라도 저녁에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아. 이비.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하니, 미안하지만 전이를 끊겠습니다.”

끄덕끄덕.

크리시가 이비의 이마에 살짝 손을 대자 이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얌전히 제 몸 상태가 온전히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변하는 게 없었다.

‘응? 뭐지?’

이마에서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느끼고 눈 뜬 이비는 당황한 크리시의 얼굴을 보고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전이가 안 끊어지는데…….”

“!?”

크리시는 여전히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재차 신력을 불어넣어 이어진 것을 끊어 내려 해도 소용없는 것을 확인한 크리시가 폐를 토해 낼 듯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이 또한 위의 뜻이군.”

‘에벨루스 님의 뜻?’

이비가 갸웃하자 크리시는 어쩔 수 없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이 상태가 지속되길 원하나 보군요. 이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니, 그럼 크리시한테 너무 미안한데!’

이비가 수첩에 다시 한번 더 시도해 보라고 적으려는 찰나, 크리시가 고개를 저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카르랑 같이 나눠 받고 있으니, 그다지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고요.”

‘손을 저렇게 떨면서 괜찮다니… 그럼 이게 끝날 때까지 크리시랑 카르젠 둘 다 고생한다는 거잖아… 나 때문에… 난 진짜 도움이 안 돼….’

이비는 제 처지를 자책하며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런 이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르젠이 손을 뻗었다. 짧은 토끼 귀가 솟아 있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니,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카르젠에게 닿았다.

“이비. 크리시도 나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보다 더한 경험도 많이 해 봤으니까 걱정할 거 하나 없어. 그리고 크리시가 신력을 거둘 수 없는 건 에벨루스 님이 뭔가 뜻이 있다는 거야. 이비의 잘못이 아니니 그렇게 침울해할 필요 없어.”

끄덕…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크리시가 덧붙였다.

“카르 말이 맞습니다.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고 다 위의 탓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 핑계로 당분간 기도회에서 빠질 수 있을 테니 저도 좋습니다.”

‘크리시는 기도회를 싫어하나 봐…….’

***

크리시가 평소보다 배는 피곤한 얼굴로 돌아간 후. 카르젠과 아리스와 짧은 티타임을 마무리한 이비는 전이받는 두 사람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방에서 쉴 겸 낮잠을 자겠다고 했다. 아리스 역시 여독을 풀어야 하니 방에서 쉬겠다고 말했고, 카르젠은 순순히 서재로 돌아가 남은 일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이비는 카르젠에게 말한 대로 얌전히 방에 누워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방에서 쉰다고 했지, 그게 누구의 방인지 말하지 않은 아리스 역시 이비와 한 침대에 누워 이비가 읽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체스터는 아카데미에 다니진 않고, 마법으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고 자주 놀러 와요.’

한창 이야기를 듣던 아리스는 드디어 저가 아는 이야기가 나와 피식 웃었다.

‘그런데요, 제가 읽었던 책에선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에 아리스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카르랑 크리시랑 아카데미에서 만난 게 언제였어요?’

“열네 살 겨울이었어. 네가 읽은 책에선 이 몸이 죽고 칼라일이 삐뚤어지는 바람에 이 이야기는 없었겠구나?”

‘네. 덕분에 지금 이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같아요. 그럼 아카데미 입학 전엔 카르젠이랑 만난 적이 없었어요?’

아리스는 베개를 끌어안고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이비를 보곤 쿡쿡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상대 가문 정보야 서로 꿰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한 건 아카데미에서였어. 친해질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리엔과 기숙사 룸메가 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리엔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지.”

이비는 저가 읽었던 <숲의 마법사> 이야기와 조금 다른 아리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략결혼 상대였던 프란제를 칼라일 후작을 피해 수도에 왕립 아카데미 기숙사로 들어온 후 아리스의 이야기를.

칼라일은 이미 소후작이 되어 후계자 수업을 위해 북부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지만, 편지를 일주일에 거의 서너 통씩 꼬박꼬박 보냈다고 했다.

‘와… 진짜 엄청났네요…….’

“엄청났지. 회피해 봤자 상처 줄 수밖에 없는 관계니 결국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로 파혼하는 쪽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절대 포기를 안 하더라고.”

침을 꼴깍 삼킨 이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짧은 귀가 아리스 쪽으로 쫑긋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 그럼 있잖아요. 칼라일은 아리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아.”

“!?”

“어떻게 해도 날 놓아줄 생각이 없어서 결국 다 털어놨지. 네가 사랑한 소녀는 이미 떠났다고. 그래도 단순히 헤어지려는 수작질로 생각하기에 결국 진실의 방까지 갔었어.”

‘진실의 방이요? 그 신전에 있는 곳이요?’

이비의 물음에 아리스가 끄덕였다.

이비가 알기로 <진실의 방>은 초월 신과 상급 신을 모시는 신전에 있는 방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신의 앞에서 맹세를 나누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장소였다.

만약 저 안에서 거짓말을 하면 신에게 벌을 받게 되는데, 보통 눈이 멀거나 팔이나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벌이 많았다. 물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진실의 방을 사용하는 비용은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맞아. 일단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곳도 아니라 이용 자체도 까다로워. 방에 들어가기 전에 대신관 축복이 꼭 필요하고, 잠시나마 신을 불러오는 거니 엄청나게 비싸지. 하여간 남편은 당연히 충격에 드러누웠고. 일주일 정도 연락이 없어서 자연스레 파혼하겠거니 했는데, 또 찾아와서는 우리 일은 비밀로 하자더라고. 파혼은 양측 가문 다 타격이 클 테니 정략결혼은 유지하되 각자 인생을 살기로 했지. 그렇게 결혼하고 몇 년은 서로 친구로 지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였지.”

‘스승과 제자! 아리스가 스승이었죠?’

“당연하지. 여기선 다이아몬드 광산 주고도 못 배울 특수 부대 전술은 전부 다 전수해 줬어. 지금 웃으며 말해도 처음 1년 정도는 서로 힘들었어. 난 어린 소녀의 몸을 단련하며 필리스에 적응하느라 힘들었고, 남편은 나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겠지. 그래도 우리 둘만의 이해관계가 정립된 상태로 잘 지냈어.”

‘그럼…… 지금은 금슬 좋다고 들었는데, 서로 진심이에요?’

“크흠. 흠흠. 뭐… 사람 오래 살고 봐야 한다고…… 어쩌다 보니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가 되었지.”

아리스는 이런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비는 상기된 얼굴로 감동받은 듯이 베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인생의 친구이자 반려…… 서로 비밀 없는 사이라니, 대단해요.’

이비는 카르젠에게 제 정체를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카르젠이 먼저 이비를 기억 상실로 오해했을 뿐이지만, 그때 오해인 줄 알면서 부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쭉 기억 상실 콘셉트를 고수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제게 한없이 다정한 그를 보면 늘 양심에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상념에 빠져 버린 이비의 고민을 의도치 않게 고스란히 들은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쟤가 혼자 착각한 거잖아. 네가 먼저 기억을 잃었다고 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 못 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어?”

그 물음에 이비는 잔뜩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쭉 속였다고 고백하는 게 무서워요… 처음엔 카르젠의 착각이었어도, 제가 정정하지 않고 그런 척하고 있었으니 속인 거죠… 카르젠은 워낙 남을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비의 작은 머릿속에 여러 고민과 자책이 홍수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조용히 이비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점점 우울의 바닥까지 파고드는 상념을 끊고자 먼저 말을 꺼냈다.

“있잖아.”

아리스는 오늘 크리시와 카르젠과 잠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비가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크리시야 알 수 있다고 쳐도, 카르에겐 말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점심을 함께하는 동안 아리스는 크리시와 꽤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그로 미루어 봤을 때 확실한 건 크리시가 카르젠에게 아직 제 능력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능구렁이 같은 카르 녀석은 이미 진즉 나와 크리시에 대해 눈치챘지만…… 굳이 우리 입으로 듣겠다고 끝까지 시치미 떼는 거 봐. 징그러운 놈.’

하여간에 카르젠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카르젠은 종종 이비를 보며 ‘다른 세계’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점심에 이비가 해초국을 먹고 행복해할 때, ‘이비가 원래 있던 세계에도 이런 비슷한 음식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아리스는 카르젠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접었다. 카르젠이 굳이 먼저 이비에게 말하지 않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저와 크리시에게 그랬던 것처럼 직접 듣고 싶어서 능글맞게 모른 척하며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 문제에 굳이 내가 나설 건 없겠지.’

아리스가 말을 하다 멈춘 탓에 이비는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작은 귀도 토끼 귀라고 고개 각도에 따라 함께 기울어졌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매우 깜찍한 고갯짓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린 아리스는 복슬복슬한 이비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너와 비슷한 상황이었잖아. 네 말대로 누군가를 속인다는 건 불편한 일이야. 네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솔직하게 말해 봐. 카르는 분명 이해해 줄 거야.”

그 말에 이비는 베개를 더 꽉 끌어안고 생각했다.

‘아리스 말대로 카르젠은 분명 자애로운 사람이니 다 이해해 주겠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흠…… 가만 보면, 넌 카르젠이 한없이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끄덕.

“뭐, 확실히 카르는 제 사람에겐 다정한 편이지만, 쟤도 네가 걱정할 만큼 호구처럼 퍼 주는 애는 아니야. 오히려 대외적으로 자애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

그 말에 이비는 우선 끄덕이며 제 생각을 들려주었다.

‘멋대로 사는 사람도 많은데, 누군가에게 자애로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상냥하고 자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비의 생각에 아리스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살포시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그래. 그 생각엔 나도 동의해. 자상함과 배려는 결국 노력에서 나오는 거니까. 하여간에 네 걱정이 뭔지는 알겠는데, 카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끄덕끄덕.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반응에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전부 삼켜 낸 아리스는 은근히 주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일단 네가 읽었던 책 이야기 좀 더 해 줄래? 네가 아는 리치에 대해서도 좀 알려 주고.”

이비는 이후 주인공 일행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기억해 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중간에 많은 이야기를 스킵했고, 리치와 마주쳤던 장면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리치가 좀 작품마다 설정이 다르긴 한데요. 보통 판타지 소설에서는 네크로맨서가 죽음을 거부하고 흑마법으로 스스로 언데드가 된 걸 리치라고 하더라고요. 그, 아리스가 패러디한 해○포터 소설 원작에 나오는 볼○모트도 리치에서 파생된 거고요.’

“흠…… 그렇게 따지면 그 코 없는 친구도 리치겠지.”

죽음을 거스르기 위해 제 영혼을 쪼개서 여러 성물에 나눠 보관하고, 그 성물을 전부 파괴하기 전까지 죽지 않는 설정은 이미 숱한 판타지 소설에서 나왔던 리치의 특징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리치를 언데드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영혼을 따로 담아 놓는다 한들 인간의 육체는 늙기 때문에, 저런 방식으로 영혼을 분리해 두고 육체는 언데드로 만들거나 다른 이의 육체를 빼앗는다는 설정이 빈번했었다.

‘숲의 마법사 책에서는 신의 경지에 올랐으면서 죽음을 거부하는 흑마법사를 리치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근데 이건 확실하지 않아요. 그냥 제 추측이에요.’

다소 자신 없다는 듯이 덧붙인 이비의 설명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치에 대한 자료는 별로 본 적이 없어서 한번 찾아봐야겠네. 내가 직접 나갈 수 없으니 마법사 길드에 요청이라도 해야 하나…… 그럼 네가 읽은 내용에 나온 리치도 영혼을 성물에 담아 나눠 뒀어?”

그 물음에 이비가 끄덕였다.

‘만약 원작대로라면 모르갈드 수정 광산 최하층에 있는 수정핵에 하나. 튜르카 영지에서 가까운 무인도의 백 년 이상 된 오래된 나무에 심어 놨다고 나왔어요. 원작에선 지그하르트가 다 부수고 꽤 빠르게 해결됐지만요.’

이비의 말을 들은 아리스는 잠시간 저를 습격했던 마법사를 생각하다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이 날 공격했을 때, 날 보고 좋은 그릇이라고 했어.”

‘그릇이요?’

“응. 날 보고 그렇게 말하더니, 옆에 제논을 보고 굉장히 놀라워했지. 그릇 옆에 그릇이 하나 더 있다면서 말이야. 무슨 1+1 취급이더라고.”

이비는 아리스의 말에 소름이 돋아 흠칫 떨었다. <숲의 마법사> 원작에서 리치가 ‘그릇’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 그릇이라는 것은 육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혼이 나간 자리에 다른 혼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육신을 일컫는 말이었고, 리치는 그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비의 생각을 다 들은 아리스가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상했지만 그릇이 그런 뜻이었구나.”

모든 육체가 다른 혼을 담을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설정까지 떠올린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즉 리치가 말한 ‘그릇’이라 불리는 체질은 극소수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 리치가 원하는 그릇 셋이 한 저택에 2+1 세트로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진짜 괜찮을까요?’

아리스는 이 와중에 겁먹어 파르르 떨고 있는 저 짧은 토끼 귀가 귀여워 웃음을 애써 참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일부러 저택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는 말은 조금 늦게 말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리스는 오늘 처음 만난 이 앙증맞은 녀석이 그저 귀여웠다.

***

비척비척 에벨루스 신전에 도착한 크리시는 제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나이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관인 그가 아메바처럼 자유분방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오직 크리시 앞에서만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저런 액체 상태로 있다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머리 아픈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긴급 호출까지 사용해 부르신 겁니까.”

“…….”

대답 없는 나이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시는 제 집무실 문을 닫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나이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크리시는 그가 알려 준 위치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엔 침침한 올리브색 액체가 들어 있는 포션 두 병이 보였다. 크리시는 이 포션이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변신 마법 포션이라는 것을 알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걸 마시면 제가 꽤 고생하리라는 건 아실 텐데…….”

마력과 신력은 한 몸에 공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강한 신력을 가진 크리시가 이렇게 강력한 마법이 담긴 포션을 마시면 며칠 크게 앓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이젤은 별다른 반응 없이 피곤한 얼굴로 침묵했다.

“체스터가요? 체스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

크리시는 체스터가 나이젤을 통해 두고 간 금지된 마법 포션에 시선을 두고 잠시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부정하기 시작했다.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건 말도……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억측이십니다.”

“…….”

“아니오. 제가 아는 그분은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

“대신관님. 물론 최근엔 뵙지 못했지만, 전 그분을 상당히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장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

나이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시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대로 쭉 침묵하더니 일순 고개를 저으며 침음했다.

“…하…….”

“…….”

잠시간 더 침묵한 크리시가 피로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젠… 후우… 그저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충격을 미처 다 갈무리하지 못한 목소리를 들은 나이젤이 힘없이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파트너를 구해야겠군요. 조금만 쉬고요.”

그렇게 말한 크리시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집무실은 고요했고, 두 사람은 아무 대화가 없었다.

이후 꽤 긴 정적이 이어지고 있을 때.

“예? 싫습니다!”

“…….”

크리시가 강하게 거부하더니, 이젠 아예 벌떡 일어나 앉아 질색하며 덧붙였다.

“아니오! 거절하겠습니다! 참으로 적합하지 않은 인재를 선택하시는군요!”

크리시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나이젤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 치며 여전히 침묵했다. 울컥한 크리시가 더 강하게 부정하려는 찰나, 복도 저편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크리시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하필 불러도…… 하아, 저 경박한 발소리만으로 자신이 누군지 알릴 수 있는 것도 참 재주입니다.”

내내 조용하던 나이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웃은 나이젤은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자 일어나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들어오라 말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신의 축복을 받은 팔라딘의 상징인 밝은 은색 머리카락과 금빛을 머금은 은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먼저 나이젤을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이젤 대신관님, 평안하셨습니까. 대신관님의 부름에 이 팔라딘 라피엘,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려왔습니다.”

크리시는 그의 인사가 각이 잘 잡혀 있고, 절도 있는 모습임에도 어째 성기사 팔라딘이라기보단 겉멋에 신경 쓴 귀족처럼 느껴졌다. 그런 크리시의 속을 알 리가 없는 라피엘은 크리시에게도 똑같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프리스트 크리시 님. 평안하셨습니까.”

크리시는 제게 성큼 다가와 인사하며 눈을 은근히 내리뜸으로써, 길고 풍성한 은색 속눈썹을 일부러 잘 보이게끔 표정 관리하는 라피엘을 떨떠름하게 보며 인사했다.

“예…… 평안하셨는지요. 일단 저기에 앉으시지요.”

크리시가 나이젤의 옆자리를 정중하게 권했지만, 라피엘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대신관님의 인자한 미소로 오늘 하루 피로를 날려 버리고 싶다며 크리시의 옆에 앉았다.

나이젤은 세상 모든 행복을 다 담은 미소로 눈부시게 웃는 청년과, 세상 모든 피로를 다 짊어진 듯이 잿빛으로 물들어 가는 초췌한 청년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오늘 이 두 청년에게 최근 수도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할 계획이었다.

그것도 풀코스. 대신관의 사비로 말이다.

***

창밖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아리스는 내내 졸렸으면서 억지로 버티다 막 잠든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 몸통보다 큰 베개를 끌어안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어휴, 짠한 녀석.’

이비와 제대로 대화한 후 아리스가 느낀 것은 이비의 처지가 퍽 짠하다는 것이었다. 이전 삶에선 불치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나이에 죽었고, 그렇다고 필리스에서 건강한 것도 아니었다.

크리시가 손을 덜덜 떨고 카르젠이 피곤한 얼굴이 된 것만 봐도, 이 작은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담당 신은 고사하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족은 있는지, 종족은 뭔지도 모르고, 왜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지도 모르고…… 어우! 깝깝해. 이번엔 몇 개나 답해 주려나 모르겠네.’

이곳 생활이 꽤 익숙해져서 이젠 꿈에 신이 찾아와도 귀찮아 대충 아무거나 묻고 마는 경우가 많았는데, 간만에 신과의 대화가 절실해졌다.

저 역시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힘들었지만, 그래도 은하수의 신 루이사가 주는 여러 힌트 덕분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아리스는 엘라이어즈 백작의 늦둥이 막내딸로, 백작 가문에서 풍족하게 살다가 칼라일과 결혼 후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되었다. 순탄한 삶이었다.

반면 이비는 저를 주워 준 카르젠을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카르젠이 제공해 주는 숙식과, 카르젠이 사 준 옷과 신발, 카르젠이 사 준 필기도구,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컨디션을 위해 동침하고 받은 약간의 용돈이 전부라고 했다.(이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비의 해명이 0.5초만 늦었어도 카르젠의 머리에 땜빵이 생길 뻔했다는 건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비 입장에선 카르젠의 속을 알 리가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게 어려울 만도 했다. 아리스는 오늘 짧은 대화만으로도 이 작은 머리통에 얼마나 많은 죄책감과 후회와 걱정과 불안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 카르젠이 제게 실망하면 어쩌나, 그래서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곁에 두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그렇다고 이대로 입 닫고 있는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닌가 등등 온갖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정 불안하면, 내가 후견인 해 준다고 하지 뭐. 내 사용인으로 고용해도 되고. 아니, 사용인보단…….’

남편만 잘 구슬리면 입양도 가능할 것이었다. 아리스는 세상모르게 잠든 이비의 코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미동이 없어 한 번 더 톡 건드리니, 살짝 찌푸리곤 베개에 고개를 더 파묻었다.

작게 웃은 아리스는 낯선 사람 앞에서도 잘 자는 순둥이를 지켜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분명 얘를 여기로 끌고 온 신이 있긴 할 텐데.’

오래전, 저가 했던 질문에 은하수의 신 루이사는 죽은 이의 혼을 안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권능이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었다. 그것도 보통 신이 아닌 초월 신이나 상급 신만 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럼 대체 이 아이의 신은 왜 나타나지 않았지?’

죽음 이후 여기에 오기 전에도 만나지 못했다고 하고, 와서도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점점 더 의문이었다.

물론 아리스가 빙의자를 많이 만난 것은 아니었다. 직접 만난 것은 제논과 김 씨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죽음 이후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어딘가를 부유하며 신을 독대했고, 두 번째 삶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설명을 들었다.

필리스에 빙의된 후엔 보통 한 달에 한두 번은 꿈에서 신을 만나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질문을 하거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셋 모두 자신을 보살펴 주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담당 신이 누군지 몰라도 애를 방치하고 진짜 무책임하네. 일단 요 귀여운 토끼에게 당장 필요한 정보는 담당 신과 종족, 그리고 원래 몸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정도일 텐데…….’

이비의 종족을 알아야 건강이 점점 나빠지는 원인이나, 카르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 담당 신이라는 작자가 애를 방치하고 있으니 아리스의 속이 다 답답했다.

필리스로 데려온 신에 대한 정보도 시급하지만, 만약 이번에 주어지는 질문이 하나라면 이비의 종족에 대해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루이사가 대답 못 해 줄 가능성이 크지만…….’

새근새근 잠든 이비를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가던 아리스는, 언젠가 저를 보살펴 주는 은하수의 신 루이사가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날을 떠올렸다.

신을 만나는 꿈은 보통 꿈과 전혀 다르기에, 아리스는 그날 루이사와 대화를 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루이사는 아리스가 깰 때까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엔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기에 아리스도 당황했는데, 다음 날 꿈에 나타난 루이사가 급한 일이 생겨 도저히 들를 수가 없었다고 해명하던 게 떠올랐다. 뭐 그리 바쁜지, 이후로도 종종 꿈에서 바람맞히는 경우가 있었다.

‘아니면…… 혹시 당장 나타날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나?’

***

“하아…….”

서재 책상에 앉아 온갖 서류에 파묻혀 있던 카르젠은 몰려오는 피로감에 이마를 짚었다. 크리시와 둘이 나눠서 전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로감이 몸을 짓눌렀다. 마치 트롤에게 짓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저렸다.

게다가 속은 또 얼마나 답답한지,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식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에 연신 한숨을 쉬어도, 속에 고인 깊은숨이 몸 밖으로 나오지 않아 갑갑함에 몇 번이고 제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육체적으로 초월한 몸이다 보니 크리시처럼 손이 떨리진 않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렇게 앉아 서류 작업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이비는 매일 이러고 있었다는 건데…….’

이비에 대한 걱정으로 재차 한숨을 끄집어내는 데 실패한 카르젠이 짜증스레 펜을 내려 두었다. 답답해 산책이라도 잠시 하려고 의자에서 일어선 찰나.

파스슷-.

갑자기 서재 귀퉁이에 텔레포트 스펠이 떠올랐다. 푸르스름한 글자가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본 카르젠은 제 허락 없이도 방문할 수 있는 이라는 것을 알고 기다렸다.

글자가 전부 소멸하며 눈부신 빛기둥이 서재 바닥에서 천장으로 솟았다. 이어 빛기둥이 사라진 곳에서 체스터가 모습을 나타냈다.

기별 없이 방문한 체스터는 카르젠을 흘긋 보더니 터덜터덜 소파로 향했다. 그대로 돌아가 앉으면 될 것을 굳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상체를 숙여 고꾸라졌다. 자유분방하게 털푸덕 누운 체스터는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하아아…… 카르. 사는 게 왜 이럴까. 나 왕세자 때려칠래.”

“유사는? 설마 유사 혼자 두고 온 건 아니지?”

“내 걱정 좀 해 줘…… 그리고 유사는 지금 바빠. 리엔이 훈련하는 거 방해하고, 주방에 가서 조리장 일에 사사건건 참견해야 하거든.”

“유사가 중요한 직책을 맡았구나. 그래서 넌 무슨 일인데.”

유사의 안부를 확인한 카르젠이 체스터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 무심한 반응에 체스터는 슬픈 눈빛을 감추지 않고 거의 울상으로 입을 열었다.

“온갖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서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

“일단 진정하고.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부터 말해 봐.”

“후우…….”

평소 체스터라면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 텐데, 어째 오늘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딱 봐도 뭔가 있다고 느낀 카르젠은 저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장 해결이 필요한 것…….”

“그래. 시급한 것부터.”

“다 시급해서 뭐가 더 시급한지 모르겠는데? 일단 꿈 수정 불법 유통자와 캔디 제작자를 추격하다 보니, 둘 다 출처가 같다는 게 밝혀졌어.”

끄덕.

“극소수의 인원으로 운영되는 그림자 길드인데, 1년 조금 덜 되는 시점에 갑자기 나타났으면서 순식간에 지하 세계를 아주 꽉 잡았다더군. 문제는 그 그림자 길드의 정체를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거야.”

“치밀한가 보네. 그래도 출처까지 밝혔으니 이제 더 집중하면 뭔가 나올 거야.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범죄자는 없어.”

카르젠의 위로에 체스터는 본격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짜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건 이제부터라는 뜻이었다. 카르젠은 충분히 경청하고 있다는 의미로 체스터에게 상체를 살짝 기울여 앉았다. 제 친우의 관심 속에 체스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엘카사트 제국에 강림한 성녀가 대신전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정보 있잖아.”

“응. 암암리에 꾸준히 나돌던 이야기였지?”

“어. 그런데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문제가 아니라, 저쪽 상황이 꽤나 심각한 것 같아. 성녀가 나를 망명처이자 신랑감으로 찍은 것 같다는 정보가 돌고 있어.”

“대신전에서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으니, 성녀가 직접 흘렸겠군.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 같은데…….”

카르젠의 대답에 체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에 대한 정보를 다방면으로 수집했을 때 동일한 규칙을 띠고 있었다. <성녀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다.> <성녀가 엘카사트 제국을 버리고 독립 왕국 루아인으로 망명을 원한다.> <성녀가 체스터 왕세자에게 결혼을 거래로 신변 보호를 요청한다.> 이 내용들은 모든 정보에 들어가 있었다.

즉 누군가 일부러 여기저기 흩뿌리듯 흘린 정보라는 것이었고, 대신전이 성녀를 포기할 리가 없으니, 성녀가 진짜 망명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대신전은 당연히 이 모든 것을 부인하는 상황이고, 성녀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성녀가 참석 예정이었던 모든 행사를 취소했다.

현 시점 루아인 왕실은 성녀가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지 몰랐기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 공식적으로 사람을 보냈어. 물론 비공식적으로도 보냈지. 근데 저 소문이 생각보다 빨리 이쪽까지 퍼져서 피곤해졌어…… 덕분에 귀족원들이 지금 두 파로 나뉘어 싸우는 중이고. 난 혼란해진 틈을 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지.”

귀족 원로 회의에서 도망쳤다는 소리였다. 카르젠은 제 친구의 탈주를 꼬집는 대신 성녀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렇지 않아도 네 결혼에 관심 많은 이들이니 난장판이겠군.”

“난장도 이런 난장판이 없어. 내 결혼인데 왜 지들이 거품 물고 싸우다 뒷목 잡고 졸도하는지.”

체스터의 결혼 이야기가 도마에 오른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성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초월 신들은 천상계에서 중간계로 내려올 수 없기에, 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곳에 저들을 대신하여 성녀를 강림시키곤 했다.

게다가 이번 성녀는 필리스 전 대륙을 통틀어 80년 만에 강림한 성녀였다. 오랜 기간 성녀가 없었기에 대부분 반가워했지만, 갑자기 성녀가 강림한 이유가 앞으로 닥칠 큰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안함을 품은 이들도 많아졌다.

이 상황에서 엘카사트 제국에 강림한 성녀가 루아인 왕국으로 망명을 요청한다면, 사실상 엘카사트 제국은 막을 수 없게 된다. 성녀는 한 국가에 속한 존재가 아닌 신이 내려 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대신전이었다. 성녀는 국가에 제약을 받진 않지만, 성녀를 강림시켜 준 신을 모시는 대신전의 제약을 받았다. 대신전 측의 공식적인 허가만 있다면 자유롭게 혼인하여 일국의 국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녀는 제국을 등지고 싶어 하고. 대신전과 이미 척진 것 같군.”

“어. 그리고 꼭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 내가 이렇게 치명적이야.”

대꾸하지 않은 카르젠은 진지하게 현 상황을 고려했다. 성녀가 바라는 대로 루아인 왕족과 혼인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루아인의 소속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족의 이혼은 오직 왕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고, 루아인은 엘카사트 제국의 제약을 받지 않은 주권 국가였다. 즉, 혼인을 하고 나면 황제가 제아무리 난리를 쳐도 루아인의 왕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혼은 성립될 수 없었다.

“대신전이 성녀의 의지를 억압하고 있다면, 그걸 빌미로 성녀를 국교로 지정되지 않은 다른 신전에 의탁하는 것도 가능하겠네.”

“응.”

“태양신 아르카라스의 성녀니, 의탁한다면 에벨루스 대신전 정도여야 할 거고.”

“응. 맞아. 나이젤 대신관님한테 이거저거 부탁하며 저 건도 언급했어. 성녀에 대해서는 조금 더 확인해 보고, 직접 제국에 방문할 예정이야.”

“만약 네가 성녀와 결혼하면, 루아인은 엘카사트랑 더 안 좋아지겠군. 그런데 왜 두 파로 나뉜 거야? 무조건 성녀랑 결혼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카르젠의 물음에 체스터의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반대파 원로들은 내가 24살이나 어린 마르카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길 바라고 있거든. 성녀로 엘카사트 황제 심기를 거스르기보단 차라리 영토 확장을 택하자는 거지.”

카르젠도 바깥 정보는 꾸준히 접하고 있었기에, 공주들에 대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 것엔 놀라지 않았지만, 동맹국 제안이 아닌 결혼으로 도마에 오를 줄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원로들은 이참에 마르카를 먹자는 입장이야. 덕분에 제국 쪽에서 지금 나한테 엄청 날 세우고 있어. 성녀랑 결혼해도 문제고. 마르카 공주랑 결혼할 리는 없지만, 어쨌든 신변 보호를 맡으면 그것도 견제받을 상황이지.”

물론 견제한다 해도, 몰락한 마르카 왕국을 두고 봤을 때 루아인이 불리할 일은 없었다.

루아인은 주변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몰락한 마르카의 난민을 가장 먼저, 그것도 조건 없이 절반 이상 받아 준 국가였다.

다른 국가도 루아인을 따라 난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일정 구역을 난민촌으로 지정해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하고 지원도 거의 없었다.

타국의 열악한 환경과 달리 루아인은 마르카에서 온 난민이 머물 곳을 제공했고, 부족하면 숙소를 지었다. 숙소 건설에 참여한 난민에겐 일당을 주었고, 건설 참여가 어려운 난민들에겐 다양한 소일거리를 주고 일당이나 식량을 주었다. 덕분에 난민들은 굶지 않고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루아인 왕실은 그들이 어떻게든 루아인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도왔다. 이미 상당수의 난민이 루아인으로 귀화했고, 이런 상황에서 루아인이 마르카 왕국을 자국으로 흡수하는 데 무리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왕족이 생존해 있고, 국혼으로 이어질 경우 주변국과 협의할 필요도 없었다.

“섭정이 지금까지 간 보느라 숨죽이고 있었나 보네.”

“그들도 상황 파악이 필요했겠지.”

난민 중에 마르카의 어린 공주 둘이 섞여 들어왔다는 소문이 돈 지 꽤 오래됐지만, 루아인 왕실은 계절이 바뀔 동안 공식적으로, 또 비공식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카의 섭정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고 두 공주의 신변 보호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래도 24살 연하는 패륜이지.”

“나도 알거든? 결혼은 우리 쪽에서 나온 이야기고, 섭정은 신변 보호만 요청했어. 저쪽에서 내건 조건도 곧 검토할 건데, 대충 봐도 섭정이 꽤 똑똑한 것 같아.”

“섭정이 제대로 된 사람인가 보네.”

“서거한 왕의 놀이 친구였고, 기사로서 평생 곁을 지켰다더라고.”

그 말에 카르젠은 어째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한마디로 마르카의 왕과 섭정은 마치 저와 체스터 같은 관계였다. 어린 시절 왕자의 놀이 친구로 차출되어 만났으나,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고 서로의 곁을 평생 지킨 사이.

카르젠은 잠시간 체스터가 결혼하고, 후계자를 갖게 된 미래를 그려봤다. 평화롭게 지내고 있어야 할 미래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적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체스터가 죽어 버린다면…… 그리고 제 친우의 아이들을 저가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면…….

“체스터.”

“응.”

“너라면 당연히 그러겠지만. 마르카 건은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리했으면 좋겠어.”

“그럴 생각이야. 일단 신변 보호로 최대한 협상 하려고. 공주들이 성년이 될 때까진 마르카를 속국으로 다스리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신변 보호로 결정되면 나중에 마르카의 진정한 왕에게 나라를 돌려줄 수는 있겠지.”

신변 보호가 결정되면, 지도자가 없는 마르카 왕국은 공주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루아인이 통치하게 된다. 어린 공주들은 성년까지 루아인 왕실에서 교육을 받고 루아인의 왕실에서 자라게 될 것이고, 그 기간은 꽤 길 것이었다.

“지금 공주들은 너무 어려. 섭정도 당장은 힘이 없고. 왕가 인장도 겨우 챙겨 왔더라고. 그 외에 귀중품은 없었어.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다는 거겠지. 작은 공주 둘만 겨우 데리고 대피할 수 있을 정도로…….”

카르젠은 마르카의 수습을 위해 보낸 파견단에서 어린 왕자들의 유해를 발견했으며, 왕자들 모두 검을 쥐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시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귀족원들은 속국 통치보단 어떻게든 흡수하려 들겠군.”

“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아니. 맞는 상황은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게 루아인에 이상적인 상황이지. 모든 결정은 마르카 공주들이 성인이 된 후에 맡길 생각이야.”

“그래. 쉽지 않은 길을 택한 만큼 귀족 반발도 심할 거야. 애초에 제 것도 아니면서 빼앗긴 것마냥 난리 치겠지. 머리 아플 만하네…….”

“그치? 근데, 카르. 믿기 힘들겠지만, 더 머리 아픈 게 남아 있어.”

“……더 있다고?”

카르젠이 드물게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체스터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리스를 공격한 마법사의 추적 때문에 프란제르 후작이 지그하르트 님께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하는데, 사실 지그하르트 님이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거든. 아, 이건 기밀이다.”

기밀이라는 말에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에게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눈이 뒤집혀 가지고 엘리시드 님 옆구리라도 찔러서 깨우라고 성화였어.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을 찌른다고 일어나겠냐고.”

“그러게. 생각해 본 적도 없네. 그런데 어딜 찌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카르. 그 말은 후작이나 아리스 앞에서 절대 하지 마라. 하여튼. 최대한 이성적으로 설득해 돌려보냈더니, 기어코 마법사 길드에 쳐들어가서 마법사를 잡으면 후작이 가진 마정석 광산에서 나오는 최상급 원석을 1년간 무료 제공 한다는 조건을 걸었더군. 덕분에 마법사들이 그 정체 모를 마법사 잡겠다고 수도를 뒤집어 놓고 있고. 환장할 노릇이지.”

“음…… 이미 벌어진 거, 뭐라도 진전이 있으면 좋겠네. 그럼 지그하…….”

“아직. 아직 안 끝났다.”

뭔가 더 있다는 말에 카르젠은 저도 슬슬 두통이 올라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체스터는 오늘 저가 카르젠에게 온 가장 중요한 이유를 꺼냈다.

“전에 네가 보호하는 사람. 이비의 머리카락 몇 개를 주워 가서 유전학 검사를 해 봤어.”

제게 말도 없이 진행한 일임에도 카르젠은 담담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결과는 토끼 묘족 31%. 미등록 종 69%였어.”

“69%면 너무 큰데…… 역시 몸이 아픈 이유는 종족 탓일 확률이 크겠군.”

체스터는 하렌델이 설명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전학 정보 중 인간과 가장 닮았으면서, 수집하지 못한 종족을 몇 번이고 검토했는데…… 너도 알겠지만, 서대륙 미등록 종족 중엔 천족과 악마가 나오더라고.”

천족과 악마라는 말에 카르젠이 이마를 짚었다. 그 반응을 본 체스터는 저가 말하면서도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냐며 말을 이었다.

“동대륙 유전 정보 중엔 기린 유전 정보가 없긴 한데, 기린은 아닐 거야. 기린은 신목에 열린 알에서 태어나는 종족이고 번식력도 없으니 혼혈이 있을 수 없지.”

“그럼 결국 천족이라는 거네. 물론 이비가 천족 같긴 하지만, 천족이 실존한다는 증거는 없어. 천족 신화가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체스터는 카르젠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덧붙였다.

“아니. 더 깊이 파다 보니 인간의 골격과 비슷하긴 한데, 완벽한 인간형이 아니라 인간형 분류에 등록되지 않은 종족이 있었어. 그들이 인간형이 맞는지 사실 유무도 밝혀지지 않은 게 좀 문제지만.”

“…….”

“음…… 내가 말해 놓고도 어처구니없긴 한데…… 난 오히려 천족보단 이쪽이 더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원래 완전체는 반인반수인데, 지상에선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전설이 있는 종족…….”

카르젠은 저 설명에 근거하는 종족이 단 하나 떠올라 침음하듯 말을 뱉었다.

“인어 말이군.”

카르젠은 체스터가 앞에 훨씬 더 머리 아픈 문제들을 두고, 왜 이비의 종족에 대한 정보를 가장 골 아픈 문제 취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어」

저가 입에 담고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인어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이 없었다. 분명 존재하긴 하나, 지금은 멸종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근 300년 이상 인어를 목격한 이들이 없었다. 300년이라는 것도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가 마지막으로 인어왕과 조우했던 것이 300년쯤 전의 일이라고 지나가는 말로 뱉은 것을 기반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인어…… 분명 아직 존재할 거라 믿고 있긴 했지.”

반인반수. 아니, 반인반어의 몸으로 바다를 누비는 아름다운 종족 인어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이 없었다.

바다에선 오크를 맨손으로 비틀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나, 뭍으로 나오면 한낱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뭍에선 인간보다 월등히 약해지는 데다가 바다에서 멀어지면 말라 죽어 버린다는 이야기가 학계의 정설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구체적으로 이를 증명해 줄 근거자료는 없었다.

그 외엔 인어가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를 가졌고, 노래로 뱃사람을 홀려 물로 끌어들인 후 익사시켜 잡아먹는다는 뱃사람들 괴담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해양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우선, 인어가 굳이 사람을 잡아먹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바다엔 수없이 많은 생명이 존재한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차고 넘칠 정도로 풍족할 텐데, 굳이 배가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노래로 사람을 홀려 바다에 빠뜨리는 힘든 과정을 거쳐서까지 인간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심해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심해엔 뭍의 종족이 상상도 못 할 만큼 경이로운 세계가 있을 터.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심해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생산적이지 못할 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학자들은 인어가 이토록 뭍의 종족과 교류가 없는 이유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종족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성 가설을 내렸다.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확실히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모를 천족보다야 나은 가능성이었지만, 인어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카르젠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번졌다.

“만약 그렇다 한들 어떻게 확인해야 하지? 대조할 표본도 없고. 바다로 데려가서 물에 들어가 봐야 하나?”

“어?”

순간 저가 뱉은 말에 민망함을 느낀 카르젠은, 피곤해서 그런지 창의적인 생각이라곤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단순한 발상에 수치심을 느낀 카르젠과 달리 체스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왜? 네 말이 맞아, 카르. 나도 딱히 다른 방법은 안 떠오르는걸. 문제는 지금 당장 남부로 가긴 조금 힘든 상황이라는 거네.”

얼마 전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 남부로 가는 길 대부분 아직 복구 중이라는 것을 상기한 카르젠이 침음했다. 게다가 텔레포트 좌표가 등록된 곳도 산사태나 홍수로 좌표가 손실되어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뭘 그리 고민해. 일단 바닷물 담을 곳이나 생각해 봐.”

“……뭘 담아?”

카르젠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보니, 체스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당분간 마차로 남부에 가는 건 어려운 상황이잖아. 그렇다고 말로 가자니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고. 또 저 연약한 사람이 버틸 수 있겠어? 그러니 차라리 바닷물을 끌어오는 게 낫겠지. 아공간 아이템이면 충분할 거야. 남부 쪽 마법사 길드에 물어볼게.”

“…….”

“왜. 뭐.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

“…….”

“아니… 그래. 아공간 아이템이라…… 생각도 못 했네. 넌 언제나 혁신적이구나.”

아공간 아이템은 아직 상용화된 기술은 아니었지만, 이론적으론 충분히 가능했다. 다소 당황스러운 발상이었지만, 카르젠은 순순히 인정했다. 산사태와 폭우로 인한 복구 작업이 하루아침에 뚝딱 끝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또 이비가 승마를 배운다고 말을 잘 탈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였다. 제대로 배운다고 해도 장거리 이동을 견딜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최악의 경우 말을 탈 체력이 없을 수도 있었다.

‘승마는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필요하니…… 이비는 무리일 수도 있겠어.’

애초에 이비에게 승마를 알려 주려던 목적도 저택과 왕성을 오갈 때, 보좌관으로 동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말을 타고 장거리 여정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에 하나 이비가 말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쯤이면 이미 길 복구 작업이 끝났을 확률이 컸다. 아니면 새로운 길을 뚫었거나.

“그래. 말로 이비와 남부로 가느니, 마법사를 고용해 바닷물을 끌어오는 게 현실적이겠어. 적어도 상급 마법사를 고용해야겠네.”

카르젠은 단순하면서 돈이 많이 드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사람이 충분히 잠길 정도의 바닷물을 떠오려면 적어도 대용량 아공간 마법 용품이 필요했다. 적재 용량이 큰 마법 용품을 자유롭게 다룰 만큼 마법사의 수준이 높아야 했는데, 그 정도의 상위 마법사를 긴급으로 고용하는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달라고 해야겠군.”

다행스럽게도 카르젠은 돈이 많았다.

***

‘이상한 꿈이네.’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게 현실일 리가 없으니 꿈인 게 확실했다. 아니, 우주 공간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빛도 그림자도 없는 암흑뿐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째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락함마저 느껴졌다.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잊은 이비는 헤엄치듯 팔다리를 움직여 봤다. 놀랍게도 저가 원하는 방향으로 몸이 점점 이동했다.

“와…… 오, 목소리도 나오네.”

역시 꿈이었다. 이비는 자유롭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둥둥 떠다니며 이게 무슨 꿈일지 추측했다. 이러다 갑자기 훅 추락하는 기분이 드는 건 아닐까 괜히 긴장도 됐다. 하지만 긴장도 잠시, 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상할 만큼, 수상하게 느껴질 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편한 자세로 누워 느긋하게 허공을 유영하던 이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지점을 바라봤다. 저 멀리. 꽤 먼 거리에 흰 점이 보였다.

‘누가 봐도 저기로 가라는 것 같네.’

빛도 없는 암흑에 유일한 흰 점이라니. 가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이비는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흰 점을 향해 이동했다. 느린 움직임이 답답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저 마음이 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 무엇도 저를 해칠 수 없으며,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느긋하게 유영하던 이비는 흰 점에 가까워질수록 마냥 흰색이 아니라 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색 동그라미의 절반 이상은 노란 줄무늬가 있었고, 세모꼴 귀도 있었다.

“헉!?”

이 동그란 존재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김현서였을 적 소원 중 하나는 바로 털북숭이 주인을 모시는 집사가 되는 것이었고, 그런 김현서의 꿈을 이루게 해 줄 대상이 눈앞에 동동 떠 있었다.

“고양이!”

이비는 저도 모르게 푸짐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굴도 크고, 몸도 통통한 것이 너무 귀여웠다. 이비는 조심스레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볼살이 넉넉한 고양이의 얼굴은 미동도 없었지만, 꼬리만큼은 귀찮다는 듯이 이비의 팔을 탁탁 쳤다. 그 반응에 묘한 고양감을 느낀 이비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귀여워! 고양이 진짜 귀여워!’

이마를 조심조심 만지니 귀가 쫑긋거렸다. 꿈에서라도 이렇게 고양이를 만질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털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뽀뽀라도 해 보고 싶었다.

이비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다 몸통도 천천히 쓰다듬었다. 포동포동 푸근한 몸이 주는 감촉에 가슴 한편이 몽글몽글 따뜻해졌다.

“야옹아.”

듣고 있다는 듯이, 귀가 또 쫑긋거렸다. 이비는 고양이의 몸을 계속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야옹아. 많이 졸려?”

이번엔 꼬리가 팔을 탁 쳤다. 순간 이비는 고양이가 제 물음에 대답해 주는 것 같다고 느껴 갸웃하며 물었다.

“안아 봐도 돼?”

비록 꿈속의 고양이라 멋대로 만져 대고 있지만, 안는 것은 어쩐지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다소 소심한 물음에 고양이가 꼬리로 이비의 팔을 툭 쳤다.

이비는 이게 고양이의 명백한 허락이라고 근거 없는 확신을 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고양이는 동그랗게 말려 있는 자세 그대로 품에 쏙 들어왔다. 이비는 고양이의 주둥이에 제 볼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어쩐지 너무 행복했다. 단순히 고양이를 안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벅차고, 기쁘고,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분명 고양이를 안고 있는 건 자신인데, 아주 그리운 누군가가 저를 꼬옥 안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옹아.”

잔뜩 메인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눈을 뜨진 않았지만, 이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듯이 꼬리로 팔을 툭툭 쳤다. 제 품에 고양이로부터 느껴지는 따스한 무언가가 온몸에 퍼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간질이는 감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배시시 웃으며 고양이의 얼굴에 볼을 비비자, 통통한 꼬리가 팔뚝을 살포시 감았다. 그 감각이 기분 좋아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자 골골대는 소리가 들렸다.

골골골-

그릉그릉그릉-

골골골-

이비는 고양이가 들려 주는 골골송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고양이가 제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응.”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이 흘러 길을 내며 간지럽혔다. 그 간지러움을 닦아 내려 손을 올리려는데, 누군가가 저보다 먼저 눈물을 닦아 주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야옹아?]

부스스 눈을 뜨며 불러 보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꿈이 끝났다는 것을 느낀 순간, 현실로 끌어당겨진 이비는 제 눈가를 보듬어 주는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손의 주인은 바다와 같이 맑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였다.

그의 눈동자가 오직 저만을 담고 있는 것을 본 이비가 살포시 웃었다. 그 역시 이비를 부드럽게 휜 눈매로 마주하며 눈물을 마저 닦아 주었다.

[카르젠 님.]

“응. 이비.”

[저 엄청 행복한 꿈을 꿨어요.]

작은 입술이 옹알거리는 것을 읽어 낸 카르젠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만개했다. 이비는 카르젠의 손에 볼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행복했다.

***

유사는 일라나드의 배에 왜 저런 큰 구멍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일라나드가 유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의 꼬마 친구… 이리 오렴…….

작은 목소리로 겨우 쥐어짜 낸 부름에, 아기 여우 요괴가 아장아장 다가가 일라나드의 옆에 앉았다. 유사는 제 인간 친구가 저를 힘겹게 바라보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했던 질문을 꺼냈다.

-이라나드…… 오늘 죽어?

언제나 아니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던 일라나드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그리곤 힘겹게 손을 뻗어 아기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사는 언제나처럼 아니라고 대답해 주지 않는 일라나드의 손을 잡고 품에 끌어안으며 물었다.

-오늘 죽으면…… 언제 또 만나?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볼 수 있어…….

유사는 아직 죽음이 뭔지 몰랐다. 그렇기에 지난 계절, 일라나드가 말해 준 대로 인간이 죽으면 아주 오래.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몇 밤? 유사가 몇 밤 자면 다시 만날 수 있어?

그 물음에 일라나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이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유사가 훌륭한 구미호가 되면…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그치만, 그치만 유사는 아직 꼬리 하나뿐인데? 구미호까지 아직 멀었는데?

-괜찮아…… 천천히 커도 돼.

크리시와 에밀리의 신력 덕분에 통증은 없었지만, 일라나드는 제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애써 울음을 참는 일행들을 쭉 둘러보며 이 아기 여우 요괴를 부탁한다는 듯이 말했다.

-유사. 유사는 여기 다른 친구들이랑 더 놀다 와.

-…….

-다른 친구들이랑 끝까지… 신나게 놀다 오면… 저번에 만들어 준 것보다 훨씬 큰… 눈사람을 만들어 줄게…….

-헛? 진짜? 그거보다 더 크게?

-응. 더 크게. 훨씬 크게…….

-아라써! 그럼 이찌, 리엔이랑 카르랑 크리시랑 체스랑 쪼꼼 더 놀고 갈게! 아, 지그하르트 아저씨랑도 쪼꼼 더 놀고 갈게!

아기 여우의 천진한 대답에, 에밀리가 고개를 숙였다. 유사는 에밀리가 끅끅 숨죽여 우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껴 재차 말했다.

-이라나드, 약속이지? 진짜 나중에 유사랑 또 놀아 주는 거 맞지?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기 여우의 물음에, 일라나드는 눈을 감으며 자신의 마지막 숨에 대답을 실어 힘겹게 뱉어 냈다.

-그래… 난 먼저 가서 기다릴게… 실컷 놀다 오렴… 나의 꼬마 친구…….

숲의 마법사 11권 22~23페이지 中

***

루아인 왕성 기사단 식당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유사가 주방에서 열심히 참견한 덕분에, 메인 메뉴로 고기 요리가 네 가지나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다들 신나게 고기를 뜯고 있었지만, 제 2기사단 단장 리엔은 식사는커녕 애원하고 있었다. 제 무릎 위의 작은 존재에게 말이다.

“유사. 딱~ 한 입만 더 먹자. 응?”

한 입이라는 말과 다르게, 리엔이 손에 쥔 스푼엔 음식이 수북했다. 제 주먹보다 크게 올라간 음식을 본 유사는 리엔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시더.”

“왜애~ 응? 한 입만. 자. 아~.”

“싯타구 해쨔나아아…….”

리엔은 칭얼대며 스푼을 든 팔을 밀어내는 아기 여우를 안은 팔로 도닥여 주며 말했다.

“이거 다 안 먹으면 유사는 있다 반 목욕하는 거 못 도와줄 텐데?”

“아냐. 유사도 반 목욕 도와줄 수 이떠.”

“으음~ 아닐걸? 왜냐하면 반은 엄~청 큰 말인걸? 그렇게 큰 말이 목욕하는 걸 도우려면 밥을 이~만~큼 먹어야 도울 수 있어.”

“…….”

“그리고 이걸 다 먹지 않으면, 내일 카르 집에 못 놀러 간다? 반도 데려가야 하는데, 유사는 힘들어서 못 갈지도 모르겠네?”

“아니야아…… 유사도 갈 수 이써.”

“지금부터 많이 안 먹어 두면, 내일 금방 졸려서 낮잠 자야 할지도 모르는데? 새 친구 이비랑 많이 놀고 싶다고 했잖아?”

“아웅.”

유사가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리엔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것만 먹자. 자, 아~.”

“아앙…….”

설득당한 유사가 결국 받아먹자,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박수 쳐 주었다. 모두가 환호하며 박수 쳐 주니 신난 유사가 또 입을 벌렸다.

리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트볼을 콕 찍어 입에 넣어 주었다. 작은 입으로 받아먹은 유사가 기민하게 오물거리며 씹어 삼키자, 이번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사들의 환호에 기분 좋아진 유사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렇게 몇 번 더 받아먹은 유사가 이젠 정말 배부르다며 작은 배를 통통 두드렸다. 그리곤 컵케이크를 양손으로 들고 앙냠냠 먹기 시작하자 드디어 리엔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리엔이 닭 다리를 손으로 들고 열정적으로 뜯어 먹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제4기사단 단장 루카스가 물었다.

“리엔. 그럼 내일 카르젠 단장에게 가는 거야?”

“어. 원래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빌어먹…… 크흠. 홍수 때문에 지체됐네.”

유사의 앞이라고 말을 갈무리한 리엔이 닭 다리 발골을 끝낸 후, 이번엔 돼지고기 튀김을 입에 쑤셔 넣었다. 유사는 볼이 빵빵해진 리엔을 보며 까르르 웃었고, 루카스는 흥미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도 같이 갈까? 오랜만에 카르젠 단장도 볼 겸.”

“됐네요. 어차피 그 사람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잖아?”

그 물음에 루카스는 씩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엔은 루카스를 흘겨보곤 이번엔 구운 옥수수를 와구와구 먹었다. 컵케이크를 오물거리던 유사는 리엔의 입을 거쳐 간 옥수수 알갱이가 탈곡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했고, 루카스는 맥주를 홀짝이며 은근히 말했다.

“궁금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카르젠 단장이 홀딱 빠졌다는 사람인데, 안 궁금할 수가 있나.”

“이항한 서히 하히 마허.”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끄덕이며 옥수수 탈곡을 마친 리엔이 과일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곤 이제 좀 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아직 못 봤지만, 그냥 손님이랬어.”

“그냥 손님을 그리 꽁꽁 숨기고 안 보여 줘?”

“몸이 약하대. 그리고 손님인데, 굳이 외부에 보일 필요가 있겠어?”

“그냥 손님인 것치고 묘한 분위기라던데? 목격자가 많잖아. 콥스 아저씨 가게에서 둘이 오붓하게 식사했다던데.”

이미 한 번 싹 돌았던 소문인데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오오~ 감탄사가 나왔다. 그 반응에 피식 웃은 루카스가 덧붙였다.

“서점에도 같이 갔다지? 디저트 카페도 가고.”

“그건 저택 사용인들도 동석한 거로 아는데…….”

기사들은 리엔이 무슨 말을 해도, 이미 저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리엔은 설득을 포기하고 저녁에 집중했다.

그동안 스캔들 한 번 없었던 카르젠이 누군가와 데이트한 것만으로도 사교계가 뒤집혔는데, 체스터까지 카르젠의 손님에게 훈련된 명마를 선물로 준다고 하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얌전히 컵케이크를 먹던 유사는 갑자기 리엔의 허벅지 위로 올라서더니,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말했다.

“내일! 유사가아! 루아잉 기사단 대신! 카르 집에 가서 케이크도 먹구! 과일도 먹구! 이비랑 마니 놀구 올게!”

깜찍한 아기 여우의 익일 스케줄을 들은 기사들은 격하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 반응에 만족한 유사는 다시 털버덕 앉아 컵케이크를 마저 먹었고, 루카스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며 은근히 유사의 옆구리를 찌르다가 꼬리로 찰싹 맞는 형벌을 받았다.

***

루아인의 수도 아브델에서 최근 가장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은 <바다의 향기>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해산물 요리가 메인이었는데, 북부에 가까운 아브델에서는 보기 힘든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특히 시들지 않는 마법의 꽃으로 장식된 3층 테라스 석은 앞으로 세 달 동안 예약이 꽉 찼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총 다섯 개의 테라스 석 중 제일 중앙에 앉은 대신관 나이젤과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주문한 생선요리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콜린 공자님은 바쁘신가 보군요.”

“하하하. 그간 계속 늙은 애비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런 날이라도 자유롭게 풀어 줘야죠.”

나이젤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페일리 남작의 뒤, 건너편 테라스 커플 석을 바라봤다. 엘카사트 제국에서 유행하는 의상을 입은 두 청년은 거대한 바닷가재 구이를 손질하며 엘카사트어로 대화중이었다.

남작과 등지고 앉은 청년은 턱을 괴고 앉아 다소 까칠한 말투로 단답만 했고, 그 맞은편에 앉은 청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제국인 청년 커플을 흘긋 본 나이젤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음식이 나오기 전이지만, 남작님께서 제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는데. 뭔지 지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너무 궁금해서 어제 내내 잠이 안 오더군요.”

성급한 물음이었지만, 나이젤의 평소 호기심 많은 성격을 아는 그는 허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예. 사실 이번에 수도에 오게 된 이유는 체스터 왕세자님의 명으로 상여를 받기 위해서인데, 이 상여를 어찌 써야 할지 고민스럽더군요.”

“오오! 드디어! 받으셨군요! 어이구! 제 속이 다 시원합니다!”

페일리 남작이 그간 거절했던 상여를 받았다는 말에 나이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에벨루스 신에게 감사의 감탄사를 올렸다. 그 모습에 페일리 남작이 다소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 너무 크게 치하해 주시는 것 같아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만, 왕세자님의 진심을 듣고 나니 더 거절하기가 힘들더군요. 당부하시길, 부디 이번 상여만큼은 타인을 위해 쓰지 말고 저와 제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하셨습니다.”

“오죽하셨으면 그러셨을까요. 허허허허.”

“하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예전 같으면 신전이나 재단에 기부했겠지만, 이번에도 그리하면 왕세자님께서 몹시 실망하실 것 같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이젤은 저가 에벨루스 신전의 대신관이라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제발 그 어디도 기부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크게 끄덕였다.

“제발.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남작님을 위해 쓰십시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페일리 남작은 조심스레 나이젤을 향해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이젤 대신관님의 주관으로 영결식을 열고 싶습니다.”

“영결식이요?”

나이젤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페일리 남작이 착잡한 눈빛을 애써 숨기며 말을 이었다.

“예. 제 딸아이. 일라나드의 영결식을 열고 싶습니다.”

평소라면 나이젤은 영결식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영결식은 고인의 장례가 끝나고 1주일 이내에 하거나, 늦어도 한 달 이내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작님.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만…… 일라나드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렇지요.”

“혹시 뒤늦게 영결식을 하려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페일리 남작은 대답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테라스 아래로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 음식을 차려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페일리 남작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얻었고, 나이젤 대신관은 남작 대신 점원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끄덕여 주었다.

점원이 물러난 후에도 페일리 남작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나이젤은 남작에게 재촉하지도 않았으며,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진심 어린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복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한 페일리 남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최근에 저는 죄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일라나드는…… 제 딸은, 분명 마족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한 정령사이자, 루아인의 전쟁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지요.”

“예. 그렇지요.”

“하지만, 루아인과 중간계 종족을 구한 것과 별개로, 제 딸아이의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존재도 분명 있을 겁니다.”

“…….”

“비록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페일리 남작의 말에, 그와 등지고 앉아 요리를 깨작거리던 제국 청년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이젤은 페일리 남작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하곤 씁쓸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남작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 일로 일라나드에게 죄가 남아 있다면, 그래서 신의 곁으로 도달하지 못해 어딘가에서 제 딸의 영혼이 고통받고 있다면, 일라나드의 이름으로 더 많은 선행을 하여, 제 딸의 죄를 덜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해서라도 신의 곁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고,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라나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전례 없는 큰 영결식이 열고 싶어졌습니다.”

“…….”

“광장은 전 일정 대관하고, 최대한 많은 신관님들을 섭외하고 싶습니다. 영결식 아침엔 일라나드의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이들에게 음식을 무료로 나눠 주고, 신관의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보통 평민들의 영결식은 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진행한다. 종이로 예쁘게 접은 꽃 장식에 작은 향초를 넣고 물에 띄워 꽃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도를 하며, 고인이 신께 가는 길이 험하지 않도록 물속으로 가라앉은 빛이 길을 밝혀 주길 기원한다.

돈이 많은 이나 귀족의 경우 광장을 저녁 시간대에 빌려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무료 만찬회를 연다. 이 만찬회에는 신관을 초대해 식전에 다 같이 고인이 가는 길이 평안하길 빌어 주는 기도회를 진행한다. 짧은 기도회에 참여만 하면 누구든 배불리 먹을 수 있기에, 이런 영결식엔 많은 이들이 찾아오곤 했다.

“신관들의 치유 말씀이십니까.”

“예. 아시겠지만, 보통 공개 영결식에 오는 이들은 마음껏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픈 곳이 있어도 먹고 살기 급급하여 제 몸을 돌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올 겁니다. 그들이 일라나드를 위해 간단한 기도만 해 준다면, 치료를 받게 해 주고 싶습니다.”

나이젤은 저가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사람인데도, 그 방법이 어찌 이리 이타적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애써 담담한 얼굴로 끄덕였다.

“남작님다운 생각이군요…….”

“내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녁 만찬 전에 기도회를 크게 진행하고, 대신관님께서 영결사를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영결식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이젤은 일단 묵묵히 들었고, 남작은 말을 이었다.

“영결식이 끝나면 에벨루스 신전에서 허락해 주실 경우, 제가 받은 모든 상여를 신전에 기탁하고 싶습니다. 부디 신전에서 제 딸아이와 에벨루스 님의 이름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보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

“저는 남은 생을 봉사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아닌 일라나드의 이름으로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게 저를 위한 일입니다.”

페일리 남작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내내 경청하던 나이젤은 남작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남작님. 일라나드의 영혼은 신의 곁에 머무르며 평안할 겁니다. 불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나이젤은 이 현명한 이가 무엇에 이리 흔들리는지 꼭 알아내야 했다. 그는 건너편 테라스 석 제국 청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남작이 근원에 대해 생각하고 떠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질문했다.

“혹시 누군가 일라나드의 영혼이 헤매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까? 아니면 살생의 죄를 용서받지 못해 신의 곁으로 가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고?”

갑자기 고인의 영면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이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사기꾼에게 현혹당해 금품을 갈취당하거나 더한 것을 요구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일리 남작이 아무리 현명한 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방면으로 능숙한 누군가가 그의 딸의 영혼의 안식을 물고 늘어졌다면 현혹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얌전히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나이젤의 시야에, 페일리 남작의 어깨 너머로 제국 청년이 이마 짚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청년이 제국어로 무언가 물었고, 이마를 짚은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요리를 깨작거리다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질문을 듣고 잠시간 제 마음을 다스리던 남작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이젤을 향해 말했다.

“실은…… 어떤 신의 경지에 다다른 분의 도움으로,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일라나드의 영혼을 아주 잠시 마주했습니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자와 영혼이라는 말에 나이젤이 눈에 띄게 경계하며 말했다.

“남작님. 고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기 수법입니다. 보통 마법 장치로 그런 짓을 일삼죠. 특히 전사자 유가족에게 살생의 죄를 언급하며 접근하는 간악한 이들이 많습니다. 고인의 영혼이 죄를 가지고 있다며 무언가 요구하는 것은…….”

“아니오. 대신관님. 아닙니다. 일라나드는…… 그때 제가 만난 딸은…….”

괴로운 얼굴로 급하게 나이젤의 말을 끊은 그가 힘겹게 저가 만난 일라나드의 영혼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 아이는 제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고, 도와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게 당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지니고 가야 할 죄니, 부디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려 하지 말고 제 삶을 살라고요…… 이젠 자기를 가슴에 묻고, 온전한 아버지의 삶을 살아 달라고…….”

잠시 말을 멈추고 혀로 입술을 축인 남작은 크게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자신을 위한 부탁도 했습니다. 제게 딱 한 가지를 부탁하더군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기 여우가 있다고. 그 아기 여우가 자신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을 테니, 자기 대신 그 아기 여우를 보듬어 달라고요… 그분께서 보여 주신 건 제 딸이 맞습니다. 대신관님… 이 미련한 애비를 닮아, 죽어서까지 제 주변 사람밖에 못 보는 착한 제 딸이 맞습니다…….”

나이젤의 표정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페일리 남작은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짙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젤 대신관님. 제 아이는 아직 신께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해 홀로 떠돌고 있습니다. 부디 일라나드의 영혼이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화려한 수도의 모습과 다르게 으슥하고 더러운 뒷골목에도 사람은 있었다. 굽이굽이 미로 같은 복잡한 골목 사이로 들어가다 보면, 밤에만 영업을 하는 불법 도박장이나 주점이나 불법 거래소 같은 업소가 밀집된 곳이 있었는데, 이런 곳을 드나드는 이들도 제 목숨이 아깝다 생각하여 다가가지 않는 곳이 노예상 건물이었다.

오늘도 상스러운 소리가 오가는 곳에서, 덩치 자랑하기 여념이 없는 남자가 ‘낚아’ 왔다는 청년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청년은 조명이라곤 고작 양초 몇 개가 전부인 어둑어둑한 지하에서 봐도 그들이 말하는 ‘특등급’ 상품임을 알 수 있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새근새근 잠든 청년은 복슬복슬하고 풍성한 크림색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눈을 감고 있어도 상당히 예쁜 얼굴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행색을 보아하니 그럭저럭 잘 사는 평민으로 보였다.

몸에 두른 것도 좋은 재질이긴 했으나, 귀족들이 입는 것만큼 고급스러운 재질은 아니었고, 비싼 장신구도 없었다. 손은 적당히 거칠었고, 그나마 비싸 보이는 것이라면 손목에 있는 흑요석으로 보이는 팔찌 정도였다.

“잭. 어디서 이런 좋은 걸 낚아 왔어?”

“말도 마. 모험가 지망생이더군. 수도에 처음 왔다며 들떠 있길래 같이 맥주 한잔했지.”

술잔에 약을 탔다는 의미였다. 그는 옆으로 쓰러져 누워있는 청년의 어깨 옷깃을 잡고 거칠게 돌려 눕혔다. 거센 손길에 청년의 목 부근 단추 두 개가 툭 투둑 떨어져 나가며 앞섶이 벌어졌다. 쇄골 조금 아래까지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스트라우에 힐드레드 자작 놈들한테 팔면 좋아하겠군.”

스트라우 영지에 힐드레드 자작의 가문 남자들이 더럽게 노는 것은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이 바닥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중 악명 높은 차남한테 걸리면 볼만하지 않겠냐고 킬킬대던 남자들은 청년이 부스스 눈을 뜨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곤 환호했다.

“이야, 진짜 물건인데! 굳이 팔아야겠어? 그냥 여기 두고 예뻐해 주면 안 될까?”

“그래. 잭. 잡일 시키면 되잖아?”

다들 눈을 부스스 뜬 청년의 외모를 보고 한마디씩 얹었다. 약에 취한 청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곧 비틀비틀 일어나 앉았다. 청초하게 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음심이 치솟은 남자들이 잭의 눈치를 살폈다.

“잭…… 여기가 어딘가요? 제가 잠들었나요? 죄송합니다. 술이 약해서…….”

그가 다시 비틀거리자 잭이 두꺼운 팔로 가느다란 몸을 안아 지탱해 주며 껄껄 웃었다. 그리곤 주변 잡배의 기대 어린 시선에 저도 동한 것인지, 끈적한 손길로 청년의 등을 보듬어 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콜린. 아까 맥주 한 잔에 취해 잠들었어. 기억 안 나?”

“으응… 죄송… 해요…….”

힘겹게 말한 콜린이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잭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잭은 콜린을 다시 테이블에 눕히고 더러운 손가락으로 여린 입술을 짓누르며 말했다.

“콜린.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눈도 제대로 못 뜬 콜린이 푸스스 웃으며 네에……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남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잭은 지저분한 손으로 계속 콜린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밑에서 일할래? 이래 봬도 여러 영지를 오가는 상단이거든.”

그는 노예상이면서 침도 바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상단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콜린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듯 헤헤 웃으며 끄덕였다.

“좋아요…….”

약에 취해 어지러운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몸을 배배 꼬는 콜린을 보던 남자들이 잭의 눈치를 살폈다. 잭 역시 콜린의 모습에 크게 동한 듯,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격하게 들썩였다.

더 참지 못한 잭이 처음은 무조건 자기라며 콜린의 허리 벨트에 손을 댄 순간, 새하얀 손이 더러운 그의 손을 밀어내려는 듯이 닿아 왔다. 그 모습에 남은 순서를 정하던 이들 사이에서 조소가 튀어나왔다. 잭은 허리를 숙여 콜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콜린. 손 치워.”

잔뜩 흥분 어린 목소리에 눈을 뜬 콜린이 잭을 지그시 바라봤다. 약에 취해 몽롱하고 탁한 눈동자를 기대했던 잭이 돌연 숨을 삼켰다.

저를 향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날카로울 정도로 선명했으며, 혐오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잭의 눈이 휘둥그레진 순간, 콜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품 있게 말했다.

“손은 그대가 치우는 게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콜린의 팔찌에서 검은 연기가 훅 뿜어져 나오며 잭의 시야가 암전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배들의 비명과 살려 달라는 애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적막이 지속되자 식사가 끝난 것을 파악한 콜린은 단추가 떨어져 나간 앞섶을 대충 여미며 말했다.

“다 드셨으면 불 좀 켜 주세요.”

그러자 홧- 하고 초가 하나 켜졌다. 아주 약한 빛이었음에도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지하실엔 콜린과 어린 소년뿐, 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단둘만 있었던 것처럼.

테이블 위에 앉아 있던 콜린은, 제 옆에 사뿐히 내려앉은 소년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콜린과 대비되는 짙은 흑발에 흑요석같이 깊고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뭐가 불만인지 불퉁한 얼굴로 콜린을 보고 있었다.

“꼭 아이의 모습으로 현현하셔야 합니까? 볼 때마다 굉장히 불편한 기분이 듭니다.”

그 질문에 소년은 대답 대신 찌푸린 얼굴로 콜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하찮은 손길에 작게 터진 웃음을 감추지 않은 콜린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었다.

큼지막한 알사탕 포장을 벗겨 입에 넣은 소년은, 혀로 몇 번 굴리더니 이제 살 것 같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며 질문에 답을 했다.

“현현한 육체가 작을수록 유지하기 쉬운 법이니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오늘도 더럽게 맛없는 놈들뿐이구나. 좀 맛있어 보이는 것들로 잘 찾아봐.”

뱉은 말은 끔찍하기 짝이 없으면서,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사탕 때문에 한쪽 볼이 볼록해진 아이를 흘긋 본 콜린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님께 맛있는 게 존재하긴 하나요? 입맛이 너무 까다로우신 건 아니고요?”

어찌 보면 참 밉살스러운 질문인데, 말하는 이가 워낙 곱고 선하게 생겨서인지 밉게 들리지가 않았다. 소년은 불퉁한 얼굴로 콜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흥. 맛있는 것도 분명 있다.”

“그럼 맛있는 걸 찾으시면 될 것을, 굳이…….”

“맛있는 건 네가 못 먹게 하지 않느냐!”

버럭! 호통쳤지만, 아이의 목소리인지라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물론 그가 콜린을 겁줄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퍽 귀여운 모습에 콜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귀여운 척하지 마시죠. 하여간에,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은 해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누가 귀여운 척을 했다는 거냐. 불경한 놈. 그리고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다. 대체 무슨 잣대로 죄가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거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예예. 벌써 백 번은 들은 것 같네요.”

“불경한 녀석아! 아직 서른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세고 계셨습니까?”

소년이 눈을 뾰족하게 뜨며 노려봤지만, 콜린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마치 조카를 놀리는 삼촌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간 저 웃는 낯을 바라보던 소년은 말을 말자며 테이블에서 폴짝 뛰어내려 지하실 문을 열고 나갔다.

소년을 따라 방을 나선 콜린은 복도 양 옆으로 수많은 방에 갇힌 이들을 흘긋 거렸다. 철창으로 만들어진 문 안으로 보이는 이들은 지저분하고 야윈 상태였으며, 모두 콜린과 소년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은 조금 전 방에서 들린 소란이 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이번에 팔려 나가는 게 자신이 아니길 바라며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지하 복도 끝에 도달한 소년은 계단을 올라가려다 콜린에게 로브 뒷자락을 잡혔다.

“뭐냐.”

“잊으신 거 없습니까?”

콜린이 복도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오냐오냐했더니 점점 건방 떠는구나.”

다소 짜증스레 대꾸한 소년은 콜린이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혀를 차며 복도를 향해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각 방 문을 굳게 잠근 자물쇠가 펑 펑- 펑- 퍼엉- 터져 나갔다. 그럼에도 놀라는 소리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콜린과 소년이 잠시간 기다렸지만, 철창을 열고 나오는 이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소년이 손가락을 허공에 가볍게 휙 긋자 모든 철창이 일제히 벌컥 열렸다.

철창이 제대로 열린 것을 확인한 콜린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맑은 얼굴을 올려다보던 소년이 퉁명스레 물었다.

“만족하냐?”

삐뚜름한 물음이었음에도, 콜린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가 허투는 아닌지, 정말 기뻐 보이는 얼굴로 배시시 웃는 콜린을 지켜보던 소년은,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며 몸을 돌렸다.

***

‘역시 남주. 반짝반짝하네.’

향긋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가 있는 카르젠의 저택 응접실.

기별 없이 찾아온 왕세자와 모두 함께 저녁 식사 후, 티타임을 갖게 된 이비는 차를 마시며 체스터를 은근히 훔쳐보는 중이었다. 체스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은은한 빛을 머금은 백금발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자꾸 눈길이 갔다.

‘체스터는 게르만족 같다고 해야 하나…….’

이비의 기준으로 카르젠이 단정하고 잔잔하면서 부드럽고 성숙한 미를 가졌다면, 체스터는 나른하면서 섹시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카르젠은 찻잔에 거의 코를 박고 체스터를 흘긋거리는 이비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이비. 편한 자리니까 무리해서 자리 지킬 필요 없어. 피곤하면 언제든 편히 일어나도 돼. 알았지?”

찻잔을 내려 두고 끄덕인 이비가 팔을 뻗어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카르젠은 티 푸드가 담긴 3단 트레이를 이비 쪽으로 가까이 밀어 준 후 체스터와 나누던 대화를 이었다.

“그럼 리엔은 내일 오는 건가?”

“응. 반 목욕 시키고 데려올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이비는 마카롱에 집중하며 둘의 대화에도 귀를 기울였다. 원래라면 리엔이 이비의 말을 더 일찍 가져왔어야 했는데, 폭우로 인한 수해 지역 피해 복구 등이 맞물려 이제야 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오간 터였다.

‘드디어 리엔을 만나는구나!’

이비는 <숲의 마법사>의 주인공 리엔을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최애가 크리시, 차애가 카르젠이라면 리엔은 그런 애정도에 관계 없이 늘 지켜보고 응원하게 되는 그런 캐릭터였다.

김현서를 포함한 독자들은 리엔의 성장을 몇 년이나 지켜봤다. 독자들은 리엔이 동료를 잃었을 때 함께 울었고, 리엔이 분노할 때 함께 키보드를 두드렸으며, 리엔이 감춰진 진실을 마주했을 때, 입을 쩌억 벌리고 함께 경악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엔이 활짝 웃었을 때, 독자들도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제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던 이를 만나게 된다니…… 마치 함께 온갖 역경을 이겨 낸 동료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거지만. 리엔하고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리엔한테 잘 보여야지. 첫인상이 중요해.’

리엔과 만남을 기대하며 분홍색 마카롱을 하나 더 집자, 이비를 쭉 지켜보던 체스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렌델이 최근에 연구한 게 있는데, 일정량 이상의 당분을 매일 꾸준히 섭취하면 나중에 췌장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더군.”

“!?”

그 말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아리스가 거들었다.

“아, 나도 그 이야긴 들었어. 췌장이 안 좋아지면 다른 장기도 망가진다지? 뭐 그런 이야기 들었던 것 같아. 어딘가에서.”

‘아, 아리스! 그거 여기서 들은 거 아니잖아요!’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자,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카르젠의 시선이 이비가 쥐고 있는 분홍색 마카롱에 닿았다. 이비는 저가 이 티타임에서 먹은 마카롱의 개수를 세 보았다.

‘7개…… 맞나?’

기억하는 것만 7개니, 아마 더 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카르젠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기미를 눈치챈 이비는 재빨리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그 민첩한 움직임을 본 아리스와 체스터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체스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실실 쪼개며 말했다.

“카르. 나도 여기서 며칠만 쉬다 가면 안 될까?”

“귀족원부터 설득 해. 그리고 넌 지금 여기서 차 마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됐어. 그치들 나 없어도 알아서 싸우다 지치면 돌아갈 거야.”

이후에도 그럭저럭 이비가 들어도 될 법한 이야기가 오갔다.

세 사람의 대화는 꽤 오래 이어졌는데, 그동안 이비는 카르젠의 눈치를 보면서도 마카롱 두 개를 더 먹었고, 계속 단것만 먹다 보니 혀가 아려 고소한 스콘도 먹었다. 그러다 텁텁함에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촉촉한 과일 잼을 잔뜩 올린 쿠키도 먹었다.

양껏 먹고 디저트 배가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이비는 차를 마저 마셨다. 아리스는 이비가 만족스럽게 먹은 것을 파악하곤 카르젠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저 눈짓의 뜻을 눈치챈 카르젠이 이비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이비. 오늘은 자기 전에 목욕하고 마사지하지 않을래?”

갑자기 목욕과 마사지를 권하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이비는 의심 대신 카르젠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반응에 카르젠이 바로 덧붙였다.

“아, 난 괜찮아. 그런데 크리시는 아무래도 나보다 근력이 많이 부족하니까. 혹시 모르니, 전이가 끝날 때까진 매일 자기 전에 목욕하고 마사지로 몸을 풀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마사지…….’

마사지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제 몸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카르젠이나 크리시가 힘들어질까 봐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비는 소파에 내려 두었던 수첩을 챙긴 후, 체스터와 아리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리스는 푹 쉬고 내일 보자며 인사해 주었고, 체스터는 이비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중에 또 만나자고 했다.

먼저 응접실 문으로 향한 카르젠은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할리스에게 이비의 목욕 시중과 마사지를 부탁했다. 할리스는 흔쾌히 끄덕였고, 카르젠은 목욕 후에 먼저 자도 괜찮다고 말하며, 조금 있다 침실에서 보자는 인사를 남겼다.

이비를 보낸 카르젠은 소파로 돌아와 앉으며 아리스의 말을 기다렸다.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아리스는 체스터와 카르젠이 제 말만 기다리는 것을 알고 찻잔을 내려 두었다.

“먼저, 체스.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

“응. 뭔데?”

“모르갈드 수정 광산과 튜르카 영지 근처 무인도를 조사해 줄 마법사가 필요해. 광산 핵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드워프 쪽에 연락 좀 넣어 줘.”

마법사는 아리스도 충분히 고용할 수 있지만, 굳이 체스터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기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번 알아들은 체스터가 생긋 웃으며 알았다고 끄덕였다. 세부 사항은 나중에 알려 주겠다고 덧붙인 아리스가 이번엔 카르젠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카르. 내가 안전해질 때까지. 그러니까, 그 마법사 자식이 잡힐 때까진 이비도 저택에서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니 당분간은 외출도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보통 이쯤 되면 왜 그러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물을 법도 하지만, 둘은 전적으로 아리스를 신뢰하며 토 달지 않았다. 아리스의 말을 들은 카르젠은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 저택에 들여도 될 정도로 신뢰할 수 있고, 지하실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수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부터 찾아봐야겠군…… 해양 생물학자도 찾아봐야겠어.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 같으니…….’

카르젠의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이러다 이 저택 지하에 아쿠아리움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픽 웃었다.

‘아쿠아리움은 무슨.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어?’

***

깊은 밤.

변신 마법이 풀리고, 마법 후유증으로 앓아누운 크리시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식은땀을 줄줄 흘려 대고 있었다. 나이젤은 수건으로 크리시의 젖은 몸을 닦아 주며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후우…… 괜찮습니다. 덕분에 남작님께서 무고한 걸 확인했잖습니까. 헛된, 쿨럭! 헛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잔뜩 쉰 목소리만 들어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젤은 침통한 얼굴로 크리시를 향해 말했다.

“네 생각엔 남작님을 현혹한 것이 무엇인 것 같더냐? 내 생각엔 아주 오랜 세월을 버틴 흑마법사가 아닐까 싶더구나.”

“저도, 쿨럭.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작님은 팔찌에 대한 것도 모르는 것 같더군요.”

나이젤은 저녁 식사 내내 크게 슬퍼하는 페일리 남작을 정신적으로 보듬어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남작이 겨우 진정했을 때,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 남작이 손목에 차고 있던 새카만 원석 팔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었다.

남작은 그 팔찌가 아들 콜린이 사 준 흑요석 팔찌라고 했었다. 미약한 마법 주문이 걸려 있어 착용만 해도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손발 저림이나 두통도 완화되고, 잠도 잘 온다는 팔찌였다.

설명만 들으면 어디 관광지에서 속아서 산 것 같은 팔찌였지만, 페일리 남작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었다.

‘저도 의사니 잘 압니다. 딱 봐도 상술이지요. 하지만 이제 콜린이 제 아비 건강을 염려하기 시작하니, 안 찰 수가 없더군요. 원래 이런 걸 사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쓰게 웃던 남작을 떠올린 나이젤이 크리시의 목덜미를 닦아 주며 말했다.

“뭔진 몰라도 범상치 않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더구나. 겉보기엔 흑요석처럼 보여도, 강력한 봉인이 깃든 마석 같았다.”

신력을 몸에 담고 있는 이들은 마력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이젤 정도로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대신관 정도가 되면, 자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크리시는 침통한 얼굴의 나이젤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중요한 건, 세 가지군요. 어떤 간악한 흑마법사가 남작님을 현혹했는지.”

“…….”

“저 팔찌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하는 건지.”

“…….”

“그리고 콜린이 저 팔찌를 어디서 구했는지. 제 생각이지만, 쿨럭! 남작님을 현혹한 마법사가 상인으로 위장해 콜린에게 판매했을 수도 있습니다. 콜린은 난민 아이들이 파는 퍽퍽한 빵이나 조잡한 화관 따위도 사 주곤 했으니, 난민인 척 접근해서 동정심을 유발해 판매했을 확률이 클 겁니다.”

“…….”

“콜린과 대화해서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쿨럭. 그 지역부터 조사해 보는 게 좋을, 쿨럭! 것 쿨럭! 젠장!”

크리시는 콜린이 마치 속아서 팔찌를 구매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나이젤은 정황상 콜린이 삿된 흑마법사와 연관이 됐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크리시는 다 듣고 있을 테니, 육성으로 말을 전하는 대신 체스터 왕세자가 남몰래 저를 찾아와 변신 포션을 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페일리 남작과 콜린이 수도까지 올라오는 동안. 두 사람이 거쳐 간 영지에 실종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실종된 이들 대부분이 악질 범죄자들이라, 조직끼리 세력 다툼을 벌였거나 다른 영지로 이동했을 수도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만…… 유사는 남작의 손목에서 동대륙의 악귀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악질 범죄자들이 연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나이젤이 침음하자, 크리시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대신관님. 콜린은 벌레도 못 죽이는 녀석입니다. 방에 벌레라도 들어오면 일라나드가 잡아서 버려 줘야 했을 정도로 유약한 녀석이라고요. 시기상 난민 이동으로 혼란한 틈에 범죄 조직이 섞여 이동했다고 보는 게 더 일리 있습니다.”

“…….”

“그리고 체스의 말이나 유사의 반응을 보면, 우리가 찾아야 할 존재는 리치화한 네크로멘서일 수도 있겠군요. 쿨럭! 과거 그런 존재를 마주한 적이, 쿨럭! 있습니다. 하아, 후우…….”

나이젤은 콜린의 범죄 연루 가능성을 두고 크리시와 논쟁하기보단, 일단 끄덕여 주었다. 이런 상태의 크리시를 설득하기보단 일단 쉬게 하고 나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나을 터였다.

‘문제는 남작님이군. 하루빨리 현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관건이겠어. 게다가 일라나드의 환영이 여우 요괴에 대한 언급도 했다고 했으니…….’

그 말인즉, 찾아야 하는 대상이 현혹술뿐만 아니라 상대의 기억을 투영하는 기술까지 다룰 수 있는 고등 레벨 흑마법사라는 것을 뜻했기에, 나이젤의 안면 주름이 깊어졌다.

‘마법사 길드와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군…….’

“쿨럭. 좋은. 생각, 쿨럭쿨럭. 하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단, 길드장과 미팅 때 저와 체스터도 동행시켜 주십…… 쿨럭!”

나이젤은 크리시가 어떻게든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곤 끄덕이며 땀을 닦아 주었다.

“일단 푹 쉬고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잠시, 더 드릴 말씀이…….”

“알았으니, 일단 자라. 자.”

그렇게 말한 나이젤이 손을 뻗어 크리시의 이마를 짚었다. 크리시는 나이젤이 뭘 하려는지 알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려 했지만, 그는 가차 없이 제 신력으로 크리시를 재웠다.

허공을 헤매다 힘없이 툭 떨어진 손을 잘 갈무리해 준 나이젤은 새 수건으로 크리시의 땀을 닦아 주며 곁을 지켰다. 고민 많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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